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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서른 아홉 번째 책 : 체호프 단편선

by 마파람94 2025. 8. 9.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체호프의 단편집을 읽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궁금했거든요. 이런 대 작가들은 시간 나면 어떤 책을 읽을까 하고선요. 그래서 체호프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 책을 구입할 기회가 생겨서 빠지지 않고 목록에 두었던 체호프의 책을 구입했습니다.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는 스토리 텔링과 그에 상응하는 상황표현이 인상 적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장면들 묘사하는 글들이 너무나 기억에 남습니다.

밑줄입니다.




황홀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제 내가 그녀의 풍만한 육체를 꼭 껴안고 황금빛 눈썹에 입 맞추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학대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녀가 나를 별로 애타게 만들지도 않고 그처럼 쉽게 무너진 것이 안타까웠다.

그때 뜻밖에도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오솔길에 중키의 남자 모습이 보였고, 나는 곧 그가 '40명의 순교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깊은 한숨을 쉬더니 성호를 세 번 긋고 거기에 누웠다. 잠시 후에 그는 일어나서 다른 쪽으로 몸을 눕혔다. 모기들과 밤의 습기가 잠을 방해한 것이다.

"아, 인생이여!"

그는 말했다.

“불행하고 고달픈 인생이여!"

그의 가늘고 굽은 몸통을 보며 그리고 거칠게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 들은 또 하나의 불행하고 고달픈 인생이 생각났다. 그러자 자신의 행운이 끔찍하고 무서워졌다. 나는 언덕을 내려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삶이 무섭다고 말했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삶이 나를 짓 누르기 전에 네가 먼저 삶을 부숴 버려. 삶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란 말이야.'

테라스에는 마리야 세르게예브나가 서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고 탐욕스럽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썹에, 볼에, 목에……………

공포 31

내 방에서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벌써 오래전부터, 일 년도 넘게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나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며 울었다. 그리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녀를 창가로 데려가서 달빛에 그녀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면 그녀는 마치 아름다운 꿈처럼 보였고, 그때마 다 나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를 다급하게 힘껏 껴안곤 했다. 벌써 오랫동안 나는 그런 황홀한 느낌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음속 멀고 깊은 심연 속에서 나는 그 어떤 거북한 느낌과 함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 속에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우정과 마찬가지로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눈물과 맹세를 담고 있는 심각한 사랑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심각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눈물도, 맹세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이 달빛 어린 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은 유성처럼 타올랐다가 그대로 팍 꺼져 버렸으면.

3시 정각에 그녀는 내 방을 나섰고 나는 문가에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갑자기 드미트리 페트로비치가 나타났다. 그와 마주치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며 길을 내주었는데, 그러는 그녀의 온몸은 그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이상한 미소를 짓더니 기침을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 깜박 잊고 당신 방에 모자를 놔두고 가서…….”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32

“공기가 선선해지네요."

올가 이바노브나는 그렇게 말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랴보프스키는 자신의 망토로 그녀를 감싸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권력 아래 있는 느낌입니다. 노예처럼. 오늘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고혹적입니까?"

그는 꼼짝도 않고 줄곧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길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는 차마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나는 당신을 미칠 듯이 사랑합니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

"한마디만 해 줘요, 그러면 난 목숨도 예술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심한 흥분 때문에 말을 더듬었다.

“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올가 이바노브나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건 지나치군요. 드이모프는 어쩌고요?"

“드이모프요? 드이모프가 어쨌는데요? 드이모프가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볼가강이 있고 달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나의 사랑, 나의 환희가 있지요. 하지만 드이모프 같은 건 없어요………………. 아, 난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는 내게 소용이 없어요. 한순간만, 나에게 한순간만을 허락해 주세요."

올가 이바노브나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 생각을 하려 했지만 결혼과 함께 그리고 드이모프와 함께,

베짱이 51

“저, 말이죠.”

올가 이바노브나는 행복에 겨워 울고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포도주 좀 가져오세요.”

화가는 흥분으로 창백해져서 의자에 앉아 사모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감더니 피로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지쳤어."

그리고 뱃전에 머리를 기댔다.

5

9월 2일의 날씨는 따뜻하고 고요했지만 음산했다. 이른 아침 볼가강 위로 옅은 구름이 떠다니더니 9시가 지나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갤 가망은 전혀 없었다. 차를 마시면서 라보프스키는 올가 이바노브나에게 그림이야말로 가장 부질없고 따분한 예술이며 자신은 화가도 아니다, 그저 한 무리의 바보들이나 그에게 재능이 있는 줄 착각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뜬금없이 나이프를 움켜잡더니 그것으로 자신이 가장 잘 그린 습작품을 마구 그어 버렸다. 차를 마시고 나서 그는 창가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볼가강을 바라보았다. 볼가강은 이미 광채를 잃어 희끄무레하고 차가워 보였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울하고 나른한...

베짱이 53

예전처럼 그녀는 매일 밤늦게 귀가했지만, 드이모프는 작년처럼 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재에 앉아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3시경에 잠자리에 들어서는 8시에 일어났다.

어느 날 저녁 그녀가 극장에 갈 채비를 하면서 경대 앞에 앉아 있을 때, 연미복에 하얀 넥타이를 맨 드이모프가 침실로 들어왔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행복한 얼굴로 아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됐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앉아서 무릎을 쓰다듬었다.

"통과됐어요?"

올가 이바노브나가 물었다.

"와!"

그는 짧게 웃고 거울에 비친 아내의 얼굴을 보려고 목을 길게 뺐다. 아내는 머리 모양을 만지느라 그에게서 줄곧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와!"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 알아? 아무래도 나에게 비상근이지만 일반 병리학 강의를 맡길 것 같아. 그런 냄새가 나거든.”

드이모프의 행복하게 빛나는 얼굴로 보아, 만약 올가 이바노브나가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더라면 그는 모든 일을 용서하고 앞으로도 영영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비상근 강사가 뭔지 일반 병리학이 뭔지도 몰랐다. 다만 극장에 지각하는 것이 걱정되었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분 정도 앉아 있다가 죄지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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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희고 짙어진 안개는 난가리들과 덤불 위로 여기저기 덮이거나 혹은 실타래처럼 길 위를 배회하면서 경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땅바닥에 바짝 달라붙기도 했다. 연기 너머로 숲에 이르는 길과 그 양옆으로 파인 검은 도랑이 보였고 거기서 자라는 낮은 관목들은 안개 기둥의 방랑을 방해하고 있었다. 쪽문으로부터 반 베르스타쯤 떨어져 있는 쿠즈네초프네 숲이 검은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왜 그녀가 나와 함께 가는 걸까? 이렇게 되면 다시 그녀를 바래다줘야 하잖아!'

아그뇨프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베라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런 멋진 날씨에 떠나고 싶지 않군요! 낭만적인 달과 고요함, 모든 것이 갖추어진 훌륭한 저녁입니다. 아세요, 베라 가브릴로브나? 저는 이 세상에서 이십구 년을 살아왔지만 로맨스 한 번 없었답니다. 평생 낭만적인 사건 한 번 겪지 못해서 은밀한 만남이나 오솔길에서의 한숨이니 입맞춤이니 하는 건 귀동냥으로나 알 뿐이에요. 한심하지요! 도시에서 자기 방에 앉아 있을 때는 그런 결함을 깨닫지 못하지만 이런 신선한 공기 속에서는 절실하게 느껴지는군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사세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럴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단지 나에게 맞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지도………………. 저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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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끼어들고 스스로 앞에 했던 말과 모순되는 주장을 일삼으며 닥치는 대로 주제를 바꿔가면서 두세 시간씩 계속되는 그런 논쟁 끝에 사람들은 웃으며 말하곤 한다.

“왜 이런 논쟁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군그래! 처음에는 안부를 묻다가 나중엔 명복을 빌게 된 꼴이잖아!"

“저랑 당신이랑 의사 선생이랑 말을 타고 훼스토보에 갔던 일 기억나요?"

이반 알렉세이치는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때 유로지브이'와 마주치기도 했죠. 제가 그에게 5 코페이카를 주었는데, 그는 세 번 성호를 긋더니 호밀밭에 동전을 던져 버렸지요. 맙소사, 제가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가져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모아서 꼭꼭 뭉칠 수 있다면 금덩어리 하나는 족히 만들어질 텐데! 이해할 수 없어요. 수도에서 북적거리며 사는 똑똑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왜 이곳으로 오지 않는지………………. 넵스키 거리나 커다랗고 습기 찬 집들 속에 아무려면 여기보다 더 많은 공간과 미덕이 있을까? 온통 화가니 학자니 기자니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내 하숙방은 항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여요."

숲을 스무 걸음 정도 앞에 두고 길에는 작고 좁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에 작달막한 기둥이 세워진 이 다리는 쿠즈네초프 가족과 손님들이 저녁 산책을 할 때면 작은 간이

1) 성스러운 바보, 즉 기행을 일삼는 수도사를 일컫는 말이다.

베로치카

아니, 이런!"

그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베라 가브릴로브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도대체? 보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면 기분 상하는 일이 있는 겁니까? 말씀하세요, 제가,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그가 베라를 달래주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 내자 눈물 사이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은 소박한 인간의 입에서 나온 평범하고 단순한 단어였지만 아그뇨프는 극도로 당황하여 베라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일어났다. 당혹감에 뒤이어 두려움이 닥쳤다.

이별과 과실주에서 비롯된 우수, 온정과 감상적인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롭고 거북한 소심증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갑자기 그는 마음이 바뀌어 베라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사랑을 고백하고 난 그녀는 여태껏 자신을 감싸고 있던 여성적인 고고함을 잃은 채, 키가 줄어들고 단순해지고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두려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런데 난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게 문제로군!'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힘든 말을 마침내 입 밖에 낸 그녀는 이미 가볍고 편안한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도 함께 일어나더니 이반 알렉세이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베로치카 105

아그뇨프는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베라는 그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오지 말아요. 혼자서 가겠어요.”

“아닙니다, 그래도…………… 혼자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 그 한마디 한마디가 아그뇨프 자신에게도 역겹고 진부하게 여겨졌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죄책감이 자라났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자책하면서 자신의 냉담함과 여성에 대한 서투름을 저주했다. 스스로를 부추길 양으로 그는 베로치카의 아름다운 몸매와 그녀의 땋아 내린 머리, 먼지 날리는 길 위에 남겨진 조그마한 발자국에 눈길을 주며 그녀의 눈물과 말들을 상기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부드러운 기분을 자아내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는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억지로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사랑을 해 보겠는가? 난 벌써 서른 살이 아닌가! 베라보다 나은 여자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 만날 거야……………… 오, 영감태기 같으니! 서른 살에 벌써 영감이 되어 버렸어!'

베라는 저 앞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점점 발걸음을 빨리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괴로움으로 인해 몸이 졸아들어서 마치 어깨 속으로 머리가 꺼져 들어간 다리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베로치카 109

자신의 괴이한 냉담함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그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것은 영리한 인간들이 종종 과시하는 그런 이성적인 냉담함도, 자아도취적인 바보의 냉담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영혼의 무기력, 아름다움을 깊이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며 또한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한 지저분한 싸움과 독신의 하숙방 생활, 그리고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리를 지나서 그는 끌려가듯 천천히 숲으로 걸어갔다. 짙은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는 곳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에만 잠겨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불같이 일었다.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린 것을 이반 알렉세예비치는 기억한다. 스스로를 충돌질하면서, 억지로 베라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면서, 그는 쿠즈네초프의 정원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원으로 가는 길에는 이미 안개가 걷혀 있었다. 달은 마치 세수를 한 듯 말끔해 보였고 동쪽 하늘만 안개 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그뇨프는 자신의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불 꺼진 창을, 헬리오트로프와 목서초의 짙은 향기를 기억한다. 그를 아는 카로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손 냄새를 맡았다. 그 개는 그가 두 번째로 이 집 근처에 온 것을 본 유일한 생명체였다. 그는 베라의 불 꺼진 창가에 잠시 서 있다가 손을 내젓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원을 떠났다.

한 시간 뒤에 그는 이미 읍내에 있었다. 그는 지치고 상심한 몸과 열이 오른 얼굴을 여인숙 현관에 기대고 문을 두드렸다. 읍내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가 잠이 덜 깬 소리로 짖어 댔고 그의 노크에 대답이라도 하듯 교회 쪽에서 누군가가 무쇠로 된 딱따기를 두드렸다.

“오밤중에 싸돌아다니기는………………."

여자 옷처럼 보이는 긴 잠옷을 입은 보수파 신자 주인은 현 관문을 열어주며 투덜거렸다.

“뭐 하러 싸돌아다녀, 그 시간에 기도나 하지.”

자기 방으로 들어간 이반 알렉세이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서 오래도록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체머리를 흔들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1887)

베로치카 111

그녀가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나의 슬픔은 더해 갔다. 나도 그녀도, 그리고 그녀가 왕겨의 구름을 지나 짐마차 뒤로 뛰어갈 때마다 슬픈 눈으로 뒷모습을 좇는 그 우크라이나인도 불쌍했다. 그것은 소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소녀가 지금 내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영영 내 것이 될 수 없는 타인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녀의 흔치 않은 아름다움이 지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우연하고 불필요하고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슬픔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특별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세 시간의 기다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강에 가서 말을 씻기고 돌아온 카르포가 마차에 말을 매기 시작했을 때, 아마도 나는 마샤의 모습을 놓친 것 같았다. 흠뻑 젖은 말은 기분이 좋아서 콧김을 내뿜으며 발굽으로 마차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카르포가 말에게 “물러서!” 하고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잠을 깼다. 마샤는 우리에게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짐마차에 올라탄 후 마당을 나섰다. 길을 가는 동 안 우리는 서로에게 화가 난 것처럼 말이 없었다.

두세 시간쯤 지나서 저 멀리 로스토프와 나히체반이 보이자 그동안 줄곧 말이 없던 카르포가 주변을 휘이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아르메니아 아가씨 정말 대단했어!"

미녀 121

꾸물꾸물 자신의 객차로 들어간 모든 승객들이 괜히 불쌍해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의 창문가를 지나치다가, 그 너머에서 전신장비 앞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전신수를 보았다. 장교는 위로 뻗친 곱슬머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누런 얼굴의 전신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전신수가 아까 본 미녀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어요. 이런 선녀 같은 여자와 한 지붕 밑에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지요. 친구, 이런 시시하고, 얌전하고, 똘똘하고, 꾸부정한 곱슬머리로 태어나서, 우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이 멍청한 미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얼마나 불행하고 우스운 일일까요! 아니, 더 나쁠 수도 있지. 상상해 봐요. 이 전신수가 아가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갖고 있다면, 또한 그 아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꾸부정하고 얌전한 곱슬머리라면...... 끔찍한 노릇 이죠!"

우리 객차 근처에서 한 차장이 광장 철책에 몸을 기대고 미녀가 서 있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깡마르고 푸석푸석 한, 밤새 잠도 못 자고 열차의 진동에 시달린 데다 소화 불량 인 듯한 얼굴은 감동과 함께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 아가씨에게서 자신의 젊음과 행복을, 순수한 본성을,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본 듯했다. 그는 이 아가씨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치 온몸으로 인정하고 느끼는 듯했다. 일찌감치 노쇠해진 데다 개기름이 흐르는 흉한 얼굴을 한 그에게 있어서 보통 사람의 행복이나 여행객의 행복 ...

미녀 125

육 년 반이 되었을 때, 수인은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를 열 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학문들에 너무도 탐욕스 럽게 몰입했기 때문에 은행가는 책을 대주기가 벅찰 정도였 다. 사 년 동안 그의 요구에 따라 주문한 책이 600여 권에 달했다. 그 몰입의 기간 동안 은행가는 자신의 수인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나의 간수님! 당신에게 이 문장들을 여섯 개의 언어로 쓰겠습니다. 이것을 전문가들에게 보여 주고 읽어 보라고 하세요. 만약에 그들이 틀린 곳을 한 군데도 찾아내지 못할 경우에는 간청하건대 사람을 시켜 정원에서 총을 한 발 쏘도록 해 주세요. 그 총소리는 나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나에게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천재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다양한 언어로 진리를 말했지만 그 말들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 내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음으로써 내 영혼이 누리는 천상의 행복을 당신이 알기나 할까요!

수인의 요구는 이루어졌다. 은행가는 정원에서 총을 두 번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십 년째 되는 해가 지났을 때, 변호사는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서 오직 복음서만을 읽고 있었다. 은행가는 이상하게 여겼다. 사 년 만에 600여 권의 심오한 서적을 섭렵한 사람이 두껍지도 않고 알기도 쉬운 책 한 권을 읽는데 일 년을 허비한 것이다. 복음서의 뒤를 이은 책은 종교사와 신학 서적들이었다.

유폐되고 나서 마지막 이 년 동안 수인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다. 자연 과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바이런과 셰익스피어를 요구했다.

내기로부터 화학, 의학 교과서, 장편 소설, 철학이나 신학 논문 따위를 동시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메모가 오기도 했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

2

노은행가는 이 모든 것을 회상하며 생각했다.

“내일 12시에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약속한 대로 나는 그에게 200만 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돈을 주면 모든 게 끝난다. 나는 여지없이 파산할 것이다.…………….”

십오 년 전만 해도 그에게는 계산이 안 될 만큼 많은 돈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묻기가 두려웠다. 자신의 돈과 빛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아슬아슬한 주식 놀음, 도박과 다름없는 투기에 대한 열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버릴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의 사업은 조금씩 기울었다. 그리하여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갑부는 이자율이 조금이라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이류 은행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망할 놈의 내기야!"

노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인간은 왜 죽지 않았을까? 이자는 아직 마흔 살밖에 안 됐어. 이자는 나의 마지막 재산을 가져가서 결혼도 하고 주식투자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겠지. 그런데 나는 거지처럼 선망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날마다 되풀이하는 말을 듣게 될 거야. ‘나는 당신에게 내 인생의 행복을 빚졌습니다. 그 러니 당신을 도와주게 해 주세요!' 아니야, 이건 너무해! 부도와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인간이 죽어 주는 것뿐이야!"

시계종이 3시를 알렸다. 은행가는 귀를 기울였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잠들었고 창문 너머에서 나무들이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는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던 문의 열쇠를 내화(耐火) 금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그는 외 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정원은 어둡고 추웠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섭고 습기 찬 바람이 괴성과 함께 정원을 온통 휩쓸고 다니면서 나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은행가는 눈을 부릅떴지만 땅이고 하얀 석상이고 바깥채고 나무들이고 간에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깥 채가 있는 지점까지 다가온 그는 경비원을 큰 소리로 두 번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경비원은 악천후를 피해 부엌이나 온 실에서 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게 만약 나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만한 용기가 충분히 있다면………………."

노인은 생각했다.

1) 속의 물건이 불에 타지 않도록 내화 장치를 한 금고.

내기

141-143

내일 12시에 나는 자유를 얻고 사람들과 교류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방을 떠나 태양을 보기에 앞서 나는 그대들에게 몇 마디 해 줄 필요를 느낀다. 순수한 양심에 따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코,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그대들에게 단언하는 바이다.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의 삶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내가 땅도 사람들도 못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책 속에서 향기로운 술을 마셨으며, 노래도 불렀고, 사슴이며 멧돼지를 좇아 숲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으며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다………………. 천재 시인들의 마법으로 창조된, 구름처럼 하늘거리는 미녀들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서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속삭여 주었고 나의 머릿속은 그 이야기들로 흠뻑 취하곤 했다.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엘브루스와 몽블랑의 정상에 올랐으며 거기서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이면 그 태양이 하늘과 대양과 산맥의 정상을 발그레한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내 머리 위로 구름을 가르며 번뜩이는 번개를 보았다. 나는 초록빛 숲과 초원을, 강과 호수와 도시들을 보 았으며, 세이렌의 노래와 목동들의 피리 소리를 들었고, 나에게로 날아온 아름다운 악마들과 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날개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바닥 모를 심연에 몸을 던지기도 했으며, 기적을 창조하고, 살인을 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고, 완전한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은 나에게 지혜를 가져다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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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그대들의 모든 책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마루 밑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자손과 역사, 천재들의 불멸의 업적들은 꽁꽁 얼어붙어 버리거나 아니면 지구와 함께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대들은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추악한 것을 미(美)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에 사과나무나 오렌지 나무에 무슨 일이 생겨서 열매 대신에 개구리나 도마뱀이 열리게 된다면, 혹은 장미꽃이 말의 땀 냄새를 풍기게 된다면, 그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을 땅으로 바꾸어 버린 그대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200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이것을 다 읽은 은행가는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기인의 머리에 입 맞춘 뒤에 눈물을 떨구며 바깥채를 나섰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자괴감을, 심지어 주식 투기에서 거액의 돈을 날렸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극심한 자기혐오를 그는 느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지

내기 147

그는 조금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침대 옆에 숙모가 앉아 있었다.

“아, 숙모!”

그는 반색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발진 티푸스야."

“그랬구나. 어쨌든 지금은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카차는 어디에 있죠?"

“집에 없어. 아마 시험을 보고 오다가 어디 들렀나 보다."

노파는 그렇게 말하더니 뜨개질하고 있던 양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입술을 떨다가 갑자기 얼굴을 돌리며 흐느끼 기 시작했다. 상심한 나머지 의사의 주의를 잊어버린 그녀는 그만 말하고 말았다.

"오, 카차, 카차! 우리 천사가 갔어! 갔어!"

그녀는 양말을 놓쳐서 떨어뜨리고 그 위에 몸을 숙였다. 그 러는 통에 머리에 썼던 실내모가 벗겨져 내렸다. 클리모프는 그녀의 백발을 보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카차가 너무나 걱정되어 물었다.

“그 아이가 어디 있어요? 숙모!"

이미 클리모프를 생각할 경황을 잃은 노파는 오로지 자신의 슬픔에 빠져서 말했다.

“너에게서 티푸스가 전염됐어. 그래서……………… 그래서 죽었단다.

장례를 치른 지 사흘째야."

티푸스 159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나 지나서 겨우 잠옷 차림으로 파벨의 부축을 받으며 창가에 다가간 그는 음울한 봄날의 하늘을 바라보며 근 처에서 낡은 전차 레일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심 장이 고통으로 찌그러지는 듯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창틀에 이마를 기댔다.

"난 왜 이리 불행한가!"

그는 중얼거렸다.

"하느님, 나는 왜 이리도 불행합니까!"

그리하여 그의 기쁨은 일상의 권태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자리를 비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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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요, 예하? 장티푸스에 걸리셨어요!"

내장 출혈 때문에 예하는 몇 시간 만에 부쩍 홀쭉해지고 창백해졌다. 살이 쪽 빠진 얼굴에는 잔뜩 주름이 지고 눈은 커다랗게 튀어나와서 마치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게다가 키까지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여위고 허약하고 초라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모든 것은 어딘가로 멀리멀리 사라져 버려 더 이상 되풀이되지도, 계속되지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좋구나!"

그는 생각했다.

"정말 좋다!"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그의 주름진 얼굴과 커다란 눈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침대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과 어깨와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도 또한 그 가 다른 누구보다도 여위고 허약하고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그가 주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에게 자기가 나은 소중한 아기에게 하듯 입을 맞추었다.

“파블루샤, 귀여운 것아."

그녀는 정신없이 말했다.

“내 아가야!…………… 내 아들아!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파블루샤, 대답 좀 해 봐라!”

옆에는 카차가 창백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이는 삼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할머니가 저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왜 저런 가슴 아픈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는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 간 자신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즐겁게 들판을 뛰어가고 있고 머리 위로는 햇빛 가득한 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눈에 그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새처럼 자유로우며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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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1902)는 체호프가 죽기 2년 전에 쓰인 걸작이다. 이미 몇 차례의 심한 객혈을 겪으면서 극도로 쇠약해진 체호프는 이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명확히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지난 삶과 닥쳐올 죽음을 응시하는 주교의 모습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존경받던 주교였지만 죽은 뒤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순식간에 잊혀 버린다. 그리고 주교의 삶과 죽음 따위는 당초부터 이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듯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은 예전처럼 계속된다. 이는 주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주교는 주변 사람들, 심지어는 친어머니조차도 낯설게 느끼며 고위 성직자로서의 자신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죽어 간다. 주교는 시소이 신부에 대해, 그가 과연 신을 믿는지, 왜 수도승이 됐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주교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식을 잃기 직전에 주 교는 생각한다. '정말 좋다!' 그리고 새처럼 자유로운 상태를 느낀다. 그 순간에 주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주교의 저 세계와 남은 사람들의 이 세계가 서로 등을 돌리고 갈 라져 나가는 신비스런 광경을 담담히 보여 줄 뿐이다. 저 세계에서의 이야기는 물론 작가인 체호프의 일이 아니다.

작품 해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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