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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독서정리

서른 여덟 번째 책 : 채식주의자-한강

by 마파람94 2024. 10. 28.

노벨 문학상이 우리나라 작가에게서 나왔습니다. 대박 사건이죠. 얼른 책장에 오래전 부터 꽂혀있던 책을 꺼집어 냈습니다.

항상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뭐라도 글을 남깁니다.

이 책은 뭐라 표현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음 편하게 또는 신나게 읽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말이 없으면 좋다. 어른 들은 원래 저런 여자를 좋아한다고, 나는 조금 불편했던 마음을 손쉽게 떨쳐버렸다.

사장 내외와 상무, 전무 내외가 미리 와 있었다. 부장 내외는 바로 우리를 뒤따라 들어왔다. 목례와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 뒤 아내와 나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눈썹을 가늘게 뽑고 커다란 비취 목걸이를 한 사장 부인이 안내하는 대로 아내와 나는 만찬용 긴 식탁 앞에 섰다. 모두 자주 와본 장소인 듯 편안해 보였다. 용마루처럼 장식한 천장을 눈여겨보며, 돌로 만든 어항에 떠다니는 금붕어들을 곁눈질하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뜻 없이 아내를 돌아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약간 달라붙는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두 개의 젖꼭지가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을 살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전무 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태연을 가장한 그녀의 눈이 호기심과 아연함, 약간의 주저가 어린 경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나는 뺨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끼리의 사교적인 대화에 참가하지 않은 채 멍하게 앉아 있는 아내를, 그녀를 흘 끔거리는 시선들을 의식하며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채식주의자 29

*

이제는 오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도 할 수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 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 카로워지는 거지.

*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아파트의 십칠층이었다. 앞동이 전망을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뒤쪽으로는 멀리 산자락이 보였다.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 완전히 자리를 잡았구나." 장인이 수저를 들며 한마디 했다.

채식주의자 43

한 뒤 그녀를 들쳐업었다.

"자네는 빨리 내려가 시동 걸어!"

나는 더듬더듬 구두를 찾았다. 짝이 맞지 않아, 두 번을 바꿔 신은 뒤에야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그 개의 꼬리털을 태워 종아리의 상처에 붙이고, 그 위로 붕대를 친친 감고, 아홉 살의 나는 대문간에 나가 서 있어. 무더운 여름날이야.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흘러내려. 개도 붉은 혓바닥을 턱까지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어. 나보다 몸집이 큰, 잘생긴 흰 개야. 주인집 딸을 물어뜯기 전까진 영리하다고 동네에 소문났던 녀석이었지.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52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

여자들은 놀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집에 남고, 처남은 뒤 이어 혼절한 장모를 돌보고, 동서와 내가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아내를 날랐다. 응급상황을 넘긴 아내가 이인용 일반병실로 옮겨지자 그제야 두 남자 모두 피가 말라 꾸덕꾸덕해진 옷을 의식했다.

오른팔에 링거바늘을 꽂은 채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나도,

채식주의자 53

무용수와 같은 깡마른 상체들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도발적인 춘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몸은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상황의 자극적인 요소를 상쇄할 만큼 다부졌고 고요했다.

한순간 이 이미지는 그에게로 왔다. 일 년여의 고갈상태가 어떻게든 끝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던, 에너지가 조금씩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던 지난겨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파격적인 이미지이리라고 그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전까지 그가 해왔던 작업은 다분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모되고 찢긴 인간의 일상을 3D 그래픽과 사실적 다큐 화면으로 구성했던 그에게, 관능적인, 다만 관능적일 뿐인 이 이미지는 흡사 괴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 일요일 오후 그에게 아들을 목욕시켜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들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서 안고 나온 뒤, 아내가 아들에게 팬티를 입히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몽고반점이 제법 크게 남아 있군. 대체 언제나 없어지는 거지?" 하고 묻지 않았다면. 아내가 “글쎄……………… 나도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영혜는 뭐, 스무살까지도 남아 있었는걸” 하고 뜻 없이 말하지 않았다면. "스무살?" 하는 그의 물음에 “응……………… 그냥, 엄지손가락만하 게, 파랗게, 그때까지 있었으니 아마 지금도 있을 거야"라는

몽고반점 73

*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그전에 그는 조금도 처제에게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제가 그의 집에 있는 동안 보였던 행동들을 기억할 때 그의 몸에서 치밀어 오르는 관능은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벌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 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 반쯤 벌린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다.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 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한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

몽고반점 67

*

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 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 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 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 듯 거세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딱히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다만 목선이 고운 편이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옅은 화장을 했으며, 흰 반소매 블라우스는 구김 없이 청결하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그 단정한 인상 덕분에, 희미하게 얼굴에 배어 있는 그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무 불꽃

151

그녀를 남기고 간호사실로 돌아가기 전에 간호사는 말했다. ………………조금만 힘주어 밀면 쓰러지거든요. 얘기가 잘 안되면 밀어보세요. 안 그래도 저희가 밀어서 병실로 가게 하려던 참이었어요.

혼자 남은 그녀는 쪼그려 앉아 영혜와 눈을 맞추려 했다. 누구든 거꾸로 섰을 때의 얼굴은 바로 섰을 때의 얼굴과 달라 보인다. 별로 살이 없는 편인데도 영혜의 얼굴은 피부가 아래로 밀려 기이해 보였다. 생생히 번쩍이는 눈으로 영혜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 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마침내 그녀는 영혜의 몸을 힘주어 밀었다. 과연 다리부터 바닥으로 털썩 무너졌다. 그녀는 영혜의 목에 팔을 받쳐 들어 올렸다.

……………언니.

영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왔어?

마치 좋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혜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178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희주 씨의 격앙된 음성이 느닷없이 기억 속으로 뛰어든다.

어떡해요, 영혜. 죽을지도 모른다면서요.

비행기가 빠르게 이륙할 때처럼 그녀의 귓속이 멍해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기억이 그녀에게 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년 전 사월, 그러니까 그가 영혜의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그녀는 한 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피에 젖은 속옷을 빨 때마다 수개월 전 영혜의 손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선혈이 떠오르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 워 하루하루 진찰을 미루며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 년. 육 개월. 아니면 삼 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 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지우를 낳은 산부인과로 향하던 오전, 그녀는 국철 왕십리역의 실외승강장에 서서 유난히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 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후락한 철조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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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과 포식이란, 원래 그리도 고독한 행위였던가? 이런 점에서 그녀가 먹는 행위에 들였던 열정은 소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고기 요리 앞에서 입을 닫고, 그 외의 음식 앞에서 입을 여는, 사뭇 단순하고 절제된 행위는 어째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가?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준수해야 하는 식탁의 법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함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회사의 부부동반 모임에 가서 자신의 유두만큼이나 '두드러진' 존재로서 자리를 지켰던 장면에서처럼. 법의 충실한 옹호자들은 법의 체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품고 있을 법에 대한 불신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범법자들을 부르는 수많은 세부명칭이 있는 이유는 그들을 법의 어휘로 호명할 때 그들이 지닌 불온성이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순화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서 먹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저 몸이 일러주는 대로 소박한 원칙을 실천했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려 했다. 그녀의 시간과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가 실천하는 행위와 사람들이 그것의 속성을 규정하는 행위 사이에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간극이 굳게 버티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 '주의(主義)'라는 말은 대개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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