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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독서정리

스물 두 번째 책 : 중력과 은총 - 시몬 베유

by 마파람94 2022. 7. 8.



프랑스 출신 여자 철학자 시몬 베유에 관한 글을 작년에 처음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중에서 그녀가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때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네 공공도서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눈에 띈 그녀의 책을 그냥 지나 칠 수 없는 것은 어떤 힘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생각입니다. 어제 이 책을 다 읽었고, 젊은 그녀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고뇌의 생각들, 어려운 이야기, 그리고 많은 문장에서 내포된 뜻을 끄집어내는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약 오분의 일만 이해되었다고 하면 '네가 그렇게 철학적 사고력이 깊어?' 라는 반문을 하게 끔 합니다.

책갈피를 옮겨와 보겠습니다.




집착을 버리기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있으려면 그저 불행을 겪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무런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위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위안도 나타나면 안 된다. 그럴 때 비로소 형용할 길 없는 위안이 위로부터 내려온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진 빚을 면해 줄 것. 미래의 보상을 하지 않으면서 과거를 받아들일 것. 시간을 순간에 정지시 이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신성을 벗어던졌다." 이 세상을 벗어던질 것. 본성을 지닐 것.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차지하는 한 점

아질 것. 무릎에 이를 때까지.

이 세상의 상상의 왕국을 벗어던질 것. 절대적 고독. 비로소 세상의 진리를 갖게 된다.



미래를 향하지 말아야 한다.

정결케 하는 한 가지 방법. 신을 향해 기도할 것. 다른 사람들 이 모르게 은밀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할 것.

죽은 이들에 대한 경건함.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할 것.

타인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 그것은 바로 빈자리가 주는 고통이며 균형이 무너지는 고통이다. 이제 대상이 없는 노력을 해야 하며 따라서 보상 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상력이 그것을 채워 버리면 인간은 격하된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자기 자신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대상과 보상은 미래에 있다. 미래를 빼앗기기, 빈자리, 균형 상실. 그렇기 때문에 "철학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죽음과도 같다".

고통을 겪고 또 그로 인해 탈진하면 이 상태가 끝없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끝없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응시할 때 그로부터 벗어나 영원에 이르게 된다.ㅋㅋ

40 중력과 은총


겪게 되는 상황들 모두가 마찬가지이며, 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는 결국 고통을 달래는 위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행복은 위안이나 고통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지팡이 끝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원래의 촉각과 다르다. 참된 행복 역시 별도의 다른 감각으로 지각되며, 그 감각은 몸과 마음을 바치는 수련을 통하여 주의력을 전환함으로써 형성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성서에 기록된 것은 그 때문이다. 보상은 필요 없다. 바로 감각 능력 안의 빈자리가 우리를 그 감각 능력 너머로 이끌어 간다.

베드로의 부인. 그리스도에게 "나는 절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말,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다. 끝까지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원을 은총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베드로는 선택된 자였기에 그것이 부인임을 모든 이가, 그리고 베드로 자신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신 있게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텅빈 상태에서의 충성이었다.

46 중력과 은총




'나'이게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비참함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신이 (한 인격으로서의) 이게 하는 것은 바로 우주의 비참함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덕을 갖추려 했던 사람들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 속에는 스스로를 높일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도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나안에 있는 귀중한 것은 언제나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온다. 그러나 선물처럼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갱신해야 하는 대부금과 같다. 나 안에 있는 것은 전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온 선물 중에서 어떤 것을 내 것으로 취한다 해도 그 역시 곧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완전한 기쁨은 기쁨이라는 감정마저도 배제한다. 대상으로 가득 채워진 영혼 속에는 나'라고 말하기 위한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기쁨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기쁨을 추구하는 자극이 없는 것이다.

56 중력과 은총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면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서도 똑같은 충만함을 느껴야 한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감각에까지 확대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을 통할 수밖에 없다.

신 안에서의 기쁨.
신 안에는 완전하고 무한한 기쁨이 실제로 존재한다. 내가 참여한다고 해서 그 기쁨에 무언가가 더해지지 않으며, 또 참여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내가 참여해야 하는지 않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신 안에서의 기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불멸성을 믿는 것은 해로운 일이다. 우리는 절대 우리의 영혼이 비육체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사실상 삶이 이어진다는 믿음이며, 따라서 죽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탈창조 67


석류 열매의 알.
우리가 신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들 내부에서 이루어진 약속에 동의하는 것이다.

훌륭한 행동으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만을 할 것. 주의력을 잘 기울여서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의 양을 계속 늘려 갈 것.

신이 나를 밀어내어 어쩔 수 없이 밀려난 곳. 비록 선을 향해서라 해도 그곳을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말 것. 행동, 말, 그리고 생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신이 나를 밀어낸다면 어디라도, 극한까지라도 나아갈 각오를 할 것(십자가...). 최대한의 각오를 한다는 것은 신이 나를 밀어내기를 어디로 밀어내는지도 모른 채 기원하는 것이다.

만일 나의 영원한 구원이 어떤 물체의 형상을 띠고서 이 탁자 위에 있고 또 손만 내밀면 붙잡을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고서는 손을 내밀지 말 것.

78 중력과 은총


입혀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을 만나기 위해 함께 러시아 대초원을 횡단하던 성 니콜라우스와 성 카시아누스가 진흙에 빠진 마차 바퀴를 끌어내던 어느 농부를 도와주느라 약속된 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차라리 부끄러워하면서, 또 후회하면서까지 행한 선행은 순수하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선행은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다. 선은 초월적이다. 신이 바로 선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 주여, 그것이 언제입니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의 자아가 사라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가 이웃을 돕게 되기를! 불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 고 주인이 보낸 노예가 될 것. 주인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노예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아버지를 위하여 고초를 당한 것이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하여 인간들에 의하여 고초를 당한 것이다.

80 중력과 은총



행동은 저울의 눈금을 가리키는 바늘이다. 바늘을 건드려서는 안 되며, 그 추를 건드려야 한다. 사람들의 의견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늘을 건드리면 혼란이나 고통이 온다.

어리석은 처녀들(15)! 이 이야기는 무언가 선택을 해야 할 때 이미 어떤 방향으로든 선택이 이루어져 있음을 말해 준다. 악덕과 미덕 사이에 놓인 헤라클레스의 이야기(16)보다 훨씬 더 진실되다.

모든 육체적인 충동으로부터 차단되고 또 초자연의 빛이 전혀 없는 본성. 그러한 본성이 초자연의 빛이 존재한다면 요구하게 될 것에 부합되는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충만한 순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핵심이다.

15) 성서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을 기다리며 등잔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명의 처녀를 말한다. 16) 그리스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쾌락과 덕을 상징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덕을 상징하는 여인을 선택한다.

필여과 복종 87


할 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저속할 수도 있고 훌륭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들이 존재의 어느 곳으로부 터 얼마만큼의 깊이에서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 말들은 신기하 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곳에 가 닿는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이 분별력만 있다면 그 말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가려낼 수 있다.

선행이 허용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보다도 더 큰 굴욕, 더 은밀하고 또 거부할 수 없는 종속의 시련이 되기 때문이다. 고마움을 표하는 행위가 허용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다. 누군가 행한선 행의 은혜를 입게 되면 결국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에 대한 종속이어야지 특정한 인간에 대한 종속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베풀 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들이 고마워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 도움이 순수한 것이라면 받은 사람은 그저 서로 간의 상호성이라는 점에서만 고마워하면 된다.

순수하게 고마워하기 위해서는 (우정의 경우만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나를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연민이나 동정 혹은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본래 기질이 그러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며, 정의가 명하는 것을 행하려는 욕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 모두가 나 같은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116 중력과 은총



폭력을 쓸 때처럼 동생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힘을 사용하라. 그대가 근육에 포함된 에너지와 동등한 에너지(가장 물질적인 의미에서 가능한 효용성)를 가진 빛을 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비폭력적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 그것은 또한 상대방에 달려 있다.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
모든 인간과 인간 집단이 스스로 이 우주의 합법적인 지배자이며 주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지상의 인간이 우주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론 그것이 가능하다면- 각자 자신의 육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생겨난 오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자기의 토지를 소유한 농부의 관계는 동쥐앙과 한 여자의 행복한 남편의 관계와 같다.

전쟁. 자기 자신의 내부에 생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지켜 갈 것.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남을 죽이지 말 것. 다른 사람의 생명이 자기 자신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죽으면 둘 다 죽게 되어 있다면, 그래도 상대가 죽기를 바랄 수 있을까? 육체와 온 영혼이 생을 갈망하면서도 진정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는 죽일 권리가 있다.

폭력 147



1이라는 가장 작은 수. "1은 유일한 지혜이다. 1은 무한이다. 우리는 수가 커질수록 무한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 지만 실제는 멀어진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춰야 한다. 1이 신이라면 무한대(∞)는 악마이다.

신의 지혜의 비밀은 쾌락이 아니라 인간의 비참함 속에 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곧 인공의 낙원이나 취기, 자기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추구를 통해 인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이 결국 헛된 추구임을 체험할 뿐이다. 우리의 한계와 비참함을 응시하는 것만이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 줄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 내부의 상승 운동은 그전의 하강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헛되다기보다 차라리 나쁘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몸. 시간과 공간 속의 한 점으로 축소된 몸이 바로 정의의 저울이다.

저울과 지렛대 159

그리스도가 그저 신일뿐이라는데 화가 나서 죽인 것이다.

신이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고통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쳐 주려는 고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내가 중요한 존재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사랑할 것. 영혼의 장막 저편에 있는 부분으로 사랑할 것. 영혼에서 우 리의 의식이 지각할 수 있는 부분은 결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설사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다.

신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불행을 내린다. 모두에게 똑같이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추는 것과 같다. 신이 그리스도만을 위해 십자가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응답하는 순수하게 초자연적인 은총을 통해서, 즉 한 개인이 그러한 개인이기를 그치는 바로 그 상태에서, 신은 있는 그대로의 개별적인 인간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그 어떤 사건도신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은총만이 신의 은혜일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는 부재한다 187


영성체는 선한 자들에게는 복이 되고 악한 자들에게는 해가 된다. 그렇게 해서 영벌에 처해진 영혼들은 천국에 가 있지만, 그들에게 천국은 지옥이다.

"왜?"라는 고통의 외침. 《일리아스> 전편에 울려 퍼지고 있다. 고통의 이유를 밝히고 설명하면 그 고통이 완화된다. 고통의 「이유가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고통의 가장 훌륭한 가치이다. 죄 없는 신이 행하는 창조에 악이 용인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닥쳐오는 고통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188 중력과 은총


지성의 영역에서 겸손의 덕은 바로 주의력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서 이러저러한 개별적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겸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피조물로서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참된 겸손에서는 지성이 큰 역할을 한다. 보편적인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흐의 곡이나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이 들려오면 인간의 영혼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 선율을 이해하기 위해 능력을 총동원하여 긴장하고 숨을 죽인다. 인간의 지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음악에서 지성은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음악을 자양분 삼아 자라날 수 있다.

신앙이란 이런 류의 받아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214 중력과 은종

읽기

타자. 인간들 각자(자기 자신의 형상)가 하나의 감옥이라고 생각할 것. 한 죄인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주위에 우주전 체가 자리 잡은 감옥.

엘렉트라 아버지가 강력한 인물이지만,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오직 남동생에게만 희망을 걸고 있다가 한 젊은이로부터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정녕 비통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바로 그 젊은이가 동생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녀는 그가 정원사인 줄 알았다." 모르는 사람이 동생임을 알아보기. 우주 속에서 신을 알아보기.

222 중력과 은총



정의. 누군가가 함께 있을 때(혹은 누군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그 타인에게서 읽어 내는 것이 실제의 그와 다르다는 것을 언제 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할 것. 혹은 상대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읽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읽어 낼 것 인간은 각기 다르게 읽혀지기 위하여 침묵 속에서 외친다.

나는 타인을 읽지만, 타인도 나를 읽는다. 읽기들의 충돌. 어떤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읽는 대로 자기 자신을 읽도록 강요하기 (노예 상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읽은 대로 읽도록 강요하기(정복). 기계론, 대부분의 경우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끼리의 대화이다.

사랑이나 불의는 여러 가지 읽기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의할 수 없다. 착한 도둑의 기적은 그가 신을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 속에서 신을 알아보았다는 데 있다. 닭이 울기 전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서 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22)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도둑 중 하나.

읽기 223


생체 리듬을 세계의 리듬에 결합시킬 것. 계속해서 이러한 결 합을 느낄 것. 그리고 물질의 교환과 인간을 이 세상 안에 젖어들게 하는 그 영속적 교환을 느낄 것.

한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어떤 이유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들. 의지가 지배하는 운동으로서의 호흡, 인식으로서의 공간. 눈과 고막을 다치고 지하 감옥에 갇혀 있게 된다 하더라도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공간을 인식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각하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마저도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또한 이웃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도 괴롭히지 않는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곧 우주를 생각하는 한 가지의 방식을 우주의 일부가 아닌, 우주를 생각하는 또 하나의 다른 방식과 연결해서 각각의 인간과 그러한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그럴 힘이 있다. 내가 세계가 존재

우주의 의미 233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원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다시 말하면 복종 대신 헌신이라고 생각하기. 심지어 해야 하는 것 이상을 해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면 고통이 줄어든다. 만일 벌을 주면서 시켰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육체적인 고통을 어린애들이 놀 때에는 웃으면서 잘 참아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예속의 굴종은 그렇게 우회로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킨다. 이러한 헌신은 허위에 근거한다. 인간이 헌신하는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도 타당한 것이 없다. (이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가 희생과 헌신이라는 관념에 근거하는 것과 달리 가톨릭의 복종 원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억압받고 있다는 참을 수 없는 생각을 헌신하고 있다는 환상으로가 아니라 필연성이라는 관념으로 대신하기.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반면 강요된 억압에 대한 반항은 즉시 분명하고 효과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반대 상태로 변하게 된다. 지독한 무력감이 생겨나 우리를 비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억압받는 자의 반항이 무력하면 억압하는 사람은 바로 그 속에 자신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신병의 이야기로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

258 중력과 은총

균형이란 한 질서가 또 다른 질서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이며. 이때 또 다른 질서는 본래의 질서를 초월하면서 또한 무한히 작 은 형태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왕국은 완전한 공동체의 나라이다. 사회 속에서 각 개인은 무한히 작지만 사회적인 것을 초월한 무한히 큰 질서를 나타낸다.

나라를 향한 국민의 사랑, 군주를 향한 신하의 사랑은 초자연적이어야 한다.

오직 균형만이 힘을 파괴하고 없애 버릴 수 있다. 사회의 질서 란 결국 여러 가지 힘의 균형일 뿐이다.

은총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의인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사회는 여러 가지의 불의가 끊임없이 동요하며 서로를 처벌하게끔 조직되어야 한다.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균형뿐이다.

사회의 조화 279



노동의 신비

인간 조건의 비밀은 바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힘들 사이에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균형은 오직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재창조하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언제나 스스로의 삶을 재창조한다는데 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겪는 것까지도 다시 만들어 내기.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적인 자기 존재를 산출한다. 그리고 학문을 통하여 여러 가지 상징을 동원하여 우주를 재창조하며, 예술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재창조한다. 이 세 가지 각각을 나머지 둘과 관련시키지 않고 별도로 보게 되면 어딘지 초라하고 공허하며 헛 되다는 것에 주의할 것.

노동과 신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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