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시칠리아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덕분에 시칠리아를 갈 동기가 생겼기 때문에 김영하 작가에게 감사인사를 글로 남깁니다.
요리재료와 소스들이 있었다. 전형적인 정주민의 실내 풍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천천히 집 안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책들을 헌책방에 내다팔기로 했다. 책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책을 팔자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 저 줄어들 줄은 모르고 오직 늘어나기만 하는 무시무시한 책들을 껴안고 살 수 는 없었다.
우선은 지난 년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책들을 먼저 골라냈다. 읽었으나 아무 감흥도 받지 못한 책들도 그 위에 얹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에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
책을 헌책방으로 보낸 것은, 그래야 책이 가장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면에서 나는 어느 정도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에서 듣기로, 도서관에 기증 한 책은 어딘가에서 분류조차 되지 않은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헌책방으로 간 책은 대부분 적당한 가치로 평가돼 주인을 찾아간다고 했다. 옷도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을 가장 먼저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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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남자친구 무릎에 앉아 키스를 퍼부어대곤 했다. 아내와 나는 마주 앉아서 동양의 신비와 침묵으로 무장한 채 '그래도 기차가 가는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견뎠다. 기차가 남쪽으로 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십대 소녀인 딸과 함께 먹을 것을 잔뜩 짊어진 이탈리아 아주머니가 우리 객실로 비집고 들어왔다. 여섯 명 정원인 객실이 드디어 만석이 되었다.
이 사람들이 설마 거기까지 가겠어? 로마에서 다 내릴 거야."
아내는 이번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양한 연령대와 민족으로 구성된 6인용 객실에선 어떤 대화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로마와 밀라노역에서 '취소 Soppresso'를 '특급 Expressa'으로 착각해 기차 출발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차분히 플랫폼 번호가 부여되기를 기다렸다는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이탈리아어 단어와 영어 단어를 섞어 만든 기이한 문장이었는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남이 바보가 된 이야기는 웬일인지 다들 잘도 알아듣고는 요란하게 웃어댔다. 특히 이탈리아 아주머니가 아주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내의 예상대로 이들은 우리가 빌라 산조반니역에 내리기 직전까지 우리와 함께하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에야 기차에서 내렸다. 밀라노를 떠난지 열네 시간 만이었다.
우리는 메시나해협에 면한 빌라신조반니역에 내렸다. 30미터만 가면 된다는 밀라노의 콧수염 역무원의 말은, 당연하게도, 허풍이었 다. 기차 한 량의 길이만 해도 30미터가 넘었다. 우리는 몇백 미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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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중심가의 성채가 장난감처럼 보였다. 관광객도 없었고 거친 손의 농사꾼만이 낯선 스쿠터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한때 온천이 있었던 듯 'Acquacalda (뜨거운 물)' 같은 지명들이 보였고 목욕을 좋아했던 로마인들이 지은 욕탕의 유적도 있었다. 온천수로 덥히던 유한한 육체들은 이미 썩어 저 땅속에 깊이 묻혀 있을 것이었다. 포도와 꿀, 케이퍼를 재배하는 농가들을 지나 무심히 섬의 고지대를 주유하다가 나는 브레이크를 밟아 스쿠터를 멈추었다.
섬의 서쪽 사면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실로 장엄한 풍경이 갑자기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불카노섬이 보였는데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또렷했다. 두 섬을 갈라놓은 해협으로 수중익선과 요트가 지나가고 있었고 태양이 바다에 드리운 붉은 기운이 마치 폭포처럼 선박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들이 절벽을 스쳐 해협을 통과하며 붉은 지평선을 향해 몰려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내가 본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의 2.5인치 액정에 담긴 해협과 절벽, 불카노의 풍경은 빛 바랜 관광엽서처럼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쿠터를 타고 달려와 맞이한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수백만 년 전 내 발밑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지각변동이 이 섬과 저 건너의 불카노를 만들었다. 지도만 보고 작다고 무시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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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토리 공연은 희곡의 정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비극과 셰익스피어, 근대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올렸다. <오레 스테이아>도 학생들에게 그리스비극의 세계를 경험케 하기 위해 준비한 공연이었다. 딸까지 제물로 바친 끝에 길고 지난한 트로이전쟁에서 마침내 이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가멤논 그러나 그를 죽이려는 부정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 정부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피에 젖어 기뻐하는 어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아들 오레스테스, 동생과 함께 복수에 가담하게 되는 딸, 엘렉트라.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아가멤논의 조상이 지은 죄에 내려진 저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죄는 저주를 부르고, 저주는 복수로, 복수는 또다른 복수로 끝없이 이어진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연기과 대학생들이 이런 무거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은 사실 역부족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가가 붙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연기하는 그리스극을 보는 맛은 따로 있다. 장황한 그리스 운문을 번역한 부자연스런 한국어 대사,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기, 코러스와 대사의 부조 화 때문에 관객들은 극 속으로 결코 깊이 빠져들지 못한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효과'가 여기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달성된다. <오레스테이아>를 보는 내내 나는 연극이 촉발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복수란 무엇인가, 가족사의 비극들은 어떻게 순진한 한 인간을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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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미야자키 감독은 여러 차례 웨일스와 이탈리아 같은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왔다고 밝힌 바가 있다. 에리체의 기슭에 안개라도 끼면 애니메이션 속의 라퓨타와 영락없이 똑같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에리체를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반드시 좋아했을 것이다. 그가 창립한 지브리 스튜디오 지브리 라는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란 뜻의 리비아어다. 똑같은 바람을 이탈리아어로는 시로코sirocco 부른다. 지브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하라사막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정찰기들의 별명이기도 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두번째 작품이 바로 1986년에 발표된 <천공의 성 라퓨타>다.
어쨌든 이 지브리라는 이름에는 그가 좋아하는 세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바로 지중해와 비행기, 그리고 바람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이런 취향은 전쟁의 참혹함을 증오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돼지로 변해버린 후 지중해의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비행기 조종사 얘기를 담은 <붉은돼지>로도 이어진다.
여름에 사하라사막으로부터 시로코(지브리)가 불어와 세상을 바싹 말린다면, 겨울에는 대서양에서 미스트랄이 불어와 저 북서쪽에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심할 때는 시속 9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불어오는 이 무시무시한 바람은 왜 지중해 연안의 집들이 저토록 거추장스런 덧창을 달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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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풍문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리체를 거쳐간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오디세우스가 있다. 우리가 묵은 숙소의 이름 역시 '율리시스의 방'이었다. 알다시피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식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율리시스는 이 트라파니 앞바다를 지나다 유명한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와 마주쳤다. 키클롭스족은 큰 몸집을 가진 거인으로서 키클롭스 Cyclops 라는 말은 '둥근 눈'이라는 의미인데, 이 거인들은 이마의 중앙에 눈을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키클롭스들은 동굴 속에서 살았고 섬의 야생식물과 양의 젖을 먹고 마시며 사는 양치기들이었다. 오디세우스 같은 뱃사람 혹은 전사에 비해 양치기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뱃사람 혹은 전사는 낯선 곳으로 떠나 공을 세우고 그것을 밑천 삼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자들이다. 반면 양치기는 자기가 가진 양을 잘 건사하는 것이 임무다. 그에게는 두 개의 눈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양떼를 노려보는 외눈이면 족하다. 타오르미나를 떠나 북동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키클롭스의 후예들을 만났다. 동굴 같은 집에서 겨울을 나며 오직 자신의 양떼들과만 대화하는 고독한 양치기들. 지독한 멀미 때문에 차 밖으로 나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햇빛 속에 서 있던 아내는 "이제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그 목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굴 속에 살던 키클롭스는 21세기의 양치기든 문명도시에서 온 이들에게는 똑같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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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통을 터뜨리는 폴리페모스에게 "나는 아무도 아닌 자가 아니라 오디세우스다"라고 기고만장하여 외친다. 이 공명심 때문에 폴리페모스는 비로소 자기 눈을 찌른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디세우스의 앞날은 더욱 험난해진다. 어쨌든 그 키클롭스들이 있던 곳이 바로 에리체라는게 그 지역 사람들의 주장이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폴리페모스의 절벽이 있고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도) 외눈박이 거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호메로스의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다보면 엉뚱하게도 현대의 테러리즘으로 연상이 튄다. 왜냐하면 현대의 테러리즘도 바로 이 '우티스', '아무도 아닌 자' 또는 '이름 없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기 때 문이다.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을 납치해 살해한 이들도 결국은 우티스로 남았다. 그 밖에 이라크나 파키스탄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테러들도 우티스의 짓으로 남았다. 몇몇 용의자들이 수사 선상에 오르지만 그들은 잘 잡히지 않거나 끝내 종적이 묘연해짐으로써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거나 아니면 그것을 끝내 구분하는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이 우티스들에게 당한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므로 참아야 한다" 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대량 납치와 살해의 결과로 바뀐 것은 한국 정부가 위험지역에 대한 자국민의 여행을 제한하는 법을 만든 것뿐이다. 눈을 찔리고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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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도 해적질과 인신납치가 성행했으며 귀족들조차 친지들이 몸값을 내주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팔려가곤 했다.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으며 스페인의 정규 해군마저 끈질기게 괴롭혔던 붉은 수염 우르지 바르바로사는 그 자신 역시 젊은날 바다에서 나포되어 노예로 팔린 경험이 있다. 레스보스섬 출신으로 아버지를 따라 운송업에 종사하던 그를 잡아 갤리선의 노잡이로 팔아넘긴 이들은 로도스섬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이었다. 그 는 삼 년 만에 탈출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무서운 해적으로 거듭났다.
폴리페모스의 절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에리체의 서쪽 사면에는 몬테산줄리아노라는 이름의 훌륭한 식당이 있다. 여름 저녁, 해 질 무렵 식당에 들어서니 트라파니 앞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이 식당의 흰 테이블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식당에서 쿠스쿠스와 홍합수프, 해산물 리소토와 황새치 구이를 먹었다. 쿠스쿠스는 본래 북아프리카에서 널리 먹는 음식으로 세몰리나 밀을 쪄 수프를 곁들여 먹는다. 쿠스쿠스는 에리체를 비롯한 트라파니 지방 전역의 식당에서 흔히 맛볼 수 있다. 트라파니는 이천 년 전에도 그랬듯 여전히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인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주요한 경로 중의 하나다. 트라파니에서 배를 타고 삼십 분만 나가면 파비나나라는 섬에 닿는데 이곳에는 칼라로사라는 이름의 유명한 장소가 있다. 직역하자면 '붉은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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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노토의 비토리오에마누엘레 거리의 한 카페에서였다. 노토의 아이스크림은 풍성하되 진득하지 않고 시원하면서도 부드럽다.
카보우르 거리의 골목 속에 숨어 있는 멋진 식당들에서 먹은 요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곳이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싱싱한 문어와 오징 어 새우와 조개로 요리한 리소토와 파스타, 상큼한 전체와 따뜻한 홍합수프 친절하고 소박한 주인들이 접시를 비운 우리를 보고 기뻐하며 '음식이 마음에 들었냐"며 조심스레 묻던 장면들도 차례로 떠오른다
식도락이야말로 순간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도 없고 잘 보존하여 간직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 최고의 행복감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천천히 사그라진다. 몇 줄의 문장으로 겨우 남을 뿐이다.
노토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이 삼백 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도시가 남았다. 시칠리아 여행을 마무리하기 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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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어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eriora, prego. É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 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시칠리아 북부의 테르미니 이메레세역까지 가서 밀라노행 열차로 갈아탔다. 열차는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무사히 메시나역을 통과해 메시나해협을 건너는 페리에 올라탔다. 열차가 완전히 페리 안으로 들어가자 객실 안의 에어컨이 꺼졌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기름 냄새와 뒤섞여 호흡기로 밀려들었다. 볼이 붉은 어린 차장이 객실 문을 잠그면서 승객들더러는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손짓을 했다. 승객들은 땀을 흘리며 좁은 계단을 걸어 갑판 위로 올라갔다. 출구를 기억해두세요. 그래야 자기 객실로 돌아올 수 있어요. 친절한 이탈리아 아주머니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충고했다. 나는 발 길을 멈추고 출구의 번호를 살피고 외웠다.
갑판 위에 오르자 메시나항의 불빛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힘차게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승객들의 땀을 식혔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 거대한 배의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쐬게 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제 곧 메시나대교가 건설돼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 토가 연결되면 이런 여행담도 먼 옛날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갑판 위에서는 여러 나라의 말이 들렸다. 나는 매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보며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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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내가 뱃머리에 부서지는 흰 물살을 굽어보다 말했다.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아내는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걱정을 해놓아야 그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 있는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결론이 왜 그래?"
"결론이 어때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잡담이 거센 바닷바람에 풀 어지는 사이시칠리아섬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시칠리아여, 안녕! Arrivedérci, Sici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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