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에서 필요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한 이후에 올해 10월 초 시작하여 약 3주간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실로 밥 먹고 잠을 잔 시간 외에는 거의 해당 시험을 위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강조하고 싶은데, 학교를 졸업하고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던 적이 없습니다. 하하..
결국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서 뿌듯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회사에서 마련된 자격시험 공부를 이토록 열심히하면서 정작, 내 삶에 중요한 것에 대한 핵심 공부는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삶에 중요한 공부가 뭔지 생각하다 성경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스쳤고, 성경을 먼저 펼쳐들기에는 뭔가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통독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ㅜㅠ
그래서 대신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책의 작가는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 입니다. 작가는 교수이며 시인/작가이고 철학자 이면서 목사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원수는 예수 그리스도 이고, 조카와 화자는 악마입니다. 그들의 시선으로 책이 씌여있기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었습니다.
밑줄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원수가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이유는, 이 구역질나고 하찮은 인간 버러지들을 이른바 '자유로운 연인이자 종- 원수가 쓰는 말로 하자면 '아들'-으로 삼겠다는 망측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 이 두 발 달린 짐승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집요한지 변태적인 관계도 서슴지 않으면서 영적 세계 전체를 모독하고 있는 형편이다. 원수는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인간 앞에 목표를 세워 놓고서도 단순한 감정이나 습관을 이 용해서 끌고 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지.‘제 힘으로' 해내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게야.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위험도 따른다는 걸 명심하도록. 처음에 찾아오는 무미건조 함만 성공적으로 이겨내면 인간들도 점차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되고, 우리는 그만큼 유혹하기 힘들어지니까.
지금까지는 옆자리에 앉은 교인 자체만 놓고 볼 때 실망을 느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는 경우를 놓고 얘기했다만, 만약 실제로도 실망스러운 인간이라면 - 이를테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여자는 구제불능성 노름꾼이고, 삐걱삐걱 소리나는 장화를 신은 남자는 구두쇠에다가 남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환자가 알고 있다면 - 일은 훨씬 더 쉬워지지, 단지 환자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만 떠오르지 못하게 하면 돼. '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옆에 앉은 저들의 다른 결점만 보고 그들의 종교가 위선이자 인습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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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객관화시켜서 그것을 곧 제가 경외하는 대상의 속성으로 생각해 버리거든. 나는 환자가 자기 '하나님' 이라고 일컫는 존재가 어디 있는지 그 위치 - 침실 천장 모퉁이 좌측이나 자기 머리 속, 또는 벽에 걸린 십자가 - 까지 짚을 수 있었던 경우들을 알고 있다.
그 합성물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너는 환자가 바로 그것 - 자신을 만든 그 위격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그것에 대고 기도하도록 붙들어 매야 한다. 환자를 잘 부추겨서 자신이 만든 합성물의 내용을 끊임없이 바로잡고 향상하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하고, 기도하는 내내 그 합성물을 눈앞에 떠올리게 할 수 있지.
그런데 만에 하나 환자가 그 차이를 구별하게 되는 경우, 즉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계시는 당신' 을 향해 의식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때에는 우리는 즉시 궁지에 빠지고 만다. 환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이미지들을 모조리 내던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혹시 일부 남는다 해도 그 생각과 이미지들이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놓는다는 걸 전심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방안, 자신의 곁에 실제로 존재하며 객관적으로 외재 →在)하는 그 존재에게 자신을 맡겨 버리기라도 할 때에는 그 이후의 일을 장담하기가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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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건 바로 이 부분에서 그렇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것도 바로 이것을 매일 감당하기 위한 기도지
따라서 네 임무는 환자가 현재의 두려움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생각을 절대 못 하게 하는 한편, 오로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에만 줄창 매달려 있도록 조처하는 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일들이야말로 제 십자가라고 믿게 만들거라. 그렇게 서로 어긋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환자의 뇌리에서 싹 지워 버리고, 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일에만 미리 마음을 굳게 다지며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애쓰게 하거라. 열 가지도 넘게 가정해 놓은 서로 다른 운명들을 진짜로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그런 일을 하려고 덤비는 인간들에게는 원수도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현재 실제로 겪고 있는 고난이라면야 아무리 두렵다 해도 받아들이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대개는 원수도 직접 개입해서 도와주지만 말이지.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법칙이 하나 연관되어 있다. 언젠가, 환자의 관심을 원수라는 존재 자체에서 환자 자신의 심리상태로 옮겨 놓으면 기도의 효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지. 이 경우는 그 반대다. 즉 환자는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상보다는 두려움 그 자체에 집중하여 그것을 '현재 겪고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상태로 여길때 더 쉽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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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리 속에 있는 독일 지도자들이라고 해봤자 신문기사를 읽고 저 혼자 만들어 낸 마네킹에 불과하다구, 그런 공상 속의 증오는 아주 맥 빠지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잦은데다가, 특히 영국인들은 이 점에서 아주 구제불능의 졸장부들이다. 독일 놈들은 어떤 고문을 해도 시원치 않다고 큰소리를 펑펑 치다가도, 막상 상처 입은 독일 조종사가 뒷문으로 들어오면 얼른 차와 담배를 대접하는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족속이지.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환자의 영혼에는 어느 정도의 악의와 함께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만약 환자가 제 어머니나 고용주나 기차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 따위를 사랑하는 몹쓸 버릇을 기르게 된다면, 독일군에 대한 증오에 아무리 기름을 퍼붓고 부채질을 해 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
네 환자를 몇 개의 동심원으로 생각해 보거라. 한가운데 의지가 있고, 다음에 지성이 있고, 제일 바깥쪽에 공상이 있다. 모든 원에서 원수의 흔적을 일거에 쓸어 버릴 수야 없는 일이지. 하지만 미덕이란 미덕은 모조리 밖으로 밀어내 공상의 원 안에 처넣고, 바람직한 자질들은 몽땅 안으로 끌어와 의지의 원 안에 모으는 작업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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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이와 전혀 다르지. 원수가 인간을 사랑한다느니 원수를 섬기는게 외려 완벽한 자유라느니 하는 말들이 단순한 선전문구가 아니라(우리야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만)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점은 우리도 직시해야 한다.
원수는 자신을 작게 복제해 놓은 이 혐오스러운 인간들 - 원수에게 흡수당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원수의 뜻에 따른 결과, 규모는 작지만 어쨌든 원수의 삶을 닮게 된 것들 - 로 우주를 우글우글 채울 생각을 정말로 하고 있다구.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먹을 가축이지만, 그 작자가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빨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는 내뿜고 싶어하지. 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그는 충만해서 넘쳐흐른다. 우리의 전쟁 목적은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다른 존재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세상이지만, 원수가 바라는 건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바로 이 지점에 골짜기가 끼어든다. 원수는 아무 때나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서 인간의 영혼이 감지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걸 활용하지 않는지 너도 궁금했겠지. 그러나 '불가항력' 과 '논의의 여지 없음'은 원수가 세워 놓은 계획의 본질상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임을 이젠 알겠느냐.
단순히 인간의 의지를 제압(원수가 최고로 미약하고 가벼운 정도로만 그 존재를 드러내도 인간의 의지는 간단히 제압당하고 말걸)하는 건 원수의 계획에 도움이 안 돼. 그는 강간은 못 한다. 사랑을 호소할 뿐이 지. 이게 다 평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천박한 생각 때문이야, 피조물과 하나가 되면서도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지니게 하겠다니, 원. 그러니까 단순히 인간들을 싹 없애 버리거나 동화시켜 버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지.
물론 원수도 처음에는 약간 제압할 태세를 갖춘다. 실제로는 미약하게 드러낸 것인데도 인간들에겐 굉장해 보이는 임재, 달콤한 감정이 일어나면서 유혹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그런 임재를 경험하게 해 준단 말이지.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오래가진 않는다. 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후원이나 장려책들을 죄다 거두 어들이니까. 물론 실제로 거두어들이는 건 아니다. 인간들이 의식하는 경험의 수준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지.
원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 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에도 의지의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물로 자라가는 게야. 그러니 이렇게 메마른 상태에서 올리는 기도야말로 원수를 가장 기쁘게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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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여전히 교회에 드나들며 성찬에 참여한다는 말을 내가 반기다시피한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는건 나도 안다만, 그래도 회심한 후 첫 몇 달간과 현재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는걸 깨닫게 되는 것보다야 낫지, 환자가 겉으로나마 그리스도인의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새 친구를 몇몇 사귀고 새 여흥거리를 몇몇 찾았을 뿐이지, 6주 전과 비교할 때 내 영적 상태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야' 라는 생각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단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는 한, 환자가 자기 죄를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인정하고 숨김없이 회개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지. 우린 그저 '근래 들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라는 불편하지만 막연한 감정만 요리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모호한 불편함을 다룰 때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불편함을 너무 심화시키면 환자가 정신을 차리게 되어 게임이 끝나 버리고, 그렇다고 불편한 마음을 완전히 억눌러 버리면 - 물론 원수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도 않겠지만 -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 요인 하나를 놓치는 셈이니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남겨 놓되 환자가 불편함을 감당치 못하고 마침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지경을 피할 때, 우리는 아주 귀중한 경향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다. 원수에 대해 생각하는걸 점점 더 꺼리게 되는 경향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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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쾌락이든 습관이 될 때 시시해진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네가 어떤 걸 제공해도, 아니 심지어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아도 환자의 산만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는걸 알게 될 게다.
이쯤 되면 기도나 일이나 수면을 방해하기 위해 환자가 좋아하는 책을 던져 줄 필요가 없다. 전날 저녁 신문에 나온 광고 한 줄로도 충분하지. 시간을 낭비시키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겨 나누는 대화에만 의존할 필요도 없어, 평소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사람들과 따분한 주제로 떠들게 하면 되거든, 또 오래도록 아무일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지. 굳이 술 마시며 떠들어 대게하지 않아도, 썰렁한 방에 앉아 꺼진 불씨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늦게까지 잠 못 이루게 할 수 있다구. 마땅히 피해야 할 건강한 외향적 활동은 죄다 금지시키면서, 그 대신 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도 있지. 그렇게만 되면 내가 언젠가 맡았던 환자가 이 곳 지옥에 도착했을 때처럼 네 환자도 이렇게 말하게 될걸. "이제 보니 나는 해야 할 일도 하나 못 하고 좋아하는 일도 하나 못한 채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 버렸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놓고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강하지 않다' (without whom Nothing is strong)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Nothing)이야말로 정말 강하고말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슬쩍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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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지 않은 형태로 환자들에게 직접 임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구름에 영원히 둘러싸여 있는 바람에 우리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인간들도 있지.
그건 그렇고, 네가 무슨 큰 실수를 했는지 좀 따져 보자. 무엇 보다 먼저, 넌 네 나름대로 변명을 내세우며 환자가 진짜 좋아하는 책을 읽도록 허용했다. 그런데 환자는 새 친구들에게 아는 척 하려고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진짜 좋아서 읽었지. 둘째, 너는 환자가 오래된 물방앗간까지 산책을 나가 그곳에서 차를 마시도록 허용했다. 환자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시골길을 그것도 혼자서 가게하다니, 한마디로 넌 긍정적인 진짜 쾌락을 두 가지나 허용 한 셈이다. 그 위험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무식하단 말이냐?
고통과 쾌락은 너무나도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속되는한 현실의 시금석 노릇을 하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낭만적인 방법 - 이를테면 상상 속에 걱정거리를 만들어 놓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르테르6)나 해롤드 공작7)"처럼 만드는 방법 - 을 써서 환자를 멸망시키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정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 5분간의 순수한 치통만으로도 터무니없는 것에 느꼈던 낭만적 슬픔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네 전략이 죄
6) 독일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7)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Lord George Gordon Byron)이 쓴 <해볼드 공자의 여행기> 주인공으로서, 낭만적 인물의 전형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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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람이든 음식이든 책이든 환자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버리게 하고, 그 대신 '제일 좋은 사람, '적합한 음식, '중요한 책들만 찾게 만드는 일에 늘 힘쓰지라,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그는 내장과 양파 요리를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사회적 야심이라는 강력한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이제 이 재난의 수습 대책을 모색하는 일이 남았구나, 가장 중요한 건 환자가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이 새로운 회개에 대해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그 하찮은 짐승이 자기 머릿속에서만 뒹굴게 하거라, 글재주가 눈곱만큼이라도 있거든 이 경험에 대해 책을 쓰게 하고, 글쓰기는 원수가 영혼에 심은 씨앗을 말의 죽이는 데 종종 탁월한 효과를 내니까.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니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 할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너를 아끼는 삼촌,
Screwt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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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일깨우며 반격을 개시할 게다. 명예의 전당에서 자신의 서열이 정확히 몇 번 채쯤 되는지 굳이 생각해 놓지 않아도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데엔 지장이 없다는 거지.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환자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또 원수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하는 교리 하나를 환자의 마음속에 현실화하려들 게야. 인간들이란 스스로 창조해 낸 존재가 아니며 그들의 재능 역시 원수가 준 것이므로 제 머리 색깔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교리 말이지. 원수가 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는 목적은 환자의 마음을 자신의 가치에 관한 문제들에서 떼어 놓는 것이고, 네 목적은 환자의 마음을 그런 문제들에 붙들어 놓는 것이다. 원수는 아무리 죄 문제라 하더라도 환자가 너무 깊이 천착하길 바라지 않지. 일단 회개했으면 되도록 빨리 관심을 밖으로 돌릴수록 좋아한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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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아끼는 삼촌,
Screwtape
인간은 현재의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원수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순간에만 자유와 현실성을 얻는 게야.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인간이 계속 영원에 관심을 갖거나(이건 곧 원수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현재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게다. 원수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일과 영원히 분리되는 일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현재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따르거나 현재 주어진 십자가를 지거나 현재 주어지는 은혜를 받거나 현재의 즐거움에 감사드리게 하려 든단 말이지.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가끔씩 한 인간(이를테면 과부나 학자)을 유혹해서 과거에 파묻혀 살게 하는 것도 다 이런 관점에서 하는 일이야.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지. 이런 치들은 과거에 관한한 어느 정도는 참된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과거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닮아 있거든. 그러니 과거보다는 미래 속에 살게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인간의 열정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따라 앞을 향하고 있는 법이므로, 미래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불붙게 되어 있다. 더구나 미래는 미지의 것이 아니냐. 그러니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곧 비현실적인 허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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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미식 취향이 어쩌다 원하는 양보다 많이 담긴 음식 때문에 거슬린 탓인데도 말이야.
글루보즈가 수년간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진행해 온 공작의 진정한 가치는, 이 노인네가 뱃속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생 활 전체가 좌지우지된다는 데 있다. 노인네는 지금 '그저 내가 원 하는 건' 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법한 심리상태에 있지. 그저 그 노인네가 원하는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 제대로 익힌 달걀 하나, 또는 적절하게 구운 빵 한 조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 한 음식을 '제대로' 해내는 하인이나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제대로'라는 주문 뒤에는 자기가 옛날에 느껴 봤다고 생각하는 그 입맛, 재현이 거의 불가능한 그 입맛을 채우려는 물릴 줄 모르는 욕구가 숨어 있다. 노인네는 그 옛날을 "좋은 하인들을 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묘사하지만, 우리가 보기 엔 '감각이 지금처럼 까다롭지 않았고 다른 것에서 얻는 쾌락들도 많아서 식탁의 쾌락에 이 정도까지 매달리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
이렇게 날마다 실망하다 보면 짜증도 날마다 느는 법이다. 요리사들은 채용하는 족족 그만두었고 우정은 싸늘하게 식어 버렸지, 글루보즈는 원수가 노인네한테 '먹는데 너무 관심이 많지 않느냐는 의심을 희미하게라도 넣어 줄 때마다 "난 뭘 먹어도 상관없지만 아들에게는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어"라는 논리로 응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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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책이 있을 시 널 보호해 줄 생각이 없다는 말도 진심은 아니었지. 네 뒤는 내가 잘 봐줄테니 나만 믿거라. 그 대신 허튼소리 말고 입단속 잘해야 한다.
사실 원수가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한 건 단순한 부주의로 헛나간 말이었다. 그거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고말고, 원수도 하나의 존재이고 인간은 그와 별개로 존재하는데, 인간에게 좋은게 원수한테도 좋을 리가 있겠느냐. 사랑에 관해 그 작자가 한 말 들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위장술이 분명하다. 인간을 창조해 놓고 그렇게나 수고스럽게 애쓰는 데에는 무언가 숨겨진 진짜 동기가 있는 게야. 그 작자가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사랑을 합네 하고 떠들게 된 건 우리가 그의 진짜 동기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대체 원수는 인간들에게서 무얼 얻으려는 심산일까?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주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 아버지께서 원수와 다투셨다는건 말해 줘도 해가 되지 않겠지. 인간의 창조가 처음 논의되던 초기 단계부터 이미 원수는 십자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밝혔고,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원수에게 면담을 신청해서 해명을 요구하셨다. 원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기가 퍼뜨리고 있는 그 사심 없는 사람 인지 뭔지에 대한 황당무계한 이야기 말고는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 당연히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런 반응을 받아들이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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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방심하면 원수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도록 가르칠게다)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찢어 버려도 되는 곰인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시킬 수 있지, 내 하나님' 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야, 실제로는 '내 장화'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뜻, 즉 '나한테 특별 봉사를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설교단에서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내가 독점하고 있는 하나님' 이라 는 뜻으로 사용하도록 교육할 수 있다구.
인간이 완전히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나오지 뭐냐, 종국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모든 인간에 대해 원수나 우리 아버지 둘 중 한 편이 '내 것'을 주장하게 될 게다. 그러니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인간들도 결국엔 자기 시간, 자기 영혼, 자기 육체가 과연 누구 것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여하한 경우에도 저희들 것은 절대 될 수 없지.
지금은 원수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현학적이고 법적인 근거를 대면서 만물이 '내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정복했다는 한층 더 현실적이고 역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만물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계신다.
너를 아끼는 삼촌,
Screwt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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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정해진 대로 기도하는게 아니냐고 말이지, 그리고 어떤 날의 날씨를 결정하게 된 원인을 찾아 물질 그 자체가 처음 창조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인간 세계든 물질세계든 모든 만물은 '처음부터' 결정나 있었던게 아니냐고 덧붙이겠지.
환자가 뭘 놓치고 있는지 알 만하지? 특정한 날씨를 특정한 기도에 끌어다 맞추려드는 짓은, 곧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지각 양식 내부에 두 점을 찍어 놓고 영적인 세계 전체를 육체의 세계 전체에 끌어다 맞추려드는 총체적인 문제의 표피에 불과하다는 것, 시간과 공간의 매 지점에서 창조 전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게야. 아니, 그보다는 인간처럼 제한된 의식을 가진 존재들은 총체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는 창조 행위도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창조 행위 속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 놓았느냐 하는 점은 정말이지 골칫거리 중에 골칫거리로서, '사랑'에 대한 원수의 헛소리에 숨어 있는 비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도 어려울 게 없지. 원수는 인간들이 자유롭게 미래에 기여하는 바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게 아니라, 자신의 '한없는 현재 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거든, 어떤 사람이 무언가 하는 걸 지켜보는 것과 그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로 시키는 것은 확실히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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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우리 것 같았다. 폭탄의 굉음, 무너지는 집들, 입술과 허파로 스며드는 고성능 폭약의 맛과 냄새, 지칠 대로 지쳐 화끈거리는 발, 공포로 새파랗게 질린 심장, 어쩔어찔한 머리, 육신거리는 다리, 그런데 다음 순간, 마치 다시는 떠올릴 필요 없는 나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 모든 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만게야. 이렇게 허를 찔려 패하고 말다니, 이 바보천치!
흙에서 나온 그 버러지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 마치 원래 이렇게 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양-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는지 똑똑히 봤느냐? 지금껏 품었던 의심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우스갯 거리로 변하는 꼴을 봤느냐고? 놈이 어떻게 혼잣말을 했을지 알 만하다! "그래, 맞아, 늘 이런 식이었지. 모든 공포는 똑같은 경로를 거친다. 처음엔 악화일로를 치달으며 병목같이 좁다란 궁지로 밀려들어가지만 막상 '끝장이다' 하는 그 순간! 보란 듯이 병목에서 빠져나오면서 모든 게 갑자기 순조로워지는 거야, 이를 뽑 을 때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다가 한순간에 끝나 버리잖아, 꿈도 악몽으로 변하는 순간 깨게 되어 있지, 사람도 죽고 죽으면 죽음을 넘어서게 되는 거야. 그동안 어떻게 이런 걸 의심할 수 있었얼까?"
환자는 너를 본 순간, '그들'도 보았겠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훤하구나, 너는 그들 앞에서 눈도 못 뜬 채 현기증으로 비틀거렸겠고, 환자가 폭탄으로 입은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입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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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욕스러울 데가! 영적 존재인 네놈도 벌벌 기는 판국에, 흙과 진창에서 태어난 버러지가 그 영들 앞에 꼿꼿이 선 채 대화를 나누다니.
너는 네놈이 느낀 그 낯선 경외감이 환자의 기쁨에도 찬물을 끼얹었으면 하고 바랐겠지. 그러나 빌어먹을 사실은, 인간의 눈에는 신들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게야. 놈은 신을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존재 자체까지 의심했다. 그런데 막상 신들을 만나는 순간, 자기가 처음부터 그들을 알고 있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삶의 시 간 시간마다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해 주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단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일이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묻는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이었군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야.
이 만남에서 접하게 된 영들의 모습과 말들은 놈의 오랜 기억들을 일깨웠을 거다. 아기 때부터 고독한 순간마다 경험했던 느낌, 어떤 친구들이 자기 주변에 함께 있어 주는 듯한 그 아련한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 드디어 이해가 되었겠지. 모든 순수한 경험 속에 내재해 있었지만 기억 속에 잡아둘 수 없었던 그 중심의 음악을 마침내 복원하게 되었을 거라구. 이런 깨달음은 놈의 시체가 경련을 멈추기도 전에, 그 영들과 자유롭게 사킬 수 있게 해 주었다. 너만 밖에 남겨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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