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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열네 번째 책 :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거만

by 마파람94 2025. 3. 16.

 

15년 전에 발행된 책입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경제 관련 이야기들은 과거의 내용이지만 2025년 3월인데 여전히 유효합니다.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에 투영됩니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높은 성장률이었지만(미국의 1.5배 수준), 이 비율대로라면 일본이 세계 경제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일은 21세기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의 성장은 다른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이 경제 운용의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라느니, 그 성공이 부분적으로는 구미 각국의 순진한 경쟁자들 덕분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여기에서 일본의 성공 원인을 놓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모두 점검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두 가지 큰 견해가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나는 일본의 성장을 훌륭한 펀더멘털(fundamental, 국가 경제 따위에서 기본적인 내재 가치를 나타내는 기초 경제 여건-옮긴이)의 산물로 설명하는 쪽이었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기초 교육과 높은 저축률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언제나 그렇듯) 아마추어 사회학적 관점이 가미된 견해, 즉 일본은 어떻게 고품질 상품의 저비용 생산이 가능한가에 대한 분석이 더해졌다. 또 하나는 일본이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 체제, 그러니까 새롭고 뛰어난 형태의 자본주의를 개발해냈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일본에 관한 논의는 점차 경제 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했다. 일반적으로는 구미식 경제관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 구체적으로는 자유시장의 덕목에 관한 논쟁으로 번진 것이다.

일본식 경제 체계에서 우월하다고 여겨지던 한 가지는 '정부의 지도' 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 정부는 경제에 대한 강력한 관리감독을 수행했다. (그 유명한 통산성과 상대적으로 조용하나 영향력은 더 강했던 재무성으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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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장기적 포석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성장의 엔진으로 삼을 수 있는 전략산업을 하나하나 정해나갔다. 그런 다음에 민간 부문을 이 산업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아가 그들이 국 내시장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기간 동안 외국 기업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으며, 그렇게 경쟁력이 갖춰진 다음에야 수출 전선으로 내보냈다. 그러면 기업은 한동안 수익성은 무시하고 오로지 시장 점유율을 높여 외국의 경쟁 상대를 물리치는 일에만 온 힘을 쏟았다. 이런 식으로 해당 산업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나면 일본은 다음 목표로 이동했다. 철강, 자동차, VCR, 반도체 등이 이런 전략산업들이었다. 컴퓨터와 항공기도 여기에 추가됐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여러 가지 구체적 증거를 대며 허점을 지적하는 회의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약탈적 시장 장악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사람이든, 아니면 통산성의 '마법사들'이 정말로 그렇게 전지 전능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일본의 성공이 일본식 시스템의 특징적 성격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었다. 어쨌든 바로 이러한 특성들, 그러니까 정부와 기업의 유착관계 및 정부 보증으로 게이레쓰 기업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일에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실자본주의가 경제 불안의 근원으로 지목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실제로 이 시스템의 취약성이 분명해진 것은 198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물론 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눈에만 보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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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과 시련, 그리고 고민

1990년이 시작될 무렵, 인구는 미국의 절반이고 GDP는 미국의 절반도 안 되는 나라인 일본의 주식 시가 총액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 컸다. 땅값도 인구밀도가 높은 탓에 절대 저렴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솟은 상태였다. 도쿄의 천왕궁 아래 1평방 마일 땅 이면 캘리포니아주 전체를 다 사고도 남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인용될 정도였다. '거품경제'에 들어선 일본은 1920년대 미국과 흡사했다.

일본에 있어 1980년대 후반은 번영과 고성장, 저실업, 그리고 고이윤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통계자료를 보면 이 기간 동안에 지가와 주가가 세 배나 폭등한 사실을 정당화할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다. 물론 당시조차도 금융 호황에 뭔가 비합리적인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저속 성장을 보이는 산업 분야의 전통 기업들이 마치 성장주처럼 평가받고, 그 주가수익률(PER)도 60이상인 점이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열된 시장에서 흔히 그렇듯, 회의론자들은 자신들의 확신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아니,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개 그렇듯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가격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온갖 것들이 다 등장했다.

금융 거품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의 '튤립 광풍'(튤립 비늘줄기의 판매를 둘러싸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투기 열풍-옮긴이)에서 근래의 닷컴 열풍에 이르는 갖가지 거품 사례에서 보듯이, 아무리 지각 있는 투자자라 하더라도 다들 돈을 벌어들이는 상황에서 분위기에 휩쓸...

3장 일본의 함정 83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황

1995년의 멕시코나 1998년의 한국, 2002년의 아르헨티나와 달리 일본은 어느 해에도 결코 재앙 수준의 경기후퇴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거품붕괴 후 10년 동안 일본의 실질 GDP가 실제로 떨어진 해는 단 두 해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일본의 경제는 과거의 경험이나 당시의 능력에 못 미치는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1991년 이후 10년 동안 1980년 대의 '평균'만큼 빠른 성장률을 보인 해는 단 한 해에 불과했다. 일본의 '잠재 생산량' 즉, 인력의 완전고용 및 자원의 완전 이용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생산량을 아무리 보수적으로 산정해 적용하더라도 실질 생산량이 잠재 생산량만큼 성장한 해는 딱 한 해뿐이었다.

이를 본 경제학자들은 어색하기로 유명한 용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일본의 상태를 '성장후퇴'(growth recession)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장 후퇴란 경제가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증가 잠재력을 충분히 이용한 성장이 아니며, 따라서 갈수록 많은 기계와 인력이 놀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성장후퇴는 매우 드문 일이다. 호황이나 불황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추진력을 더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속성장 아니면 뚜렷한 쇠퇴를 낳아야 정상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10년씩이나 지속되는 성장후퇴를 경험했고, 이것이 마땅히 이뤄야 할 성장 수준에 한참 못 미친 탓에 전혀 새로운 현상을 예고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성장불황'(growth depression)이었다.

유난히 더딘 속도로 진행된 일본의 경제 악화는 그 자체로 혼동의 원인이 되었다. 불황이 슬금슬금 나라 전체에 퍼진 탓에 국민들이 정부에 뭔가 극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경제 엔진이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추는 대신 서서히 동력을 잃어간 탓에 정부는 시종일관 성장 지표만 하향조정했을 뿐이다. 일본 정부는 그들이 이룰 수 있고, 또 이뤄야 마땅한 성장에 한참 모자라는 성장률을 놓고 그래도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 정책들이 유효한 것 아니냐며 정책 옹호 에만 열을 올렸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일본과 외국의 분석가들은 일본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저속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의 고속성장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는 추정을 내놓곤 했다.

이렇듯 일본의 경제 정책은 독선과 숙명론의 이상한 조합이 특징이 었다. 한 가지 더,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잘못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경향도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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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션이 실제로 발생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일본 재정의 장기적 건전성과 관련한 약간의 우려감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적자 지출로 경제의 시동을 걸려던 시도가 한계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공공지출의 확대는 수렁에 빠진 경제에 대한 표준적 처방이다. 그러나 은행으로 통화 공급을 확대하는 일 역시 또 하나의 표준적 대응이 될 수 있다. 대공황과 관련한 통념 가운데 하나는 1930~31년의 은행위기가 신용 시장에 장기적인 손상을 가했기 때문에 대공황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다는 견해다. 만약 대출을 받기만 했다면 기꺼이 더 소비할(투자할) 기업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자격이 있는 차용자 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대출을 해줄 수 있는 은행가들은 이미 업계에서 밀려나 있거나 자금을 모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은행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베이비시팅 조합의 예에 비유하자면 겨울에 기꺼이 외출하고 여름에 다른 회원의 아이를 돌 보겠다는 이들조차 필요한 쿠폰을 빌려주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은행들은 거품경제 시절에 많은 부실대출을 했고, 뒤를 이은 스태그네이션으로 인해 다른 대출들까지도 부실화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불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은 다음과 같았는데, 일본이 유동성 함정에 빠진 주된 이유가 은행들이 재정적으로 취약해 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은행을 개혁하면 경제는 살아날 것이라는 얘기 였다. 결국 1998년 후반에 일본의 입법부는 5,000억 달러를 투입하는 은행구제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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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은 반대로 이러한 처방책이 먹혀들지 않는 상황을 조명하는데도 유용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번째 비유는 유동성 함정이라는 것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들에 대한, 적어도 애당초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들에 대한 확실한 지침을 제공한다.

이야기를 다시 더듬어 보자. 베이비시팅 조합이 맞닥뜨린 기본적 문제는 회원들이 여름에 대비해 이자율이 제로인 겨울에도 쿠폰을 축적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조합원 전부가 아이를 맡기지는 않고 돌보려고만 든다면 누구도 쿠폰을 벌 수 없다. 결국 회원들의 개별적 노력이 모여 겨울철 불경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라면 즉시 알아차리겠지만 해결책은 가격을 적절히 바로잡는 것이다. 즉, 겨울에 쌓은 포인트를 여름까지 갖고 가면 가치가 떨어 진다는 점을 확신시켜야 한다. 일테면 겨울에 쌓은 다섯 시간의 베이비 시팅 신용을 여름이 되면 네 시간으로 축소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 게 하면 사람들은 쿠폰을 가급적 빨리 사용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게 되 고, 따라서 남의 아이를 돌볼 기회도 더 많이 창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회원들의 정당한 저축을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일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합원 전체가 겨울의 베이비시팅 시간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겨울 시간을 여름 시간과 일대 일로 교환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조합원들의 인센티브를 왜곡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베이비시팅이 아닌 실제 경제에서 여름에 가치가 떨어지는 이 쿠폰과 상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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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시간에 비례해 돈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인플레이션이다. 아니, 유동성 함정에서 경제를 탈출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인플레이션 예상 심리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상황에 적합한 답일 터다. 인플레이션을 예측하는 이들은 돈을 비축해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유동성 함정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 처하면 인플레이션 심리 조장이 훌륭한 해결 방법이라는 결론에서 도망갈 수가 없다. (일본의 사례는 유동성 함정의 가능성을 절대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이제까지 나는 베이비시팅 조합이라는 별난 비유담을 통해서 인플레이션의 장점을 설명했지만 경제학자들이 통화정책에 관해 논의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준적 수리 모델 중 어떤 것을 적용해도 동일한 결론이 나온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실제로 통화정책을 이용해 경기후퇴와 싸우려면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반대자들은 '물가안정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이며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일은 자칫 통제불능의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폈고, 인 플레이션 옹호자들은 이 뿌리 깊은 고정관념과 싸워야만 했다. 물가안정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표준적 경제 모델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과서의 일반적 이론은 일본의 유다른 상황에 대한 자연적 해결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제안한다. 그러나 경제를 보는 전통적 이론과 전통적 지혜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금융위기에 직면해 힘든 결 정을 내려야하는 나라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러한 이론과 지혜의 충돌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3장 일본의 함정 101

대신에 어떤 장관의 조카가 소유한 금융회사에 돈을 빌려준 외국 은행은 자신들이 약간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만약 투자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그 장관이 금융회사를 구해줄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 태국 정부는 이들 금융회사에 돈을 물린 외국 채권자들을 대부분 구제해주었다.

이번에는 금융회사 소유주인 장관의 조카 관점에서 상황을 보기로 하자. 먼저 그는 낮은 이율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무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빌린 돈을 높은 이율로 부동산업자인 친구에게 다시 빌려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친구가 업무용 신축 빌딩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일이 잘 된다면 두 사람 다 거액을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일이 안 풀려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장관이 조카의 금융회사를 살릴 방도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카는 무사하고 뒤처리는 납세자들이 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곧 위기를 맞을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금융 중개인들의 역할은 다소 미약했다. 대신 전형적인 검은 거래가 이루어졌다. 외국 은행들은 대통령의 족벌이 통제하는 회사에 직접 대출을 해주었다.(대표적인 예가 홍콩의 페레그린 인베스트먼트 홀딩스 Peregrine Investment Holdings를 파산으로 이끈 대부였다. 당시 대출금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딸이 소유한 택시회사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재벌들 이 조종하는 은행들이 대규모 차입을 했다. 재벌은 한국에서 (아주 최근까지도) 경제와 정치를 지배해온 거대 복합기업이다. 이밖에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정부 고위관리들이 암묵적인 투자 보증을 해주었는데, 덕분에 위험한 투자에 대한 체감 위험도가 줄어들어 많은 해외투자자들이 오히려 전망이 밝다는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과열된 투기성 호황 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아시아 전역에 경제위기가 닥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통화위기를 이미 1년 전에 예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러나 이 위기가 얼마나 심각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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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견은 태국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에 대한 동정론도 거의 없었다. 말레이시아는 지난 수년 동안 (태국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금액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더군다나 이 나라의 총리는 사악한 투기꾼들(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를 비롯한 서구의 헤지펀드들을 의미-옮긴이)을 공공연히 비난함으 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경제 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다들 호의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통화하락을 용인한 것은 옳다고 본 반면, 루피아화의 약세는 합당치 않다고들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상적자는 이웃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GDP 대비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1996년 적자는 GDP의 4퍼센트 미만이었는데, 이는 호주와 비교해서도 적은 수치다. 인도네시아의 수출 기반(원자재와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도 견고해 보였다. 전체적인 경제 기초가 겉보기에 건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 달도 못가서 인도네시아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맞이했다. 역사상 최악의 불황 중 하나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주변국들뿐만 아니라 거리가 꽤 떨어져 있고 GDP도 인도네시아의 두 배, 태국의 세 배인 한국에까지 옮겨갔다.

'경제적 전염'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캐나다는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다. 캐나다의 생산품 가운데 상당량이 남쪽의 거대한 이웃나라 미국에서 팔리기 때문이다. 위기가 전염된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도 있었다. 태국은 말레이시아 제품의 시장이고, 말레이시아 역시 태국 제품의 시장이었다. 또한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품목이 서로 엇비슷했기 때문인 이유도 얼마쯤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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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날 헤지펀드의 역할은 이 책에서도 한 장(제6장)을 차지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역할은 1998년에 들어서야 중요해졌다. (공교롭게도 이즈음 소로스와 여러 헤지펀드들은 미국의 정책적 바람과는 완전히 반대로 움직였다) 아시아 위기에 대한 설명으로 음모론은 설득력을 잃었다.

반면에 많은 서구인들은 아시아의 위기를 일종의 권선징악으로 보았다. 정실자본주의에 대한 필연적 죗값이라는 얘기였다. 재앙이 터지자 여기저기서 아시아 국가들의 낭비와 부패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금융회사들 이야기며, '테크놀로지 회랑'(technology corridor, 대규모 정보통신기술 단지-옮긴이)을 세운다는 말레이시아의 웅장한 계획, 수하르토 일가가 축적한 막대한 부, 한국 재벌들의 기괴한 확장욕(한 속옷 회사가 스키리조트를 샀다가 나중에 마이클 잭슨에게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쌍방울[현 트라이브랜즈]과 무주리조트를 말한다-옮긴이)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먼저 아시아에서 정실주의와 부패가 매우 만연하기는 했지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재벌은 본질적으로 현대식 기업을 가장한 가족회사다. 소유주들은 수십 년 동안의 특별대우에 익 숙해져 있었다.(그들은 각종 대출과 수입허가, 정부 보조금 등에서 우선권을 지녔다) 재벌은 그동안 엄청난 성장을 했다. 서구의 기준으로 보면 깔끔한 시스템이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는 35년 동안 매우 훌륭하게 기능해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기에 빠진 모든 나라가 비슷한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이런 결함들이 왜 하필 1997년에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는가?

124 불황경제학

엉터리 정부정책 때문도 아니었다. 패닉에 취약해진 부분적 이유는 금융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즉, 자유시장경제의 퇴보가 아니라 발전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역이 제3세계에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는 국제금융업자들의 인기를 끌자 그들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고 채무를 엄청나게 늘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빛이 신뢰상실에서 비롯된 피드백을 금융위기로 증폭시켰고, 다시 반대로 피드백이 이루어지면서 위기의 악순환은 더욱 강도를 높였다. 빌려온 돈이 모두 엉터리로 낭비된 것은 아니다. 일부는 그랬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 경제를 파멸로 이끈 것은 과거와 달리 달러로 빌린 새로운 채무였다.

에필로그: 2002년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물론 아시아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2002년에 아르헨티 나는 아시아와 흡사한 위기를 겪었다. 아르헨티나는 널리 찬양을 받아 온 경제 정책이 어떻게 한 나라를 한순간에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아픈 사례다.

아르헨티나 통화 정책의 역사는 앞서 제2장에서 자세히 살펴봤다. 오랜 세월 동안 방만하게 화폐를 남발하던 끝에 1991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통화위원회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페소와 달러화를 1:1로 고정시켰다. 통용되는 페소는 모두 달러 보유고의 뒷받침을 받았다. 통화 안정을 통해 경제가 지속적 번영을 누리길 바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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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을 택하면 경기후퇴와는 얼마든지 맞서 싸울 수 있는 대신에 기업 활동 환경에 불확실성이 조성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니면 환율을 고정시킨 후 평가절하는 절대로 없을 것임을 공언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면 기업활동은 더 편하고 안전해지겠지만 억지춘향식 단일통화정책의 문제점이 다시 불거질 게 뻔했다. 이것도 아니면 조정가능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즉 환율은 고정하되 이것을 변동시킬 권리를 보유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때에만 유효할 터인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이 제도는 기업에 추가비용을 떠안길뿐더러, (이익발생 가능성이 있 는 거래를 금지할 경우에 으레 그렇듯) 부패의 원천이 될 수도 있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물론 글로보는 허구의 통화다.

글로보 체제와 가장 가까웠던 것이 1930년대 이전의 금본위제다. 금본위제는 불운하게도 세계적인 경기변동을 막을 만큼 적절히 관리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가상의 역사는 글로벌 경제 속에서 각 국가들이 직면한 '3각 딜레마'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거시경제 관리자들이 원하는 것은 세 가지다. 그들은 통화정책에 대한 재량권을 원한다. 경기후퇴를 막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다. 그들은 안정된 환율을 원한다. 그래야 기업이 너무 큰 불확실성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자유로운 국제 비즈니스를 원한다. 민간 부문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특히 원하는 외환을 쉽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글로보와 그 소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룰 수는 없음을 말해준다. 잘해야 두 가지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먼저 환율의 안정을 포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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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보와 같은 세계단일통화의 실현을 꿈꾸는 전문가도 거의 없다. 국가 단위든 지역 단위든 통화 독립은 여전히 필요한 명제다.

반면, 전후 첫 세대 동안 선진국들이 케인스주의 정책과 고정환율제를 결합해 실시했던 자본통제는 이제 너무 낡은 방법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통제의 근본적 문제는 '좋은' 국제거래와 '나쁜' 국제거래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평가절하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말레이시아에서 돈을 빼낸 투기꾼들의 행동은 반사회적이다. 반면, 선구매 후지불 조건으로 해외 바이어를 유치한 말레이시아 수출업자는 자국 상품의 해외시장 진출에 기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수출업자가 링깃화(말레이시아 통화)의 평가절하를 예상해 결제대금은 달러로 받되 결제일을 일부러 뒤로 미뤘다고치자. 이것은 암시장에서 링깃화로 달러를 산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처럼 생산적 비즈니스와 환투기 사이의 구별이 모호 한 사례는 무척 많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 다. 첫째, 투기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쉽게 피해 갈 수 있다. 둘째, 정부가 평범한 거래에도 부담스럽고 귀찮은 규제를 가해야만 투기를 제한할 수 있다.(예를 들어, 수출업자가 바이어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신용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50년쯤 전만 해도 대부분의 정부는 이런 규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시장의 장점을 다시 깨달은 시대다. 정부의 개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특히 제한과 금지가 많을수록 뇌물과 '봐주기'도 만연하기 쉽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롭게 변동하는 환율제도만이 남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이 되면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자유변동환율제를 그래도 세 가지 악 가운데 최선유로 여기게 되었다.

138 불황경제학

투자자들이 잔뜩 긴장하더니 한꺼번에 자금을 빼내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한 나라가 곤경에 처한다. 주식시장은 급락하고 이자율은 급등한다. 혹자는 '지각 있는 투자자라면 이때를 매입의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펀더멘털에 큰 변화가 없다면 자산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제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산가치의 급락은 건실한 은행들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경기후퇴와 높은 이율, 환율 급변 등으로 인해 튼튼한 기업들이 파산할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은 경제 혼란으로 인한 정치 불안이다. 다들 출구를 향해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매입은 좋지 않은 생각일 수도 있다. 결국 당신도 탈출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원칙적으로 한 나라에 대한 신뢰상실은 그 나라에 경제위기를 가져 올 수 있고, 이 경제위기는 다시 신뢰상실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나라들은 경제학자들이 '자기입증형 투기 공격'이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하다. 과거에는 자기입증형 위기의 중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경제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1990년대 남미와 아시아의 위기는 이를 분명한 문제로 자리 잡게 하거나, 최소한 실제적인 문제로 취급하도록 만들었다.

재미난 점은, 일단 사람들이 자기입증형 위기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시장심리가 상황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투자자들의 기대치, 심지어 편견까지도 경제 펀더멘털의 하나가 돼버린다. 믿음이 사태를 만드는 것이다.

호주를 예로 들어보자. 이 나라는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수십 년 동안 GDP의 4퍼센트 이상 수준으로 경상적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호주 경제의 기초 체력을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5장 부적절한 정책 141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라고 말이다. 그러면 설령 호주달러가 하락한다고 해도 투자자들은 반등에 대한 기대로 호주달러를 매수하고, 그러면 해당 경제는 실제로 이득을 얻게 된다. 시장의 신뢰 가확인을 받는 셈이다.

반면, 20여 년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버리지 못한다고 치자. 이럴 때 루피아화 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이런, 인도네시아가 끔찍한 옛날로 돌아가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 결과 자본유출이 발생하고, 이는 금융과 경제, 더 나아가 정치적 위기로 이어진다. 시장 의 불신을 확인받는 셈이다.

다시 말해 케인스 계약이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변동환율제가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앞서 살펴본) 세 가지 대안 중 최선이라는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영국이나 미국, 캐나다와 같은 나라들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멕시코와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은 1990년 대 위기를 겪으며 자신들이 다른 룰의 적용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절한 평가절하를 통한 대처는 신뢰의 극적인 붕괴로 이어질 뿐이 었다. 바로 이러한 신뢰의 문제가 케인스 계약이 깨진 이유를 궁극적으 로 설명해준다.

142 불황경제학

그런데 알고 보니 홍콩통화청은 그래야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달러를 비축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러면 이 돈을 헤지펀드들에 맞서는데 어떻게 사용했을까? 홍콩당국은 홍콩의 주식을 사들였고, 그래서 주식 가격이 올라가자 주식을 공매도했던 세력은 손실을 입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주식 매입이 대규모여야 한다. 다시 말해, 헤지펀드들의 공매도 규모와 비슷하거나, 이를 넘는 규모여야 한다. 홍콩 당국은 이런 대응이 가능한 자금을 갖고 있었다.

헤지펀드들은 왜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홍콩 정부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치는 상황을 감수하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의 모범생이 시장에 개입하려 든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당연히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밀턴 프리드먼 은 홍콩 정부의 행동을 '미친 짓'이라고 했고, 헤리티지재단은 경제적 자유의 보루라는 홍콩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박탈했다. 신문들은 엄격 한 자본통제를 시작한 말레이시아에 홍콩을 빗대는 기사를 썼다. 홍콩의 재무장관 도널드 창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투자자들에게 자국 정부 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홍콩은 영원히 자본주의의 편이라고 설득했 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헤지펀드들은 이런 반발이 홍콩 당국을 굴복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쇼트포지션을 롤오버하고(공매도한 주식을 빌린 원소유주에게 추가비용을 지불하면서 상환을 미루고) 홍콩 정부가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때 홍콩 정부가 일종의 시장 진입장벽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 공매도를 제한하는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것이다.

6장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 -헤지펀드의 실체 165

그러자 주식을 빌려주었던 홍콩의 투자자들은 회수에 나서야 했다. 헤지펀드들은 분 노의 신음을 애써 삼키며 자신들의 포지션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홍콩의 사건은 서서히 잊혀 갔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기괴한 사건들이 헤지펀드들 스스로가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포템킨 경제

1787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제국 남부의 시찰에 나섰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포템킨 장군은 시찰 하루 전날 예정지역에 가서 마치 영화세트와도 같은 가짜 거리를 만들어 낙후된 마을을 아주 잘 사는 곳처럼 보이게 꾸몄다고 한다. 그런 다음, 거리 세트를 해체해 다음 시찰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 후 '포템킨 마을'이라는 표현은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외관상으로만 행복한 허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 었다.

1990년대 후반의 러시아 경제가 그랬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쉬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이 과정이 훨씬 힘들었 다. 공산주의 몰락 후 수년 동안 러시아의 경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 간한 상태로 굴러갔다. 중앙에서 지침을 제공하던 계획경제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경제가 자리 잡지도 못했다. 그나마 웬만큼 돌아가던 요소들마저도 기능을 멈췄다. 

166 불황경제학

1998년의 패닉

1998년 여름, 세계 헤지펀드들의 대차대조표는 분량도 많을뿐더러 엄청나게 복잡했다. 그래도 한 가지 패턴은 있었다. 그들은 안전한(가치가 폭락할 것 같지 않은) 유동적(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에는 쇼트포지션을 취했다. 반면, 위험하고 유동성이 낮은 자산에는 롱포지션을 취했다. 이를테면, 안전하고 쉽게 팔 수 있는 독일 국채에는 쇼트포지션을 취하고, 조금 더 위험하고 빨리 팔기 어려운 덴마크의 주택저당증권(부동산 에 대한 간접적 권리)에는 롱포지션을 취하는 식이었다. 또 일본 채권에는 쇼트포지션을, 러시아 채권에는 롱포지션을 취했다.

여기에 적용된 일반적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역사적으로 시장은 안전성과 유동성에 높은 프리미엄을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소규모 투자자들은 리스크를 꺼려하는데다 언제 현금이 필요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규모 운영자들의 사정은 달랐다. 자금력이 있는 그들은 분산투자 등을 통한 세심한 다각화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또한 대개의 경우 자산을 갑자기 현금화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성과 비유동성을 기회로 삼았다. 헤지펀드가 매년 그토록 많은 돈을 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1998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기본 개념을 파악하고 있었다. 헤지펀드들 사이의 경쟁도 가열돼 수익을 내기가 갈수록 힘들어졌다. 몇몇 헤지펀드는 사실상 해체를 선언하고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멀리 나아가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노력도 기울 였다.

6장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 -헤지펀드의 실체 169

은행의 약사

현대적 은행의 시초는 아마도 금 세공인들이었을 거라고 한다. 그들은 본업으로 장신구를 만들었지만 부업으로 다른 이들의 돈을 맡아줌으로써 짭짤한 수입을 얻기도 했다. 가게에 훌륭한 금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현금을 숨겨두기에 침대 밑의 돈궤보다는 금 세공인의 금고가 더 안전한 장소였다.(조지 엘리엇의 소설 「사일러스 마 너』Silas Marner를 기억하라)(소설에서 수전노 사일러스 마너는 돈을 도둑맞아 반미 치광이가 된다-옮긴이)

그러다 어느 순간 금 세공인들은 맡아둔 돈의 일부를 이자를 받고 빌려줄 경우, 돈을 보관해주는 부업의 수익성이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돈 주인들이 나타나서 당장 자신의 돈을 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금 세공인들은 평균의 법칙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도 깨달았다. 매일 돈 주인들 중의 일부가 와서 돈을 찾아가긴 하지만 하루에 돈 주인들 대부분이 몰려오는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만 보유하고 나머지는 빌려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눈앞이 캄캄한 상태가 전개되기도 한다. 은행이 돈을 잘못 빌려줘서 큰 손해를 봤다는, 그래서 맡아둔 돈을 모두 돌려줄 능력이 안 된다는 소문이 도는 것이다.(이러한 소문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면 예치자들은 남은 자산이 바닥나기 전에 자신의 예금을 찾으려고 앞 다퉈 은행으로 달려간다. 이른바 '뱅크런'이 일어나는 건데,

192 불황경제학

반면 ARS를 통해 자금을 빌리는 경우라면 이러한 규제와 여기에 따르는 수반 비용을 피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ARS가 은행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때 총액이 무려 4,000억 달러에 달했던 ARS 시스템은 2008년 초반에 붕괴하고 말았다. 신규 투자자들이 충분히 몰리지 않자 경매가 하나둘 실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액을 언제든 현금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투자자들은 갑자기 수십 년짜리 투자에 돈이 묶였음을 깨달았다. 한 번의 경매가 실패하자, 그 다음 경매도, 또 그 다음 경매도 실패했다. 이처럼 '너무' 영리한 투자 방식의 위험성이 드러난 상황에서 누가 여기에 신규 자금을 쏟아 넣겠는가?

경매방식채권 사건은 사실상 전염성 강한 일련의 뱅크런인 셈이었다.

1907년 패닉과의 유사성이 명백하게 보이는가? 20세기 초반,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규제의 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던 신탁회사들도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다가 결국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로부터 1세기 후에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비은행 금융기관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나 장치를 일반적으로 '유사 금융시스템'(parallel banking system) 또는 '그림자 금융시스템'(shadow banking system)이라고 부른다. 나는 후자가 좀 더 정확하고 생생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연방준비제도의 일부로서 예금을 받는 전통적인 은행들은 햇빛 속에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다. 회계는 투명하고, 정부가 어깨 너머로 감시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8장 그림자 금융 199

부실 대출이 유행병처럼 번지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좌익들은 주로 위기의 근원으로 규제 철폐를 꼽는다. 특히 1999년 글래스-스티걸법의 폐지가 비난의 핵심이다. 이로 인해 일반 은행들이 투자은행의 영역에 뛰어들어 더 많은 리스크를 떠안게 됐다는 논리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조치였으며, 따라서 미묘한 방식으로 위기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호황기에 생겨난 고 리스크 금융구조 가운데 하나가 일반 은행들의 장부외 운영이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규제 철폐로 새로이 리스크를 떠안은 기관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애당초 규제를 받지 않은 기관들이 높은 리스크를 감수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 확장돼 전통적인 은행들과 비등하게 됐거나, 혹은 더 중요해 졌다면 정치인과 관리들은 대공황의 원인이 된 금융 취약성이 다시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고 기존의 규제와 금융 안정망을 확장해 새로운 금융 체계를 모두 아우르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어야 마땅했다.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나서서 한 가지 간단한 규칙, 즉 은행과 똑같은 기능을 하는 모든 기관들, 다시 말해 은행과 똑같은 방식으로 구제되어야 하는 모든 기관들을 은행과 똑같이 규제한다는 내용의 규정을 발표했어야 했다는 얘기다.

사실, 제6장에서 설명한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위기 역시 그림자 금융시스템의 위험성에 대한 객관적 교훈으로 삼았어야 마땅했다. 분 명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림자 금융시스템의 붕괴 위험을 알아 차리고 있었다.

8장 그림자 금융
203


집값 폭락과 그 결과

미국의 주택 대호황은 2005년 가을부터 꺼지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다수의 미국인들이 (계약금이 없고 티저금리 대출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집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오르자 매매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품에서 쉿쉿 소리를 내며 바람이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집값은 한동안 상승세를 유지했다. 예상된 일이었다. 주택은 하나의 시장가격이 시시각각 바뀌는 주식과는 다르다. 집값은 제각각이며, 판매자들은 실구매자를 찾기까지 한동안 기다릴 것을 예상한다. 따라서 집값은 주로 최근에 팔린 다른 집들의 가격을 토대로 결정된다. 판매자는 자신이 제시한 가격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점을 아프게 깨닫기 전까지는 가격을 내리지 않는다.

206 불황경제학

2005년까지 몇 년 동안 집값이 매년 꾸준히 급등하자 판매자들은 이러한 경향이 지속될 것을 기대했고, 따라서 판매가 감소해도 한동안 호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그러다가 2006년 늦봄에 이르러 시장의 약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격은 처음에는 서서히 떨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급락의 물살을 탔다. 널리 사용되는 케이스-실러 주택 가격 지수에 따르면 2007년 2분기까지의 집값 하락률은 1년 전 정점 대비 약 3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듬해 1년 동안 무려 15퍼센트가 넘게 떨어졌다. 물론, 가격하락 폭은 거품이 가장 크게 일었던 지역, 일테면 플로리다 해안 등지에서 더욱 크게 나타났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대출 붐의 근거가 되었던 여러 가정들은 처음의 점진적 가격 하락 때부터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다. 서브프라임 대출의 핵심 근거는 바로 대부자의 관점에서 차용자의 실제 모기지 상환 능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집값이 계속 오른다면 차용자는 만약 상황이 어려워져도 언제든 재융자를 받거나 집을 팔아 상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집값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집을 쉽게 팔 수 없게 되자 곧바로 채무불이행 건수가 많아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또 하나의 불쾌한 진실이 드러났다. 유질처 분(담보물을 찾을 권리의 상실-옮긴이)은 주택소유자에게도 비극이지만 대부업자에게도 불리한 거래라는 점이다. 유질처분된 주택을 시장에 다시 내놓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과 법적 비용,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쉽게 낡아버린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차용자의 집을 취득한 채권자는 대체로 대출금을 온전히 회수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원금의 절반 정도선에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9장 공포의 총합 207

사실상 일종의 은행 역할을 하며 3,300억 달러 가치의 대부를 제공하던 경매방식채권은 사라졌다. 또 하나의 사실상 은행 부문으로 1조 2,000억 달러의 대부를 제공하던 자산유동화기업어음은 이제 겨우 7,000억 달러 규모로 축소됐다. 다른 그림자 금융 장치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시장에선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재무부증권(단기채권)의 이자율이 0퍼센트 가까이 떨어진 것인데, 투자자들이 안전한 투자처로 피신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논평자의 표현을 빌리면 “투자자들이 사려는 것은 오직 미국 국채와 생수뿐”이었다. (미국 국채가 지구상의 어떤 것보다도 안전한 이유는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책임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붕괴하면 세상도 거의 붕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수가 필요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간혹 미국재무부증권의 이자율은 마이너스로 내려가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금융 거래 담보물로 오직 이것만을 요구하는데 반해, 공급이 제한적인 탓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 지기 때문이다.

일부 차용자들은 다시 전통적인 은행에서 대출을 모색함으로써 그림자 금융시스템의 붕괴에 따른 여파를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와 관련해 기대를 거스르는 듯 보인 한 가지 측면이 바로 은행대출의 확장이었다. 이것이 일부 관찰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대체 어디서 신용경색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전통적 은행의 대출 증가만 으로는 그림자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인한 여파를 상쇄하기에 역부족이 었다.

소비자신용은 결코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았지만 2008년 10월에 이르자 신용카드도 도마 위에 올랐다는 증거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9장 공포의 총합 213

물론 이것은 멋지고 중요하며 장기적으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쟁점들이다. 그러나 케인스가 지적 했듯이 장기적으로 보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기 마련이다.

한편, 단기적으로 보면 세계는 연이은 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이러한 위기들의 핵심에는 모두 충분한 수요 창출의 문제가 놓여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부터 줄곧, 1995년에는 멕시코가, 1997년에는 멕시코·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한국이, 200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그리고 2008년에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연이어 일시적이나마 수년 간의 경제적 발전을 원상복귀 해놓을 정도의 경기후퇴를 경험하며 전통적인 정책 대응들이 어떠한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이로써 다시 한번, 경제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요를 창출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해졌다. 즉, 불황경제학이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왔다는 얘기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상 상황에 대한 대처

지금 당장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구조 작전이다. 전 세계의 신용 시스템은 마비 상태이며, 이 글을 쓰는 지금 세계적인 불황은 계속 추진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야기한 경제적 취약점들을 개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발등의 불을 끄는 일이 먼저란 얘기다. 이를 위해 전 세계 정책입안자들이 행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바로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 지원이다.

228 불황경제학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부분적으로는 부시 행정부의 이데올로기적 성향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의 금융 구제가 현재 미국 및 여타 선진국들에서 시행되고 있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한 후 처음에 미 재무부는 은행과 기타 금융 기관들로부터 7,000억 달러어치의 부실자산을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이 상황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만약 재무부가 시장 가치 그대로 지불한다면 은행의 자산 상태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시장 가치 이상을 지불한다면 납세자의 돈을 함부로 낭비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미국은 3주 동안 안절부절 못하다가 영국과 유럽 대륙국들의 선례를 따라 이 계획을 자본재구성(recapitalization) 계획으로 바꾸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조치로 상황이 충분히 바뀔 수 있을지 미심쩍어 보인다. 첫째, 자본재구성에 7,000억 달러가 모두 쓰인다고 해도(지금까지는 이 중 아주 소액만이 사용되었다) GDP 대비 일본의 은행 구제 규모와 비교하면 여전히 작은 액수다.(현재 미국 및 유럽의 금융위기 심각성은 일본의 위기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어느 정도의 구제책이 나와야 문제의 핵심인 그림자 금융시스템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가 여전히 미지수다. 셋째, 은행들이 이 자금을 보유하지 않고 기꺼이 대출해줄 것인지의 여부가 분명치 않다. (75년 전 뉴딜 정책이 직면 한 문제이기도 했다)

내 생각은 자본재구성이 더 크고 광범위해야 하며, 정부의 입김도 결국 더 세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사실상 금융시스템의 상당부분이 완전한 국유화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것, 즉 국가가 경제의 주도 세력이 되는 것이 장기적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전해진 순간부터 금융은 다시 민영화되어야 한다. 1990년대 초반에 스웨덴이 대규모 구제책을 펴고 나서 은행을 다시 민간부문으로 돌려보냈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신용을 이데올로기라는 매듭으로 묶지 말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시스템을 구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 다소 '사회주의적'이라는 우려 때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230 불황경제학

 

금융개혁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에 케인스는 "마그네토가 고장 난 셈"이라고 말했다. 경제 엔진의 대부분은 멀쩡하지만 주요 부품인 금융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의미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다루기 어려운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해 적절히 조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진술 모두 그때나 지금이나 엄연한 진실이다.

이번의 두 번째 거대한 혼란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대공황 이후에 우리는 해당 기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즉 대재앙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설계했다. 1930년대에 치명적인 오작동을 일으킨 부품(은행)을 엄중한 규제 밑에 놓고 강력한 안전망으로 이를 지지하는 한편, 당시에 파괴적 역할을 했던 자본의 국제적 이동도 제한했다. 금융시스템은 다소 따분해졌지만 훨씬 더 안전해졌다.

그러다가 다시 흥미롭고도 위험천만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자본의 국제적 흐름이 증가하면서 1990년대의 파괴적 통화위기와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의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림자 금융시스템은 크게 성장한데 반해 규제가 이에 걸맞게 확대되지 않자 대규모 현대판 뱅크런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이번 뱅크런에서 군중들은 굳게 잠긴 은행 문 앞에 몰려들어 미쳐 날뛰는 대신에 미친 듯이 마우스를 클릭해댔지만 결코 그 정도가 덜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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