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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열여섯 번째 책 : 철학은 어떻게 삶의 ...-야마구치 슈

by 마파람94 2025. 3. 30.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철학 개념을 실사구시 측면에서 기술한 책입니다.'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저자의 기업 컨설팅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장에 철학을 접목하여 표현하던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성과 보상, 아이디어 개발, 정반합의 토론 방식, 데블스 에드버킷, 악의 평범성, 타인의 의견, 마태효과, 리좀 사상 등이 머리에 스칩니다.

책 갈피입니다.




Q. 내 연설에 뭔가 뜨뜻미지근한 이 반응은 뭐지?

A.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다. "로고스뿐만 아니라 파토스와 에토스도 중요하거든."

Q. 나는 지지리 운도 없지! 시대 상황도 안 좋고 회사는 이 모양이고, 도통 의욕이 안 생겨.

A. 사르트르가 말한다. "자네는 도망만 치고 앙가주망은 하지 않을 텐가?"

19세기 이후 의학, 심리학, 뇌과학에 그 역할이 넘어가기 전까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날카롭게 고찰한 이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그들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방약무인으로 행동하는 이웃을 보면 '왜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라고 고민했다. 이렇게 몸소 문제에 부딪쳐 본 철학자들이 남긴 고찰이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이 남긴 생각은 우리가 '사람'에 관련된 문제를 생각할 때 깊은 통찰력을 선사한다.

'조직'에 관한 핵심 콘셉트는 집단에 속한 인간이 보이는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조직은 여러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지지만, 단순히 개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의 합으로 조직의 행동을 예측하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단 집단이 만들어지면 그저 개개인 특성을 더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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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들은 '어떤 사회가 이상적인가'라는 문제와 마주했다. 물론 그 물음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은 아직 없다. 아니, 오히려 이 물음은 애당초 '문제 설정'에 큰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치즘, 스탈리니즘, 문화대혁명, 폴 포트, 옴진리교 등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한 운동'은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선의로 깔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 좋은 세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이상을 잃지 않은채 그러한 '이상 사회'를 꿈꾸며 운동을 벌이는 일이 독선과 기만에 빠질 위험성 또한 동시에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의 철학자가 남긴 사회에 대한 고찰이 우리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고'에 관한 핵심 콘셉트는 모든 일을 깊고 예리하게 고찰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 철학의 역사는 그 자체 로 '장대한 사고 과정의 기록'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철학의 역사는 어떤 제안 A가 그 제안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다른 제안 B에 의해 부정되고, 또다시 그 제안을 부정하는 제안 C가 등장하는 식으로 제안과 부정의 연속이다. 이때 많은 철학자는 자신이 부정하는 철학 자의 고찰에 대해 '그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라고 공격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즉, 얼핏 보면 옳다고 생각되는 사고방식에 사실은 함정이 있고 상대가 그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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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가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128건의 연구에 메타 분석meta analysis(단일 주제를 조사한 많은 연구물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종합해 고찰하는 연구 기법-옮긴이)을 실시했다. 이 실험의 결과로 그들은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든 대가를 예고하면 이미 재미를 느껴 몰입해 있는 활동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저하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에드워드 데시 교수의 연구에서는 대가를 약속하면 피험자의 성과가 저하되고, 예상 가능한 정신 측면에서의 손실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거나 또는 성과급이 기대되는 행동만을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대가를 약속받으면 높은 성과물을 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대가를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스스로 과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전적인 과제가 아니라 가장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과제를 선택하게 된다.

이들 실험 결과는 통상 비즈니스 세계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과급 정책이 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창조성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과를 유도하기 위해 제공하는 '당근'이 조직의 창조성을 높이는데 의미가 없을뿐더러 되레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대가와 학습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가령 로버트 아이젠버거 교수와 J. 캐머런처럼 대가가 자발적 동기를 저하시킨다는 경고는 대부분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예고된 대가가 자발적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분석한 데시의 논고에 관해서는 1970년대부터 지속적인 논의를 거쳐 거의 결말이 나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영학 세계에서는 아직도 대가가 개인의 창조성을 자극해 높인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나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편을 잡았던 게리 해멀 교수는 혁신에 관한 논 문과 저서에서 자주 '엄청나게 큰' 보상이 가져다주는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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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불확실한 것에 매력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
    : 대가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 (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

미국의 심리학자, 행동 심리학의 창시자로, 자유의지는 환상이며 사람의 행동 은 과거의 행동 결과에 의존한다는 강화이론을 주장했다.


'스키너 상자'를 만들어 쥐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연구한 인물이 바로 그다.

스키너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설정하고 쥐가 어떤 조건에서 손잡이를 더 많이 누르는지 실험했다.

① 고정간격 스케줄: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② 변동간격 스케줄: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불규칙적인 간 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③ 고정비율 스케줄: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

④ 변동비율 스케줄: 손잡이를 누르면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온다.

스키너의 실험에 따르면 손잡이를 누르는 횟수는 ④→③→②→① 순으로 감소한다. 이 결과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③)는 조건보다 손잡이를 누르면 불규칙하게 먹이가 나온다(④)는 조건이 쥐에게는 더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결과는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대가의 의미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아할지도 모른다. 이는 '행동 강화'에 관한 실험으로, 행위는 그 행위로 인한 대가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보다도 대가가 불확실하게 주어질 때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실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해 생각해 보면, 불확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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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1975)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평론가, 철학자.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 정권 성립 후에 파리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시카고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나치즘, 스탈리즘 등 전체주의 국가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분석하고 현대 사회의 정신적 위기를 고찰했다. 저서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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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하고 건장한 게르만의 전사 모습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상상했던 모양이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는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재판은 기가 약해 보이는 이 인물이 저지른 수많은 죄들을 낱낱이 밝혀 나갔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책에 기록했다. 책의 제목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주제가 그대로 드러나 이해하기 쉽지만, 문제는 부제다. 아렌트는 이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고 붙였다. 악의 평범성이 라니! 기묘한 부제가 아닌가? 보통 '악'은 '선'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 둘은 모두 정규분포에서 최대치와 최소치에 해당하는 양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아렌트는 여기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사용 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넘칠 정도로 많아서 시시하다는 의미이므로 정규분포의 개념을 적용시키면 최빈치最頻値 혹은 중앙치中央値를 뜻한 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렌트가 의도한 것은 우리가 흔히 '악'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 즉 악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특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대 민족에 대한 증오나 유럽 대륙에 대한 공격심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그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경위를 방청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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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일수록 인맥이 넓지 않다 : 자아실현적 인간

에이브러햄 매슬로 (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

미국의 심리학자. 인간의 욕구에는 단계가 있다는 '욕구 5단계설'로 잘 알려져 있다. 정신 병리의 이해를 목적으로 의식을 분석하는 정신 분석과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행동주의 심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세력'으로서의 인본주의 심리학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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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이해하기도 쉽고 일반인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지만, 실증 실험에서는 이 가설을 설명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아직도 학술적인 심리학 세계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개념이다. 매슬로는 이들 욕구가 단계적이라 저차원적 욕구가 만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가 생겨난다고 주장 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말을 바꾸기도 하는 등 제창자 자신도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우리 역시 성공한 사람들이 업적을 이루고 명예를 얻은 후에 섹스나 마약에 빠져든 사례들을 많이 알고 있다. 섹스를 이 테두리 안 에서 평범하게 해석하면 1단계의 생리적 욕구에 해당하므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슬로가 당초 주장한 “욕구의 단계가 순차적이고 비 가역적으로 상승해 나간다"라는 가설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그건 매슬로가 말하는 의미의 '생리적 욕구'와 다른 거지” 하고 반론할지도 모르지만, 원래 매슬로가 주장 한 욕구의 정의는 처음부터 애매한데다 시간축에서 흔들리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러한 논의에는 별 의미가 없다. 어쨌든 우리에겐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의 올바른 해석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도움을 줄지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욕구 5단계설의 개요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여기서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자아실현에 관한 매슬로의 다른 연구를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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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꺼이 생각을 바꾸는 사람들 : 인지 부조화

리언 페스팅어 (Leon Festinger, 1919~1989)

미국의 심리학자. 사회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르트 레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인지 부조화 이론과 사회적 비교이론의 제창자로 유명하다. 아이오와 대학교, 로체스터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단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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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사상과 신조, 또는 이데올로기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반론을 강하게 호소하여 설득하거나 고문을 가하지 않고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이 실제로 행한 방법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포로가 된 미군에게 '공산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다'라는 간단한 메모를 적게 하고 그 포상으로 담배나 과자 같은 아주 사소한 것을 주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미군 포로는 착착 공산주의로 돌아섰다.

이 세뇌 기법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사상이나 신조를 바꾸기 위해 주는 포상은 이를 사들이기 위한 뇌물이므로 대가가 아주 크지 않다면 효과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사후 영혼의 복종을 조건으로 현세에서 인생의 모든 쾌락을 얻는 계약을 맺는 다. 영혼의 복종은 결국 사상과 신조를 팔아넘기는 것이므로 그만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현세의 온갖 쾌락 정도의 포상이어야 적합한 것이다. 그런데 미군 포로는 사상과 신조를 바꾸는 대가로 담배나 과자밖에 받지 않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해하기 힘든 이 사태를 인지 부조화 이론으로는 설명 가능하다. 인지 부조화 이론의 틀에서 미군 포로들의 심리 변화 과정을 알아보자. 우선 자신은 미국에서 나고 자라 공산주의는 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포로가 되어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메모를 적었다. 이때 호화로운 포상이 나왔다면 포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메모를 적었다는 명분이 성립되므로 사상과 신조에 반하는 메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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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은 끝났지만 오늘은 조수가 휴가이므로 당신이 다음 참가자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실험이 매우 재미있었다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이다. 다음 피험자는 연구진이 미리 섭외해 둔 사람으로, 피험자가 지시받은 대로 거짓말 을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피험자가 자신이 참가한 작업에 대한 소감을 질문 용지에 기입하는 것으로 실험은 끝난다.

이때 제1그룹의 피험자에게는 참가의 대가로 20달러를, 제2그룹의 피험자에게는 1달러를 주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지루한 작업'이었다는 인지와 '매우 재미있었다'는 거짓말이 대립하여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이미 거짓말을 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부조화를 경감하려면 지루한 작업이었다는 인지를 바 꾸는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대가가 고액이면 부조화는 작아진다. 싫은 일이라도 대가를 위해서 했을 뿐이라는 명분이 생겨서다. 하지만 대가가 작으면 거짓말을 정당화하기가 어려워지므로 지루한 작업이었다는 인지를 바꾸려는 동기가 강해진다.

과연 결과는 페스팅어의 가설대로였다. 대가가 적었던 제2그룹 에서 작업이 즐거웠다고 답한 비율이 더 높았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타인에게 의뢰할 때 더 높은 대가를 지급해야 즐거운 마음으로 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스팅어의 인지 부조화 실험의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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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권위에의 복종

스탠리 밀그램 (Stanley Milgram, 1933~1984)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권위에의 복종에 관한 '아이히만 실험'으로 유명하다. 사회 심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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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 작성을 비롯해 검거, 구류, 이송,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많은 사람이 분담하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의 책임 소재는 애매해 지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아주 수월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저는 명부를 작성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엔 누구나 협력했지요”, “제가 어떻게 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죽이지 않았어요. 단지 이송열차를 운전했을 뿐이에요” 등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러한 체제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구성 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책임 소재가 애매하게 분단된 체계를 구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고 술회했다. 그 악마 같은 통찰력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밀그램 교수의 실 험 결과는 사람이 집단 내에서 어떤 일을 할 때야말로 그 집단이 지닌 양심이나 자제심이 가동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조직 구성원 모두가 제반 법규를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사전적, 상시적으로 통제하고 감독하는 체제-옮긴이) 위반이 속출하고 있는 오늘 날, 우리는 밀그램의 실험 결과가 시사하는 바를 더욱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밀그램 교수가 실시한 아이히만 실험은 우리에게 희망의 빛도 함께 가져다준다. 권위의 상징인 흰 가운을 입은 실험 담당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을 때 피험자 100퍼센트가 150볼트라는 상당히 낮은 단계에서 실험을 중지했다는 실험 결과를 떠올려 보자. 이 사실은 자신의 양심과 자제심을 자각시키는 아주 조그마한 지지 라도 받으면, 사람은 누구나 권위에 대한 복종을 멈추고 양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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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 악마의 대변인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의 정치 철학자·경제사상가. 정치 철학에 있어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사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 대학교 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를 제안했으나 종교적인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많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밀은 일생 아마추어 철학자였으며 전문직으로 서 '학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악마의 대변인이란 다수파를 향해 의도적으로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 '의도적'이라는 말은 원래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 다수파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이 같은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다.

악마의 대변인은 존 스튜어트 밀이 만든 용어는 아니고 원래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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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자유론』에서 처형된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현재는 위인으로 칭송받고 그들이 남긴 사상과 신조가 광범위한 분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어느 시대의 '악'은 시대를 거치며 '선'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다시 말해 어떤 아이디어의 옳고 그름은 그 시대의 엘리트가 통제하는 대로 결정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다면적인 사고를 거쳐 결정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같은 관점에서 밀은, 이 책의 곳곳에서 우리가 한창 논의하고 있는 다양성의 중요함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할 만한 거리를 남겼다.

어떤 사람의 판단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경우, 그 사람이 신뢰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대한 비판을 항상 거리낌 없이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능한 한 받아들였으며, 잘못된 부분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되짚어 보고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하기를 습관으로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제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다양한 의견을 두루 듣고 사물을 모든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외의 방법으로 진리를 얻은 현인은 없으며 지성의 특성을 보더라도 인간은 이 이외의 방법으로는 현명해질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집단의 문제 해결 능력은 동질성과 이율배반의 관계trade off에 있다.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 예일대 교수가 '피그스만 침공 사건(1961 년 4월 미국이 훈련시킨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이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 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바 남부를 공격하다 실패한 사건-옮긴이)',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 6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해 워터 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 했던정치 스 캔들-옮긴이)', '베트남 전쟁' 등 고학력 엘리트가 모여 극히 어리석은 결정을 한 다수의 사례들을 연구한 결과, 아무리 개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도 동질성이 높은 사람이 모이면 의사 결정의 질이 현저히 저하된다는 게 밝혀졌다.

재니스 교수의 연구 외에도 조직론에 관한 수많은 연구에서 다양한 의견에 따른 인지 부조화가 질 높은 의사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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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권위를 만드는 세 가지 요소 : 카리스마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

독일의 정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사회학 여명기의 오귀스트 콩트와 허버트 스펜서에 이어, 제2세대 사회학자로서 에밀 뒤르켐, 게오르크 지멜 등과 어깨를 견준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적인 물질주의에 대해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에 담겨 있는 문화적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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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발탁해 동기를 부여하기는 어려우며 애당초 바람직하지 않은 발상이다. 그러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에 의한 지배밖에 없는데,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카리스마 지도자는 비일상적인 천부적 자질을 지닌 인물이므로 흔하지가 않다. 결국, 우리는 이 흔치 않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인공적으로 키워 내는 일 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을 끌어모으는 자질을 타고 난 인물을 얼마만큼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역으로 추적하여 기본적인 설계 개념과 적용 기술을 파악하고 재현하는 일-옮긴이)해서 더욱 폭넓은 범위에서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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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만 하는 이유 : 타자의 얼굴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프랑스 철학자. 유소년기부터 유대교의 경전 탈무드』를 가까이했으며 성인이 되고 나서는 독자적인 윤리학, 그리고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관한 연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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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타자'로 그려져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어린이들뿐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외계인을 어떻게든 자신의 별로 되돌려 보내 주려는 아이들과 외계인을 포획해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어른들의 대결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어른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적인 어른들의 얼굴은 화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어른 의 얼굴이 화면에 비치는가 싶으면 부자연스럽게도 허리부터 상체가 화면에서 잘려 있거나 역광으로 실루엣 처리가 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방사능을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되는) 헬멧을 쓰고 있어서 항상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처럼 〈이티>에서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이라는 이해 가능성의 매개체가 교환되지 않는다.

어른의 얼굴은 영화 후반의 클라이맥스에 가서야 등장한다. 거의 죽게 된 외계인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과 아이들이 협력하는 장면에 이르러 비로소 어른들은 헬멧을 벗고 주인공 엘리엇 남매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레비나스가 주장한 '타자'의 개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일본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 등 대화 자체가 어려운 국가들 간의 관계성이 바로 떠오르고, 국내 사회를 전망해 보면 인터넷에 의한 섬우주島宇宙화(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 교수가 정의한 개념으로,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집단을 만들어 그 내 부에서만 소통하는 현상-옮긴이)가 진행됨으로써 연봉이나 직업, 정치적 경향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인 그룹마다 원리주의적인 순수배양(저자가 섬우주화 현상을 한 가지의 생물만을 순수하게 분리하여 다른 생물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배양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음-옮긴이)이 진척되어 '대화 불가' 라 할 정도로 서로 의견을 나누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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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진다 : 마태 효과

로버트 킹 머튼 (Robert King Merton, 1910~2003)

미국의 사회학자, 과학 사회학의 발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마태 효과'와 '예언의 자기 성취' 등 오늘날 널리 이용되는 이론들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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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적인 분포도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4월과 5월에 태어난 선수들이 많다. 구체적으로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 12개 구단에 등록된 선수 809명(외국인 선수 제외) 가운데 4~6월생 선수가 248명으로 전체의 약 31퍼센트, 1~3월생은 131명으로 약 16퍼센트다. 프로축구에서도 마찬가지로, J1리그의 18개 팀에 등록되어 있는 선수 454명이 태어난 달을 살펴보면 4~6월생은 149명으로 전체의 약 33퍼센트, 1~3월생은 71명으로 4~6월생의 약 절반인 16 퍼센트를 차지한다.

전체 인구 통계상, 탄생 월에 따른 인구수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하니 월별 탄생률은 8.3퍼센트, 분기별로는 평균 25퍼센트 정도다. 따라서 프로야구와 J리그 모두 4~6월생인 선수가 31~33퍼센트를 차지한다는 통계는 확실히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운동 말고 공부 측면에서는 어떨까? 공부 역시 통계적으로 공부 잘하는 아이 중에 4~6월생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당시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가와구치 다이지 부교수가 국제 학력 테스트의 결과를 분석해 보니 확실히 4~6월생들의 학력이 다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높았다. 가와구치 교수에 의하면 약 9,500여 명의 중학교 2학년 학생과 약 5,000여 명의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수학과 이과의 평균 편차치(일본 입시 제도의 상대 평가 지표- 옮긴이)를 태어난 달마다 산출한 결과, 4월부터 순서대로 낮아져서 다음 해 3월까지 평균 편차치는 꾸준하게 하향선을 나타낸다. 그리고 4~6월생의 평균 편차치와 1~3월생의 평균 편차치 사이에는 약5~7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7의 편차치는 지원 학교의 순위가 한 등급 다른 정도의 차이이므로, 이는 자칫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다(일본은 매년 4월에 신학년이 시작되므로 '한 해의 4월생부터 다음 해 3월생'까지가 같은 학년이 됨. 저자는 이 사실에 근거해 탄생월에 따른 기량 차이를 설명하고 있음-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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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사람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 진다"라는 문장을 차용해 이 메커니즘을 '마태 효과'라고 명명했다.

저명한 과학자의 글은 성과가 실제보다 부풀려지거나 확대된 형태로 승인되는 한편, 무명 과학자에게는 그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가령 노벨상 수상자는 평생 노벨상 수상자로 살게되는데 수상자가 되면 학계에서 유리한 지위가 부여되어 과학 자원의 배분, 공동연구, 후계자 양성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해낸다. 반면 무명인 신인 과학자의 논문은 학술지에 실리기도 힘들고 실적을 발표하는데 있어 저명한 과학자에 비해 조건이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마태 효과가 아이들에게도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가설이 예전부터 교육 관계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다. 같은 학년에서 야구 팀을 만들 경우 4월생 쪽이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면에서도 발육이 빨라 아무래도 유리한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팀의 주전 선수로 뽑히고 더 질 높은 경험과 지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은 일단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되면 의욕이 상승해 연습에 매진하게 되므로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진다.

마태 효과에 관한 시비 논의는 제쳐두고, 4월생은 3월생보다 운동도 공부도 더 뛰어나다는 통계적 사실과 그 요인에 대해서 머튼이 주장한 가설은 조직에서 '학습 기회의 이상적 방향성'에 관해 우 리에게 소중한 반성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항상 이해력이 빠른 아이를 사랑하는 한편,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아이는 아주 짧은 기간 내에 포기하는 나쁜 습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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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교육을 위한 비용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교육 투자든 사회 자본으로서의 교육 기회든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용 대비 효과가 더 높은 아이에게 교육 투자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 초기의 성적 결과에 따라 잘하는 아이에게는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 한층 더 성적이 높아진다. 반면 첫 타석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아이는 점점 더 힘든 여건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다 보면 세상 물정에 밝은 쓸모 있는 아이만 조직 내에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정도 능숙해지는 데 시간은 걸리지만 본질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이 즉 혁신의 종자가 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소외시키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성적이 좋은 아이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위태롭기 그지없다.

4월생 아이는 성적도 좋고 스포츠도 잘한다는, 발생학 측면에서 생각하면 매우 부자연스러운 이 사실은 우리에게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초기의 실적 차이를 그다지 의식하지 말고 조금 더 여유롭고 긴 안목으로 사람의 가능성과 성장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가르침 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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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왜 기장이 조종할 때 사고 발생 확률이 더 높을까? :권력 거리

헤이르트 호프스테더 (Geert Hofstede, 1928~)

네덜란드의 사회 심리학자, 조직, 국가, 민족 간의 문화적 차이에 관해 선구적 연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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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하면 항공기의 조종실은 최소의 조직이다. 조직에서 의사 결정의 질을 높이려면 구성원 간에 의견 표명이 자유롭고 마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판단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이견을 갖고 있다면 그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어 지적해야 한다. 항공기 조종실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다른 한 사람이 반대 의견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 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부조종사가 조종타를 잡고 있을 때는 상사인 기장이 부조종사의 행동과 판단에 자연스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기장이 조종타를 쥐고 있을 때 부하 직원인 부조종사는 과연 기장의 행동이나 판단에 반대 의견을 솔직히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개는 심리적인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걱정되는 점이나 다른 의견이 있어도 망설이다 속으로 꿀꺽 삼킨 결과가 '기장이 조종타를 잡았을 때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로 발현된 것이다.

상사에게 반론을 제기할 때 부하 직원이 느끼는 심리적 저항감의 정도가 민족 간에 차이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네덜란드 림 뷔르흐 대학교의 조직 인류학 연구자인 헤이르트 호프스테더는 전 세계적으로 '상사에게 반론할 때 느끼는 심리적 저항 강도'를 조사 해 수치화했고 이를 권력거리지수PDI, Power Distance Index 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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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안정이 계속될수록 축적되는 리스크 :반취약성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Nassim Nicholas Taleb, 1960~)

레바논 출신의 미국 작가이자 인식론자, 독립 연구가, 금융 파생 상품 전문가로 뉴욕 월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이후 인식론 연구자가 되었다. 저서로 『블랙 스완』, 『안티프래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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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는 외부의 혼란이나 압력에 의해 바로 무너지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성질을 '취약 = 약하다 = fragile'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와 대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강건 = 튼튼하다 = robust'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맞을까?'라는 의문이 탈레브가 이 개념을 제시한 사고의 출발점 이었다.

외부의 혼란과 압력이 강해지면 성과가 저하되는 성질을 취약성의 정의라고 한다면, 대치되어야 하는 것은 '혼란과 압력이 강해지면 오히려 성과가 상승하는 성질'이라고 본 탈레브는 이를 '반취약성 = anti fragile'이라고 명명했다. 탈레브는 '안티프래질'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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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취약성은 내구력이나 강건함을 초월한 의미다. 내구력이 있는 물체는 충격을 견디고 현상을 유지한다. 하지만 반취약성을 지니면 충격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 같은 성질은 진화, 문화, 사상, 혁명, 정치 체제, 기술 혁신, 문화적·경제적 번영, 기업의 생존, 훌륭한 레시피(치킨 수프나 코냑을 한 방울을 떨어뜨린 타르타르 스테이크 등), 도시의 융성, 사회, 법체계, 적도의 열대 우림, 세균에 대한 내성 등 시대와 함께 변화해 온 모든 것에도 해당한다. 지구상에서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와 같이 살아 있는 것, 유기적인 것, 복합적인 것과 책상 위의 스테이플러와같은 무기적인 물건과의 차이는 반취약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스트레스나 외부의 혼란 또는 오류에 의해 오히려 조직 전체의 성과가 올라간다고 하면 좀처럼 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 른다. 예컨대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도 안티프래질이라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실업자에서 연봉을 500억 원까지 올리며 성공한 실존 인물인 증권 트레이더 조던 벨포트를 연기해 화 제가 되었던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는, 벨포트가 사장으로 일했던 금융 트레이딩 회사를 폄하하는 기사가 미국 경제 잡지인 《포천Fortune》에 게재되자 격노하는 벨포트를 아내가 달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아내는 "이 세상에 해로운 홍보란 없는 법이에요 There is no such thing as bad publicity"라고 말한다. 아내의 말대로 결국 이 폄 하 기사를 계기로 벨포트의 회사에는 입사 지원이 쇄도했고 이후 사업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으니 이 또한 스트레스에 의해 오히려 조직의 성과가 올라간 예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몸도 마찬 가지다. 절식이나 운동이라는 ‘부하負荷'를 걸어 놓으면 오히려 건강 해지는 것 또한 반취약적 특성이다.

탈레브가 반취약성 개념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예측이 무척 어려워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시스템을 구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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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대지진(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 에서 발생한 진도 9.0의 지진과 그에 동반한 초대형 쓰나미, 그리고 그 후의 여진으로 인한 대규모 지진 재해,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초래함-옮긴이) 때는 도쿄마저 교통망이 완전히 마비 되어, 나는 사무실 근처에서 자전거를 구입해 30킬로미터나 떨어진 집까지 두 시간 만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로 이동했던 사람들은 다섯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반취약성'을 조직론이나 경력론에 적용해 생각해 보면 어떤 깨달음이 있을까? 우선 조직론에 적용하자면 의도적인 실패를 설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스트레스가 적은 상황일수록 시스템은 취약 해지게 마련이므로 언제나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일정하게 가해야 한다. 그 실패가 학습을 독려하고 조직의 창조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경력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탄탄한 경력이란 대형 시중 은행이나 일류 대기업 등 인지도 높은 대규모 조직에 들어가 그곳에서 무사히, 크게 실패하는 일 없이 순조롭게 출세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한 경력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듯이 정말 굳건 할까?

이 책을 집필하던 2018년 2월에는 이미 대형 시중은행의 인원 감축 뉴스로 사회가 떠들썩했다. 조직론 분야의 전문가에 의하면, 은행 업무는 모듈화modularity가 진행되고 있는데다 절차의 프로토콜 (통신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교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신 규칙-옮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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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도태

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영국의 자연과학자, 지질학자, 모든 생물종이 공통의 선조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자신이 자연도태라고 명명한 프로세스를 거쳐 진화했는 가설, 즉 진화론을 제창했다. 그 공적으로 오늘날에는 대개 생물학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신은 살아생전에 스스로 지질학자라고 밝혔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찰스 다윈은 지질학자'라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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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을 뿜으며 지나간 경로가 반드시 최단 거리인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멍청한 개미가 적당히 길을 잘못 들거나 다른데 들렀다가는 에러를 일으킴으로써 생각지 못한 결과로 최단 경로가 발견되었다. 이에 다른 개미도 그 최단 경로를 사용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단기적인 비효율'이 '중장기적인 고효율'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자연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에러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우리는 종종 '우리 회사의 DNA'라는 말을 쓴다. 돌연변이란 분명, 이 '우리 회사의 DNA'를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 전해 주려고 의도 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과실로 인해 잘못 복제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계에서의 적응 능력 차이는 계획과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조직이나 사회 운영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를 수정해 자신의 의도보다 오히려 ‘긍정적인 우연'을 만들어 내는 체계를 이루는데 주력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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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재빨리 도망칠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 20세기 프랑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하나로, 자크 데리다 등과 함께 포스트 구조주의 시대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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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뜻을 살펴보면 파라노이아는 편집증을, 스키조프레니아 는 분열증을 말한다. 파라노이아는 무엇에 편집하는 걸까? 바로 '아이덴티티identity'다.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이를테면 'ㅇㅇ대학교를 졸 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며 ○○동네에 살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집착하고 이 정체성을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정합적 특질을 획득하는데 매진한다. 인생에서는 종종 우발적인 기회나 변화가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기회와 변화를 받아들 일지 말지는 축적해 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와 꼭 들어맞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파라노이아형 인간은 타자가 보기에는 ‘일관성 있고 알기 쉬운 인격과 인생'이다.

들뢰즈는 다른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서양 철학이 오랜 세월 동안 근본으로 삼아 온 출발점을 토대로 트리형에 가지와 잎을 정합적으로 펼쳐 나가는 식의 논리 구조를 한편에 두고, 그와 대비하여 출발점을 갖지 않고 무질서하게 확산해 가는 뿌리형 개념을 들고 나 와 이것을 리좀rhizome(프랑스어로 뿌리를 뜻하는 말로 다양성이나 다면성의 형태를 일컬음-옮긴이)이라고 명명했다. 이 ‘트리'와 '리좀'이라는 대비 구조에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를 적용시키면 파라노이아는 트리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의 스키조프레니아는 무엇이 분열하는 것인가? 이쪽 또한 ‘아이덴티티'다.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은 고정적인 아이덴티티에 속박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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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 :격차

세르주 모스코비치 (Serge Moscovici. 1925~2014)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회 심리학자, 소르본 대학교에서 수학했 으며 사회 심리학, 정신 분석학, 인류학, 과학사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의 사회과학고등 연구원 교수, 파리에 있는 유럽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군중의 시대』 『다수를 바꾸는 소수의 심리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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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큰 격차나 차별이 아니다. 에도 시대의 신분 차별 제도나 현재의 영국과 독일에서 보이는 계급에 의해 차별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공평이 심신을 해치는 일은 없다. 오히려 동질성이 전제가 되어 있는 사회와 조직에서 나타나는 '작은 격차' 야말로 큰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오해가 있을까 봐 덧붙이는데, 나는 결코 신분 차별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동질성이 표면상으로 전제되어 있는 사회나 조직과 비교해서 르상티망이나 질투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적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격차나 차별로 인한 질투의 감정은 사회와 조직의 동질성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구성원에게 상처를 준다.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평등을 이상으로 내건 민주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그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불평등이 사회 공통의 법일 때는 최대의 불평등도 사람의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의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토크빌의 지적은 우리가 공정한 조직과 공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을 들추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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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결국 이런 뜻이죠?'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
  :무지의 지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델포이에서 받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반증하기 위해 많은 현인과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하는 동안에 현인들이 자신의 이야기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지식인 행세를 하는 자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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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자신 내면의 시점에서 생각한다 새로운 정보를 자신이 과거에서부터 지녀 온 사고 속으로 입력한다. 미래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다면 효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상황은 파멸에 이를 정도 로 악화된다.

2단계: 시점이 자신과 주변의 경계에 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 할 수 있다. 미래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경우는 효율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본질적인 문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 대처할 뿐이다.

3단계: 자신의 외부에 시점이 있다. 고객의 감정을 고객이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일체화한다. 상대와 비즈니스 거래 이상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4단계: 자유로운 시점 무언가 큰일로 이어지는 직감을 얻는다. 이론의 축적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체험과 지식을 연결할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생긴다.

이들 네 단계의 커뮤니케이션 중에서 “결국 ㅇㅇ이라는 뜻이 죠?"라고 정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듣기 단계인 '1단계: 다운로딩' 에 불과하다. 이렇게 듣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틀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상대와 더욱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창조적인 발견과 생성을 이끌어 내려면 '결국 ㅇㅇ이다'라 는 식으로 축소해서 인식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데이터와 조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만약 “결국 ㅇㅇ이라는 뜻이죠?"라고 요약하고 싶어질 때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새로운 깨달음과 발견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쉽게 아는 것은 과거의 지각 틀을 그대로 늘려 가는 효과밖에 가져다줄 수 없다. 정말로 자신이 바뀌고 성장하려면 안이하게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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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이상은 이상일 뿐,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 이데아

플라톤 (Plato. B.C. 427~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사사한 후 자신의 학교 '아카데메이아 Academy'를 개설하고 아리스토텔레스 등 후진을 양성했다.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 철학의 원류로 인식되고 있는데, 철학자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에 대한 방대한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현존하는 저서의 대부분은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요 화자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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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를 설계하지만 현실적인 운영 상황은 플라톤이 지적한 대로 '이데아의 열화 복제로서의 현실'일 뿐이다. 이데아는 상상 속의 이상형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확실히 바람직한 모습의 이상형을 그리는 일은 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지만, 그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불가능한 것을 무리하게 추구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국가의 이데아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철인 정치'를 줄곧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했는가? 플라톤은 실제로 철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었던 제자 디온에게 부탁받아 시칠리아로 건너가 왕을 교육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정쟁에 휘말려 감금당하는 등 위험에 처하게 되자 간신히 도망쳐 아테네로 돌아온다. 플라톤의 이상론은 이처럼 보기 좋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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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진보는 나선형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 변증법

게오르크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철학자, 관념론 철학 및 변증법적 논리학은 물론, 근대 국가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는 등 정치 철학의 영역에서도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인식론, 자연 철학, 역사 철학, 미학, 종교 철학, 철학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논했다.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 해서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의 이름이다. 즉 대립하는 사고를 서로 부딪쳐 투쟁시킴으로써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방법론이다. 철학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변증법의 프로세스는 대개 다음과 같다.

① 정(正): 명제 A가 제시된다. = 테제thesis

② 반(反): A와 모순되는 가명제 B가 제시된다. = 안티테제antithesis

③ 합(合): 마지막으로 A와 B의 모순을 해결하는 통합된 명제 C가 제시된다. = 진테제syn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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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사용되는 비유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원이다"라고 주장하고(정) 어떤 사람이 "직사각형이다"라고 주장할(반) 경우, 이차원 공간을 전제로 한다면 이들의 주장은 형식 논리상 양립될 수 없 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렸다. 하지만 이때 “잠깐 기다려. 이거 원 기둥 아냐?"라는 주장(합)이 나오면 두 사람의 의견을 통합하는 형태로 해결된다. 이차원 공간이라는 전제를 없앰으로써 양쪽의 주장 이 모순 없이 양립하는 새로운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는 이 3단계를 아우프헤벤Aufheben(지양止揚)이라고 한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헤겔에 의하면 이렇게 제안된 통합 명제에 관해서도 다시 안티테제가 제시되고, 양자가 다툼으로써 한층 더 새로운 명제가 성립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가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이다. 이렇게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 상당히 수상쩍은 느낌이 들지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겠다.

헤겔에 따르면 이 변증법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니라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사회 형태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부정하는 다른 사회 형태가 제안되고, 결국에는 양자의 모순을 평정하는 형태로 진테제로서의 이상 사회가 제안된다. 헤겔은 그렇게 해서 사회가 발전해 나가며,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인류에게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에는 실로 천진한 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헤겔이 살던 시대는 마침 왕제에서 공화제로 넘어가는 전환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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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헤겔이 가장 감수성이 풍부하던 대학생 시절에 일어났다. 왕 제라는 테제에 대해서 공화제라는 안티테제가 제안되어 실제로 혁명이 성취되었기에 헤겔의 사고, 즉 '투쟁을 통해 사회는 발전해 나간다'라는 발상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에는 마르크스주의로서 공산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회가 실제로 그렇게 발전할지 아닐지, 애초에 사회가 발전한다는 사고 자체가 건전한 것인지 아닌지(사회가 발전한다는 사고는 필연적으로 '발전한 사회'와 '미개한 사회'라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의 논점은 차치 하고, 상반된 두 명제를 통합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해 나가는 지적 태도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하다.

우리는 공적인 입장이든 사적인 입장이든 항상 트레이드오프 trade off(한쪽을 추구하면 다른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관계-옮긴이) 상태로 양자택일을 종용받는다. 대부분의 경우 이 두 가지 선택 사항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헤겔이 지적한 대로 지적인 투쟁이나 대화를 통해 양자를 양립시키려는 태도가 부정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트레이드오프 상황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양쪽 다 원한다든가 어느 쪽도 원치 않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혁신가가 그런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일을 무리하게 추구한 끝에 트레이드오프를 양립시키는 기술 혁신을 성취했다는 사실 또한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명제를 통합해 해소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 사고인데, 이때 진테제는 '나선형 발전'에 의해 출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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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때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 에포케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수학자. 처음에는 수학 기초론 연구자였지만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프란츠 브렌타노의 영향을 받아 철학의 측면에서 다른 여러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관심을 돌려 전혀 새로운 대상으로의 접근 방법으로서 '현상학'을 제창했다. 현상학은 20세기 철학의 새로운 흐름이 되어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후계자를 길러 내고 현상학 운동으로 확산되어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와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국제 콘퍼런스에서

'뷰카VUCA'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원래는 미국 육군이 현재 의 세계 정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지만 오늘날에는 다양 한 장소에서 접할 수 있다. 뷰키는 오늘날의 세계 상황을 잘 드러내 는 네 가지 영어 단어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 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이니셜을 조합한 말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기가 무척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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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크로가 주연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는 조현병에 걸린 천재 수학자 존 내시가 의사와 가족의 여러 번에 걸친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 환각과 환청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에포케를 아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에포케가 다양한 내용을 시사해 주는 사고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타자 이해의 어려움'을 깨닫게 해 준다는 점을 꼽고 싶다. 후설이 반드시 그렇게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에포케는 결국, “당신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번 보류해 보십시오"라는 뜻이다. 그 말대로 따르면 어떤 점이 좋을까?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과 상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때 양자가 모두 자신의 세계관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 어긋난 차이가 해소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지금 시대에는 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기회와 자리 자체를 폭력으로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은 다시 말해 대화에 절망하고 있다. 왜 대화에 절망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개개인의 가치관을 너무나 완고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서로 연결되고 맞물려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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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회에서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 사실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 것은 위험 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객관적인 세계관은 애초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세계관을 확신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는, 이른바 어중간한 경과 조치로 일단 잠시 멈춰 보는 중용의 자세가 바로 에포케다. 그러니 이 에포케의 사고관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더더욱 필요한 지적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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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에디슨은 축음기를 유언장의 대체품으로 발명했다. : 브리콜라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 Strauss, 1908~2009)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이자 민족학자. 전문 분야인 인류학과 신화학에서 높게 평가받았으며, 일반적인 의미의 구조주의 시조로 불린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 이외의 연구자들, 자크 라캉,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현대 사상으로서의 구조주의를 발전시킨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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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또한 당초 상정된 용도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결실을 맺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현재의 항공기를 만드는 원리를 이용해 최초로 동력 비행을 성공시킨 인물은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 트 형제였다. 과연 그들은 어떤 목적을 상정하고 비행기를 발명했을 까? 그들의 목적은 전쟁의 종결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작은 비행기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에 사용된다면 적의 움직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감시할 수 있기 때문에 기습 공격이나 치열한 전투를 무효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들의 사례는 우리가 자주 듣는 ‘용도 시장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한 혁신을 일으킬 수 없다'라는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정확한 가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대부분 결과적으로 혁신이 일어난 데 지나지 않으며, 당초 상정했던 대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는 오히려 매우 드물다. 반면 용도 시장을 명확히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개발 투자를 실행해야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경영사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아마도 미국 제록 스 사의 팰로앨토 연구소 Palo Alto Research Center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연구소는 용도 시장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 고 연구자의 백일몽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결과, 엄청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돈을 벌지는 못하는 악몽 같은 사례를 남겼다. 펠로앨토 연구소는 마우스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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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영화 〈아폴로 13〉을 보면, 신체의 내부와 외부의 환경을 모니터링해서 큰 변화가 생기면 즉시 조치를 취하는 ICU 시스템이 그대로 실현된 장면을 볼 수 있다.

아폴로 계획처럼 막대한 낭비로 보이는 프로젝트에서도 인류에 게 꼭 필요한 기술과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 들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브리콜라주라고 할 수 있 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케네디 대통령의 머릿속에 이 우주 계획에서 파생적으로 인류에게 무척 유용한 지혜가 탄생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행여 관계자 가운데 누군가가 이 계획을 완수함으로써 무언가 중대한 지혜나 그것을 완수하는데 생 기는 '애매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마토 그로소의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야성적인 지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현재 글로벌 기업에서는 “그건 어디에 도움이 되는가?" 라는 경영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는 자금 지원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앞서 말한 사례를 보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혁신의 대부분은 '왠지 대단한 것 같다'라는 직감에 이끌려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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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조급해하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 패러다임 전환

토머스 쿤 (Thomas S. Kuhn. 1922~1996)

미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전문은 과학사 및 과학 철학이다. 1962년에 발표한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진보는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인 혁명적 변화, 즉 패러다임 전환에 따른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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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패러다임 전환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쿤에 따르면 다른 패러다임에는 상당히 깊은 골이 있기 때문에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론은커녕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조차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우열을 가리기 위한 공통된 기준이 없다. 쿤은 이것을 '공약 불가능성'이 라는 말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 전환은 매우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교류와 교환이 없어지면, 어떤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 다임으로의 전환은 어느 한쪽의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전부 절멸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은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를 설득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 줌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자가 멸종하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여 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질 때에 비로소 승리 한다.

확실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그가 죽은 후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뉴턴의 만유인력도 발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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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획기적인 발견이나 발명을 뒤쫓아 가며 학습하고 있는 우리는 그러한 발견과 발명을 계기로 세상이 단번에 뒤바뀐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는 '혁신의 보급'에 대해서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렛 로저스 교수가 제시한 내용과 같은데, 이를테면 활판인쇄 기법이나 괴혈병, 감염증의 예방법 등 획기적인 발명은 보급되기까 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단 몇 년 사이에 패러다임 전환이 거듭된다고들 말하지만, 토머스 쿤은 그것은 패러다임이 아니라 의견이나 방법의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한다.

반대로 말해 우리가 지금 100년 단위로 일어나는 패러다임 전환 속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디서 어디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축을 길게 잡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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