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우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인물 중 쇼코 라는 여자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공교롭게 이번 소설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 쇼코입니다. 누군가 조작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는 쇼코가 흔한 이름인가요? 우리나라의 미영~ 혜영 뭐 이런 정도일까요? 좀 흔한...좀 덜 촌스럽지만 완전 세련되지 않은 듯한...
여하튼 이번 소설의 제목이 낮술입니다. 주인공 여자 등장인물이 낮에 먹는 음식과 술을 곁들이면서 각 이야기를 중첩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일본에서 제작된 먹방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면 종종 등장하곤합니다. 고독한 미식가인 주인공이 음식을 먹고 독백 내레이션이 흐르면서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약간 코믹하기도 하죠.
이 소설은 고독한 미식가의 음식 먹방에 술이 더해지고 앞 뒤로 진지한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지킴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 직업과 지킴을 받아야 할 것 만 같은 여자 주인공이 처해있는 현실이 아이러니 하게 겹쳐집니다.
이 소설에 제가 그은 밑줄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p. 62 낮술
대화하고 서로 부딪쳐가며 해결해나갈 힘이 없었어요. 그렇게까지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관계를 구축하지도 못했으 니까요."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도쿄돔이 보이기 시작했다. 쇼코는 입을 다물었다.
"왜 아이를 두고 왔어?"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해드릴게요. 또 불러주시면 그때,"
"어머나."
모토코가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었다.
"수완이 좋네."
모토코가 산 원예용품은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부피가 컸다. 쇼코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모토코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짐은 현관에 두었다. 집안에 들어가자 모토코는 코트를 벗더니 곧장 쇼코의 손을 잡았다.
"좋아, 보여줄게."그러고선 그대로 모토코의 방 앞에 섰다.
"아들한테는 비밀이야.' 모토코가 문을 열었다. 쇼코는 "와아" 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 난초였다.
진홍색, 흰색, 분홍색, 노란색, 주황색・・・・・・ 각양각색의 호접란이 방안에 빽빽이 놓여 있었다.
p. 74 낮술
선잠을 자거나 이따금 옆에 있는 쇼코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나는 지금 배를 젓고 있는 거야." 지난번에 왔을 때, 한쪽 눈만 뜬 노부인이 말했다.
"배요?"
"느릿한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듯한 밤이야."
"저는 배를 타본 적이 거의 없어서요."
"홋카이도 출신인데? 나는 많이 타봤어. 작은 어선도 타보고, 아주 커다란 호화 여객선도 타봤지."
"호화 여객선은 언제 타셨어요?"
"할머니일 때,
부부가 여든을 넘겼다는 사실을 아는 쇼코는 잠자코 있었다. "할머니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야. 꽤 한참 전.. 쇼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흘러내릴 듯한 얇은 담요를 부인의 목 언저리까지 다시 덮어줬다.
"젊을 때는 말이야. 한번 노인이 되면 계속 똑같은 줄 알았는 데 노인에도 단계가 있더라고. 젊은 노인, 약간 젊은 노인, 아주 조금 노인, 완전한 노인, 중간 노인, 상당한 노인, 심각한 노인. 어찌할 방도가 없는 노인."
쿡쿡, 노부인이 웃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p. 97 다섯번째 술
커다란 접시에 회 네 종류. 그와 별개로 모미지오로시*와 폰즈** 를 곁들인 흰살생선회, 생선조림, 채소튀김과 생선튀김, 배추절 임에 미소시루와 밥까지 쟁반에 다 안 들어가 비어져나올 정도 로 가짓수가 많다.
"술도 나왔습니다."
점원이 네모난 뒤에 든 차가운 술잔을 가져와 큼직한 됫병에서 콜콜 술을 따른다. 잔뿐만 아니라 잔을 받친 되까지 흘러넘칠 만큼 듬뿍.
'하나부터 열까지 다 최고야. 최고.'
한 모금 마셔보니 산뜻하면서 묵직한 맛을 지닌 술이다. 회에 잘 어울릴 것 같다.
'하, 정식에서 뭐부터 먹어야 좋으려나. 다 먹을 수 있을까.' 쇼코는 역시 회부터 먹을까 싶어 접시를 바라보았다. 둥근 접 시에 오른 건 잿방어 전갱이, 흰살생선, 단새우다.
'일단 흰살생선부터 ' 쥐치일까. 쫄깃쫄깃한 맛이 있는 생선이었다. 그리고 고슌 한
*: 무와 홍고추를 강판에 간 것.
**: 감귤류의 과즙에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일본의 소스
p. 227 열한번째 술
"어? 벌써 가는 거야? 볼일이라도 있어?"
"응, 사무실에 얼굴을 좀 비춰야 해서..
"그래. 아쉽네. 나중에 또 얘기하자. 궁금한거 있으면 전화해." 말과 정반대로 그의 표정에 안도하는 기색이 보였다. 쇼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왔다. 등뒤로 미닫이문을 드르륵 닫고 나서야 계산하지 않고 나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뭐, 어때, 결혼 앞두고 행복한 사람인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또르르 흘 렀다.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고개를 들자 여름햇살이 쇼코의 얼굴을 뜨겁게 비췄다.
'아 이번 약속이 왜 세번째인 거냐고 묻는다는 걸 깜빡했네.' 그 의미를 묻는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 258 낮술
"여기 몇 번 와본 데야?" 둘 중 누구에게 할 것 없이 쇼코가 물었다.
"응, 두세 번쯤." 둘이 과거에 사귀었던 건 알지만 현재의 관계는 잘 모른다. 제법 둘이서 바람도 쐬러 다니는 건가. 쇼코의 작은 궁금증 같은 걸 알 리 없는 둘은 곧장 건물로 들어갔다. 쇼코도 부랴부랴 뒤를 따랐다.
1층은 지역 특산품과 해산물 등을 파는 곳이고 2층은 식당가 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기분이 상쾌하다. 아직 오전 11 시지만 벌써 자리가 절반 정도 찼다.
"오, 자리그물 해산물덮밥이 남았어." 다이치가 칠판에 적힌 메뉴를 가리켰다.
"그게 맛있어?" 제철 생선을 먹을 수 있거든. 수량이 한정돼서 이것 때문에 일찍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자리그물*로 잡은 제철 생선. 말로만 들어도 아찔하게 매력적이었다.
*: 일정한 곳에 설치해놓고 고기떼가 지나가다 걸리도록 하는 그물.
p. 261 : 열세번째 술
다이치와 사치에가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억지로 이른 아침에 데리고 온 거라고. 점심엔 다 팔리니까."
"알았으니까. 우리는 좀 마실게."
사치에가 쇼코의 잔에 맥주를 가득 따랐다.
"같은 걸로 한 병 더 주세요."
빈 맥주병을 높이 들어 지체 없이 주문한다.
"더 마시게?"
"쇼코는 실컷 마시고 차 안에서 자면 돼." 다이치의 말을 흘려들으며 사치에가 대꾸했다. "고마워."
다이치가 추가로 주문한 전복회는 쫄깃하고 신선했다. 바다 내음을 온몸에 고스란히 머금은 생물이라고 할까.
"이거, 간장이나 고추냉이를 아주 조금만 찍는 게 좋을 것 같 아. 많이 찍으면 전복 본래의 맛이 사라져 아깝겠어."
똑같은 생각을 한 쇼코가사치에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주 마시고 싶다."
"나도 그 생각 했어!" 이런 말에는 큰 소리로 동조한다.
p. 286 낮술
'식감이 쫄깃쫄깃해서 맛있네. 이것 또한 술안주로 최고다 ' 내장구이를 먹는 동안 드디어 장어덮밥과 장어 간을 넣어 끓인 맑은국이 함께 나왔다.
'아!'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른다. 이미 채소절임과 내 장구이를 먹고 있지만 다시 한번 손을 모으고 "잘 먹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인다.
덮밥이 담긴 찬합을 열자 고운 빛깔로 구워진 큼직한 장어가 밥 위에 빈틈없이 딱 맞게 올라가 있다. 끝에서부터 깔끔하게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는다.
'역시 맛있어.'
지나치게 부드러워 흐물거리는 장어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데 이곳의 장어는 식감이 알맞았다. 양념이 너무 달지도 않고 많 지도 않아서 장어와 밥의 감칠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타이밍에 아이즈호마레를 한 모금, 기름진 장어와 쌉쌀한 술이 잘 어울린다.
'장어덮밥은 알코올과 탄수화물의 만남에서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이따금 상큼한 채소절임을 곁들이면 그 또한 맛이 좋다. '아, 사람들이 왜 이렇게 줄을 서는지 그 이유를 진심으로 이 식감이 쫄깃쫄깃해서 맛있네. 이것 또한 술안주로 최고다' 내장구이를 먹는 동안 드디어 장어덮밥과 장어 간을 넣어 끓인 맑은국이 함께 나왔다.
'아!'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른다. 이미 채소절임과 내 장구이를 먹고 있지만 다시 한번 손을 모으고 "잘 먹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인다.
덮밥이 담긴 찬합을 열자 고운 빛깔로 구워진 큼직한 장어가 밥 위에 빈틈없이 딱 맞게 올라가 있다. 끝에서부터 깔끔하게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는다.
'역시 맛있어.'
지나치게 부드러워 흐물거리는 장어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데 이곳의 장어는 식감이 알맞았다. 양념이 너무 달지도 않고 많지도 않아서 장어와 밥의 감칠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타이밍에 아이즈호마레를 한 모금, 기름진 장어와 쌉쌀한 술이 잘 어울린다.
'장어덮밥은 알코올과 탄수화물의 만남에서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이따금 상큼한 채소절임을 곁들이면 그 또한 맛이 좋다. '아, 사람들이 왜 이렇게 줄을 서는지 그 이유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야'
p. 338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은 술과 음식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가 흥미와 재미를 한 층 더한다. 소설 속 많은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드라마 각본가 출신인 작가의 이력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에 나오는 음식점이 실재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도시의 지명과 음식 이름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알아낼 수 있는 식당들을 배경으로 작가의 취재가 더해져 그 현실감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낮술』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하라다 히키는 독특한 직업이나 사연을 가진 여성과 음식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통해 폭넓은 독자층의 호평을 받는 작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그 시점에서부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성장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 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삶이든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이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일은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정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자신의 지친 영혼을 감싸줄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다시 힘을 내 살아가자고 다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쇼코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결정적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뢰인 혹은 고객이라는 형태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도시의 고독한 이들의 하룻밤을 지켜주며 그들의 외로움에 공감하고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함으로써 쇼코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기도 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기도 한다. 그렇게 조금씩 고개를 들어 진정한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모습에 서 작지만 단단한 용기와 희망이 엿보인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삶에도 그 끝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을 비롯한 누군가의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보듬고 살펴봐주며,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닐지. 언젠가 한 손에 이 책을 들 고 소설 속 가게들을 직접 찾아가 쇼코가 먹고 마신 것들을 실제 로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꿔본다.
-김영주,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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