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통해 한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으로써 강자의 조건을 알게 됩니다. 짜임새 있고, 술술 읽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밑줄 가져와 보겠습니다.
이러한 약탈과 폭력은 로마를 전쟁터로 끌어들인다는 목적 외에 좀 더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휘하의 5만 병력을 당장 먹이고 재워야 한다는 문제였다. 밀림지대인 프랑스 내륙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온 한니발로서는 후방으로 부터의 병참지원은 꿈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도시도 한니발에게 성문을 열지 않는다면 강제로 빼앗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를 돌아다니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자 로마도 곧 곤경에 처하기 시작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로마연합은 로마를 맹주로 하는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맹의 맹주는 당연히 동맹국들을 보호하는 의무를 진다. 맹주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니까 동맹국들도 맹주를 따르는 것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면 동맹국들이 적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맹주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짓은 없다. 결국 로마에서도 적극전파가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이듬해인 기원전 216년의 전쟁을 위해 곧 대규모 군단이 편성되기 시작했다. 상대가 한니발인 만큼 로마도 이번에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카드를 모조리 쓸 각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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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스페인에 있던 한니발의 아우와 다른 카르타고 장군을 격파합니다. 한니발이 간나이에서 펼쳤던 전략과 거의 비슷했지요. 자신의 군대 중심부를 약화시키고 양 날개 측을 강화시켜 적군을 포위합니다. 그의 군대는 점점 강해져서 결국 한니발의 부대보다 뛰어나게 됩니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거기서도 카르타고 군을 무찌릅니다. 한 번은 카르타고 군 기지를 기습하고 또 다음엔 측면에서 공격을 가합니다.
또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그토록 강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항상 기마대로 하여금 보병대를 지원하도록 배치했던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과거 한니발이 이탈리아인들을 설득했던 것처럼 누미디아인과 협상을 하고 자신과 손을 잡도록 설득합니다. 적으로부터 동맹군을 빼앗아 자신과 손을 잡도록 한 후 기마대를 확보하고자 했던거지요. 이는 곧 그가 한니발과 대적할 때 사상 처음으로 로마군이 한니발보다 더 많고 강력한 기마대를 보유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결국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모두 습득하게 된 거지요. 자마의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싸웠던 방식 그대로 싸우게 되는데 한니발은 이미 모든 유리한 입지를 잃었기 때문에 대응할 방법이 없었지요. 이 전투는 힘겨운 전투가 되지만 스키피오에게 더 강력한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한니발을 이기게 됩니다. "30
지휘관의 전술적 능력이 동일하다면 결국 병사들의 능력과 숫자가 전투를 결정지을 수 밖에 없다. 자마에서 한니발이 마주친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스키피오는 교묘한 외교전을 통해 누미디아를 우군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이 말은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과 함께 싸웠던 정예 누미디아 기병이 이젠 로마 편이 되었다는 뜻이다. 한 니발은 결국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0 에이드리안 골드워시 (로마 전쟁사> 저자) 인터뷰 중에서
76 |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PART I·로마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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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계, 아일랜드계, 독일계, 중국계, 한국계 미국인들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공통의 정체성이란 미국 시 민권을 가진 미국인이라는 것뿐이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후대에 사실상의 세계제국이 된 다음에는 더 대단해지지만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3세기를 기준으로 봐도 로마 연합에는 다양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인들과 유사한 라틴계 도시국가들도 있었고 문화적 선진 민족이었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도 로마 연합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국가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당시로서는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갈리아인들에게조차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곤 했다.
간혹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로마는 도대체 왜 싸운 것인가? 기껏 싸워서 이겨놓고 자기네랑 동등한 시민으로 받아들인다면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뭐하러 싸운단 말인가?" 그런데 이 질문에는 질문 자체에 이미 순혈주의의 전제가 숨어있다. "나와 피를 나눈 나의 형제들이 남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승리한 보람이 있다"라는 전제이다. 하지만 이건 당장의 우월감만을 중시하는 매우 협소한 생각일 뿐이다.
중요한 건 내가 남들 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상대적 우월감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면 남들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이다. 이건 결코 도덕적인 의미에서 사해동포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입장에서 나와 나의 공동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나와 나의 공동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에게도 유리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실용적인 선택이다.
PART I·로마 시민권 157
더불어 로마도 본격적인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결국 로마의 관용이었다. 적극적으로 패배자들에게 시민권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동료로 받아들인 로마의 역사가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민권 개방 노선은 로마가 제국의 길을 걸음에 따라 더욱 확대되어 갔다. 라틴인들과 그리스인에 더해 갈리아인들이 로마 시민이 되고, 북아프리카 원 주민들이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스페인인들이 로마 황제가 되었다.
서기 193년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는데 그는 최초의 북아프리카 출신 황제였다. 다시 말해서 한니발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심지어 라틴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카르타고어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는 자신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국의 후손조차 황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 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서기 48년 원로원에서 갈리아 코마타" 인들을 원로원에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한 연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학자 황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던 이 황제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개방적인 시민권 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32 "장발의 갈리아"라는 뜻이다. 유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통해 정복한 지역으로 지 금의 벨기에, 프랑스 중부 및 독일의 일부 지역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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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이렇게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판단력, 자신의 의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과 혈연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때론 종교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 다수 인간이 가지는 한계인 셈인데 테무진은 어린 시절의 고난으로부터 오히려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한 셈이다. 이렇게 건강한 개방성을 자신이 거느린 무리의 원칙으로 삼게 되자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패배한 부족을 대하는 방식도 남들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1202년 테무진은 타타르족에 대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타타르족은 일찍부터 초원에 진출해서 두각을 나타낸 부족으로 초원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중국 북부 금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따라서 초원의 부족들 중 가장 부유한 부족이었고 부족원의 숫자도 많아서 강력한 부족이기도 했다.
테무진으로서는 초원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더해 타타르족은 테무진과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부족이기도 했다.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살해한 것이 타타르족이었다. 타타르족과의 전쟁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복수전이기도 했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성장하고 있던 테무진에게 타타르족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타타르족은 순식간에 패배했고 대부분의 전사들은 살해되었다. 지금까지의 초원의 관행에 따른다면 타타르족은 모두 노예가 되거나 모든 가축과 재산을 빼앗긴 채 초원에 버려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테무진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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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정치적 퍼포먼스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형제로 대우하겠다는 제스처를 자신이 앞장서서 실천함으로써 일종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양자가 아닌 어머니의 양자로 삼은 것은 제국의 상속권과 관련된 불필요한 분쟁의 여지를 제거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새로운 부족을 정복할 때마다 한 명씩 테무진의 형제가 생겼고 몽골족은 더욱 커졌다. 처음엔 우정으로 뭉친 소수의 부랑자 집단이었던 몽골족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점점 더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해 갔다.
"당시엔 몽골족, 타타르족, 나이만족, 콩기라트족, 메르키트족, 케레이 트족 등의 다양한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은 이 다양한 부족들을 통합시켰습니다. 몽골족은 한 부족의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칭기즈칸 아래 몽골족, 메르키트족, 나이만족, 콩기라트족, 케레이트족 등 다양한 부족들이 통합되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 통합된 집단의 올바른 명칭은 칭키스즈(칭기즈칸의 부족입니다. 몽골족뿐 아니라 다양 한 부족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65
아버지를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고아소년을 몽골 초원의 강자로 키운 것은 결국 패자를 자신의 동족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관용이었던 셈이다.
65 조지 레인(런던대학교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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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테무진의 곁에 남아있던 부하들은 모두 19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19명이 서로 다른 부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최악의 순간에 테무진과 운명을 함께한 것은 이번에도 그의 친족들이 아니라 우정과 충성심으로 뭉친 그의 동지들이었다. 테무진과 같은 몽골족 출신은 동생 카사르 뿐이었다. 출신 부족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종교도 모두 달랐다. 이슬람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그리고 테무진과 같이 몽골 전통의 샤마니즘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모자이크를 그려 놓은 것처럼 당시 몽골초원을 축소해 놓은 것이 이 19명의 특징이었다. 이 19명이야말로 이후 테무진이 건설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후 새롭게 등장한 테무진의 부대는 친족집단이나 부족과는 완전히 무관한 부대가 되었다. 애초에 존재했던 친족 위주의 구성을 완전히 해체해서 10진법에 근거한 혁신적인 군사조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테무진은 우선 병사들을 '아르반'이라고 부르는 10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로 재편성해서 분대원들끼리 형제가 되도록 했다.
마치 테무진 자신이 친족이 아닌 동지들과 형제애로 뭉친 것처럼 부하들도 전혀 다른 부족 출신들을 섞어서 형제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형제이므로 함께 살고 함께 싸워야 했다. 분대원 중 한 사람이 포로가 되면 남겨두고 떠날 수 없었다.
10개의 아르반이 모이면 '자군이라 불리우는 100명 단위의 중대가 되었다. 다시 자군 10개가 모이면 1,000명의 부대원을 가지는 '망간' 이 되었으며 망간 10개가 모이면 10,000명의 부대원을 가지는 '투멘' 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투벤을 한자로 표기하면 '만호'가 된다. 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최전선의 부대의 무장에게 내리는 벼슬이 '만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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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할 것인가
동방견문록
당시 알려진 세계 전체를 돌아다녔다는 말을 들었던 이 위대한 여행가의 여정도 '팍스 몽골리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만 여행자가 나온 것은 아니다. 내몽골에 거주하던 기독교도 랍 반 사우마 역시 세계를 여행했다. 옹구트부 출신의 기독교도였던 그는 1275년 경 이스라엘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다. 여행 도중 그는 일칸국의 바그다드에 들렀는데 그때 일칸국을 지배하고 있던 아르칸에게 유럽과의 동맹을 추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이 왕에 내친 걸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선뜻 칸의 부탁을 수락한 반 사우마는 칸의 친서를 휴대한 채 유럽을 향해 떠나 교황 니콜라스 4세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를 만났다. 동아시아 끝에 있던 어느 기독교도가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해 행장을 꾸릴 수 있었던 시대가 바로 13세기 몽골제국의 진면목이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는 15~16세기의 '대항해시대'와 대비해서 '대여행 시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에 콜롬부스와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이 활약 할 수 있었던 것도 '대여행 시대'의 정보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 제국이 인류에게 남긴 것은 단지 엄청난 넓이의 영토를 지배했다는 기억만이 아니었다. 문명의 전달자 몽골제국이 있었기에 유럽은 잠에서 깨어나 근대를 시작할 수 있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도 다른 문명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몽골제국과 함께 13세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사를 만든 힘은 서로 다른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융합했던 몽골제국의 '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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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기술자들이 단 한 사람도 스페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애국심 때문인가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쪽에서 초청한 사람들은 영국 본토에 있는 대포 기술자들이 아니라 독일의 리에주에 넘어와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국땅에서 돈벌이를 위해 대포 기술을 팔아먹고 있던 입장에서 스페인이라고 해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스페인으로 가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악명 높은 스페인의 종교재판 때문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비록 신교도였지만 가톨릭교도에게도 종교적 탄압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종교와 정치는 구분되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달랐다. 스페인 제국은 반드시 가톨릭으로 통일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당시 스페인에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화형과 고문이 횡행했다. 16세기에 대부분의 대표 기술자들은 신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제정신이라면 스페인으로 건너갈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배 건조 기술의 발전을 등한시한데 모자라 대포의 혁신 마저 불가능한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펠리페 2세는 영국에 비해 대포의 무장이 부족하다는 점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적함대의 사령관 메디나 시도니아에게 보내는 지시에서도 영국의 대포를 조심하라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조심해서 대응하기만 하면 충분히 극복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대포 기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좀 심하게 말해서 너희들이 싫으면 말라는 식이었다. 믿고 있는 것이 있어서였다.
PART III - 대영제국의 탄생 | 217
어떤 전술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는 실제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런 영국 해군의 혁신이 오히려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영국 해군에서 보병이 적함에 뛰어드는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포격전에 치중했던 것은 애초에 영국에 믿을 만한 보병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철 대포를 개발한 것도 청동 대포를 만들만한 자원이 부족하고 재정도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스페인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혁신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보병의 위력을 지키기 위해 포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무관심했고 대포의 개발에도 덜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혁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스페인 함대는 레판토 해전의 빛나는 승리이 후 불과 17년 만에 낡은 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낡은 사고를 비웃는 것처럼 혁신의 속도는 항상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스페인의 종교적 불관용이 미친 영향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스페인도 주철 대포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주철대포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주는 공포 때문에 기술자들은 한 사람도 스페인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혈통과 종교의 순수성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기술의 결합이란 양립하기 어려 운 법이다.
결국 칼레 해전은 해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영국이 새롭게 선보인 전술의 효과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다투어 영국식 해전 기술을 받아들였다.
PART 111 • 대영제국의 탄생 | 241
이들의 제안에 따라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금은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81명의 선주들이 공동 출자하는 형태로 마련했다. 이렇게 모인 설립자금이 황금 64톤이었다. 엄청난 돈이었다.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는 스페인, 영국 등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동인도회사에 출자한 81인의 선주 중 반수 이상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또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17인 주주 위원회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그중 8명이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동방무역을 위한 자금은 스페인에서 나온 셈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최초의 근대 기업입니다. 근대 기업이라 함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이 있고, 회사에는 자본투자가 이뤄졌으며, 투자금이 회수되어 전부 주주들에게 배당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구적으로 존속하는 기업으로 초기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단기간 동안만 동업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 설립되면서 10년 운영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간이 만료되면 벌어들인 수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해체 하는 것이 초기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진출을 통 해 확장되면서 10년이 지난 시점에 수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10년 후 수익을 낼 수 없었던 이유는 아시아에 진출하는데 있어 선박 등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미 선점해 있는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요새와 공장을 장악해야 했고 또한 기반시설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배당금을 마련할 수 없었고 그러한 이유로 회사 운영기간은 다시 10년 연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금액의 투자금이 필요했고, 심지어 1621년과 1622년에는 배당금을 현금 대신 후추 등 향신료의 형태로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현금으로 배당을 받지 못한 주주들은 이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동인도회사는 투자금의 전액을 돌려받지 못하는 형태로 전향되었습니다. 대신 투자증권의 거래가 가능하고 큰 시세 차액을 노릴 수 있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주식회사입니다." 157
157 엔카플란(런던대학교 네덜란드사 교수) 인터뷰 중에서
PART IV •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309
308 |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아마 네덜란드는 최초의 경제적 초강대국 사례일겁니다. 경제력으로 초강대국의 지위가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이 경제 범위가 세계적입니다. 네덜란드는 인구밀도는 높지만 지리적으로 매우 작은 나라입니다. 17세기 중반 카리브해 브라질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가 네덜란드의 경제 기반이었습니다. 일본에 무역 근거지를 만들고 일본과 거래했습니다. 물론 영국령 북아메리카에도 중요한 기반이 있었습니다. 뉴욕은 초창기에 뉴암스테르담이라는 네덜란드 도시했습니다. 경제를 통해 이런 일을 했습니다.
어떻게 경제적으로 강력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리적 이점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적 관용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네덜란드로 이주했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경제적 기량 skill을 가진 여러 사람이 모여 네덜란드가 경제적 초강대국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원자재가 없는데도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제일가는 항구가 없는 데도 운송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종의 다문화주의 alicaihuralism 입니다. 대단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다문화주의가 17세기 네덜란드가 진정한 초강대국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 세 대의 유명한 사상가가 이 교훈을 받아들입니다. 일례로 위대한 영국 사 상가 존 로크(ohn Locks는 이민에 관한 조약을 작성했습니다. 종교에 상관없이 영국에 오려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들이 모든 기술을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네덜란드가 강력해진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162
162 스티븐 핀쿠스(예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인터뷰 중에서
318 |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할 것인가
이렇게 역사상 최초로 경제적 헤게모니를 이용해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덜란드의 번영은 단지 경제적 번영에 머물지 않았다. 17세기 황금시대가 개화하면서 암스테르담은 금융과 상업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뉴욕과 같은 도시가 된 것이다. 하긴 뉴욕의 원래 이름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땅이었기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은 사상적 관용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며 저술활동을 하던 철학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다. 그는 원래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30년 넘게 암스 테르담에서 자유롭게 그의 사상을 꽂 피웠다. 그가 프랑스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온 이유는 그의 사상이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불온한 것이었 기 때문이다. 엄격했던 프랑스 사회에서 가톨릭 진영에서는 그를 칼뱅 주의자라고 여겼고 칼뱅주의자들은 그를 무신론자라고 여겼다. 사상 탄압을 피해 그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였다.
데카르트 :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 학자, 생리학자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합리주의 철학의 길을 열었다.
PART IV.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319
제약했던 다른 나라와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러한 자유로움 때문에 화가들은 상상력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전 세계의 선박이 정박했습니다. 동양 물건과 향신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렘브란트는 항상 이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에 극적인 사건과 표현을 덧붙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시의 환경이 그에게 영향을 줬습니다. 일례로 램브란트의 집이었던 이곳은 유대인 지역입니다. 전 세계 유대인이 암스테르담에 모여들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암스테르담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렘브란트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묘사하는게 그의 재능이었으니까요. 서로 어울리며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특별한 방식으로 그려냈습니다.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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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여기 현대 네덜란드의 헌법 1조가 있다.
"네덜란드의 모든 국민은 평등한 환경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종교, 신념, 정치적 의견, 인종 또는 성별 등의 어떠한 배경에 바탕을 둔 차별도 금지되어야 한다."
헌법 1조는 그 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네덜란드 헌법은 실로 독특한 1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관용'을 제1의 가치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아마도 17세기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네덜란드인들에게는 관용이 그 어떠한 가치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17세기 네덜란드는 관용이 만 들어낸 역사상 가장 작은 제국이었다.
166 레슬리 슈왈츠(암스테르담 램브란트박물관 연구원) 인터뷰 중에서
PART IV. 가장 작은 제국 네덜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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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텃밭이었다. 남북 전쟁이래 남부인들은 언제나 민주당에 몰 표를 던져왔다. 그런데 1964년과 1965년의 민권법이 모든 상황을 바꾸었다. 남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민권법안을 주도한 민주당을 자기들의 당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보수화한 공화당이 남부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한 세대가 아니라 두 세대가 지난 지금도 남부는 공화당의 아성으로 남아있다. 비록 실행 과정에서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민주당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자기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남부라는 텃밭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비록 남부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결국 보답받았다.
민권법 이후 민주당은 소수민족의 확실한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변모했다. 남부를 잃은 대신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인등 소수 민족이라는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은 셈이다. 그리고 갈수록 이민자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현실에서 소수 민족의 압도적 지지는 민주당의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1965년의 투표권 법이 없었다면 민주당 출신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없었을 것이다.
“2004년 오바마 연설을 들었을 때 미국의 더 나은 부분과 의사소통하는 능력면에서 매우 유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대통령 출마를 발표했을 때 당연히 (그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일종의 다음 단계였습니다. 함께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킹 목사가 암살된지 40년이 흘렀습니다.
229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미국인의 13%가 당대에 이민 온 사람들이다.
402 |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다행히 아베는 살아남아 당나라로 귀환하여 조형'이라는 이름으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이라는 고위 벼슬에 오르고 장관까지 지냈다. 물론 일본인들도 이 사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일본만이 아니다. 토번(지금의 티벳)이나 거란, 돌궐, 심지어 중앙아시아나 이란에도 당나라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있다. 이쯤 되면 정말 대단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지를 가진 인재들이 모두 당나라를 위해 일했으니 말이다.
남의 나라에 가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신화는 요즘도 사그러들줄 모른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총재로 취임한 김용 총재 236 도 한 때 대단한 화제가 되었고, 올랑드 대통령이 임명한 프랑스의 플뢰르 펠 르랭 (한국명 김종숙) 문화부 장관도 남의 나라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DNA로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이 두 케이스에서 정말 대단한 것이 우리 민족일까? 그 우수한 인재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대답은 자명하다. 정말 대단한 것은 사실 그 우수한 인재 들을 자기 나라에서 성공하게 만든 미국과 프랑스인 것이다.
이 책은 내내 관용의 현실적인 힘과 개방성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관용과 개방성을 어떻게 한국사회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 한 질문에 이르면 사실 대답이 쉽지 않다.
236 세계 양대 금융 기관인 IMF와 세계은행 총재는 관례상 유럽 출신 인사와 미국 출신 인사 가 나누어 맡게 되어있다. 따라서 김 총재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세계은행 총재가 된 것이다.
410 |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만약 많은 컴퓨터 기술자와 상인 은행가를 일본에 받아들인다고 합시다. 일본 시민권을 주거나 원한다면 일본 여권을 발급해줍니다. 이것이 일본을 위한 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아니라며 단일한 일본 민족, 일본 문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민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국과 비교해 볼까요? 일본과 영국은 모두 비슷한 크기의 섬나라 입 니다. 영국에는 일본을 뛰어넘는 제조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열린 사회입니다. 많은 인도의 인재들이 영국에 있습니다. 영국 병원에서 의사로 일합니다. 또 대부분의 전문 간호사들이 인도나 동아프리카 케냐 출신입니다. 이들은 매우 뛰어난 의료 교육을 거쳐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영국에서 최고 수준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뱅골이나 케냐 출신입니다.
영국은 현명한가요? 당연합니다. 많은 전문 의료진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또 러시아의 금융 전문가들을 영국으로 데려왔습니다. 컴퓨터 기술과 수학 기술을 가진 러시아 전문가들도 데려왔습니 다. 러시아의 수학자들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달리) 영국의 현명한 이민 정책이 영국을 강하게 만들 뛰어난 전문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237
지금까지 살펴본 2,500년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강대국을 만든 리더십의 실체는 힘이 아니다. 관용과 개방을 통한 포용이다. '말 위에서 천하를 지배할 수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몽골제국의 오래된 경구는 묻는다. 당신은 진정한 '강자의 조건'을 가졌는가?
237 폴 케네디(예일대학교 국제관계사 교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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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자의 조건: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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