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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독서정리

스물 아홉 번째 책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by 마파람94 2023. 9. 24.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들 입니다. 내면을 강하게 만들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1부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
산책의 동료는 ‘고뇌’로 족하다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착각
현명할수록 명예와 체면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안다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다
늙음의 덧없음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부모는 자녀를 개인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가진 자에게도, 다스리는 자에게도 ‘장수’는 징계다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라
우리가 사소한 일에 위로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다

2부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하면 행복할 수 있다
신의 은총에 인생을 던지고 싶지 않다
내가 강해질수록 나는 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나는 왜 다른 사람의 판단에 휘말리는 것일까?
아파하고 싶지 않다면 아픔과 친해져야 한다
우정을 우연에 맡겨서는 안 된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면 마흔 살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3부

왜 주님이라는 자는 항상 분노하고 계시는가
잘못된 독서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 나쁘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등 뒤에 서 있다
소유는 만족이 아니라, 의무의 시작이다
나보다 비참한 자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성장이 아닌 ‘개조’에 있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다
인간의 성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인간을 불평분자로 만드는 악당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보잘것없는 재능으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4부

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범죄자를 위한 사회의 헌신은 공짜가 아니다
가진 자들의 머릿속에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전가하는 계획밖에 없다
대체 왜 우리는 노력하는가, 왜 청춘은 꿈을 꾸는가
세계관은 소년 시절에 완성된다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다
그다지 불행할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
승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에게 신이 필요한 이유
부강한 국가가 국민의 행복은 아니듯 강력한 국가가 국민의 힘은 아니다
죽음마저도 자연의 일부이다
부처는 밥을 지을 때도 온정성을 쏟는다

5부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더라도 정직할 것
국가는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을 두려워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군주와 같다
‘고독’과 ‘권태’는 나의 말이 되었다
철학은 자명한 이치에 대한 반항이다
청년 시절은 처지와 환경이 어떻든 대체로 불만족스럽다
위대한 작품은 항상 시대에 버림받았다
남들이 나를 거부할 때, 내 안에는 거대한 기운이 용솟음친다
‘부’를 목적으로 지식을 습득하지 마라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독립된 세계이며, 유일한 표상이다
나는 타인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길 거부하겠다
환상 속에 갇힌 어린아이로 살겠다
오직 질문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주요 밑줄입니다.

 

 



헛소리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구타는 그저 구타일 뿐이다. 골목에서 당나귀와 마주쳐 발굽에 치일 수도 있다. 개에게 물려도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개에게 물렸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나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것은 아니다. 당나귀에게 밟힌 것이 화가나 당나귀 엉덩이를 걷어찼다고 해서 사람답게 보복한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당나귀 엉덩이를 차주고 왔다고 떠들어댄들 명예를 회복했구나, 칭송받을 입장도 아닌 것이다.

옛이야기들과 그들의 삶을 돌아보건대, 고매한 문명인들에겐 명예와 체면이라는 거짓된 편견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옛날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야만족 장수가 로마의 사령관에게 단둘이 결투를 벌여 전쟁을 종결짓자고 제안하자, 사령관은 부하들 앞에서 '차라리 나무에 목을 매고 말겠다' 라며 정 싸움이 하고 싶다면 은퇴한 늙은 검투사를 보내주겠다고 야만족 장수에게 대답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터에서 군인으로서 자신의 체면과 명예 따윈 나무에 걸린 시체 만도 못하다고 여긴 마음 씀씀이였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고, 논쟁이 말 싸움으로 번져 무식한 시민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

33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성공을 시기한다. 시기 끝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중상모략을 시작한다.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보다 빨리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능력과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단숨에 뛰어오르려는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남보다 빠를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뒤처진다.

산에 오르고 싶다면 남을 떠밀어서도 안 되고, 자기 능력 보다 무리해서도 안 된다. 정상을 바라보며 한눈팔지 말고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너무나 평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산을 무사히 정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생이 고달파지는 까닭은 경쟁적 성공이 행복의 근본 요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감정이 인생을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청년 시절에는 존재감이 미미했던 화가가 중년 이후 자기 재능을 인정받음으로써 행복해질 수가 있다.

돈의 힘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으로 산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 성공은 행복을 부르는데 지불되는 한 가지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성공을 위해 그밖에 다른 요소를 희생시킨다면 성공을 제값보다 더 비싸게 구입하는 셈이다.

37

함부로 면죄부와 구원을 판매하는 목사들마저도 나이가 들면 그들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보다 나이를 먹고 몸에서 빠져 나간 혈기와 기운을 그리워한다. 천국이 가까워졌음에도 밤마다 욕정에 시달려 침상을 뒹굴던 수십 년 전의 보잘것없었던 자신을 그리워한다.

젊은 시절 빈곤한 자를 짓밟고, 옆자리의 동료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며 눈에 보이는 모든 지위와 재물을 손에 움켜 쥐려던 거대한 욕망은 나이와 더불어 세상에 초연해진다. 그가 살아온 시간에 실망하게 된다.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오는데 필요했던 분노와 시기와 잔인이, 실은 나를 기만한 하찮은 사건들에 불과했음을 고백하게 된다. 가진 자에게도, 다스리는 자에게도 인생은 미궁이며, 장수는 징계다. 삶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단 하나의 공평이다.

몇 대씩 장수하는 집안이 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 자신도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후에도 홀로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인격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오히려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죽음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열거하자면 골동품 가게의 진열대에 올려진 먼지 쌓인 상품이다.

56


우리가 사소한 일에 위로를 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소한 일에서 위로를 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서 고통받기 때문이며, 신을 안다고 말하는자 중에 신을 사랑하는 자가 극히 적은 이유는 형식과 진실의 거리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멀기 때문이다. 행복을 손에 넣고 싶다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 이외의 다른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 혼자만을 위한 행복은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 인류의 진보, 문명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고.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의 수고는 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노력이다.

행복은 수단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향해 의지의 실천을 했을 때 길의 중간에서 우연찮게 얻은 물 한모금..

63


고통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간의 고통이 따르는 향락보 다는 향락이 없는 대신 고통도 없는 삶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은 삶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삶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생의 지혜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 중용의 미덕이다. 크게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이렇듯 위선의 함정만 잘 피해 나가도 이른 나이에 삶을 통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인생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편하게 살고 싶다면 일찌감치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이 좋다. 화려할수록 위험하다. 세상은 무대와 같아서 눈에 보이는 건 겉모습에 불과하다. 연극이 끝나면 그 화려한 무대는 순식간에 철거되어 텅빈 창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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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하거나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한심스레 여기고 있으며, 타인을 증오하는 중이고, 영혼과 육신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이럴 땐 그저 쉬는 게 최선이다.

반성은 자기혐오다. 자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인간은 뭔가 반성할만한 건수가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무턱대고 반성하며 자아를 성찰한다. 그럴 바에야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도박도, 기도도, 명상도 도움이 안 된다. 여행도 도움이 안 되고, 술을 먹어봐야 자기혐오만 짙어질 뿐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혐오스러운 오늘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괴롭다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새로운 시작을 펼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78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정직하지가 못 했다. 내가 정직한 인간이었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높게 평가하는데에 두려워했을 것이고, 나를 비웃는 조롱에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작은 비판에 분노하고, 입에 발린 칭찬인 줄 알면서도 교만했다.

인간은 정직해져야 한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 지금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즐겁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다.

나를 감동시키는 단 하나의 기쁨도 사랑이다.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나를 어린아이처럼 들뜨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문명 속에서도 나는 사랑을 기다린다. 노동을 사랑하고, 그 노동에 뒤따르는 고통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이 전해주는 진실을 사랑한다.

사랑의 표현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고통이다. 사랑은 그 고통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쳐 거리를 헤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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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너무 오래 매달렸다. 나는 그것이 악임을 알면서도 행했고, 그것이 선임을 자각하면서도 눈을 감아버렸다.

인간의 의지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나의 의지가 내 앞에 굴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비평가의 말처럼 나란 인간은 현대적인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첨단의 유행은 내 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내 사고방식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현실로 도피하고자 하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전에 어디서부터가 현실이며 어디서부터 과거인지 따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과거시제와 현재시제를 가늠할 권한은 오직 내게 있다. 현재를 덧없이 지나간 과거로 정의할 권리가 내게 있으며, 과거를 오늘처럼 살아갈 권리가 내게 있다. 특히 그 시제가 정신적인 영역에 귀속된 시간이라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첨단이라고 믿었던 유행 사조가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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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가 과거의 것이라며 진부하게 여겼던 사상이 시대를 초월하는 획기적인 관념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시대를 초월해야 한다. 현재로 국한된 시제가 전부인 듯 착각하며 살아가기에는 인류가 이룩한 과거의 영광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것을 포기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짧다. 오늘 사랑받고 싶다면 오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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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쉽게 깨어지는 유리그릇이다. 인간의 감정을 구성하는 성분마다 결함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끈기가 없으므로 호감은 언제든지 반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오래 사귄 친구이더라도 그의 마음은 나의 눈동자보다 더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연약한 마음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는 농담도 견디지 못하고, 진담도 견디지 못한다. 작은 불행도 참지 못하고, 나의 성공에도 감정이 상한다.

인간과의 교제는 극도의 주의가 필요한 매우 힘든 수행이다. 항상 그들의 연약한 마음을 신경 써야 하고, 표정도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자기 신상에 조금만 불리한 일이 생겨도 그들은 불쾌감을 드러낸다. 인간은 감정의 노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우정을 내팽개치기도 하고, 스스로 환상에 빠져 우정을 우상처럼 숭배하기도 한다.

좋은 친구를 찾는 법은 인간에 관한 판단이다. 이때 기준은 예의다. 예의가 바른 사람은 타인과의 의견이 대립될 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최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한다. 그 같은 노력의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이런 시도가 우정을 형성하고 지속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예의가 바른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은 것처럼 상대방의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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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런 잘못된 폐단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아 인격적인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인생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려는 자는 극히 드물다.

인간은 일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노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노동은 인간에게 땀방울을 요구한다. 땀방울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든다. 이것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죽어버린 사회다.

인생에서 가장 애처로운 시간은 먼 훗날, 관 속에 누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을 때, 일생을 헛된 욕망을 좇느라 세월을 탕진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는 한 번 더 시간이 주어지기를 가만히 소망해보는 때다.

한 번만 더 동일한 시간의 삶이 주어진다면 보다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 텐데, 하고 후회할 때다. 이것이 오늘날 나와 그들의 운명이다. 교양과 계급을 막론하고, 부자와 가난뱅이에 상관없이,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운명이다. 내가 진심으로 나의 생애를 사랑한다면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젊은 날의 희망도 산산이 깨어지고, 소년 시절의 꿈도 여름날의 오후처럼 찌들어버렸다. 잎의 죽음을 재촉하는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오고 있다. 그 바람이 어머니의 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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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로 새롭게 정립되었기에 가능한 자유다. 즉 내가 얻지 못하더라도, 내가그것을 해내지 못하더라도, 내가 좌절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예전처럼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나만 홀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나의 의지다. 신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다.

나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동일하게 여겼을 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의 의지로 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의지가 신의 의지로 여겨져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불안을 떨쳐낼 수 있다. 신의 의지인 내게는 걱정도, 불안도 없다. 이와 달리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의지는 인생의 방주가 될 수 없으며, 살아가는 내내 불안과 고통은 필연처럼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인생에 대한 극복과 인생에 대한 굴복이다. 숨 쉬는 모든 존재에게 길은 이 두 가지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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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계획을 뿌리부터 들어지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따라서 확신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우연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그냥 안장을 잘 얹고 말을 타면 된다.

그런 점에서 다윗 왕의 삶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부하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고, 부하의 아내를 얻기 위해 부하를 전쟁터 맨 앞에 서게해 죽게 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다윗 왕의 아들을 낳았다. 이 용서받지 못할 죄악에 신은 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응답했다. 다윗 왕은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기도했다. 정신이 거의 나갈 정도로 식음을 전폐하며 이기적인 기도를 거듭해 신을 화나게 했고, 결국 아들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 이후 다윗 왕은 어떻게 처신했을까? 신을 원망했을까? 왕이 되었음에도 어린 아들 하나지 켜내지 못한 권력의 허망함을 비웃었을까? 성욕에 눈이 멀어 부하를 죽이고 그 부인을 강탈한 자신의 더러운 죄악을 혐오 했을까? 전부 아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들고 자신의 임무, 즉 왕이 되어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다스리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자녀들을 생산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아들을 죽인 신을 여전히 찬양했고, 일말의 의심 없이 믿었고, 신앙 안에서 행복해했고 즐거워했다.

151

이것은 아주 중대한 원칙이다.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해봐야 소용없다.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태만이나 무모함, 불성실을 후회하기에도 늦었다.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152

항구를 출발한 배는 필연적으로 파도를 거슬러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남은 동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의심이 가지 않는다면 신앙이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젊은 청년들이 출발선을 떠나보기도 전에 인생을 포기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일찍 주위를 둘러봤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이 자신임에도 이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신을 존재하게 만들 수도 있고, 존재하는 신을 저주할 수도 있으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 매단 것도 인간이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도 인간이었다.

인간은 가장 극렬한 고통도 신의 은총으로 감사할 수 있다. 또 다윗처럼 신의 은총을 간음의 기회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다윗의 간음을 힐책한 예언자 나단의 말처럼 인간은 한 마리 양으로 신을 만나고, 자기 우리에 백 마리를 채우려고 가난한 농군의 어린 양 한마리를 빼앗은 후 신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182

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소해지는 원인이다. 하찮은 것들은 비뚤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자신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추진력이다. 비록 하찮은 실천이라도 그 마음만큼은 존귀하다.

부처는 하다못해 밥을 지을 때도 정성을 다 쏟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가 부처에게 물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무슨 수로 그 모든 일에 열심을 다 한단 말입니 까?" 그러자 부처는 "사람으로 태어난 나의 처지가 미천하여 천한 일도 마다할 수 없기에 마다하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부처도 그리하였거늘 보통 사람에 불과한 우리의 삶이 경중을 따져 의지도 경중으로 나눈다는 것은 마음의 병, 다시 말해 의지가 병들었다는 것이 된다.

청소처럼 하찮은 일은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생이고, 청소일지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겉만 닦고 끝나는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정신이 닦여져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믿었던 것이 성현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다.

이를 뒤집어 생각했을 때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의지의 출현을 연습하는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다.

204

타인에게 강요할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사고체계 안에서 생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현시점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낸 인물들은 모두 철학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체계, 사회, 구조란 무엇인가. 이것은 거미 줄과 같다. 무척이나 비사교적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거미줄을 쳐놓은 거미에게만 우호적이다. 거미줄을 쳐놓은 거미만이 거미줄 위에서 자유를 누린다. 두 마리의 거미는 서로 거미줄을 쳐놓고 상대가 자신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절대로 한발 앞서 자신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미줄이 어떤 구조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전쟁이 사라질 수 없는 구차한 진리다.

한 편의 시가 목동의 지팡이를 푯대 삼아 풀밭을 뒹구는 어린 양이라면 체계, 사회, 구조를 뒷받침하는 철학사상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전갈이다. 상대방의 목덜미에 독물이 끈적거리는 꼬리를 서슴치않고 꽂아 넣는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철학자로 불린 자들의 이름은 모든 국가에 등장한 왕들의 이름보다 훨씬 적다. 아마도 100분 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왕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226

그리고 왕들의 손은 왕관이 씌워진 머리에 의해 움직여졌다. 왕들의 머릿속에는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은 대부분 해당 시대의 철학자 소유였다. 철학자로 불리는 것이 특권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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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의지가 창작이라는 활동에 스며든 표상이다. 작가의 특정한 의지가 스며든 미술과 음악은 그 속에 포함된 의지의 작용으로 감상자와 청중의 내면에서 공명작용을 일으킨다.

앞에서 예를 든 집회에서의 공명작용이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는 광기라고 한다면 미술과 음악을 통해 경험하는 공명작용은 보다 개인적이고, 보다 내적으로 깊게 사유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의지를 밖으로 표출하는 작용이다. 그 같은 표출을 감상한 사람들에게 예술가의 의지가 침투하여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 같은 의지에 자극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자극은 감상자의 내부에서 공명작용을 일으키며 새로운 의지의 도출을 유인한다.

그러므로 퇴폐적인 감정이 유입된 작품을 감상하거나 듣게 될 경우 감상자의 의지 또한 퇴폐적으로 변질될 수 있고, 예술가가 긴장한 상태에서 표현한 작품을 보거나 듣게 되었 을 때는 마찬가지로 감상자의 감정 상태가 긴박해지기도 한다.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작품은 감상자의 의지를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경박한 그림과 음악은 감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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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인도한다. 유혹에 대항하는 수단은 오직 하나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도록 내면의 귀를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한 편의 비극을 관람하고 감동받았을 때 나를 방금 본무대에 적용시켜 본다. 나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나라면 다르다,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혼자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 버릇이 생긴 이유는 내가 연극적 사건을 비극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극을 비극으로써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다. 영웅의 몰락과 죽음이 비극이라는 그들의 인식을 받아들 일 수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마녀의 의지가 관철된 몽환적인 메르헨(동화)이다. 슬픈 연극을 자주 관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어린애 같은 단순함에 나는 감동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부조리에 절망한다. 그 절망을 나는 영감이라고 부른다.

타인이 베푼 호의에 무감각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그런 주제에 그들의 베풂에는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자립심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남들로부터 거절 당했다고 생각될 때다. 남들이 나를 거부한다고 생각될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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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용하는 까닭은 자신의 허구성을 숨기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들의 문장에는 명확함과 명료함이 없다.

우리는 이 같은 특징을 통해 그들이 단지 원고지의 빈 여백을 메우기 위해, 몇 마디 말로 한 달간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펜을 들고, 강단에 오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평소 즐겨 읽는 유명 작가 중에도 이런 자들이 적지 않다.

레싱의 연극론, 장파울의 쓸데없는 소설 몇 편은 빈여백을 돈과 바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펜을 들고, 작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사상의 끈을 붙잡고 수고한 결과다. 책을 읽다가 이처럼 거짓된 모순을 발견했다면 작가의 이름이 누구든 지간에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지식인이 자기가 알고 있는 몇 가지 특정 단어와 인식을 팔아치우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구경꾼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지식인에게 기만당한 것과 다름없다.

대다수 지식인은 대중에게 뭔가 전달해야 할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명분을 내세우는데, 명분이야말로 지식인이 즐겨 사용하는 변명거리이며, 우리가 그들이 쓴 책을 읽고, 그들이 가르치는 대학에 다니고, 이 의견을 좇아 마치 내가 그가 된 것처럼 누군가에게 열변을 토하는 행위야말로 그 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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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며, 셋째로 그릇에 맞는 내용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넷째로 내용에 맞는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지와 신체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다. 의지가 있기에 신체라는 표상의 출현이 가능했고, 신체라는 표상을 벗어나서는 의지의 확인은 불가능하다. 우주 만물의 탄생이 이같은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만일 조물주가 존재한다면 그 또한 우리와 같은 질서로 탄생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보다 확고하고, 자율적이며, 모든 의지의 의지가 될 만큼 순수했다는 것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도 거대한 의지이며,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천지를 주관하는 절대자들도 동일한 의미에서 의지다. 이런 의지가 담긴 그릇이 우주 만물이다.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삶이 서로 다른 듯 보여도 결론을 말하자면 우주의 섭리가 세계에서 표출되고, 인간의 삶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새롭게 형성되어 하나의 표상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독립된 세계이며, 유일한 표상이 된다. 인간이 스스로를 영장(長)으로 정의한 주체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지'였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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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신의 성스러움을 자랑하기 위한 에고이즘이라고 여겼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는 이 같은 사랑의 감정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에고이즘도 없다. 타인에 의한 구원은 없다고 믿는다. 타인을 위한 구원도 없다고 믿는다. 나의 영혼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신의 영혼부터 돌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타인의 구원에 관여하는 것은 말참견에 지나지 않으며, 타인에게서 사랑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사랑하고 싶지도 않다.

복수의 존재가 동일한 세계에서 구성원으로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경이롭다는 감탄에 빠진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동석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은 더욱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는 대상을 구체화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피에 굶주린 모기떼와의 싸움과 비슷하다. 모기 몇 마리를 쫓아내는 것으로 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내가 전 인류를 위해 더없이 중요한 사명을 완수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지만, 정작 인류는 나의 고뇌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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