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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독서정리

서른네 번째 책 :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by 마파람94 2024. 9. 10.

대학 졸업 전후에 뉴에이지 장르라는 분야의 피아노 멜로디를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피아노 건반이 왠지 모르게 혼탁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해 줬다고 할까요. 유키 쿠라모토 부터 이루마, 시크릿 가든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류이치 사카모토 까지 두루 좋아했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글입니다. 피아노 작곡가 겸 빛나는 연주자였던 그의 인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문장들 속에 감정의 파도 속에서 살아왔던 그를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네요.

 

출처 : https://youtu.be/fSo3fkJiWMY

 

 


사후 세계

조디 포스터(Jodie Foster) 주연,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 감독의 <콘택트>(1997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NASA에서 행성 탐사의 리더를 담당하기도 했던 칼 세이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작 SF로,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된 만큼 이미 영화를 본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조디 포스터가 연기하는 주인공 엘리는 천문학 연구자로, 어린 시절부터 우주에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였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 다. 영화 후반, 우주선 캡슐에 탑승한 엘리는 웜홀을 통과하며 시공간을 이동해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변의 하얀 백사장 위에 서 있는, 사랑해 마지않는 아버지와 다시 만납니 다. 실제로 그것은 지구 밖의 지적 생명체가 아버지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재회를 통해 커다란 힘을 얻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결코 외톨이가 아니다'라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였습니다.

칼 세이건은 코넬대학의 교수이기도 했고, 그의 학술적 경력을 감안하면 이렇게까지 로맨틱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에 저항감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일류 과학자로 활동하는 동시에 이러한 상상력도 갖추고 있었죠. 저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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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총 4악장으로 'still'(겨울), 'return'(봄), 'firmament'(여름), 'autumn'(가 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의 3악장은 미니멀하게 구성되었으나 마지막 악장인 가을만큼은 멜로디가 두드러지는 선율이 더해져 고요히 끝을 향해 흘러갑니다.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아 제 개인 작업에서는 무심코 억제해 버리기 일쑤지만, 다른 뮤지션에게 곡을 줄 때는 의도적으로 로맨티시즘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곡의 의뢰자이기도 했던 사와이씨는 이렇게 기복이 큰 음악을 선명하게 연주해 주었습니다.

저의 고희를 기념하여 commmons에서 기획한 '내가 좋아하는 사카모토 류이치 10선'에서 40년 지기 친구 무라카미 류는 이 협주곡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글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합니다.

개인적으로 사카모토 류이치 최고의 걸작은 이 고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2010)이라고 생각한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콘체르트는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에 '멈춤과 태동', '싹틈과 탄생', '성장', '황혼·어둠·죽음'을 겹쳐가며 이미지화해 미니멀 뮤직의 틀 안에서 조용하게 끓어오르는 물이 새어 나오듯, 또한 ‘엄밀함과 억제'를 '감정'의 가시가 푹 찔러버리듯, '로망'을 엮어낸다. 이 콘체르트는 사카모토가 돌아가신 어머니께 바치는 레퀴엠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곡을 통해 인자함과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

사카모토가 그의 음악에서 이런 식으로 인자함과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그 감정은 늘 곡의 이면에 숨어 있다. 사카모토의 어머니는 이 곡을 듣지 못하셨다. 레퀴엠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께 들려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카모토의 콘서트나 영화 시사회 등에서 나는 그의 어머니 옆이나, 옆의 옆자리에 가까이 앉곤 했다. 한마디로 좋은 자리였다는 뜻이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는 "매번 고마워요"라며 내게 인사하셨다. 그러나 웃는 모습을 보여주신 적은 없었다.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분이 사카모토를 키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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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깜짝 선물로 프라이빗 트리뷰트 앨범을 받았습니다. 호소노 씨와 유키히로 군, 다카노 히로시 군, 오야마다 게이고 군, 다카다 렌 군, 곤도 도모히코 군과 유잔 등 친분이 있는 뮤지션들과 제 딸 사카모토 미우가 참여해 평소에 웬만하면 감동하는 일이 없는 저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앨범은 비매품으로,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RADIO SAKAMOTO〉에서 특별히 호소노 씨가 불러준 <Birthday Song〉을 소개한 적은 있지만, 음원은 일절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환갑 기념으로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생일 당일에 파트너가 "잠깐 나갔다 올까?" 하고 제안하길래 시키는 대로 준비된 차에 올라탔더니, 맨해튼 57번가로 향하더군요. 그곳에는 피아노의 메카 격인 스타인웨이 앤 선즈(Steinway & Sons)의 본점이 있는데, 저는 '여기가 바로 그 글렌 굴드가 들른 적이 있다는 가게구나' 라고 생각하며 지하에 있는 피아노들을 시험 삼아 이것저것 쳐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파트너가 "아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골라봐" 하는 거예요. '설마,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했죠.

파트너가 말하길, 집에 피아노가 없다는 핑계로 연습을 전혀 안 하는 저를 보다 못해,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도록 선물해 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못 이기는 척, 거실에 놓을 수 있는 조금 작은 크기의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를 골랐습니다. '연주 기술은 실제 콘서트 현장이 아니면 늘지 않는다'는 주의였지만, 선물까지 받은 이상 평소에도 피아노를 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영향을 주었던 외삼촌에게 갈색 피아노를 물려받았던 이래 처음으로, 60세의 나이에 저만의 피아노를 갖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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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이긴 하겠지만 (원자력 발전을) 당장 멈추라고 해봤자 멈추지 않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력회사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그들에게 어느 정도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고, 전력회사의 요금 체계 설정 문제나 발전과 송전의 분리, 지역 독점 문제 등이 점점 자유화되면, 원전에 기대지 않는 전기를 우리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반 가정이나 사업체 등이 점차 자가발전을 하는 식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전력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가는 겁니다. 우리 돈이 전력회사로 들어가 그 돈이 원전이나 관련 시설이 되는 것이니 이런데 쓰일 돈의 액수를 조금이라도 줄여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고작 전기입니다.

고작 전기 때문에 왜 생명이 위협을 받아야 합니까. 저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번 세기가 반쯤 지났을 때쯤, 2050년경에는 전기 같은 것은 각 가정과 회사, 공장에서 자가 발전하는 일이 당연해지는,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고작 전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일본,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의 생명이 위협받게 둬서는 안 됩니다. 돈보다 생명입니다. 경제 보다 생명입니다. 아이들을 지킵시다. 일본의 국토를 지킵시다.

마지막으로 "Keeping silent after Fukusima is barba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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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in with String>과 바이올린을 부수는 순간을 찍은 비디오 <One for Violin Solo〉가 유명하죠. 이날의 이벤트에서는 이 두 개의 작품을 융합하여 바이올린 안쪽에 작은 마이크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부서지는 순간의 소리와 광경을 악기의 관점에 서 회장의 스크린에 영사하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동경하던 백남준을 만난 것은 198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도쿄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개인전이 열렸고, 저는 전시 준비를 하는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전시장 쪽으로 걸어가자 맞은편에서 백남준이 손을 벌리고 다가오더니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라는 『논어』의 구절을 읊으며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저 감동스러웠습니다. 백남준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어 교육을 받은 세대고, 이후 도쿄대학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일본어가 매우 능숙합니다. 그때부터 아주 친한 사이가 되어 백남준이 작업의 거점으로 삼았던 뉴욕 소호의 아틀리에에 몇 번인가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허름한 빌딩 맨 위층에 있는 옥탑이었는데 화장실에 문도 없고, 겨울철에 찾아가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천장 틈새로 떨어져 아틀리에 안에 흩날리기도 했습니다. 같이 만나러 갔던 아사다 아키라 씨가 "신주안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선명히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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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하와이의 민족 음악은 찬트(chant)와도 닮아 꽤 정취가 깊습니다. 그런 진정한 전통음악을 계승하는 뮤지션들이 평소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리조트용의 가짜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심경이 복잡해집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하와이안 뮤직에 대한 저의 생리적 거부 반응은 결코 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근대 이후의 역사를 더듬어볼 수는 있다고 해도, 가장 먼저 하와이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그곳에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들은 4,000킬로 정도 떨어진 폴리네시아에서 넘어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통나무를 잘라 만든 배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이동했다면 적어도 2~3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동안 식사는 어떻게 했을까요. 낚시로 조달한다고 해도 육지에서 그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는 물고기가 거의 살지 않을 텐데요. 먼바다에는 산호도 없고 물고기의 먹이인 플랑크톤도 없으니까요. 분명 닭은 싣고 갔을 것입니다. 매일 달걀을 낳잖아요. 설령 폴리네시아를 출발할 때 하와이 섬의 대략적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물살이 빠른 조수 위에서 자신들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해가 진 후 달과 별에 의존해 위치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겠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와이라는 땅은 정말이지 신비하고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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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베를린에서의 통화가 마지막 대화가 되었죠. 무리를 해서라도 로마에 들렀어야 했는데,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베르톨루치는 연명 치료를 멈춘 후 마지막 한 달을 집에서 보내며 매일 원 없이 와인을 마시고 의료용 대마도 마음껏 피우며 무척 신나게 보냈다고 합니다. 연일 친구들이 놀러 왔던 모양이라, 그가 떠난 후 그의 아내인 클레어에게 "이보다 더 웃었던 적은 없다 싶을 정도로 실컷 웃다가 즐겁게 갔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 행복한 마지 막이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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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계속 호텔 생활만 할 수도 없었기에, 거주지를 어떻게 할지, 만약 금방 죽는다면 누구에게 부고를 전해야 할지, 장례식은 어떤 형식으로 치러야 할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제 의사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요.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이후의 활동을 돌아보며 살아 있는 동안 이 연재를 위한 구술 필기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모든 절차를, 파트너는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차근차근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강인함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제가 반원전 운동을 활발히 하던 시기 "혹시 일본 정부에게 밉보여, 자객한테 당하기라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러자 파트너는 "당신이 암살 당하면 여론이 반원전 쪽으로 쏠릴 테니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아?" 하고 답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뀐 2021년 1월 14일, 첫 번째 글에서 말했듯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때도 아직 병에 대해 알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이 한창일 때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 스포츠신문이 “사카모토 류이치, 중병"이라는 특종을 내기 위해 관계자에게 확인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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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의 대규모 전시회

입원 중에도 원래 결정되어 있던 프로젝트들은 제가 없는 채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베이징의 사설 미술관 'M WOODS'의 전시회였습니다. 2018년 한국 서울의 'piknic'에서 진행한 <LIFE, LIFE> 전시 오프닝을 찾아온, 중국 베이징에서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부부가 "저희의 공간에서 규모를 더 크게 키워 이 전시를 개최할 수 있을까요?"라고 상담을 해왔습니다. 조지 부시와도 친분이 있는 자산가 집안 출신의 남편과 모델 같은 미모의 온라인 셀럽 아내라는, 예전의 중국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커플이었죠. 유럽 브랜드의 고급 차를 타는 남성이 "나랑 결혼해 주면 널 위해 빨간 페라리를 사줄게"라고 프러포즈 하자 여성이 “자동차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날 위한 미술관을 만들어줘"라고 대답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건물을 세웠다는 농담 같은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어 보이는데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들의 행보가 부자들의 놀이 같은 인상을 주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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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 자체는 그 자리 류의 편집 관계자 모두가 알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조금 만 더'라는 말에 담긴 사태의 심각성과 그 상황 속에서 사카모토 씨가 가졌던 결연한 생각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1월의 수술이 무척이나 어려워 스무 시간이나 걸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후로도 격렬한 투병과 수술이 이어졌음을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상황에 대해서는 글의 서두를 비롯해 이 책 이곳저곳에 쓰여 있는데, 특히 1월의 대수술 후 심신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가 병실에서 불현듯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를 회의 도중 매니지먼트 관계자에게 들었다. 그것은 사카모토 씨가 음악을 맡은 1990년의 영화 <마지막 사랑>의 마지막에 등장한 원작자 폴 볼스가 내레 이션처럼 읊조리던 말의 일부였다.

그 혼잣말이 연재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그 말은 내뱉어진 순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볼스는 길을 헤매다 모로코 변두리에 있는 카페에 들어온 주인공 키트를 연기한 데브라 윙거에게 “미아가 된 건가?" 하고 묻고는 "예스”라고 답하는 그녀에게 원작인 1949년의 동명 소설에 있는 다음의 부분을 마치 책을 읽듯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니 우리는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무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극히 적은 횟수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어린 시절의 그 오후를, 앞으로 몇 번 떠올릴까? 그것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깊은 곳에서, 지금의 자신의 일부가 된 그 오후마저. 아마 앞으로 네 번, 혹은 다섯 번일 것이다. 아니, 더 적을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는 일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아마 스무 번이려나. 그리고, 그럼에도, 무한한 횟수가 있다는 듯 생각한다.' (졸역)²

Because we don't know when we will die, we get to think of life as an inexhaustible well. Yet everything happens only a certain number of times, and a very small number really. How many more times will you remember a certain afternoon of your childhood, some afternoon that's so deeply a part of your being that you can't even conceive of your life without it? Perhaps four or five times more. Perhaps not even that. How many more times will you watch the full moon rise? Perhaps twenty. And yet it all seems limi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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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모두의 에고가 사라졌을 때,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

20220129 노을을 보고 있자니, 구름의 느긋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과연 도쿄에서 몇 명이나 이걸 보고 있을까/ 구름의 움직임은 소리 없는 음악 같다

20220320 내게는 음악이 마루턱의 찻집 같다/아무리 지쳐 있어도 그것이 보이면 달음박질하게 되고, 주먹밥 하나 먹고 나면 남은 절반의 등산도 문제없다

20220321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야만적이며 고귀하다

20220418 이렇게 된 이상 어떤 운명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20220616 NY에/잠 못 드는 밤/아름다운 아침

20220807
영화 <줄 앤 짐>(Jules et Jim) 훌륭하다. 아폴리네르의 소설이 읽고 싶어 진다. 동시에 『쓰레즈레구사』(徒 然草)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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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해 볼 거야"라는 사카모토 씨의 말에는 이 무렵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면역치료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1월 13일, 첫 치료를 받고 사카모토 씨는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엄청난 희망이 느껴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카모토 씨는 다음 날인 14일의 '일기'에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으로 눈이 말똥말똥해져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폐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호흡이 힘들어졌다. 산소호흡기를 달게 되었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튜브를 코에 꽂은 채로 지냈다. 하지만 전체적인 몸 상태는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월 30일에는 염원하던 '아라키'의 스시를 먹었다.

아라키의 주인 아라키 미쓰히로 씨는 긴자에 포렴을 건 2010년부터 2년 연속 미슐랭 3스타를 받고 2014년부터 런던으로 가게를 옮겨 그곳에서도 3스타를 받은 후, 2019년에 런던의 가게를 제자에게 넘기고 홍콩에서 다시 가게를 낸 스시 명인이다. 런던에 가게를 낼 때 카운터의 우드 슬랩을 선물했을 정도로, 사카모토 씨는 아라키 씨를 경애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아라키의 스시를 먹고 싶어"라고 사카모토 씨는 말했다고 한다. 그 아라키 씨가 “사카모토 씨가 아직 드실 수 있는 상태라면 스시를 만들어드리고 싶 다"며 연락을 해왔다. 아라키 씨는 오직 사카모토 씨를 위해 임시로 가게를 빌려 1월 30일, 특별히 스시를 쥐었다.

양은 조금 적게, 라고 말하면서도 사카모토 씨는 얼추 다 먹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카모토 씨의 마지막 외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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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2년 9월, 91세의 장 뤽 고다르가 의식은 아직 명석함에도 신체적 고통과 현저한 체력의 상실을 겪으며 보행조차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위스 자살 조력 단체 '엑시트'의 도움으로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약을 먹고, 지켜보는 부인과 친구, 그리고 간호사들이 건넨 “Bon voyage” 라는 인사에 “고마워 모두. 이런 마지막을 실현시켜줘서"라고 답한 후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는 이야기…. 이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한 방법과 사카모토 씨의 이날의 행동이 하나로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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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씨는 3월 28일 오전 4시 32분에 숨을 거둬, 71세의 생애를 마쳤다. 가족 중 한 명이, 그래도 남들의 세 배는 살았어, 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고, 다른 가족들도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카모토 씨가 살아 있던 시간은 71년이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의 농밀함을 떠올리면 향년 71세가 아니라, 210세라고 해도 이 상하지 않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71년은 짧다면 짧다. 하지만 그의 71년은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시간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선으로 그려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복선화 된 시간이 동시에 내달려온 7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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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So3fkJiW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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