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펼치는 서른 한번째 책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입니다.
아니~~ 뭐지.? 그 다음이 어떻게 될까? 이야기는 이렇게 지어 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1권 300쪽 까지는.
저택에 초대된 장면에서는 탄식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 이렇게도 이야기를 꾸며 낼수가 있다니... 라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모퉁이를 돌면 저 사람이 등장하고 윗길로 올라가면 준비해둔 저것이 나타나고, 궁금해서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됩니다.
책 속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어 주인공으로 빙의 되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상상을 하게 됩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그림들도 그려지고, 주변 구조물들과 건물들도 머릿속에 건설되게 됩니다.
책을 읽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산맥의 산둘레를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 94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통유리를 두른 저 근사한 저택에서 우아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불편한 위치에서 매일 도시로 출퇴근할 리는 없을 테니까. 아마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리라. 하긴 거꾸로 저쪽에서 골짜기 너머로 이곳을 바라보면 나 역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혼자 유유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멀리서는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날 밤도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테라스 의자에 앉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나처럼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부심하는 것이리라.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제아무리 모자랄 것 없는 환경이라도 사람에게는 어떤 고민거리가 있는 법이다. 나는 와인잔을 살짝 들어올려 골짜기 맞은편의 그 사람에게 은밀한 연대가 담긴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때는 머지않아 그 사람이 내 인생 깊숙이 들어와 내가 걸어가는 길을 크게 바꿔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건이 내 주위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고, 동시에 그가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p. 130
환경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고, 누구 하나 똑같은 사람이 없다. 화요일 아침, 집안을 깨끗하게 치우고 청소한 뒤 정원에서 꽃을 꺾어와 화병에 꽂고, <기사단장 죽이기>를 작업실에서 손님 방으로 옮겨 원래대로 갈색 전통지로 꼼꼼히 싸두었다. 그 그림을 남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다.
한시 오분이 지났을 때 차 한 대가 오르막길을 올라와 현관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 한동안 굵고 묵직한 엔진음이 주위에 울렸다. 몸집 큰 짐승이 동굴 속에서 만족스럽게 그르렁대는 듯한 소리다. 아마 배기량이 큰 엔진이리라. 이윽고 엔진음이 멎고 골짜기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은색 재규어 스포츠 쿠페였다. 잘 닦인 기다란 펜더가 때마침 구름 사이로 흘러나온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나는 차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 모델명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차가 최신형이고, 주행거리는 아직 네 자리 숫자이며, 내가 중고 코롤라 왜건에 치른 것보다 적어도 스무 배는 넘는 가격이란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다. 딱히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기 초상화에 그만한 거금을 내놓는 사람이다. 설령 대형 요트를 타고 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차에서 내린 이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중년남자였다. 진녹색 선글라스를 쓰고, 새하얀 긴소매 면 셔츠에 (그냥 하얀게 아니라 새하얀), 카키색 치노바지를 입었다. 신발은 크림색 보트슈즈
p. 175 : 9 서로의 일부를 교환하는 일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죠. 당신도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특별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나는 침묵을 지켰다.
"사람은 때때로 크게 변하곤 합니다. 멘시키는 말을 이었다. "자기 스타일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그 잔해 속에서 힘차게 재생하기도 하지요. 아마다 도모히코 씨도 그랬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양화를 그렸지요.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전쟁 전에는 서양화 유망주였죠. 그런데 빈 유학을 마치고 온 후 갑자기 일본화로 전향해서 전쟁이 끝난 뒤 눈부신 성공을 거뒀고요."
멘시키가 말했다. "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 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다 도모히코 씨는 전자였죠."
대담한 전환, 그 말을 듣자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의 광경이 떠올랐다.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는 청년.
"일본화를 잘 아십니까?" 멘시키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시절 미술사 수업에서 배우긴 했지만 대단한 지식은 아니죠."
p. 184
돌아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심장이 멈춘 뒤었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아침 식탁에서 같이 아침을 먹고 현관 앞에서 헤어져 나는 고등학교로, 동생은 중학교로 갔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았을 때 그에는 더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커다란 눈은 영원히 닫히고 입은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막 봉긋해지기 시작한 가슴은 성장을 멈추었다.
다음으로 본 그애는 관 속에 있는 모습이었다. 좋아하던 검은 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얇게 화장을 하고, 말끔하게 머리를 빗고,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조그만 관 속에서 위를 보고 누워 있었다. 검은색 원피스에 달린 동그란 레이스 칼라가 거의 비현실적일 만큼 새하였다.
누워 있는 그애는 그저 조용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살짝 몸을 흔들면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도 이제 눈을 뜨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답답한 관 속에 동생의 가냘픈 몸을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몸은 더 너른 곳에 눕혀야 온당했다. 이를테면 초원 한복판에. 그리고 우리 무성하게 자란 초록풀을 헤치고 조용히 그애를 만나러 가야 온당했다. 바람에 풀이 천천히 흔들리고, 주위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벌레들이 울어야 한다. 들꽃이 허공에 꽃가루를 날리며 향기를 내뿜어야 한다.
p. 220
"고흐의 우편배달부처럼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상상도 못했겠지요. 몇십 년 후에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이 미술관까지 찾아가서, 혹은 화집을 펼쳐서 거기 그 려진 자기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리라고는요."
"거의 틀림없이, 상상도 못했겠지요."
"허름한 시골집 부엌 한구석에서 아무리 봐도 정상 같지 않은 남자가 그린 특이한 그림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멘시키가 말했다. “그 자체로는 영속할 자격이 없던 무언가가 어떤 우연한 만남에 의해 결과적 으로 그런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게 말입니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요.
그리고 나는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를 떠올렸다. 그 그림 속에서 검에 찔린 '기사단장도 아마다 도모히코에 의해 영속할 생명을 얻었을까? 아니. 애당초 그 기사단장은 대체 누구일까?
나는 멘시키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는 마시겠다고 말했다. 부엌에 가서 커피메이커로 새 커피를 내렸다. 멘시키는 작업실 의자에 앉아 오페라에 귀를 기울였다. 레코드 B 면이 끝날 때쯤 커피가 나왔고, 거실로 자리를 옮겨 함께 마셨다.
p. 292
어떤 그림으로 나아갈지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작품에 중요한 바탕색이 되리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림은 이른바 초상화라는 형식에서는 점점 멀어져가는 듯했다. 그러나 초상화가 되지 못한다 해도 별수없다고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만약 여기에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 보자(멘시키도 그걸 원했다).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해도 된다.
나는 계획도 목적도 없이, 내 안에 절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쫓아갔다. 마치 들판을 날아가는 희귀한 나비를 발밑도 보지 않고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한차례 색을 칠한 뒤 팔레트와 붓을 내려놓고 다시 2미터쯤 떨어진 스툴에 앉아 그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색이 맞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잡목림이 만들어내는 녹색, 스스로를 향해 몇 번 작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것은 내가 그림에 대해 매우 오랜만에 느낀 확신 (비슷한 것)이 었다. 그래, 이거다. 내가 원했던 색이다. 혹은 이 '골' 자체가 원했던 색이다. 나는 그 색을 기조로 응용한 색을 몇 가지 더 만 든 후, 그것들을 적당히 덧붙이며 전체적으로 변화를 주고 두께를 더해갔다.
거기까지 완성한 그림을 바라보니 뒤따를 색깔이 자연히 머릿 속에 떠올랐다. 오렌지색. 그냥 오렌지색이 아니다. 타오르는 듯 한 주황, 강한 생명력을 발하지만 동시에 퇴폐에 대한 예감을...
p. 339 : 18 호기심이 죽이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
왜 느닷없이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불쑥 미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절로 입 밖으로 말이 나와버렸다.
멘시키는 의아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라? 무슨 말씀이시죠?"
"그 석실에 있었을 미라 말입니다. 분명 매일 밤 방울을 울렸을 텐데 방울만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죠. 즉신불이라고 해 야 할까요. 어쩌면 그도 댁에 초대받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돈조반니>의 기사단장 조각상처럼요." 멘시키가 잠시 생각하다가 겨우 이해됐다는 듯이 밝게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돈 조반니가 기사단장 석상을 초대한 것처럼, 저도 미라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면 어떻겠냐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이것도 무슨 인연일 수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저는 전혀 상관없어요. 축하하는 자리니까요. 만일 미라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면 기꺼이 초대하지요. 아주 흥미로운 저녁이 되겠군요. 그런데 디저트로는 뭘 내놓으면 좋을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다만 문제는 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본인이 없어서야 아무리 초대하고 싶어도 못하니까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이라는 법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p. 385~
자세히 보니 그것은 쿠션도 인형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조그만 인간이었다. 키는 얼추 60센티미터 일 것이다. 그 작은 인간은 기묘한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연신 몸을 꼼지락거렸다. 마치 옷이 몸에 잘 맞지 않아 영 불편한 것처럼. 그 옷을 어디서 본적 있었다. 고풍스러운 전통의상이다. 고대 일본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었을 법한 옷뿐 아니라 그의 얼굴도 눈에 익었다. 기사단장이다. 나는 깨달았다.
몸이 뼛속부터 차가워졌다. 주먹만한 얼음덩어리가 등줄기를 훑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에 그린 '기사단장'이 내 집-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거실 소파에 앉아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작은 남자는 옷차림이고 생김새고 그림과 똑같았다. 마치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빠져나온 것처럼.
그 그림이 지금 어디 있더라? 나는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래, 그림은 물론 지금 손님방에 있다. 누가 집에 왔다가 봐버리면 일이 번거로워질까봐 눈이 닿지 않도록 갈색 전통지에 싸서 감춰두었다. 만일 남자가 그림에서 빠져나왔다면 지금 그 그림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화폭에서 기사단장의 모습만 사라졌을까?
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인물이 현실로 빠져나오는 일이 가능한가? 물론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 정도는 너무 당연하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논리적인 생각을 잃고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소파에 앉아 있는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일시적으로 걸음을 멈춘것 같았다. 시간은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며 내 혼란이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듯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 괴이한-다른 세계에서 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사단장도 소파 위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아마 너무 놀란 탓이리라. 그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살짝 벌린 입으로 소리 없이 호흡을 이어가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기사단장 역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은 일자로 다물었다. 짧은 다리를 소파 아래로 똑바로 뻗었다. 등받이에 반쯤 기대긴 했지만 머리는 등받이 맨 위까지도 닿지 않았다. 발에는 기묘하게 생긴 작은 신발을 신고 있다. 가죽으로 만든 듯한 검은색 신발이다. 뾰족한 앞코가 위로 들려 있다. 허리에는 자루에 장식이 된 장검을 찼다. 장검이라지만 그의 몸에 맞춘 크기이니 실제로는 단검에 가깝다. 하지만 얼마든지 흉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짜 칼이라면.
"그래, 진짜 칼일세." 기사단장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작은 체구에 비해 제법 낭랑한 목소리였다. "작지만 베이면 틀림없이 피가 나지."
나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남자가 정상적으로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남자의 말투가 상당히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쓸 일이 없을 종류의 말투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빠져나 온 키 60센티미터의 기사단장이 애당초 '보통 사람'일 리 없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말투를 쓰건 놀랄 일은 아닐 터이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 > 에서는 가슴에 칼을 맞고 불쌍하게 죽어가던 참이었지."
p. 393 : 21 작지만 베이면 틀림없이 피가 나지
그 모습은 역시 임시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길고 생생한 꿈을 꾸었을 뿐이다. 아니, 지금 이 세계도 꿈의 연장이다. 나는 꿈속에 갇혀버렸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이건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도 아니다. 나와 멘시키는 둘이 함께 그 기묘한 구덩이에서 기사단장을-혹은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이 집에 이미 자리잡아버렸다. 천장 위의 수리부엉이처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뜨렸던 아마다 도모히코의 떡갈나무 지팡이를 주워들고 거실 불을 끈 뒤 침실로 돌아갔다. 주위는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카디건을 벗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들어가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기사단장은 화요일 멘시키의 집에 갈 작정이다. 멘시키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면 할수록 내 머릿속은 다리 길이가 제각각인 식탁처럼 침착함을 잃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한 졸음이 쏟아졌다.
p. 397 : 22 초대는 아직 유효합니다
실체와 표상의 틈새가 보면 볼수록 흐릿해져갔다. 반 고흐가 그린 우편배달부가 결코 실체가 아닌데도 보면 볼수록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듯 느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단지 검은 선 하나로 거칠게 표현한 까마귀가 정말로 하늘을 날아가는 듯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감상하며 나는 새삼 아마다 도모히코라는 화가의 재능과 역량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기사단장도(아니. 그 이데아도) 이 그림이 얼마나 훌륭하고 강렬한지 알아보았기에 그림 속 기사단장의 모습을 차용한 것이리라. 소라게가 되도록 아름답고 튼튼한 조개껍데기를 제집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십 분쯤 바라본 뒤,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라디오 정시 뉴스를 들으며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의미 있는 뉴스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지금 내게는 하루하루의 모든 뉴스가 거의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일단 매일 아침 라디오 일곱시 뉴스를 듣는 일을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었다. 가령 지구가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다면 그것도 좀 곤란할 테니까.
아침을 먹고, 지구가 나름의 문제를 안고도 아직은 성실하게 회전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 들 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창문의 커튼을 걷고 신선한 공기를 맞았다.
p. 419 : 23 전부 이 세상에 진짜로 있어
그로부터 이 년 후 동생은 죽었다. 그리고 작은 관에 들어가 화장됐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 그애는 열두 살이었다. 그애가 화장되는 사이 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화장장 안마당 벤치에 앉아 그 풍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작은 구멍 앞에서 동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시간의 무게,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짙은 어둠, 뼛속까지 얼어붙던 한기를, 구멍에서 제일 먼저 그애의 검은 머리가 나타나고, 뒤이어 어깨가 천천히 나오던 모습을 그애의 흰색 티셔츠에 묻어 있던 정체 모를 여러가지를
동생은 병원에서 정식으로 사망 선고를 받기 이 년 전, 그 풍혈 속에서 이미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의 그렇게 확신했다. 나는 구멍 속에서 잃어버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그애를 살아 있다고 착각 하고서 전철에 태워 도쿄로 데려왔던 것이다. 손을 꼭 잡은 채. 그리고 그후로도 이 년간 오빠 동생으로 함께 지냈다. 그러나 그 것은 덧없는 유예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년 후, 죽음은 그 횡혈에서 기어나와 동생의 영혼을 거두러 왔다. 정해진 변제기한이 닥쳐 빚을 받아내러 온 사람처럼.
어쨌거나 그 풍혈 속에서 그애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이 꺼냈던 말은 진실이었다고 나는-이렇게 서른여섯 살이 된 나는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앨리스가 존재한다. 3월 토끼도, 바다코끼리도, 체셔 고양이도 실재로 존재한다. 물론 기사단장도.
p. 464
"저는 그 그림교실 운영자인 마쓰시마 씨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입니다." 멘시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저는 마침 그 교실의 투자자랄까, 후원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마쓰시마 씨가 중간에서 거들어주면 비교적 수월하게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합니다. 당신의 신원이 확실하고 경력 있는 화가라는 걸 보장한다고 한마디해주면 보호자도 아마 안심할 테지요."
이 남자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을 예측하고 바둑의 포석처럼 하나씩 적절하게 손을 써둔 것이다. 마침 그렇다는건 있을 수 없다.
멘시키가 말을 이었다. "평소 아키가와 마리에를 돌봐주는 사람은 고모입니다. 아버지의 동생이고, 독신이지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어머니가 죽은 후로 그 집에 함께 살며 마리에의 엄마 노릇을 해왔어요. 아버지는 일이 바빠서 매일 꼼꼼하게 챙겨주기 힘드니까요. 그러니까 그 고모만 설득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아키가와 마리에가 모델 일을 승낙하면 아마 보호자 자격으로 댁 까지 따라오겠지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아이 혼자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키가와 마리에가 그렇게 간단히 모델 일을 승낙할까요?"
"그 문제는 맡겨주십시오. 당신이 초상화 작업에 동의하신다면, 뒤따르는 몇 가지 실무적인 문제는 제가 손을 써서 해결하겠습니다."
p. 492
혹은 명령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불완전한 형상으로 그곳에 완전히 실재했다. 모순된 어법이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남자의 감춰진 상은 화폭 속에서 작가인 나를 향해 강한 사념 같은 것을 전달하려 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 남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나는 실감했다.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채 마르지도 않은 그림을 이젤에서 내려, 물감이 묻지 않도록 뒤로 돌려서 작업실 벽에 세웠다. 그 그림을 바라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불길한 무언가가 아마도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림 주위에는 어항이 있던 마을의 공기가 떠다녔다. 그 공기에는 바다 냄새와 생선 비린내. 어선의 디젤엔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닷새 한 떼가 날카롭게 울면서 강풍 속을 느릿하게 선회 했다. 아마도 생전 골프라고는 해본 적이 없을 중년남자가 눌러 쓴 검은색 골프모자 구릿빛으로 그은 얼굴과 뻣뻣한 목덜미, 발이 섞인 짧은 머리. 낡은 가죽점퍼 패밀리레스토랑에 울리는 나이프와 포크 소리-전 세계 모든 패밀리레스토랑에 똑같이 울릴 무개성한 소리. 그리고 주차장에 가만히 서 있던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 리어범퍼에 붙은 청새치 스티커.
p. 495 : 27 모양은 그렇게 생생히 기억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온갖 것이 이 집안에서 나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천장 위에서 발견한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잡목림에 뚫린 구덩이에 남아 있던 기묘한 방울, 기사 단장의 모습을 빌려 내 앞에 나타나는 이데아, 그리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를 타는 중년남자. 그에 더해, 골짜기 맞은편에 사는 불가사의한 백발의 인물. 멘시키는 아무래도 제 머릿속에 있는 어떤 계획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모양이었다.
내 주위의 소용돌이가 점점 세차고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너무 늦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철저하게 고요했다. 그 기묘한 정적이 나를 떨게 만들었다.
28 프란츠 카프카는 비탈길을 좋아했지 p. 501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에 대해서입니다. 물론 그게 뭔지는 알고 계시죠? 어쨌거나 당신은 그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을 차용했으니까요. 짐작건대 그 그림은 1938년 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암살미수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건에 아마다 도모히코 씨도 직접 관련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혹시 이 이야기에 대해 뭔가 아시는 건 없나요?"
기사단장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실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일도 무척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
"일반론으로는 그럴지 모르죠. 하지만 그 그림은 보는 이에게 무언가를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어요. 아마다 도모히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그러나 공공연하게 말할 수는 없는 어떤 일을 개인적으로 암호화할 목적으로 그 그림을 그린 게 아닌가 싶어요. 인물과 무대 설정을 다른 시대로 바꾸고 자신이 새롭게 익힌 일본화의 기법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른바 은유로서의 고백을 시도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서양화를 버리고 일본화로 전향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들 정도예요."
p. 503 : 28 프란츠 카프카는 비탈길을 좋아했지
조금이라도 깊어지는가. 그 말일세."
나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프란츠 카프카도 알고 계셨던 건가요? 개인적으로?"
"그쪽은 물론 개인적으로 나를 모르지만 말일세." 기사단장은 말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것처럼 쿡쿡대며 웃었다. 기사단장 이 소리내어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프란츠 카프카에 게 그렇게 쿡쿡 웃을 만한 무슨 요소가 있는 걸까?
곧이어 기사단장이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진실은 곧 표상이고, 표상은 곧 진실이지. 그러니까 눈앞의 표상을 통째로 꿀꺽 삼켜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이야. 거기에는 억지 논리도 사실도. 돼지 배꼽도, 개미 불알도, 아무것도 없다네. 사람이 그외의 방법을 써서 이해의 길을 나아가려는 건 흡사 물에 소쿠리를 띄우려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내 말 듣게나. 그런 건 그만두는 게 좋네. 안됐지만 멘시키 군이 하고 있는 일도 별 반 다르지 않아."
"다시 말해 뭘 하든 어차피 헛된 시도라는 겁니까?"
"구멍 숭숭 뚫린 물건을 물에 띄우는 건 누구에게나 의미 없는 짓이지."
"멘시키 씨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요?"
기사단장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말런 브랜도가 떠오를 만큼 매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단
p. 509 : 28 프란츠 카프카는 비탈길을 좋아했지
이쯤 여유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이틀 뒤면 답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이를 뒤에 다시 전화드리지요멘시키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말해 대답을 하기까지 이틀이나 필요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나는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설령 누가 제지해도 그 일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굳이 이틀의 유예를 받아낸 것은 상대방의 페이스에 고스란히 말려들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쯤에서 잠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편이 좋다고 본능이-그리고 또한 기사단장이 내게 알려주었다.
흡사 물에 소쿠리를 띄우려는 짓이나 마찬가지야기사단장은 말했다. 구멍 숭숭 뚫린 물건을 물에 띄우는 건 누구에게나 의미 없는 짓이지.
그는 무언가를 곧 다가올 무언가를 내게 암시한 것이다.
p. 529 : 30 그런 건 아마 상당히 개인차가 있지 않나
멘시키의 은색 재규어, 여자친구의 빨간색 미니 멘시키가 운전기사를 딸려 보낸 검은색 인피니티, 아마다 마사히코의 검은색 구형 볼보, 그리고 아키가와 마리에의 고모가 운전하는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 물론 내가 모는 도요타 코롤라 왜건도 있다(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 억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마 여러 이유나 근거나 사정에 따라 자신이 운전할 차를 고를 테지만, 아키가와 마리에의 고모가 어떤 이유로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를 선택했는지 내가 알 도리는 없다. 어쨌거나 그 차는 자동차라기보다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보였다.
프리우스의 조용한 엔진이 조용하게 정지하자 주위가 조금 더 조용해졌다. 차문이 열리고 아키가와 마리에와 아이의 고모로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젊어 보이지만 아마 사십대 초반일 것이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심플한 연파랑 원피스에 회색 카디 건을 걸쳤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핸드백을 들고 굽이 낮은 진화 색 구두를 신었다. 운전하기에 적합한 신발이다. 차문을 닫은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에 넣었다. 어깨 정도까지 오는 머리카락에는 아름다운 컬이 들어가 있다(그러나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것처럼 과도한 완벽함은 아니다). 원피스 칼라에 달린 금브로치 말고 눈에 띄는 장신구는 없었다.
p. 556
지금까지 내 길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걸어왔던 길이 갑자기 발밑에서 쏙 사라져버리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허허벌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야.
어디로 가는지 모를 해류건, 길 없는 길이건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다 마찬가지다. 어차피 비유에 불과하다. 아무튼 나는 실물을 지니고 있다. 그 실물 안에 실제로 들어앉아 있다. 그런데 왜 비유 같은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할 수 있다면 편지를 써서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유즈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다.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내고 있어'라는 막연한 표현은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별일 없기는커녕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여기 살기 시작한 뒤로 내 주위에 일어난 일의 전말을 쓰기 시작하면 분명 수습이 힘들어질 것이다. 가장 곤란한 문제는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 자신도 뭐라고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정합하고 논리적인 문맥으로 '설명'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유즈의 편지에 답장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일단 쓰기로 마음먹는다면 지금껏 일어난 일들을 고스란히 (논리고 정합성이고 무시하고) 기록하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 않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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