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독서정리

열 번째 책 : 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by 마파람94 2023. 4. 11.

법정 스님이 유명하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고, 그의 유명한 저서가 무소유였던가 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그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 왔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생각이 책을 통해 메아리로 남습니다.
 
특히 그가 읽은 책들과 연관되어 쓴 글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단상이라던지, 어린왕자에 대한 글들을 보고 스님은 불경만 읽을 것이라는 저의 편견이 완전히 사라진 경험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인에 대한 이야기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미리 쓰는 유서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的 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 만 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귀의해 지금껏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으니까. 내 그림자 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일상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도 말한 바 있다. 

57
1장 행복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더라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 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 무일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1장 대복

59

 함께 살고 있는 존재로서 살뜰한 정을 주고받았었다. 나그넷길을 떠나기 위해 행장을 챙길 때에도 흔히 느끼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혼자서 이삿짐을 주섬주섬 싸고 있을 때 문득 시장기 같은 것을, 허허로운 존재의 본질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살만큼 살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 혼자서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왔던 길을 되돌아갈 그때에도 이런 존재의 허무 같은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남의 집 셋방 신세를 지면서 여기저기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프고 쓸쓸한 심정을 얼마쯤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 자신의 경우는 스스로 선택해서 옮겨가는 것이지만, 자기 집이 없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고, 집을 비워 달라는 말 한마디에 기가 죽어 다시 또 이삿짐을 주섬주섬 꾸릴 때, 그 막막하고 고달픈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집 마련을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그토록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몸담고 살아갈 주거 공간을 내 식으로 고치느라고 며칠 동안 분주히 보냈다. 엉성한 전기 배선을 안전하게 다시 하고, 다락도 말끔히 치워 새로 도배를 했다. 후원의 수각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마당 한쪽까지 수도를 끌어들이고, 개울에서 넓적한 돌을 주워다 빨래터도 하나 만들어 놓았다.

81

2정 자연

더운물을 쓸 수 있도록 군불 지피는 아궁이에 솥을 걸었더니 불이 잘 안 들었다. 다시 뜯어내어 이맛돌을 낮추어 걸었다. 이제는 활활 잘 든다. 굴뚝도 그전보다 높였다. 절에서 흔히 말하는 목 연탑을 세운 것. 나무 타는 연기가 나오는 굴뚝이라고 해서 장난삼아 그렇게들 부른다.

대밭에서 서너 발 되는 장대를 베어다 앞마당에 빨랫대로 걸어 두었다. 헛간에서 헌 판자를 주워다가 또닥또닥 손놀림 끝에 한자 높이의 보조 경상도 하나 만들었다.

방 안 벽에 대못을 두 개 박아 가사와 장삼을 걸고, 반쯤 꽃이 핀 동백꽃 가지를 꺽어다 백자지에 꽂아 놓으니 휑하던 방 안에 금세 봄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임제 선사의 어록 중 에서 좋아하는 한 구절 '즉시현금 갱무시절現'이라고 쓴 족자를 걸어 놓으니 낯설기만 하던 방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를 가지고 되씹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을 자기 자신답게 최선을 기울여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82



산비둘기는 또 무슨 한이 있어 저리도 서럽게 서럽게 우는고. 흐느끼듯 우는 산비둘기 소리를 들으면 내 가슴에까지 그 서러움이 묻어오는 것 같다.

우리 곁에서 새소리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메마를 것인가. 새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소리요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런데 이 새소리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참새며 까치며 희귀 조류까지 사람의 손에 잡혀 먹히고, 독한 농약으로 인해 논밭이나 숲에서 새들이 무참히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극심한 대기 오염 때문에 텃새와 철새 들도 이 땅을 꺼리고 있다.

새가 깃들지 않는 숲을 생각해 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있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 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거나 다름이 없다.

세상이 온통 입만 열면 하나같이 경제 경제 하는 세태다. 어디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1993)
89

걸핏하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폭력을 휘두르려 하며, 때로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콕 막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오늘 오후,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바람 끝이 쌀쌀하고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에 사는 사람이 산을 오른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산속에서도 오를 산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첩첩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뒷등성이로 올라 오리나무 숲을 찾아갔다. 오리나무 숲도 잎들을 어지간히 떨쳐 버리고 옹기종기 모여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훨훨 벗어 버린 나목의 숲 속을 거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무들의 체온이 다가선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는데,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 들에서 도리어 따뜻함을 감촉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한테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 인간미를, 조촐하고 맑은 가난을 지니고 사는 사람한테서 훈훈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가난은 주어진 빈궁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는 선택된 청빈일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악덕이고 부끄러움일 수 있지만, 선택된 그 청빈은 결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112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안빈낙도를 이야기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치겠지만, 옛 우리네 선비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가꾸면서 맑고 조촐한 삶을 넉넉하게 이루었던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투철한 인생관을 지니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삶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선비 정신과 꿋꿋한 기상이 일상의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무디어진다. 맑은 바람이 지나갈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몫을 더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에 갈등과 모순과 비리로 얽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이나 집단이 정서가 불안정해서 삶의 진실과 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만약 나뭇가지에 묵은 잎이 달린 채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2강 자연

93

보면 그 안에 삶의 운치와 여유와 지혜가 들어 있다. 도시에는 여백이 별로 없이 그저 빽빽이 들어찬 과밀뿐이다. 따라서 삶의 여백 또한 지니기 어렵다. 여백이 없는 사유는 자칫 환상이나 망상으로 치닫기 쉽다. 도시의 온갖 범죄도 이런 데서 연유되지 않을까 싶다.

도시의 빌딩에서 내다보이는 전경은 또 다른 빌딩일 뿐이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과 여백 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 주고 있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생각 돌이켜 선뜻 버리고 떠나는 일은 새로운 삶의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되풀이로 찌들고 퇴색해 가는 범속한 삶에서 뛰쳐나오려면, 나무들이 달고있던 잎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는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한 해가 기우는 마지막 달에 자기 몫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오던 길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이 없다. 그의 혼은 이미 빛을 잃고 무디어진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끝없는 탐구이고 시도이며 실험이다.
 
그런데 이 탐구와 시도와 실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연의 리듬은 멈추거나 끝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96

철이면 번번이 연기가 아궁이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불이 잘 안 들 때 평지 같으면 굴뚝을 높이면 연기를 잘 빨아올리지만, 산중에서는 바람을 타기 때문에 굴뚝이 높으면 상대적으로 덜 든다는 사실도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러다가, 굴뚝에 다는 환풍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걸 사용 한 뒤부터는 눈물을 흘릴 일이 없다. 불 내는 바람이 불어 이 환풍 기를 쓸 때마다, 나는 이런 기구를 발명한 사람에게 무슨 상이라도 드리고 싶은 고마운 심정이다. '문명의 이기'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싶다.

산천경개의 겉모습만 보고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한가하게 새소리나 듣고 부드러운 앞산의 산마루나 바라보면서 맑음과 고요를 즐기는 듯한 산중 생활을 부러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한가와 고요와 맑음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보상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그래서 세상에는 공것도 없고 거저 되는 일도 없다. 그 어떤 형태의 삶이건 간에 그 삶의 차지만큼 치러야 할 몫이 있는 법이다.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치러야 할 그 몫도 또한 크고 많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장마철 빨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며칠씩 잔뜩 찌푸 린 채 찔찔거리다가도 하루쯤 반짝 햇볕이 나는 때가 있다. 말하자

2장 자연

101

속아왔는지, 냉정하게 맑은 제정신으로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하루하루, 한순간 한순간이 우리를 형성하고 거듭나게 한다. 이 한순간 한순간이 깨어 있는 영원한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삶이라 할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부질없이 낭비하고 말 것이다.

미국의 사상가 랄프 트라인은 이렇게 읊고 있다.

그대, 진정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무엇을 하든 무엇을 꿈꾸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하라

자신의 주관을 지니고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발견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

오늘 아침, 올봄 들어 처음으로 숲에서 찌르레기의 야무진 목 청이 들린다. 이제 또 봄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1991)

2장 자연

115

욕망의 좁은 공간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소비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그럴듯한 광고에 속지 말아야 한다. 광고는 단순히 상품의 선전이 아니라 우 리들의 욕구를 충동질한다.

산업 사회의 생산자는 소비자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 소비자는 결국 생산자에 의해서 조작당하고 유도된다. 이때 소비 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광고다.

광고의 그럴듯한 단어들에 현혹되지 말라. 그 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어떤 알맹이와 함정이 들어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 눈을 돌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한때의 기분이나 충동에 휘 말리게 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침내 쓰레기가 되고 만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들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 없어도 좋을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홀가분해져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 

2강 자연

119

아이가 자라서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야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비밀을 알려 준다. 그러면서 너를 키우느라 애간장을 태웠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머릿속의 황금을 조금만 나누어 줄 수 없겠느냐고 한다. 아이는 선뜻 호두알 크기만 한 황금 덩어리를 자신의 두개골에서 떼어 내어 어머니에게 드린다.

그는 이때부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값비싼 황금에 정신이 팔 려 이 황금이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게 된다. 그는 황금을 마구 낭비하면서 왕족처럼 사치스럽게 살 아간다. 뇌 속의 황금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자꾸 줄어들고, 못된 친구에게 도둑맞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골 속이 다 비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세상에는 하찮은 것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황금을 마구 낭비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 하찮은 것들로 인해 그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좋은 특성과 잠재력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지닌 그 황 금은 무엇인가? 소중한 그 황금을 혹시나 하찮은 일에 탕진하고 있지는 않는가?

3장 책

135


바람을 마시고 사는 처마 끝의 풍경이 자기도 집 안으로 좀 들어갈 수 없느냐고 이따금 오들오들 떨면서 땡그랑거린다. 업이 달라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 하지만 땡그랑거리는 그 소리가 오두막의 주인에게는 적잖은 위로와 과적이 된다. 바람이 없는 집안에서는 풍경은 한시도 살아 있을 수가 없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듯이 수행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물고기의 형상을 만들어 처마 끝에 매달아 놓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혹은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건져내듯이, 고통의 바다에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법의 그물로 구제하라는 뜻에 서라고도 한다.

바람이 없으면 그 존재 의미가 사라져 버리는 풍경,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풍경은 우리들에게 명상의 소재를 끊임없이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딘 귀는 단지 땡그랑거리는 풍경 소리로밖에 들을 줄을 모른다.

난롯가에 앉아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보면서 눈에 묻힌 오두막의 살림살이에 고마움을 느낀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수행자들에게는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영원한 사표가 될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그의 '거룩한 가난'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물질의 풍요 속에서 도리어 정신적인 궁핍과 자책을 느끼게 한다.

137

3장 책

카스는 자신의 오케스트라가 이룩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연 열릴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우리의 음악은 제한된 청중(여유 있고 유복한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간 다고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은 연주회 입장권을 살 수가 없었다. 간신히 돈을 모은 소수의 사람들은 맨 꼭대기층의 가장 싼 좌 석에 앉았다. 나는, 그들이 호사스러운 정면의 일등석이나 귀빈석에 앉은 상류 계층의 사람들을 내려다볼 때 음악과는 전연 무관한 다른 생각에 잠길 것 같았다.

나는 공장과 상점과 부두에서 일을 하는 남녀들이 우리의 음악을 듣고 즐거워할 수 있기를 원했다. 결국은 그들이 우리 고장에서 대부분의 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그들이 문화적인 부를 나누어 가지는 일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 나라의 문화 정책이 어떻게 세워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걸핏하면 문화 민족이 어떻고 하는 자긍심에 도취된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문화 민족일 수 있으려면 그 문화도 각 계층에 고루 분배되도록 두루 손을 써야 한다.

160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점령하의 한 시골에서 그는 어려운 날들을 보낸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독일 국민을 위해 연주해 달라고 나치 당국으로부터 수차 종용을 받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 다. 어째서 독일에 안 가려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독일에 가는 것은 스페인에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카살스는 프랑코와 그가 표방하는 것들에 단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스페인에 자유가 있다면 돌아가겠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면 투옥되거나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88세 되던 1962년 초, 그가 전쟁 중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베들레헴의 구유>와 함께 개인적인 평화의 십자군으로 나서려는 결의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먼저 한 인간입니다. 예술가는 그다음입니다. 인간으로서 나의 첫 번째 의무는 나와 같은 인간들의 안녕과 평화입니다. 음악은 언어와 정치와 국경을 초월하므로 나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이 방법으로 내 의무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세계 평화에 내가 기여하는 바는 미약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이상을 위해 내 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습니다.

161

거칠어져서 자기 아내에게 곧잘 손찌검을 하였다. 바람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런 날은 정말이지 산 위에 사는 일이 아 주 싫다.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공연히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려고 한다. 혼자서 투덜투덜 욕지거리를 쏟아 놓아도 개운치가 않다.

이런 때는 생각을 크게 돌이켜야 한다. 내가 화를 내면 내 자신 이 안팎으로 피해를 입게 된다. 시작이 있는 것은 그 끝이 있게 마 련, 태풍도 불만큼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그렇다. 이런 날이야말로 순수한 '내 날'이 될 수 있다. 그 누구 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불쑥불쑥 찾아 드는 불청객들도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젖은 겉옷을 벗어 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홀가분하게 있자.

전기도 나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바람. 자, 뭘 하지? 그렇 다. 소설이나 읽자. 이런 날은 소설이나 읽어야지 엄숙한 일은 격에 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락에 올라가 더듬더듬 손에 잡 히는 책을 뽑아 드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였다.

마침 잘되었다. 굵직굵직한 카잔차키스의 선을 나는 좋아한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오늘 기연이다 싶어 다시 펼치기로 했다. 

3장 책

165

창가에 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읽자. 소설을 누가 뺏 뺏이 앉아서 읽는단 말인가.

책장을 펼치자 거기에서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남유럽 쪽으로 부는 세찬 비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카페 안에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그 항구에서 산투리(기타 비슷한 악기)를 끼고 있는 조르바를 만 나 이야기 끝에 '나'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이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두 손은 못이 박이 고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 있었다."

조르바가 쓰는 단순하고 소탈한 말에 견줄 때, 복잡하고 시끄 럽고 닳고 닳은 현대 문명 속에서 사는 오늘 우리들의 미끈한 말이 얼마나 허황하게 울리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연장과 악기를 함

166

조르바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 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물음이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낸 게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 (1986)

3장 책

169

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마르틴 부버는 그의 <인간의 길>에서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했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로 그와 같이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유한한 존재다.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이므로 더욱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한스러운 일도 적고 생에 대한 미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사람은 또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할 것인가. 죽음이 없다면 생 또한 없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들의 생을 조명해 주기 때문에 보다 빛나고 값진 생을 가지려고 우리는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살인, 강도, 대량 학살, 고문, 폭행 등 비인간적인 범죄가 날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늘어만 가고 있는 현대 사회. 때로는 우리들의 의식이 마비될 정도로 그 도가 심각하다. 1999년까지 갈 것도 없이, 인간의 끝이 아닌가 싶도록 막막할 때가 있다.

178

그러면 인간다운 행위란 무엇일까? 우선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져야 '이웃'이 될 수 있고,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관계를 통 해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이 곧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우리들의 관계는 인간을 심 화시킨다.

흔히 베푼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인 것 같다. 원천적으로 자기 것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 우주의 선물을,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그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지, 결코 베푸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무엇 하나 가지고 나온 사람 있던가? 또한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자기 것이라고 해서 무엇 하나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았는가?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나누어 가지는 것이 어찌 물건만이겠는가. 부드러운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함께 걱정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누어 가짐이다. 그러니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 가질 때, 그 즐거움 자체가 보상이다.

180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 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 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 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 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4장 나눔

187

우리가 수도하고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 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 으면 오염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진실한 마 음을 지키는 것이 제일가는 정진第一)이라고 옛사람 들도 말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닦는 일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닦는 입장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깨달음에 얽매여 본래의 깨달음을 망각하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흥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무엇이 되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그대로 충만된 삶입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건 흥미가 아니고 야심입니다. 야심에는 기쁨이 없고 고통이 따릅니다.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우주의 커다란 생명력의 작용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개체인 내 자신이 어떤 일을 통해서 전체인 우주로 합일되어야 합니다. 둘이 아닌 법(不二法)이란 이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되면 어깨를 활짝 펴고 삶의 한복판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 주지 않습니다.

4장 나눔

195
 

올바른 종교는 두려움을 없애 주고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합니 다. 다시 카비르의 시를 소개합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그대 집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으로 저 골짝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자신의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1992)

19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