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고 합니다. 실제 쓴 약을 복용하기 쉽게 달콤한 것으로 덧입힙니다. 문학의 당의정설을 이십 대 중반쯤 대학 다닐 때 교양 과목 '문학의 이해' 라는 과목으로 배운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입에 쓴 철학을 재미있는 영화로 연계한 당의정 같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가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뒤쪽에 가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장도 있긴 하지만-저에게는 스타워즈가 그랬습니다.-대체로 정신 차려 읽어야 됩니다.-사실 모든 책이 그렇긴 하죠.
어쨌든 한 열흘 만에 다 읽게 되었는데, 작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유명한 영화에 대입해서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만약 쉽지 않았을 터인데, 어려운 철학을 영화와 접목시켜서 설명한 데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철학과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독하기를 권해 드립니다.
영화 목록
프랑켄슈타인,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토털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할로우맨, 인디펜던스데이-에이리언,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1장. 프랑켄슈타인 — 삶의 의미
•핵심 철학 문제: 실존주의적 부조리와 존재의 의미
•영화/소설 포인트: 인간이 창조한 존재의 부조리와 윤리적 책임에서 삶의 본질을 탐구.
2장. 매트릭스 — 확실성의 문제
•핵심 철학 문제: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
•영화 포인트: 현실과 가상의 구분, 지식론의 착각/의심 이슈를 다름.
3장. 터미네이터 — 심신 문제 (Mind–Body)
•핵심 철학 문제: 마음과 육체는 어떻게 연결되나?
•영화 포인트: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통해 의식과 정체성,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짐.
4장. 토탈 리콜 · 6번째 날 — 인격 동일성
•핵심 철학 문제: 기억과 육체가 동일성을 결정하는가?
•영화 포인트: 복제·기억 조작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철저히 재고토록 함.
5장. 마이너리티 리포트 — 자유 의지
•핵심 철학 문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가?
•영화 포인트: 사전 범죄 처벌이 자유의지와 운명론 사이의 긴장을 불러옴.
6장. 할로우 맨 —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핵심 철학 문제: 도덕 행동의 이유와 근거
•영화 포인트: 투명 인간의 부도덕에서 도덕적 책임의 본질을 질문함.
7장. 인디펜던스 데이 · 에일리언 — 도덕의 범위
•핵심 철학 문제: 도덕적 지붕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영화 포인트: 인간 이외의 ‘타자’들에 대한 도덕적 고려와 연대의 윤리를 탐색 ().
8장. 스타워즈 — 선과 악
•핵심 철학 문제: 선(善)과 악(惡)이란 무엇인가?
•영화 포인트: 포스와 제다이 윤리를 통해 도덕적 딜레마와 구원에 대한 사상을 다룸 ().
9장. 반지의 제왕 — 도덕 상대주의
•핵심 철학 문제: 도덕은 보편적인가, 혹은 상대적인가?
•영화 포인트: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상대주의적 판단과 절대적 가치를 동시에 조명.
10장. 블레이드 러너 — 죽음과 삶의 의미
•핵심 철학 문제: 삶의 의미란 무엇이며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영화 포인트: 인간과 레플리컨트의 경계 속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함.

때때로 부조리한 일이 생기는 반면, 철학에서는 늘 그렇다는 것이다. 부조리는 인간 실존을 통째로 관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철학과 철학이 다루는 문제들의 핵심에도 자리 잡고 있다.
철학에서 부조리는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나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같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업계 용어다. 통상적인 부조리 개념을 놓고 보자면, '부조리하다'는 것은 단지 '멍청하다'거나 '칠칠치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조리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 방식과 관계가 있다. 즉 앞에서 대략 설명한 것처럼, 관점들의 충돌 같은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꿈 안에서 당신은 의미와 성적인 목적 추구의 핵이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당신은 추잡한 웃음거리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 탄생하는 방식이다. 고민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철학적 문제는 이런 종류의 충돌로부터 생겨난다(그런데 오늘날 철학으로 불리는 많은 것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두 개의 견해, 안으로부터의 견해와 밖으로부터의 견해는 정확히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부조화가 생길 때마다. 부조리가 바로 코앞에 닥친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는 바로 삶의 의미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부조리 관념은 많은 실존주의 저술들에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특히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를 보라.
1장 프랑켄슈타인:: 철학과 삶의 의미 19
우리의 존속 기간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그리 긴 시간이 되지는 않을 거다.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거주하는 이 우주의 기원은 우리에게는 부득불 수수께끼다. 기껏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주하는 이 우주의 최종 운명은 열 죽음 heat death 이라는 것 정도다. 그것은 우주의 온갖 복잡한 구조물들이 단순한 구성인자들(양자, 중성자, 전자, 쿼크 등)로 분해된 후 절대 영도에 근접하는 온도로 존재하는 불변의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생명도, 어떤 빛도, 어떤 변화도 없다. 영원히, 영원히 그렇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자면, 우리 각자는 스스로 선택한 적도 없고 그저 어렴풋하게 이해할 뿐인 힘들의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오히려 상당한 정도로 우리를 통제하는 특정한 유전 형질을 전달받았다. 유전 형질은 우리가 걸리기 쉬운 질병이나 우리의 지적 능력, 신체 능력, 도덕 능력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결정해 준다. 아마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꽤나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고, 적어도 결정적인 성장기에는 우리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특정한 환경 속에 태어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환경이 우리의 유전적 소질이 결정짓지 못하고 남겨놓은 느슨한 틈새를 마저 채우게 될 것이다.
1장 프랑켄슈타인 :: 철학과 삶의 의미 21
결국 당신은 코트 하나 달랑 빌려 입고 그 미치광이의 소굴에서 탈출하여 거리로 피신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아주 작살낼 기세로 덤벼든다. 드디어 당신은 시골 마을에 이르러 평범한 농부 가족(눈먼 늙은 할아버지와 알랑거리는 아이들을 둔)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당연한 결과지만, 그 집 아버지 역시 당신을 아주 작살낼 기세로 덤벼든다.
예민한 괴물인 당신은 당연히 이런 식의 작살내기에 마음이 동요한다. 그리고 지적인 괴물이기도 한 당신은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 이해해 보려 애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당신에게는 사실상 성서나 다름없는 문건이 있다.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일 지'다. 이 책자는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실에서 황급히 탈출할 때 빌려 입고 나온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물론 당신은 아직 글을 읽지 못하지만, 빠른 속도로 글 읽는 법을 손쉽게 스스로 터득한다. 이는 생득적 언어 체계에 대한 촘스키 Noam Chomsky의 논제를 입증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지능 지수가 900 언저리쯤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탄생에 얽힌 세부 사항들을 차근차근 꿰매서 짜맞춰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꿰맨다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결단코 갖고 싶지 않았을 외모와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능력과 성향을 갖추고서 자신이 직접 선택하지 않은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28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즉 그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방식 때문인 것이다. 안으로 보면, 지금 단계에서 그는 결코 폭력적인 녀석이 아니다. 그는 추한 몰골의 잡종임에도 불구하고 신사적이고 친절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곳은 각박한 세상이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동생의 목을 조르면서 그는 폭력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당연히 이 이야기 안에는 보편적인 인간적 관심사들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이 이야기가 위대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도 그 괴물이나 매한가지로 재활용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래, 안다.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괴물의 몸은 비교적 큰 부위들(팔, 다리, 뇌)을 조립한 것인 반면, 우리를 구성하는 부품들(원자와 분자들)은 확실히 더 작다. 하지만 그런 부품들은 하여튼 우리보다 더 오래전부터 있던 것들이고, 적어도 우 리가 아는 한, 순수하게 물리적인 설계 원리들에 따라 조립된다. 괴물에게는 다소 불안정하긴 해도 어쨌든 지적인 설계자가 있었다면, 우리는 부모의 유전자가 제공하는 설계 주형에 따라 조립된다. 그리고 괴물의 타고난 능력과 성향과 재능은 그를 꿰매 합 치는데 사용된 사람들로부터 전해진 것인 반면, 우리의 것들은 약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는다. 즉 우리의 부모, 그리고 부모의 부모들의 유전자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작은 차이일 뿐이다. 물론 우리가 말 그대로 우리 조상들을 꿰매어 합쳐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1장 프랑켄슈타인:: 철학과 삶의 의미 31
내가 만일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과정과 힘들의 산물이고, 내가 가진 본질적인 특성이 그런 과정이나 힘들과 불가분 엮여 있다면, 어떻게 내가 의미와 목적의 중심일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비유가 있다. 우리와 역사의 관계는 소용돌이와 그걸 둘러싼 강물의 관계와 같다. 소용돌이는 정말 문자 그대로 그걸 둘러싼 강물로 형성된다. 소용돌이를 소용돌이로 결정짓는 것은 바로 강물의 흐름이다. 우리 하나하나는 소용돌이가 물결에 휩쓸려가듯이 역사의 조류에 휩쓸린다. 나름의 특유한 물결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듯이, 우리를 둘러싼 역사의 조류가 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소용돌이가 단지 물의 요정과도 같은 개별 물결들의 부산물이라면, 어째서 우리 역시 그저 우리 식으로 만들어진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인가?
나름의 과정과 힘들의 역사에 포박된 어떤 존재의 일례로 나방의 일종인 매미를 생각해 보라. 어떤 매미 종들은 17년을 사는데, 생의 거의 대부분을 애벌레 상태로 보낸다. 매미는 이 시기 동안 땅속에서만 산다. 매미 애벌레는 어둠 속에서 산다. 땅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17년을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짧은 혼례 비행을 위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서 알을 낳은 뒤 며칠 사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다음엔 그렇게 낳은 자손이 땅굴을 파고 어둠 속에 서 17년을 보내다가, 또다시 나타나 혼례 비행을 하면서 다음 세 대를 위한 과정을 이어나간다.
1장 프랑켄슈타인:: 철학과 삶의 의미 35
대부분을 마치 핵전쟁 후에 찾아오는 핵겨울을 견뎌내기 위해서 지하 벙커에 안전하게 처박혀 보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대부분과 달리, 매미는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기세 좋게 밖으로 나온다. 적어도 훌쩍거리지는 않는다.
만약 의미 없는 삶이라는 생각을 표현하는 자연의 상징물이 존재한다면, 확실히 이 매미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매미의 삶이 어쩌다 지금처럼 되었는지, 어쩌다 그런 기이한 생명주기를 갖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더할 나위 없는 탁월한 설명은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인과적 설명은 의미나 목적에 관해서는 더 보태는 게 없다. 각각의 매미는 세상으로 내던져진다. 매미의 비참한 삶은(우리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그것이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경쟁의 필 연성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매미는 그런 사정을 눈곱만큼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정확히 우리가 역사의 큰 조류 속의 하나의 소용돌이에 불과한 존재로 밝혀질 때 벌어지는 상황이다.
매미의 삶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이 부조리하진 않다. 부조리는 단순한 무의미 이상의 상황을 요구한다. 부조리는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한 깨달음을 요구한다. 인간 삶의 부조리는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귀속시키는 무게감, 우리가 가진 욕구의 엄중함, 우리가 세운 목표의 근엄성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 모두가 적어도 가끔씩은 마음 한복판에서...
1장 프랑켄슈타인 :: 철학과 삶의 의미 37
그는 영원히 그 짓을 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신들 만이 고안할 수 있을 법한 잔혹하고도 참으로 끔찍한 형벌이다. 하지만, 이 형벌이 주는 공포란 정확히 무엇일까?
사람들이 이 신화에 대해 흔히 말하는 방식은 시지프의 노동이 몹시 고된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바위는 육중하고 그가 간신히 밀수 있을 만한 크기로 묘사된다. 그래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시지프의 한 발 한 발은 심장과 신경과 근육을 인 내의 극한까지 몰아간다. 그러나 시지프의 노동에 담겨 있는 진정한 공포는 노동의 난이도에 있지 않다. 신들이 그에게 거대한 바위 말고 주머니에 넣으면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조약돌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시지프는 돌멩이를 갖고서 언덕 꼭대기까지 느긋하게 산보 삼아 올라가서, 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다시 처음부터 노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과제는 전보다 덜 고되다는 특징이 있지만, 그 과제가 주는 공포는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완화되지 않는다. 공포의 원천은 과제의 어려움에 있지 않다. 공포는 등골 휘는 중노동이 아니라, 그 노동의 완전한 공허함에서 나온다. 이것은 단지 시 지프의 과제가 늘 무위로 돌아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신은 성취하는데는 실패하지만 그래도 꽤나 의미 있는 과제를 접할 수 있다. 그럴 때 당신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그 실패에는 슬픔과 후회와 원망이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공포가 없다. 시지프의 과제가 주는 공포는, 그것이 쉽건 어렵건 간에,
1장 프랑켄슈타인:: 철학과 삶의 의미 39
나직한 목소리가 그를 부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메아리와 속삭임을 통해서 시지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주 잠깐 동안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아마도 시지프는 자기가 마치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낄 것 같다. 그리고 희미한 거울을 통해 자기 삶의 부조리함을 어렴풋이, 불완전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시지프의 형벌에 담긴 진정한 공포는, 형벌의 극단적인 어려움이나 형벌에 대한 그의 증오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제의 공포는 그 형벌의 무용함에 있다. 그 과제는 어떤 것도 겨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허하다. 그 과제의 한복판에 있는 둥근 바위만 큼이나 메말라 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아침에 붐비는 도심의 거리를 거쳐 직장이건 학교건 어딘가 목적지로 향해 갈 때, 주위에서 부산하게 떼지어 이동하는 다른 사람들을 한번 쳐다보라.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중 아무나 한 사람을 유심히 보라, 아마도 그는 어제 했던 업무와 똑같은 업무가 오늘도 반복되고, 오늘 할 업무와 똑같은 업무가 내일도 반복될 사무실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42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밖에서 보면, 사람들 각자의 인생은 정상을 향해 가는 시지프의 여정들 중 하나와 같으며, 그런 각자 인생의 하루하루는 시지프가 여정에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와 같다. 차이는 이것뿐이다. 시지프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되돌아온다. 우리는 그 일을 자식들에게 넘겨준다.
시지프의 노동에 실은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가령 그가 똑같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대신에, 각양각색의 바위 여러 개를 밀어 올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바위들은 언덕 아래로 도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시지프의 과제는 그렇게 밀어 올린 바위들을 활용해서 신전 이건 술집이건, 하여간에 무엇이건 짓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지프가 그런 신전 혹은 술집을 건설하려는 강한 욕망을 품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그게 혹시 술집이면) 맛있는 맥주를 팔게 될 장소를 말이다. 그리고 무거운 돌들을 밀어 올리는 모질고도 무시무시한 고군분투의 한 시절을 지내고 나서, 우리의 시지프가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신전 혹은 술집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이제 높은 산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노동의 열매를 즐길 수 있다. 만약 둘 중에 술집 쪽이었다면, 즐길게 여러 가지 더 있을 테고,
자, 그럼 시지프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우리의 시지프는 따분해지지 않을까? 영원한 권태? 만약 그가 멍청하게도 신전을 지었다면, 이런 젠장 술집을 지었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44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우리의 모든 목표와 목적은 우리에 의해서건, 우리의 자식들에 의해서건, 우리 자식들의 자식들에 의해서건, 그저 그 자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겨냥할 뿐이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는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생명체며, 따라서 우리의 행위와 목 적은 대수롭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자신의 마음을 늘 경탄하게 만드는 두 가지가 있다고 적었다. 자기 머리 위로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자기 안에 있는 도덕률이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머리 위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볼 때 나를 경탄으로 채워주는 것은 혹시 이런 식으로 우주를 창조한 어떤 신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즉 어떤 하나의 원리(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설계된 우주(이것은 곧 고통과 죽음이 우주의 구조적인 기본 요소들 중 하나로 미리 설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수십억 년 산고의 세월이 지난 후에 마침내 의식을 가진 그리고 이어서 자의식을 가진 생명체들을 생성해 낸 우주, 그런 생명체들을 통해 자신에 대해 깨닫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감탄하고, 그러다 결국은 자신의 숙명이 정해져 있으며, 우주의 운명은 열 죽음이고, 우주는 본질적으로 덧없고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들마저 알게 되는 그런 우주를 말이다. 수십억 년의 분투 끝에 마침내 무의식의 암흑은 의식의 빛에 자리를 양보했지만, 도리어 그 빛은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는 우주적인 규모의 잔인함이다. 그리고 오직 신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프랑켄슈타인:: 철학과 삶의 의미 47
그 사람은 물이 아니라 롬에 관한 생각이나 믿음을 가질 것이다. 이 생각은 단지 물에 관한 생각과 아주 유사해 보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물에 관한 생각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물에 관한 생각이 아니다. 어떻게 그것들이 물에 관한 생각일 수 있겠는가? 이 빌딩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물을 접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매트릭스 안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이는 당신의 생각이 정말 어떤 생각인지 실제로는 결코 확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당신의 일부 생각들은 그렇다. 당신은 지금 매트릭스 안에 있는지 아니면 진짜 세계 속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는 지금 당신 생각이 공기에 관한 생각인지, 아 니면 공기에 관한 생각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컴퓨터가 생성한 특별한 성질에 관한 생각일 뿐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하는 바로 그 생각들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온다.
숟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의주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련된 견해로서, 철학에서는 인식론적 입장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런데 어떤 철 학자들은 외부세계에 관한 회의주의의 입장을 더욱더 강력한 어떤 입장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바로 외부세계에 관한
82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 매트릭스
먼저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가져야 하고, 그다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를 의식적으로 직접 알고 나서, 이 둘을 비교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결코 경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거다. 우리는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를 우리의 경험과 비 교하거나 그 둘 간의 유사성 여부를 평가할 수 없다. 결국 우리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일치한다고 가정할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식의 영역인 인식론의 영토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라고 추정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직면했다. 경험 바깥으로 나가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면, 그리고 추정된 그 물리적 세계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세계에 관해 유의미하거나 정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전혀 알 길이 없는 어떤 것에 관해서말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는 1916년에 출간된 비트겐슈타인의 첫 번째 책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 Philosophicus》의 마지막 문장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가장 유명한 철학적 선언 열 개를 꼽으라면 들어갈 만하다.
86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이는 순전히 물리적인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 개별적인 정자나 난자에 어떤 비 물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들이 따로 있건 합쳐져 있건, 거기서 어떤 정신성의 징후를 탐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엄청나게 압도적인 증거들이 보여주 듯이, 우리 각자는 순전히 물리적인 기원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가 종으로나 개체로나 순전히 물리적인 기원을 갖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순전히 물리적인 것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영혼주입 ensoulment이 언제 일어나는지, 즉 이전까지 순전히 물리적이었던 신체에 언제 비물리적인 본질적 요소가 부착되는지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더 잘 아는 게 분명하다. 특정 종교 분파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되는 대답 중 하나는 바로 '수정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다. 가령, 왜 하필 그때인가? 비물리적인 마음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진화가 우리의 신체같이 마음을 담기에 적합한 복잡한 신체적 운반자 vehicle를 만들어오는 동안에, 그 모든 비물 리적인 마음들은 어디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건가? 또한 인간의 물리적 신체가 이러한 비물리적 마음을 담아내는 적합한 운반자 가령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그렇다. 프로테스탄트에 좀 더 가까운 다른 종파들에서는 그것이 40일째에 일어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장 터미네이터 :: 심신문제 117
다시 말해서, 순전히 물리적인 것도, 우리가 주의를 안으로 돌렸을 때 발견하게 되는 마음의 거주자들, 즉 심적 상태를 갖는 것들일 수 있다. 단지 올바른 형태로 체현된 신경 네트워크, 즉 올바른 형태의 몸에 올바른 형태의 신경 네트워크가 결합된 존재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음 수백 년 이내에 우리가 지능적인 기계를 만드는 일에 성공하리라 자신 있게 예측한다. 물론 그 예측이 잘못되었다고 증명될 무렵이면 나는 이미 죽고 없을 것 임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예측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신경 네트워크 모형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것들은 이전 까지는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점점 더 많은 일을 실제 수행 하고 있다. 논리적, 수학적 추론을 수행하고, (놀라울 정도로 복잡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달성하는 방식은 컴퓨터를 로봇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다. 네트워크 자체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본질적으로 로봇들이 그에 해당한다)에 신경 네트워크가 장착되고 있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새롭게 만들어진 이러한 지능적 존재는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인간을 섬길까? 아니면 인간을 파멸시키려 들까? 아니면 그냥 인간을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길까? 지능적인 존재는 대개는 매우 못된 존재다. 적어도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두 인종 사이에 기술적 발전에서 중대한 차이가 생기면 대개는 기술적으로 덜 발전된 인종이 전멸하거나 그에 근접한 결과로 귀착되곤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잉카족, 아스텍족, 마야족, 마타벨레족, 피르볼그족, 네 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에게 물어보라. 우주가 점점 더 뛰어난 지능을 향해 진화하고 우주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확장됨 에 따라, 실리콘 기반의 생명 형태인 이른바 메카노이드 mechanoid 인간처럼 보이고 행동하도록 설계된 로봇 지능체들이 우리를 앞지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진화의 다음 단계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우리가 다음 단계 세대의 선조일지는 모르지만, 그 단계를 함께할 참여자는 아닐 수 있다. 누가 알랴? 혹여, 나쁜 결말이 우리 모두에게 닥 쳐오고 있는지도.
아스타 라 비스타Hasta la vista, 베이비! <터미네이터 2>에서 슈워제네거가 급속 냉동된 T-1000에게 결정적으로 한 방 먹이면서 던지는 대사로, 헤어질 때 쓰는 스페인어 인사말임
130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화성에 도착한 아널드는 옛 혁명 동지들과 애인인 멜리나(레 이철 티코틴)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함정이었다. 실제로 하우저는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완벽하게 위장하려고 자신의 기억을 지운 뒤에 새로운 기억, 즉 퀘이드의 기억을 이식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위장한 줄도 모르는 비밀첩자가 된 것이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돌연변이들은 누가 거짓말을 하든지 알아차 릴 수 있기 때문에 하우저는 그들을 속이려고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는 적어도 자기가 아는 한 진실을 말하고 있었으므로, 돌연변이들도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쨌든 돌연변이 지도자인 쿠아토가 살해되고, 아 널드와 멜리나는 생포된다. 물론 아널드는 탈출해서 멜리나를 구하고, 리히터를 죽이고, 코하겐도 죽인 다음에, 어떤 외계 기술을 이용하여 화성에 대기를 만든다. 오스트리아의 떡갈나무가 노상 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무슨 문제를 다룬 걸까? 이 영화는 철학에서 인격 동일성의 문제로 알려져 있는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 '인격'은 영어 'person' 의 번역어다. 문맥에 따라 '사람'으로 옮기기도 했다. 신체적 특성이나 심적 특성을 귀속시킬 수 있는 행위와 책임의 주체로서 자아를 의미하는 개념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당신을 지금의 당 신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당신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만들며, 오늘의 당신과 내일의 당 신을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버호벤-슈워제네거의 대답은 당신의 기억이다.
138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인격동일성의 문제
우리에게는 왜 인격동일성 이론이 필요한가? 스스로 한번 질문해 보라. 오늘의 당신과 10년 전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당신은 당연히 10년 전 당신과 매우 다르다. 나처럼 갱년기에 들어섰다면 특히 그렇다. 10년 전에 당신 몸을 구성했던 거의 모든 세포는 이미 죽어서 대체되었다. 죽어서 대체되지 않는 것은 오직 뇌세포뿐이다. 뇌세포는 그냥 죽기만 한다.
당신은 또한 정신적으로도 변화했다. 아마 지금 당신은 10년 전에는 믿지 않았던 많은 것을 믿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10년 전에는 갖고 있지 않았던 다양한 기억, 의견, 느낌, 감정, 욕구, 목표, 기획,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육체적으로, 정신 적으로, 감정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믿음을 획득하고 과거의 믿음을 거부하며, 새로운 기억을 얻고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전에 우리가 그토록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은 희미해지고 새로운 감정이 대신한다. 우 리는 모두 거의 모든 차원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시점의 우리와 그다음 시점의 우리가 서로 같은 사람일까
4장 토탈 리콜 6번째 날 :: 인격동일성의 문제 139
당신은 내 신체를 기초로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은 내 신체를 보고, 이전에 만났던 신체와 같으니까 거기에 같은 영혼이 타고 있으리라 추리한다. 따라서 같은 나임을 알아차리고, 서둘러서 길을 건넌다. 그러나 이는 단지 문제를 일보 뒤로 물리는 일일 뿐이다. 같은 신체가 있는 곳에 같은 영혼이 있다는 원리를 믿을 만한 이유가 대체 뭔가? 다시 말해, 당신은 어떻게 신체와 영혼의 그런 상관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맥주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 당신이 선택한 여섯 개들이 맥주 꾸러미가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병들에 당신이 선택한 그 맥주가 담겨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물론 병에는 상표가 적절히 붙어 있다. 그런데 병 바깥에 표시된 것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확립되는 걸까? 믿거나 말거나 요점은 이것이다. 병 바깥에 표시된 것과 안에 든 내용물의 상관관계를 확립하려면 당신은 병뚜껑을 따고 내용물을 마셔볼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바깥에 쓰인 표시를 보고, 병뚜껑을 따서, 내용물을 즐긴다. 이로써 좀 더 일반적인 요점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두 대상의 상관관계를 확립하려면 두 대상이 자기 앞에 있음을 각기 독립적으로 확립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맥주의 경우에, 이것은 정확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신은 병 바깥에 붙어 있는 상표를 본다.
150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만약에 머리 바꿔치기 기술자가 아주 재주가 좋아서, 두뇌에 피를 공급하는 방법도 찾아내고, 쇼크나 출혈 같은 부작용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면, 그는 아마 당신의 두개골만 빼고 나머지는 몽땅 다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이제 더는 그 결 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도 여전히 존재하면서,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기술적 한계를 논외로 한다면, 당신에게는 오로지 두개골만이 필요할 뿐이다. 뇌의 위치를 잡아주고 보호하며, 수납 용기가 수행하는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데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가령 플라스틱 두개골같이 똑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대안적 수단을 찾을 수 있다면, 머리 바꿔치기 기술자는 당신의 두개골 또한 없앨 수 있다. 또는 플라스틱 두개골 대신에, 뇌의 생존과 기능에 필요한 영양분이 담겨 있는 통 속에 당신의 뇌를 띄워놓으면 어떻게 될까? 2장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는가? 따라서 당신이 누구인지 결정할 때 본질적인 것은 당신 신체일 수가 없다. 당신은 원리상 그것을 잃고도 여전히 같은 사람일 수 있다. 물론 이전의 당신보다 심하게 손상된 모습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동일성에 관한 또 다른 설명인 뇌이론-brain theory에 이르게 된다.
4장 토탈 리콜·6번째 날 :: 인격동일성의 문제 157
당신은 당신의 뇌인가?
뇌이론에 따르면, 당신에게 본질적인 것은 당신 뇌다. 물론 우리가 단지 뇌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신체도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당신의 다른 모든 신체적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우연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즉 당신은 다른 모든 특징을 잃은 후에도 생존할 수 있지만, 뇌를 상실하면 생존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방금 다른 모든 특징을 잃었지만 뇌가 생존해 있어서 당신이 생존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뇌이론에 따르면, 뇌가 같기 때문에 지금의 당신과 어제 혹은 10년 전의 당신은 같은 사람이다. 그 세월 동안에 울적할 정도로 많은 수의 뇌세포를 잃는 일은 본질적 변화가 아니라 우연적 변화로 인정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바로 당신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어떤 누구도 당신의 뇌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뇌일까? 뇌가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일까? 뇌란 무엇인가? 뇌는 유기적이며 전기적이고 화학적인 어떤 복잡한 시스템이다. 당신이 우울하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세로토닌 결핍 같은 화학적 불균형 상태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당 신은 뇌에 세로토닌의 양을 늘려주는 약을 복용한다. 체내에서 생성되지 않는 화학물질을 흡수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158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결심한 그 시점에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도 숙지하라고 요구한다. 실제로 당신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아마도 당신은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 수행한 일련의 고전적 실험의 피험자였을 것이다. 혹시 당신이 나이가 더 들었다면, H. H. 콘후버 Kornhuber가 더 오래전에 실시했던 본질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실험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어떤 실험에 참가했든 간에, 그 결과는 아마도 상당히 놀라웠을 것이다.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당신의 의식적인 결정은 손가락을 움직이기 몇 분의 1초 전에 일어난 반면, 뇌파 측정기가 기록한 뇌의 전기적 활동은 당신이 손가락을 구부리기 1초 내지 1.5초 전부터 점차 강해졌다. 말하자면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결정은 손가락 움직임을 야기한 뇌 활동 이후에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리벳과 콘후버의 실험은 우리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여러 가지 중 하나다. 적어도 하나의 해석에 따르면, 이들의 실험 결과는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의지 행위 때문에 손가락이 움직였다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당신 손가락의 움직임은 실 제로는 의식 행위 이전에 발생한 당신 뇌의 활동이 야기한 것이다. 당신은 뇌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물론 이것이 그 실험 결과의 유일한 해석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무모해 보이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어쨌든 이 실험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것만으로도 출발점으로 삼기에 충분히...
5장 마이너리티 리포트 :: 자유의지의 문제 187
우리는 특정한 인과 계열을 선택하는 데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또 다른 인과 계열의 한 부분이며, 그래서 같은 문제가 다시 처음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결정론과 운명론
사람들은 흔히 결정론과 운명론predestinationism을 혼동한다. 따라서 논의를 더 진행하기에 앞서,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하자. 두 입장은 사실상 겉보기엔 유사해서, 그렇게 혼동하게 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먼저 결정론을 살펴보자. 결정론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선택하고 결정하는 일까지도)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당신이 한 그대로 행위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당신의 선택, 결정, 행위는 불가피하다. 그것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 나타났다. 따라서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모두 불가피하다.
반면에 운명론은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어떤 행위를 하든 간에, 미래는 동일하게 판명나리라는 견해다.
200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예지자 중 한 명이 이 사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린 소수 의견 즉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없었다. 따라서 톰이 레오를 총으로 쏘는 일은 불가피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이 납치한 애거서는 톰에게 당신은 인간이며 따라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외친다. 그리고 오호라 놀랍게도, 톰은 정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레오를 쏘지 않기로 선택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운다. 그는 레오 크로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의 선택은 자유로운 것으로 묘사된다. 물 론 안에서 보자면 그렇다. 톰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늘 선택권이 있으며 원하기만 했다면 언제든 지금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그런 얘기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톰의 행위로 이어지는 인과적 질서에 어떤 틈이 있으며, 그 결과 그의 행위는 선행하는 그의 결정이나 의욕에 원인 지어지 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행위는 무작위적이거나 자발 적이며, 따라서 자유롭지 않다. 크로를 쏘지 않으려는 그의 의욕, 즉 의지의 작용은 그에 선행하는 무언가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어떤 것인가? 그것 또한 무작위적이거나 자발적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가 일어나게 만든 어떤 것이 아니기에, 즉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에, 자유롭지 않다. 톰 이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올바른 방식으로 원인 지어졌기 때문에 자유로운가?
224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마이너리티 리포트:진유의지의문제
나는 적어도 우리가 우리에게 그런 특권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경우에, 우리가 밖에서 보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안에서는 갖고 싶어 하며 또 실제 가졌다고 간주하는 상황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그런 것을 가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자 하는 그런 것은 실은 거기에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장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는 우리가 철학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 가운데 가장 거창하고 골치 아픈 문제에 속한다.
226
기게스의 반지
<토탈 리콜>에서 인격동일성 문제(제4장 참조)를 놓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창의성 넘치는 공동 작업을 펼친 네덜란드의 거장 감독 폴 버호벤은 그 작품 말고도 〈할로우 맨〉(2000) 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일도 책임졌다. 〈할로우 맨〉은 H. G. 웰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제작된 〈투명인간〉 시리즈를 버호벤이 자신의 전매특허인 피투성이 장면들을 약간 가미해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지닌 철학적 힘이 쇠퇴했는지도 모르겠다. 〈토탈 리콜〉에서 보여줬던 대담한 독창성은 이 이야기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스타쉽 트루퍼스>를 지배했던 통렬한 사회정치적 비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8~348이 전해준 설화를 그대로 재각색한 작품이다. 그 설화는 '기게스의 반지'로 알려져 있는데,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대화편 인《국가>에 등장한다.
기게스 Gyges는 리디아에 사는 양치기다. 하루는 그가 양 떼를 몰고 들로 나갔는데, 마침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감춰져 있던 지하 동굴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난다.
230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할로우 맨
기게스는 과감하게 동굴로 들어가 사람의 형체를 한 몸집이 유난히 큰 시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시신의 손가락에 황금 반지가 끼워져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부업 삼아 남의 무덤을 조금 도굴하는 정도를 마다할 사람이 아닌 양치기 기게스는 시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챙긴 뒤 양 떼에게 되돌아간다. 그가 그날 밤늦게 동료 양치기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무심결에 반지의 보석을 고정하는 장식물을 안쪽으로 돌리자, 순식간에 그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된다. 기게스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알아채지 못한 듯, 동료 양치기들은 마치 그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양 그에 대해 얘 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어쨌든 적어도 그들이 보기에 기게스는 그 자리에 없다. 기게스가 아까 그 반지 장식물을 바깥쪽으로 돌리자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나타난다. 끝내주는 행운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게스는 곧장 큰 도시로 향한다. 그곳에 가서 그는 (1) 왕비를 겁탈하고 (2) 왕을 살해하고 (3) 온 나라를 차지하고 (4) 그 후로 리디아를 통치한 유구한 혈통의 시조가 된 다. (그 핏줄 중에는 엄청난 부자이자 리디아 최후의 왕으로 유명한 크 로이소스 Kroisos도 포함된다.)
글쎄, 아마 어느 누구도 그 녀석이 좋지 않은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좋다 good는 말의 한 가지 의미에서는 그렇다. 지체 높은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비천한 양치기, 양 떼를 유일한 벗 삼아 산중에서 쓸쓸히 보내던 밤들을 안락한 왕비의 침실과 맞바꾸고, 거기에다 왕국 통치권까지 손에...
6장 할로우 맨 ::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231
그럼에도 당신이 강제로 그녀를 겁탈하려고 한다면, 그녀 역시 당신에게 어떤 제재를 가하려고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연구소의 모든 동료를 죽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에 따라 후속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면, 그들은 극단적인 반감을 품고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아마도 그들 역시 당신 에게 똑같이 앙갚음하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위험천만한 거래다. 홉스가 말한 대로, 그런 상황에서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는 투쟁이 될 것이고, 그럴 때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더럽고, 잔인하고, 짧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사리에 맞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너는 나를 죽이려 하지 말라, 그러면 나 역시 너를 죽이려 들지 않으리라. 너는 나를 강간하려 하지 말라, 그러면 나 역시 우리 오빠들에게 쇠 파이프와 자전거 체인을 들려서 네게 보내지 않으리라. 달리 말해서,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다면, 그보다 더 사리에 맞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정한 제약을 부과하는 동시에 반대급부로 당신의 자유에도 일정한 제약을 부과하는 계약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이른바 도덕에 관한 사회계약론 social contract theory의 기초를 제공한다.
그 발상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이기주의자이지만
6장 할로우 맨 ::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241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사전-사전계약을 하는 토론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계약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무한퇴행 infinite regress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한 사례이다.
그러니 사회계약을 어떤 추정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실제 묘사로 이해하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사회 계약이라는 착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착상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계약은 실제가 아니라 가설적인 합의다. 마치 어떤 누군가가 특정 시점에 실제로 계약에 합의한 것처럼 계약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질서 잡힌 사회에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계약에 합의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이란 단지 무작 위적인 일군의 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욕구나 목표를 최대한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능히 합의할 수 있는 규칙들의 집합이다.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이 질문은 ‘왜 계약 조건들을 준수해야 하는가?'와 동등한 질문이다. 사회 계약론이 제공하는 답변은 만약 계약 조건을 준수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간단한 답변은 없다. 신이 맡았던 응징자 역할을 사회가 넘겨받은 것이다.
244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우리 모두가 더럽고 악랄한 욕심쟁이이고 나밖에 모르는 하잘것없는 쓰레기로, 섹스를 위해서라 면 아마 자기 할머니도 기꺼이 팔아넘길 족속들이라는 그 그림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노인이 다 된 로버트 레드퍼드가 하룻밤 즐길 수 있게 해 주면 100만 달러를 주겠다며 음탕한 제안을 해 온다 해도, 결단코 자기 할머니를 그의 섹스 상대로 팔아넘기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할머니를 좋아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서로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으흠, 그냥 착하다.
그러니까 홉을 비롯한 여러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투명인간 케빈 베이컨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동료나 친구들을 정말로 좋아하고, 그들을 만나면 행복해하며, 만나지 못할 땐 그리워한다. 어떤 이들은 타인에게 도움 되는 일을 좋아한다. 우리 모두가 막돼먹은 개망나니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을 고려할 경우, 인간이 그저 노골적인 타산적 이유가 아닌 도덕적 이유에 의거해 행동할 수도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우리는 친구나 동료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면부지의 이방인들에게도 호의, 애정, 공감, 연민, 동료애 같은 일반적인 감정을 갖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물론 호의, 애정, 동질감, 연민, 동료애 같은 감정을 자기 안에서 얼마나 많이 찾을 수 있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6장 할로우 맨 ::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249
다시 칸트
우리는 이미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 이론을 만나본 적이 있다. 그의 핵심적인 도덕 법칙은 이른바 정언명령이었다. “네가 동시에 그것이 또한 마땅히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그런 격률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예를 들어, 당신은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말이 수많은 기분 나쁜 귀결을 낳기 때문도 아니며(결과론자들이라면 그렇게 말하겠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도 아니다(사회계약론을 옹호하는 부류라면 그렇게 말하겠지만).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거짓말하기가 일관되지 않은 행동 방침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무언가를 약속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곧 몽땅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거짓말 역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재적소에서 언제든 거짓말을 하겠노라는 행동 방침은 스스로 망가지거나 스스로를 무효화하는 방침인 셈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거짓말 이 그릇된 행위인 이유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본질적으로 황금률을 이쪽 세계의 전문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만일 어떤 행위가 당신이 해도 괜찮은 일이라면, 그것은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68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다른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면, 내가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할까 숙고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관되게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당신이건 다른 누구 건 그 일은 해도 괜찮은 일 이 아니다. 그렇다면 황금률에 대한 칸트의 재해석은 바로 이것이다. 첫째, 도덕적 올바름은 일관성이라는 생각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어떤 행동 방침을 일관되게 채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규칙이다. 둘째, 일관성은 본질적으로 공평성이라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일관되게 채택된 규칙은 모든 사람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채택한 것이라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만약 어떤 규칙이 내가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모든 사람이 하더라도 괜찮은 것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공평성이 수행하는 역할은 칸트가 내놓은 정언명령의 대안적인 공식 중 하나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공식은 근본 적으로는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칸트는 그것을 다른 이름, 즉 실천명령 practical imperative으로 부른다. “너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나 항상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 이것은 무슨 뜻일까?
7장 인디펜던스데이 에일리언 :: 도덕의 범위 269
즉 공리주의에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낳는 결과에 의해서, 그리고 오로지 그것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없다. 반면에 칸트는 의무론자였다. 즉,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의 배후에 있는 격률, 즉 그 행위가 수행된 동기 또는 의도의 함수로서 결정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없다는 뜻”라는 속담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 공리주의자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물론 칸트는 이것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안겠지만.
칸트의 도덕 이론과 공리주의자의 도덕 이론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 모두 도덕 추론에서 일관성과 공평성 개념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다만 공리주의자들은 공평성에 해당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소 다르게 이해할 뿐이다.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공리주의는 쾌락주의 hedonism라고 알려진 견해에서 가져온 가정과 더불어 출발한다. 즉 행복이 궁극적인 선 good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이 가정을 수용할까? 기본적인 발상은, 행복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 자체로 우리가 추구하는 유일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다른 모든 것, 가령 돈, 고급 자동차, 대저택, 친구 등등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원하는 이유는 행복이 우리가 가진 그 이상의 더 큰 목적이나 목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274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우리는 행복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그 자체로 행복이라서 행복을 원한다. 그래서 쾌락주의자들은 행복이 궁극적인 선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쾌락주의자들에 따르면 행복은 본래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오직 도구적 가치만을 지닌다. 만일 그것들이 가치를 지닌다면, 그 이유는 단지 그것들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뿐이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뿌리를 둔 견해인 쾌락주의의 기본 원리다.
이런 쾌락주의의 발상에 공리주의자들은 사회적 차원을 추가한다. 실제로 공리주의는 종종 일종의 사회적 쾌락주의로 칭해지곤 한다. 행복이 궁극적인 선이자 본래적인 가치를 지닌 유 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행복은 그야말로 으뜸으로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이 누구의 행복이며, 그런 행복이 언제 생기는지 등과 같은 문제는 부차적인 중요성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서 최대한 많은 행복을 산출하거나 증진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목표가 되어야 하며, 행복을 얻는 것이 누구이며 언제 그런 행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 각자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의 행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 방침은 다름이 아니라 전체 적은 로 가장 많은 양의 행복을 산출하는 방침이다.
7장 인디펜던스데이 에일리언 :: 도덕의 범위 275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은 사슬을 끊고 탈출하여 동굴 입구까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빛이 너무도 눈부셔서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횃불이 아니라 태양이 드리운 그림자들이다. 마침내 적절한 준비가 갖추어지고 나자, 당신은 바깥 세계로 모험을 떠나서 그림자가 아니라 그 그림자의 원천인 진짜 대상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언젠가는 아예 태양까지도 직접 쳐다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동굴에서 탈출하는 것은 철학자가 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당신은 차근차근 더욱더 실재적인 것들에 점점 익숙해질 수가 있다. 당신이 마침내 볼 수 있게 된 가시적 대상들이란 바로 형상에 해당하며, 그러한 가시성의 원천인 태양은 선의 형상에 해당한다.
그래서 플라톤에 따르면, 일상적인 물리적 사물들과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가 나름 지니고 있는 실재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형상의 세계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가 나름 지니고 있는 실재성이 그것을 드리운 원천으로부터 파생되었듯이 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물리적인 세계는 오로지 그것이 형상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 정도로만 실재한다. 형상의 세계의 실재성이 으뜸이다. 물리적인 사물들의 실재성은 그것들이 유관한 형상을 어느 정도 닮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유관한 형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한, 그것들은 덜 완벽해질 뿐 아니라 덜 실재적이 되기도 한다.
8장 스타워즈:: 선과 악 323
은하계를 사악한 폭군의 노예 신세로 전락시키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당신을 심판할 자, 누구란 말 인가? 이런 충동을 내면에 억누르는 것은 결국에는 건강을 잃고 억압된 상태가 되고 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너 자신을 표현하라. 니체가 이런 전략에 따로 이름을 붙이 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히피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히피들이 변태처럼 은하계 정복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만사를 마음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둔다는 통념 때문에 붙여본 이름이다.
니체라면 이런 전략도 싫어했을 것이다. 그 전략을 채택할 경우에, 기독교적 전략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야기하는 해로운 결과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전략 또한 나름의 약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개선할 황금 같은 기회를 잃는다는 점이다. 지배하고 파괴하고 정복하려는 충동이 제공하는 모든 에너지와 힘이 사라져 버린다. 그 에너지는 정확히 은하계를 지배하고 파괴하고 정복하는 일에 사용된다. 그건 확실히 재미나긴 하겠지만, 유익한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니체의 견해에 따르면 그렇다. 기독교식의 억압 전략은 당신을 이전보다 더 나빠지게 만드는 반면, 히피의 전략도 당신을 이전보다 더 낫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견해에 따르면, 위대성은 당신의 가장 강한 욕망과 충동을 억압하는 것으로도,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으로도 성취되지 않는다.
332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오히려 위대성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바로 승화다. 그 기본적인 발상은, 강한 충동과 욕망은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최소한 니체의 견해에 따르면 더욱 가치 있는 충동과 욕망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의 궁극적인 외적 표출은 그 근원적인 힘과 권능을 제공하는 충동이나 욕망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다스 베이더가 가진 다양한 어둠의 충동과 욕망은 무한정한 횟수로 변형될 수 있다. 위대성에 이르는 열쇠는 그런 욕망을 당신의 의지에 따라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원래의 <스타워즈> 3부작에서 다스 베이더는 욕망의 주인이라기보다 그것의 포로로서, 그저 자신의 충동에 휩쓸린 존재일 뿐이다. 다스 베이더뿐 아니라 나머지 우리 모두에게도, 위대성이란 (이것이 핵심인데) 우리가 가진 충동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충동을 근절하는 대신에, 또한 그것을 저 좋은 대로 내버려 두는 대신에, 그것을 다른 어떤 더 가치 있는 충동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다스 베이더는 반란군의 행성을 파괴해 그들의 폭동을 분쇄하려는 욕망을 거두어들이고, 그 욕망을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하거나 그쪽으로 이행해 승화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차분히 집 안에 머물면서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충동이 지닌 힘은 그 새로운 활동으로 방향 전환되고, 만약 그런 승화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다스 베이더는 새로 선택한...
8장 스타워즈:: 선과 악 333
니체는 위버멘쉬 übermensch, 즉 초인超人이라 칭한다. 초인은 기본적으로 고도로 승화된 개자식이다.
우리 대부분은 희망컨대 행성을 파괴하고 지배하고 정복하 고픈 진지한 욕망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욕망은 대부분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유형의 것이라기보다 주로 적나라한 쾌락적 유형의 것들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똑같은 논지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당신은 자신의 본능적 에너지를 뚝뚝 흘리면서 최근에 성적으로 꽂힌 대상을 찾아가려고 방향을 돌리는 대신에, 그런 충동을 거둬들여 승화할 수 있다. 완전히 더 고귀한 그 무엇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과 정, 즉 승화와 재승화의 지속적인 과정 속에 위대성의 유일하고 진정한 가능성이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체에게는 똑같은 종류의 논지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문화에도 적용된다. 하나의 문화로서 그리스인들이 너무나 어두웠던 것은 사실이다. 즉 그들은 어두운 면이 지닌 힘을 인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이룬 위대성의 궁극적인 원 천이다. “한 시대가, 한 민족이, 한 개인이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 열정이 더 크고 더 엄청날수록, 그들의 문화는 더 높이 우뚝 서게 된다. 그런 것들을 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 Götzen-Dämmerung
8장 스타워즈:: 선과 악 335
탈바꿈시키는 일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일은 균형 잡힌 방식으로 수행할 필요성이 있다. 허가가 아니라 금지가 미학적으로 즐거운 인생을 사는 열쇠다. 다스 베이더는 니체의 이런 요구 사항들에 미치지 못한다.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어두운 면을 건드린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초인이 되는데 필수적인 승화의 요구 수준을 성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정복하고 통제하고 파괴하고픈 충동은 전부 다 꽤나 원초적인 것이다. 베이더 경은 그런 원초적 충동을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으로 승화하려 노력하기보다, 단지 그것을 표출하고 그것에 따라 행위하는 쪽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 결과는 초인이 아니라 균형 감각을 잃은 과대망상증 환자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내면의 포스는 강했다. 그의 어두운 면 역시 강했고, 그 점 때문에 다스 베이더는 잠재적 위대성을 지닌 자가 되었다. 기본적인 충동이 그리 강하지 않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나약하거나 빈약해져 있다면, 당신은 초인이 될 수 있는 능력마저도 갖지 못한다. 그런데 그 기본 충동은 틀림없이 아나킨 스카이워커에게 매우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스 베이더로 변신한 것은 대체로 이 어두운 충동과 욕망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끔 내버려 두는 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결코 니체의 초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승화, 즉 기본적인 충동을 점진적으로 더 높은 차원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변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8장 스타워즈:: 선과 악 339
생각하는 성차별주의자는 자신이 사실로 여기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에 따라 여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우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적인 믿음이 아니라 도덕적인 믿음이 다. 환경 파괴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사우론보다 몇 수 위인 다국적 기업의 CEO가 단지 세계나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 기 회사가 마음대로 착취해도 되는 자원들의 집합이라는 것만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사실적 믿음들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착취가 자신의 회사가 행동하는 합당한 방 식이라고도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적인 믿음이 아니라 도덕적인 믿음이다.
사람들이나 문화 사이에 생겨나는 대개의 흥미로운 도덕적 논쟁에서 사실적 믿음과 도덕적 믿음은 매우 단단히 얽혀 있어서 그것들을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도덕 가치로부터 사실적 믿음을 구별하고자 하는 도덕 객관주의자의 전략은 애당초에 가망이 없는 일이다. 이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우리가 도덕적인 요소에서 사실적인 요소를 절대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요점은 결정적인 시점에서 그렇게 분리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문화 사이의 도덕적 논쟁을 심판해야 하는 결정적인 시점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러한 경우들에서는 사실적인 요소가 도덕적인 요소와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9장 반지의 제왕 :: 도덕 상대주의의 문제 375
인식적 책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흥미로운 대부분의 도덕적 논쟁의 경우에, 도덕적 가치는 사실적 믿음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논쟁들의 맥락 속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요소와 사실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분리할 수가 없다. 나는 도덕 불일치를 설명하기 위한 도덕 객관주의자의 전략을 비판하기 위한 논증으로서 이것을 이용했다. 그런데 결국 이는 우리가 도덕 가치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큼의 객관성을 짜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도덕적 논쟁의 경우에 우리가 사실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를 분리할 수 없다고 인정해 보자. 좋다! 이제 우리는 사실적 믿음들을 공격하거나 옹호함으로써 도덕적 논쟁의 해결을 시도할 수 있다. 사실적 믿음을 공격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도덕적 믿음을 공격하거나 옹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귀결이 낳은 한 가지 함축이다.
세상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을까? 문화들 사이에 깊은 도덕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불일치가 존재할까? 기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해서 정말로, 정말로 멍청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정 말로 멍청한 믿음들은 심각한 도덕적 귀결들을 불러올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376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멍청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는 여기서 발걸음을 정말로 조심히 내 디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눈 깜빡할 사이 순식간에 파시스트 악당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쉽사리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추정컨대, 우리 중 그 누구도 파시스트 악당이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이 책을 구입한 일반적인 독자라면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표현의 자유가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의 자유가 없다면 표현의 자유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허튼소리라도 말할 수 있으려면, 어쨌든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약 이 같은 소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19세기 영국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 후손이다. 내가 그렇다. 유행에는 뒤떨어졌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자유론》이 지금까지 쓰인 최고의 정치철학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허튼소리라도 일단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가끔은, 정말 가끔은, 소 뒷걸음치다 쥐 잡듯이, 일이 제대로 터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쩌다 새롭고 흥미로운 어떤 것, 심지어는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을 생각해 내기 때문이다. 달콤한 꿀을 맛보기 위해서는 악취 나는 진창을 기꺼이 건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의 자유에 입각한 표현의 자유라는 밀의 자유주의가 이상적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밀의 이론에는 단지 한 가지 결함이 있을 뿐이다. 그 이론은 참이 아니다.
9장 반지의 제왕 :: 도덕 상대주의의 문제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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