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아주 젊은 시절 지은 소설입니다. 핀볼 기계를 찾아가는 소설 속 인물의 모습에 젊은 하루키의 모습을 투영해 봅니다. 그리고 하루키의 핀볼 머신과 같은 그 언젠가 나를 떠난 사람, 시간, 사물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십대 청년 하루키의 글을 접하면서 나의 스무살 초반도 들여다보게 됩니다.
서류의 종류도, 의뢰인도 정말이지 다양했다. 볼 베어링의 내압성에 관한 《아메리칸 사이언스)지의 기사, 1972년도의 전 미술美 칵테일 북, 윌리엄 스타이런의 에세이에서부터 안전 면도기의 설명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서가 “몇 월 며칠까지” 라는 꼬리표를 달고 왼쪽 서류함에 쌓여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 건이 끝날 때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씩 위스키를 마셨다.
우리 수준의 번역 작업의 매력적인 점은, 덧붙여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왼손에 동전을 들고 오른손에 포갠 다음 왼손을 치우면 오른손에 동전이 남는다. 그것뿐이다.
열 시에 출근해서 네 시에 퇴근했다. 토요일에는 셋이서 근처의 디스코텍에 가서 J&B를 마시면서 산타나를 흉내 낸 밴드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다.
수입도 나쁘지 않았다. 회사의 수입 가운데서 사무실 임대료와 약간의 필요 경비, 여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의 급여,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십 등분해서 하나는 회사 자금으로 저금해 두고, 다섯은 그가 갖고, 넷은 내가 가졌다. 원시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책상 위에 현금을 늘어놓고서 나누는 일은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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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으로 두 번 불었다. 좋은 곡이네, 하고 두 사람은 칭찬했다. 하지만 떨어져 있는 공은 한 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뭐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도쿄의 싱글 플레이어가 다 모였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골프장에서 떨어진 공을 전문으로 찾는 비글(개의 한 품종, 주로 사냥을 하는 데 쓴다-옮긴이)이라도 키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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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등대는 몇 번씩 구부러진 기다란 제방 끝에 외로이 서 있었다. 높이는 3미터 정도로 그다지 큰 등대는 아니다. 바다가 오염되기 시작해서 물고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여러 척의 어선이 이 등대를 이용했다. 항구라고 할 만한 곳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해변에 레일과 같은 간단한 나무 틀을 설치하고 어부가 윈치로 로프를 당겨서 어선을 뭍으로 끌어올렸다. 해변 근처에는 세 채쯤 어부의 집이 있었는데, 방파제 안쪽에다 아침에 잡은 자잘한 생선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 햇볕에 말렸다.
1973년의 핀볼 60
여느 때보다 십오 분 정도 일렀지만 별 생각 없이 뜨거운 물로 수염을 깎고, 커피를 마시고, 잉크가 흠뻑 손에 묻어날 것 같은 조간신문을 샅샅이 읽었다.
"부탁이 있어.”
쌍둥이 중 한쪽이 말했다.
"일요일에 차를 좀 빌릴 수 있을까?"
다른 한쪽이 물었다.
"아마 될 거야.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내가 물었다.
"저수지.”
"저수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수지에 뭐 하러 가는데?"
"장례식을 치르러,"
"누구의 장례식?"
“배전반.”
“그렇군.”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신문을 읽었다.
120
맛이 없지.
그렇게 맛이 없어?
옛날에 디즈니의 동물 영화에서 죽어가던 얼룩말이 꼭 그런 색깔의 흙탕물을 마셨지.
그녀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예뻤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겨운 곳이었어. 모든 게 조잡하고 더럽고....... 라고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해? 그녀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그런 시절이었지.
번역 일을 하고 있지.
소설?
아니, 하고 나는 대답했다. 일상의 거품 같은 것들뿐이야.
이쪽의 시궁창 물을 다른 시궁창으로 옮기는 것뿐이라구.
재미없어?
글쎄, 생각해 본 적도 없는걸.
여자 친구는?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쌍둥이와 함께 살고 있어.
커피 하나는 끝내주게 끓이지.
1973년의 반볼 197
내가 말했다.
"어딘가에서 다시."
한 명이 말했다.
"어딘가에서 다시,"
다른 한 명도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메아리처럼 내 마음속에서 한동안 올렸다.
버스 문이 꽝 하고 닫히고 쌍둥이가 차장에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같은 길을 혼자 되돌아와 가을 햇살이 넘치는 방 안에서 쌍둥이가 남기고 간 <러버 솔)을 들으며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11월의 일요일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쳐 보일 것 같은 한 11월의 조용한 일요일이었다.
218
함정들처럼 우물은 인간이 살기 위해 파놓은 마음속의 우물이다. 그 위로 환상의 새가 날아다닌다.
삶의 한복판에 뻥 뚫린 우물, 결코 채울 수 없는 우물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만들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안고 잠자리에 들듯이 우리는 환상의 알맹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환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면 우물의 깊은 나락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을 어루만지던 나른 한 슬픔, 그 한없는 허무 가운데 가느다란 불빛이 있다.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구원이다. 아픔 속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면 얼핏 보이는 가느다란 끈, 그것이 하루키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다.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드는 끈을 찾는 여행, 아무것도 아닌 삶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긴 여행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또 다른 인물 '쥐' 이고 시간 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가 자신이며 우리들의 모습이다.
나와 핀볼 -탐색의 대상인 동시에 반성적 주체인 핀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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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토성이나 금성의 이야기, 그에게 캠퍼스의 학생운동은 꽁꽁 얼어붙는 토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서른 살밖에 살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사랑은 습하고 무더운 금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토성과 금성은 자신의 대학 시절 두 모습이다.
혁명을 외쳤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던 학생운동과 한 여자를 사 랑했지만 죽음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기억들은 그의 과 거지만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둘 다 환상이지만 현실이요, 기억이지만 여전히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학생운동의 부조리한 현장을 빠져나와 나오코와 나눈 사랑을 그는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처럼 듣고 싶어 한다.
1969년에 사랑하던 나오코가 무심코 했던 말 한마디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를 지배하여, 그는 개가 있다는 시골의 작은 역을 찾는다. 나오코가 살았던 마을과 그곳 사람들, 아버지, 우물을 잘 파던 남자....... 나오코는 화자에게 우연이었으나 필연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한 마리의 개를 보기 위해 그는 아무도 없는 역에 앉아 기다린다. 그리고 그 개를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여전히 슬프 다. 죽고 없는 그녀는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두 여자가 그를 맞는다. 두 여자 쌍둥이는 생김새도 똑같고 이름도 없다.
1973년의 핀볼 225
먼 훗날, 해변의 카프카)에서 말하듯이 삶이란 불완전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완벽한 음악을 들으면 그는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완벽함은 텅빈 주머니를 한 번에 채워버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삶은 우물의 함정이어 파인 땅 위를 걷는 불완전함의 반복이다. 마치 같은 모티프가 다르게 반복되면서 음악이 태어나듯이 이 소설은 세 개의 서술이 다르게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전 작품들은 우물의 모티프를 다르게 반복한다.
(1973년의 핀볼)은, 삶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전원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암시하는 소설이다. 입구는 출구요, 절망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굳은 시체에 열정 불어넣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썩어가는 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환상을 끝없이 다르게 반복한다. 마치 핀볼 이야기를 반복하듯이,
하루키는 훗날 다르게 되풀이될 아름답고 슬픈 나오코와의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다른 기법으로 제시했다. 인간의 사랑과 환상과 죽음이라는 진부함을 핀볼 마니아를 통해서 슬프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것이 굳은 언어의 시체에 열정을 불어넣는 기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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