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히지 않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을 통해 니체의 영혼회귀를 다시한번 더 곱 씹고, 낯선 이에 대한 기댐은 위험하지만 필수 선택이며, 신뢰의 즐거움을 위해 가보고 싶은 곳이 남았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카메라 없이 여행을 했다. 사진을 찍으면 내가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고, 과거의 상황과 장면들을 고정시키고 쌓아두려 애쓰는 것은 기만적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랬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들이 진짜 현실이었노라고 돌이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한 학생이 나를 카메라 가게로 데려가더니 새 기계를 사고는 쓰던 카메라를 주었다.
그 뒤 인도로 떠난 나는 여러 날 동안 그 카메라로 건물과 풍경만 찍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카슈미르에 있는 달 호수에서 시카라라고 부르는 작은 배에 타고는 호숫가에 드리워진 버드나무들 쪽으로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뱃사공은 계속해서 천천히 노를 저었다. 그런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니 방금 전 호수에서 목욕하던 남자들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웃으며 소리쳤다. "고마워요!" 나는 그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풍경이나 인도의 유적이 아니라 자신들을 기록해 두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흑백필름은 인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필름 한 통을 순식간에 찍어대며 결과물을 살펴보았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하며, 다음날 그 장소에 다시 찾아가도 그들이나 그들의 지인이 똑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는 점을 깨달 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운데 가장 순수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사진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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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G
고대 부족문화와 종교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돕는 행위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문화로 되돌아 간다는 얘기다. 현대 영국처럼 고효율과 정보화를 추구하며 경제와 문화가 재교육되고 재활용되는 곳의 경우, 그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돌아갈 만한 문화적 안식처는 없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라고는 무차별적인 증오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면, 논의하지 못할 것도 없을 뿐더러 당연히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과학자, 사회학자, 문화비평가, 종교지도자, 심리학자, 민족 생물학자들이 텔레비전에 나와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나는 익히 알고 있던 신뢰와 공포의 경험을 돌이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부터 타오르는 듯한 내적 깨달음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이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 또는 증거가 있고 증명이 가능하며 조리 있고 일관된 설명에 대한 믿음을 낳는다. 반면 신뢰는 믿음만큼 강력하지만 지식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신뢰하는 사람은 부분적이나마 불분명하게라도 알 수 있는 것들만, 혹은 모호하고 잘 알 수 없는 것들만 신봉한다. 신뢰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이해 불가능하거나 동기나 생각을 알 수 없을 때 생성 되는 것이다.
딱 한 번 그와 같은 순간에 마음의 도약이 가능하도록 용기를 얻으 려면 오래전부터 알아왔다는 듯이 미지의 대상에게 들러붙기만 하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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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는 조언자가 되려면 오랜 시간 집중되고 성실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법률과 공공시설과 정치와 가치관과 교육과 사회 속에서 동료집단으로부터 받는 압력을 전부 알게 되면 정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걸까? 하지만 신뢰할 만한 진짜 조언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충성스러운 행동이 불충의 기회를 열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문화의 법률과 기제를 이해하면 할수록 그 문화의 구성원들이 법률과 기제에 반하는 충동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 알게 되고, 그런 충동을 제어하기는 커녕 일부러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신뢰는 깨뜨림이며, 확실성과 가능성 사이에 걸쳐 있는 지도에 만들어진 지름길이다. 의심과 신중함의 결합을 깨는 힘은 돌발성과 탄생, 그리고 시작이다. 그런 힘은 고유의 추진력을 가지고 홀로 자라 난다. 그런 힘은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수많은 이방인들에 대해 그 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 거라고 그토록 의심을 품고 걱정했건만, 우연히 한 사람의 이방인에게 집중하면서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듯 부풀어 오르다가 탄생하는 신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젊은이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가 정글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줄 거라고 신뢰하기로 했다. 그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내 가방을 가지고 30분 거리만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도 계속해서 그를 신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신뢰라는 것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스스로 점점 복잡해진다.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길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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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이었어요.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늘 공손했죠." 런던 폭탄 테러범 이웃 사람들의 말이다. 이웃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들 한복판에서 괴물이 정체를 드러낸다. 당신이 신뢰하고 세를 주었던 사람이, 당신이 신뢰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가게에 다녀올 동안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실은 모르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할 폭탄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신뢰가 공포로 바뀐다.
목적 '이데올로기' 주류사회에서 도외시됐던 집단, 복수심 등을 가지고는 그 외로운 폭파범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백색 늑대'의 일원도 아니었다. 경찰은 범인이 백색 늑대의 일원이라고 상정했으며, 두 번의 폭파 사건이 흑인과 방글라데시인들의 거주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세 번째 폭탄이 게이 바에서 터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뢰와 마찬가지로 증오도 지식 너머나 심지어 지식이 부재하는 곳에서, 증오할 이유가 없는 곳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것 같지 않은가?
심리학자와 범죄학자들은 증오의 첫 원인을 젊은 폭파범의 유아기나 청소년기에서 찾는다. 범인은 어릴적에 버림을 받았거나 학대받지 않았을까? 사춘기의 불안함이 정신적인 외상으로 남은 건 아닐까? 하지만 증오란 혐오스러운 사건이나 인물 때문에 발생하는 직접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의 젊은 기술자는 자신을 억지로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했던 아버지를 계속 증오했지만, 그러는 대신 멸시하거나 무시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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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상상했던 영원회귀라는 것은 이전 삶과 똑같은 순서와 인과에 따라 지금 살지 않으면서 그와 동시에 한번 살아봤던 것처럼 상상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환자가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옛 사건의 힘을 없애버리는 행위라면, 역사가의 정신도 과거의 기억과 그것이 나타내는 바에게서 힘을 벗겨버리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는 자신이 설명하는 사건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샅샅이 조사한다. 그 사건들의 힘을 동기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배치하고, 연계시키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선택한다. 종교역사가들은 우리가 몽골 의식용 나팔과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들을 배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팔의 본성과 배경, 기능, 표현의 관점에서 본 의미 등을 기록하면서, 향수 때문에 검게 변색된 인간의 뼈라는 물질과 접촉하면서 손으로 전달되는 떨리는 감정을 없애버린다. 설명이 감정 재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 모든 힘들을 재현하려면 오래전 저 먼 곳에서 있었던 사건과 시작들을 잊어야만 하는 걸까?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사건과 시작에 흘러넘치는 희망과 자긍심의 힘이며, 웃음과 눈물의 힘이며, 축복과 저주의 힘, 사랑과 신뢰와 믿음의 힘이다. 희망과 자긍심은 슬픈 과거의 연속성을 끊어주며, 과거 없이 새로이 태어나는 힘이 되어 솟아오른다. 사랑과 신뢰와 믿음은 과거에 배운 교훈 및 과거에 깨우쳤던 조심성과 결별할 수 있는 힘이며, 순수함과 정직함에 힘입어 솟아오른다. "망각 없이는 행복도, 쾌활함도, 희망도, 자긍심도, 현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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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취향, 꿈들을 거의 대부분 돌이켜볼 수 있었다.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과, 모든 사상과 탄식과, 오래 전에 살던 사람들의 인생사에 있어 형언할 수 없이 크거나 작은 모든 일들은 회귀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예를 들자면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이다. 역사가들은 정신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려들지만, 니체는 가장 포괄적인 영혼을 통해 그에 대항한다. 그 영혼의 내부에서는 '모든 사물이 진보와 반진보, 밀물과 썰물을 내포하고 있으며, 오랜 과거에 저 먼 곳에 존재하던 본능, 감수성, 취향이 언제든지 회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는 또 다른 시간을 돌이켜 부를 수 있다.
니체가 자신의 나라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기의 언어를 썼으며, 그 언어의 주제와 범주와 분류에 내재된 해석을 통해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호머와 소포클레스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가진 거라고는 그들이 남긴 작품밖에 없으며, 그 작품들을 읽는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과학과 문화의 범주와 문법을 기반으로 그 것들을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과 관련해 남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해석의 해석일 뿐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습과 제도 속에서 그들의 본능과 감수성과 취향이 이끌어내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의 내부에서 회귀하는 만큼 이해할 수도 있었다.
소포클레스, 리그베다의 현자들, 예수, 괴테의 의견과 증명과 반증들은 (니체에게 있어 이것들은 본능과 감각과 취향이 유발하는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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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의 분과가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아푸, 즉 서로 다른 신성한 산을 숭배한다. 각 분파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성한 산의 형태를 머리에 직접 반영한다. 즉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에 틀을 씌우는데 한 분과는 아이의 두개골이 원통형으로 자라도록 하고, 다른 분파는 두개골 윗면이 편평해지도록 한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레둑시온이라 부르는 요새화된 촌락에 모으고, 아이의 두개골을 변형시키는 행위를 금지하고 스페인 옷을 입도록 했다. 그러자 첫 번째 분파는 높은 원통형 모자를 만들어냈고 다른 분파는 높고 위가 편평한 모자를 만들었다.
높이 솟아 있는 산들은 양쪽 면 모두 얼음에 덮여 있었지만, 사방카야 화산은 짙은 연기구름을 뿜어내고 있었다. 산티아고와 나는 마카 라고 불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산티아고에 의하면 2년 전 지진으로 인해 한 촌락이 무너졌는데 지금 같은 지점에서 다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서 커다란 균열을 바라보았다. 산티아고는 그 지역 사람들의 얘기를 듣더니 내 손목시계를 보고 몇 시간 전을 가리키면서 바로 전날 밤 생긴 균열이라고 전해주었다. 우리는 발밑에서 부서지는 자갈들을 보며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협곡을 올라갔고, 우리의 노력과 생명이 지질학적 연대에 맞서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지질학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미미했으며, 그 시간 속에서는 우리가 협곡에 남긴 족적을 비롯해 일생 동안 남긴 그 어떤 업적도 결국은 침식되고 무기물로 분해될 운명이었다.
우리는 코카잎을 씹으면서 제일 위에 위치한 단까지 힘들게 등반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협곡 바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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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느라 느꼈던 피로함은 노동과 정반대이다. 그리고 그동안 산과 관련해 축적해 놓은 관념과 정보들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산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다가옴에 따라 흩어져버린다. 그런 순간은 덧 없이 짧다. 일단 산을 떠나면 아무리 묘사해보려 해도 그 순간을 복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산에 갔건만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낯선 이를 끌어안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교수도 자기 결정능력이 있는 성인 남성도 아니다. 그 순간 나는 돌봐주어야 할 유아가 되고, 욕정적인 익명의 동물이 된다. 나는 관능적인 황홀함에 빠져 자신을 잊고, 자신에 대한 평판을 돌아보는 것도 잊고, 명성도 잊고, 위엄이나 신분도 잊고,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육체도 잊고,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다. 나는 관능적인 환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다. 현재는 저절로 쇠퇴하고,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소비된다. 그런 경험은 누적되지 않는다. 환희의 절정에서 자신을 잊고픈 갈망은 반복적인 충 동이기 때문이다.
의무와 수정해야 할 일과 완료할 일과 달성할 목표를 떠올리는 순간 그런 경험들은 흩어져버린다. 그런 경험은 흥분까지, 그 시발점까 지도 끊어내 버린다.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언어를 통해 묻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현재의 황홀경은 사라져 버린다.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느낄 때 우리의 머리는 텅 비고, 자아는 소멸해 버리고, 탐욕스러 운 단어의 노동은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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