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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독서정리

스물 여섯 번째 책 : 아직도 가야할 길-스캇 팩

by 마파람94 2024. 7. 15.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어떤 감상평의 글도 필요치 않은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책에서 처음 만난 글




차 앞자리의 바닥에 누워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어떻게 된 것인가 살펴보았다. 몇 분을 들여다보았다. 먼저 줄들과 튜브와 연결 막대들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도무지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브레이크 기계장치를 눈여겨보니, 곧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에 조그만 걸쇠가 있었는데 그것이 브레이크가 풀리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분명했다. 이 걸쇠가 어떻게 된 것인가 천천히 궁리해 본 결과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위로 올리면 쉽게 움직여서 브레이크를 풀어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보았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손가락 끝으로 누름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나는 최상급 수리공이 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기계 수리를 할 만한 지식도 없었고 그걸 배울 시간도 없었다. 사실 나는 내 시간을 기계 만지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투자해 왔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수리공에게 뛰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은 단순히 내 선택의 결과일 뿐, 내가 벌을 받아서라든지. 유전인자에 결함이 있어서라든지, 혹은 처음부터 무능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을 들여서 해볼 마음만 있으면 무슨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기계 고치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수리공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이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인생에서 필요한 지적이며 사회적이고 영적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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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방향 등을 융통성있게 균형 잡는 능력이다.

이러한 균형잡는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 를 하는 것이다. 나는 아홉 살 때의 어느 여름 아침에 이런 진실을 처음 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자전거 타기를 배운지 얼마 안 되어서, 새로 배운 것을 신나게 이리저리 해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일 마일쯤 되는 지점에서 길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날 아침에 신나게 언덕을 내려오면서 점점 빨라지는 속력에 황홀감을 느꼈다. 브레이크를 걸어서 이런 황홀감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자기 처벌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속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언덕 아래의 커브길을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내 황홀감은 몇 초 안 되어서 길에서 12 피트 떨어진 숲으로 나가떨어짐으로써 끝났다. 나는 형편없이 긁히고 피가 났으며, 새 자전거의 앞바퀴는 나무에 부딪쳐 심하게 뒤틀어졌다. 나는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행동이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커브길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면 그 황홀한 속력을 포기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나는 균형을 유 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어쨌든 이것은 내가 일생을 통해 계속 되풀이하여 배워야 했던 교훈이 되었다. 누구든지 삶의 여러 가지 길과 협상할 때에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포기 대신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인생이라는 여행을 아예 그만두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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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크게 고통을 당하고 위험할 정도로까지 괴로움을 당한다.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점을 인식하면서 결정을 하는 과정이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어리숙한 인식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보다(대개의 결정들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런 결정은 잘못이라는 것이 증 명되고 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두 장군이 자기 휘하 군인들을 전투에 나가게 할 것인지 아닌지 각각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한 장군에게는 군단이 전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장군은, 전략의 도구라는 점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각 개인의 생명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고 또 각 개인의 가족의 생명까지도 일일이 인식하고 있다. 어떤 장군이 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을까? 인식을 어리숙하게 하는 장군이 더 쉬울 것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말 해서, 보다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에 따르는 고통을 견뎌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렇게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

"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장군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문제가 기업체의 회장이나, 의사, 선생, 부모가 되는데에도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 치는 결정을 항상 해야만 한다. 가장 결정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기 들의 결정에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용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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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발전의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력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훈련을 하지도 않고 성자가 되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뿐 아니라 바라기까지 한다. 가끔 그들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막에 은거한다든지 목수일을 하는 식으로 성자의 겉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방을 통해 그들이 정말로 성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꿰뚫고 나가야만 한다는 괴로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모든 생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까지 네 가지의 기본적인 기술들을 분리해서 설명하였다. 즉, 즐거운 일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충실한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훈련이란 이런 기술들의 체계라 하겠는데, 그 이유는 이 기술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행동으로 둘, 셋 혹은 이 기술 전부를 동시에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기술들은 서로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기술들을 사용할 힘은 사랑에 의해 제공된다. 이것은 다음 부분에서 설명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 기초적인 기술들을 덧붙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 명상, 요가, 정신치료 자체와 같은 과정들이 훈련의 기술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들은 물론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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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우리는 어렸을 때 성장하면서 뼈아프게 포기해야만 했던 전지전능함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모든 일들이 가능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사랑의 힘이 복종과 굴복과 암흑과 같은 모든 반대세력들에 저항하고 물리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문제가 극복될 것이다. 장래는 온통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이러한 비현실적인 느낌은, 두 살 난 아이가 자신을 집안에서나 세상에서 무한한 권력을 가진 왕으로 착각하는 비현실적인 느낌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러나 현실은 두 살짜리 아이의 전지전능한 환상을 깨어나가듯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환상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조만간 매일매일의 일상생활 문제에 대항해서 개체는 그 자신을 재확인할 것이다. 그는 섹스를 원하는데, 그녀는 원치 않는다. 그는 은행에 저금하기를 원하는데, 그녀는 세탁기 사기를 원한다. 그녀는 자기 일에 관한 것을 얘기하기 원하는데,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녀는 그의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고, 그는 그녀의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다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취미와 편견 그리고 생활리듬만 고집하려 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혹은 급작스럽게 자아 영역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들은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다시금 그들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두 개체가 된다. 이 정도가 되면 그들은 서로 헤어지거나 아니면 참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훈련이란 인간의 정신적 발달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하겠다. 지금부터 훈련을 하도록 격려해 주는 동기는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이 그것을 추진해 나가게끔 힘을 주는가 살펴보겠다. 나는 그 힘의 정체를 사랑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랑을 아주 신비로운 그 무엇으로 여기면서 고찰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도는 실제적으로는 조사할 수도 없고, 조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그 무엇에 관한 고찰이다. 사랑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참으로 이해될 수도, 측량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파헤쳐 보려는 것은 이와 같은 시도가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시도가 어떤 면에 있어서는 부적절하리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랑은 신비롭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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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료 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가끔 말한다.

"자 보시오,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당신 자신에게 가장 잘못된 일을 하는 셈이라는 걸 좀 똑바로 보란 말입니다. 차라리 헤로인(마약)에 의존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입니다. 그 약물은 항상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중독되어 사람들을 빨아먹고, 그렇게 빨아먹을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 대신 술에 탐닉하거나 마약 같은 약물에 중독되게 된다는 것이 수동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들의 공통적인 결함이다.

요컨대 의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상대방에게 애착하도록 하는 힘이 있으므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반대형이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데서 처음 시작된다.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추구하게 하며 성장하기보다는 어린아이로의 퇴행을 부추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해방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의존성은 관계를 이룩해 주기보다는 파괴하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기보다는 파멸에 이르는 문으로 밀어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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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사랑할 수 있는 내 능력을 누구에게 집중시킬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하고, 그 사람을 향해서 사랑의 의지를 집중시켜야 한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되는 그러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인 것이다.

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보통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자기기만을 하게 된다. 한 알콜중독자 남자가, 당장에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야만 할 절실한 상태에 있는데도 가족에게 가볼 생각은 않으면서 술집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술집 주인에게 "나는 정말 내 가족을 사랑한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자. 이처럼 아이들을 대체로 소홀하게 돌보는 사람들도 자식들을 매우 사랑하는 부모라고 자처한다. 이렇게 참사랑과, 단지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하는 자기 위안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 속에 사랑한다는 느낌의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쉽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행동 속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사랑이란 의지적인 행동이며 그것은 사랑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단순한 애착의 단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랑이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순수하게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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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의 아이는 상호작용이란 없이, 어두운 방 구석에서 어른들을 쳐다보는 조용한 벙어리 같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재잘거리는 것을 방관하면서 듣는 척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때는 사실 외관상으로는 경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와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단지 글자 그대로 허공이나 자기 자신에게 독백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의 방법은 듣는 것처럼 하면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해나가거나, 혹은 당신이 하던 생각을 그대로 하면서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흔히 “응.” 혹은 “그거좋구나."하며 다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때에 응답을 해주는 것이다.

네 번째 방법은 선택해서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민첩성이 요구되는 행동유형으로서, 부모들이 듣는 체하는 동안에 아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 그 내용을 끄집어 낼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에서의 문제는 선택하고 구분해 내는 인간의 능력이 그다지 능률적이지 않으므로 경청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들을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게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즉 아이에게만 온 정신을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말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방법은 뒤의 것으로 올수록 점점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다섯 번째는 진심으로 경청하는 것으로 다른 방법들에 비해서 부모들에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독자들은 내가 다섯 번째 방법을 추천하리라고 짐작했을지 모르겠다.

176

누구에게든 의존해 보라. 그러면 그가 당신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애착은 고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고통을 감내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많은 것들을 삶에서 제외시켜야만 할 것이다. 즉 아이들을 갖는다든지, 결혼, 섹스의 황홀감, 야망, 우정 등 인생을 생기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고 중요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제외시켜야 될 것이다. 어떤 면으로 성장을 하든 그것이 고통이 되든지 기쁨이 되든지 그것은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될 것이다. 충만한 생활은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든지 아니면 삶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 즉 성장과 쇠퇴로 만든 한 벌의 투구와 갑옷이다. 생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변화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고독하게 살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한 그 여인의 폐쇄된 생활은, 그 원인이 여러 번에 걸친 죽음이라는 체험이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두 번 다시 그 아픔을 겪지 않으려고 충만한 생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경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는 성장과 변화를 피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던 것, 모험이나 도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항상 변화 없는 생활을 선택한 것이다. 이미 말했던 대로 정당한 괴로움을 피하려는 시도는 모든 심리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 대개 정신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죽음의 현실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에 문제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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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뛰어넘기를 택한 것이었다. 나는 내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휘어잡았던 것이다.

성장의 과정은 이주 서서히 일어난다. 여러 번의 작은 뛰어넘기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예로 여덟 살 난 사내아이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혼자 시골 가게에 가는 모험을 할 때, 혹은 열다섯 살 된 소년, 소녀들이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따르는 불안과 고통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성격의 건강한 아이들만 살펴보아도 그들은 새롭고 어른스러운 활동들에 몰두할 뿐 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멈칫거리고, 뒤로 움츠리고, 안전하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고, 의존하고,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소 미묘한 정도이지만 이와 똑같은 양면성을 성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노인들은 이미 지나간 것과 잘 알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40세가 되어서도 거의 매일 일상의 일들을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는 모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 즉 성장할 기회들을 갖는다.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나 내가 하려는 만큼 그리 빨리 자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이 선택하고자 하는 모든 조그마한 뛰어넘기들 중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것들도 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익힌 전체적 생활양식과 가치들을 버리고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이러한 거대한 뛰어넘기를 택하지 않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197

고통을 받아들여 함께 겪어 나가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치료의 핵심이며, 환자가 그것을 느낄 때에 치료효과는 배가된다. 치료자 자신을 기꺼이 확대시키고 환자들과 함께 괴로움을 겪으며 그들을 위해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면 치료자 자신도 성장하고 변화하게 된다. 또 어떤 상담도 나의 태도와 통찰력에 아주 의미 있고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경우는 없다.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사람을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 바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훈련이며 자신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변화도 이와 더불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좋은 정신치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좋은 부모가 되는 데에도 필수적으로 적용된다. 자신을 분리하고 확대하는 것은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에도 적용이 된다. 그들의 건전한 요구들에 응답해 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그런 변화에 따른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라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는 변하게 마련이며, 우리는 마땅히 그들과 함께 변하고 자라야 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십 대가 되기까지는 대개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부모들 자신이 더 이상 변화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성숙하 고 달라지는 아이들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결과 좋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16

자신의 의견을 밝힐 때, "당신이 일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당신처럼 직업을 갖지는 않았지만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더 정확해요. 내 생각엔 당신의 시간을 다른 곳에 더 쓰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아요."

"내가 옳고 당신이 잘못이니, 당신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태에 직면시키고자 하는 태도는 대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해버릴 수 있다. 그들은 생각 없이 이 일 저 일 간섭하고 다니면서 즉흥적으 로 비판하고 빈정대는 일을 쉽사리 한다. 대개 그런 비판과 직면은 화가 나거나 몹시 못마땅할 때 충동적으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발전보다는 혼돈을 증가시키는 셈이다.

참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책 없이 비판하고 사태를 일깨우려고 하지 않는다. 때로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행위가 거만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실을 일깨워 주려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 당시에 문제 되고 있는 것에 관한한 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성과 고유한 특성을 알아주고 존중해 준다(이에 대해서는 후에 더 이야기할 것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 너한 데 무엇이 좋은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이 좋은지를 더 잘 알고 있을 때도 있으며 당면한 문제에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수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위치에 설 수도 있다.

219

이럴 때에는 둘 중 더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적인 성장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사랑하는 상대의 삶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과 그 삶에 대해 사랑으로 충고해 주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난처해질 수 있다.

이것은 괴로운 자기 성찰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즉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충고를 하고자 하는 자신의 숨은 동기와 자신의 '지혜'를 잘 살펴야 한다. "내가 참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사랑하는 자의 선택이 오히려 현명한 것이 아닌가, 나의 편견으로 인해 내 인식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내가 저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방향을 잡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 혹시 나 자신을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닌가…………….”등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자문해야만 하는 질문들이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정밀히 조사해 보는 것이 겸손하고 온유한 것의 기초가 된다. 14세기 영국의 어느 성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온유한 것은 인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생긴 그대로 진실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으로 온유함에 틀림없다."

다른 인간에게 충고하거나 비판하는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적으로 자기의심과 자기 모색을 통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의 두 가지이다. 첫 번째 경우는 거만한 방법으로서 가장 흔하게는 부모, 부부, 선생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220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미리 계획한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영향을 끼쳐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결하고 비판할 때는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물론 대결이나 비판이 아니라도 사건들이 일어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에는 다른 보다 나은 많은 방법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암시를 준다든지, 비유를 든다든지, 상과 벌을 준다든지, 질문하거나 금지 혹은 허락을 하고, 새로운 경험 기회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조직을 만들 수도 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법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다음의 말로 충분 할 것이다. 사랑하는 개개인들이 이러한 기법에 고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돋우어 주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결정짓기 전에 먼저 그들 자신의 가치관을 자세히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그 다음에 칭찬을 해준다든지, 관심을 더 기울여 준다든지, 얘기를 해준다든지, 혹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실에 직면하도록 해주는 것이 그 아이가 더 호의적으로 반응할 것 같으면 사실에 직면하게 해주든지 등을 그 아이의 성격과 능력에 맞추어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에게 사태에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사실에 직면시키게 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223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말해야만 하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능력에 맞게 전달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사랑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데는 커다란 노력이 요구된다 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위험과 두려움이 생기는가?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겸손해진다. 그러나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내가 누구이길래 인간사의 과정을 좌우할 것인가? 내가 무슨 권리를 가지고 내 아이, 내 남편(부인), 내 나라, 혹은 인류에 대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가? 누가 감히 자신의 판단을 믿고, 이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려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누구이길래 하느님 행세를 하는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험이다. 우리는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세계와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개의 부모들, 선생들, 지도자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바로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사랑을 해내자면 완전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자기 인식도 없이 거만한 태도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영향력이란 신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을 파괴하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일하며 행동하는 것이 신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사랑은 우리의 역할이 하느님과 같은 신의 역할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 역할에 따른 책임감을 가지고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실수 없이 신의 뜻이 지상에 충만하게끔 행동한다.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역설에 이르렀다. 즉 인간이 신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랑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225

선생님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개념은 정열이 차지할 자리를 남겨 주지 않는걸요."

그리고 그들은 치료를 그만두었다. 그 후에 들은 말에 의하면 그 들은 다른 치료자들과도 몇 차례나 상담을 했으나 무질서한 결혼생활은 변화 없이 계속되어 매일 소리 지르고 싸우며 비생산적인 일과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들의 화합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찬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원색적인 그림들과 같고 도화지에 아무렇게나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아서, 매력이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어린아이들의 예술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렘브란트의 잔잔하고 조정된 색깔에서도 같은 색채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무한히 풍부하고 독특하며 의미있는 어떤 것이다. 정열이란 거대한 심층적 느낌이지 제어되지 않은 감정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격언에 "얕은 시냇물이 시끄럽고, 잔잔한 물은 깊이 흐른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감정이 잘 조절되고 평정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열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자기 절제하는 것이 그의 감정을 짓눌러서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해서도 안 된다. 나는 환자들에게 감정은 그들의 노예이며 자기 절제 훈련은 노예를 소유하는 기술과도 같다고 말해 준다.

227

인간의 감정을 적절하게 다루는 데에는 복잡하지만(단순하거나 쉽지 않다) 균형 잡힌 중용의 길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비판과 재조절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주인은 그의 감정(노예들)을 존중하고, 좋은 음식, 집, 의료혜택을 제공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에 대답해 주며, 그들의 건강에 대해 걱정하면서 그들의 규율을 정해 주고, 제한도 하며, 분명하게 결정해 주고, 새로 방향 지어 주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며, 더불어 누가 윗사람인가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히 해준다. 이것이 건전한 자기 훈련의 길이다. 아이에게 감정 중에서 분명 훈련되어야만 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내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순간적인 애착이나 정신집중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집중이 장차 가져다 줄 창조적인 힘을 위해서 이것은 존중되고 길러져야만 한다. 이것이 제멋대로 가게 놓아두면 그 결과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혼란과 비생산성에 이르고 만다.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그러나 좋든 싫든 우리가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의 24시간에 비례한다. 단순히 말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 인류를 사랑하고픈 열망에 불타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그러한 열망이 몇몇 특정한 개인에게로 길을 잘 잡으면 그들을 진정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그다지 많지가 않으며,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가 사랑하려는 상대방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결과를 낳고야 만다.

229

가족 안에서나 밖에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건설적인 관계들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와 훈련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훈련이 없는 자유란 사랑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파괴적인 것이다.

지금 어떤 독자들은 내가 훈련의 개념에 푹 젖어서 칼빈적인 처량한 금욕 생활 스타일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자기 훈련하라! 계속해서 자기 성찰하라! 의무! 책임! 신청교도주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이 어떻게 부를지라도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훈련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며, 이것만이 생을 근본적인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해서 가보라. 그러면 환희의 진귀한 순간들을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들은 허무하게 달아나 버리고 점점 더 붙잡기 어려워질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확대할 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주면 줄수록 내 자신의 정신적 성장도 더욱더 촉진된다. 나는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통해 성장함에 따라 내 기쁨도 증가하고, 그 기쁨도 계속해서 증대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신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존 덴버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그걸 알지. 당신은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 계속하여 그렇게 해보라. 인생은 완벽하다. 나는 그걸 믿지, 와서 나와 함께 사랑의 게임을 하자.
233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 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서 태어났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은 줄지라도, 당신의 생각을 줄 수는 없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의 육신은 집에 두지만, 그들의 영혼을 가두어 둘 수는 없다.
왜냐면 그들의 정신은 당신이 갈 수 없는 미래의 집에 살며, 당신의 꿈 속에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을 애써 닮으려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된다.
왜냐면 인생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활이 되어 살아 있는 화살인 당신의 아이들을 미래로 날려 보내야 한다.
사수는 영원의 길 위에 있는 표적을 겨냥하고 하느님은 그 화살이
날렵하게 멀리 날아가도록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의 팔을 구부린다.

사수의 손에 들어간 힘을 당신은 기뻐하리라.
왜냐면 하느님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그 자리에 있는 활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분리된 개체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결혼을 포함한 모든 친근한 관계들도 방해한다.

241

얼마 전의 일이다. 어떤 부부의 모임에서 나는 한 회원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아내의 '목적과 역할'은 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를 잘 먹이는 데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주제넘은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이런 참기 어려운 내 느낌을 보여 주려고 다른 회원들에게 부부의 목적과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얘기해 보자고 제안했다. 깜짝 놀란 것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여섯 사람이나 거의 모두 똑같은 답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남편이나 아내의 목적과 역할을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정의를 내렸다. 그들 모두 배우자들이 자기 자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들이고 결혼관계를 떠나서 어떤 종류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하고 나는 탄식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모두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당신들이 각각 자신의 개별적 운명을 성취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들 모두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쳐야 할 거요."

그 모임의 사람들은 심하게 야단 맞은 것으로 느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한 것으로 인해서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내게 아내의 목적과 역할에 대해서 정의를 해보라고 요청했다. 내 아내 릴리의 목적과 역할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녀가 가진 목적은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것이며,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들에게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243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이체)'로 말한다.

그러나 당신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들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말라.
당신 부부 영혼들의 해변 사이에는 저 움직이는 바다가 오히려 있도록 하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말라. 미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각 홀로 있어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계 속으로는 침범하지 말라.
생명의 손길만이 당신의 심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말아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246

때때로 우리가 '창조'라고 이름짓는 그 자연은?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기쁨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는 등 이상하고 이치에 안 맞는 반응을 하게 되는가? 어떤 음악은 악기로 연주되거나 노래로 불려질 때 그다지도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을까? 여섯 살 난 내 아들이 병원에서 편도선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온 첫날밤, 내가 피곤해서 마루에 누워 있을 때 아들이 옆으로 와서 내 잔등을 살살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그때 왜 나는 눈이 젖어 오는 것을 느꼈을까?

아직 논의되지도 않았으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차원의 사랑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질문들은 사회 생물학에 의해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인 지식을 가지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주 조금밖에 도움이 못 될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나 종교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가장 많이 이해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통찰력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들과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종교의 다양한 측면들을 다뤄 보려고 한다.

다음 장에서는 아주 제한된 방식이지만 종교와 성장 과정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은총에 초점을 두고 성장 과정에 있어서 은총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취급할 것이다.

은총의 개념이 종교에 있어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개념이지만, 심리학을 포함한 과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은총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 존재들의 성장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바라건대 다음에 계속되는 논의가 다소나마 종교와 심리학자 사이에 커져가는 간격을 좁히는 데 이바지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65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주 큰 사진의 작은 일부분처럼 어딘가 커다란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그리고 내가 그 그림을 잘 보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나는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 고 있으며, 내가 그것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의 캐시의 경우에는 치료를 통해서 하느님의 개념이 절대시되는 유신론에서 하느님은 무의미하다는 무신론으로 철저하게 탈바꿈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마르시아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무의미하게 여겼던 위치로부터 이동해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위치로 옮겨 간 것이었다. 똑같은 과정, 똑같은 치료자였으나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결과는 둘 다 성공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캐시의 경우에는 치료자가 그녀의 종교적인 관념들을 적극적으로 맹공하여 그녀의 생에서 하느님에 대한 개념의 영향을 극적으로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 경우다. 그런데 마르시아의 경우에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오히려 그 영향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료자가 없었다면 그녀의 종교적 개념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치료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하는 회의가 생길지도 모른다. 치료자가 적극적으로 환자의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도전해서 고의로 환자를 인도할 필요성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또 다른 유형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307

우리의 지혜가 유전된 것임을 시사한다. 기억 현상에 관련된 유전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과학 실험에서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가 지식을 유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식이 핵산 코드 형태로 세포 속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지식을 과학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인간에게 유용한 여러 지식들이 어떻게 해서 조그만 두뇌 속에 저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과학적인 설명은 유전된 지식이나 좁은 범위의 경험적 지식 따위를 저장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끔 하지만 정작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에는 답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그러한 전문적인 가설을 좀 더 파고들어 본다면-그 가설이 어떻게 구 성되었고, 또 어떻게 작용하는가 등등-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상 앞에 경외의 심정으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파고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이 우주의 질서에 대해 사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이 그의 군단과 수호천사들, 세라핌과 세루빔 같은 천사들을 거느리고서 다스리는 이 우주의 질서 말이다. 기적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기적이다.

370

이 예는 한 젊은 여자 환자와 관련된다. 그녀는 우리 서로가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꽉 닫혀서 열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지나치게 이지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녀는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서 현실세계에 대한 고도로 정리된 '기학학적' 개념을 갖춘데 카르트적 합리주의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지나친 합리주의를 완화해 보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 그녀 스스로가 들어앉아 있는 완고한 지적 껍질을 깨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창을 등진 채 그녀와 마주 앉아서 그녀가 쏟아내는 말의 잔치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 아주 인상적인 꿈을 꾸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황금풍뎅이를 주었는데 아주 값비싼 보석으로 된 것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꿈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 등 뒤에서 무 언가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기척이 났다. 돌아보았더니 어떤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려고 바깥에서 유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즉시 유리창을 열고는 날아들어 오는 벌레를 붙잡았다. 그것은 풍뎅이였다. 초록과 황금색이 뒤섞인 그 빛깔은 흡사 황금풍뎅이 같았다. 나는 그 벌레를 내 환자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그 황금풍뎅이가 있어요." 이 사건이 그녀의 합리주의에 내가 바라마지 않던 구멍을 내었다. 그녀의 얼음장 같은 지적 저항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후 치료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였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불가해한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초능력이라는 현상이다.

375

"우연히 이 책을 찾았어요. 당신이 이 책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어쩐지 꼭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른 때 같았으면 책을 쓰는 일에 몰두하느라 약간 귀찮고 성가시게 느끼며 그 책을 볼 틈이 없다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 하리만치 겸손한 그녀의 태도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되도록 빨리 읽어보겠노라 하였다. 그 책을 가지고 집에 오기는 했으나 '되도록 빨리'가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그런데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나는 다른 책을 젖혀두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앨런 휠리스가 쓴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나 How people Change』라는 얇은 책이었다. 책임감에 대한 내용이 그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은 내가 골머리를 앓 고 있던 바로 그 주제를 좀 더 심화시킨다면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 들을 아주 깊이 있고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내 책의 그 부분을 간략히 서술하고서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각주를 달아 휠리스의 책을 참고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곤경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동네방네 나발을 불 일도 아닌 것 같다. 무시해 버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그런 것 없이 잘 지내왔으니까. 그러나 나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그 사건은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하다.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껴지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평범하다. 마치 풍뎅이가 조용히 창문을 두드린 사건처럼, 은총은 우리 의식의 문을 두드린다. 내 친구의 아내가 내게 책을 건네준 일 이후로 이와 비슷한 사건은 수도 없이 생겼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것은 내가 의식하고 있고 또 어떤 것은 그 놀라운 기적적인 본질을 의식하지 못 한 채로 혜택을 입고 있다.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스쳐가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379

그런 현상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연법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에 열역학 제2법칙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보다 정돈된 상태로부터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복잡한 분화 상태로부터 보다 단순한 분화 상태로 흘러간다. 한마디로 말해 우주는 흘러 내려가는 과정이다. 이것을 묘사하는 데 종종 인용되는 예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시냇물이다. 이 과정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면 에너지나 일-펌프, 수문, 양동이로 퍼올리기, 기타 등등-이 필요하다. 흘러내린 물을 다시 원래 연원 인 산꼭대기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힘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다른 데서 가져와야 한다.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에너지 체계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아래로 흘러내리기만 하여 마침내는 모양도 없고 질서도 없는 점액질이 되어 버려 더 이상은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를 엔트로피라 부른다.

엔트로피의 상태를 향하여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엔트로피의 힘이라 한다. 진화의 흐름은 바로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진화의 과정은 유기체가 단순한 분자구조로부터 보다 고차적인 복합구조, 즉 분화되고 정돈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분자 한 개보다 약간 큰 간단한 유기체이다. 박테리아는 좀 더 복잡하며 좀 더 분화되었고 세포벽과 여러 개의 다른 종류의 분자들이 분화된 형태이며 동화작용을 한다. 짚신벌레는 핵산과 섬모와 소화기관을 가지고 있다.

386


진화는 피라미드형의 도식으로 그릴 수 있다. 가장 복잡하지만 수가 적은 인간은 꼭대기에 있고, 가장 단순하고 수가 많은 바이러스는 바닥에 있다.

꼭대기는 엔트로피의 힘에 대항하여 밀고 올라간 셈이다. 피라미드 속에 그려 놓은 화살표는 바로 이 진화의 힘을 상징한다. 이 '어떤 힘'은 수백만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연법 칙'에 도전해 온 결과, 그 자체가 일종의 자연법칙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영적인 진화도 이것과 비슷한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영적 성장의 과정이 힘겹고 어려운 것임을 나는 거듭해서 강조해 왔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을 극복하고 그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의 힘이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이겨 내야 한다.

388

우리들 개개인이 모두 완전한 하느님 그 자체가 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 성장의 목적이란 의식이 무의식에 통합되어 모든 것이 무의식이 되어 버리는 데 있다는 말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야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것은 명징한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무의식의 신이리는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의식의 새싹이 신 그 자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모습의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의식은 존재 전체 가운데 실천하는 부분이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의식이다. 완전히 무의식적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갓 태어난 어린 아기와 같아서 하느님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힌두교나 불교의 일 부 신비 사상 가운데는 퇴행적인 성격으로 비춰질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자아의 영역이 없는 유아의 상태를 열반에 비유한다거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유사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비주의 철학은 정반대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아가 없는 무의식 상태의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자아가 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적 자아로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독자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 의지를 하느님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하여 새롭고도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의식적 결정을 통해 이 세상이 그분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한 모습으로서, 인간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사랑이 없던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며, 인류 자체의 진보를 위해 봉사하는 것 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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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한 자아의 망각은 언제나 마치 고요히 사랑에 잠긴 것과 같이 조용한 환희로 다가온다.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외로움으로부터의 탈출도 가능하게 해준다. 합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즐거운 경험이기는 하지만, 영적 권능을 경험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경지가 심오해질수록 어떤 행동으로 돌입하기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 다. 나는 이런 상황을 이 책의 제1부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휘하의 일개 사단을 전투에 참가시킬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 두 장군을 예로 들어서였다. 자신의 사단을 단순히 일개 전략 단위로만 간주하는 장군은 결정을 내린 뒤에 편안히 잠들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휘하에 있는 장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다른 장군은 이 결정이 고민스러운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장군들과 같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문명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다. 어린아이 하나를 칭찬할 것인가 야단칠 것인가 를 결정하는 것조차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한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하고서 결과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더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하고 또 소화해 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알수록 결정을 내리는 일은 복잡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 알 수 록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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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즉 성장하려는 의지는 어린 시절의 부모의 사랑뿐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에 미치는 하느님의 사랑인 은총에 의해서도 자라난다는 것을 나는 믿게 되었고, 그 후부터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써 왔다. 은총은 우리의 의식 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대리자를 통해 작용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 말고도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 사람들이 부모로부터의 애정결핍이라는 외상을 극복하고 인간적으로 부모보다 훨씬 나은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은총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자신의 부모로부터 기인한 환경을 극복하고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적은 것은 왜일까? 내가 믿기로는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으며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덜 귀한 사람이 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고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우리 대 부분은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받은 자는 적다."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은총에로 불려 가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은총의 부름에 귀기울이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가? 나는 앞에서 질병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 능력을 주는 은총에 대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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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건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저항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주어졌었다.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즉 우리에게 저주로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이다. 은총이 인간의 진화라고 하는 사다 리로 우리를 밀어올리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인 것처럼 엔트로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힘에 저항하여 지금의 편안한 자리에 그냥 머무르게 하거나 훨씬 적은 힘이 요구되는 사다리의 아랫단으로 내려가 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르치고 훈련시켜 진정으로 사랑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해 이미 얘기했었다. 이 어려움을 피해 가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엔트로피와 게으름이라고 하는 근본적 문제 말고도 또 한 번 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정신과 의사들뿐만 아니라 문외한들도 승진한 직후의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정신적 문제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승진 노이로제'라 불리는 이 증상은, 군인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하사라든가 중사, 또는 상사가 되지 않으려하는 사병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똑똑한 일반 사병들 가운데 장교가 되느니 죽는 편이 낫겠다면서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꼭 맞으리라고 생각되는 보다 높은 지위로의 상승을 보장해 줄 장교 승진 교육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직업에서 뿐 아니라 영적 성장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은총에의 부름은 곧 보다 더한 책임과 권력이 있는 지위로 승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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