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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열아홉 번째 책 : 해변의 카프카(하) - 무라카미 하루키

by 마파람94 2025. 4. 18.

소설 속에 엄청난 표현이 있다기 보다 지극히 평범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각인시켜줍니다. 작가의 놀라운 글쓰기 힘이 전해집니다.

열다섯의 카프카 군, 나카타 노인, 도서관의 해변을 그린 그림, 조니워크, 샌들스 노인, 입구의 돌, 숲속의 사건, 다무라 도서관, 사에키의 몽블랑 펜, 산속 별장, 두 병사, 미지의 마을 등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 강하게 인식되는 글들
- 확실히 그려지는 등장인물
-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 흐름
- 여전히 등장하는 자동차들

이번 하권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호시노 청년이 운전하는 파밀리아, 사에키의 회색 폭스바겐, 토요타 러쎌과 수프라, 오시마의 형이 몰고 나타난 사륜구동 닷썬이 등장합니다. - 저는 왜 하루키가 표현한 차를 굳이 인터넷으로 찾아보는지 모르겠네요.

호시노 청년이 듣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를 그의 비슷한 입장에서 들어봅니다. 멜로디가 소설속 등장인물과 겹쳐집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소나타 4악장을 저만의 주크 박스에 담습니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어김없이 음악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습니다.

이번 소설을 통해 저 스스로의 열다섯 시절 성장한 기억들을 더듬어 떠올려 봅니다. 어렵게 처한 상황도 있었고, 험한것(?)도 만났고, 입구의 돌을 누군가 손 봐줬을 것이라고도 상상해봅니다. 그 때문에 성장 할 수 있었고 세계의 일부가 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사에키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옵니다.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어. 너만 기억해 주면 된다고...'




마음이 황폐해져서 마구 날뛰던 고교 시절,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면 언제나 할아버지가 데리러 와주었다. 경찰관에게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못된 짓을 못하게 하겠다는 각서 같은 것을 쓰고 풀려나게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꼭 식당에 들러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그럴 때 할아버지는 설교 비슷한 얘기는 절대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를 위해 경찰서를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난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처지에 불량배가 된 셋째 아들까지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그는 때때로 생각한다. 할아버지만은 적어도 그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고, 지켜봐 주었다.

그런데도 그때는 할아버지한테 감사해 본 일이 없었다. 감사할 줄도 몰랐으며, 그보다도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문제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자위대에 들어간지 얼마 후에, 할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는 망령이 들어서 그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는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호시노 청년이 이튿날 아침 여덟 시에 눈을 떴을 때, 나카타 상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커다랗게 코 고는 소리도, 규칙적인 리듬도 어젯밤과 똑같았다. 청년은 아래 층으로 내려가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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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말이 맞아” 하고 청년은 말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나카타 상은 곧장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동 호시노 상은 유카타(원래 목욕 전후에 입는 옷이었으나 이제는 주로 남녀 공용의 가정복으로 입는다-역주) 차림으로 다다미에 엎드려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별로 대단한 뉴스는 없었다. 나카노 에서 유명한 조각가가 칼에 찔려 살해당한 사건의 수사는 아직 진전이 없었다. 목격자도 없고, 유류품도 단서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경찰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행방불명된 열다섯 살짜리 아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저런 저런, 또 열다섯 살인가!” 하고 호시노 상은 생각했다. 어째서 최근에는 이렇게 열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흉악 범죄를 일으키는 것일까? 그도 열다섯 살 때 주차되어 있던 오토바이를 훔쳐 면허증도 없이 타고 돌아다녔으니까 남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 쿵 말할 자격은 없다. 물론 남의 오토바이를 슬쩍하는 것과 아버지를 찔러 죽이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아버지를 어쩌다가 찔러 죽이지 않을 수 있었던게 오히려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시도 때도 없이 얻어맞았으니까.

뉴스가 끝났을 때, 나카타 상이 마침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어, 호시노 상,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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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두 허리뼈가 문제였습니다" 하고 나카타 상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아팠다구" 하고 말하고 호시노 상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도쿠시마 역에서 특급 열차를 타고 다카마쓰로 향했다. 숙박료도, 전차 요금도 호시노 청년이 지불했다. 나카타 상은 자기가 내겠다고 우겼지만, 청년은 듣지 않았다.

"우선 내가 내고, 나중에 정산하면 되잖아. 사내대장부가 돈 몇 푼 갖고 쩨쩨하게 구는건 안 좋아한다구."

"네. 나카타는 돈 문제는 잘 모르니까, 호시노 상에게 맡기겠습 니다" 하고 나카타 상이 말했다.

"아저씨가 지압해 준 덕분에 나는 훨씬 몸이 편해졌거든. 조금쯤은 보답을 하게 해달라구. 이렇게 개운한 건 참 오래간만이야. 어쩐지 새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건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카타는 잘 모릅니다만, 아무튼 뼈는 중요한 것입니다.”

"지압인지 정체整體(지압이나 마사지에 의해서 등뼈를 바르게 하거나 몸의 컨디션을 좋게 함-역주)인지 카이로 뭐인지, 호칭은 나도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아저씨는 이런 방면에 상당히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어디다 간판 하나 걸고 지압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건 내가 보증해. 내 운전사 동료들만 소개해도 한 재산 모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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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스무 살이 될까 말까하는 나이에 누군가 다른 인간으로 오인 되어 의미 없이 살해당한―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벌써 삼십 년쯤 전의 일이라구―그 불쌍한 소년을 질투하고 있어. 숨이 막힐 만큼 격렬하 게. 네가 누군가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다니, 생전 처음 있는 일이지. 넌 질투라는 것이 어떤 건지, 이제 이해하게 될 거야. 그것은 들판의 불길처럼 네 마음을 불태우지.

너는 태어나서 지금껏 누군가를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하지만 너는 지금 그 소년을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고 있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 소년을 대신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설사 스무살에 고문당하고 쇠파이프에 맞아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어도 상관없지. 그래도 좋으니까 넌 그 소년이 되어, 열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의 젊은 날의 사에키 상을 무조건 사랑하고 싶고, 그녀로부터 무조건 사랑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안고 있어. 그녀와 마음껏 끌어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섹스 하고 싶어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고 싶어하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하나의 전설로, 영상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각인되고 싶어해. 추억 속에서 밤마다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 넌 무척 기묘한 장소에 세워져 있지. 너는 이미 다시는 찾아 볼 수 없게 된 소녀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이미 죽어버린 소년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럼에도 그 상념은 지금까지 네가 현실에서 체험 한 어떤 감정보다도 훨씬 더 생생하고 애절한 것이지. 그리고 거기에는 출구가 없어. 출구를 발견할 가능성조차 없는 거야. 너는 시간의 미궁 속에 빠져버린 거다. 가장 큰 문제는, 네가 그 시간의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그렇지?

30

“하지만 아저씨, 나는 손님이라구. 이렇게 먼 거리를 걸어가면 지쳐빠져서 성욕이고 뭐고 다 없어져버릴 거야."

“정말 한심한 녀석이군. 그러고도 자네가 남자야? 이 정도로 식어버릴 시원찮은 성욕이라면, 처음부터 없는 게 낫지."

"이런 제기랄!” 하고 청년이 말했다.

샌더스는 골목을 빠져나가 신호를 무시하고 넓은 길을 건너더니, 다시 한참 동안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리를 건너 신사 안으로 들어 갔다. 상당히 큰 신사였으나 밤도 늦고해서 경내에는 사람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샌더스는 사무실 앞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며 거 기에 앉으라고 했다. 벤치 옆에는 커다란 수은등이 있어서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청년이 시키는 대로 벤치에 앉자, 샌더스도 그 옆 에 걸터앉았다.

"나 좀 봐요, 아저씨, 설마 이 근처 어디서 하라는 건 아니겠지?" 하고 호시노 청년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 하게나. 미야지마(宮島)의 사슴도 아닌데, 신사 경내에서 집어넣기를 할 리가 없잖은가?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구!" 샌더스는 주머 니에서 은색 휴대전화를 꺼내, 세 자릿수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그래, 나야.” 상대가 나오자 샌더스는 말했다. “어디긴 어디야 늘 있는 곳이지. 신사 말이야. 옆에 호시노 짱이라는 사내가 있어. 그래……………. 그렇다니까. 평소와 마찬가지야. 알아. 알았으니까 얼른 오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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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특별히 생각나는건 없지만, 좀더 무엇인가 철학적인 걸 인용해 주지 않겠어?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사정을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또 금방 발사될 것만 같아서 그래."

“글쎄, 좀 오래된 것이지만 헤겔로 하면 어떨까?"

“뭐든 괜찮지. 좋아하는 것으로 하라구.”

“헤겔은 들먹일 만해. 조금 오래됐지만, 짠짜라짠! 오래된 건 좋은 거 아니겠어."

"좋아, 좋아.”

“나는 관련의 내용인 동시에, 관련하는 것 그 자체이기도 하 다."

"어어."

"헤겔은 '자기의식自己意識' 이라는 걸 이렇게 규정했지. 인간은 단순히 자기와 객체를 따로따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중간에서 자기와 객체를 연결해 객체에 자기를 비춤으로써, 행위적으로 자기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자기의식이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그건, 즉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하고 있는 일이라구, 호시노 짱. 나에게는 내가 자기이고 호시노 짱이 객체지만, 호시노 짱 입장에서는 물론 그 반대지. 호시노 짱이 자기이고 내가 객체. 우리는 이렇게 서로 자기와 객체를 교환하고 투사해서 자기의식을 확립하고 있는 거야. 행위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아직 잘 모르지만, 뭔가 격려를 받고 있다는 느낌은 드는군.”

"그게 중요한 점이야"라고 여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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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뭐냐, 신이라는 건 반바지를 입고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로스타임을 재고 있단 말인가?"

“참 집요하네, 아저씨도" 하고 호시노 청년이 말했다.

“일본의 신과 외국의 신은 친척 간인가, 아니면 적인가?"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이보게, 호시노 짱, 신이라는 건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라네. 특히 이 일본에서는 좋건 나쁘건 간에 신은 어디까지나 융통무애融通無碍한 것이네. 그 증거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신이었 던 천황이,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이제 신 노릇은 그만두시오' 라는 지시를 받자, '네, 이제 나는 보통 인간입니다'라고 하며, 1946년 이후부터는 신이 아니게 되었네. 일본의 신이 라는 것은 그 정도로 조정이 가능한 것일세. 싸구려 파이프를 물고 선글라스를 낀 미국 군인의 몇 마디 지시에 존재 방식이 달라져버리거든. 그만큼 초포스트모던한 존재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 고 생각하면 없는 걸세.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네.”

"알았어요."

“어쨌든 그 돌을 꺼내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나는 신도 부처도 아니지만, 다소의 연줄이 없는 것도 아니거든. 자네에게 뒤 탈이 없도록 보장하겠네."

“정말 책임지는 거죠?"

“두말하면 잔소리지” 하고 샌더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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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 무엇인가가 필요하고, 그게 우연히 이 돌이었던 것이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멋진 말을 했네. 만일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온다면, 그것은 발사되어야만 한다'고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모르겠는데요.”

“물론 모를 테지” 하고 샌더스는 말했다. "알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예의상 한번 물어본 것뿐일세.”

"고맙군요.”

“체호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세. 필연성이라는 것은 자립적인 개념일세. 그것은 논리나 모럴이나 의미성과는 다르게 구성 된 것일세. 어디까지나 역할로서의 기능이 집약된 것이지. 역할로서 필연이 아닌 것은 거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반면 역할로서 필연인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하네. 그것이 바로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방법, 좀더 유식한 말로는 희곡작법이라고 하지. 논리나 도덕이나 의미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관련성 속에서 생겨나네. 체호프는 희곡 작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너무 얘기가 어렵다구.”

“자네가 안고 있는 돌은 체호프가 말하는 ‘권총' 일세. 그것은 발사되어야만 하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중요한 돌이지. 특별한 돌이야. 그러나 거기에는 신성성 같은 것은 없다네. 그러니까 자네는 뒤탈 같은 것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일세.”

호시노 청년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 돌이 권총이란 말이야?"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일세.

115

“저, 오시마 상.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요?"

“물론” 하고 그는 말한다.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어째서 물론이죠?” 하고 나는 묻는다.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얼굴을 든다.

“멀리 있는 낡고 그리운 방?"

"맞았어” 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그리고 포크를 공중에 세운다. “물론 메타포지만.”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사에키 상이 내 방으로 찾아온다. 내가 혼자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려니까, 폴크스바겐의 엔진 소리가 주차장에서 들려오더니 멈춘다.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발의 고무 바닥 소리가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지른다. 이윽고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133

문을 열자 거기 사에키 상이 서 있다. 오늘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다. 줄무늬 면 셔츠에, 얇은 천의 청바지, 흰 운동화, 그녀가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리운 방” 하고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앞에 서 서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운 그림."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장소가 이 근처입니까?" 하고 나는 묻는다.

"이 그림 좋아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그린 거지요?"

“그해 여름에 고무라 가에 묵고 있던 젊은 화가야. 별로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어. 적어도 그 당시에는 말이야. 그래서 이름도 잊어 버렸지만 좋은 사람이었고, 이 그림은 아주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해. 여기에서는 뭔가 힘이 느껴져. 그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줄곧 옆에서 지켜보았지. 옆에서 농담 삼아 여러 가지 주문을 했어. 나는 그 화가하고 사이가 좋았거든. 까마득히 먼 옛날의 어느 여름의 일이야.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지”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그림 속에 있는 소년도 열두 살이었어."

"장소는 이 근처의 해안 같은데요?"

“이리 따라와 봐” 하고 그녀는 말한다. “산책하러 가자. 거기 데 려가 줄게."

나는 그녀와 함께 해안까지 걸어간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가 밤의 모래사장을 걷는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반쯤 나온 달이 파도를 비추고 있다.

134

강함을 벽 삼아 그걸로 자기를 둘러쌀 수는 없지. 강함은 더욱 강한 것에 의해 깨지는 법이거든. 원리적으로.”

“강함 자체가 모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사에키 상은 미소 짓는다. “다무라 군은 무척 이해가 빠르군.”

나는 말한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 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ㅡ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

“그것은 아마 손에 넣기 제일 어려운 종류의 강함일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미소가 한층 깊어진다. “다무라 군은 틀림없이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든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고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알고 있어야 하는데도 모르는 것이요. 예를 들어, 저는 사에키 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 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어. 즉 다무라 군이 알아야 할 것은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

“가설에 대해서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까?"

171

주로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실체가 없는 것 같았다. 있는 것은 단지 의미 없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까지 드래곤스를 열심히 응원해 왔다. 그러나 나한테 드래곤스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드래곤스가 자이언츠에 승리하면, 나라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향상된단 말인가? 향상될 리 없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마치 자기의 분신처럼 지금까지 열심히 응원해 온 걸까?

나카타 상은 자신이 텅 비었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카타 상은 어렸을 때 당한 사고 때문에 텅비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고도 당하지 않았다. 만일 나카타 상이 텅 빈 거라면, 나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텅 빈 것 이하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카타 상에게는 적어도, 일부러 시코쿠 까지 따라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무엇인가가 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사실은 잘 모르지만.

청년은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저희 가게 커피 맛이 괜찮으신지요?” 하고 백발의 주인이 와서 물었다(물론 청년은 알리 없지만 그는 전에 문부성 관리였는데, 퇴직 후 고향인 다카마쓰 시로 돌아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찻집을 시작했다).

“네, 굉장히 맛있네요. 향이 정말 좋아요."


185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말려들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된 것을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

뭐라고 할까, 자신이 올바른 장소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 자신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문제가 나카타 상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좋게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약간 과장일지 모르지 만,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석가와 함께 있으면 나는 이렇게 기분이 좋거든, 하는 식으로, 교리라든가 진리 같은 어려운 문제를 말하기 이전에, 그런 기분 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부처님의 제자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제자들 가운데 명하茗荷라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나쁘고 아둔해서, 간단한 경전의 문구도 하나 만족스럽게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한테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석가가 그에게 말했다. “명하야,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경전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앞으로는 현관 토방에 앉아서, 여기 있는 신발을 닦도록 해라.” 명하는 순진했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석가. 네 엉덩이나 핥아라” 하고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로부터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석가가 시킨 대로 다른 사람의 신 발을 부지런히 닦았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석가 제 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던 걸로 호시노 청년은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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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필요하군요.”

“그렇습니다.”

“모두가 위인이나 천재라면, 이 세상이 정말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누군가가 여기저기 살피면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처리해야 하니까요."

“맞는 말입니다. 모두가 위인이나 천재라면 이 세상은 엉망이 되겠지요."

"꽤 괜찮은 곡이네요."

“훌륭한 곡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트리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하고 기품이 있는 작품입니다. 베토벤은 마흔 살 때 이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 곡을 끝으로 피아노 트리오에는 두 번 다시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 작품을, 이 양식의 음악으로는 정점에 이른 것이라고 느꼈 던 것이겠지요."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어떤 일이든 정점은 필요하니까요"

하고 호시노 청년은 말했다.

“또 오십시오.”

“네, 다시 오지요.”

방으로 돌아와 보니 예상대로 나카타 상은 계속 자고 있었다. 두 번째 겪는 일이라서 청년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고 싶은 만큼 자게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189

물론 그 경찰은 노인을 떠올렸고 자기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상대방의 이름도 주소도 묻지 않았던 거야, 그런 일이 상사에게 알려지면 난리가 날게 뻔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어.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그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이 밝혀지고 말았지. 그 경찰은 물론 징계 처분을 받았어. 불쌍하게도 평생 출세하기는 어려울 거야.”

오시마 상은 속력을 내서, 앞에 달리고 있던 흰색 도요타 터셀을 추월한 후 재빨리 원래의 차선으로 돌아온다.

"경찰은 전력을 다해 그 노인의 신원을 밝혀냈지. 이력은 잘 모르지만 지적 장애가 있는 것 같아. 그다지 심한 장애는 아니지만, 약간 빗나가 있나 봐. 친척의 도움과 생활보조금으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어디론가 떠나고 지금은 그곳에 없다지. 경찰이 행적을 뒤쫓은 결과 아무래도 히치하이킹을 해서 시코쿠로 향한 것 같다는 거야. 장거리 버스 운전사가 고베에서 그런 노인을 태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징 있는 말투로 묘한 말을 해서 기억에 남았던 거지.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하고 함께 있었다는 제보도 들어왔어. 그리고 두 사람이 도쿠시마 역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는 것과 그들이 숙박한 도쿠시마의 여 관도 알아냈어. 여관 종업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전차로 다카마쓰에 온 것 같아. 그래서 노인의 향방과 너의 현재 머물고 있는 주소가 딱 들어맞게 된 거지. 너도 그 노인도 나카노구 노가타 에서 곧장 다카마쓰로 향했거든.

200

“미묘한 장소?"

“사에키 상은………………” 하고 오시마 상은 말하고 나서 그 뒷말을 찾는다. “쉽게 말하면,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거야. 나는 그걸 알 수 있거든. 나는 요즘 줄곧 그런 기색을 느껴왔어.”

나는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고 오시마 상 옆얼굴을 본다. 그는 똑 바로 앞을 보고 운전하고 있다. 고치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막 들어 선 참이다. 자동차는 신기하게도 규정 속도로 주행 차선을 달리고 있다. 검은 도요타 수프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우리가 타고 있는 로드스타를 추월해 간다.

“죽어가고 있다니요………?” 하고 나는 묻는다. “그건 불치의 병 같은 걸 말하나요? 예를 들어, 암이나 백혈병 같은?"

오시마 상은 고개를 흔든다.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도 없어. 어쩌면 그런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살려는 의지ㅡ 그런 것과 관계되는 게 아닐까?"

“살려는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지. 계속해서 살아나가려는 의지를 잃고 있어.”

“사에키 상이 자살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그녀는 그 냥 솔직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향해 가고 있어. 아니면, 죽음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거나.”

205

내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돌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오시마 상은 여전히 잠자코 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나는 묻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돼” 하고 그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전혀 아무것도 하지 말라구요?"

오시마 상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이렇게 너를 산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겠어?"

“하지만 산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죠?"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돼” 하고 그는 말한다. “나는 늘 그렇게 하고 있어."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시마 상은 손을 뻗어 내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예언 탓도 아니고, 저주 탓도 아니지. DNA 탓도 아니고, 부조리 탓도 아니고, 구조주의 탓도 아니고, 제3차 산업혁명 탓도 아니야.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影繪]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바람은 불지. 미친 듯이 불어대는 강한 바람이 있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어. 그러나 모든 바람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져. 바람은 물체가 아니야.

그것은 이동하는 공기의 총칭에 지나지 않아. 너는 귀를 기울이고...

207

그러나 군대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목적은 깊은 숲 속을 완전무장한 채 행군하고, 전투 훈련을 하 는 데 있었을 테니까.”

그는 보온병에서 내가 끓여 부은 커피를 컵에 따라서, 설탕을 조 금 넣더니 맛있게 마신다.

“군대로부터 요청이 있어서 우리 증조 할아버지가 산을 빌려주었대. 마음대로 쓰십시오 하고, 어차피 쓰지 않는 산이니까. 부대는 우리들이 차를 타고 온 도로를 걸어서 왔어. 그리고 숲 속으로 들어 갔지. 그런데 며칠간의 훈련이 끝나고 점호를 해보니까, 병사 두 명 이 행방불명되었더래. 그들은 숲 속에서 한창 훈련을 하던 중에, 완전무장을 한 채 사라져버린 거야. 둘 다 갓 징병당한 신병이었어. 물론 군대는 대대적으로 수색을 실시했지.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군.”

오시마 상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숲에서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탈주를 했는지, 그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어. 그러나 이 부근의 산은 굉장히 깊고, 숲 속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언제나 이웃해서 또 다른 세계가 있지. 넌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 주의하기만 하면 거기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도 있고.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버리면 두 번 다시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돼.

237

그건 마치 되도록 사람들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게 디자인한 자동차 같았다. 그 차를 본 후 돌아서고 나면, 어떤 형태의 차인지 거의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패밀리아를 운전하여 맨션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다카마쓰 시내 지도와 시코쿠 도로 지도를 샀다. 근처에 CD 가게가 보여서, 내친김에 들어가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를 찾아보았다. 도로변 CD 가게의 클래식 매장은 별로 크지 않았고, <대공 트리오>는 염가판 한 장밖에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백만 달러 트리오의 연주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청년은 천 엔을 주고 그 CD를 샀다.

맨션으로 돌아와 보니 나카타 상이 주방에서 익숙한 솜씨로 무와 유부로 조림을 만들고 있었다. 방 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 나카타는 이것저것 요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고 나카타 상이 말했다.

“그것 마침 잘됐군. 요즘 계속 외식만 했잖아. 이제 슬슬 담백한 가정 음식이 먹고 싶었거든” 하고 청년은 말했다. “아저씨, 차는 빌렸어. 밖에 세워두었는데, 지금 당장 쓸 건가?"

"아닙니다. 내일 사용해도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돌 상하고 좀더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 그게 좋을 것 같네. 얘기를 나누는 건 중요한 일이지.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대화는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좋지.

244

문 옆에는 커다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검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무라 기념 도서관………………” 하고 청년은 읽었다. “사람도 별로 다 니지 않는 이런 조용한 곳에 도서관이 다 있네. 도서관 같아 보이지 도 않는데 말야. 보통 저택 같잖아?"

“고무라 기념 도서관?"

“맞아. 아마 고무라라는 사람을 기려서 만든 도서관일 거야. 고무라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전혀 모르지만.”

"호시노 상."

“왜?” 하고 호시노 청년은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저곳입니다.”

“저곳이라니, 뭐가?"

“나카타가 지금까지 계속 찾고 있던 곳이 바로 저 장소입니다.”

호시노 청년은 지도에서 얼굴을 들고 나카타 상의 눈을 보았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도서관 문을 보았다. 간판의 글자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었다. 말보로 담뱃갑을 꺼내 흔들어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인 뒤 열려 있는 차창 밖으로 내뿜었다.

“정말로?"

“네. 틀림없습니다.”

“우연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군” 하고 청년은 말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고 나카타 상도 맞장구를 쳤다.

261

그러나 베토벤은 그런 모욕적인 대접을 받으면 크게 화를 내고, 물건을 벽에다 집어 던지고, 귀족과 대등하게 같은 식탁에 앉기를 주장했다. 베토벤은 성미가 급해서(거의 불같은 성격이었다) 일단 화가 나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숨기려고도 안 했다. 귀가 안 들리게 되자, 그런 기질은 더욱 강해졌다. 그의 음악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비약적으로 폭이 넓어지고, 그와 동시에 조밀하게 내부로 집중되어 갔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었던 건 베토벤이나 되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범한 작업은 그의 현실의 인생을 계속 파괴해 갔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격무를 견뎌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위인이란 것도 무척 힘든 것이군" 하고 호시노 청년은 도중에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며 깊이 감탄했다. 학교 음악실에 동으로 된 베토벤의 흉상이 있었기 때문에, 쓴 맛 나는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그 얼굴만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도 고난에 찬 인생을 보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베토벤이었으니 그렇게 신경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구나,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나는 도저히 위인 같은 건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283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면, 커다란 목재 테두리가 달린 구식 컬러 텔레비전이 이 방에 있는 단 하나의 가구다. 제조된 지 십오년 이나 이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리모컨식이 아니다. 누가 내버린 것을 주워 온 것 같다(방 안에 있는 전기 기구는 모두 가전제품 폐기 장에서 들고 온 것으로 보인다. 불결하지는 않고 아직 쓸 만하지만, 모두 색깔이 바래고 유행이 지난 것이다). 스위치를 켜보니 텔레비 전에서 옛날 영화를 하고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초등학교 때 학교 선생님의 인솔하에 영화관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본 몇 편 안 되는 영화 가운데 하나다(영화관에 데려가 줄 만한 어른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미가 까다롭고 규 칙밖에 모르는 아버지 트랩 대령이 비엔나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 가정교사인 마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소풍을 간다. 그리고 풀밭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순진무구한 노래를 몇 가지 부른다. 유명한 장면이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빠져들듯이 그 영화를 본다.

364


만일 내 소년 시절에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주었다면, 내 인생은 좀더 달라졌을 것이다(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내 앞에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문득 현실로 돌아온다. 왜 나는 지금 이런 곳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진지하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사운드 오브 뮤직>일까? 여기 사람들은 위성방송 안테나를 써서 어딘가의 방송국 전파를 받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장소에서 비디오테이프 같은 것을 틀고 있는 걸까? 아마 테이프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채널을 바꿔도 <사운드 오브 뮤직>밖에 안 나오기 때문이다. 한 채널 외에는 모두 샌드스톰(모래 폭풍)이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 꺼끌꺼끌한 하얀 화상과 무질서한 잡음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매서운 모래 폭풍을 연상시킨다.

<에델바이스>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나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끈다. 원래의 고요함이 방에 되돌아온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서 커다란 병에 든 우유를 꺼내 마신다. 진하고 신선한 우유 다. 편의점에서 사서 마시는 우유하고는 맛이 많이 다르다. 그 우유 를 글라스에 따라서 몇 잔 잇따라 마시고 있는 동안에, 나는 불현듯 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어른들은 이해해 주지 않는다〉를 떠올린다. 영화에서 앙투안이란 소년이 가출을 했는데, 배가 고파서 이른 아침 어느 집에 갓 배달된 우유를 훔쳐 살금살금 도망치면서 마시는 장면이 있었다. 커다란 우유 병이어서 그것을 모두 마시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슬프고도 애절한 장면이다.

365

“저, 다무라 군,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어?"

“나에게 사에키 상을 용서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녀는 내 어깨 쪽을 바라보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분노와 공포가 너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사에키 상, 만일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용서 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한다.

어머니, 하고 너는 말한다. 나는 어머니를 용서하겠습니다. 그러자 네 마음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무엇인가가 소리를 낸다.

사에키 상은 잠자코 포옹을 푼다. 그리고 머리칼을 고정하고 있던 핀을 빼서는 망설이지 않고 날카로운 핀 끝으로 왼팔 안쪽을 찌른다. 아주 세게.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 부근의 정맥을 꽉 누른다. 이윽고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첫 방울이 바닥에 떨어지 면서 의외일 정도로 큰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팔을 나한테 내민다. 다시 한 방울, 피가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몸을 구부려 작은 상처에 입술을 갖다 댄다. 내 혀가 그녀의 피를 핥는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한다. 나는 빨아들인 피를 입에 머금고 천천히 마신다. 나는 목구멍 안쪽으로 그녀의 피를 넘긴다. 그것은 내 마음의 메마른 살갗에 아주 조용히 빨려 들어간 다. 내가 얼마나 그 피를 원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내 마 음은 무척이나 먼 세계에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몸은 여기에 서 있다. 마치 생령처럼. 나는 이대로 그녀의 모든 피를 빨아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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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9장 |

눈을 뜨면 넌 새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튿날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 나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듣고 집 밖으로 나간다. 이윽고 차체가 높은, 크고 탄탄한 타이어를 단 소형 트럭이 모습을 나타낸다. 사륜구동의 '닷선'으로, 적어도 최근 반년 동안은 세차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짐칸에는 잘 손질된 파도타기용 서프보드 두 개가 실려 있다. 트 럭은 통나무집 앞에서 멈춰 선다. 엔진이 멋자, 주위에 다시 정적이 돌아오고, 문이 열리더니 키가 큰 사나이가 내려온다. 헐렁한 흰색 티셔츠, 카키색 반바지 차림에 뒤축이 닳은 운동화를 신고 있다. 기름 얼룩이 밴 티셔츠에는 '두려워 말라'는 뜻인 듯 'NO FEAR'라는 영문자가 보인다. 대충 서른 살쯤 되어 보인다. 어깨 폭이 넓고, 온통 새카맣게 햇볕에 그을리고, 얼굴에는 사흘쯤 면도를 안 한 듯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 머리칼도 귀를 가릴 정도로 길다. 고치에서 서핑숍을 하고 있다는, 오시마 상의 형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436

“서핑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했었어. 그냥 취미 삼아서 말이야. 진지하게 하게 된 것은 육 년쯤 전이구. 전에는 도쿄의 커다란 광고 대리점에 근무했는데 일이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여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서핑을 하기 시작했지. 저축해 둔 돈을 몽땅 털고, 부모님한테 돈을 빌려서 서핑숍을 차렸어. 혼자 몸이니까 그런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가 있거든."

"시코쿠에 돌아오고 싶었습니까?"

"그렇기도 했지” 하고 그는 말한다. "바로 가까이에 바다는 있는 데 산이 없으면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거든. 인간이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태어나서 자란 장소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 사고방식이나 느낌은 아마도 지형과 온도와 풍향과 연동하고 있는 것 같아. 넌 고향이 어디지?"

"도쿄입니다. 나카노 구 노가타입니다."

"나카노 구에 돌아가고 싶은가?"

나는 고개를 흔든다. "아뇨" 하고 나는 말한다.

"어째서?"

"돌아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군" 하고 그는 말한다.

"지형이나 풍향과도 그다지 연동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나는 말한다.

"그래?" 하고 그는 말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문다.

444

다음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본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점점 들더라구요."

“도망쳐 다녀보았자 아무데도 갈 수 없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예요" 하고 나는 말한다.

"너는 많이 성장한 것 같군” 하고 그는 말한다.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오시마 상은 연필의 지우개 부분으로 관자놀이를 몇 번인가 가볍 게 누른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으나 그는 무시한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는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 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나는 오시마 상이 손에 쥐고 있는 연필을 보고 있다. 그것은 나를 무척 마음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좀더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으로 있어야 한다.

449

나는 늘 사에키 상을 위해 커피를 갖고 갔다.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는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 언제 나 한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에키 상은 여기서 무엇을 쓰고 있었던 걸까요?" 하고 나는 묻 는다.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 나는 몰라" 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여러가지 비밀을 삼켜버린 채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지."

여러 가지의 가설을 삼켜버린 채,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덧붙인다.

창은 열려 있고 6월의 바람이 흰 레이스 커튼 자락을 조용히 흔 들고 있다. 어렴풋이 바다 냄새가 난다. 해변의 모래 감촉이 손바닥 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책상 앞을 떠나 오시마 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는다. 오시마 상의 날씬한 몸은 무엇인가 무척이나 그리운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오시마 상은 내 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는다.

"세계는 메타포야, 다무라 카프카 군” 하고 오시마 상은 내 귓가에 대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나 너에게나, 이 도서관만은 아무런 메타포도 아니야. 이 도서관은 어디까지나 이 도서관이지. 나와 너 사이에서 그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어."

“물론이죠” 하고 나는 말한다.

“무척 견고하고, 개별적이고, 특별한 도서관이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는 없어."

452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거지?"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 준다.

“잘 가, 카프카 군” 하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슬슬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나랑 얘기하고 싶거든 언제든 이리로 전화해도 좋아."

“잘 있어” 하고 말한 후 나는 “누나” 하고 덧붙인다.

다리를 지나고, 바다를 건너, 오카야마(岡山) 역에서 신칸선 고속 열차로 갈아탄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열차의 진동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다. 발밑에는 단단하게 포장된 그림 <해변의 카프카>가 놓여 있다. 나는 계속 발에 그 감촉을 느끼고 있다.

“다무라 군,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어" 하고 사에키 상은 말한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본다.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비중이 있는 시간이 많은 의미를 지녔던 옛날의 꿈처럼 너에게 덮쳐 온다. 너는 그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이동한다. 설사 세계의 맨 끝까지 간다고 해도, 너는 그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역시 세계의 맨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끝까지 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455

나고야를 지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두운 유리창에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도쿄를 떠날 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난다. 나는 숱한 장소에 내리는 비를 생각한다. 숲 속에 내리는 비와 바다 위에 내리는 비, 고속도로 위에 내리는 비와 도서관 지붕 위에 내리는 비, 그리 고 세계의 맨 끝에 내리는 비에 대한 생각을.

눈을 감고 전신의 힘을 빼고, 딱딱하게 굳은 근육을 푼다. 열차가 달리며 울리는 단조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거의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따뜻한 감촉을 뺨 위에 느낀다. 내 눈에서 넘쳐 나와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입가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말라간다. 걱정할 것 없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단지 한 줄기 눈물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 눈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유리창을 때리는 비의 일부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

"너는 옳은 일을 한 거야"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너는 가장 옳은 일을 했어. 다른 어느 누구도 너만큼 잘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너는 진짜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 이니까 말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한다.

“그림을 보면 알게 돼”라고 까마귀 소년은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 "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 을 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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