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입장, 나의 자아에 대한 것, 미처 그려보지 못한 낯선 환경을 떠올려 보는 것, 그리고 처음 본 단어, 음악, 문장들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내용 중 칠성장어 이야기는 낯선 느낌의 정점이라는 생각이고, 내 차를 누군가에게 의뢰하여 실려다니는 상황도 억지로 만들어 봅니다. 갇힌 공간에서 깨어나서 어렵게 몸을 움직이는 상상도 합니다.
이번 책을 통해 두 가지의 새로운 음악-나에게 있어서-을 알게 되었습니다. 퍼시페이스의 A Summer Place, 그리고 13 jours en France 이 두 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플 뮤직 주크박스에 담아 둡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좋아했던 음악들에 은연중에 빠져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다카쓰키가 과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후쿠는 직업상 수많은 술꾼을 만나왔지만 (왜 배우들은 그토록 열심히 술을 마시는지), 다카쓰키는 어떻게 봐도 건전하고 건강한 부류에 속하는 술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그가 지우려는 것이 무엇인지 가후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심약한 성격일 수도 있고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현실적으로 떠안고 있는 골칫거리일 수도 있다. 그런 모든 것의 혼합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뭐가 됐건 그의 내면에는 '가능하면 잊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잊기 위해, 혹은 그것이 자아내는 아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술을 입에 털어 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후쿠가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다카 쓰키는 같은 술을 두 잔 반 마셨다. 상당한 하이페이스다.
어쩌면 술 마시는 페이스가 빠른 것은 정신적 긴장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이 예전에 은밀히 동침한 여자의 남편과 단둘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 자리다.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44
가후쿠는 그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이지."
"맞습니다." 다카쓰키는 인정했다.
"나는 지금 죽은 아내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렇게 간단히 일반론으로 몰아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다카쓰키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가 아는 한, 가후쿠 씨 부인은 정말로 멋진 여자였어요. 물론 내가 안다고 해봐야 가후쿠 씨가 아는 것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그런 멋진 사람과 이십 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걸 가후쿠 씨는 뭐가 어찌됐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드라이브 마이카 51
그보다는 이쯤에서 한번 각자 다른 길을 걸어보고, 그러다가 역시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으면 그때 다시 합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선택지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어때, 알겠냐?"
"알 듯 모를 듯하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무사히 대학 졸업하고, 어디 회사에 취직하고, 그대로 에리카랑 결혼해서 모두의 축복 속에 잘 어울리는 부부가 되고, 아이도 둘쯤 낳고, 어릴 때부터 익숙한 오타 구립 덴엔초후 초등학교에 보내고,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다마가와 강변에 가서 놀고, *오블라디 오블라다....... 물론 그런 인생도 전혀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인생이란게 그렇게 미끈하니,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편안해도 괜찮을까. 그런 불안도 내 안에 없지 않더란 말이야."
"자연스럽고 원활하고 편안한게 지금 문제다. 그런 얘기야?" "뭐, 그런 얘기지."
자연스럽고 원활하고 편안한게 왜 문제라는 것인지 나는 영 알 수 없었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더는 따지지 않기로
*비틀스의 노래 제목, 나이지리아 부족의 말로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라 는 뜻이라고 한다.
예스터데이 79
나한테는 그런 쪽으로 첫 경험이었으니까."
"그리고 기타루는 감이 좋은 녀석이고."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눈길을 떨구고 목걸이의 진주를 잠시 한 알 한 알손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아직 제자리에 잘 달려 있는지 확인하듯이. 그러고는 어떤 생각에 다다른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키는 상당히 예리한 직관력이 있었어."
"하지만 결국 그 동아리 선배와도 잘되지 않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 그래서 그렇게 멀리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었어. 아직도 한참 그러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누구나 끝없이 길을 돌아가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가만있었다. 좀 있어 보이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내가 가진 문제점 중 하나다.
"기타루는 결혼했어?"
"내가 알기로는 아직 혼자야." 구리야 에리카는 말했다. “적어도 결혼했다는 엽서는 받은 적 없어. 어쩌면 우리 둘 다 결혼이 어려운 사람이 됐는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그저 서로 각자의 길을 멀리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예스터데이 109
의대 성형외과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처음에는 조수로 아버지 일을 거들다가, 아버지가 시력이 나빠져 은퇴한 뒤로는 직접 클리닉 운영을 맡았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외과의사로서 실력은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미용성형이라는 세계는 그야말로 옥석이 뒤섞인 곳이라 광고만 요란하고 실상은 몹시 무책임한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양심적으로 해 왔고, 환자와 큰 트러블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나는 그 점에 대해 프로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생활에도 불만이 없어요. 친구도 많고, 몸도 아직 별 탈 없이 건강해요. 나름대로 내 생활을 즐기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 들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 진지하게 말이죠. 내게서 성형외과 의사의 능력이나 경력을 걷어낸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생활환경을 잃는다면,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한낱 맨몸뚱이 인간으로 세상에 툭 내던져진다면, 그때 나는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카이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뭔가 반응을 원하는 듯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나는 물었다.
"어쩌면 얼마 전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읽은 탓도 있을 겁니다. 전쟁 중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내과의사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140
베를린에서 개업의로 일하던 유대인이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때까지 그는 가족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존경, 환자의 믿음 속에 근사한 저택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왔어요. 개도 몇 마리 기르고, 첼로가 취미라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의 실내악을 연주했죠. 평화롭고 풍요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고 생지옥 같은 장소에 갇힙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풍족한 베를린 시민도, 존경받는 의사도 아니고, 하물며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가족과 떨어져 들개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합니다. 고명한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용소 소장이 어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단 가스실에 끌려가는 건 면했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간수의 기분에 따라 어이없이 곤봉에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다른 가족들은 이미 살해됐을 것이고."
그는 잠시 틈을 두었다.
"그걸 읽고 나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의사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장소와 시대만 바꾸면 그대로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만일 내가 어떤 이유로든-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지금의 생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끌어내려져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그저 번호뿐인 존재로 전락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독립기관 141
책을 덮자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어요. 성형외과 의사의 기술과 신용을 빼면 나는 아무 장점도 없고 아무 특기도 갖지 못한 그냥 쉰두 살 남자입니다. 아직 건강한 편이지만 체력은 젊은 시절보다 못해요. 거친 육체노동은 오래 버텨내지 못하겠죠. 내가 자신 있는 것이라고는 맛있는 피노누아를 고를 줄 안다거나, 단골 레스토랑이나 초밥집이나 바가 몇 군데 있다거나, 여자에게 선물할 세련된 액세서리를 잘 고른다거나,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거나(간단한 악보는 한 번 보고도 칠 수 있습니다), 고작해야 그런 정도예요.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겠죠."
나는 동의했다. 피노누아에 대한 지식도,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도, 세련된 화술도, 그런 곳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실례지만 다니무라 씨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 글 쓰는 능력을 빼버린다면 대체 나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한낱 인간'이라는 출발점에서 맨몸뚱이나 다름없이 인생을 시작했다. 우연한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해 다행히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 장점도 특기도 없는 일개 인간이라 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굳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같은 거창한 가정을 들고 나설 필요는 없다. 고.
142
글을 쓰고 있다. 글로 남겨두는 것이 내게는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어서 이름이나 장소는 조금 바꿨지만 사건 자체는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고토 청년이 어디선가 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도카이 의사에 관해 또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무슨 얘기 끝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언젠가 나에게 여자 전반에 대한 한 가지 견해를 밝혔다. 이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상처받거나, 그녀들의 평안한 잠이 방해받거나 하는 일은 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일어나지 않는다.
166 독립기관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는 잘못된 보트에 이어졌던 거라고 우리는 뒤늦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단언할 수 있을까? 생각건대 그 여자가 (아마도)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의미는 얼마간 다르겠지만,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작용이었다. 제삼자가 나중에야 뭘 좀 아는 척 왈가왈부하고 자못 서글프게 고개를 내젓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순간에 도카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깨달았을지, 물론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깊은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나에게 새 스쿼시 라켓을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길 만한 의식은 되찾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거기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인지, 죽음을 앞둔 그에게는 그 답 비슷한 것이 조금은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카이 의사는 그것을 내게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독립기관 169
그것은 그녀 혼자 떠안을 수밖에 없는 무겁고 어두운 비밀인 것이다.
"나는 주기적으로 그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됐어." 셰에라자드는 말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그건 몹시 위험한 짓이야. 그런 외줄 타기를 언제까지고 계속할 순 없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었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킬 것이고, 들키면 틀림없이 경찰에 끌려갈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도 불안했어. 하지만 일단 비탈을 굴러내려가기 시작한 차바퀴를 막을 수는 없었지. 두 번째 '방문'으로부터 열흘 뒤, 내 발은 저절로 또다시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어. 안 그러면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것 같아."
"학교를 그렇게 자주 빠져도 별문제 없었어?" 하바라는 물었다. "우리 집은 장사를 해서 늘 바빴고 부모님도 나한테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부모님 말을 대놓고 거스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 아이는 내버려 둬도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을거야. 학교에 내는 서류도 어렵지 않게 위조할 수 있었어. 엄마 글씨체를 흉내 내서 간단하게 결석 사유를 쓰고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어.
셰에라자드 201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그게 나의 '빈집털이 시대' 이야기야."
어째 피카소의 '청색 시대' 같다고 하바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려는 바는 하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베갯머리의 디지털시계에 눈길을 던졌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러다 말했다.
"실은 이야기가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러고 사 년 뒤였나, 간호학교 2학년 때 나는 좀 희한한 우연으로 그를 다시 만났어. 이 이야기에서는 그의 어머니 비중도 확 커지고, 약간 괴담 비슷한 부분도 있어. 과연 당신이 믿어줄지 자신은 없지만, 어때, 이 얘기도 듣고 싶어?"
"꼭." 하바라는 말했다.
"그럼 다음에." 셰에라자드는 말했다. "얘기를 시작하면 꽤 길어질 텐데,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해야 해."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가 속옷을 입고, 스타킹을 신고, 캐미솔을 걸치고,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었다. 하바라는 침대에서 그 일련의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옷을 하나하나 챙겨 입는 동작이 그것을 벗을 때보다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212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죠." 아가씨는 사려 깊게 말했다. “세계 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 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또 착실히 고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해 보면 참 이상야릇하다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뭐,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외로 그런게 정답일 수 있어요.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 해도,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 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 도 모르겠어요."
아가씨는 다시 크게 고개를 꺾어 잠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쪽 눈썹이 쭉 추켜 올라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참견인지 모르겠지만, 2층의 그 방은 대체 뭐 하던 데예요? 가구 하나 없는 방에 이렇게 튼튼한 자물쇠를 달아놓고, 그게 망가졌다고 당신 부모님은 그렇게 걱정하고. 그리고 창 문은 왜 또 그렇게 두꺼운 판자로 막아놨어요? 그 방에 뭘 가둬 두기라도 한 거예요?"
잠자는 침묵 했다. 만약 누군가가, 무언가가 그 방에 갇혀 있었다면 그건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아니다. 하지만 왜 자신이 그 방에 갇혀야 했을까.
“하긴 당신한테 그런 걸 물어봤자 알 턱이 없죠." 아가씨는 말했다. "난 이만 갈게요. 늦게 들어가면 식구들이 걱정할 테니까.
308 사랑하는 잠자
나는 그런 그녀를 어디로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물론 그녀를 다시 잃을 때가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의 뱃사람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지켜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라도 잠깐씩은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잠도 자야 하고 화장실에도 가야 한다. 욕조도 청소해야 한다. 양파를 다지거나 강낭콩 꼭지를 따기도 한다. 자동차 타이어 공기압을 점검할 필요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녀가 내게서 떠나간 것이다. 물론 그곳에 는 뱃사람들의 그림자가 명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 힘으로 혼자 빌딩 벽을 슬슬 기어오를 것 같은 농밀하고 자율적인 그림자다. 욕조나 양파나 공기압은 그 그림자가 압핀처럼 흩뿌려놓은 메타포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사라졌을 때 내가 얼마나 고뇌에 잠겼는지, 얼마나 깊은 늪에 빠졌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아니, 당연히 알리가 없다. 나 자신도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니까. 나는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나는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가? 슬픔을 간단하고 정확하게 계측할 수 있는 기계가 이 세상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수치로 산출해 남겨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계가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나는 타이어 공기압을 젤 때마다 그런 생각에 잠기고 만다.
324 여자 없는 남자들
세상에서 두 번째 고독과 세상에서 첫 번째 고독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 아마도. 깊을 뿐 아니라 폭도 엄청나 게 넓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채 건너가기도 전에 힘이 다해 떨어져버린 새들의 주검이 골바닥에 높은 산을 이루었을 만큼.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 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십억 년은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리라 빼앗겨버리는 것. 저 멀리 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암모나이트와 실러캔스와 함께 캄캄한 바다 밑에 가라앉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의 집에 전화를 거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 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지와 무지 사이 임의의 중간지점에서 낯선 상대와 만날 약속을 하는 것. 타이어 공기압을 측정하며 메마른 길바닥에 눈물을 떨구는 것
여자 없는 남자들 327
엠에 대해 내가 지금도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음악'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곧잘 흐르는 그런 음악-즉 퍼시 페이스나 만토바니, 레몽 르페브르, 프랭크 책스필드, 프랑시스레, 101스트링스, 폴 모리아, 빌리 본 같은 유의 음악들. 그녀는 (내 생각으로는) 무해한 그런 음악을 숙명적으로 좋아했다. 유려하기 짝이 없는 각종 현악기, 산뜻하게 떠오르는 목관악기, 약음기를 붙인 금관악기,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하프 소리. 절대로 무너지는 일 없는 차밍한 멜로디. 설탕과자처럼 착 감기는 하모니, 적당하게 에코를 살린 녹음.
나는 혼자서 차를 운전할 때 곧잘 록이나 블루스를 들었다. 데릭 앤드 더 도미노스나 오티스 레딩이나 도어스 같은. 그러나 엠은 그런 건 절대로 틀지 못하게 했다. 항상 엘리베이터 음악 카세트테이프 열두 개 정도를 종이봉투에 담아와 손에 잡히는대로 틀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정처도 없이 드라이브하고, 그동안 그녀는 프랑시스 레의 <13 jours en France에 맞춰 나직이 입 술을 움직였다. 연한 립스틱을 바른 멋지고 섹시한 입술을. 어쨌든 그녀는 엘리베이터 음악 테이프를 만 개쯤은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죄 없는 음악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음악 박물관'도 열 수 있을 만큼.
섹스할 때도 그랬다. 거기에는 언제나 엘리베이터 음악이 흘렀다.
여자 없는 남자들 333
그녀를 안으면서 퍼시 페이스의 <A Summer Place〉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성적으로 흥분된다. 숨이 약간 거칠어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퍼시 페이스의 〈A Summer Place〉 인트로를 들으며 성 적으로 흥분하는 남자는 전 세계를 뒤져도 아마 나 하나뿐일 것이다. 아니, 그녀의 남편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 스페이스는 일단 남겨두자. 퍼시 페이스의 〈A Summer Place〉 인트로를 들으면 성적으로 흥분하는 남자는, 전 세계를 뒤져도 아마 (나를 포 함해) 두 사람쯤일 것이다. 그렇게 바로잡자. 그러면 된다.
스페이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건." 언젠가 엠이 말했다. “요컨 대 스페이스의 문제야."
"스페이스의 문제?"
"그러니까,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거든. 그곳은 정말로 넓고,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 벽도 없고 천장도 없어.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아무 생각 안해도 되고, 아무 말 안해도 되고, 아무 일 안해도 돼. 단지 그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냥 눈을 감고 스트링스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면 돼. 두통도 없고 수족냉증도 없고 생리도 배란기도 없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아름답고 평안하고 막힘이 없어. 그 이상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천국에 있는 것처럼?"
"응." 엠은 말했다. "천국에선 분명 BGM으로 퍼시 페이스의 음악이 흐를 거야. 저기, 등 좀 쓰다듬어줄래?"
"그럼, 물론이지." 나는 말했다.
"당신은 등을 정말 잘 쓰다듬어."
나와 헨리 맨시니는 그녀 모르게 서로 마주 본다. 입가에 슬그머니 웃음을 띠고.
334
'2024독서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흔두 번째 책 : 여행의 시간-김진애 (0) | 2024.11.12 |
---|---|
서른여섯 번째 책 :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5) | 2024.09.29 |
서른네 번째 책 :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1) | 2024.09.10 |
서른세 번째 책 : 여행 아닌 여행기 (0) | 2024.09.09 |
서른두 번째 책 : 너무 쉬워서... 너무 어려워서... (0) | 2024.08.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