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보니 블로그에 읽은 책을 정리한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11권 읽었고, 작년에만 4권을 읽었네요. 하루키의 글에는 매력이 있는것 같습니다. 다시 찾게 되는.
이렇게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면 책을 읽는 동안 작가와 대화하는 수준으로 책을 읽게 됩니다. 그러면서 작가의 생애주기 중 언제 쓴 책인지 감안하고 읽게 되는 듯합니다. 그에 맞춰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대 후반 정도에 쓰인 글들입니다. 비슷한 나이로 나름 등가 시켜서 생각하며 읽다 보니 더욱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책과 같은 하루키가 쓴 가벼운 수필은 언제나 부담이 없습니다. 마치 배 고플 때 라면이나 먹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키득거리면서도 읽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도 하고, 그런 밑줄 입니다.
우...........비.....................엔" 하는 식이 된다. 하긴 이건 극단적인 예지만, 요컨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대 사가 무지하게 많다.
"그럴까?"
"그래요."
"역시, 그럴까?"
"그렇잖아요."
"역시, 그렇겠지."
"그래요."
이런 대사를 독일어로 처리하면 묘하게도 어딘가 형이상학적인 색채까지 띤다.
"그런 것인가?"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렇다."
"그렇다."
이런 상황이다. 나의 독일어 실력은 상당히 어중간한 것이라 정말 그런 말인지 아닌지는 책임 못 지겠지만, 어감상으로는 꽤 나 그런 변증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듯 느껴진다. 난해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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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감각으로 보면 작자의 설교적, 교훈적인 의도가 다소 느껴진다"는 말씀을 해서 그때는 '흠, 그런가' 하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교훈적인 부분만 머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 기묘한 일이다. 『쓰레즈레구사』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문학 작품을 예로 들어도 마찬가지다.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 묘사는 읽을 당시에는 감탄스러울지언정 세월이 흐르면 모조리 잊히고, 아주 사소할지라도 좌우지간 효율적인 종류의 것만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어떤 편집자가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역시 꽤 교훈적인 이야기였는데, 교훈이 너무 많은 나머지 아직도 정리를 다 못 하고 있다. 케이스 스터디 삼아 이 자리에서 재현해 본다.
【케이스스터디] 모 편집자의 이야기
나는 재즈를 아주 좋아하는 터라, 한 전위재즈 뮤지션의 연주를 테이프에 담아 일 관계로 ××씨(주: 고명한 재즈 평론가)를 찾아가는 김에 가져가 들려주었습니다. xx 씨는 그 음악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음, 이거 아주 좋은데, 최고야" 하고 격찬하더군요,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57
정통적으로'라는 연주 기준을 머릿속에 철석같이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현악사중주 15번과 17번도 그렇다. 이 경우는 15번이 줄리아드 현악 사중주단이고, 17번은 빈 콘체르트하우스 현악 사중주단이라는 경이적인 조합이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이 두 연주 단체의 성격은 서로 극단적일 만큼 정반대다. 줄리아드는 엄격하고 딱딱하며, 후자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런 연유로 내게 '15번은 엄격하고 딱딱한 곡이며, 17번은 부드럽고 따뜻한 곡이다. 모차르트는 과연 다면성을 지닌 천재 작곡가였구나'라고 오래도록 믿어왔을 정도였다. 스무 살이 넘어 다른 레코드로 15번을 들어보고는 천지가 뒤집힐 듯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도 15번이 듣고 싶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줄리아드의 레코드(물론 새로 산 것) 쪽으로 손이 가고 만다. 기묘한 일이다.
이런 예를 일일이 들어보자면 끝이 없다. 한마디로 바겐세일 하는 레코드를 가리지 않고 마구 사들인 결과인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들쑥날쑥한 무작위함이 음악을 듣는 재미를 오히려 더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취향이 편협하게 치우치지 않 은 것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무슨 일이든 이런 식으로 우회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방 식을 조금씩 찾아가는 성격이라, 무언가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실패도 잦다. 그러나 일단 그게 몸에 배면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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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자랑하는 건 아니다. 이런 성격은 자칫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스스로 그 스타일을 교정하려 해도 마음처럼 잘 바뀌지 않는다. 남이 무언가를 권유하면 대 부분은 듣고 흘려버리며, 남에게 무언가를 진지하게 권유하는 일도 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 새삼 뭐라 할 건 아닌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보통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란 스무 살 을 경계로 점점 둔해지는 듯하다. 물론 이해력이나 해석 능력은 훈련에 따라 높아질 수 있지만, 십 대에 느꼈던 뼛속까지 스며드는...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63
차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은 "맞아요, 그게 제일이죠. 꼭 차를 탈 필요가 없다면 안 타는 것보다 좋은 게 없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전철로 한두 역이면 가는 곳도 구태여 차를 끌고 가기가 일쑤다. 운전을 안 하니까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한다면야 그도 일리 있지만,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통 알 수 없다. 주차자리를 찾느라 기웃거려야 하고, 간발의 시간차밖에 나지 않는데도 툭하면 차선을 바꾸며 달리고,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차가 없어서 자동차 할부금이니 주차비니 세금이니 기름값이니 수리비니 하는 돈이 들지 않는 만큼, 나는 택시나 국철의 특별석을 곧잘 애용한다. 이것도 상당히 불가사의한 일인데,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택시나 특별석의 요금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택시나 특별석을 종종 이용한다고 하면 "그건 사치야"라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따져보면 도쿄-후지사와 간의 특별석 요금은 두 시간분 주차비와 비슷한 정도다. 그 가격으로 편하게 자리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딱히 국철 애호론을 펼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약 조금 더 젊었더라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67
그사이 나는 실로 어이없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마쓰오 카투수가 교진을 상대로 거의 9회 투아웃까지 퍼펙트 피칭을 해서, 앞으로 딱 한 명만 아웃시키면 되는 마당에 홈런을 맞아 진 적도 있었다. 나는 딱히 지는 게 좋아서 야쿠르트를 응원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역시 어느 정도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야쿠르트를 응원하면서 얻은 자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패배에 대한 관대함이다. 지는 것은 싫지만, 그런 걸 일일이 마음 깊이 묻어두다가는 도저히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체념이다. 그런 내 눈으로 보자면 교진 팬은 졌을 때의 태도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듯하다. 야쿠르트 대 교진 전에서 야쿠르트가 이기면 “돼지에게 차였다"며 내게 전화를 걸어대는 교진 팬 친구가 있는데, 이런 건 정말 좋지 않다.
※마쓰오카 투수의 은퇴 시합 관전 중 내게 맥주를 권해주었던 샐러리맨 아저씨 두 분,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쓰오카 선수도 상대편 와카나를 경 원하지 않고 깨끗한 승부를 해주어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깨끗하게 스리런 홈런을 맞긴 했지만.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79
건강에 대하여
'첫째는 건강, 둘째는 재능'이 나의 좌우명이다. 조만간 안자이 미즈마루 화백에게 족자에다 써달라고 부탁해 도코노마에 걸어두려고 생각할 정도다. 글자 아래에는 철제 아령 그림 같은게 들어 있어도 좋겠다.
어째서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능'인가 하면, 단순하게 생각해서 건강이 재능을 불러올 수는 있어도 재능이 건강을 불러올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하기만 하면 재능이 졸졸 따라온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간 노력과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체력이 필요하고, 노력과 집중력을 유지함으로써 재능을 증식시켜 나가는 일은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그래서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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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유명세에 대하여
가끔 바의 카운터 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옆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한 소문을 얘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걸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소문의 대상은 나도 이는 유명인일 때도 있고, 그들의 직장 상사나 동료, 친구인 경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그 나름으로 재미있다.
제일 재미없는 건 누군가를 칭찬할 때다. "누구누구 알지, 그 자식 굉장한 놈이야. 능력 있어" 같은 얘기가 나오면 내 쪽도 시큰둥해져서 '빨리 험담이나 하라고' 하며 속으로 채근하곤 한다. "그 자식 바보라니까. 정말 바보 얼간이, 도저히 구제 불능이야" 하는 기세면, 어차피 남 얘기니까 내 쪽도 유쾌하기 그지없다.
몇 년 전인가, 요코하마에 있는 '스토크'란 재즈 클럽의 카운트...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85
이세탄 백화점 2층, 후지사와에 있는 세이부 백화점과 오타루의 길모퉁이에서도 그런 일이 한 번씩 있었다. 오타루에서 내게 말을 건 사람의 얘기로는 홋카이도에서는 내 책이 제법 잘 팔린다고 한다. 암만 그래도 오타루 역 앞 상점가에서 나 같은 사람의 얼굴을 잘도 알아봤다 싶어 내심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꼽아보니,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육 년 동안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내게 알은체를 한 횟수는 전부 여덟 번이다. 대충 일 년에 한 번꼴보다 조금 많은 셈인데, 이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 빈도'가 나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에게 많은 편인지 적은 편인지는 잘 모르겠다.
옛날에 모 가수가 사는 맨션 옆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가수가 차에서 현관까지 10여 미터 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필시 쫓아오는 팬들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새벽 한 시가 넘어 사방에 인기척 하나 없을 때조차 그 했다. 유명인이란 상당히 기묘한 인생을 강요당하는 모양이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89
마누라는 "옛날에 비해 머리를 안 쓰니까 스트레스가 없어져서가 아닐까?"라고 간단히 말하는데, 암만 별 볼일 없는 소설이라 해도 소설을 쓰는 이상 나름대로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면 자연히 스트레스도 쌓인다. 문단이며 출판업계, 세금, 대출금 등 신경 쓸 일도 많고, 소설가도 옛날처럼 한가로이 뜰에 앉아 참새 떼를 바라보며 “벌써 봄이로군" 하고 주절거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머리를 안 쓰니까'라는 말로 간단히 치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게도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다. 그런 것들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내 머리숱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전업작가가 된 후부터다. 그렇다면 전업작가가 된 것이 내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총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 증모増毛 현상의 수수께끼도 자연히 풀 릴 것이다. 몇몇 변화를 꼽아보니 다음과 같다.
① 도쿄를 떠나 교외에서 살게 됐다.
②사람을 만나는 일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③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도 일찍 자게 되었다.
④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고, 스스로 요리를 하게 되었다.
⑤ 매일 운동을 하게 되었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107
지난 2월 내 체중은 마침내 66킬로그램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딛고 말았다. 운동 부족에다 일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에 과식과 폭음이 겹쳤으니 살이 찌는 게 당연하다. 이 정도 체중이 되니 사뭇 몸이 무겁고, 29인치 바지에 몸을 쑤셔 넣기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석 달 동안 감량에 감량을 거듭한 결과 59킬로그램까지 체중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조금 더 힘을 내어 어떻게든 58킬로그램 선에 정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키가 168센티미터니까, 그 정도 체중이 가장 생활하기 편하다. 내 경험상 한 달에 2킬로그램 정도의 감량에는 그리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찌기는 쉽고 빼기는 어렵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또 다르게는 '비만에 이르는 길은 짧고 평탄해도, 체중 감량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하기야 이 점은 체질 탓도 있으니, 중년이 된다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살이 찌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자이 미즈마루 씨 같은 경우는 나보다 한 단계(혹은 반 단계) 위의 중년인데도 늘 늘씬한 것이 부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우리 마누라 같은 경 우도 절대로 살이 안 찌는 체질이다.
살이 찌는 체질인가 안 찌는 체질인가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이 점은 제삿날이나 결혼식 등 친척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에 나가 주위를 휘 둘러보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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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 우리 친척들은 뚱뚱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통통한 체형의 사람이 많고, 마누라 쪽의 친척들은 대개 다 야위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기 전에는 '상당한 각오로 임해야겠는걸' 하고 결심을 새로이 다지고 운동에 힘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오래전 단편 중 새끼손가락이 짧다는 이유로(아마도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박복한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일가족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요즘 들어 그런 사람들의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노력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을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불공평, 불평등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쓰다 보니 점점 화가 난다.
그러나 그 대신ㅡ이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ㅡ마누라 집안에는 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은 반면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다. 비만과 암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처럼 혈통이란 꽤 흥미로운 것이다. 나는 어쩌다 결혼식에 초대받거나 하면 식장에서 좌우로 나뉘어 나란히 앉아 있는 양가 친척들의 얼굴 생김새나 체격 등을 하나하나 견주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113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부주의로 생긴 실수보다 한층 중대한 의미를 지닌 실수일 때가 많다. 따라서 전자보다 식은땀의 양이 훨씬 많아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부주의로 저지른 수많은 실수를 전부 끌어모아 병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꽤 재미있는 연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글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믿기 어려운 실수를 범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변을 봐야지' 하고 화장실로 가려했던 것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까지 하고 나와서는,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음, 이상한데, 아직도 소변이 보고 싶은걸. 몸이 어디 좀 이상한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도는 다반사다. 그런 것에 비하면 'twenty one'을 '31'로 번역하는건 그리 터무니없다고도 할 수 없을 듯하다. 열차 시간표나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번역뿐 아니라 지금처럼 내 글을 쓸 때도 가끔씩 형편없는 실수를 한다. 그러나 나는 데이터를 참고로 이론을 전개하는 타입의 글쟁이도 아니고, 실제 모델이 있는 소설이나 논픽션도 쓰지 않으며, 그런다고 딱히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으므로, 대개의 실수나 사실관계의 오류는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129
며칠 전 아키시마 시에 사는 오카무라 란 분에게서, "무라카미 씨의 소설 중에 '폭스바겐의 라디에이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좀 이상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모 잡지에 실렸는데 알고 계십니까"라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누군가 에게 물어봤더니 역시나 폭스바겐 비틀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다고 한다. 영락없는 실수다.
그러나 그 일로 내가 허리를 굽히고 사과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고 역시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 왜냐하면 그건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한들, 코끼리가 작아져서 손바닥 위에 올라온다 한들, 폭스바겐 비틀에 라디에이터가 달려 있다 한들, 베토벤이 11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 '아, 그래. 이 건 폭스바겐 비틀에 라디에이터가 달려 있는 세계의 얘기구나!' 하고 생각하며 소설을 읽어준다면, 나는 무척 기쁘겠다.
※며칠 전 아키시마 시에 사는 오카무라란 분에게서, "무라카미 씨의 소설 중에 '폭스바겐의 라디에이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암만 그래도 역시 실수는 참을 수 없다는 강직한 분께서는, 근 일에 출간될 영어판 『PINBALL, 1973』에는 그 부분을 올바르게 고쳐놓았으니 그쪽을 읽어주십시오─라고 이 기회에 선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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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70퍼센트, 30퍼센트 정도 선이면 약간은 재미있는 인터뷰가 된다. 80퍼센트, 20 퍼센트면 스스로 말하기도 좀 뭣 하지만, 어느 정도 쇼킹한 내용이 폭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면밀히 사전조사를 해오는 인터뷰어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잡지 쪽 사람들은 누구나 상당히 바쁘니까 그러려니 여기지만, 질문을 받은 쪽이 등골이 오싹해져 제대로 얼버무릴 수 없을 만한 질문을 준비해 도전해 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긴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이 친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야 그 편이 편하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인터뷰 질문이란 대개 몇 가지로 정해져 있는데,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은 다음 세 가지다.
①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는가?
② 필기구는 무엇을 사용하는가?
③ 사모님과는 어디서 알게 되었는가?
이런 걸 안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늘 염려스럽지만, 다들 묻는 걸 보면 역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나 보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145
시간을 많이 뺏긴 탓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러닝이 하루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음악을 듣는 데 두 시간, 비디오를 보는 데 두 시간, 산책에 한 시간...... 이렇게 따지다 보면 차분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 따위 거의 없다니까요, 정말로, 뭐 직업상 읽어야 할 책은 한 달에 몇 권씩 의무적으로 읽긴 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책은 솔직히 말해 도무지 읽지 않는다. 한심한 노릇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 내지 경향에 빠진 건 결코 나 혼자만은 아 닐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게 된 것 역시 독서 외 의 다양한 활동에 시간과 돈, 에너지를 대폭 할애하는 까닭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얘기가 갑자기 아저씨 같아지지만 전반적으로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수 없지, 책이 라도 읽을까' 하고 생각하기 쉬웠다. 당시에는 비디오도 없었고, 레코드도 상대적으로 비싸 그리 많이 살 수 없었고, 스포츠도 오늘날처럼 번성하지 않았다. 시대적인 분위기도 대단히 이론적이어서, 어떤 종류의 책을 일정량 독파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업신 여김을 받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게 뭐야? 안 읽었어. 알지도 못하는걸"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 그 밖에도 할 일이 얼마든지 많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 미디어가 각양각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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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위가 튼튼한 터라 나이를 먹으면서 보통이나 보통을 약간 넘는 정도의 주량을 갖게 되었다. 일 하나를 끝내고 술잔을 기울이는 기분이란 인생의 몇 안 되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 복) 중 하나다. 외국 속담에 '인생의 행복은 세 가지밖에 없다. 식전의 한 잔과, 식후의 한 대'라는게 있는데, 이 말도 상당히 설 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내 주변을 둘러보면 나이를 먹으면서 주량이 늘었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와 또래인 사람들은 대부분 내장에 무슨 탈이 나서 "난 이제 그렇게는 못 마셔"라며 두세 잔으로 끝내고 만다. 특히 젊은 시절 술이 쎘던 사람들 중에 이런 예가 많다. 정열적인 투수가 어깨를 못 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 지나치게 마셔댄 탓에 내장이 피폐해져 버린 것이다. 아울러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 많든 적든 관리직 비슷한 위치에 오르게 되므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처자식에 대한 책임감도 느껴지고 해서 비교적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된다. 인생. 마시고 싶은 만큼 실컷 술을 마실 수 있을 때가 꽃이다.
시부야역 앞 같은 데서 한바탕 술을 마신 뒤 시끌벅적하게 소란을 피우는 학생들을 보면, 앞으로 십오 년만 지나면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주머니에다 위장약을 숨겨두고 술을 마시겠지란 상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의 환성 속에서도 제행무상諸行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157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고, 덕분에 스스로를 갉아먹을 기회를 몇 번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내적 지옥이 존재함을 시사했는데, 작가가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하는 상황도 그 지옥 중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 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 대해 비평을 쓴다-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식사를 하고(혹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그러고는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세계의 구조를 신뢰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전제조건으로 수용하고는 있으며, 트집을 잡아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트집을 잡기보다 한시 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스칼렛 오하라는 아니지만, 밤이 밝으면 내일이 시작되고, 내일은 내일의 일이 기다리 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비평을 거의 읽지 않는 인간이지만 간혹 기분이 내켜 읽었다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사실을 오해한 경우도 있고, 명명백백하게 빗나간 추측도 있고, 노골적인 인신공격도 있고,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썼다고...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215
굴곡을 이기지 못하고 35킬로미터를 지난 지점부터는 언덕을 보기만 해도 그만 머리가 지끈지끈해져, 결국 오르막길에선 걷고 말았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이제부터 다시 크로스컨트리로 착실하게 단련해서,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그 코스에 도전해보고 싶다.
그러나 기록이야 어찌 됐건, 42킬로미터를 완주한 뒤에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 표현해야 할 것으로, 이를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생각해 낼 수 없다. 그러니까 대개 마지막 5킬로미터쯤은 계속 "맥주, 맥주"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달린다. 이렇게 가슴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42킬로미터라는 머나먼 길을 달려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좀 잔혹한 조건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아주 정당한 거래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필립 로스의 소설이 갑자기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일까? 그리 재밌다는 평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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