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정리하자면,
어떤 진리에 이르는 것은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보다 기존에 있던 것에 내 것을 덮어쓰는 것이 그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이다 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수산나와 장로 그림들과 객관성에 대한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었네요.
니콜라 부리요가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쓴 문장처럼 '우리가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몽타주'일 뿐이다. 홈비디오로 기록한 무편집 영상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듯 살아온 모든 순간을 누락 없이 축적한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될 순 없다. 중요한 건 자기 서사고, 의미 부여다. 테드 창이 『숨』에서 쓴 아래 문장처럼.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아상을 예로 들어보자. 자아상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사건 중에서 특정 부분에 주목하고 맥락을 만들어서 의미를 덧붙인 기억의 모둠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나에 대해 편집된 이야기'다. 인간은 누구든 성공과 실패를 고루 겪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작은 실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의지박약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작은 성취의 순간을 유독 예민하게 그러모아서 '나는 마음먹으면 해내는 사람이야'라는 자아상을 그리기도 한다. 객관적 사건의 양상보다는 해석과 의미 부여가 인지적 차별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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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이 감소하면 근육이 퇴화한다'는 원칙은 헬스장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도 그렇다. 어렵다고 방치하면 수행력은 계속 떨어진다.
얼마 전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열어젖힌 문으로 거대한 변화가 들이닥쳤다. 챗 GPT는 긴 글의 핵심도 뚝딱 요약하고, 원문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독자 수준에 맞게 수십 가지 문체로 고칠 줄도 알았다. 함께 일하는 1~3년 차 주니어 에디터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줬다. 곰곰 생각했다. 챗 GPT가 절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은 뭘까? 답은 금세 나왔다. 챗 GPT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입장을 갖지 못한다. 입장이 없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한 다. 앞으로도 생성형 AI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가지 단어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 무엇이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지, 무엇이 신선하고 매력적인지 의미 부여하고 주장하고 설득하는 일은 언제나 인간이 할 것이다. 에디토리얼 씽킹이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에디토리얼 씽킹을 시작합니다. 38
칵테일파티 효과 cocktail party effect라는 인지심리학 개념이 있다.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환경 안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우선으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뇌의 기능을 뜻한다. 파티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떠들면 우리 귀에는 청각 정보가 대량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 뇌는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예를 들어 대화 상대의 목소리,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소리를 잡음으로 처리해버린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내가 산 모델이 갑자기 길에 많아진 기분을 느끼는 것, 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장만해야 하면 어딜 가도 가구만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같은 맥락의 인지 작용이다. 비슷한 원리로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짚어준다. 질문을 품고 있으면 정보는 딸려온다. 질문이 자석이라면 정보는 철가루다.
철학자 에릭 호퍼는 『길 위의 철학자』에서 이렇게 썼다. "언어는 질문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 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데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아름다운 문장을 내 식으로 변형해 마음에 품고 있다. "에디터가 에디터다운 것은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다. 에디터의 커리어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할 충동이 없는데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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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너무나 방대했지만, 짧은 글로 분명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네 개의 키워드-기업형 예술가의 시초, 반복을 탐험한 사상가, 황금 시대의 시민, 명성을 사랑한 슈퍼스타로 정보를 분류했다. 제목은 앤디 워홀이 복수의 페르소나를 가진 아티스트임을 암시하도록 '앤디 워홀에 로그인하는 네 개의 ID'라 고 지었다.
손 안에 든 재료를 특정 기준을 세워 정리하고, 그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의미나 시사점을 찾아내기 위해 습관처럼 질문 한다.
"이걸 뭐랑 묶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이 두 문장은 설득력 있는 목차나 보고서 개요를 짤 때도 유용하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설득력이 감정이입과 상상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에디터라면 콘텐츠를 볼 상대방 클라이언트, 상사, 독자 입장에서 궁금한 점이 무엇일지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업무용 문서라고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앞서 중요하게 설명한 연상 작용처럼 편안한 일상어로 생각나는 대로 끼적이면 된다.
3. 범주화
아기와 빗방울은 약하다(weak), 바다와 여왕벌은 여성이다(female), 마법 의식은 이런 종류의 연관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던 고대 이집트의 한 여성은 밀랍과 남자의 마음은 둘 다 부드럽게 녹아내릴 수 있다는 가정하에 남자의 모양으로 빚은 밀랍 조각상을 녹였다. -제롬 케이건,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훈련법은 이렇다. 먼저 머릿속 단어 주머니에서 아무 단어나 골라잡는다. 지금 나는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다음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를 적는다. '고양이-강아지'. 이 단어 조합의 공통점은 뭘까? '가장 사랑받는 반려동물'이라고 정리해본다. '고양이-가방'은 어떨까?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됨'이라는 속성이 연상 된다. '고양이-택시'라면 어떨까? '불러도 절대 안 옴'. '고양이- 빨간색'은? '강인하다'. '고양이-몰스킨 노트'는? '쫙 펴진다. '고양이-달력'은? '뭔가를 하라고 조른다'...
이 놀이 역시 단어(정보)가 품고 있는 연상 그물망을 활성화 시킨다. 단어(정보)는 모양, 색, 촉감, 크기, 기능, 소리, 일반적으로 위치하는 장소, 움직임, 습성, 범주, 상징성 등의 다양한 갈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 갈고리들을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연결 가능성이 높은 재료나 개념을 유연하게 찾아낼 수 있다.
목적에 맞게 적정 거리 조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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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을 도출 한 관점이 형식의 일관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집을 '물질적 조건과 심미안이 극적 타결을 하는 공간'으로 정의했으니 보증금과 월세 정보를 공개하는 인터뷰 형식이 적절했고, 플래시를 강하게 터뜨려 생활감이 느껴지도록 하는 사진 톤도 말이 됐다.
이렇듯 '내가 보는 ○○의 의미는 ○○'라는 관점이 세워지면 형식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컨셉이 필요한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의 내용 what to say과 그것을 담는 그릇 how to say을 잘 정렬시켜서 궁극적으로 아직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빈 땅에 내 콘텐츠를 위치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기억되고 선택받도록 하기 위해서, 컨셉은 톡톡 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식과 포지셔닝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보는 ○○의 의미는 ○○'라는 선언 뒤에는 그 생각을 검증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미 나와 있는 비슷한 주장이나 해석은 없나? 여기가 정말 빈 땅이 맞나? 이미 비슷한 관점의 콘텐츠가 있다면 표현적으로 새롭게 할 방법이 있나? 새롭게 할 방법이 없다면 그 아이디어는 폐기하고 처음 부터 다시... 이렇게 뱅글뱅글 생각의 뫼비우스 띠 위를 걷는다. 컨셉 도출에 가장 필요한 역량은 재치가 아니라 끈기라고 생각한 다. 내가 깃발을 꽂을 수 있는 빈 땅이 보일 때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끝까지 자문자답하는 끈기가 기억되는 컨셉을 만든다.
6. 컨셉
그런데 별것 아닌 경험담도 맛깔나게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서사시 같은 경험을 하고도 무미건조하게 뭉뚱그리는 사람도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나는 핵심을 알아보고 구조를 조직하는 능력이 결국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 이야길 들을 상대방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느낄 만한 재료가 무엇인지, 신선하다고 느낄 만한 내용이 무엇인지 상상할 줄 모른다면 핵심을 골라내기도 힘들 것이다. 창작자로서 '아, 이렇게 만들어볼까?', '아! 재밌겠다!' 하면서 즉흥적 기분에 도취되는 경험도 분명 필요하지만, 그 건 최초의 시동을 걸기 위한 에너지로서 의미가 있다. 흥분되는 첫 마음이 지나고 난 뒤에 콘텐츠를 지탱하는 힘은 타인에 대한 상상에서 온다. 수용자에게 어떤 첫인상으로 다가갈지, 그들은 어느 순간에 어떤 마음으로 이 콘텐츠를 선택할지, 보고 난 뒤에 무엇이 마음에 남을지 상상한 만큼 콘텐츠에 힘이 생긴다. 이 야기를 듣는 입장일 때도 마찬가지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상대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의도를 읽어내려 애쓰며 듣는 적극적 경청을 해야 핵심을 알아차릴 수 있다.
수용자와 맥락에 따라 핵심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가벼운 놀 이로 함께 경험해보자. 동화 『인어공주』 줄거리를 기억하시는지?
핵심을 알아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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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지금처럼 생활 곳곳 어디서나 이미지를 볼 수 없었고, HD 해상도 단말기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이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회화 작품이 가장 생생하고 매혹적인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에디토리얼 씽킹을 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각 작가가 이야기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어디에 주목 하는가?" ①~③은 여성의 벗은 몸을 훔쳐보고 희롱하는 행동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는 평온함이 작품 안에 흐른다. ①~③의 경우 화가가 주목 하는 건 '폭력'이 아니라 매력적인 수산나의 '나체'다. 수산나가 얼마나 성적으로 매혹적인지 보라고, 이렇게 유혹적인 여성이 눈 앞에 있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냐고, 당신도 끌리지 않냐고, 선을 넘는 짜릿한 상상에 동참하지 않겠냐고 말을 건다.
반면 ④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입장을 취한다. 화가가 주목하는 건 수산나의 '고통'이다. 이처럼 같은 소재도 어디에 주목하는지, 다시 말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창작은 자신이 발견한 의미를 당대의 사회문 화적 맥락 안으로 던져넣는 행위다. 환영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일하게 여성 화가 입장에서 '수산나와 장로들'을 그 린 젠틸레스키 작품은 수백 년 동안 주류 미술사에서 지워졌다.
8.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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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의 문맥 안에서 부활해 비로소 제대로 이해받고 있다.
정보는 언제나 다면적이다. 네트워크처럼 여러 갈래로 교차 하는 문맥 안에서 사물, 사건, 인물은 전방위적으로 의미를 뿜어 댄다. 나에게는 악역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다른 맥락에선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고통의 이유처럼 느껴지는 어떤 사건이 다 른 맥락에선 초월적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 나는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을래' 라는 태도로는 그 무엇도 창작할 수 없다. 주목이 가진 힘과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해석 가능성이 수천수만 가지일지언정 '나는 이렇게 바라보겠다'는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 에디터적 사고력은 정보를 해석하는 자로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위치와 관점을 의식하는 과정에서 길러진다.
이번엔 조금 실용적인 예를 들어보자. 성수동에 멋진 카페가 많이 생기는 현상을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에디터 A씨와 에디터 B씨가 각각 이런 기획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내가 이들의 편집장이라면 다음과 같이 피드백을 줄 것이다.
에디터 A의 기획 : 요즘 뜨는 성수동의 멋진 카페 10곳
피드백 : 에디터적 사고력을 초급 레벨로 발휘한 기획이다.
입장과 관점을 정하고 드러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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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소개한 '수산나와 장로들' 사례에서 보았듯 미술사적 평가 역시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합의한 시대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다. 정치사회문화적 제도가 바뀌면 주류 시각도 바뀐다. 이상하지 않은가? 객관이 완전무결한 절대 진리라면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변치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품고 있을 무렵, 구원 같은 문장과 만났다. 이후로 내내 내 안에 머물며 도끼가 되어준 문장.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정희진처럼 읽기』의 한 꼭지에서 정희진 선생은 객관성의 신화를 꼬집는다. 흔히 객관적 세계라 여겨지는 과학도 그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 입장에 대한 독단적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개종의 역사라는 것이다. (갈릴레오 사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어지는 퍼즐 조각을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에서 찾았다.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 joint- 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주관적인 것의 힘 173
객관은 완전무결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동시대 다수가 합의 한 임의적 약속이다. 어떤 생각이 객관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그 것을 수용한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의미다. 다수의 합의를 얻는 이유는 여럿일 수 있다. 꼭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생각이 논리적 이고 탁월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저 노출 빈도가 높고, 오랫동안 당위로 여겨졌고, 명성과 권위의 후광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미미했던 누군가의 주관이 끈기 있는 설득으로 객관이 되기도 한다. 1963년 8월, "흑인이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와야 한다"고 외쳤던 한 사람의 목 소리는 처음엔 일개 개인의 주장일 뿐이었지만 서서히 주류 집단의 생각으로 자리 잡아 이제는 당연한 지배 규범이 되었다.
결국 설득의 문제다. 주관은 열등하고 객관은 우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건 주관의 산물인데, 어떤 주관은 여러 이유에서 설득력을 가져 보편의 차원에 자리 잡는다. 냉철하게 숫자를 보는 비즈니스 세계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책상 위로 온갖 곳에서 기록한 데이터가 쌓인다. 숫자들은 중립적이지만, 그중 특정 지표에 '주목'하고, 경영 여건에 대한 '판단'을 내려 '전략'을 세우는 경영자는 결국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일한다. 자기 버전의 현실 인식 프레임을 제시하고 함께 일하는 구성원의 합의를 최대한 모으는 것이다. 편집도 그렇다. 주관적 관점으로 정리한 결과물을 타인에게 보이고 합의를 모은다.
9. 객관성과 주관성, 174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 쓰고 있는데요.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내내 나쁜 사람이었던 건 아니거든요. 쓰고 싶은 소재이긴 한데, 혹시 제가 아버지를 나쁘게 몰아가는건 아닐까요?"
몇 해 전, 글쓰기 특강에서 한 독자가 질문을 건넸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청중 몇몇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 역시 비슷한 고민으로 서성인 경험이 있어 그의 의중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회고형 에세이 쓰기는 오래 방치한 서랍을 정리하는 일과 비슷하다. 잊고 살자 결심했지만 잊히지 않는 순간, 늦은 새벽 슬그머니 어깨동무하는 어두운 감정, 공감받지 못한 욕망, 발설하고 싶었지만 삼켜야 했던 말 등이 뒤엉킨 서랍. 사람마다 서랍의 크 기와 상태는 제각각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깊은 곳에 있던 서랍을 열어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다시 말해 내밀한 기억을 글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서랍 지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을수록 그는 내 인생에 큰 타격감을 남길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지나가던 행인이 부당한 언사를 보일 땐 곧장 '미친 사람 아냐?'라고 거침없이 판결 내리지만, 가족이나 친구의 경우라면 온갖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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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
나는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의 대화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주저 없이 붙일 만큼, 만약 인터뷰가 에디터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20년이나 하지 못했을 것 이다. 누구든 붙잡고 질문할 수 있다는 직업적 특권에 기대어 삶의 갈증을 해소한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내 안에도 빛나는 무언가가 있을까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죠, 아름다움이 대체 뭘까요, 우정이란 또 뭐죠, 의욕이 나지 않을 땐 어떻게 해요,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인터뷰 중'이라는 팻말만 붙이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일상적 관계에서는 좀처럼 던지지 않는 커다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 거는 경우가 별로 없는 내향인인 나는 인터뷰 현장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구하고 채웠다. 에디터라는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20년 동안 어림잡아 1,500명 정도의 타인을 취재하지 않았나 싶다. 질문지를 수도 없이 꾸렸는데도 질문 만드는 일이 지겹 지 않다. '이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때 마음은 어땠을 까?' 궁금해하면서 저쪽 편으로 건너가는 시간이 좋다. 나의 작은 머리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 쓸 때 가장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분을 느낀다. 물리적 이동은 없지만, 더없이 강렬한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폴 서루가 『여행자의 책』에서 쓴 다음 문장을 나는 늘 마음에 품고 있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
195
멋진 도시를 보려고 8km를 가느니, 한 사람의 현인과 이야기하기 위해 160km를 가는 편이 낫다.
학위가 있거나 명성이 높은 사람만이 현인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인터뷰가 잘못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터뷰이조차 다른 주파수를 이용해 내게 지혜를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about a father' 프로젝트를 하면서 단단해졌다.
'about a father'는 라이프스타일 계간지 《볼드저널》 편집장으로 일한 2017년부터 2018년 사이에 진행한 길거리 인터뷰 프로 젝트다. 동시대 아버지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담히 아카이브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사진가와 정기적으로 길거리로 나갔 다. 경비원, 직장인, 택시 기사, 공사장 인부, 구둣방 세탁소 주인 등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중년 노년 남성에게 무작정 말을 걸었고, 당신 삶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청했다.
이런 취재는 예술가나 명사 인터뷰보다 열 배 정도 긴장된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만난 취재원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해줄지, 어떤 맥락으로 대화가 흘러갈지, 그렇게 나눈 대화가 원고로 남길 만큼 유의미할지,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은 상황
11. 질문, 196
노래를 따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는다는 거야. 지금은 자가용 운전해서 어느 때든 갈 수 있고 어느 때든 볼 수 있는 시대잖아. 쉽게 구할 수 있고 아무 때나 할 수 있으면 추억으로 남지 않아요. 편리함? 좋지. 그런데 진짜 내 기억에는 남질 않아."
소맷단이 닳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 한 갑 정도를 연달아 피운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의 60대 어르신이 말했다. '쉽고 편리한 게 늘 좋은 건 아니야' 간결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지혜. 길거리에서 오래 서성이며 차곡차곡 쌓아간 인터뷰가 100명을 향해갈 무 렵,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언어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는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직업적으로 질문을 달고 사니 역으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어느 상황에나 통용 되는 좋은 질문이 무언지는 나도 여전히 모르지만, 기억하려 애 쓰는 몇 가지 마음가짐이랄까 태도 같은 건 있다.
첫째, 상대와 상황에 반응하는 현재의 나 자신을 존중한다. '너무 사소한 질문 아닐까', '사적인 질문이라고 기분 상하면 어쩌지', '뜬금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같은 자기검열을 내려놓고 궁금하다면 일단 묻는다.
11. 질문
에디터가 갖춰야 하는 다른 역량과 마찬가지로 비주얼을 다루는 역량도 수치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표준화된 학습 방식이나 테스트 방식이 존재하는 외국어 어학 능력과는 다른 세계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비주얼 감각은 각 개인이 경험을 통해 배우면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제 부터 하려는 이야기도 에디터 최혜진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일 뿐 모두에게 통용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밝힌다.
한창 월간 패션지 에디터로 일한 2000년~2010년대에는 핀터레스트 같은 이미지 스크랩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핀터레스트에서 이미지 하나를 고르면 그와 유사한 이미지가 끝없이 추천되지만, 그때는 시각적 영감이 필요하면 회사 도서관 이나 수입 잡지 전문 책방에 가서 일일이 책장을 넘기면서 쓸 만 한 자료를 찾아내야 했다. 찾고 싶은 이미지를 만날지 만날 수 없을지 모르는 상태로 수십 권의 참고 자료를 들춰보았고, 그 과정에서 원래 의도치 않았던 페이지들까지도 감상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페이지 흐름과 리듬감, 다양한 레이아웃의 효과 등을 익히고 배웠다. 효율성 측면만 보면 핀터레스트는 축복이지만, 생각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 좋아 보이는 이미지 사냥만 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찬물을 흠뻑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12. 시각 새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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