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거나 가슴이 울컥거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감성이 메마른 것으로 판단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가 잘짜여있어 앞뒤구성이 입체적이라는 생각이며,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서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 호소한다는 것에 작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마지막 문장이 메아리 칩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결국 힘겹더라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나는 정적이 흐르는 집에서 홀로 줄담배를 피우며 술을 엄청 마셨어. 조세핀과 네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가 너희한테 용서를 빌고, 내게 자신의 나약함을 물려준 아버지를 용서해줬을텐데. 하지만 용서는 우리 성격이랑 잘 맞지 않지.
결국 술이 내 화를 잠재웠고, 대대로 내려온 비겁함이 다시금 돼살아났어. 그날 밤. 내가 가진 구슬 전부
네가 나에게 말을 잘 붙이지 않으려는거 잘 안다. 네 상처가 무언지 아니까. 나도 네 나이 때 똑같은 상처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상처가 마음속에 남아 있으니까. 난 그때 베개를 있는 힘껏 내려치고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는가 하면, 구슬치기에서 딴 구슬 전부와 교환한 깨진 벽돌 조각을 자동차나 집 창문에 던지기도 했어. 유리 깨지는 소리가 좋더라고, 나도 같은 감정을 느꼈어. 두려웠어. 너처럼 두려웠어. 참 불공평하게도 하루의 고통이 1,000일의 행복을 지워버리는 법이지.
58
억이 모든 걸 용서하진 않아. 애정도 마찬가지. 개조한 혼다 호넷 사건에서는 수십만 유로에 달하는 보험금을, 어디 그뿐인가, 해고되기 전까지 여러 사건을 몇 년간 처리하며 회사에서 수백만 유로에 달하는 보험금 지급을 아끼도록 해주었어.
그동안 나는 능력 있는 전문가이자 냉정하고 경계심이 강하며 청렴한 직원으로 통했지. 빈틈없는 사람이자 냉혈한으로. 그래서 회사는 내 연봉을 인상해주고 날 인재로 대접했어. 내가 지나가면 사장 비서가 괜히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보너스도 줬고. 해고되기 2년 전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회사 차를 지급하고, 개인 비서까지 붙여주었지. 선물도 있네, 다음 월요일에 차를 받아볼 텐데 필요할 때 쓰게나, 지금껏 수많은 차량 사고 건으로 우리 회사에 많은 돈을 벌어다 주었으니, 자네가 이 차를 선물로 받고 기뻐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주는 거라네. BMW 320i. 가격은 3만 2,150유로. 월급 서른 번을 합친 것과 맞먹는 금액이었지.
난 그 차를 타고 퇴근하며 속도를 올리고, 미끄러지듯 커브를 돌고, 노란불도 그냥 지나가며 잔뜩 흥분한 상태로 차를 몰았어. 현관에 들어서면서 나탈리한테 소리쳤지. 얼른 가방 싸, 토스카나로 떠나자. 어머니가 말씀하신 적이 있었거든. 토스카나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러자 나탈리가 대답했어. 조세핀이 자요. 아이가 자면 뜨거운 사랑도 잠드는 법. 결국 우리는 떠나지 않았고, 나탈리는 그 차를 보더니 디자인도 별로, 색상도 별로라고 했어.
109
날 나쁜 놈으로 생각하진 말게나. 자네도 숨지 않았나. 자네도 겁이 났잖아. 자네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거든. 자네가 이곳에 온 뒤로 수없이 그 눈빛을 지우려 한 걸 알지만, 내 눈엔 여전히 그 흔적이 보인다네. 나도 자네와 똑같은 두려움을 가졌던 거지. 숨고 싶었어. 여자들의 배 속에 숨어 있고 싶었어. 여자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모든 여자를. 내가 버렸던 한 여자 때문에.
자네의 은신처는 침묵이더군. 하지만 있잖아, 침묵은 권총의 총알과도 같은 걸세. 결코 잠자코 있지 않아. 언젠가는 파멸을 부르지. 이번엔 내 얘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내 안에 든 악마와 짐승에 대해.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 묵직하면서도 거친, 수많은 여자를 홀렸던 그 손으로 말이다. 남자의 손이자 아버지의 거대한 손이었다. 그 뒤로 여러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입 밖으로 나왔다. 자식들 이름부터 비겁했던 아버지, 도망간 어머니, 아주 심했던 어머니의 기침 소리, 영원히 깨지 않은 여동생 안, 어린 시절에 벽을 쳤다가 손등이 부러진 일, 새벽에 다른 남자의 체취를 한껏 안고 집으로 돌아와 웃음을 흘렸던 나탈리, 고용지원센터 직원들이 휴식 시간이라며 상담을 중단했던 일까지.......
그렇게 흘러나온 말은 모두 거친 바람처럼 흩날려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 죽은 자의 세계인 '믹틀란'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스쿠알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206
난 아르히날도를 위해 그렇게 믿고 싶다. 예전에 조세핀과 레옹을 위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처럼. 어릴 땐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은 더욱 멀리 보이고 꿈은 더욱 크 게 보이는 거란다. 나무에 열린 사과를 따고 체리를 따기 위해 높이뛰어올라 보렴. 무수히 많은 승리의 영광을 누릴 테니까.
우리 셋은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 서로의 어깨가 닿아 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고, 마틸다의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인다. 그녀의 아들은 공이 보물이라도 되는 듯 가슴에 꼭 안 고 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아들은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그녀가 자기 엄마인 줄 모른다. 그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천천히 조심스레 쓰고 있는 이야기도 알지 못한다.
내 자식들과 지냈던 시절에는 몰랐던 것을 아르히날도를 위해 배운다. 슈팅을 날리고, 모래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을 잡고, 과일 이름을 익힌다. 까만 눈동자의 마틸다가 다정한 시선을 보내온다. 조용히 가족이 탄생한다. 축복 안에서 평화롭게.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왔다.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구름이 수평선쯤 에서 떠다닌다. 그리고 아르히날도가 고개를 돌려 내게 묻는다. 아저씨, 비는 왜 내려요?
214
그러더니 아저씨가 나한테 용서를 구했다. 나한테. 용서해다오, 조세핀, 그 일이 있고 나서 네 아빠를 내버려 두고, 옆에서 끝까지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도 못하고, 네 소식을 살피려고 하지도 않아서 미안하구나. 아저씨는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7년 동안 수치심과 불행이 이어졌다고.
두려웠다. 매일 아침 구역질을 하고 피를 토했지. 손가락이 점점 뻣뻣해져서 이젠 더 이상 주먹을 쥘 수가 없어. 내가 저지른 배신에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 우정이라는 것 때문에 나는 매일같이 화를 내고 미쳐갔지.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어. 너의 그 비열한 아빠가 보고 싶다. 그 비겁함이 그리워. 그 비겁함은 그저 삶을 향한 무한하고도 수줍은 사랑이었는데…………….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그날 밤 이후 술을 엄청 마셔댔어. 아침에 눈만 뜨면 그놈이 생각나고, 그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지. 그렇게 내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어. 조세핀,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그러니까 넌 날 멸시해도 되고,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돼. 내가 빌 어먹을 놈이지. 아저씨의 두 눈이 반짝였다. 격한 감정과 키르, 수치심. 나쁜 조합이었다. '아저씨도 나쁜 놈이야! 하고 외치고는 아저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옆에 있던 부인이 아저씨의 팔을 잡고 개 끈을 잡아당기듯...
280
고모는 5년 전, 우리가 리옹으로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정신병원에 서 아빠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아빠한테 내가 했던 '끔질' 얘기를 꺼내놓았더니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레옹이랑 내가 아빠와 관련된 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성도 버렸다는 얘기까지 전했다고. 그날 이후로 아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렇게 둘 사이에도 침묵이 시작된 거였다. 창밖으로 아침이 밝아왔고 고모랑 나는 하품을 했다. 고모가 나한테 봉투 하나를 건넸다. 내 생일 선물이라고 했다. 아빠와 고모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뒤늦게 찾아간 집에서 아빠와 고모 앞으로 남아 있던 단 두 가지 물건이었다.
조세핀, 이건 행복이 존재한다는 걸, 행복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했다는 걸 말해주는 선물이란다.
봉투 안에는 사진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쌍둥이 자매의 모습이 있었다. 얼굴이 백옥같이 하얗고 예쁘다. 정원에서 웃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다. 두 사람 뒤로 원피스 색과 똑같은 빛깔의 히아신스 꽃이 보인다. 두 번째 사진은 즉석 증명사진으로, 사진 속에는 여섯 살 난 어린 소년이 있었다. 단정히 머리를 빗고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오빠가 유도 수업 등록 서류에 붙이려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정작 유도 수업은 잠깐 듣고 말았지 아마, 고모가 사진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사진을 찍은 날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날이었다고...
283
자들은 그게 무슨 성병이라도 되는 듯 당장 내뺀다. 불쌍한 녀석들. 그런데 어제 만난 한 남자는 이미 그 단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거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 말에 난 꼼짝도 못 했다. 심지어 얼굴까지 잘생긴 남자였다. 그러다가 일곱 번째로 맞는 겨울의 어느 날 아침, 안나 고모한테서 전화가 왔지요. 당신한테 편지를 한 통 받았다고. 당신이 멕시코에 있다고. 멕시코 서안인 듯싶다고. 별말은 없었고 그저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정도의 얘기였다고. 새로운 삶을 찾고 새로운 친구도 만났다고.
나는 그날 내내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녁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날 보더니 얼굴이 창백하다고, 긴장한 것처럼 보인다며 걱정하는 눈치였죠. 선생님한테 구역질이 난다고 얘기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당신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난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정말 아 니냐고 계속 물었어요. 그래서 나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죠. 아니...
285
버스를 탔어요. 총 맞은 내 인생 이야기가 담긴 수첩을 양손에 꼭 쥐고 말이에요. 콜레트처럼 손이 떨리네요. 울퉁불퉁한 길 때문이겠죠.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 때문 일 거예요.
기뻐서 몸이 벌벌 떨리는 것 같아요. 버스가 멈춰 서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아래쪽에 있는 해변을 손으로 가리켜요.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게 치네요. 아주 세차게 서 퍼는 보이지 않아요. 어딘지 모르게 황량한 느낌이에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요. 미지근한 모래 속에 벗은 발로 들어가 요. 어린아이 몇 명이 모여 막대기를 들고 개를 쫓아다니며 놀고 있어요. 저 멀리 왼편에 호텔이 보여요. 문을 닫은 것 같아요. 한 커플 이 해변을 따라 걷고 있어요. 파도가 밀려와 부서질 때마다 함께 폴 짝 뛰며 물러서기도 하고요. 그들을 바라봐요. 특히 남자. 설마, 아 빤가요.
모두 세 사람이에요. 휘몰아치는 파도를 마주 보고 세 사람이 앉아 있어요. 한 남자와 한 여자와 한 아이.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요. 저 목, 저 등, 앉아 있는 저 실루엣, 왠 지 익숙해요. 저녁마다 내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헨젤과 그 레텔>을 읽어줄 때도 저 모습이었는데, 소리치고 싶어요. 달려가고 싶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네요. 조용히 그들의 발걸음을 쫓아가요. 그들을 향해, 그 293 사람을 향해.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요. 아이는 가슴에 축구공을 꼭 안고 있고, 여자의 머리카락이 아빠의 뺨을 간질이고 있어요. 5미터도 채 되지 않아요. 바람 소리에 묻혀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리 지 않아요. 이제 두 발짝만 더 가면 돼요. 아이가 구름을 보더니 아 빠한테 고개를 돌리며 묻네요.
아저씨, 비는 왜 내려요? 그들 곁으로 다가가 아빠 옆에 앉았어요. 아빠는 놀라지 않네요. 그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요. 멋져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여 요. 세월이 흘렀죠. 아빠가 손을 들어 내 어깨에 올려놓더니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요. 눈물을 흘리네요. 다시는 날 떠나보내지 않을 거라고.
그러고는 랑기누이 이야기를 하고, 파파투아누쿠 이야기를 해요. 대지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하늘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요. 우리 의 눈물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294
그러니까 인생이란 결국 힘겹더라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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