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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서른일곱 번째 책 : 빛과 실 - 한강

by 마파람94 2025. 7. 23.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한강의 글을 또 접합니다. 책 표지 처럼 거울로 빛을 반사해주는 모습이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 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 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 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 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 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15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 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 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 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 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The Nobel Foundation 2024

(29)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루틴을 지키려 고 노력했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 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넣어 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그렇게 하루에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 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기증한 찻잔과 메시지 [2024]

(61


코트와 나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었네

서른 살 겨울에 산

긴 겨울 외투는 평생 이거면 되겠다 했던
종아리를 덮는 검정색 코트

안감은 미어지고
밑단 재봉은 두어 번 터졌다 다시 감쳐지고
양쪽 소맷단에 까만 보풀이
물방울들같이 맺힌 코트

오십 년 늙은 내가
이십 년 늙은 코트를 입고
겨울볕 아래로 걸어가네

벽에 걸어놓으면


코트는 나를 닮아 어깨가 수긋하고
텅 빈 안쪽 어둠을
안고 있는지 그저
놓아두고 있는지

반으로 접어 의자에 걸쳐두면
코트는 나를 닮아
먼지투성이 몸을 곧잘 구부릴 줄 알고

어깨를 집고 들어올리면 바닥에 스치며
무겁게 허리를 펼 줄도 알고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팔을 뻗으면
소매가 순순히 따라오고

깃을 세우면
내 목은 움츠러져 거기 잠기고

내가 코트를 입을 때
코트도 나를 입는지

겉감이 안감을 당기고
안감이 겉감을 두르듯

코트는 나를 안고
나는 코트를 업는지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함께 이별한 것 끌어안은 것
간절히 기울어져
붙잡았던 것 그러다
끝내 놓친 것
헤아릴 수 없네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어느 날 헤어질 서로를 안고 업고

겨울별 속으로 걸어가네

(67


III 합창

내 모국어의 안녕은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

강세와 어조와 맥락으로 구별할 수 있다

* 안녕, 만나서 반가워.
안녕, 잘 가.

안녕, 다시 만났구나.
안녕, 다시 만나자.

* 그러나 구별할 수 없다. 어느 쪽인지

강세와 억양이 없다면
한 개의 단어도 곁에 없다면

맥락도
상황도 없다면

그저 '안녕'이라고 속삭이기만 한다면
오직 '안녕'이라고 소리치기만 한다면

*
최초에 유동하는 없음이 있었다

힘도 무게도 아니었던 그것이
비물질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넘어
10의 -43승 초의 찰나를 통과해 폭발한
확률적 순간

그 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끝없이 서로에게서 멀어지면서
영원히 회전하면서
불타면서
식어가면서
빨려들어가면서


팽창하는 우주가 임계에 닿으면
다시 수축해 한 점이 될 거라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유동하는 없음으로 되돌아갈 거라고
다시 임계를 넘어 폭발하는 확률적 순간이 온다고 말한다

*

안녕,
만나고 헤어졌던 우리는

안녕,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우리는

*

시작도 끝도 없이 날개를 펼쳤다 접으며 날아가는 나비처럼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것이
몇 번째로 수축하고 팽창한 우주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

안녕. (속삭이며)
안녕. (소리치며)

내 모국어의 안녕은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

(79)


몇 주 뒤 조경사님이 식물들을 가져왔다. 삽으로 화단의 흙을 깊이 파고, 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심고, 커다란 조리개로 물을 듬뿍 준 다음 '물이 엄청나게 잘 빠지네요. 아주 좋아요'-조경사님은 앞으로의 관리법을 알려주었다.

아무리 작아도 정원은 정원이라 품이 많이 들 거예요.

그는 웃으며 경고했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아이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크게 하려면 거울을 이용하시는 것도 좋아요.

거울이요?

놀라 되묻는 나에게 그는 설명했다.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주는 거예요. 반사시켜서. 여 기는 종일 빛이 없잖아요.

(91)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의 감각을 그렇게 익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구가 공전하는 속도의 감각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계절에 따라 햇빛의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거울을 배치하는 위치를 약 사흘마다 조금씩 바 꾸어야 한다.

*

거울로 햇빛을 붙잡아 나무들에게 비춰주면 흰 북쪽 벽에 빛의 창문이 생긴다. 잎과 가지들의 그림자가 그 안에 서 음각화 같은 형상을 만든다.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 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 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리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그 기쁨에 홀려 십오 분마다 쓰기를 중지하고 마당으로

(95)

4월 23일

1. 라일락에 살짝 보랏빛이 들었는데 작년처럼 진하지 않다. 색이 옅어지는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겠다.

2. 내가 벽으로 거울 빛을 쏘아주지 않자, 단풍나무가 스스로 마당 가운데를 향해 몸을 틀었다.

3. 블루베리 흰 꽃에 보라색이 들고 있다.

4. 관중고사리 작은 잎이 또 나온다. '뿌리를 뽑아야 해'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됐다. 뿌리에는 힘이 있다.

(117)

더 살아낸 뒤
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을 꼭 껴 안아보았어.
(글쓰기로)

사람들을 만났어.
아주 깊게 진하게
(글쓰기로)

충분히 살아냈어.
(글쓰기로)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2023]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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