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기에는 뭔가 좀 어색하고 친숙함이 멀다는 생각에 선뜻 시집을 들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독서 내공이 한 3년은 더 쌓여야 온전한 시집을 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대신에 시와 그 시를 설명하는 글들로 이뤄진 책을 선택했습니다. 부제로 직장인을 위로한다는 메시지가 있어서 더욱 눈길을 끌게 되어 책을 손에 잡게 된 듯합니다.
전체 글 중 가슴을 진하게 파고드는 시와 이를 설명하는 문장들이 있어서 좋았고 덕분에 시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책 속 그은 밑 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는 일과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도 모르는 나에게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구를 열어주었다. 시적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았다.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 있었고 막힌 것이 뚫리는 경험이 있었다. 차츰 이중생활에 익숙해져서 수시로 현실 공간에서 상상 공간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물 론 내가 상상 공간에서 숨 좀 쉬었다고 삶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 나는 여전히 돈과 일과 힘 있는 손이 쥐고 흔드는 대로 휘둘렸으며, 순하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어수룩하게 당했으며, 아무리 달려도 생활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꽤 달렸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힘 있는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 -미 투!!
하지만 시 쓰기를 통해 삶과 현실을 견디어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시는 내 안의 정체불명의 괴물을 달래주었으며, 쓸모없으면서도 막무가내로 절실하기만 한 욕망을 허구의 공간에서 충족시켜주었다. 시는 지겹고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일상이나 닳고 닳도록 보아서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들을 두근거리며 이제 막 처음 보는 것 같은 신선한 '첫 경험'으로 하게 해주었다. 답답하고 좁은 시야와 숨구멍을 확장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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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좋은 풍경을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면 가족이 먼저 생각난다. 이 아까운 것을 나만 독차지한다는 생각이 들면 혀가 아무리 맛있다고 감탄해도 마음은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시를 읽을 때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여럿이 나누면 즐거움이 얼마나 더 커질까 하는 생각 말이다. 다행히도 이런 즐거움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기회가 생겼다. 2010년 오월부터 일 년간 한국문화 예술위원회에서 임명한 문학 집배원이 되어 내가 평소에 즐겨 읽거나 좋아하는 시에 짤막한 감상을 붙여 배달하게 된 것이다. 유니폼을 입고 우편 행낭을 메고 빨간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우편배달부가 아니라 가상공간에서 인터넷망을 타고 배달하는 유령 배달부였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월요일마다 편지 봉투를 뜯는 대신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시인의 낭독과 동영상 그래픽과 음악이 어우러진 멋진 시를 감상할 수 있었다.
내가 즐겨 감상한 시들은 내면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주거나 사물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게 해주거나 지리멸렬한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확 바꿔 보게 하거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즐거움으로 바꾸는 에너지가 있는 시들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관습에 끌려다니는 나를 혐오스럽거나 오싹한 체험으로 깨워 한껏 불편하게 해주는 시도 지나칠 수 없다. 혼자 즐길 때는 시의 맛이 시거나
조깅
-황인숙
후후후, 후! 하, 하, 하, 하!
후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후하후하!
땅바닥이 된다.
나무가 띈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띈다.
내生의 드문
아침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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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가벼움의 본능이 깨어나다
영하 십 도까지 떨어졌던 이월 하순. 추위를 각오하고 내복 위에 두꺼운 점퍼를 챙겨 입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한겨울 추위에 돋아 있던 매섭고 날카로운 가시나 이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추위에는 강아지가 손가락을 무는 것처럼 간지러움마저 느껴졌다. 잔뜩 움츠렸던 세포가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두꺼운 점퍼가 무겁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콧구멍이 여기저 기서 향긋한 흙냄새와 풋내를 찾고 있었다. 영하 십 도의 바람을 맞으면서 저절로 이런 발음이 나왔다. '봄이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봄추위는 순하다. 꽃샘추위는 아무리 성질을 내도 부드럽다. 입춘이 지나 계곡과 땅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있을때 내 몸의 얼음도 조금씩 녹고 있었나보다.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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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얼음도 조금씩 녹고 있었나 보다. 내 마음 어디에선가 봄이 차근차근 준비되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그에 따라 몸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나보다. 겨울의 완력에 단단하게 묶였던 동식물들이 일시에 풀려나는 느낌. 생명을 꽁꽁 묶어두었던 끈이 봄 햇살에 툭, 끊어지는 느낌. 돌덩이처럼 딱딱해지고 무뚝뚝해졌던 힘들이 스프링처럼 경쾌하게 튕겨 오르는 느낌. 그 탄력의 난리! 반동의 난리! 약동의 난리! 유쾌한 난리! 통쾌한 난리! 후련한 난리! 웃음의 난리! 터져 나오는 소리의 난리! 어질어질 아지랑이의 난리! 흙이건 나뭇가지건 마구 뚫는 초록의 난리!
조깅을 하는데 왜 힘들지 않고 오히려 상쾌할까. 다리와 허파에서 탄력과 가벼움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같이 뛰고 싶어서 "뒤꿈치가 들린” 나무와 버스와 창문이 안달하고 있는게 보이기 때문이다. 가뿐 들숨과 날숨에 날개가 달려 허파를 날아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니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은 가쁜 숨을 쉬고 싶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우리 몸에는 '삶의 가장 깊은 본능 중의 하나인 가벼움의 본능' 또는 '비상(飛上)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우 리가 날아오르는 꿈을 꿀 때는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게 아니란다. 날 개가 있건 없건 먼저 날아오르고 나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나 중에 날개가 달리는 거란다. '꿈꾸는 사람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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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흙흙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흙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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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우는 법
웃을 일은 점점 없어지고 울 일은 차츰 많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울려고 하면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 남수단에서 봉사와 선교 활동을 한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며 눈물을 흘린 후에는 나도 거의 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공 야고보 수사에 의하면, 남수단 사람들은 거의 울지 않는 단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가 그들을 울리는 걸 보면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가를 알 수 있단다. 자유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과 싸우고 인종 갈등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인한 정신이 필요할 것이고, 그래서 남수단 사람들은 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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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남수단 사람들은 울면서도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소리는 작거나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울음을 참느라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 울음은 절대로 울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뚫고 올라온 진한 울음이었다. 그 울음은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온몸의 힘이 눈물로 모여 눈과 목구멍으로 강제로 밀고 올라올 때 그것을 억누르려는 정신이나 의지는 한없이 나약해진다.
울음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을 녹여서 가볍게 하기 위한 몸의 장치인 것 같다. 격한 감정이나 고통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몸은 제가 살기 위한 자구책으로 울음을 울어 그 무거운 것을 배출해주는 것 같다. 한참 울고 나면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깨끗하게 씻긴 듯 상쾌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울음에는 즐거움도 있다. 그래 서 박완서는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잘 안 나오다가도 슬픔에 적당히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온다'면서 울음에 '달착지근한 맛'이 있다고 얘기했다(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울음은 좋지 않은 감정을 씻어내는 보약이 될 수 있지만, 몸에 좋다고 아무 데서나 뜬금없이 울 수는 없다.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울어야 할 경우도 있지만, 감추면서 혼자 은밀하게 울음을 즐기고 싶은 경우가 더 많다. 마음껏 울면서도 창피당하지 않고 바보처럼
제1부
25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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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훤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틀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 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神과 神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 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 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 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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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밖으로 터져 나오려 했는지 깨닫게 된다. 뒤늦게 내 허파와 내장은 꽃과 나무가 독한 겨울 추위를 제 몸에 흡수하여 숙성시켰다가 갑자기 폭발시킨 색깔과 향기의 맛을 전율하며 느끼게 된다.
그때 꽃과 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혈연관계라는 걸 깨닫게 된다. 꽃과 나는 첫눈에 불꽃이 튀고 서로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관계는 아니다. 거기엔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폭풍 같은 연정의 열기는 없다. 겉으로는 소 닭 보듯 하지만 안으로는 서로의 피가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혈육이 문득 느껴진다. 그래서 꽃은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처럼 오고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오는 것이다. 그래서 꽃은 나를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것처럼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묶는 것이다.
봄꽃은 열흘도 채 넘기지 못한다. 한 번 보고 나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김영랑의 시처럼 꽃이 활짝 핀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한 닷새이고, "봄을 여읜 설움"은 "삼백예순 날" 지속된다. 보는 시간은 잠깐이고 기다리는 시간은 아주 길다. 눈으로 보는 꽃은 아주 짧고 마음으로 보는 꽃은 아주 길다. 그래서 꽃은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이고 그립지 않은 그리움이다. 꽃을 기다리는 마음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간절하게 끌어당기는 그리움, 무의식적인 그리움, 눈이 마주친 순간에야 마음이 환해지는 그리움이다.
제1부
65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밥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房)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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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우리처럼 둥근 구멍도 있으며, 절구처럼 안은 작고 밖은 큰 구멍도 있으며, 긴 웅덩이처럼 긴 구멍도 있으며, 물이 얕은 웅덩이처럼 생긴 얕은 구멍도 있는데' 이 구멍에서는 '물이 돌에 세게 부딪치는 듯한 소리, 화살이 날면서 나는 듯한 소리, 사람이 소를 몰며 꾸짖는 듯한 소리, 사람이 호흡을 하면서 들이쉬는 듯한 미세한 소리, 사람이 높은 소리로 절규하는 듯한 소리, 개가 미세한 소리를 내듯 머무는 소리, 개가 사납게 짖는 듯한 소리'가 난 다고 한다. 또 '앞에서 부는 바람이 경쾌하고 느슨한 소리를 내면 그 뒤를 따르는 바람은 중탁한 소리를 내며' 불고 '산들바람이 불면 모 든 구멍에서 작은 소리로 조화하고, 큰 소리로 불면 모든 구멍에서 큰 소리로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여러 구멍이 고요하 게 텅 빈다'고 한다. 나도 내 귀와 신경과 피와 관절을 다하여 아파 트 창을 들이받는 그 음악을 듣는다.(공력소음)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고 한 김경주 시인은 허공과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바람의 고고학자 같다. 바람은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 (비정성시)란다. 이 시에서는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서 우리가 모르는 시간,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을 살다 간 사람들을 본다. 바람 속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발견하고, 지금 내가 사는 이 삶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바람 속에서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와 냄새와 인기척을 느끼며, 바람이 되어 미래의 어느 날이 방에 찾아와 문을 두드릴 자신까지도 본다. (최애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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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 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내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 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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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마들렌 홍차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학교에서 돌아와 추워하는 걸 보고 어머니가 띠뜻한 홍차를 준다.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녹인 홍차였는데,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인 그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나의 내면에서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소스라쳐 놀랐다. 어떤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원인 불명의 고립된 쾌감이었다. 그 쾌감으로 인하여 나는 곧 인생의 부침(浮沈) 같은 것은 별것 아니고 갖가지 재난도 무해한 것이며 그 덧없음은 착각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마치 사랑의 힘이 작용하여 그렇게 하듯이 그 쾌감이 나를 어떤 귀중한 본질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아니 그 본질이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가 보잘것없고 우연적인, 결국은 죽어 없어질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맛과 냄새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논리적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모조리 다 지워버릴 만큼 확실한 행복감과 현실감을 느끼게 했던 그 알 수 없는 상태'란 무엇인가. 주인공은 끈질기게 기억을 추적하여 그 맛이 콩브레에 살던 어린 시절에 레오니 고모가 주었던 과자의 맛이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맛에 감춰져 있던 그 기억에는 유년 시절과 콩브레와 그때 만났던 사람들의 행복한 기억이 덩굴째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거의 죽은 채로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끈질기게 세월을 견디다가 마들렌 홍차로 코와 혀가 자극되는 순간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난 것이다.
후각과 미각의 기억력은 놀랄 만하다. 머리가 잊고 있는 나, 너무 깊이 숨어 있어 만나지 못하는 나, 인간과 삶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나가 이렇게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니! 감각이나 기억에는 아직도 만나지 못한 '나'가 얼마나 많은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현재의 나는 얼마나 적은가? 마들렌 홍차의 기억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강렬한지 주인공은 삶에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런 것은 아주 하찮은 일이며 나는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먼지 같은 존재라는 비관적인 생각도 틈입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 시에도 기억 속에 감춰진 풍부한 나를 불러내는 즐거움이 있다. 가난을 한갓 남루로 만드는 기품 있는 충만한 옛 시간들. 지나고나야만 진정한 가치가 슬그머니 드러나는 옛것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거나 버린 것들. 이제는 기억과 감각과 정서에 기생하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씩 드러나는 것들. 아무리 생생하게 재생해도 거품처럼 금방 꺼지는 것들. 이것들은 지나가 없어진 것들이 아니라 모두 나의 일부다. 이것들은 언제든지 부르면 다가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채워주고 내 고단한 시간들을 위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가난한 시절의 이 보잘것없고 누추한 것들이 지금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나의 결핍을 채워주고 있다. 추억은 위로와 평안을 주지만, 때로는 현실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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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있어? 바람은 왜 불어? 사람은 다리가 두 갠데 왜 개는 네 개야? 찌찌는 왜 달려 있어? 똥꼬는 왜 있어? 딸아이가 어렸을 때는 가끔 자다가 깨면 느닷없이 "이게 뭐야?"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 말이 아예 입에 붙어버린 것이다. 그 질문에는 종종 어른들이 포기했거 나 잊어버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왜 나는 나일까? 너도 아니고 재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나일까? 나 하나만 해도 의문과 질문은 끝이 없다. 어쩌면 우주에 관한 모든 질문이 여기 다 들어 있는지 모른다. 어릴 때 그토록 많았던 호기심은 다 어디 갔을까? 물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질문을 잊은 것일까? 어른이 되면 나와 세상과 일상이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당연해 보일까? 살면서 겪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와 체념이 궁금증을 앗아간 것일까? 왜 질문은 갈수록 줄고 고정관념은 늘어갈까? 나, 지금, 여기, 너, 밥 먹는 일, 바람 소리, 나를 보는 강아지의 궁금한 눈빛. 이 모든 평범한 것들이 감추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
무한한 비밀을 품고 있지만 절대로 누설하지 않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저 사물들이 궁금한 사람, 그래 서 아이처럼 엉뚱한 질문이 그치지 않는 사람, 어른이 되어도 그 호기심이 줄어들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시인이다.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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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 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달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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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을 한 방 후려치는 이 통째! 순식간에 모든 핏줄과 신경과 뉴런으로 퍼져 온몸을 깨어나게 하는 이 통째! 내 살과 세상과 우주를 하 나의 후각으로 명쾌하게 요약시키는 이 통째!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누가 있었는지 냄새로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냄새로 지나간 시간을 찾아내거나 존재의 근원에 닿을 수도 있을까? '바람의 냄새는 그런 믿음에서 나온 시인 것 같다. 바람 속에 남아 있는 냄새로 한때 이 땅을 살다 간 수많은 삶과 죽음의 비밀을 엿보려 한다. 그 호기심은 이 세상 구석구석에 코를 들이대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시간의 기억을 넘기도 하고,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처럼 공간의 기억을 넘기도 한다. 그 후각은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과 같이 우주적이며, 그 욕망은 모든 삶이 시작된 "발원지"를 찾아내려는데까지 뻗어 있다. 이 코의 상상력은 수천 년 수만 년 이 땅을 살다 간 선조들의 후각적인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코의 사유는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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