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이 부분은 꼭 누구에게 전해주면 좋겠다는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잊힐세라 제 빨리 책갈피와 메모를 하고 다시 이 블로그에 옮겨와서 표시를 해둡니다. 기어코 그 사람에게 전해 줬을 때 어떤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특히 그런 부분을 만났습니다. 히사이조와 요로 교수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보석을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요로
아마 다른 동물들은 뇌가 너무 작아서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인간은 뇌가 진화하고 의식이 생겨났지요. 그렇게 되면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해서 이해한 결과와 귀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해서 이해한 결과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눈과 귀로 들어오는 서로 다른 정보가 모두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는 정보임을 이해하는 기능을 발달시켜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자아분열이 일어나고 말 테니까요.
뇌가 커지면서 눈에만 속하는 것도 아니고 귀에 만 속하는 것도 아닌 여분의 영역이 생겨났습니다. 그곳이 소위 '연합영역'입니다. 인간의 경우는 그 영역이 매우 커졌고요. 그리고 시각과 청각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감각을 연합시킨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인간은 언어를 가짐으로써 세계를 '똑같이' 만들어 버린 겁니다.
언어는 눈으로 보나 귀로 들으나 똑같아요. 다만 두 감각을 결합하는데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시각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을 사진에 담을 수는 없지요.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요. 눈은 시간을 전제로 삼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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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공간을 전제로 합니다. 반대로 청각에는 '공 간'이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흔히 말하는 '데카르트 좌표*'는 시각적 좌표이고 청각적 좌표인 '극좌표**'에는 거리와 각도밖에 없어요. 소리가 얼마나 멀리서 들리는지, 어느 방향에서 들리는지. 그뿐입니다. 눈이 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습득할 필요가 있고, 귀가 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해야 하지요. 그래서 '시공간'이 언어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언어는 그렇게 생겨난 거예요.
*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좌표.
** 원점을 기준으로 다른 점의 거리와 방향을 나타내는 좌표.
제1장 음악에 감동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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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과 후각의 이중 구조
히사이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다른 감각 기관에도 관심이 생기는데요.
요로
촉각은 아주 섬세합니다. 마작을 할 때 손가락으로 패를 더듬기만 해도 무슨 패인지 알 수 있잖아요. 점자도 마찬가지지요. 작은 좁쌀 같은 돌기를 만져서 글씨로 인식하는 것이니까요. 단단하거나 부드럽다는 질감의 인식도 그렇고요. 우리가 '촉감'으로 느끼는 것,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감각은 현대적인 감각입니다.
하지만 아픔을 느끼는 통각이나, 뜨거움과 차가 움을 느끼는 온도 감각은 완전히 내부의 감각이에요. 근육이나 관절의 움직임을 느끼는 운동 감각도요. 아주 오래된 감각이고, 척추 속에 통로가 따로 있지요. 촉각도 이렇게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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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에 관해서는 제대로 규명된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후각도 냄새를 구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페로몬이라고 있잖아요? 포유류도 페로몬이 있어요. 예를 들어 쥐가 임신하고 나서 이틀째나 사흘째에 우리 속에 새로운 수컷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다른 수컷이 나타나면 암컷은 이전 수컷의 새끼를 전부 유산합니다.
히사이조
그런가요?
요로
네. 바로 냄새 때문이에요. 페로몬의 영향이죠. 인 간도 분명히 페로몬의 영향을 받을 겁니다. 여자 기숙사에서 여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월경 주기가 서로 비슷해지는 현상이 옛날부터 경험적으로 알려져 왔는데요. 이것도 아마 페로몬 때문 일 것이라고 합니다.
후각기관을 살펴보면 '야콥손 기관'이라고 해서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기관이 있습니다. 포유류는 이 기관으로 페로몬을 느끼는 것이 분명해요. 인간의 경우, 태아 단계에서는 야콥손 기관이 발견되지만 어른이 되면 퇴화한다고도 해요.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신생아에게는 야콥손 기관이 확실히 존재하지요. 예를 들어 신생아가 어머니의 젖 냄새를 알고 남의 어머니와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야콥손 기관의 작용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어머니와의 접점이니 외부 환경과 내부 환경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이렇게 후각도 명백히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제1장 음악에 감동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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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
독일인들은 그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니체는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 눈으로 보는 무대와 귀로 듣는 합창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의 이중성을 설명합니다. 시각적인 요소는 명료한 아름다움이 있고 균형과 질서를 중심으로 삼는 반면, 음악은 강렬하고 어두우며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요. 니체는 전자를 '아폴론적', 후자를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나누어 표현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는 그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니체는 이십 대라는 젊은 나이에 글로 써낸 거예요.
히사이시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가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깔끔하게 연결된 기분이 듭니다. 니체는 직접 피아노도 치고 작곡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니체의 글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음악에 빗대어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 이건 어쩌면 이런 뜻이 아닐까?' 하면서 어렴풋이 이해될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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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질감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결이 맞는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그 딱 맞는 감각은 사물과 사람에게 모두 존재해요. 가령 명품 옷이라도 내게 착 붙는다는 느낌이 없으면 안 되지요. 또는 아주 유능한 사람을 소개받아도 도저히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일로 만나는 사람과는 호흡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호흡은 맞출 수 있어도 결은 맞출 수 없지요. 개개인이 저 마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결국, 감촉이란 자신과 대상의 거리감을 파악하는 척도처럼 느껴집 니다.
요로
저는 '개성은 몸에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비슷한 뜻이지요. 감각이 점점 둔감해지고 몸이 잊히는 상황에서 '개성의 표현'이나 '나다움'이라 는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히사이시
'개성은 몸에 있다라'....
요로
네. 우리의 몸은 개성 그 자체입니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하더라도 피부 이식조차 할 수 없잖아요. 개성 운운하며 엉뚱한 곳에서 자신을 찾는 헛된 수고를 하기 전에 각자의 몸과 감각을 더 돌아봐야 해요.
제2장 감수성이 움트는 감각의 토양 71
미각의 기억
요로
누구나 맛집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미각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흔히 '어머니의 손 맛'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실제로는 미각이라 기보다 기억입니다.
히사이조
누구나 각자 정겹게 느끼는 맛이 있지요. 경험을 통해 몸에 밴 맛이요.
요로
가장 유명한 것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홍차와 마들렌 이야기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마들렌이 나오자 거의 무의식적으로 홍차에 담습니다. 그리고 그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문득 옛날 기억이 뇌리에 떠오르지요. 어릴 때 숙모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자주 줬던 거예요. 그것을 계기로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의 다양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장면입니다. 미각의 기억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아주 잘 그려 냈어요.
히사이시
하지만 결국 눈앞의 대상과 기억 속의 대상은 다르지요.
요로
맞아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오 랜만에 무언가를 먹었다가 '어, 이런 맛이었나?' 하고 실망한다든가 말이죠.
히사이시
그런 경우가 있죠. 아까 뇌는 시각에 속는다고 말 씀하셨는데, 미각도 뇌를 속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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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
왜 문화마다 체계에 대한 의식에 차이가 있는지는 과학계에서도 간혹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가장 노골적인 의견은 문장 속의 관계절에 대한 것인데요(웃음). 일본어처럼 관계절이 없는 언어와 달리 영어 등의 언어는 문장이 복문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주어와 서술어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하나의 문장 속에 명확한 단계가 존재한다는 겁 니다. 그래서 하나의 문장 속에 위계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구조예요.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일본인의 경우에는 위계 구조를 의식적으로 만드는 데에 서투르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위계적으로 질서를 수립하고 이론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경험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히사이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됩니다. 대표적으로 소니의 워크맨처럼 일본은 편의성이 높은 소형 제품의 기술력에서 뛰어난 면이 있지요. 그런데 전문가용 녹음 장비는 지금도 거의 영국제예요. 일본제도 있기는 있지만, 역시 음질이 영국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제가 예전부터 신기하게 생각하는 점이에요. 저는 영국인들을 떠올리면 근면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상이 있는데(웃음), 어떻게 채널이 100개쯤 되는 정교한 콘솔을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요로
역사의 축적이지요. 사회가 확고하게 체계화되어 있으니, 개인이 죽도록 일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요. 대신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겁니다.
제2장 감수성이 움트는 감각의 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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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아주 공감해요. 저는 지난주까지 런던에서 런던 교향악단과 함께 앨범을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작곡가에게는 꿈의 오케스트라인데, 어떤 악보를 줘도 즉석에서 바로 연주하지요. 아주 일을 잘하는 세계 최고봉의 오케스트라예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압도적인 차이가 느껴집니다. 모든 소리가 부드럽고 굵어요. 일본 오케스트라도 아주 뛰어나고 수준이 높지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역시 무언가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테크닉보다는 '음악을 하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다른 지도 모르겠다'라고 느껴지는, 그런 차이가 있어요.
녹음하던 스튜디오는 애비로드 스튜디오였는데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프로 중의 프로지요. 그런 환경에 있으면 제 감각도 점점 날카롭게 연마되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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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그 환경에서 2주 동안 그 소리를 계속 들으며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제 감성이 일본에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지는 것이 스스로 느껴져요. 그 분위기 속에 있으면 저도 물드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뿐만이 아니라 같이 간 스태프도 마찬가지 입니 다. 일본에 돌아와 다시 일상적인 환경에서 영화 음악 같은 것을 녹음하다 보면, 스태프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어제까지의 그 감각은 뭐였을까요? 제 감성이 어딘가 발달했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네요."라 고 불평하더군요. 런던에 있던 때의 감성으로 일본에서 작업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똑같이 음악을 작업하지만 다릅니다. 역시 환경이 감성을 바꿔 놓는거죠.
제2장 감수성이 움트는 감각의 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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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풍토가 묻어난다
히사이시
가령 런던 오케스트라 사람들을 일본에 데려와 일본의 오케스트라에 넣었다고 해봅시다. 일주일 정도는 변화가 없겠지요. "오, 역시 분위기가 다르 네."라는 느낌을 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지나면 일본의 소리가 되고 말거예요.
요로
말하자면 소리에 습기가 차겠지요(웃음)!
히사이시
아하하, 좋은 표현이네요! 신기하게도 인간은 결 국 집단을 따라가더군요. 환경에 적응한다는 건 그런 현상 같아요. 반대로 외국 오케스트라에 있으면서 그곳의 소리를 가지게 되어 성공한 연주 가도 많지요. 그래서 환경은 중요해요.
요로
예술이란 것에는 풍토가 종합적으로 나타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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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지은 집과 나무로 지은 집에서는 당연히 서로 다른 것을 느낍니다. 건조한 공기와 습한 공기도 서로 다르고요. 환경, 문화, 풍토야말로 사회 전체의 존재 방식과 관련되어 있어요. 파이프 오르간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애초에 서양에서 돌로 지은 교회의 홀 같은 곳에서 발달한 악기이니, 일본에 가져오면 잘 맞지 않아요.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순식간에 소리가 변하고 말지요.
히사이시
정말 그렇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은 설치하는 것만 해도 큰일인데, 거기다 일본의 건물에 설치하면 그 건물 자체가 적응하는데에 시간이 걸려요. 그동안 뭔가가 틀어지고 말지요. 조정하고 또 조정해서 결국 쓸만한 상태가 되는데에 3년 이상은 걸립니다. 그렇게 해도 일본에서는 소리가 인정되지 않아요. 상당히 까다롭지요.
요로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 가져오면 쓸 수가 없군요.
제2장 감수성이 움트는 감각의 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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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그건 좋은 경험이네요. 평생 잊을 수 없겠어요. 저 는 음악에서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휴대전화 버튼을 몇 개 누르면 쉽게 받을 수 있는 음악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지요. 금방 질리고 말 거예요.
무엇이든 그렇지만,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해서 얻어낸 것은 쉽게 버리거나 그만둘 수 없어요. 처음 에는 다운로드해서 들어도 좋으니, 그것을 계기로 그 뮤지션의 팬이 되어 CD를 사고, 콘서트가 언 제 어디에서 있는지 스스로 알아보고, 표를 사고, 들으러 가기를 바랍니다. 음악을 가장 감동적으로 듣는 방법은 그렇게 스스로 노력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 음악은 잊을 수 없게 되지요.
요로
그렇습니다. 스스로 뛰어들어야 해요. 요즘 사람들은 미리 깔린 선로나 포장된 길만 가기 때문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지 못하죠. 포장도로 위에서는 재미를 찾을 수 없어요.
가끔 초등학생들을 곤충채집에 데려갈 때가 있어 요. 저는 그저 곤충을 잡고 싶어서 나가는 거고,
제2장 감수성이 움트는 감각의 토양 103
아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돌보지만요.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아이들을 데려갑니다. 그리고 저는 혼 자 마음대로 곤충이 있을 만한 풀숲 같은 곳에 들어가지요. 잠시 있다가 돌아와 보면, 아이들이 전 부 길 위에 있어요. 산에 곤충을 잡으러 갔는데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길은 곤충이 걸어 다니는 곳이 아니야. 곤충을 잡으려면 길에서 나와야지."라는 기본 중의 기본부터 말해 줘야 해요.
히사이시
평소에는 어지간히도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라'라 고 주입받으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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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겠어요. 그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무언가 화학반응을 일으키 기도 하지요. 작곡할 때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복사해서 붙여 넣는 작업을 할 때 실수가 일어나 엉뚱한 곳에서 소리가 겹칠 때가 있어요. 어시스턴 트가 “아, 죄송합니다.”라며 서둘러 고치려고 할 때 “아니, 조금 더 들어 보지.”하고 계속 듣다 보면 무언가 단서가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외의 순간에 재미있는 발견을 하게 되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웃음). 미리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대로 틀을 벗어나는 일 없이 곡을 완성하는 경우보다 그렇게 우연과 만났을 때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요.
요로
과학의 세계에서도 실험 중의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예상치 못한 발견과 발명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염색체를 관찰할 때, 접시 위에 세포를 배양하고 편평하게 누른 후 물을 넣어 세포에 구멍을 내면 염색체가 아주 잘 보인다는 사실도 우연히 발견되었지요. 이 사실은 쉬다오쥐에(徐道覺) 씨라는 미국의 중국인 교수가 발견했는데요. 배양 세포에 영양액을 넣을 때 연구원이 실수로 물을 넣은 거예요. 그래서 전부 못 쓰게 됐지요. 그때 “잠시 뒤 보자." 하고 관찰했더니, 분열하는 세포의 염색체가 아주 잘 보였던 겁니다(웃음). 그게 계기였어요. 거기서 "아, 망쳐 버렸네." 하고 버리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발견을 할 수 없었겠지요. 무언가를 발명하거나 발견하려면 근본적으로 그런 우연을 포착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히사이시 과학 실험도 그렇군요.
제3장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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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홍콩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군요. 홍콩은 길거리 도 소란스럽지만, 사람들도 말하기를 좋아하고 활 기차지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부자와 지식인이 중국 공산당의 나라에 서 살기 싫다며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때 캐나다의 홍콩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팔린 테 이프가 뭔지 아시나요? 바로 홍콩의 소음을 녹음한 테이프라고 해요(웃음). 음식점의 소리, 거리의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를 녹음한 테이프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합니다. 홍콩에서 이민을 간 사람들은 대자연에 둘러싸인 캐나다의 끝없는 고요함을 불안하게 느낀 모양이에요. 시끄러워서 귀가 아픈 것이 아니라 너무 조용해서 귀가 아팠던 거 지요(웃음).
요로
그런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세상일의 좋고 나쁨은 일괄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어떤 일을 겪더라도 인생은 ±0(플러스마이너스 제로)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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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원동력은 무의식이다
요로
올림픽을 보고 있으면 수영 선수가 라스트 스퍼트에서 오히려 느려지는 경우가 있지요. 그전까지 3박자 리듬이었던 수영이 2박자가 된다든가 말이 에요. 본인은 죽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느려지는 겁니다.
히사이조
그런 경우가 많지요. 아나운서가 "어떻게 된 건가요.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네요."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요로
아마 '결승선이 바로 앞에 있다'라고 생각한 순간 몸의 움직임이 달라졌기 때문일 거예요. 본인은 힘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아, 결승선이다. 이제 다 끝났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거지요. 의식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몸은 그 생각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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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원동력은 무의식입니다. 게다가 무의식은 아 주 정직해서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의욕 이 뚝 떨어지지요. 의욕이 떨어진 부분을 의식으로 보충하려 하니 엉망이 되는 겁니다. 허둥지둥할 뿐 밖에서 보면 속도가 전혀 높아지지 않아요.
그런 원리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히사이시
의식이 아무리 힘을 내려해도 무의식을 이기지 못하는군요.
요로
맞아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 중 "천재는 100리 길을 갈 때 99 리를 절반으로 여긴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99 퍼센트까지 왔을 때 아직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100미터 경주라면 200미터라고 생각하고 달리는 거지요.
히사이시
눈앞에 결승선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계속 달리는 건가요?
요로
그렇습니다. 마라톤에서 결승선에 뛰어들 때, 힘이 다해 풀썩 쓰러지는 선수와 결승선을 지나서도 계속 달리는 선수가 있지요. 제 지인은 그 차이가 무의식의 의욕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더군요.
제4장 인간의 의식과 말
165
히사이시
그 직전까지 아주 일을 잘하던 사람들이에요. 1코 너, 2 코너, 3 코너를 꾸준히 잘 달려왔지요. 그런데 4 코너를 돌아 직선 코스를 단숨에 뛰어가면 되는 순간에 집중력이 흩어지는 거예요. 저는 “그 지점을 잘 극복하는 사람만이 프로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거야."라고 쓴소리를 합니다.
요로(워니에게 들려주고픈)
아마 목표 지점에 대한 인식이 다를 거예요. 그 사람들의 목표 지점은 밤샘 작업을 끝내고 음악이 완성되는 데에 있고, 히사이시 씨의 목표 지점은 창작자로서 제한된 시간 내에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100리 중 99리나 왔다'라고 인식하고, 히사이시 씨는 '99리는 절반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거예요. 그것이 지구력의 차이라는 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히사이시
음악이란 아무리 다듬어도 진정으로 완성할 수는 없어요. 반대로 말하면 노력한 만큼 확실히 더 좋 아진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그만큼 노력해야 하고요.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얼마나 힘을 짜내 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거기서 스태프가 쓰러지면 제가 난감하다든가 하 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 순간에 잘 버티는 사람은 꼭 저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일하더라도, 또는 일이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도 분명히 뚝심이 있을 거예요. 한 걸음만 더 힘내면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 생각이 제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쓴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곧바로 이해하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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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서로의 관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할 때나 문자를 보낼 때나 그 점을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말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질 거예요.
제4장 인간의 의식과 말
185
목소리와 대화
요로
저는 타모리* 씨의 목소리가 가진 표현력에 감탄했어요. 도쿄 미타카시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에 가면 그곳에서만 상영하는 십여 분짜리 단편 애 니메이션이 있지요. 소녀가 산에 들어가 폭풍우도 만나고 괴물도 만나는 내용이에요.
히사이시
네, <집 찾기>라는 작품이지요. 대사, 음악, 효과 음을 모두 사람의 목소리로 넣는 시도를 해서, 타모리 씨와 야노 아키코 씨가 전부 육성으로 녹음했습니다.
요로
배경음까지 전부 육성으로 처리했더군요. 소리를
전부 입으로 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요. 숲이 술렁이는 소리부터 빗소리까지 전부 표현하 다니 대단했어요.
히사이시
미야자키 감독은 그 단편을 만든 일을 계기로 <벼랑 위의 포뇨>에서 포뇨의 동생들의 목소리를 야 노 아키코 씨에게 맡겼다고 해요. 포뇨 때도 야노 씨가 입으로 “쵸쵸쵸” 하는 소리를 냈지요.
요로
타모리 씨가 낮 시간 프로그램 <웃어도 좋다고!> 를 벌써 27년째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는데, 아마 타모리 씨는 그 프로그램에서 별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모리 씨의 말을 녹음해서 전부 책으로 엮어도 분명 특별한 내용은 없을 거예요. 그보다 상대방이 잘 이야기하도록 이끌 수 있는 분이겠지요. 목소리의 높낮이, 침묵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에 비결이 있을 거예요. 상대방에 맞춰 분위기를 아주 잘 조절하겠지요. 그 공감의 호흡은 성대모사를 잘하는 것과도 감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듯하네요.
히사이시
상대방에게 맞출 수 있다는 건 중요한 능력이지요.
제5장 공감과 창조 189
요로
그런 물리적인 공명 현상으로 또 유명한 것이 '하위헌스의 추시계'인데요. 돌로 지은 집의 서로 마주 보는 벽에 추시계들을 걸어 놓으면, 처음에는 시계추가 제각기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똑같이 움직입니다. 종류가 다른 소음들은 서로 간섭해서 지워지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추의 진동만 이 전달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두 시계추가 완전히 똑같은 주기로 움직이게 되는 거예요.
히사이시 신기하네요.
요로 같은 맥락에서 오래 함께 산 부부 중 한쪽이 상태가 나빠지면 다른 쪽도 상태가 나빠지는 건 충분 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요. 딱히 서로 맞추려고 하면서 생활하지 않아도, 함께 살다 보면 서로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하다못해 시계추도 서로 공명하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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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 공명
히사이시
시대와의 공명이라는 것도 있지요.
요로
네, 아주 크지요.
히사이시
서로 분야가 아주 다르고 이야기 한번 나누어 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무언가 시대와의 공 명이 마치 통주저음*처럼 흐를 때가 있어요. 좋은 창작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해변의 카프카》 (2002)를 썼을 때쯤 미야자키 하야오 씨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만들었지요.
* 바로크 음악에서 곡의 기반이 되는 저음 선율. 그 위에 즉흥으로 화음을 쌓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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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씨가《애프터 다크》(2004)를 썼을 때쯤 미야자키 씨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을 만들었고요.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에 나온 거예요.
《해변의 카프카》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은 작가 정신이 뚜렷하게 드러난 장편이고, 아주 명확한 스토리라인이 있었습니다. 한편 《애프 터 다크》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둘 다 중편이에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2시간 분량이니 긴 작품이기는 하지만, 원작은 미야자키 씨가 쓰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미야자키 씨는 전쟁 중 인간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내고자 할 법한 사람이지만, 의도적으로 그 부분은 미련 없이 포기하고 더 가벼운 주제를 선택했지요. 《애프터 다크》도 무라카미 씨의 작품 중에서는 드문 유형이에요. 시점이 조금 달라서 3인칭 시선의 작품입 니다. 무겁지 않은 방향을 택했지요.
그 시기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도 고이즈미 내각이 자위대를 파견하는 등 분위기가 뒤숭숭했어요. 현실 세계가 모든 사람의 마 음에 무겁게 얹힌 시대였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반대로 무거운 주제를 내세우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5장 공감과 창조 215
미야자키 씨와 무라카미 씨는 직접적인 접점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시대에 대한 창작자의 자세라는 면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느낍니다.
창작자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을 자유롭게 형상화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기 때문에 저 역시 당시 솔로 앨범 <FREEDOM>에서는 메시지나 작가 정신을 자제했고요.
요로
그 부분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면 많은 사람의 공 감을 얻을 수 없지요. '이게 뭐야?'라는 반응이 돌아오고 말아요.
히사이시
맞아요. 그 후 <벼랑 위의 포뇨>(2008)와 《1 Q84》 (2009)가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번에 미야자키 씨는 철저히 개인적인 세계관 속으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무라카미 씨는 대중에 다가간 작품을 쓰려고 한 것 같고요. 그런 차이는 있지만 두 작품 모두 캐릭터성과 이야기가 아주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세계관을 파고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오락성이 강한 장편이라는 점은 같아요. 미야자키 씨와 무라카미 씨는 항상 시대와 밀착해서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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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정말 그래요. 고전에는 보편성이 있어서 좋다는 것도, 음악에 공감이 필요한 것도, 그렇다고 해서 공감만 추구하면 안 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제가 항상 과제로 삼는 것도 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요로
독창성이란 새로운 공감을 발견하는 겁니다. 공감받지 못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 들을 저는 수도 없이 봤어요. 심지어는 마음이 병드는 경우도 있었지요. 개성이 지나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타인이 거의 공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워 요. 그게 예술이겠지요?
너무 독창성만 넘치는 작품을 만들면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독창성을 밀고 나가지 못하면 대중성으로만 치우치게 돼요. 당연한 소리만 늘어놓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지요. 너무 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병원에 갈 정도도 아닌 선을 걸어야 하는 것이 히사이시 씨의 입장이겠지요. '선 위의 히사이시 씨'인 거예요(웃음).
제5장 공감과 창조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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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네, 아마 그렇겠지요. 그게 저의 가장 큰 꿈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마음대로 소리를 주물럭거 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돼요. 정말로 내가 소리를 선택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죠.
그 '진짜배기'를 추구하는 길을 어느 정도 나아가 다 보면, 내가 만들어 내고 내가 소리를 고르는 것 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최고의 해답, 필연적으로 모든 조각이 제자리에 딱 들어맞는 해답이 반드시 있고 나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요.
그건 이 요소를 이곳에 놓으면 반드시 이런 전개로 이어져야 한다는 원리주의적인 의미는 아닙니 다. 하지만 선택하는 주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무언가 최적의 해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에 다다르기 위해 철저히 노력하고 고생하는 것은 역시 다르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보면 작곡가라고 해도 자신의 감성에 의존해서 곡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고 또 무엇이 달라지고.... 생각하며 탐색하는 작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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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이시
서머셋 몸이 쓴 《달과 6펜스》에서 타히티의 선 장이 자신을 “내 나름대로는 예술가라고 생각한 다.”라고 말하잖아요. '나는 생활 자체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정열을 표현한다' 같은 의미의 말이었지요. 지금 그게 생각났어요. '내 일생은 작품이다'라는 사고방식이니까요.
요로
인간은 모두 예술가라는 사고방식이 사라졌기 때 문에 예술이 약해진 거예요. 예술이란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그 분야에서 무언가 한 가지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를 보여 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거기에서 가치를 발견하느냐 하면, 자신의 일생과 겹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 일생도 이렇게 완성하고 싶다는 마음을 그 작품에 공명 시킬 수 있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신에게 귀속시키면 편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게을러요(웃음).
그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작품이어야 합니다. 각각의 일생이요.
히사이시
사람은 작품.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로
그렇게 생각하면 왜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타인 이 가진 삶의 대한 태도가 자신과 달라도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라고 서로 이해할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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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90세까지 현역이었는데, 50세 이후로 스타일을 엄청나게 바꾸었어요. 거장이니 사회에 서 실력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상태였지요. 하 던 대로만 해도 문제는 없었을 텐데,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이 피카소다운 부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과제를 던져 주고 몰아넣는 태도 덕에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라요.
사람은 변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세우면 지금 이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겁니다. 달라도 괜찮고요. 직업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생은 작품이고 자신은 그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고 생각하면 그런 예술가의 삶 속에서 무언가 참고할 만한 것,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요로
맞아요. 저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이미 종착점이 보이니까요(웃음).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를 포기하기 쉽지요. 노인의 특징일 거예요.
히사이시
요로 씨 같은 분도 그런가요?
제6장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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