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책 : 보통의 존재를 읽었습니다. 그의 감성과 그의 생각을 오롯이 전달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이 되고, 사람들이 왜 이책을 선택하는지 알게 합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왜냐하면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그런 내용들을 다시한번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예시와 같은 문단들입니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그래,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건 헤쳐 나가야 할 펄떡펄떡 뛰는 세월이 아니라 그저 잔여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즘 나의 우울함은 나의 나이에 기인한 것일까?
어제는 능룡이랑 오랜만에 차를 마셨다. 최근 근황을 묻다가 요즘 나의 상태에 대해 이야길 하는데 능룡이가 또 내가 싫어하는 얘길 하는 바람에 울컥했다.
“내가 쫌만 어렸어도 해봤겠지만..."
능룡이는 올해 서른두 살, 나하고는 일곱 살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가끔 그 애는 너무 쉽사리 조로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인가 춤을 배워보고 싶은데 아쉽다고 하더라. 옛날부터 배워보고 싶었지만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배우면 되지 무슨 시기를 놓쳤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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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느 날 친구가 로또를 맞았다고 치자. 그걸 내 일처럼 기뻐하기가 쉬울까? 언젠가 한번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게 믿을 수 없는 행운이 찾아왔다. 친구는 내게 실시간으로 일의 진행상황을 전하다 마침내 대박을 알려왔는데, 거짓말처럼 일이 풀려가는 걸 보며 놀랍고 기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한 10%쯤의 질시의 감정 또한 커져가던 걸 난 또렷이 기억한다.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일이 잘 되어도 내 몫이 줄어들거나 나와 비교될 일 같은 건 없을 텐데도 내 맘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런 감정이 드는 게 꼭 나쁜 마음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친구와 나의 처지가 서로 달라질 테니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그저 곁에 있는 누군가의 갑작스런 성공을 목격하게 되면 자연스레 본능적인 질시의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친구가 슬픔을 당했을 때는 어땠을까. 그 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일정상 도저히 짬이 나지 않는 스케줄을 쪼개 부산까지 내려가 조문을 하고 왔다. 삼십 분 조문을 위해 주말 이틀 동안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끌어써야 했고 그 여파는 다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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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들었던 띠 궁합이라는 것에 의하면 돼지와 용은 상극이라 했다. 우리집에서는 내가 돼지였고 엄마를 포함해 용이 세 마리나 있었는데 궁합이라는게 정말 있는 것인지 난 그 셋과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족 간의 상극'. 같이 살면 서로 간에 힘이 드니 떨어져 살아야 애틋함이 살아난다는 궁합. 함께 살기에 그들은 성격이 맞지 않고, 대화는 좀처럼 원활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가족 간의 상극이라는 게 다른 것 없다. 서로 안 맞으면 그게 바로 상극 아닌가. 왜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던졌는데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화를 내는가. 왜 어떤 일을 하든 다툼 없이 조정과 이해가 가능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같은 핏줄인데도 어째서 작은 일에도 늘 부딪히고 기어이 얼굴을 붉히고 마는 사이가 있는가. 집안의 작은 일을 할 때조차 의견이 맞지 않는 생활 방식의 차이, 한 마디를 던져도 비수가 되어버리는 고통의 대화, 말이 통하지 않을 만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가치관.… 제아무리 가족이라도 함께 산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다행히도 독립을 하게 되면서 떨어져 사는 것의 위력을 체험한 바 있다. 과연 떨어져 살게 되자 엄마에 대한 모든 불만은 사라지고 오직 인륜으로서의 감정, 애틋함과 효도하고 싶은 마음만이 충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떨어져 보지 않았던 이러한 마음을 가져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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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친구가 없다고 털어놓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지내게 된 지금도 그 친구는 여전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친구의 결혼식 때 왔었던 백 명도 넘던 그의 친구들은 도대체 그에게 무엇이었던 걸까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타인이란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나의 말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말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내가 빚어내는 모든 결과물들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내가 지금 어느 곳에서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 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친구라 부르며 이런 중요한 일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없거나 그 수가 많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저에게도 친구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세상이 부러워하는 그런 친구가 하지만 그 친구는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죠. 친 구가 떠난지도 벌써 6년. 그동안 저는 새 친구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열심히 살았지만 다시 그런 친구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속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온 대가로 많은 지인들을 알게 되었 으므로 정말로 외톨이였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만 지인이 아무리 많다 한들 친구의 자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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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회장 아저씨처럼 대궐 같은 집도 마련하지 못했으면서 개만 분수 넘치게 많이 들인 결과 결국 어렸을 때 품었던 나의 두 가지 로망은 그렇게 초라한 흉내내기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토록 고생을 했을지언정 어린 시절부터 줄 곧 품어왔던 판타지 어린 소망을 어찌 됐건 이뤄본 것에 만족했으니까. 로망이 로망으로 그치지 않는 것. 혹여 실망하게 되더라도, 그건 후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로망은 또 멈춤 없이 생성되었다.
난 호텔이라는 공간을 워낙 좋아한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가면 무명의 가수들이 악단의 반주에 맞춰 흘러간 팝송 같은 것을 부르곤 하지 않는가. 내겐 그 모습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호텔에서 노래를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값싼 인건비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의 독무대가 되었다지만 내가 무보수로라도 서겠다고 제의하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 일이 내게 매력적인 이유는 우선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 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호텔이나 놀이공원, 그것도 아니면 종로 3가 거리에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을 볼 때, 나는 내게 무명의 악사들에 대한 환타지가 있음을 느낀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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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고 좋아해주는 사람들 말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까닭은, 분명한 건 내겐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울림을 주고 싶다는 환상과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것이 진짜라는 생각에.
그리하여 어느 크리스마스 날, 호텔 로비에서 사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저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온 순수한 호텔 고객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결혼식 때 입었던 삼만 원짜리가 아닌 정말로 비싼 고급 턱시도를 손수 구입해 차려입고 옛날 마피아 영화에서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이면 등장하는 그 두터운 케이크 조각처럼 생긴 마이크를 들고 멋지게 노래하고 싶다. 그러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 노래가 들려오는 것 같아 한 명 두 명씩 돌아보 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로망이란 어쩌면 단지 꿈꾸는 단계에서만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바라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내 것이 되었을 때, 상상하던 만큼의 감흥을 얻었던 적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이루어낸 로망보다는 아직 이루지 못한 로망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꿈을 품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다행히 내게는 로망이 아직 몇 개 더 남아 있고 앞으로도 조금 더 생길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것들은 힘닿는 대로, 비록 실망 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해 볼 것이다. 왜냐고?
로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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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돌리기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거웁게 춤을 춥시다.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면서… 다섯!"
긴장 속에 원을 그리며 돌던 아이들이 갑자기 다섯씩 짝을 이루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리곤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하는 탈락자들, 이건 마치 무슨 낙오에 대한 리허설이라도 하는 것 같다
또 있다. 수건 돌리기, 술래가 원을 그린 채 앉아 있는 아이들 뒤를 빙글빙글 돌다가 살짝 누군가의 등 뒤에 수건을 놓고 달아나면 당사자는 황급히 일어나 술래를 쫓지만 원망의 미소를 던지면서도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반면 한 번도 선택되지 못한 아이는 박수 치고 노래를 하며 차례를 기다려 보지만 게임이 끝날 때가 가까워올수록 초조해짐을 느낀다.
모르겠다. 이런 게임을 외국에서도 하는지 우리만 하는 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린 어려서부터 비정상적으로 의무적인 관계 맺기를 강요당해왔다는 것이다. 왜 친구가 많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왜 혼자 극장에 가면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하는 건지 난 알 수가 없다. 친구가 백 명 있는 사람도 있는 거고 친구가 두 명 있는 사람도 있는 거다. 밥을 혼자서 먹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두 줄로 줄을 서며 짝을 짓도록 강요받았을까. 왜 혼자 다니면 놀림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나는 우리나라의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들이 하객 모으기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시달리는지 잘 안다. 우리는 결혼식 때 친구들이 얼마나 오는가를 놓고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많이 온 신랑은 성품이나 대인관계 면에서 인정받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간성이나 사회적인 능력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 는 시선들.
내가 우리 사회의 이러한 강요된 관계 맺기 문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어떨 땐 너무나 숨이 막힌다.
287
돈
허영만 화백이 그랬다.
자기는 아무리 젊음이 좋다 해도 30대로 돌아가기는 싫다고. 늙었어도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누구나 밥벌이는 지겹다.
대개는 한 달을 벌어 그다음 한 달을 살고 혹 누구는 하루벌이로,
또 누구는 일 년 벌이로 각자의 능력과 팔자대로 살아간다.
하루하루 밥벌이에 허덕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막연히 염원하던 큰돈이 생겼다고 치자.
그때의 기분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개학을 하려면 아직 제법 많은 날이 남아 있는데 방학숙제를 미리 다 해놔서 아무런 마음의 짐이나 부담이 없이 편안하게 아침 눈을 뜨고,
뜨고 나서도 뭔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다시 한번 곱절의 편안함을 느끼며 온돌바닥에 나른히 몸을 뉘던 어린 시절 그때 그 순간 말이다.
순도 100%의 마음의 평화, 여유 뭐 그런 것.
어린 시절엔(설사 방학숙제를 다 해놓지 않았더라도)
1월의 이즈음이면 저절로 얻어지던 그런 여유를 이제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맛볼 수 있다는 건 어른으로서의 슬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처럼 누려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슬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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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다는 게 결국 글쓴이의 생각을 엿보는 것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다.
여기 '친구가 없다'라는 주제로 각각 다른 두 사람이 일기를 쓴다 고 치자. 한 사람은,
'나는 친구가 없다. 세어보니 두 명밖엔 안 된다. 친구가 더 있었 으면 좋겠다. 끝.
이렇게 단순 사실만을 나열했다. 다른 사람은,
'나는 친구가 없다. 근데 친구라는 게 뭘까? 친구는 어떨 때, 왜, 어느 정도 필요한 걸까?'
하면서 친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이랬을 때 똑같이 친구가 없는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재료로 일기를 썼어도 읽는 사람들이 보기엔 커다란 차이가 나게 된다.
첫 번째 사람의 글을 보면 읽는 이는 그저 '얘는 친구가 없네' 할 뿐 더 이상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의 글을 읽으면 친구가 뭔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게 되고 그 의견에 동조하거나, 달 리 생각하는 등 결국에 글쓴이와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이 글쓰기이고 말 걸기이며 소통이자 대화인 것이다.
이제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오늘 내가 본 <펠햄 123>에 대해서 일기를 쓴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쓰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펠햄 123>을 보았다. 압구정동 시네시티에서 보았다. 강남에 있는 극장 치고는 시설이 안 좋았지만 영화는 그럭저럭 볼 만했다.
누가 남의 이런 단순 일상을 알고 싶어 하겠는가. 개인적인 일상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장치로서 나는 하나의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화두를 던지려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대화에 역시 나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난 덴젤 워싱톤이 싫어. 왜냐면 그는 잘생겼지만 지루해. 배우인
데 '색기'가 없거든."
"아니 왜요? 덴젤 워싱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
"연기 잘해도 '색기'가 없으면 딴따라는 지루해. 윌 스미스를 봐. 얼마나 매력이 넘쳐."
“난 덴젤 워싱톤 섹시하기만 하더라."
"그래서 니가 감각이 없다는 거야. 니가 '색'을 알아?"
<펠햄 123>을 봤다는 얘기도 없고 어디서, 누구랑 봤으며 재미는 어땠으며, 도 없다.
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눈치 빠른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그 영화를 봤나 보다고 짐작케 하고 동시에 덴젤 워싱톤이라는 대체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배우에 대해 이런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힘으로써 읽는 사람과도 자연스레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만 알고 있어도 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굳이 공개적으로 쓸 때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생각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너그러움과 호기심을 갖고 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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