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길엔 니체 퇴근 길엔 장자 라는 책 제목에 수식 처럼 회사 앞 카페에서 철학자들을 잠깐 만난 느낌입니다. 마음에 새겨 놓을 글귀를 옮겨와 봅니다.
죽음, 지루한 일상을 깨우는 종소리
우리의 일상이 습관과 범속에 갇혀 있는 것일 뿐이라면, 출구는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니체가 아니다. 그래서 초인을 말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보기엔, 누구도 과거로부터 구축돼온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잠시만이라도 도약해 초월을 엿볼 수 있는, 일상을 뒤흔드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가운데 관건은 죽음이다. 우리는 태어나면 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 앞에 충분히 젊은 생명이란 없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제한이며 궁극적인 한계다.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유한함을 의미하고, 그러한 가능성은 궁극적 끝을 매듭짓게 된다. 가능성의 궁극적 끝이 매듭지어지고 나면, 어떤 가능성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가능성도 실현할 수 없는 존재에 남는 것은 '무'뿐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무상함이 눈앞에 펼쳐지거든 탄식만 하지 말고 생명의 시한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할 때의 그 내일은 갑자기 없어 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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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을 고정불변의 죽은 사물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일 뿐이다.
자오둔화는 강조한다.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다. 자유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자유는 인간의 에 있지 않다. 그의 실존과 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는 말로 인간의 자유를 묘사한다. 그는 인간이 의식의 내재적 구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은 사물들처럼 결여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의식은 나의 행동이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의식이 곧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선택을 안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사르트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선택이라고 보았다. 앞에서 참전을 두고 고민하던 학생이 만약 참전과 어머니를 돌보는 것 가운데 어떤 선택도 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건 결국 참전을 택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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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자신을 긍정하면서 노동하지 못하고, 자본가가 정한 규칙에 따라 생산해야 한다. 효율만이 최우선 목적이 돼버린다. 물론 지금은 모든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만 생존하지 않지만, 효율이란 결국 특정 부서의 기획을 통해 구현 되는 것이다.
하나의 회사는 여러 부서로 이뤄져 있고, 각 부서는 여러 직위로 세분화돼 있다. 우리는 어떤 직위에 있든 그 직위가 요구하는 대로 일해야만 한다. 매일 반복되는 번잡하기 그지 없는 업무는, 따지고 보면 산업혁명 시대에 매일 같은 자리에 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던 공장 노동자들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노동은 본래의 의의를 잃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자신이 무엇을 생산할지, 생산품은 어떻게 처리할지 등을 자주적으로 주장하는데 노동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자신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족감과 의의를 느낀다. 손님을 위해 요리하지만 자신만의 노하우와 창의성을 발휘해 요리할 수 있고, 맛있게 먹는 손님을 보면서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요리사는 자기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만큼 요리에 열정을 갖기 어렵다. 둘 다 손님을 위해 요리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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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_출근길의 지혜_서양철학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요리사는 본사에서 지시하는 조리법 대로만 조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조리 과정은 표준화돼 있고, 표준화된 레시피대로만 조리하면 음식이 완성된다. 즉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노동자의 만족감은 생산 과정의 자주성에 정비례한다. 생산 과정에 대한 자주적 권리가 커질수록 노동자 자신의 기술적 참여도도 높아지고, 노동에 대한 만족감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어떻게 해서 노동의 자주권을 잃어버린 것일까?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이 당신이 매달 받고 있는 낮은 임금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착취당하고있을까
"직원은 그가 일하는 시간 동안 그 회사에 소속된 자산"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자본가가 직원에게 일할 기회를 주었고, 임금으로 직원의 노동력을 샀으므로 직원은 곧 그 회사의 자산이라는 뜻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시간(가령 하루 8시간)을 팔아 노동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는다. 얼핏 합리적인 거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본가는 하루 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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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종교도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나 믿음을 통해 그 부조리를 뛰어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론 부조리로부 터의 도피와 다르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를 의식했을 때 견지해야 할 태도는 부조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삶의 무의미함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의미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게 된다.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승진해야 하니까. 왜 승진해야 하는가? 그래야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높은 지위는 성공을 의미하니까. 성공은 그렇게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덜컥 큰 병에 걸린다거나 대형 사고라도 당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삶의 무의미함을 절감하며 세계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카뮈가 인정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인간은 세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둘째, 세계는 인간의 이러한 갈구에 응답하지 않는다. 셋째,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협화음에 대해서 이성은 무력할 뿐이다. 카뮈에게 있어 부조리는 도피 해서는 안 될 현실의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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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이듯, 부조리감은 삶을 돌아봐야 할 때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모든 외재적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거기엔 아무런 절대적. 고정적 이유가 없다. 부조리는 똑바로 서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공통된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사회적 기대라는 속박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시시포스와 마찬가지로 반항 자체가 우리를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게 하진 못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에 우리가 소망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삶에 대한 열정, 뜨거운 애정의 표현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알제리 태생의 소설가로 <시시포스 신화> <이방인> <반항하는 인간> <페스트> 등 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반파시스트 지하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3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로 칭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실존 체험에 큰 관심을 갖고 고민했기에 실존주의자로 불리게 된다.
CHAPTER 1
이러한 심리를 적극적 비관주의라고 불렀다.
염세를 뛰어넘어, 초인이 돼라
마지막으로 초인이 있다. 시대의 고난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이 특정 조건에서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간파하는 능력도 있다. 초인은 행동으로 가치를 전복하고 재구성하여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초인과 비극적인자의 차이는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에 있다. 비극적인자가 의지를 행동으로 전환시키고 그 행동에 내재된 시련을 받아들였다 해도, 그의 행동에는 여전히 더 나은 세계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당위의 삶이 설정돼 있다. 그러나 초인의 행동은 더 좋을 것도 더 나쁠 것도 없이 실재가 본래 이러하다는 것을 인정한 채, 가치를 재고하고 질서를 재구성하는 의지의 행동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영원히 회귀하는 가운데에서도 초심에 변함이 없다. 아무리 조건이 달라 지더라도 그의 의지는 한결같다.
비극적인 자는 다음번 세상이 더 낫기를 희망하고, 증오하는 자는 마땅히 가졌어야 하나 갖지 못한 것을 증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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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속에 있으면 고요를 찾는다.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변화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에서 최대한 느긋하게 있고 싶어 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고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 싶어 한다. 이러한 추구는 사실 자아 실현의 충동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코 고정된 테두리 안에만 있으면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성으로 계획을 세우지만 위험, 실패, 상실은 두려워한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세상살이의 온갖 번뇌가 생겨난다. 안정적인 관계를 갈망했던 사람도 관계가 너무 안정됐다 싶으면 자극을 추구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원했던 사람도 일이 안정적이다 못해 기계적으로 반복되면 다 부수고 탈출하고 싶어 한다.
안정 아니면 소진이다. 안정이 극에 달하면 소진이 된다. 극도로 안정적인 상태에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욕망까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선택지는 어떻게 배열하고 조합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 다. A를 고를까 B를 고를까, 거리를 걸을까 집에 있을까.
CHAPTER1_출근길의 지혜_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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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사람이나 사물과의 상호작용이 없는데 작동을 할까? 좋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치자. 그러나 이 부분에서 맹자의 심성론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도 이어나가기 어렵다.
맹자의 도덕심이 일종의 내재적 판단력이라면, 우리는 곤경에 처했을 때 내면의 마음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 잃어버린 마음을 찾기만 하면 될까? 그 마음의 소유자인 당신이 어둠의 혼란 속에 갇혀 있어도 그럴 수 있을까?
맹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키우던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찾아야 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 학문의 도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
자신의 마음을 찾는 것, 잃어버린 그 마음을 찾는 것이 삶의 진리라는 게 맹자의 생각이었다. 당신이 키우던 고양이나 강아지를 잃어버리면 당신은 다급하게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의 도덕심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지 않는가?
CHAPTER2_퇴근길의 사색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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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썼던 사람은 많지만, 후대에까지 전해진 사람은 창힐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사람-옮긴이) 뿐이다. 농사짓기를 좋아했던 사람은 많지만, 후대에까지 전해진 사람은 후직(后稷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후대에 전수 했다고 알려진 사람-옮긴이)뿐이다.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은 많지만, 후대에까지 전해진 사람은 기,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사람-옮긴이)뿐이다.”
요즘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런 의미가 될 것 같다.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예 중국의 유명 서예가 옮긴이)처럼 신들린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한자 한자를 쓰는 데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딸기를 심어 가꾸는 사람은 많지만, 적시적소에 심어 가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자는 딸기를 심어 가꾸는 일 하나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5566(대만의 유명 보이 그룹-옮긴이)처럼 온 국민이 부를 정도로 노래를 유행시킨 그룹은 많지 않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는 일 하나에 온 마음을 쏟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지에만 전념하고 나머지는 내팽개쳐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매순간 우리 마음을 그 순간 하고 있는 일에 온 전히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CHAPTER 2_퇴근길의 사색_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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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은 철저히 자기 잇속을 챙기는곳
한비자의 철학은 한 마디로 자기 잇속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는 "무릇 인간은 안전과 이익을 좋아하고, 위험하고 해로운 것은 피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 속 사람들의 성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가를 두고 논 쟁하지 않았다. 다만 현실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좋아하고 해 로움을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모두 한비자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야말로 현실에서 보이는 보편적 특징이라는 것.
가마 만드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부유하기를 바라고, 관 만드는 장인은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원한다. 가마 만드는 사람은 어질고 관 만드는 장인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귀해져서 사는것이 풍요롭지 않으면 가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람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야 이익을 얻을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CHAPTER2 퇴근길의 사색 동양철학
상상해보라. 이런 가족기업에서 특정 직원을 따돌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안에서 당신 혼자만 잇속을 차리거나 오만하게 군다면, 다른 가족들은 도덕의 힘으로 간단히 당신을 제압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직장에서는 누구도 당신과 혈연관계가 아니다. 혈연관계였다면 모두가 미간을 찌푸리는 정도로 끝났을 일도 공적 기관에서 일어났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그 사실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뜻밖의 수입을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 또한 일종의 이익 도모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직장에서의 관계가 이익 지향적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하는 사력을 다하는 것으로 군주와 군신관계를 맺고, 군주는 벼슬과 봉록으로 신하와 관계를 맺는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부자와 같은 혈육관계가 아니므로 이러한 계산에 따르는것이다.
고대의 신하들은 왜 임금의 명을 따르기 위해 사력을 다했는가? 임금이 그들에게 봉록과 직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신하 간에 이뤄진 일종의 이익교환이자 거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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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도덕적 이상에 근거한 순진한 이론은 직장에서 만나는 위선자들에게 잔혹의 날개만 더해 줄 뿐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어리석은 학자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서, 옛 서적만 시끄럽게 읊어대며 세상을 어지럽히면서도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직장에서 유난히 온화, 선량, 공경, 절검, 겸양을 떠들어대는 위선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현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입만 열면 공자왈맹자왈 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직장을 잔혹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일 가능성이 높다."
한비자가 살아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유가학설에서는 사람이 본래 선량하고 사회는 본래 조화롭다고 간주한다. 순자는 이런 생각에 반대했지만, 유가에서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거론하거나 논쟁하는 대신 이단으로 배척하고 유가에서 축출해버렸다. 유가는 겸손하고, 양보하며, 예의를 다하고, 심지어 이익을 다퉈도 안 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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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지는 게 아니다. 먼 옛날의 도덕적 모범을 들고 나와 지금 사람들에게 덕행을 요구하기보다 현실 속 사람들의 사리 추구 성향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벌제도를 확립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로 윈윈하도록 하는 편이 낫 다. 그것이 SK-II를 바르는 것만큼이나 효과가 빠를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괜히 기대했다가는 당신만 상처받을 것이다. 차라리 그 이기적인 사람들과 협상하고 소통하면서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생존의 방책이다."
한비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인물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있다. 그는 《리바이 어던》에서 국가 질서가 형성된 원인과 과정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줄곧 어떤 도덕이나 규범, 법률도 존재하지 않는 '전쟁 상태'에 있었고,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도덕과 부도덕을 따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의 자원을 빼앗을 뿐이었다. 남의 자원을 충분히 빼앗아야만 나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폭력, 절도, 심지어 살해에 이르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회 질서는 어떻게 해서 형성됐는가?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런 식의 전쟁 상태에서는 늘 경계해야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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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장기간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두 사람이 식량으로 토끼 한 마리만 얻을 수 있다면(귀여운 토끼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고 나에게 따지진 말기를), 조금이라도 더 힘세고 건장한 자가 다 차지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그도 쉬거나 잘 때 남들이 남은 토끼를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방비해야 한다. 나아가 늙거나 병들기라도 하면, 그때는 토끼 고기에 입도 못 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토끼 반 마리는 먹을 수 있게 하자고 협상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강자 입장에선 승자 독식의 전쟁 상태라면 혼자 차지할 수 있었을 토끼를 반밖에 먹지 못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도 토끼 반 마리는 매일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눔이 곧 덕행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자, 합의와 협력을 통해 사회 질서가 자리 잡게 된 과정이다. 이후 두 사람은 쌍방이 모두 이러한 합의를 준수하도록 한 명의 중재자를 세워, 어느 한쪽이 합의를 깨고 토끼를 독차지하면 반드시 처벌을 받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법률과 국가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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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야근을 한다면, 어디까지나 돈을 더 벌기 위해서여야 합당한 것이다. 이런 게 어째서 도덕의 문제가 돼야 하는가? 어째서 나 자신이 온화, 선량, 공경, 절검, 겸양의 모범이 돼야 하는가? 어째서 나 자신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어야 하는가? 어째서 나 자신은 위선군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희생제물이 돼야 하는가?
물론 도덕을 전면 부정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 비자의 철학은 우리가 도덕의 밧줄에 묶인 인질이 될 필요는 없으며, 나의 잇속을 추구하는데 대해 불안이나 불편을 느낄 필요도 없고, 내 안의 잔혹에 대해서도 낙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다.
잔혹은 위선자들에게 대항하는 무기가 되고, 직장 내불의나 불공평을 깨뜨리는 용기가 될 수도 있다. 보통의 동양인들은 대립과 충돌을 두려워해서 억지 조화를 감내하려는 경향이 크다. 이는 직장 내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심화시킬 뿐이며, 위선자들의 위세만 북돋울 뿐이다. 그러나 직장 내에 잔혹이 존재한다고 해서 치를 떨며 분개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냥 인간 본성의 이 사회의 진상(眞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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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인물이라면, <장자>는 중국철학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철학책일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우언의 방식으로, 이야기 사이사이에 감추어진 지혜의 말을 드러내고 있다. 가령 <소요유>에서는 붕새와 열자의 이야기를 통해 무위에 대해 말하고, <응제왕>에서는 혼돈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며, <주>에서는 뛰어난 솜씨로 소의 뼈와 살을 바르는 포정의 이야기를 통해 '양생의 묘'에 대해 말하는 식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추상적인 지혜를 생생하게 구체화한다. 장자의 고상함과 현명함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자, 장자가 널리 사랑받아온 이유다.
자신감이란 자신을 믿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믿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내가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고, 감당 가능한 수준의 손실을 정확히 타산할 수 있을 때 생겨나는 확고부동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든 박탈될 수 있는 외재적 사물이 제공하는 자신감이라면, 그런 자신감에 기대어 자아의 성장을 도모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우리에게 진정으로 확고부동한 감각을 줄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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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날 장자는 해진 옷에 낡은 짚신을 신고 위나라의 혜 왕을 알현하러 갔다. 혜왕이 장자의 행색을 보고 물었다.
"선생은 어찌 그리 피폐하시오?"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저는 가난할 뿐 피폐하지 않습니다. 글을 읽는 자에게는 배운 이치대로 행하지 못함이 피폐한 것이지요. 해진 옷과 낡은 짚신은 가난일 뿐 피폐함이 아닙니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어서 그는 원숭이를 비유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나무를 타는 원숭이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원숭이가 녹나무나 가래나무, 예장나무처럼 큰 나무들의 가지를 자유자재로 잡아타며 옮겨 다닐 때는 후예나 봉몽 같은 명사수라도 원숭이를 쏘아 맞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산뽕나무나 가시나무, 탱자나무, 구기자나무처럼 작은 나무들 사이에 있을 때는 조심조심 움직이며 여기저기 살피는 눈빛으로 두려워하며 몸을 떱니다. 이는 원숭이의 뼈와 근육이 유연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처신하기 불리한 환경 때문에 자유로이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풍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장자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사리에 어두운 임금과 혼란에 빠진 대신들 사이에 있으면, 피폐해지지 않으려 해도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은나라의 충신 비간이 주왕에게 간언하고자 했다가 심장을 도려내는 죽음당한 일이 이를 증명합니다. "1 장자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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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당신들처럼 임금의 눈을 가리는 비겁하고 어리석은 관료 들로 조정이 채워져 있으니, 나처럼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가 피폐하게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허나 나는 진리와 함께 있고, 그 진리가 모두 내 몸에도 있으니 천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므로 나는 가난하게 보일지언정 피폐하지 않다."
그런데 '천지와 하나'라는 것은 대체 어떤 감각일까? 장자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자만하지도 않고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온 세상이 칭찬한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으며, 온 세상이 비난한다고 해서 기죽어 슬퍼하지도 않는다. 안팎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영욕의 경계를 뚜렷이 짓기에 그리 할 수 있는 것이다."3
온 세상이 당신을 칭찬하고 떠받든다고 들뜨거나 우쭐해 하지 않고 온 세상이 당신을 비난해도 풀이 죽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깥의 사물과 나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치욕인지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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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_퇴근길의 사색_동양철학
장자는 그것이 바로 무위라고 말한다.
<장자> <대종사> 편에서는 진인(人)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옛날의 진인은 역경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뽐내지 않으며,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잘돼도 득의양양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 올라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물에 빠져도 젖지 않으며, 불 속으로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지혜가 도에 이르면 이러하다. 진인은 잠을 잘 뿐 꿈은 꾸지 않았고, 깨어 있을 때는 걱정이 없었다. 지나치게 단 음식을 찾지 않았고, 숨은 매우 깊이 쉬었다. 진인은 발뒤꿈치로까지 숨을 쉬건만, 다른 사람들은 목 구멍까지만 숨을 쉴 뿐이다.
사람들은 논쟁할 때면 숨이라도 넘어갈 듯 헉헉대다가 결국은 말을 잇지 못한다. 이것은 다 그들의 욕망이 너무 깊어 서다. 그에 비해서 하늘에 대한 지혜는 터무니없이 얕다. 욕심이 너무 깊은 사람은 타고난 기틀이 천박하다.
옛날의 진인은 산다고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싫어하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났다며 떠들어대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 지도 않는다.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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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미에 나오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 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문구는 그 메시지가 서로 호응하고 있다.
이 두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는 배움[學)]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므로, 그 앞에 나오는 문구와 같이 봐야 한다.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먼 데서까지 찾아온다면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아마 이런 말이 될 것이다.
당신이 배운 것을 그때그때 실천할 수 있으니 정말 기쁘지 않은가? 당신의 학문에 의견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멀리서도 찾아오니 정말 즐겁지 않은가? 그런데 당신의 학문을 실천할 수도 없고, 당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친구조차 없다해도, 그런 걸로 화를 내선 안 되지. 그런 것은 군자답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전공 분야에 해당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당신은 그동안 연마한 학문이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당신의 이상도 실현할 수 있으니 분명 기쁜 일이다. 그러나 아직 기회도 얻지 못했고 전공 실력을 발 휘할 곳도 없지만, 당신의 이상에 동조하고 당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능력을 펼칠 곳도 없고, 당신의 실력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사람도 없다면, 그때도 낙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도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반드시 하고 싶었던 어떤 일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면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군자다운 것이라고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 가능하다. 꿈을 펼칠 기회나 타인의 인정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것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것들을 통해 성취를 경험하므로 그저 매력적이라고만 느끼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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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퇴근길의 사색 동양철학
스승에게서 배운 바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즉 그 세 가지란 충(忠, 남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때 나의 책임을 다 하는 것), 신(信, 벗과 어울릴 때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 겸하(下. 뭔가 를 배울 때 따로 사견을 보태지 않고, 상대가 전수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 아들이는 것)다.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 신을 바로잡아가고 타인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줄 안다면, 그 것이 바로 인이다.
하지만 증자가 말하는 이 세 가지를 실제로 실천한다는 것 이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또한 진정한 인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 일 것이다. 이 말을 요즘 식으로 풀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의 전후인과를 두루 통찰하기에 마음에 의혹이 없고, 어진 사람은 삶의 원칙을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사람들과 어울릴 때나 어떤 일을 고려할 때도 근심걱정이 없다. 용감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선택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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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 된다. 장수 또한 적에 대한 일시적 분노만으로 전쟁터로 달려나가서는 안 된다. 노여움은 언제든지 기쁨으로 바뀔 수 있고, 분노 역시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멸망한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없고, 한 번 죽은 자는 영영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
손자가 말하는 이익은 당연히 전쟁터에서의 이익이지만, 맹자에게 진정한 이익은 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맹자가 말한 의로운 분노는 조직 내에 커다란 이로움을 가져온다. 우리의 의로운 분노를 통해 조직은 타성에 머무르지 않고 진취적이며 생산적인 기세를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노의 출처를 명확히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고대에는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전쟁의 명분을 앞세웠다. 그러니 우리의 분노에도 합당한 이유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당한 명분을 앞세운 군대는 인의지사(師)로 불렸고, 이러한 인의의 군대는 이기지 못하는 전투가 없었다. 우리의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면, 설령 사장 앞이라도 '내분 노가 이렇게 의로운데, 당신이 뭘 어쩔 수 있겠어'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의로운 분노를 사장이 못한다면 안타 깝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의로운 분노를 동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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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은 "극기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언제든 예로 돌아가는 (self-disciplined and ever turning to li) 5 태도라고 말한다.
인은 한 사람의 수양의 경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들과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통해 평가받는 것이기도 했다. 제자 가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 아래에 살아가면서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어질다(인)'고 할 수 있다."
그 다섯 가지 덕목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 답한다.
"공경, 너그러움, 신의, 민첩함, 은혜로움이다. 내가 남을 공경하면 나 또한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너그러우면 인심을 얻게 되며, 내가 신의가 있으면 남에게 신임을 받고, 민첩하고 부지런하면 일을 이루어내는 공이 있고, 널리 은혜를 베풀면 넉넉히 사람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지자란 무엇인가
<논어> <씨> 편에서는 지자에 대해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있다면 서민들이 국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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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물의 특성은 어째서 지자를 은유하는 것일까?
《순자》의 <유좌> 편에는 공자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물을 그토록 진지하게 관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물은 만물을 두루 거쳐 흐르며 그들에게 생기를 부여하 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으니, 이것은 덕(德)과 같다. 낮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흐르되 반드시 자신만의 물길을 따라 흐르니, 이것은 의(義)와 같다. 하루라도 마를 날 없는 기세로 흐르는 왕성함은 도(道)와 같다. 나아가는 기세는 결연하고 깊디깊은 계곡에 이르러서도 두려움이 없으니, 이는 용과 같다. 물은 수평을 재는 기준이 되니, 이는 법(法)과 같다. 어디든 가득 메운 뒤에도 평평하게 깎을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정(正)과 같다.
부드럽고 투명한 모습으로 미세한 데까지 흘러드니, 이는 밝게 살피는 것과 같다. 물이 흘러 지나간 자리는 깨끗해지니, 이는 선한 교화와 같다. 물길이 아무리 굽이져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는 굳은 의지와 같다. 이렇듯 물의 덕성이 훌륭하므로 군자는 물을 보면 깊이 관찰하면서 감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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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엔 니체, 퇴근길엔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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