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 동안 거의 한 달 평균 네다섯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에 딱 한 권을 읽게 될 것 같은데, 바로 이 책 중국행 슬로 보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인데, 고작 200쪽 남짓에 일곱 개의 단편인데 읽는데, 3주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이번 달은 책 읽을 여유가 없어진 대신 KTX와 항공편으로 세 번 부산-창원을 다녀왔고, 건강검진도 있었고, 별 보러도 갔었네요.
하여튼 덕분에 이번 달에는 이 책 한 권이 남았습니다. 그 책갈피입니다.
도쿄-그리고 어느 날, 야마노테선 전철 안에서 이 도쿄라는 도시조차 돌연 리얼리티를 잃기 시작한다. 그 풍경은 창밖에서 갑작스레 붕괴하기 시작한다. 나는 차표를 쥐고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도쿄의 거리에 나의 중국이 재처럼 쏟아져내려 이 거리를 결정적으로 침식해간다. 그것은 차차 사라져 간다. 그렇다. 여기는 나의 장소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언어는 사라지고 우리가 품었던 꿈은 언젠가 뿌옇게 지워진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그 따분한 소년 시절이 인생 어딘가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듯이.
오류………… 오류라는 것은 그 중국인 여대생이 말했듯이(혹은 정신분석의가 말하듯이) 결국 역설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류야말로 나 자신이며 당신 자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옛날 충실한 외야수로서의 자그마한 자부심을 트렁크 바닥에 챙겨 넣고 항구의 돌계단에 앉아 텅빈 수평선 위로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중국행 슬로보트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중국 거리의 빛나는 지붕을 그리워하고 그 푸른 초원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니 상실과 붕괴 뒤에 무엇이 오든 나는 이제 그것을 두려위하지 않으리라. 마치 4번 타자가 몸쪽 변화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열렬한 혁명가가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처럼. 만일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친구여, 중국은 너무도 멀다.
46 중국행 슬로보트
생각이 들어요. 뭐든 좋아요. 불완전하든 어떻든 그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공기의 떨림입니다.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공기의 떨림이에요. 그것이 그들의 양식이죠.
후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무척 딱한 영화를 봤습니다. 아무리 농담을 던져도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코미디언 이야기예요. 아시겠어요? 누구 하나 웃지 않는다고요.
지금 이렇게 마이크에 대고 주절거리고 있으려니 자꾸 그 영화가 떠오르는군요.
참 신기한 일이죠.
똑같은 대사라도 어떤 사람이 하면 웃겨 죽겠는데 다른 사람이 하면 전혀 웃기지 않아요. 신기하지 않나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그 차이라는 건 아무래도 타고나는게 아닌가 싶더군요. 왜 있잖아요. 세반고리관 끝이 남들보다 약간 더 구부러졌다든가 하는 식으로. 만일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따금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웃긴 생각을 해내고 혼자 배를 잡고 웃는데 막상 입 밖에 내어 누군가에게 들려주면 전혀, 조금도 재미있지가 않아요. 마치 이집트의 모래 사내가 된 듯한 기분이죠. 게다가 무엇보다…………
이집트의 모래 사내라고. 알아요?
122 캥거루 통신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마치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 몇 마리를 쌓아 올린 것 같다. 미적지근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걸 상품이랍시고 내놓다니-상품 말이다-나는 때때로 엄청나게 창피해진다. 정말로 얼굴이 붉어지는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면 온 세상이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파악한다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으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 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잘되면 좋겠네요. 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잘될 리가 없다. 잘되었던 적도 없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141
대충 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대충 할 수 있고, 제대로 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제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했다고 그만큼 평가받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꽤 제대로 한다. 이건 성격의 문제다. 그리고 아마도 자존심의 문제다.
열두 시에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자 그녀는 나를 부엌으로 불러 샌드위치를 챙겨주었다.
넓지는 않지만 말끔하고 청결한 부엌이었다. 불필요한 장식이 하나도 없었다. 심플하고 기능적인 부엌이었다. 전자제품은 하나같이 구형이었다. 그리운 기분이 든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어디선가 시대가 멈춰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 거대한 냉장고가 웅웅거리는 소리 외에 사방은 아주 고요했다. 그릇에도 숟가락에도 그림자 같은 고요함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맥주를 권했지만 나는 작업중이라며 거절했다. 그녀는 대신 오렌지주스를 주었다. 맥주는 그녀가 직접 마셨다. 테이블 위에는 절반 남은 화이트호스 위스키병도 있었다. 싱크대 밑에는 여러 종류의 빈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햄과 양상추와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는 보기보다 훨씬 맛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157
"미안" 그녀가 말했다. "그 얘기 좀 더 듣고 싶은데."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하지만 그건 당신 문제예요. 그 얘기는 나보다 당신 자신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담배가 1센티미터쯤 타들어갈 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재가 소리 없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당신에게는 어떤 것이・・・・・・ 그러니까 어느 정도나 보여?" 여자가 말했다.
"보이는 건 전혀 없어요." 나는 말했다. "영감 같은 뜻으로 말한 거라면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느낄 뿐이죠. 어둠 속에서 뭔가를 걷어차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거기에 뭔가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색깔인지까지는 모르죠."
"하지만 아까 프로라고 했잖아."
"글을 쓰고 있어요. 인터뷰 기사나 르포 같은거. 그리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을 관찰하는게 내 일이죠."
"그렇구나." 그녀는 말했다. "그런 걸로 해두고, 이제 그만하죠. 비도 그친 것 같고 비법도 다 털어놓았고, 맥주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하지만 왜 정원이 튀어나왔지?" 그녀는 말했다.
"그거 말고도 얼마든지 떠오르는 게 있었을 거야. 그렇잖아? 왜 정원이었지?"
땅속 그녀의 작은 개 198
"아이참." 찰리가 말리고 나섰다. "당신은 정말 생각이 모자란다니까." 그녀는 내게 말했다.
"그렇고말고." 양 박사가 말했다.
나는 불끈해서 권총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찰리가 급히 가로막았다. 그리고 내 복사뼈를 힘껏 걷어차며 권총을 낚아챘다.
"당신도 문제야." 찰리는 양 박사를 향해 말했다. "왜 양사나이의 귀를 돌려주지 않는 거야?"
"귀는 절대로 못 돌려줘. 양사나이는 나의 적이야. 다음에 마주치면 다른 쪽 귀도 뜯어올 거야." 양 박사가 말했다. "왜 그렇게 양 사나이를 미워하죠? 착한 사람이잖아요?" 나는 말했다.
"이유 따위는 없어. 그냥 그자들이 싫어. 그렇게 한심한 꼴을 하고 희희낙락 사는 걸 보면 참으로 얄밉단 말이야."
"소망증오야." 찰리가 말했다.
"응?" 양 박사가 말했다.
"뭐?" 내가 말했다.
248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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