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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서른 여섯 번째 책 : 살인자의 기억법 - 이영하

by 마파람94 2021. 9. 7.

올해 서른여섯 번째 책을 거의 2시간 가량 만에 뚝딱 다 읽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입니다.

 

유명한 소설이라 기대를 너무 크게 가진 것 아닌가 합니다. 소설을 줄곧 읽으면서 속도감 있게 읽게 됩니다.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달리는 단거리 자전거에 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면 좀 어색할까 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소설 속 스토리 때문에 크게 한방 얻어맞는 반전을 기대하면서 읽게 되면, 그 반전의 효과가 충격적이지 않으면 좀 덜 아프다라고 할까요. 그랬습니다. 여하튼 단숨에 읽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잘 읽고 잘 봤습니다. 

 

 

p. 51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할 테니까.

아침에 눈을 떴다. 낯선 곳이었다. 벌떡 일어나 바지만 꿰어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음 보는 개가 짖어댔다. 신발을 찾으려 허둥 대다가 부엌에서 나오는 은희를 보았다. 우리 집이었다. 다행이다. 아직 은희는 기억에 남아 있다.


p. 101

은희는 박주태와 단단히 사랑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쉼없이 그의 이야기를 한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자기한테 잘해주는지 말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나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은희는 한 번도 가정다운 가정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그 뒤로는 나하고 살았으니까. 이제 처음으로 은희는 가정다운 가정을 꾸릴 단꿈에 젖어 있다. 그런데 은희야. 상대가 왜 하필 그놈이란 말이냐 왜 하필 네가 사랑하는 놈은 너의 부모를 죽인 내 손에 죽을 운명이란 말이냐.

박주태를 빨리 죽이고 싶다. 그런데 자꾸만 까무룩 정신줄을 놓 는다. 마음이 급하다. 이러다 아무 일도 못 하는 존재가 돼버리는건가 우울하다.


p. 145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감옥 같기도 하고 병원 같기도 한 곳에서 머문다. 이제 둘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둘 사이를 오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 이틀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영원이 지난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오전인지 오후인지도 모르겠다. 이 생인지 저 생인지도 분명치 않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자꾸만 내게 여러 이름을 댄다. 이제 그 이름들은 내게 어떤 심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사물의 이름과 감정을 잇는 그 무언가가 파괴되었다. 나는 거대한 우주의 한 점에 고립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p.148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 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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