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이어령 교수님의 마지막 얘기 입니다.
돌아올수 없는 먼곳으로 떠나기 전 전달하고 싶은 얘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 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죽기전에 남긴 의문에 답하는 것을 프레임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일화로 답해보겠습니다. 완벽한 성인이라고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습니다. 그런데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시체가 썩는거예요. 그래서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가 큰 절망에 빠져 매춘부 그루센카를 찾아가요. 처음으로 탈선을 결심한 겁니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얘기해요.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을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뿌리 하나야. 어서와'
하나님은 벌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끌어안고 포용하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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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공부를 위해 떠났던 마틴 루터는 벌판을 지나다가 강력한 벼락을 만나 죽음의 공포를 느껴요. 광부의 아들인 그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에게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두려움 속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기도와 약속, 바로 그것이 개신교에서 종교개혁을 이룩하려고 했던 마틴 루터가 처음으로 위대한 하나님을 맞이하는 입구가 된 것입니다. 애초에 그는 종교개혁을 하려던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오로지 법학 공부를 하려던 것인데 말이지요.
질문 15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나요?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성경 어디에 쓰여 있는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길거리에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 사제도 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가요. 이교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만 나그네를 살려주고 갔어요. 그러면 기독교인이 천국에 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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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천국에 가겠어요. 이러면 제사장이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이교도가 천국에 가는 거예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면 세계 종교가 못 됐어요. 오늘날의 기독교가 안 됐습니다.
질문 16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요?
예수님 자신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어요.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고 말씀하신 뒤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10)" 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칠복이지요. 그 복을 천국으로 바꿔보세요. 다 천국으로 간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처럼 애통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또 어디 있겠습니 까. 우리 선인 중에도 생명을 존중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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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자연물의 하나인데 어떻게 알까요. 정부가 계획경제를 세우면 국민이 다 잘살 것 같지요? 여기서 만지면 저기서 터지고, 저기 터진 곳을 만지면 여기서 다시 터져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다 실패하는 거야. 시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자생력으로 서로 얽혀서 생태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걸 애덤 스미스가 뭐 라고 그랬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어요. 보이지 않는 손을 신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시장 하나도 인위적으로 안 되는데,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이해가 안 되는데, 그 기술로 삼라만상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우주는 물질로 돼 있다고 유물론자는 말하죠.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 증명이 된다고 말해요. 블랙홀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보통의 물질은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의 73% 가 암흑에너지 (dark energy)이고, 23%가 암흑물질(dark matter) 이라고 해요. 이 4%도 대부분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먼지나 기체라고 해요. 지구와 태양, 그리고 별과 은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전체 에너지의 0.4%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0.4%에 지나지 않은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칠흑같이 검은 우주를 탐사해야만 하죠. 신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과학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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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숨이 찬데 이걸 또 로마 사람들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말'과 '이성'으로 두 쪽이 납니다. 주일마다 들고 다니는 성경 책 놓고 생각을 정리해보세요. 성경 보다 훨씬 윗사람이 누구여? '말씀'이지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의 말씀이 성경보다 훨씬 위야. 그럼 말씀, 즉 로고스가 누구야? 바로 하나님이시지.
하나님 말씀이 성경이라면, 인간이 쓴 성경은 달그림자에요. 알아듣기 쉽게, 시적(詩的)으로 불경(佛經)식으로 표현하자면 '월인천강(月印千江)', 천 개의 강물에 어린 달그림자지요. 대한민국 한강에 비친 달, 북한의 대동강과 독일의 라인 강, 미시시피에 비친 달・・・ 하늘의 달은 그대로인데, 수백 수천의 강물에 비치는 달그림자는 물결에 따라 서로 달라요. 그런데 달그림자를 두고 자꾸 하나님이라고 하면 되겠어?"
하늘 위 달과 강에 비친 달그림자, 그리고 카논
- 천개의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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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나는 남이 안 보면 존재하지 않아요. 여자의 곱게 한 화장을 누가 안 봐주면 그게 화장한 거야? 남이 나를 봐 줬을 때만 내가 존재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만 내 가 존재하는 거야.
아무리 달이 휘영청 밝아도 모든 사람이 달을 안 보면 어떻게 돼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지. 선인과 악인의 개념에서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야. 만약 인간을 안 만드셨다면 이 만물을 봐주는 존재가 없을지 몰라. 이 만물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야. 짐승들이 저 개가 달 보고 짖는 게 아름답다고 짖는 거야? 우리처럼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고 하겠어요?
하나님은 당신 형상과 닮은 그리고 영혼을 집어넣은 분신을 만드셨는데, 이게 잘되면 좋은데 어느 날 신이 되려는 거야. '아바타'인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
물론 완전하면 모를까 불완전 존재잖아요. 게다가 완전한 척을 하면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하니까 '다른 피조물하고 똑 같아져라' 하시며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겁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데 생각은 신이야. 느낌도 신이야. 그런데 그게 비극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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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韓流)와 한국 기독교의 매력
- 소련 붕괴 이후의 공산권 국가들을 어떻게 보시나요.
"지금 러시아를 보세요. 마르크스가 지배했던 무신론이 지배했던 정치적 가치가 무너졌잖아요. 군대조직이나 집단 농장 같은 생산양식은 그대로 지니지만, 정신적 가치가 없으니 강대국이나 세계를 아우르는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중국도 마찬가지야. 미국과 맞설 만한 경제력, 군사력을 갖췄지만 세계에 내놓을 가치가 없어요.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철지난 마르크스주의에 의존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한국의 BTS(방탄소년단) 같은 엔터테인먼트의 한류 같은 것도, 지구적 보편성을 갖춘 매력 있는 새로운 발명품도 없어요. 세계가 정말 중국에 매력을 느끼는 그 '무엇'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군사력, 경제력과 함께하는 문화력이라는 것이 결여돼 있다는 겁니다.
미국을 비난하고 그들의 자본주의를 욕하지만, 정치체제로서 자유와 민주 사상은 비록 너절한 팝 컬처 (pop culture)의 소비문화라고 해도 아직은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고, 또 여전히 창의력과 모험의 아메리칸 드림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비자를 받으려고 종일 미국대사관 앞에서 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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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로 인해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태껏 한국인의 종교는 서구인과 달랐어요. 종교가 파국적이고 부딪히는 것, 깨지는 것, 부서지는 역사를 거쳐온 면에서 치열하지 않았어요. 우리 신앙의 선조(先祖)들이 순교와 죽음으로 종교를 증거했으나 일반적인 신앙인들은 믿음이 점잖다고 할까요? 치열하지 않았지.
동양 사상이 훌륭해서 그런지도 몰라요. (웃음)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그리스도교와는 달라요. 공자를 떠올려봐요. 생김새부터 온화하잖아. 제자들 중에 배신한 제자도 없고 편안해요. 수레도 타고 다녀. (웃음) 예수님에게 수레가 어디 있었어요? 심지어 맨발이야. 제자들이 있긴 있는데 공자 같은 제자들이 아녀.
공자 제자들은 먹을 것 다 벌어가지고 주군 모시듯이 했지만, 예수님 제자들은 배신을 밥 먹듯 합니다. 오병이어, 만선 (滿船)으로, 혹은 병든 환자를 싹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줬지만 자기 살려고 배신을 했어.
공자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데 예수님의 제자와 비교 불가야. 무식한 어부들도 있고, 이처럼 아주 드라마 틱한 신앙이지만 동양의 믿음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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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힘을 가졌을 때만이 수식을 계산할 수 있고, 사칙연산을 할 수 있고, 대수와 기하학을 배울 수 있는 거야. 경험적인 게 아냐.
각 나라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1+1=2, 2+2=4는 어디서든 통해요. 이성은 달나라에서도 통하고, 지구에서 우주에서도 통해요. 인간이 없어도 통합니다.
수학은 인간 경험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초등학교 선생님이 수학을 경험으로 가르치려 하는데 잘못된 거여.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던져 '사과 5개 중에서 3개를 먹으면 얼마나 남았어?'라고. 아이가 3개 남았다'고 답해. 선생님이 짜증을 내며 '아니, 2개 남았지 왜 3개야?' 하고 되물어. 아이가 태연하게 이렇게 말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먹는게 남는 거래요'라고. (하하하)
수학은 경험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어. 이성이라야 풀수 있어.
고대 이집트의 수학 지식을 적어놓은 두루마리인 '린드 파 피루스'에 낙타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주 흥미로워요. 아버지가 자식 셋에게 낙타 17 마리를 나눠 가지라는 유언을 남겼습 니다.
'장남에게 전체 낙타의 2분의 1. 차남에게 3분의 1. 막내에게 9분의 1을 가지라고 한 거지.
삼형제가 머리를 싸맸어. 아버지 유언대로라면 장남은 17 마리의 2분의 1인 8.5마리, 차남은 17마리의 3분의 1인 5.666 마리, 막내는 17마리의 9분의 1인 1.888 ・・・・・・ 마리를 가지게 되는 셈이야. 그런데 온전한 낙타를 죽여서 나눌 수 없으니, 형제들은 답답했어요.
이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어요. '내 낙타를 한 마리 빌려줄 테니 다시 한번 나눠보는 게 어떻겠소?'라고.
삼형제는 갸우뚱하면서 낙타 18마리를 기준으로 다시 계산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장남은 낙타 18마리의 2분의 1인 9마리, 차남은 18마리의 3분의 1인 6마리, 셋째는 18마리의 9분의 1인 2마리를 가지 게 된 거야. 게다가 형제들이 낙타를 다 나누고도 신기하게 노인의 낙타 한 마리가 남았어."
- 와! 신기하네요. 가공의 숫자를 넣으니 정확하게 9 +6+ 2+1이 될 수 있다니…………
"수학이라는 게 인간 경험과 관계없는 숫자적 질서, 이성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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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면 꽃방석에 앉는 것처럼 생각해요.
꽃방석은 죽고 나서 얘기죠. 죄 많은 현세에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유다는 물론이고 모두 비참하게 죽었어요. 한 사람도 편안히 떠난이가 없어요. 하물며 열두 사도조차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 말로(路)가 그런데 나야. 뭐. 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열두 사도처럼, 십자기에 거꾸로 매달려 죽거나 가죽이 벗겨져 죽는・・・・・・ 그런 고통이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묻죠.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하나님이 어디에 있었냐고요. 나는 말할 수 있어요. 바로 그때 신이 나타난 거라고. 아우슈비츠만큼 인간이 처절하게 죽어간 역사가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의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신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극한상황을 체험하면서 그 고통 속에 자기 밥그릇을 양보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서 신을 보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통 때 나타나시나요? 안 나타나시죠. 가까운 동료들이 죽고, 내일이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 그 목전의 죽음에서 서로 사랑하고 희망을 얘기하는 마음속에 신이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고난의 순간에 신이 나타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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