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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서른다섯 번째 책 : 곁에 두고 읽는 니체-사이토 디카시

by 마파람94 2025. 7. 19.


가수 신해철의 노래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나에게 쓰는 편지를 좋아하는데요.

그 노래 중 랩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고 약간은 내레이션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내용인데요.

'고흐의 불꽃 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는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아는 니체는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사속 저 부분이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번 책을 읽었다고 해서 철학자 니체라는 큰 산에 대해 알았다고 말은 못 하지만, 작게나마 산자락 둘레길을 잠깐 체감하는 느낌입니다.

좀 뜬금 없지만 나에게 쓰는 편지 중 나머지 내레이션 가사를 옮겨와 봅니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계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던 바그너를 비판하는 <바그너의 경우(Der Fall Wagner)》와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등 다양한 저작들을 쏟아내며 마지막 창작혼을 불태웠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로 건너간 니체는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정상적 정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정신착란에 시달리다가 1900년 8월,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니체는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음에도 살아 있는 동안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학계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또 종교계와 윤리주의자들로부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리며 평생 외롭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사후 유럽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는 19세기를 살았던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세상을 억압하는 온갖 권위에 철저히 불복하는 태도를 견지했던 쇼펜하우어로부터 크게 영향받은 까닭에 세상을 뒤엎으려는 혁명적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이나 도덕 관념주의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니체가 현대 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20세기 이후 지식인들은 니체가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와 함께 근대 철학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상가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들어가기 전에 11


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물리량이다. 속도, 변위, 가속도, 힘, 운동량, 전 기장 등을 표기할 때 이것을 사용한다. 벡터는 화살표의 길이로 크기를, 화살표의 방향으로 방향을 나타낸다.

니체가 말하는 화살 이미지에서 방향성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따라 일직선으로 곧장 날아가는 것과 같고, 양은 자신의 이상에 대한 열의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현재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가고자 하는 의지 덩어리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화살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렇게 썼다.

누구나 자기 미래의 꿈에 계속 또 다른 꿈을 더해나가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거나 소소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다음 에 이어질지 모를 장벽을 걱정하며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니체는 당대의 철학자들을 포함한 지식인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아도 절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자기 삶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내달렸다. 니체 스스로 초인이라는 존재를 향해 날아가는 하나의 큰 벡터였던 것이다.

니체가 세상의 질타와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함으로써 이뤄낸 업적은 오랜 세월 그리스도교에 의해 구축되고 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린 사유 체계를 단번에 일신할 만큼 혁명적인 것이었다.

26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문제는 평등이라는 개념에 있다. 평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냉철하게 평가해야 할 것들조차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누구는 1시간에 10의 효율을 내고,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에 5의 효율밖에 내지 못한다면 더 많은 땀을 흘리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은 보수를 받는 사람은 그런 현실을 평등하다고 말할까? 이런 일은 자유와 사랑을 외치는 현장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니체는 사이비 평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대형 독거미인 타란툴라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높은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끌어내리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니체는 이런 일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르상티망, 즉 막연한 분노나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그런 사람들을 기피했다.

니체는, 평등이 곧 미덕이라고 외치며 '우리와 동등하지 않은, 우리보다 강력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을 비방하자'며 야합하는 타란툴라들의 행태에 몹시 분개했다. 타란툴라들이 말하는 아래로의 평등은 개인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말살하는 살인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곧잘 이런 일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영어권 나라에서 살다 온 학생은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발음할 수 있다.

PART 1 한 발의 화살이 되어라 69

쓰메 소세키가 작가로서 활동한 것은 1905년에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의 약 10년 정도였다.

역사상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운 영국의 록 그룹 비틀스(The Beatles) 도 데뷔부터 해산까지의 활동 기간은 겨우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만들어낸 것들은 질뿐만 아니라 양도 엄청났다.

이런 예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일에서 최고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것은 깊은 몰두와 집중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평소의 훈련으로 힘을 잘 비축해 두었다가 '이때다!' 싶은 시기가 오면 단숨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도록 자신을 다그친다. 바로 그 순간 최고의 효율과 가치가 얻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직 신출내기일 때, 혹은 매우 불우한 처지에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어떤 일을 제안받았다고 하자. 그때 어떤 생각으로 일하는가가 중요하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몰입해서 주어진 일을 해낸다면 그동안 겪었던 고생도, 약자로서 품고 있던 르상티망도 한순간에 반전되어 긍정의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누군가가 최고의 힘을 발휘함으로써 큰 성공을 쟁취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사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에 뛰어난 인재들이다.

88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세계 명반 100선' 같은 음반 컬렉션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고 했다. 그보다는 나중에 '내가 왜 이런 걸 샀지?' 하는 서투른 면이 있는 자기 모습이 좋다는 것이다. 또 그런 면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신뢰가 간다고도 했다. 너무 효율이나 쉬운 성공만 생각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하루키의 말은 니체의 생각과 일 맥상통한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특별한 일로 세상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은 독창적인게 아니라 그저 주목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말로 독창적인 사람은, 다른 이들도 이미 보았지 만 아직 알아차리지 못해서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 삶

온몸이 떨리는 감동으로 이어지는 도전하는 삶을 외면한 채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에 만족하는 인생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가면 될 것이다.

PART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95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끝내 죽고 말듯이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커녕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까지의 가치관을 비롯해서, 지금의 나를 구축하고 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좁은 세상이라도 그에 집착하며 지키고 싶어 하기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얇은 보호막 안에서 혼자 만족하며 살아간다.

자신을 깨뜨리려고 덤비는 것들과 당당히 맞서서 피를 흘리고, 강한 상대들을 피하지 않고 차례차례 만나 그 타격을 온몸에 받으며 깨달아 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의 의미일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정보를 인터넷이 대신 찾아주고, 손가락만 까딱해도 지구 반대편의 일들이 한눈에 보이는 현대 사회다. 하지만 검색하는 손을 잠시 멈추고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면 삶이 주는 기쁨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나의 손과 발로 발견의 기쁨을 찾는 사람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오늘의 초인이다.

PART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97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니체는 지금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예전에 행한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윤회한다고 생각하면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삶의 굉장한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인공인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무서움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을 견디면서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 부분에서 니체는 내세에서의 행복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불씨를 최대한 지피며 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니체의 '영접회귀(Ewige Wiederkunft)' 사상이다. 니체의 영접회귀 사상에는 현재의 삶에 실수가 있어도, 실패를 해도

PART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99

용기는 죽음을 죽인다. 그때 용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되뇌며 몇 번이나 자신을 다잡아도 시시포스의 신화에서처럼 어떤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 개의 사람들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다시는 같은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시포스처럼 똑같은 일이 무한 반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고 해도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이다. 그렇기에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다시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고 행동한다면 다른 미래가 찾아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몰입해야 할 이유다.

별다른 생각 없이 멍하니 보내버린 시간은 그저 바람이 스쳐가듯 막연히 지나가 버린다. 반면 어떤 일에 철저히 몰두한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의 시간 감각을 기억한다. 온 마음을 집중해서 ‘이것밖에 없다'며 반복 작업에 쏟아부은 시간은 내면에 깊이 파고든 감각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것이 '침잠 감각'이다. 이런 감각을 가지고 일에 깊이 빠져들면 외견만 보는 사람들한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104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나는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니체의 이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 20대 시절에 커다랗게 써서 벽에 붙여놓고 읽고 또 읽었다. 친구들은 주야장천 책만 들여다보면서 20대를 보내는 나를 보며 답답하다며 혀를 찼지만, 나는 니체가 그러했듯이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반드시 들려주는 니체의 말이 있다. 부질없는 명성이나 헛된 욕망을 좇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확고히 지배하는 주인으로 살았던 니체는 미래의 자기 모습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기에 《우상의 황혼》에 이렇게 썼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왜?'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다음은 아주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의 길이 명료하게 보이기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당신은 스스로의 '왜?'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있고, 내일은 왜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다.

PART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109


이런 사람들에게 앞길을 가로막는 악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가타(永田) 농법'이라는 작물 재배법이 있다. 이를테면 토마토를 기르면서 일부러 물을 주지 않는 재배 방식을 말한다. 토마토에게 물이 없는 환경은 가혹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란 토마토는 놀랄 만큼 달고 풍부한 맛이 된다. 일부러 최악의 환경을 만들어놓고, 작물로 하여금 거기에 적 응하도록 만들면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역발상의 산물인 셈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척박한 토양을 이겨내는 토마토가 되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시작했으나 중도에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혀 더 이상 해나갈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수록 '밑바닥까지 떨어져보라'는 게 니체의 메시지다. 누구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힘차게 뛰어오를 때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남보다 일찍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기어이 절벽을 기어 올라 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 중에 프랑스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도 있다. 파리의 뒷골목 풍경을 시적인 정취가 넘치는 색채로 표현해 낸 위트릴로는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하고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0 곁에 두고 읽는 니체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손을 사용하거나 냄새를 맡거나 해서 어린 시절의 감각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정신은 물론이고 신체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자극을 받는 오감은 뇌에 활력을 가져다준다.

오늘날은 '오랜 세월 쌓인 감각'에 의지해서 일하는 장인이 드물고, 대신 정보 검색 같은, 기계에 의지해서 단시간에 결과를 얻어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바로 기업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점점 퇴직을 강요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기계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언젠가 이러한 감각을 대부분 잃어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얼마 전에 유명 아트디렉터 사토 가시와(佐藤可士和)의 잡지 인터뷰 기사가 생각났다. 그는 자신의 창조력의 비밀은 신체 감각을 키우는 운동기구인 '밸런스 볼'에 있다고 했다. 밸런스 볼을 본 순간 어른들은 주 저하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불안정한 감각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사토 가시와는 지금도 도로 옆에 조금 높게 설치된 담이나 난간이 있으면 꼭 그 위에 올라가 본다고 했다. 그렇게 오감을 최대한 가동시키는 습관을 통해 몸의 모든 기관이 늘 열려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조금 높은 설치물 같은 걸 발견하면 당장 뛰어올라 평균대에서 균형을 잡듯 놀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올라갔을 때의 긴장감 때문에 사람은 예민해진다. 체조 선수처럼 전신의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니체가 권하는 춤이나 사토 가시와의 밸런스 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정신의 우물을 맑게 하는 오감의 작동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어느새 그런 감각을 대부분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이야말로 삶의 난관을 돌파하는 힘과 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120 곁에 두고 읽는 니체

그녀가 인생의 스승으로 흠모한 니체 또한 오만하리만치 강렬하게 자신의 세계를 고집한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아주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민함이 있었기에 두 사람 다 항상 자신의 오감을 극대 화하면서 참신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명력 넘치는 몸을 동양적 신체관에서 말하면 '상허하실(上虚下實)'이라 한다. 이것은 상반신의 힘을 최대한 빼고 골반과 배, 허리를 포함하는 하반신에 힘을 싣는 신체 상태를 말한다. 상허하실을 제대로 유지하면 배꼽 아래의 중심인 단전에 에너지가 꽉 들어차는데, 이때는 호흡이 깊고 안정되어 있어 온몸에 활 기가 넘친다. 이런 모습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불상을 떠올리면 된다.

니체의 철학 세계는 동양의 정신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니체가 말하는 '춤을 추는 몸'은 역동적인 명상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동양 적 사유 방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에너지가 가득 찬 상태를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춤을 추는 행위에 명상을 더해서 정신의 우 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길 바랐기 때문이다. 춤을 춤으로써 해방감을 느껴 자신을 밝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우리는 스스로가 창조적이라 고 느낄 때 반드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PART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123

바베트의 만찬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이라는 영화가 있다. 덴마크 여성 작가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의 동명 소설을 같은 나라 출신 영화감독 가브리엘 악셀(Gabriel Axel)이 연출한 영화로 1987년에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아이작 디네센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를 쓴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의 필명으로 동양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언론에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이 상은 내가 아니라 다음 세 사람, 칼 샌드버그, 버나드 베렌슨, 그리고 아름다운 작가 아이작 디네센이 받았어야 했다.”

PART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141

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무대는 19세기 후반 덴마크 서부 해안의 가난하고 외진 마을로, 그곳에 목사인 아버지와 마르티네와 필리파라는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신실한 신앙생활을 이끈 목회자이자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목사가 죽고 나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교회를 떠나갔고, 그나마 남은 늙은 신도들도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에도 자매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난한 신도들을 살뜰히 살피며 살아간다.

젊은 시절에 언니 마르티네는 잘생긴 청년 장교 로렌스의 사랑을 받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동생 필리파는 잠깐 그녀를 가르쳤던 프랑스 성악가 파팽에 대한 추억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자매에게 바베트라는 프랑스 여인이 파팽의 편지를 들고 찾아온다. 그녀를 가정부로 받아달라는 부탁의 편지였다. 자매는 파리 코뮌의 혼란 와중에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그녀를 받아들이고, 바베트는 자매를 정성껏 도우며 함께 지낸다.

자신의 과거를 입에 올리는 일이 없는 그녀는 처음엔 모든 이들의 경계 대상이었지만, 곧 알뜰한 살림 솜씨와 성실한 품성으로 자매와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고 점차 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간다.

그들과 함께 생활한 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바베트는 1만 프랑짜 리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

142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자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바베트가 그 돈을 들고 다시 도시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베트는 자매의 아버지인 목사의 100번째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 돈으로 완벽한 프랑스식 만찬을 차리게 해달라고 자매에게 청한다.

금욕적인 생활을 고수해 온 두 자매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프랑스식 만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나 마지못해 바베트의 간청을 들어준다. 아버지의 생일날 과연 어떤 음식이 등장할지 알 수 없어 걱정하는 자매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식탁에 아무리 이상한 요리가 나와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한편 젊은 시절 마르티네를 짝사랑했던 로렌스가 이제는 중년의 장군이 되어 그 지역에 살았던 숙모와 함께 만찬에 초대된다.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이 촛불을 밝힌 식탁에 둘러앉은 가운데 그들 앞에는 한때 프 랑스에서 일류 요리사로 명성이 높았던 바베트가 혼신을 기울여 차린 만찬이 놓인다.

프랑스 군대의 장군으로서 궁정 생활에 익숙한 로렌스는 능숙하게 요리를 먹으며 환상적인 맛에 대해 칭찬을 쏟아내지만 마을 사람들은 요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묵묵히 먹기만 한다.

하지만 먹고 마실수록 그들 사이에 사랑과 온기가 퍼져나가고, 이윽고 인생 최고의 만찬을 경험한 사람들은 천상의 빛과 같은 은혜로움을 느끼게 된다. 바베트로 인해 그동안의 반목과 미움, 질투 등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게 된 것이다.

PART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143


영화를 보면서 인간다운 욕망을 철저히 차단하고 늙고 병든 마을 사람들을 벗하며 살아가는 자매를 보면서 아름다움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중세 가톨릭도 그랬지만 청교도적 생활에서는 더더욱 엄격한 금기들을 정해놓고 이에 철저히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자매는 여기에 묵묵히 순응하며 일생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매의 모습에 연민이 솟는 것은 나뿐이었을까?

욕망해야 삶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중세 가톨릭은 신도들의 금기 사항으로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꼽았다.

여기엔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포함되는데 이런 행위들이 또 다른 죄를 불러일으켜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니체가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욕망이야말로 삶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가장 원초적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톨릭의 금기 사항을 인간성을 말살하는 억압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곱 가지 대죄에 깊은 지식은 없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이따금 그리스도교에 대단히 남성적인 신이 군림하고 있어 신도들에게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안 된다'며 야단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144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왜 이렇게 중세 가톨릭은 사람들에게 금지하는게 많았을까? 예를 들어 칠죄종 중에 음욕이 있다. 이처럼 성욕을 무조건 안 된다고 부정하면 성에 접근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기 쉽다. 이는 수도나 가스의 밸브를 단단히 잠가버리는 것과 같아서, 어쩌다 한 번 수도꼭지를 틀더라도 에너지를 제대로 발산할 수가 없다. 물론 성욕이라는 에너지를 다루는데는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무턱대고 금지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폭발하게 된다.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성에 대한 호기심을 차단했다가 자칫 엉뚱하게 분출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대로 제어하기만 한다면 성을 포함해서 욕망하는 일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춤추는 몸'처럼 생명을 마음껏 연소시키는 일이 행복과 이어진다면, 중세 가톨릭이 고집하는 도덕률은 생명력의 바탕을 굳게 닫아버리는 것이 된다고 니체는 비판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욕망이 삶의 기쁨을 구가하는 일임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창조도 성욕도 모두 적극적인 의욕이다. 두 가지 모두 인간 삶의 근원이 되는 활력의 우물에서 길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의 우물에 덮개를 덮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PART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145

우리는 역사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매일의 삶 자체가 곧 역사다.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매일의 역사를 만든다. 두려워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오늘 하루를 마쳤는가, 게 으르게 보냈는가, 용감하게 도전했는가, 어떤 일을 어제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행했는가. 이 같은 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 매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역사책이라고 말한다. 페이지마다의 내용은 남이 대신 채워주지 않는다. 그러니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도 늘 신선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페이지를 메워나가야 한다. 밝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지런히 용감하게.

이런 일에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오늘은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해서 학교나 회사를 가 보자. 눈앞에 지나치는 풍경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것이기에 어제는 느낄 수 없었던 활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또 하나 유용한 것이 앞에서도 말한 역할 바꾸기다. 역할을 바꾸면 이 제껏 몰랐던 상대의 기분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줘 야 하는지 알게 되고, 이는 타인에 대한 헌신과 배려로 이어진다. 리더라면 더욱 역지사지에 능해야 한다. 멋진 리더가 되기를 원할수록 부하들로부터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참신한 방법으로 접근하라.

PART 4 꿀벌처럼 나누는 삶 181


"오늘은 나의 일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구나."

제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바라보며 이렇게 서두를 꺼낸 공자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서른 살이 되어서는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而立), 마흔 살이 되어서는 미혹됨이 없어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不惑), 쉰 살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어며(知天命), 예순 살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아차렸 고(耳順),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從心).”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동안 태산 아래로 펼쳐진 망망한 하늘과 숲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려고도, 사람을 책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이 믿는 것을 따라, 마치 태산의 정상에 오르려고 낮은 곳에서부터 한 발 한 발 높은 곳으로 올라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하늘이 알고 있다.”

태산을 내려온 공자는 제자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제부터 사제 관계는 그만두고, 우리 모두 친구가 되자. 스승으로서 나의 임무는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친구로 지내자."

이즈음 공자는 필생의 숙원 사업인 《춘추(春秋)》의 저술을 막 끝낸 직후였다.

184 곁에 두고 읽는 나체

기억력은 나이와 관계없다

진짜 교양은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가, 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바로 여기에 교양인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시인 두보(杜甫)는,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고서도 자기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사람은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한 것뿐이다.

머리에만 담으려 하지 말고 몸의 일부가 되게 하라는 뜻의 암송은 사실 서구 사회에서는 문화 교양의 기본적인 기술로 여겨왔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나 산문에 익숙해지도록 수업 시간에 암 송을 많이 시킨다. 영국에서는 초등학교 때 셰익스피어를 외운다. 단순히 아이들의 수업만이 아니다.

PART 4 꿀벌처럼 나누는 삶 193

니체는 자신의 저서를 촌철살인의 짧은 글로 구성하는 걸 좋아했는 데, 이는 진리의 핵심을 꿰뚫는 짧은 글이 한 권의 책과 대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이나 금언, 속담 같은 말들은 인간의 지혜를 짧게 엮어 외우기 쉽게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 니체는 어쩌면 자신의 아포리즘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한때 일본에서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짧은 글을 외우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현자가 걸었던 한 걸음 한 걸음을 자기의 발로 직접 밟아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단순히 그냥 한 번 읽혀지고 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을 쓸 때 피를 쏟아서 썼기에, 니체 역시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 내용 하나하나를 완전히 체화하여 삶의 영양분으로 삼기를 바랄 것이다.

PART 4 꿀벌처럼 나누는 삶 195

니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어야 하는 꿈과 이상을 잃은 채 하 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자기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영웅을 외면하지 마라. 더 높은 곳을 향한 꿈과 이상을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이 말하지 마라. 살면서 어느 사이에 꿈과 이상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비웃게 되고 시샘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면 발전하겠다는 의지나 자기 자신을 극복하겠 다는 강고한 마음 또한 버려지게 된다.

니체는 또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생존 본능은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자극에 의해 북돋아진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미적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생존 본능을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인 미와 아키히로(美輪明宏)씨 와 함께 작업을 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아름다움의 힘이 사람을 얼마나 정열적으로 만드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미와 씨는 1935년생으로 이제 80세가 되었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지금 이 시간에도 팬들과 열정적으로 만나는 무대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에게 그 나이가 되도록 아름다움과 활력을 잃지 않고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은 본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건강해진답니다."

200 곁에 두고 읽는 니체

그 대단한 의욕들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자극을 얻는다. 이런 일로도 우리가 의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은가?

가고시마 지방에 전해지는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울까? 뭘까? 울겠다면 뛰어라!"

이 말을 좀 더 풀어 해석하면 이렇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채로 무서워서 울 것인가? 큰마음을 먹고 뛰어내 릴 것인가? 울거라면 차라리 뛰어내려라!"

니체가 혹시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 을지 모른다. 재능이 없다며 도전을 주저하면서 울고만 있지 말고 그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이것이 바로 니체가 자신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세상을 돌파했던 방법이며,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권하는 인생이다.

228 곁에 두고 읽는 니체

까마득한 상공에 홀로 외로이 떠 있는 연과, 이를 위해 팽팽하게 버티고 있는 연줄은 난관에 온몸으로 맞서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심장이 뜨거워지곤 했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바람은 더욱 강하고 거칠어진다. 연을 높이 날리면 날릴수록, 땅을 밟고 서 있는 나 역시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줄을 통해 지상에는 없는 바람의 감각을 맛보게 된다. 연은 바람 덕분에 더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지만, 바람 때문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니체가 운명에 대해 말할 때마다 사용했던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이 있다. '운명애(運命愛)'라고 번역되는 이 말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설명한다.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지만, 여기에 묵묵히 순종하는 삶에서는 창조성을 찾아볼 수 없다. 운명의 필연성은 긍정하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자기만의 새로운 삶을 이루게 되고, 바로 여기서 창조성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바람에 맞서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연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항상 따뜻한 봄날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거친 바람과 폭우가 몰아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늘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라는 난관을 사랑하고 받아들여서 내 편으로 만드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모르 파티!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감수할 뿐만 아니 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할 때 진정으로 완성된 인생을 살 수 있다.

232 곁에 두고 읽는 니체

큰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되어라.

그가 말하는 웃음은 TV 속 코미디언이 말하는 우스갯소리를 듣고 터 뜨리는 공허한 웃음이 아니다. TV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서는 니체 가 말하는 '큰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 스스로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웃음을 전달받기를 바라는 태도로는 진정한 웃음의 행복 을 얻을 수 없다.

프랑스의 잡지 편집자였던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의 《잠수복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니체의 큰 웃음의 예로 보여주고 싶다.

이 책은 의식은 정상이지만 온몸이 마비된 작가가 눈의 깜박거림만으 로 의사소통을 해서 완성한 회고록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인 화 제를 모았다.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으로 일하던 보비는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침도 넘길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알아듣고, 의식도 확 실히 살아 있다. 날로 굳어가는 신체 안에 갇혀버린 그는 몸이 마치 잠수 복을 입은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는 이 터무니없는 운명의 무거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이 보비가 20만 번이나 눈을 깜빡거린 끝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가 말하고 싶은 알파벳에 눈을 깜박이면 파트너가 그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었다.

덧붙이는 글 243

"나는 머릿속에서 하나의 문장을 열 번씩 퇴고한다. 그렇게 말을 지우거나 형용사를 넣거나 한 끝에, 마침내 단락마다의 모든 말을 암기해버 린다."

어느 날 보비는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자신도 알아볼 수 없이 변해버린 자기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는 걸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역겹고 추한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그 얼굴에 대해 보비는 이렇게 썼다.

“내 안에 경련과도 같은 큰 웃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 넘어 산인 이 상황에 최후의 일격을 먹이면서, 모든게 농담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눈물이 흘러넘칠 때까지."

독자들은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모든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 고 외치는 니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신의 불행에 보내는 큰 웃음, 보비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해방의 힘 때문이다.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아모르 파티! 그가 눈물이 흘러넘칠 때까지 웃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보비는 이렇게 썼다.

“어디선가 관악대가 왈츠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벌떡 일어나서 타일로 장식된 바닥을 딛고 빙빙 돌면서 계속 춤을 추었다."

244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어떤 특별한 일로 세상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그저 주목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말로 독창적인 사람은, 다른 이들도 이미 보았지 만 아직 알아차리지 못해서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탄 생하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부록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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