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소설의 소재가 되는 이런 상상을 평소에 얼마나할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계속 멤돌게 하는 책 입니다. 이상하리 만큼 책 이곳저곳에서 김영하 작가의 얼굴이 수시로 떠오르는 특이한 독서 체험입니다.
야? 그리고 무슨 용서?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아빠야, 내가 아니라."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 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다.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 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 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저 낯선 몸뚱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허망한 존재에게 인생이 바쳐졌구나 싶어요. 저는 저 사람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바이털 사인이 꺼지고 더 이상 저 육체로부터 아무 반응도 받아오지 못한다면, 즉 아빠가 마침내 의학적으로 사망한다면 한동안은 좀 막막할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주 생각하게 돼요. 뉴욕에 있었다던 그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떤 어둠에 대해서요.
어젯밤, 이제 반쯤은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빠의 손을 잡고 ...
오직 두 사람 39
게다가 그를 지탱해 온 미신적인 신념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미라가 정신병원에 가면 성민이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는 비이성적인 믿음. 이 믿음은, 성민이만 돌아오면 미라의 병은 깨끗이 낫게 되리라는 또 다른 믿음과도 이어져 있었다. 그런 믿음을 차치하고라도 윤석은 미라를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 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월요일이 되자 윤석은 성민이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대구에서 전학을 시켜야 했다. 제대로 다녔다면 중학생이 되었어야 할 성민이는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성민이를 데려간 여자가 벌금을 물고 신 생아를 출산한 것으로 속여 허위로 출생신고를 해버린 탓이었다.
초등학교의 교장은 생각보다 젊었고 여자였다. 그녀는 동행한 사회 복지사로부터 성민의 특수한 처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사무적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친절하고 정중했지만 골치 아픈 아이를 맡게 된 것에 마뜩잖은 기색이 엿보였다. 가난한 육체노동자 행색의 윤석도 교장의 선입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이를 찾습니다. 71
막상 산책에 나선 그를 뒤따라 가다보니 그런 질문을 던져 그에게 불안과 죄책감을 심어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서진을 위협하거 나 공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남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메타세쿼이아 뒤에서 뭔가가 후다닥 튀어나와 남편을 덮쳤다.
"야, 이 살인자 개새끼야!"
서진은 그 남자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사철나무 군락에서 자신을 덮쳤던 그 사채업자였다. 그는 남편을 깔아뭉갠 후, 그 위에 올라 타 주먹으로 남편의 얼굴을 무지막지하게 가격했다.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는 사채업자에게 남편은 무방비로, 이대로 두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남편을 때리는 사채업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인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아야, 인아야, 내가 잘못했다. 인아야!"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사채업자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마침 지나가던 공원 관리인이 그를 남편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는 관리인에게 어깻죽지를 제압당한 채 누워 있는 남편을 향하여, 저놈이 살인범이다. 저 새끼가 사람을 죽였다. 소리를 질러댔다.
주춤주춤 현장에서 벗어난 서진은 회사에 출근해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혼자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병원들을 돌기로 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신도시의 유일한 대학병원도 있었다.
인생의 원점 106
사장이 가끔 여자에게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 돈 씀씀이가 무지하게 짜다는 것. 둘 사이에 그간 쌓인 불신과 미움이 대단하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정보들은 통화 막판에 여자가 사장에게 던진 충 격적인 선언에 묻혀버렸다.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을 부정당한데 대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이 아름다운 여인은, 그렇다면 나와 한 침대에서 자는 수밖에 없으니 신경 끄라고 통보를 한 것이다.
일평생 나는 압도적 미모의 여성을 가까이하면 큰 재앙을 당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또한 이런 스크루볼 코미디에나 나올 법한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압도적 미모의 여성이 개입된 스크루볼 코미디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전화를 끊더니 한결 평온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차 때문에 잠은 안 오고 출출하네요. 혹시 라면 같은 것 없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네요.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얼른 샤워하고 침대로 오세요' 같은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라면이나 끓여달라는 말을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화장을 매만진 후에 내가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빈 그릇을 싱크대에 처박은 다음, 나는 와인 한 병을 땄다. 머쓱함도 떨 칠겸, 그저 손에 들고 홀짝거릴 뭔가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음주는 결국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됐고 화제는 부부간의 깊숙한 문제까지 나아갔다. 나는 여성을 유혹하는데는 젬병이지만 대화를 유도하는 데에는 본래 일가견이 있었다.
옥수수와 나 146
얼마나 오래 그걸 생각해 왔는지 넌 모를 거야. 내 상상 속에서 너는 무수히 죽었어. 실행에 옮기려 한 적도 있었지. 그런데 그때마다 계획에 결함이 발견되곤 했어. 그래서 수정을 하고, 또 수정을 하고, 오늘에야 완벽해진 것 같아. 살인 계획이라는 건 말이야. 이민하고 비슷한 것 같아. 한번 그쪽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영선이 쏘아붙였다.
"나라고 당신 죽이고 싶은 순간이 없었는 줄 알아? 늘 혼자만 옳지. 이번 계획은 완벽한 것 같아? 제 꾀에 제가 빠지고 말걸? 내가 죽으면 당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당신 입국 기록도 있을 거 아냐?"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왔으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둘의 감정이 더 격해지지 않도록 내가 끼어들었다.
"완벽한 알리바이? 그거야말로 허상입니다.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죠. 작가들도 말이죠. 구상 완벽하게 하고 작품 시작하는 사람들 치고 별 볼 일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겁니다. 실패한다는 거죠. 써 나가보면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돼버리거든요. 내가 볼 때 당신은 강박증이에요. 계획한 대로 다 돼야 한다고 믿는 어린애란 말입니다. 자, 총 내려놓으세요. 살인이라는 건 말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짓을 함부로 저지르면 안돼요. 인생이 무슨 게임입니까?"
"시끄러워. 하여간 입만 살아가지고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소설은 왜 그 모양일까?"
사장이 다시 권총을 치켜들었다.
옥수수와 나 163
나는 항의했다.
"뭐,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겠지."
사장은 입가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총을 들어 내 미간을 겨누었다.
"얼른 안 써?"
시키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서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완 벽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가 달리 보였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오쟁이진 남편이 아니었다. 그의 계획은 빈틈없고 완벽했다. 단 하나의 아귀도 어긋남이 없이 딱딱 맞아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영어의 플롯은 음모로도, 그리고 구성으로도 번역된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 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 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 비약인가? 나는 내 곁에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영선을 바라보았다. 이 범죄 치정극의 마지막 퍼즐, 그런 소설에는 꼭 등장하는 절대 미모의 팜므파탈, 그런데 이 여자, 너무 얌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치고는.
"잠깐만요!"
166
자꾸 이러면 정말 당신한테 서운해."
“애 나오면 머리카락 뽑아와. 유전자 검사 결과 나오면, 그러면 믿 올게."
"사과도 해야겠지."
"물론이지.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왜 최은지 얘기를 나한테 미리 안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거야. 그건 알아둬."
나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고 그날부터 우리는 각방을 썼다.
12
병동 입구 휴게실에서 링거를 꽂은 환자들이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왜 박인수를 찾아왔을까. 그의 말대로 나는 무슨 신탁이 라도 바라는 것일까.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먼저 온 방문자가 있었다. 단정한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박인수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박인수는 눈을 감고 있어 내가 들어온 것을 몰랐다. 그는 오른손으로 여 자의 뒤통수를 빗질하듯 쓸었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거세게 흐느꼈 다. 나는 휴게실로 물러나와 환자와 간병인들 사이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가 끝나고 휴게실을 나오는데 마스카라가 흉하게 번진 여자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정이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박인수는 지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겨우 눈을 뜨더니 힘없이 내뱉었다. "다녀갔어."
226 최은지와 박은수
눈앞에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저 빛이다. 저기에 희망이 있다. 우리를 지상으로 올려 보내줄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빛들이 움직인다.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등뒤에서 껴안는다. 버둥대는 정은에게 그들이 말한다. 경찰, 경찰이라고. 아, 살았구나. 정은은 안도한다. 우리 어떻게 찾으셨어요? 경찰관은 동네 고양이들한테 고맙다고 하라고 말한다. 길냥이들이 살해당한다는 신고가 계속돼 탐문을 하던 중에 넷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아, 길냥이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았구나. 냥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태준이 정은에게 고양이들이 죽어 있을 원룸으로 혼자 돌아가기 무섭다고 말한다. 정은은 그와 함께 가주기로 한다. 원룸의 문을 열자 고양이들이 있다. 비쩍 마르기는 했지만 둘 다 살아 있다. 아, 다행이 다. 정말 다행이다. 태준이 두 마리를 양팔로 끌어안고 기뻐한다.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 그는 원룸이 아니라 종이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고 그의 고양이들이 상자 밖에서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정은은 고시원에 와 있다. 총무가 그녀의 짐들이 모두 창고로 치워졌다는 말을 한다.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다만 내일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테니 하루만 재워줄 수 있냐고 묻는다. 총무가 못마땅한 얼굴로 열쇠를 준다. 침대에 걸터앉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면서 도널드 트럼프와 강호동이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등장한다. 이 좁은 고시원 방에 저런 거구들이 들어올 수 있다니 이상 하다. 강호동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정은씨, 진심으로 축하드립니 다. 이 어려운 방 탈출 미션,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이정은씨
신의 장난 263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었다. 작가는 팩트를 확인하고 인용할 근거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잘 느끼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잘난 팩트의 세계를 떠나 근거 없는 예감의 세계로 귀환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다음 해인 2015년에 과분하게도 김유정문학 상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썼다.
수상의 기쁜 소식을 들을 무렵에 저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고 있었습니다. 소설은 공교롭게도 4월 16일의 오랑시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비극의 전조는 쥐 떼였습니 다. 쥐들은 백주의 거리로 비틀거리며 기어 나와 떼로 죽어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애써 그 징조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곧 페스트가 사람들을 덮치고 도시는 폐쇄되고 맙니다. 그들은 피해자인데도 도움을 받기는커녕 고립됩니다. 신의 징벌이라고 떠드는 이가 나타나는가 하면,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며 회피하려는 이도 있고, 어떻게든 이 문제와 직면하려는 이도 있습니다. 도시는 시체로 뒤덮이고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지옥도는 몹시 낯이 익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해 4월 16일 이후 목도한 일과 흡사합니다. 카뮈가 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이소 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황당 한 발상은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로부터 빌려온 것입니다. 그는 과거의 작가가 미래에 발표될 후배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흥미로운 개념, '예상표절'을 우리에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268
문학사를 불가역적인 일직선으로만 사고한다면 이런 말은 한갓 말장난에 지나지 않겠습니다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연대기적 시간이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호 사고를 먼저 겪은 후, 나중에 『페스트』를 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작품의 발표 순서 같은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수십, 수백 년 전에 쓰인 텍스트와 불과 일년 전에 일어난 사건 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후대의 수많은 소설에 영감을 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는가 하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마치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아이를 찾습니다,를 구상하고 서두를 써둔 것은 몇 년 전, 해외 체류 시절로 지난해 봄에 일어난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묻어두었던 초고를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 집필에 착수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난 직후였으니 쓰는 내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문학에 어떤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언어의 그물로 엮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문학은 혼란으로 가득한 불가역적인 우리 인생에 어떤 반환의 좌표 같은 것을 제공해줍니다. 문학을 통해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독자 앞에 불려 오고, 지금 쓰인 어떤 글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예감합니다.(하략)
작가의 말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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