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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열세 번째 책 : 잠수종과 나비 - 장 도미니크 보비

by 마파람94 2025. 3. 10.


저자는 BMW 차에서 잠수종과 함께 서서히 가라 앉았습니다.
 - 실제 잠수복을 약 20년을 썼던 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 내용과는 좀 상관 없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지난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야기를 통해 프랑스 남부 도시 칸의 지중해 섬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번에 장 도미니크 보비의 글을 통해 프랑스 북부 북해에 접해있는 베르크의 바닷가를 상상해 봤습니다.
그리고 베르크를 검색해 봤고요. 영화 배경으로도 표현 되었기에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역시 글로 만나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은 좀 심하게 표현하면 각도와 방향이 좀 다른 느낌입니다.

앗!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과 음악이 있습니다. 장면은 베르크로 추정되는 바닷가에 솓은 절벽이 무너져내리는 씬이구요. 삽입된 음악으로 바흐의 콘체르토 NO.5 BWV 1056 은 제 인생 멜로디인데, 극중(약 35분 쯤)에 삽입되었습니다.

음악은 샹드리느에게 언어 훈련 후 이를 포기하고자하는 이야기 이후 잠수종으로 심연에 빠진후 절벽이 무너져내리는 장면에 삽입되었습니다.

아래 음악도 공유해봅니다.

 
 

https://youtu.be/zc5lhK00GSg

J.S. BACH, CONCERTO NO.5 IN F-MINOR FOR HARPSICHORD AND STRINGS (BWV 1056) - LARGO, MARIA JOÃO PIRES

 

 






Prologue

책머리에

군데군데 벌레 먹은 커튼이 우윳빛으로 뿌옇게 밝아 오는걸 보니 새벽이 오는 모양이다. 발뒤꿈치가 아프다.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고, 온몸은 잠수종 속에 갇힌 듯 갑갑하게 조여 온다. 내 방에서 어둠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사진과 아이들이 보내온 그림, 포스터, 그리고 친구 녀석 이 파리와 루베팀의 경주 바로 전날 보내온 양철로 된 자전거 선수 조각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Prologue | 13

바위에 붙어사는 소라게처럼 몸을 붙이고 있는 침대 위로 솟아오른 막대기도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지난해 12월 8일부터 나의 삶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서는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뇌간(brain stem, 腦幹)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날 심장 순환기계통의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이 기관이 고장 나자, 비로소 나는 뇌간이라는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컴퓨터 장치의 핵이며, 뇌와 말단신경을 이어 주는 통로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처럼 급작스런 사고를 ‘뇌일혈'이라 불렀으며, 한번 걸렸다 하면 백발백중 죽는 병이었다. 그러다가 요즘에 와서 는 소생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상황이 좀 더 복잡해졌다.

14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죽지는 않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즉 영미 계통의 의사들 이 '로크드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라고 표현한 상태가 지속된다. 왼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만 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이런 소상한 내용은 언제나 당사자가 가장 늦게서 야 알게 되는 법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0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벗어난 후에도 몇 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정확한 병명과 증세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막어 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베르크 해양병원 119호 병실에서, 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한 것은 1월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아침이다. 7시가 되자, 예배당의 종소리가 15분마다 한 번씩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 시작한다. 밤새 잠잠했던 기관지가 고인 가래를 뱉어 내려는 듯 갑자기 그르렁대기 시작한다.

Prologue | 15

노란색 시트 위에 경련을 일으키는 손 때문에 고통스럽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혹은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근육이 경직되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기지개를 켜보려하지만, 내 팔다리는 겨우 몇 밀리미터 정도만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사지의 통증을 더는데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 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 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 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로 달려가 그 곁에 누워, 그녀의 잠든 얼굴을 어루만질 수도 있다. 공중누각을 지을 수도 있고, 황금 양털을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를 향한 모험길에 오를 수도 있고, 유년 시절의 꿈이나 성인이 된 후의 소망을 실현에 옮길 수 있다.

16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보답을 드리는 것이 나의 도리라는 갸륵한 생각을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카메룬의 한 주술사에게 나 의 완쾌를 빌어 준 친구의 성의를 봐서, 아프리카 출신 수호신들에게 나의 오른쪽 눈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또 신심이 두터운 장모님께서 보르도 교구 신부님들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을 간청하신 답례로, 내 청각을 하느님께 제공했다. 신부님들께서는 지속적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나는 때때로 그 수도원을 찾아가 하늘까지 울려 퍼지는 그들의 찬송을 듣는다.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회교도 광신자들에게 일곱 명의 수도사들이 학살당하였을 때에는, 어쩐 일인지 여러 날 동안 귀가 아팠다. 하지만 이 처럼 다양한 신들의 철통 같은 보호막도, 내 딸 셀레스트가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 비한다면 한낱 종이벽에 불과하다. 그 아이와 내가 잠드는 시간이 거의 일치하므로, 나는 밤마다 나를 악몽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비스런 기도 소리와 더불어 꿈의 나라로 향한다.

28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ESARINTULOMDPC F B V H G J Q Z Y X X w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는 이 글자 행렬은, 하 지만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하고 복잡한 계산의 결과이다. 따라서 단순한 알파벳이라고 하기보다는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철자를 배치한, 이를테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자 주 쓰이는 E가 제일 앞에 나오고, W는 꼴찌 자리라 도 감지덕지. B는 발음이 혼동되기 쉬운 V와 하필이 면 이웃하게 되어 뾰로통, 하고많은 문장에서 제일 앞에 나와 거만해진 J는 뒤쪽으로 밀린 자기 위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H보다 한 자리 뒤로 밀린 뚱뚱보 G는 심술을 부리고, T와 U는 둘이 붙어 있게 되어 기쁜 듯. 나와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만다행.

36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아마도 나는 그 역무원의 편지를 스무 번도 더 읽었 을 것이다. 외제니 황후가 이 병동 저 병동을 돌아다닐 때, 나는 조잘대는 여인 수행부대 틈에 끼여 눈으로는 황후의 노란 리본이 달린 모자와 태피터 양산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코로는 황후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 나오는 향수의 내음을 즐기곤 하였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날에는 황후에게로 다가가, 굵은 새틴 줄무늬가 진 하얀 치마의 주름 사이로 내 머리를 파묻기도 했다. 생크림처럼 보드랍고 새벽이슬처럼 신선한 느낌이었다. 황후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봐요, 인내심을 가져야 해요"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스페인 억양이 섞인 황후의 목소리는, 신경과 의사의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황후는 이제 리타 성녀처럼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의 수호신이며 위안자였다.

내가 나의 슬픔을 황후의 흉상 앞에서 털어놓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웬 사람이 나와 황후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열장 유리에 비친 그 사나이의 모습은 마치 석탄독에 빠졌던 것처럼 거무튀튀했다. 입은 비뚤어지고, 코는 울퉁불퉁한 데다가 머리카 락은 제멋대로 곤두섰고, 시선마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한쪽 눈은 꿰매져 있었고, 나머지 눈은 흡사 카인의 눈처럼 커다랗게 열려 있었다.
L'impératrice | 43


잠시 동안 나는, 이 가엾은 피후견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희열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저 내가 몸은 마비되고 말도 못 하는 데다가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이 말미잘처럼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귀양살이를 하는 보잘것없는 처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몰골까지 이렇게 끔찍할 줄이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 운명을 바꿔 놓은 그날의 사고 이후, 줄곧 내가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제니 황후는 나의 이 같은 발작적인 웃음에 처음엔 몹시 당황했으나, 곧 전염이 되었다.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함께 웃어댔다. 그때 마침 시립 악단이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나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외제니 황후에게 춤이라도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 다. 우리는 대리석 바닥을 지칠 줄 모르고 뱅뱅 돌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회랑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외제니 황후가 어쩐지 나를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44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부르고뉴 스튜는 먹음직스러울 만큼 적당히 기름기가 흐르며, 쇠고기 젤리는 투명해서 신선한 내용물이 한눈에 들어오며, 살구 파이는 알맞게 새콤하다. 기분에 따라 가끔 달팽이 요리 한 접시와, 푸짐하게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슈크루트(양배추 절임 요리]에다가 '늦게 수확한 포도로 생산' 했다는 품질보증서가 붙은 게뷔르 츠트라미네르 포도주 한 병을 곁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간단하게 계란 반숙과 버터를 바른 가느다란 빵만 을 먹기도 한다. 음, 그 맛이란! 따뜻한 계란 노른자위가 입천장을 지나 목구멍으로 서서히 내려온다. 소화 불량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물론 가장 좋은 재료 만을 엄선해서 쓴다. 제일 신선한 채소,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생선, 적당히 기름기가 도는 고기. 모든 재 료는 엄격한 요리 규칙에 따라 조리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보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한 친구는 내게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고기를 가늘게 썰어 뚤 뚤 감아서 만드는 원조 트루아 순대 비법을 보내 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계절의 변화도 철저하게 고려해 넣는다.

Le saucisson | 57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멜론과 붉은 과실류로 내 미각을 상쾌하게 하고 있다. 굴과 불치고기는 가을에나 음미할 작정이다. 하긴 그때까지 입맛 이 유지되어야 할 테지만. 왜냐하면 성찬을 즐기다가 도 곧 제정신으로 돌아와 금욕 생활에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결핍감 때문에 끊임없이 음식 창 고를 들락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폭식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머릿속 한구석에 늘 매달려 있는 마 른 소시지 한 줄 정도면 만족스럽게 여긴다. 농가에서 직접 손으로 만들어 모양도 울퉁불퉁한 리옹 소시지를 적당히 말려, 두툼하게 서너 조각 썰어먹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조각 한 조각 씹기도 전에 이미 혓바닥에서 살살 녹는 듯하다. 소시지로 인한 이 같은 즐거움의 내력은 이미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탕을 좋아해야 할 나이에, 나는 이미 사탕보다 햄이 나 소시지를 더 좋아했다. 나는 라스파유가에 자리한 외할아버지의 음침한 아파트를 방문할 때마다. 외할아 버지를 돌봐 주시던 간호사에게 소시지를 달라고 애교 섞인 혀짜래기 소리로 졸라댔다.

58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L'ange gardien

수호천사

상드린느의 하얀 가운에 달려 있는 명찰에는 언어장애치료사라고 적혀 있지만, 수호천사라고 읽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내게 의사소통 체계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상드린느이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전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친지들 대부분은 병원에 와서 이 방법을 익혔지만, 병원 직원 중에서는 상드린느와 심리학자만이 이 방법을 사용할 줄 안다.

L'ange gardien |

61

기력을 소진시키는 이 같은 연습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가 언어를 처음으로 발견하는 동굴의 원시인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끔씩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이 훈련이 중단되기도 한다. 친지들에게 상드린느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전화를 하도록 부 탁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통해 마치 나비를 잡듯이, 친 지들의 삶의 한 귀퉁이를 붙잡아 볼 수 있다. 내 딸 셸 레스트는 조랑말 등에 올라탔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다. 셀레스트는 5개월만 지나면 아홉 살이 된다. 아버지는 두 다리로 서 계시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하신다. 벌써 아흔세 살이신데, 그만하면 건강하신 편이다. 딸과 아버지는 나를 에워싸고 보호해 주는 사랑이라는 고리의 두 중심점이다. 나는 때때로 일방통행식 대화로 만족해야 하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할지 무척 궁금하다. 나 자신은 번번이 마음이 요동할 정도로 감정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다정한 친지들의 전화에 침묵이 아닌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개중에는 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는 플로랭스는 상드린느가 내 귀에 바짝 대주는 송수화기에 내가 큰 소리로 숨소리라 도 들려주지 않으면, 근심에 차서 "장 도, 듣고 있나 요?"를 연발한다.

때때로 나는 내가 듣고 있는지조차 잘 모를 때가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64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날을 갈지 않은 면도칼로 그런대로 열심히 내 볼을 면도해 줄 때마다. 나는 자주 아버지 생각을 한 다. 내가 해 드린 면도가 이발사 피가로의 솜씨보다 나 았었으면 다행이겠다.

아버지가 이따금씩 내게 전화를 하시므로, 누군가 가 내 귀에 송수화기를 대주면 약간 떨리지만 온정에 넘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답을 들 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의 아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또 미니 골프장에서 찍은 내 사진을 보내 주셨다. 나는 처음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사진의 뒷면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두고두고 그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그제서야 내 머릿속에서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어느 봄날의 주말 광경이 영화 필름처럼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나는 바람이 몹시 불고 약간 음산한 한 마을에서 산보를 하던 참이었다. 틀이 잘 잡힌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아버지는 사진 뒤쪽에 베르크 쉬르메르, 1963년 4월이라고만 적어보내셨다.

70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다음날 우리는 투르 드 프랑스(le Tour de France: 매 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일주 사이 클 대회) 코스의 일부분인 높은 고개를 자동차로도 힘겹게 넘어서, 찜통 같은 더위로 숨이 막힐 듯한 루르드에 도착했다. 조제핀은 운전을 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손때가 묻어 두툼해지고 모양도 구깃구깃 해진 《뱀의 자취》는 뒷좌석에 팽개쳐져 있었다. 아침부터 내내 감히 책을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제핀이 내가 이국정취를 물씬 풍기는 소설에만 열중하는 나머지, 자기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시기적으로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성수기라서 도시는 온통 만원사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텔이란 호텔은 샅샅이 훑고 다녔다. 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곤란해서 어깨를 으쓱거리거 나, 혹은 유감스럽다는 호텔 종업원의 형식적인 인사치레뿐이었다.

94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Paris
파리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 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린다.



Paris 115

잠수종에 갇힌 신세가 된 이후에도, 나는 전격적으로 두 번이나 파리에 다녀왔다. 의학계 정상급들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첫 번째 여행 때에는, 앰뷸런스가 내가 편집장으로 일했던 여성 주간지의 초현대식 건물 앞을 지날 때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됨을 느꼈다. 나는 먼저 우리 잡지사의 옆건 물을 알아보았다. 6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서, 곧 철거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뒤이어 거울 로 된 우리 건물의 전면에 구름과 비행기가 반사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 앞 광장에는 이름은 모 르지만 10년 동안 매일 마주쳐서 낯이 익은 사람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나는 고개를 최대한으로 돌려 혹시 아는 사람이 저쪽 여자 뒤에 서 있지는 않는지, 회색 작업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뒤에 반가운 얼굴이 가려져 있지는 않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운명은 내 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6층 편집실로부터 나를 태 운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나는 내가 가끔씩 점심식사를 하러 들르던 근처 식당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울 수가 있다.

116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나는 뛰어난 편지들을 받아 본다. 병원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연중에 의식처럼 굳어진 절차에 따라 편지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어 편 다음, 내 눈앞에 잘 보이도록 놓아준다. 무언의 성스러운 예식으로 편지의 도착을 기념하는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 편지를 한 통씩 정성 들여 읽는다. 어떤 편지는 아주 심각한 내용이다. 삶의 의미와 영혼의 고귀함, 인생의 오묘함 등에 대해 말하는 편지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와의 관계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이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박하게 보이는 인간관계 밑에 인생의 깊이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토록 눈멀고 귀 멀었던 것일까? 혹은 불행을 당해 보아야 비로소 진실한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는 것일까?

122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다른 편지들은 소박하게 시간의 흐름을 구별지어 주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해 준다. 저녁 해질 무렵에 꺾은 장미꽃, 비 오는 일요일의 나른함, 잠들기 전 울음보를 터뜨리는 어린아이 등등. 삶의 순간에서 생생하게 포착된 이러한 삶의 편린들, 한 줄기 행복들이야말로 나에게 다른 어느 무엇보다 깊은 감동을 안겨 준다. 단 석 줄짜리 짧은 편지이건 여덟 장짜리 장문의 편지이건, 또 머나먼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왔건 가까운 파리 교외에서 왔건, 나는 이 모든 편지들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한다. 언젠가 나는 이 모든 편지들을 한 장씩 붙여서 1킬로미터짜리 리본을 만들어, 우정을 찬미하는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말 많은 독수리들을 멀리 쫓아 버릴 수 있을 텐데.

Le légume | 123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미트라 그랑샹의 일화를 잊고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남으로써 나는 이중으로 고통스럽다.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향수와, 특히 놓쳐 버린 기회에 대한 떨쳐버리기 어려운 미련이라는 두 가지 감정 때문이다.

미트라 그랑샹은 사랑할 줄 몰라서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들일 수도 있고, 잡을 줄 몰라서 흘려보낸 기회일 수도 있으며, 멀리 날아가 버린 행복의 순간들일 수도 있다. 요즈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전체가 이처럼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답을 뻔히 예상했으면서도 상을 탈 수 없는 경주. 말이 나온 김에 덧 붙이자면, 우리는 판돈을 모두 환불함으로써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Vingt contre un |

139

'A day in the life'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이젠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듯하다. 이제부터 1995년 12월 8일에 일어난 청천벽력 같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애초부터 나는 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았던 마지막 날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뒤로 미룬 나머지 이제 막상 내 과거로 불쑥 점프를 하려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조각으로 깨어진 체온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은 방울을 잡기가 무척 어렵듯이, 나는 이 무겁고 공허한 순간들을 어떻게 포착해야 할지 모르겠다.

'A day in the life' |

171

 말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해 간다. 늘씬한 갈색머리 여인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육체 곁에서 정상인으로서의 마지막 잠을 자고 눈을 떴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는채 오히려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그 아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하늘, 오가는 사람들, 며칠 동안 계속되는 대중교통수단의 파업 시위 등, 모든 것이 잿빛이었고 질척질척한데다가 체념의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수백만 파리 시민들과 다름없이 플로랭스와 나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잠이 덜 깬 눈에 피곤에 지친 안색을 한 채, 도저히 빠져나올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서의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면도하기, 옷 입기, 코코아 한 사발 마시기 등, 지금 생각하면 기적같이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모든 동작을 기계적으로 해치웠다. 벌써 여러 주일 전부터 나는 이날을 한 수입업자가 권하는 대로, 독일 자동차 회사 제품을 운전사를 대동한 상태로 시운전해 보는 날로 정해 두었다.

172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약속 시간이 되자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 은회색빛 BMW 앞에 몸을 기댄 채, 우리 아파트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나는 육중하면서도 안락해 보이는 커다란 리무진 자동차를 살펴보았다. 오래된 진 재킷을 걸치고, 회사 중역들이 주로 애용하는 이 승용차를 몰면 잘 어울릴까 자문해 보았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살갗에 닿는 찬기운을 느껴 본다. 플로랭스가 다가와 부드럽게 내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작별인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나 싶을 때, 나는 벌써 왁스 냄새가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냄새.

오늘 난 뉴스를 읽었다네, 가엾은 친구.......

라디오에서는 교통 혼잡을 알리는 스포트 뉴스 사이사이로 비틀스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가 흘러나 온다. 하마터면 나는 비틀스의 ‘오래된' 노래라고 적을 뻔했다.

'A day in the life' | 173

비틀스의 마지막 음반이 1970년에 나왔으니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인데, 불로뉴 숲을 가로질러 BMW는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미끄러진다. 부드러움과 쾌락의 보금자리, 운전사에게 아주 호감이 간다. 나는 그에게 오후 계획을 설명한다. 우선 파리에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자기 엄마와 살고 있는 내 아들 녀석을 찾아 차에 태우고, 저녁 무렵에 다시 파 리로 데리고 온다는 계획이다.

그는 불빛이 바뀐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네.......

지난 7월 내가 집을 떠난 이후로, 테오필과 나는 남자끼리의 진실한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아리아스의 새로운 연극을 구경한 뒤, 클리시 광장에 있는 한 식당에서 굴을 먹을 예정이다. 그렇지, 주말도 함께 보내야겠어. 파업 때문에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74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나는 나의 새로운 동반자인 플로랭스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마도 플로랭스는 금요일 저녁 기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금쯤 벌써 부모님 댁으로 떠나고 없을 것이다. 나는 딱 한번 유대인 가정 의식에 참석해 본적 이 있다. 바로 이곳 몽탱빌에서, 내 자식들의 탯줄을 잘라 준 나이 든 튀니지 의사 선생님 댁에서였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앞뒤가 제대로 맞지 않는다. 눈앞이 흔들거리는 듯하더니 머릿속도 멍해졌다. 그렇지만 BMW의 핸들 앞에 앉아 계기판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하지만 헤드라이트의 물결 속에서, 나는 내가 수천 번도 더 지나다 녔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커브길을 잘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차가 한 대 지나칠 때, 나는 그 차가 두 대로 보였다. 첫 번째 교차 로에서 나는 자동차를 길 한쪽에 세웠다. 그러고 나서 비틀거리며 BMW에서 내렸다. 나는 거의 서 있을 수 도 없었다. 얼른 뒷자리로 가서 주저앉았다.

'A day in the life' | 181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간호사인 처제 디안이 살 고 있는 마을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쯤밖에 의 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처제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테오필에게 뛰어가서 이모를 불러오라고 말했다. 잠시 후 디안이 왔다. 디안은 채 1분도 안 되 게 나를 검사하더니, 이렇게 선언했다. “병원으로 가 야 해요. 최대한 빨리.” 병원까지는 15킬로미터 거리였다. 운전사는 자동차 경주 선수처럼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마치 환각제라도 먹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내 나이에 환각제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도 생각했다. 단 한순간도 내가 아마 죽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망트로 가는 도로에서 BMW는 날카로운 모터 소리를 내며 거듭거듭 클랙슨을 울리면서, 앞에 가는 차들의 행렬을 뒤로한 채 달려갔다. 나는 “여보게, 이제 좀 괜찮네. 이렇게 쌩 쌩 달리다 사고를 낼 필요까진 없겠네"라는 식의 이야 기를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내보낼 수가 없었고, 말을 듣지 않는 고개는 계속해서 저 혼자 끄덕거렸다.

182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그날 아침에 들었던 비틀스의 노래가 다 시 생각났다.

소식이 좀 슬픈 편이어서,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네.

순식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이쪽저쪽으로 황급히 뛰어다녔다. 두 팔이 흔들거리는 나를 바퀴의 자로 옮겼다. BMW의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언젠가 좋은 차는 문 닫히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병원 복도의 형광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격려했으며, 비틀스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60층에서 떨어지는 피아노, 피아노가 완전히 떨어져 부서지기 직전에, 나는 연극 구경을 취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공연장에는 늦게 나 도착할 형편이었다. 내일 저녁에 가면 되겠지. 그런데 테오필은 어디 갔을까? 그리고 나서 나는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다.

'A day in the life' |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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