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여년 전에 쓰인 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낯선 기분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아우스티누스의 고백록입니다.
몇 해 전 한 신학과 교수가 이 책의 10권 중의 내용을 인용하여 강연을 했던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장면은 르네상스 시대 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페트라르카가 프랑스의 몽팡두 산을 건너면서 아우구스티누의 고백록의 구절을 떠올리는 장면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탄하는데, 정작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부분이었습니다. 페트라르카 입장에서는 당시 이교도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의 생각에 강한 자극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 기억 때문에 이 책을 들지 않았나 싶은데,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랑하시는 당신 안에서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여 당신 아닌 다른 것을 향하는 자에게는 괴로움만 쌓 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한도가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육체의 감각도 본래 지음을 받은 대로 제 구실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정해진 시작에서 정해진 마지막으로 흘러가는 것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아, 헛된 것을 좇지 말고 영원하신 말씀께 돌아오라. 감각으로 아는 것은 부분일 뿐, 전체를 알 수 없다. 부분을 아는 것보다 전체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보다 더 뛰어나시니 그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 육체들이 네 마음에 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너의 사랑을 그것들에게 돌리지 말고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께 드려라. 영혼들이 너를 즐겁게 하거든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라.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아, 너희 마음으로 돌아가 너를 만드신 그분을 굳게 붙들어라. 그분 안에 거하라. 그러면 너는 굳게 설 것이다. 그분 안에서 쉬어라. 그러면 너는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왜 괴로운 길을 찾아 헤매냐? 네가 찾는 안식은 그곳에 없다. 생명 없는 그곳에 행복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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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나에게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신다는 것과 당신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어도 말입니다. 그때 나는 당신은 어떤 분이시며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진리를 발견하기에는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성서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에 거슬리던 성서의 대목들을 차근히 풀이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신비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성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겸손하 게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들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당신은 내 곁에 계셨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내 마음을 받아주셨고, 내가 흔들릴 때에도 당신은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세상길로 나아가 방황할 때에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명예와 돈과 결혼 등의 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욕구 때문에 쓰라린 곤경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당신은 은혜가 더해갈수록 당신 아닌 것에 입맛을 다시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당신께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끄신 은혜였 습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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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초월하신다. 더구나 선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니, 도대체 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혹시 악이란 본래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악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악이로구나. 그렇게 보면, 악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거나 무서워하기 때문에 악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다면, 악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혹시 창조의 질료가 악한 것이었을까? 창조하실 때, 본래부터 악한 질료를 변경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더구나 애당초 악한 것이 없도록 막지도 못하셨다는 이야기인가? 그분이 전능하신 분이시라 면 애초에 악을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스스로 지으시지 않은 질료를 빌려야 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설명하기 어렵게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이러한 난제들을 고민하면서 혹시라도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답답하고 불안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은 내 마음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분명한 신앙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날마다 새록새록 깊어져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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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 아래 있는 모든 것은 온전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당신께로부터 와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당신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비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존재는 영원불변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악해지기는 했어도 본래는 선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 근원을 찾아 방황했던 악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악이 실재한다면 그것도 선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좋게 지으셨다는 것과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실체는 하나도 없다는 것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 선합니다.
당신에게는 악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은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부분과는 서로 조화되어 선이 되고 또한 그 자체로 선입니다. '이런 것은 차 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리고 상위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보다 더 선한 것이지만,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 상위의 존재가 홀로 있는 것보다 훨씬 선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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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정원을 산책했다고 합니다. 둘씩 짝을 지어 다른 길을 가던 중, 다른 길로 간 두 사람이 몇 사람의 수도사들이 모여 사는 작은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한 책 한 권을 보고 감탄 하여 읽다가 변화를 겪었다고 합니다.
서로 말하기를, '고위직 공무원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노력한들 얼마나 이룰 수 있을까? 그러나 주의 진리 앞에서는 순전한 마음만 가지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은가?' 하면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때 다른 길에서 돌아온 폰티키아누스와 동료가 궁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그들은 수도사들과 함께 남기로 결심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남지 않으려거든 방해나 하지 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의 약혼녀들도 당신께 헌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폰티키아누스의 말을 듣는 동안 당신은 내 자신을 성찰하게 하셨습니다. 추하고 일그러진 내 모습에 너무나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내 죄를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폰티키아누스의 동료들이 헌신한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은 뜨거워졌고 죄인 된 내 모습이 역겨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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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남편을 그의 지상 생활의 말년에 드디어 당신께 인도했습니다. 어머니는 또한 당신의 성직자들을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한 남편의 아내였고 두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으며, 집안을 신앙으로 이끌었으며 선한 일에 열심이었고, 자녀들이 주께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영적 해산의 고통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어머니가 당신 품에 잠드시기전, 내 친구들은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섬겼고 어머니도 내 친구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우리가 오스티아의 티베리나 강변에 머물고 있을 때,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에 기대어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를 기다리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나는 진리이신 당신 앞에서, 지나간 일들은 잊어버리고 이제껏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는 성자들의 영생이란 어떤 것일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장차 얻게 될 그 생명의 샘물을 목말라하면서 그 깊은 뜻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깊어져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육체적 감각의 쾌락은 제 아무리 좋고 또한 지상의 빛으로 빛이 난다고해도 하늘의 행복에 비하면 감히 그 이름값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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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으로 누웠습니다. 어머니는 임종 시에 이렇게 말했습니 다. '내 육신이 어디에 묻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어머니 나이 쉰여섯, 내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렇게도 신실하고 경건한 저 영혼은 육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마음에 슬픔이 밀려왔으나 울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장례를 슬퍼하는 것은 죽는 이가 불쌍하거나 영원히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어머니의 선하고 거짓 없는 믿음이 어머니의 구원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마음 아파했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행복 속에 지냈던 시간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장례 후 나는 어머니의 경건과 사랑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우는 것은 슬픔의 눈물과는 다릅니다. 아담으로 인해 죽는 모든 영혼을 생각하며 흘리는 경건과 두려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평화로이 쉬게 하소서.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제단에서 어머니의 이름, 모니카를 기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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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나의 영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바다와 산을 보려고 여행을 떠나기는 해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 기억 속에 있는 엄청난 자료들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들어온 인상일 뿐, 지각하는 대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기억의 무한한 창고에는 이런 것들뿐 아니라 배움에서 얻은 지식들이 더 깊숙한 내면의 장소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문학이나 논리학이나 수사학의 지식들은 고스란히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들은 감각을 통해 인상만을 남기는 소리나 향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각적 인상들은 기억의 은밀한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에 따라 떠올려지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아, 나는 말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의 인상은 지니고 있지만 소리는 바람 속에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경우에는 소리 그 자체를 어떤 과정을 통해 인식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이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것 이라기보다 이미 내 속에 있던 것 아닌가? 내가 배우기 전에 이미 내 속에 있었지만 기억 안에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감각을 통하여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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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몸 된 교회에 연약한 지체의 하나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향기에 도취하는 것은 굳이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도 스스로 기만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는 내 속의 능력이 어떤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오기 때문에 잠시라도 안도하거나 유혹을 이겼다고 자만할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당신께서 베푸시는 은혜뿐입니다. 그리고 귀를 통해 다가오는 쾌락도 있었지만, 이것도 주께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노랫소리는 감미로운 것이지만 적절하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말씀들이 노래를 통해 더욱 경건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세상 노래를 듣다 보면 마음이 흔들려 감각적 쾌락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는 감성이 이성에 순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성을 앞질러 인도하려 드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무의식 중에 죄를 짓고 나서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엄격하다 보면 찬송까지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처음 신앙을 가지고 교회의 찬송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때를 생각하거나 지금도 찬송의 선율보다 내용 자체에 감동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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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들을 잘라버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은 이러한 유혹들로 가득 차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나는 더 이상 원형극장을 찾아다니며 토끼를 사냥하는 개를 구경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비롯하여 그동안 내가 보았던 모습들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오니, 주께서 나를 깨우쳐주시고 내 약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만 바라보게 하소서.
도마뱀이 파리를 잡아먹는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이 생태계의 조화들을 탐구하는 것도 당신께 영광을 돌려야 마 땅한 결론이건만, 그 처음에는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을 보면 내게 당신의 은혜가 더 많이 필요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허망한 생각이 끼어들면 기도에 방해가 되오니 도대체 이러한 헛된 생각들을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으니 당신의 은혜만이 소망입니다. 당신은 내 죄를 모두 용서하셨고 내 생명을 건지셨으며 긍휼로 나를 받아주셨고 행복으로 내 욕구를 채우셨습니다. 나는 무거운 세상의 멍에를 대신하여 쉽고 가벼운 당신의 멍에를 메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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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는 아직도 또 다른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구조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존경과 명예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진정한 행복을 대신하려는 것은 거짓된 삶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행복해야 마땅하건만 당신을 대신하여 존경과 명예를 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의 연약한 양들일뿐입니다. 당신만이 존경과 명예를 받으셔야 합니다. 누군가 명예를 얻는다면 오직 당신으로 인하여 얻게하소서. 아무리 존경받아도 당신을 멀리한 자는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주여, 날마다 끊임없이 유혹이 밀려옵니다. 눈을 통해오는 육체적 쾌락의 유혹과 허망한 호기심에서 오는 유혹을 이겨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 명예욕이 우리를 흔들리게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 즐거워지고 나를 비난할 때는 즐겁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칭송할 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주여, 혹시 내가 아직도 나 자신을 속이고 당신의 면전에서 내 혀와 마음으로 진실 아닌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여, 이런 어리석음을 멀리하게 하소서. 내 말솜씨가 죄인의 기름이 되어 내 머리에 윤기나게 바르는 일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말솜씨를 자랑하거나 그것으로 명예를 누리려는 것은 스스로 자랑하며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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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은 과거가 된 기억에서 오는 것을 현재에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며 그것이 실행되어야 비로소 미래의 행동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이미 미래가 아닌 현재일 것입니다.
이제 내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미래도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시간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이렇게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 관습에서 온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시간을 잰다고 합니다. 더 길거나 짧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 애타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 소원을 닫지 마시고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언젠가 어떤 학자가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을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물체의 운동이 곧 시간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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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 영혼아, 끈기를 가지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라. 목소리를 놓고 보자. 소리가 울리고 지나간 후 침묵이 찾아온다. 소리는 이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잴 수도 없다. 다만 현재라는 것은 아무 길이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지만 일정한 길이를 가진 연장이기 때문에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가 있었고 지나갔다는 것을 잰다는 것은 결국 이미 지나가서 없어진 것을 재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남은 무엇을 재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영혼아, 결국 나는 내 안에서 시간을 재는 것이었다. 영혼아, 네 안에서 시간을 재노라. 지나간 것들이 남겨둔 인상을 현재처럼 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기다리고, 직관하고 기억한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지만 미래에 대한 기다림은 마음에 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지만 과거의 기억이 마음에 있지 않은가? 현재는 또한 순간적으로 흘러가 버린다. 예를 들어 시를 한 수 읽는 동안 이미 읽은 것은 기억하고 아직 읽지 않은 것은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기다림이 짧아지면 기억이 길어지고 기다림이 사라지면 행동은 기억 속에 간직된다. 인간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위는 삶의 한 토막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생활은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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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당신 한 분만을 따르라 하시는 것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의 일들과 현재의 지나가는 일들에 마음을 분주하게 빼앗기지 말고, 오직 우리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여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라는 뜻임을 말입니다. 이제 나는 아무런 헷갈림도 없이 오직 당신 만을 향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지금 나는 시간에 얽매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영원하시오니 뒤죽박죽 혼돈되고 뒤틀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당신의 사랑 안에 당신과 하나가 되기 전까지 산산조각이 나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이제 나는 굳세게 서서 당신의 진리 안에 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등 이것저것 헷갈리게 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의 창조주이시며 그 어떤 피조물도 영원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과거와 미래를 아시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하게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엉뚱한 질문으로 헛된 일을 하는 자들에게도 이 신비를 깨닫든지 혹은 깨닫지 못하든지 간에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은 한없이 높으시며 겸손을 통해서만 당신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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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짠물로 가득 찬 바다와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단 샘을 열어주십니다. 당신의 명을 따라 자비를 행하고 이웃을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하는 자들은 주께서 은혜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새벽의 여명이 빛나게 하시며 당신의 성서가 말하는 궁창의 빛처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옛것은 지나고 새것이 되었으며 우리의 구원이 가까우며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경륜을 따라 계절마다 하늘의 복을 땅 위에 내려 주시며 궁창과 같은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우리에게 스스로 성결케하라고 하시며 궁창에 떠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자랑할 때, 천상에 보화를 쌓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처럼, 당신은 우리에게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서, 주님을 따르며 궁창의 빛을 구석구석 비추라고 하십니다.
또한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하시고 길짐승과 날짐승을 내어 번성하라 하신 것은, 세상의 유혹에서 당신의 물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성서의 말씀을 온 세상에 달리며 날아가며 두루 전하라 하신 뜻입니다. 말하자면, 짠 바닷물에서 구별되어 뭍이 된 곳에서 길짐승과 날짐승처럼 세상의 유혹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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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들 안에서 당신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좋다고 보는 것은 당신께서도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당신으로 인해 즐거울 때 당신께서도 즐거워하시며, 우리가 성령의 영적 감동으로 사랑하는 것을 당신께서도 사랑하십니다. 좋은 것도 나쁘다고 하는 사람과 좋은 것을 좋게 보는 사람이 구별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명히 깨닫는 것은 당신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모든 것은 당신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 나는 창조에 관한 해석에서, 물질세계의 상층이든 하층이든 혹은 영적인 창조나 물질적인 창조나 가릴 것 없이 하늘과 땅에 관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궁창이라는 것은 영적인 물과 형체 있는 물 사이에 있는 우주의 처음 모습이거나 우리가 하늘이라고 말하는 기체의 공간일 것입니다. 새들은 하늘과 땅 위에 흐르는 물 사이의 공간을 날아다닙니다. 바다에는 물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고 벌거숭이 땅과 우거진 숲을 볼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은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기준이 되며 자연의 습기에 의해 생물들이 양육되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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