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5독서정리

마흔한 번째 책 : 기울어진 평등 - 마이클 샌들

by 마파람94 2025. 8. 20.

이번책은 마이클 샌들 교수와 토마 피케티의 대담형식으로 진행된 내용을 글로 엮어 출간한 책 입니다.

샌들 교수는 진정한 정의와 평등은 개인의 성취만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 여건과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전부라 여기고 실패한 사람은 무능하다고 낙인찍는 구조를 문제 삼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와 같은 논의가 있으면 어떨까 합니다. 다른 책에서 제시한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도 이번 책을 읽는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부의 집중, 능력주의 이를 뛰어넘을 아름답고 효율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형태의 참여, 모든 형태의 존엄성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실제로 장기적인 추동력이 되지요. 경제적 차원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관한 당신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결론을 내자면, 오늘날 불평등의 높은 수준에 관해 당신이 언급한 수치는 맞습니다만, 100년 전에 불평등은 이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200년 전에는 그보다 더 심했고요. 그러니까 길게 보면 진보가 이뤄진 것입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진보는 언제나 엄청난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운동을 필요로 했습니다. 진보는 계속 이런 식으로 이뤄질 겁니다. 좋은 소식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도 이긴 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싸움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마 우리가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지요.

샌델

당신은 방금 불평등이 왜 문제인지 세 가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첫 번째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모두의 접근권에 관한 것입니다.

12

우리의 이상에는 정치적 운동의 공식적인 조직과 뉴스에 대한 공식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모든 비공식적인 관계도 포함됩니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며 함께 숙의해 가는 사회적 관계이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철학 적 논거는 사실상 역사적 논거인데요,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불평등을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 재화와 정치적 참여에 대한 접근권뿐 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의 소득과 부의 불평등까지도요. 오늘날 상황을 볼까요? 최근 몇십 년 동안 불평등이 커졌다고 해도, 유럽에서 상위 10퍼센트 혹은 상위 1퍼센트와 하위 50퍼센트 혹은 하위 10퍼센트 간 소득 격차는 100년 전보다 크게 줄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만큼은 아니어도 100년 전과 비교하면 불평등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1. 왜 불평등을 걱정하는가?

15

우리가 공적 규제 기관에 적합한 사람들을 뽑으려고 할 때, 이 사람들의 급여가 구글이나 다른 어떤 기업 사람들이 버는 것에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고 20배 더 주는 게 해법은 아니지요. 급여 차이를 대폭 줄여서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이 확실한 해법입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효과적이었던 건 이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회와 경제를 다루는 역사가입 니다. 저는 사회과학자로서 평등의 역사를 살펴봤는데요, 확실히 우리는 탈상품화와 재분배 중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둘은 함께 작동했고, 그랬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성공적이었기 때 문입니다.

30

누진 세제 면에서는 심지어 루스벨트보다도 더 나아간 정강이었지요. 이 정강은 또한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권한에 관한 매우 실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이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강력한 대표성을 갖도록 했습니다. 공립 대학과 공공 의료 체계를 통한 대단히 현실적인 탈상품화 전략도 포함했고요. 이런 것은 제가 볼 때 일종의 포퓰리스트식 분노를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당신이 왜 이런 것에 ‘포퓰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였는지 조금 헷갈립니다. 미국에 서 쓰는 이 용어의 역사는 이해합니다. 당신이 말했듯이 일찍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나온 포퓰리 스트들의 주장에는 진보적 논지와 이민 배척주의 논지가 거북하게 섞여 있었지요. 샌더스와 워런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혼란스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을 ‘포퓰리스트'라고 칭하는 건, 제가 생각하기에 더 좌파적인 이들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클린턴과 블레어 진영 사람들의 방식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60

5. 능력주의는 왜 위험한가?

피케티

저는 여전히 당신의 용어 선택이 조금 걱정됩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능력주의 문제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저는 당신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의 애독자니까요. 이 책은 최근 몇십 년간 발전한 능력주의라는 일종의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루고 있지요. 당신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 번째 기둥입니다. 세계화와 금융화, 능력주의가 바로 그 세 기둥이지요. 저는 당신이 능력주의에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5. 능력주의는 왜 위험한가?

63

세금을 한 푼도 안 내도 돼. 어쨌든 이건 당신 돈이니까." 글쎄요,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죠. 그건 당신들 돈이 아닙니다. 수백만 명의 집단적 노동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 돈은 공공 인프라스트럭처나 우리의 법체계 없이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 수 없어요. 그리고 그냥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추첨제에 관한 당신의 구체적인 제안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물론 이런 식의 다른 제안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건 통제권을 되찾아오는 하나의 사례 일 뿐입니다. 하버드대학교와 미국의 다른 최고 대학들의 입학에 이런 식의 규칙들을 민주적 숙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샌델네, 이 사안은 부분적으로 그런 것이고, 도덕적 판단과 태도, 인정의 문제로 돌아가서 봐야 할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능력주의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그 문제를 밝히기 전에 저는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으로 능력은 좋은 것이라 말하고 싶네요. 제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저는 자격이 충분한 의사가 해주길 바라거든요.

5. 능력주의는 왜 위험한가?

65

그것이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어떻게 일종의 포악暴惡이 될 수 있을까요? 자, 우리가 논의해 온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시 살펴볼까요? 이 시기에 승자와 패자의 괴리는 계속 깊어져서 정치에 독이 됐고, 우리를 갈라놓았지요. 이 괴리는 우리가 논의해 온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커지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이 괴리는 또한 불평등이 커지면서 그에 따라 성공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과도 관련 있습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이 그들 자신이 이룬 것이고, 그들의 능력을 가늠해 주는 척도며, 따라서 자신들은 시장이 주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뒤에 처진 이들과 힘겹게 애쓰는 이들은 그런 운명에 처할 만해서 그런 것이라고 믿게 됐고요. 성공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어떤 이상에서 비롯됩니다.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한 승자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 원칙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제 능력주의의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볼까요? 한 가지 명백한 문제는, 우리가 자신이 공언한 능력주의원칙에 맞게 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66

기회는 진정으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른이 되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계층의 상향 이동은 제한적입니다. 당신이 물어본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네, 이들 대학이 후한 재정 지원을 해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해 소득이 8만 5000달러에 못 미치는 가정의 학생들은 수업료나 기숙사비, 식비, 책값을 전혀 내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 스탠퍼드대학교의 경우는 연 소득 10만 달러 미만일 때 그렇고요. 그런데도 이들 대학에는 소득 하위 50퍼센트 가정 출신의 학생들을 다 합한 것보다 상위 1퍼센트 가정 출신의 학생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분명 우리는 완벽한 능력주의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실현했다고 가정해 보지요. 우리가 어떻게든 이 교육 체계에서 대학 입학과 관련해 참으로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해 보자고요. 경제 체제에 관해서도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보지요. 그러면 완벽한 능력주의를 실현했으니,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에 살게 될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완벽하게 실현되었을지라도 능력주 의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능력주의는 왜 위험한가?

67

능력주의는 공동선을 부식시키지요. 왜 그런가 하면,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들의 성공을 그들 자신이 이룬 것으로 보고, 자신의 성공을 너무 깊이 받아들이며, 성공에 이르는 길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준 행운과 요행을 잊어버리고, 당신이 묘사한 것처럼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해 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Michael Young

'능력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마이클 영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주의를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 위험은 정확히 이런 겁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뿐만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성공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키워 우리를 분열시킵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에게는 오만을, 뒤처진 이들에게는 수치심을 키워주지요.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들의 실패와 고투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아마도 그렇게 설득될 겁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최근 몇십 년 동안 어떻게 해서 이토록 양극화되었는지 밝혀줍니다. 불 평등은 깊어지고 노동자들은 임금 정체와 실직에 맞 닥뜨렸을 때,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주류 정치인들은 노동자들에게 기운을 돋우는 조언을 했습니다. “글로벌 경제에서 경쟁하면서 이기고 싶으면 대학에 가라. 당신이 얼마나 버느냐는 당신이 무엇을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68

6. 대입과 선거에 추첨제를 활용해야 할까?

샌델

추첨제에 대한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제가 제안하는 것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 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첨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버드대학교나 스탠퍼드대학교 같은 곳은 한 해 응시자가 약 6만 명에 달하는데, 받아들이는 인원 은 2000명도 채 안 되지요. 응시자 대다수는 학업을 잘하고, 동료 학생들의 배움에 기여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최고의 대학에서 혜택을 받으며 재능을 꽃피울 자격이 있는지 입학사 정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6. 대입과 선거에 추첨제를 활용해야 할까?

75

78
시대가 만들어낸 학력주의자 credentialist의 편견에 맞설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대다수 시민은 대학 학위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체 국민의 약 38퍼센트만 4년제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3분의 2 가량은 학위가 없지요. 영국에서는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 전체의 약 70퍼센트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몇 퍼센트나 의회에 입성할까요? 아주 아주 적은 수치, 약 5퍼센트 내지 1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 계급 의원들은 아주 적습니다. 이것이 진정 대의제일까요?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활발한 토론은 없지요. 미국 의회나 프랑스 하원, 혹은 다른 유럽 민주주의 국가 의회에 진출한 여성의 비율이 그토록 불균형적이라면 논쟁이 있었을 텐데요. 우리는 대의정부에 더 많은 여성이 들어가도록 하는 데 많은 진전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왜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토론도 없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입법 기구가 둘인 양원제 국가에서는 추첨제 발상이 지금의 상황을 돌파할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기구는 선거 관련 기부를 적절히 제한하면서 선출을 통해 구성하고, 다른 한 기구는 추첨으로 자리를 순환시키는 것이지요.

78

어떻게 장려할지를 놓고 좌파와 우파 사람들의 의견은 당연히 갈릴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 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경쟁적으로 기어오르도록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데 집중하면서 그 사다리의 단 사이가 갈수록 멀어지는 걸 간과하는 것과는 초점이 다르지요.

많은 노동자와 학위 비소지자들이 엘리트층이 자 신들을 업신여기고, 자신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이는 엘리트층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원천이지요.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유럽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는 우리가 논의하는 부분, 즉 주류 정당들이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주로 학력 수준을 높여서 개인의 상향 이동을 꾀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등 교육을 통한 개인의 상향 이동이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트럼프나 르펜 같은 인물들에게 극히 비판적인 사람들은 노동자와 학위 비소지자들이 고학력 엘리트들에 대해 느끼는 정당한 불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88

이는 정치적으로 늘 쉬운 일만은 아니지요. 최근 몇십 년 동안 어떻게 진보 정치의 주류 프로젝트가 노동자와 학위 비소지자들의 정당한 불만을 키웠는지를 따지기보다는, 트럼프 같은 인물들과 그들이 호소하는 인종주의,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를 비난하는 쪽이 더 쉬워진 탓도 있습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지요.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경제학자 이사벨 소힐 Isabel Sawhill이 몇 년 전 미국에서 연방정부가 대학 진학 지원에 쓰는 보조금과 대출, 세액 공제 금액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요, 그 금액이 한 해 1620억 달러나 됐습니다. 직업 교육과 기술 교육 지원에 쓴 돈은 연 11억 달러에 그쳤는데 말이지요. 10억 달러가 조금 넘는 돈과 1620억 달러를 한번 비교해 보시죠. 자, 바로 이 수치가 지금의 정책 입안자들이 가진 학력주의 credentialism와 능력주의 편견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분배적 정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보면, 이는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노동 계급이 하는 일에 대한 존중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6. 대입과 선거에 추첨제를 활용해야 할까?

89

그래서 학력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끝내 용인되 어서는 안 되는 편견입니다. 우리가 다른 형태의 편 견들을 떨쳐버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사람들이 학력주의를 생각 없이,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동의 존엄성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재생하는 데 중요한데요,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문제는 재분배로 해결할 수 있는 불공정만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학위 없이도 공동선에 값진 공헌을 하는 이들에 게 돌아가야 할 인정이 부족하고, 명예와 존중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6. 대입과 선거에 추첨제를 활용해야 할까?

91

대안은 우리가 공공의 자원을 늘리자는 구상을 받아들이는 건데요, 이 구상은 더 공평한 조세 체계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나옵니다. 소득과 부에 대해 매우 가파른 누진 세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이지만, 그 과업의 중대성을 깨닫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따져보고 싶군요. 우리가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고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사회에 더 널리 확산하고 싶다면, 임금 차이나 소득 격차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임금에 대해 완전한 1대 1 평등을 이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대 5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제가 본 비교역사적 증거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1 대 10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하위와 최상위 계층 간 격차가 1대 50, 1 대 100, 1 대 200이 라면 문제는 돈만이 아니지요. 이는 실제로 존엄성의 문제입니다. 그런 격차는,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7. 누진 세제와 공동체

95

또한 진보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유성 commonality과 공동체, 정체성의 도덕적 기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누진 세제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은 정치적으로도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조건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공유성을 배양할 수 있을 까요? 이는 순전히 추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토마, 당신이 옳게 지적한 대로 모든 부는 개인적 성취에 따른게 아니라 집단적 산물입니다. 이는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인식하고 믿으려면, 시민 사회 안에서 우리의 공유성을 상기시켜 줄 조건과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 여기 존엄성과 상호 인정을 위한 구상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제안이 있습니다. 최근 몇십 년 동안 확대된 불평등의 가장 심각한 부식 효과 중 하나는, 부유한 사람들과 대단치 않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점점 더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7. 누진 세제와 공동체

101

승자들을 옹호하는 상황으로 몰아넣게 될 위험 이 실제로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옹호하는 현실 이 굳어져 버리면 상황을 바꾸기란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까, 맞습니다. 국제주의는 재건되어야 합니다. 그 일은 자유 무역과 자유로운 자본 흐름을 위해 30~40년 전에 발전시킨 것과 같은 체제의 토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변화가 민주적인 운동을 통해 평화적인 방식으로 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변화는 또한 지구촌 남부의 엄청난 압력을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여기서 방 안의 큰 코끼리(잘 보이지만 다들 말하기를 꺼리는 문제_옮긴이 주)는 규제받지 않는 자유 무역이 부상한 것, 그리고 북부의 풍요가 지구의 거주 적합성을 극적으로 떨어트리면서 이뤄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피해는 먼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싸우는데 협력하라는 압력, 그리고 더 일반 적으로는 지구촌 북부가 정한 의제를 따르라는 압력을 받는 남부 국가들에 돌아가고 있지요. 하지만 남부의 많은 나라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보세요. 당신들은 단지 자신의 이익, 자신의 풍요만 생각하고, 당신들이 부유해지면서 우리에게 끼친 모든 피해에 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글로벌 경제·금융·재정 시스템과 환경 규제의 변화를 이루려는 이 모든 노력은, 지구촌 북부 사람들을 세계화나 국제주의와 화해시키는 동시에, 이를테면 어떤 형태의 공유된 프로젝트를 통해 남부와 북부를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극히 대립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겁니다.

114

이 대담 내내 우리는 평등의 세 가지 측면을 논의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것으로, 소득과 부의 재 분배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것으로, 발언권과 권력, 참여에 관한 것이지요. 그다음으로 '존엄성', '지위', '존중', '인정', '명예', 그리고 '존경'에 관한 세 번째 범주가 있습니다. 저의 직감은 이 세 번째 차원이 정치적으로도 가장 강력하고, 아마 도덕적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두 가지 차원인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든, 그것은 인정과 명예, 존엄성, 그리고 존중 면에서 더 큰 평등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데 달려 있을 겁니다. 직감이니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피케티

매우 타당해 보이네요. 우리가 언급한 주제 중 하나로 되돌아가서 보면, 저는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이 촉진한 것과 같은 민주사회주의 의제는 이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 같습니다. 장래에는 더 젊은 후보들과 비백인 후보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이 방향으로 밀고 나간 것이, 그 의제가 특히 젊은 유권자들에게 성공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성공적이란 것은 50세 이하 유권자층에서 샌더스와 워런이 바이든보다 훨씬 앞섰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민주당은 바로 이 방향으로 계속 밀고 나아감으로써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단지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더 넓은 지역에서도 인정의 느낌을 되살릴 수 있을 겁니다. 유럽과 또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9. 경제와 정치의 미래

145

하지만 그러고 나서 루소는 그 발명도 오직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인식하는 태도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 구절을 읽어주고,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지 보려고 합 니다.

먼저, 불평등의 기원을 소유권으로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땅 한 조각에 울타리를 친 다음 '이 땅은 내 것'이라고 말할 생각을 해내고는, 순진하게도 그를 믿는 사람들을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이야말로 문명사회의 진정한 창시자다.” 루소는 계속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말뚝을 뽑아버리고 ……………… 동료들에게 '이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라. 이 땅의 과실은 우리가 모두 평등하게 소유한 것이며 땅 자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너희는 끝장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범죄, 얼마나 많은 전쟁, 얼마나 많은 살인, 얼마나 많은 불행과 공포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이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강력한 주장입니다. 하지만 루소는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소유권이라는 관념은 그에 앞선 몇 가지 관념들, 느리게 이어진 건과 정신적 향상에 의존한다(루소가 문명이 일종의 타락을 부른다고 생각했음을 기억한다면, ‘정신적 향상' 은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루소는 인간의 원시 상태를 상상합니다.

9. 경제와 정치의 미래

147

사람들이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던 때를요.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큰 나무 주위로 모여들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하고 자신도 살펴봐 주기를(혹은 올려다봐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뭇사람의 존경은 가치를 지니게 됐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이, 춤을 가장 잘 추는 이, 가장 잘생긴 이, 가장 튼튼한 이, 가장 솜씨 좋은 이, 가장 말 잘하는 이가 가장 큰 존경을 받게 됐다.” 루소는 명예와 인정을 위한 이 경쟁이 '불평등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고 말했지요. 이 말 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피케티

루소의 말에 관해서는 더 오랜 시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의 진술에서 두 부분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부분도 당신이 능력에 관해 이야기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요.

148

불평등을 비롯해 우리가 다뤄야 할 여러 문제의 기원은 복합적이고, 재산의 불평등과 재능의 불평등 둘 다에서 생기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승자들은 정당화하고 패자들은 낙인찍힐 수 있게 이런 것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이 모든 것이 루소의 글에 담겨 있군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루소가 아주 명백히 밝힌 한 가지는, 문제는 최초의 울타리와 최초의 한 조각 사유 재산이라기보다 재산의 한도 없는 축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루소의 글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 고, 제가 발전시키려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집이나 차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재산이 소수의 손에 믿기 어려울 만큼 집중되고, 이는 권력의 집중과 더불어 생긴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권력을 쥐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통제권도 갖지 못하지요.

그러니까, 부와 재산의 소유권은 단지 돈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삶과 사회의 나 머지 사람들에 대한 협상력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149

어떤 노동 조건이나 임금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면 집세를 내야 하니까요. 빚은 샌더스가 학자금 부채를 억제하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었지요.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또 생활비를 내야 합니다. 우리가 10만 달러, 20만 달러, 30만 달러만 갖고 있다면, 글쎄요, 억만장자가 보기에 그건 무일푼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그에게 이 정도의 금액과 무일푼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큰 차이가 있지요. 이 정도 돈이 있으면 우리는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집을 살 수가 있습니다. 뉴욕이나 파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집을 구할 수 있지요.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고요. 이제 제안받은 일 자리를 조금 더 까다롭게 고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용주나 자산가들은 좋아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까다로워지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등은 실제로 권력과 협상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가 루소에게 동의하는 것은, 문제는 재산 축적이라는 점, 사유 재산 자체의 끝없는 축적이라는 점입니다.

1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