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단기간에 약 1200쪽에 해당하는 책을 단숨에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엄청 크나큰 감명이 있거나 새로운 사실을 깨우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전개해 나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전체 구성을 치밀하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한줄평만 쓴다면 그다음 페이지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덮을 수 없다 라고 쓰고 싶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4권 째 읽고 있는데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에서 절로 그의 책에 손이 가는 것에 깜짝 놀라곤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소설에 묘사된 많은 씬들을 마치 영화의 한장면이나 한 폭의 그림 또는 사진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상상의 공간과 등장인물 그리고 스토리가 절묘하게 조합되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상식이나 현실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비밀 또는 신비한 것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책에서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기묘한 관념적인 것에 대한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겪었던 것들에 비춰 소설속의 내용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어키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한번 한줄평을 남깁니다. '그다음 페이지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덮을 수 없다.'입니다.
제가 접은 이 소설의 밑줄 그은 부분입니다.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자기가 뭘 찾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긴 횟수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죠. 만나면 만날수록 오히려 혼란만 늘어나고 아무런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 아이는 어쩌면 저와 피를 나눈 친말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상관없습니다. 그 아이를 앞에 두고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손가락으로 가상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새롭고 맑은 혈액을 온몸 구석구석 보낼 수 있어요. 저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지금까지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멘시키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혹은 산다는 것의 정의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멘시키는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의 얇은 문자반을 내려다보고.
버둥거리듯이 어색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이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을 겁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불안한 걸음으로 현관으로가 시간을 들여 신발을 신고 끈을 고쳐 묶은 후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차에 올라타 돌아가는 모습을 현관 앞에서 바라보았다. 재규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위는 다시 일요일 오후의 정적에 둘러싸였다.
34 그리고 보니 최근에 공기압을 재지 않았다 49
그런데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직접 자동차 타이어의 공기압을 재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주유소에서 공기압이 떨어진 것 같으니 재보는게 좋겠는데요"라고 하면 그제야 부탁해 재보는 정도다. 물론 공기압계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모른다. 글러브박스에 들어갈 정도니까 그렇게 크진 않겠지. 모르긴 해도 할부로 사야 할 만큼 비싸지도 않을 것이다. 다음에 한번 사봐야겠다.
주위가 어둑해지자 부엌에 가서 캔맥주를 마시며 저녁을 차렸다. 술지게미에 절인 방어를 오븐에 굽고, 채소 절임을 썰고, 오이와 미역을 식초로 무치고, 무와 유부를 넣어 된장국을 끓였다. 그리고 혼자서 묵묵히 먹었다. 이야기 상대도 없거니와 딱히 할 말도 없다. 그렇게 혼자만의 간소한 저녁을 마쳐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다들 내가 식사를 마치기 직전에 초인종을 누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긴 일요일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34 그러고 보니 최근에 공기압을 재지 않았다 51
"하긴 그렇지." 아마다가 말했다. "그래도 하야마나시에 비하면 훨씬 나아. 한동안 하야마에 살았는데, 여름철에 차로 도쿄를 오가려니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 바다에 놀러 가는 사람들로 도로가 꽉 막히거든. 그냥 왔다갔다하는 것만으로 반나절이 걸려 오다와라 방면은 그 정도로 붐비지는 않으니까 다행이지."
우리는 메뉴판을 훑어보고 런치 코스를 주문했다. 생햄으로 만든 애피타이저와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메인은 새우 스파게티다.
"드디어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 모양이네." 아마다가 말했다.
"이제 홀몸이니 생계 때문에 억지로 그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이 생겼는지도 몰라." 마사히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든 밝은 측면이 있어. 제아무리 어둡고 두꺼운 구름도 뒤쪽은 은색으로 빛나지."
"일일이 구름 뒤로 돌아가서 살펴보기도 번거로울 것 같은데."
"뭐, 일단 이론은 그렇다는 거야." 아마다가 말했다.
"그 산 위의 집에 살게 된 덕도 있는 것 같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기에는 확실히 두말할 나위 없는 환경이니까."
"응, 정말 조용한 곳이지.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산만 해질 이유도 없고. 보통 사람한테는 너무 적막하겠지만 너 같은 녀석이라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어."
문이 열리고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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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았다. 그런 다음 집안에 들어와서 홍차 잔과 포트를 부엌으로 가져가 헹구었다.
그 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턴테이블에 올리고 소파에 누워서 들었다. 할 일이 특별히 없을 때면 <장미의 기사>를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멘시키가 심어준 습관이다. 그의 말대로 그 음악에는 확실히 일종의 중독성이 있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어떤 정서. 구석구석 색채를 지닌 악기 소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는 한 자루의 빗자루도 음악으로 극명히 그려낼 수 있다'고 호언한 바 있다. 어쩌면 빗자루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음악에서는 회화적 요소가 짙게 느껴졌다. 내가 지향하는 회화와는 방향성이 다르긴 했지만,
잠시 후 눈을 떠보니 기사단장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아스카 시대 복장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죽 안락의자에 키 60 센티미터 정도의 남자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오랜만이네요." 나는 말했다. 어디 다른 곳에서 억지로 끌어 온 듯한 목소리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말했다시피 이데아에게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없네."기사단장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서 오랜만이라는 감각도 없지."
"그냥 습관적인 인사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38 그래 가지고는 절대 돌고래는 되지 못해 129
"E=mc"의 개념은 본래 중립이었을테지만 결과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어냈네. 실제로 그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제군이 하고 싶은 말은 이를테면 그런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나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네(말할 것도 없이 이건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네. 이데아에게는 육체가 없고 따라서 가슴도 없으니까. 그런데 말일세. 제군, 이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카베아트 엠프토르 caveat emptor거든." "네?"
"카베아트 엠프토르 라틴어로 '매수자 위험 부담'이란 뜻이지. 남의 손에 넘어간 물건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파는 쪽 에서 관여할 일이 아닐세. 예를 들어, 옷가게에 걸린 옷이 누구 몸에 입혀질지 옷가게 주인이 고를 수 있나?"
"왠지 억지 논리처럼 들리는데요."
"E=mc'은 원자폭탄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것도 많이 만들었어."
"예를 들면요?"
기사단장은 잠시 생각했지만 적당한 예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지 입을 다물고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면 그런 토론에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업실에 두었던 방울의 행방을 모르십니까?"
38 그래 가지고는 절대 돌고래는 되지 못해 133
"그렇지. 멘시키 군에게는 늘 어떤 의도가 있어. 반드시 확실하게 포석을 두지, 포석을 두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야. 말하자면 선천적인 질환 같은 거야. 좌우 뇌를 항상 최대한으로 쓰면서 살아가지. 그래 가지고는 절대 돌고래는 되지 못해. 기사단장은 윤곽이 서서히 흐릿해지고 바람 없는 한겨울 아침의 수증기처럼 어렴풋이 퍼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내 앞에는 오래된 안락의자뿐이었다. 그곳에 남겨진 부재가 너무 깊어서 그가 방금 전까지 정말 내 눈앞에 앉아 있었는지조차 확신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저 공백과 마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나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사단장의 예언대로 멘시키의 재규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키가와가의 아름다운 두 여성은 멘시키의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 골짜기 맞은편의 새하얀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 았다. 시간을 죽일 셈으로 부엌에서 요리 재료를 만들어두었다.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를 우린 물에 야채를 삶고, 얼릴 수 있는 것은 냉동실에 넣었다. 생각나는 일거리를 다 해치우고도 시간이 남아서, 거실로 돌아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마저 들으며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아키가와 쇼코는 멘시키에게 호의와 흥미를 갖고 있다.
38 그래 가지고는 절대 돌고래는 되지 못해 135
이런 부탁을 해버렸군요. 치는 내일 가지러 오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요?" 멘시키가 물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하겠습니다. 기분이 상하진 않아요."
"일전에 결혼을 하셨다고 했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했었습니다. 실은 바로 얼마 전 이혼 서류에 서명해서 보낸 참이에요. 그러니 현재 정식으로는 어떤 상태인지 잘 모릅니다. 어쨌거나 결혼생활을 했었습니다. 육 년 " 정도지만요.
멘시키는 잔 속의 얼음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물었다. "캐묻는 꼴이 되는데, 이혼이라는 결과를 맞닥뜨리고 후회하신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그에게 물었다. 매수자 위험
부담'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뭐였죠?"
"카베아트 엠프토르,"멘시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직 외우지는 못했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이해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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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두 개 챙기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냈다. 위스키를 잔에 따르니 무척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여는 듯한 소리다. 우리는 위스키를 마시며 음식 준비를 했다.
"둘이 이렇게 느긋하게 마시는 건 꽤 오랜만이다." 아마다가 말했다.
"그러게. 옛날엔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아니, 많이 마신 건 나였지." 그는 말했다. "넌 옛날부터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어."
내가 웃었다. “네 눈에는 그럴지 모르지만 내 기준으로는 그것도 꽤 과음한 거야."
나는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신 적이 없다. 대개는 만취 전에 졸음이 와서 잠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다는 그렇지 않았다. 한번 작정하면 끝도 없이 마시는 타입이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회를 먹고 위스키를 마셨다. 그가 함께 사온 싱싱한 생굴부터 네 개씩 먹고 도미를 먹었다. 즉석에서 뜬 생선회는 무척 신선하고 맛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살이 좀 단단했지만 술을 곁들여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먹었다. 결국 둘이서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배가 제법 불렀다. 생굴과 회 말고 먹은 것이라곤 바삭바삭하게 구운 생선 껍질과 고추냉이 절임, 두부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을 먹었다. "오랜만에 호화롭게 먹었네." 내가 말했다.
42 바닥에 떨어뜨려 깨지면 달걀이지 187
"웬만하면 해가지고 나서는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밤에는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내가 말했다.
이 일대의 어둠 속에는 온갖 정체 모를 것이 도사리고 있다. 기사단장과 '긴 얼굴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아마다 마사히코의 생령. 그리고 아마도 나 자신의 성적 분신인 몽마까지 나조차 경우에 따라서는 밤의 어둠 속 불길한 무언가가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희미한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되도록 해지기 전에 올게요." 마리에가 말했다.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둘이서만."
"알았어. 기다릴게."
이윽고 정오 차임이 울려서 나는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아키가와 쇼코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두툼한 책이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그녀가 안경을 벗더니 가름끈을 끼워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작업은 잘되고 있어요. 앞으로 한두 번 더 와주시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아키가와 쇼코는 미소 지었다. 아주 기분 좋은 미소였다. "아니에요.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마리에는 모델 일이 즐거운 것 같고, 저도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 소파는 책을 읽기에 아주 좋거든요.
44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해주는 특징 같은 것 221
"물론이죠."
"저는 가끔 저 자신을 그저 무라고 느낍니다." 멘시키가 고백하듯이 말했다. 엷은 미소가 아직 입가에 걸려 있었다.
"무, 라고요?"
" 텅빈 인간 말입니다.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껏 저 자신이 제법 똑똑하고 유능한 인간이라고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감도 좋고, 판단력과 결단력도 있습니다. 체력도 타고났고요. 어떤 일에 손대도 실패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원하는 것은 거의 전부 손에 넣었습니다. 물론 도쿄 구치소 일은 명백한 실패지만, 그런 예외는 몇 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 될 거라 생각했지요. 세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장소에 닿을 거라고요. 하지만 쉰을 넘기고 거울 앞에 서서 발견한 것은 그저 텅 빈 인간이었습니다. 무입니다. T. S. 엘리엇이 말한 빈 부분을 지푸라기로 채운 인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전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디선가 잘못된 방법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의미한 일만 잔뜩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당신을 보고 있으면 곧잘 부러워지는 겁니다." "이를테면 어떤 점이요?" 내가 물었다.
48 스페인인은 아일랜드 앞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297
이 하늘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나는 그 똑바른 선을 끝에서 끝까지 눈으로 좋았다. 그토록 길고 아름다운 직선은 어떤 자를 써도 인간의 손으로는 그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 아래에는 무수 한 생명이 약동하고 있을 터였다. 이 세계는 무수한 생명과 그 리고 그것과 같은 수의 죽음으로 가득하다.
문득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안에 아마다 도모히코와 나 둘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맞아, 제군들은 이 방에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니야." 기사단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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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내게는 풀어야 할 몇가 지 의문이 있었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왜 그 사건에 대해서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세월 침묵을 지킨 거죠? 더는 그의 발언을 저지할 게 없었는데도요.'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의 연인은 나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됐네. 오랫동안 고문당하며 서서히 죽어갔지. 다른 동료도 모두 말살됐어.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무위로 끝난 걸세. 오직 아마다 도모히코만 정치적 배려에 의해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그 일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네. 그 역시 체포되어 두 달간 게슈타포에 구류된 채 지독한 고문을 받았어. 고문은 죽지 않을 만큼만, 또한 몸에 흔적이 남지 않게끔 주의 깊게. 그러면서도 철저히 폭력적으로 가해졌지. 신경이 망가져버릴 정도로 사디스틱한 고문이었어. 그리고 그 결과, 실제로 그의 안에서 뭔가가 죽어버렸을 테지. 그 뒤로 그는 사건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일본에 강제 송환됐네."
그리고 그에 앞서 아마다 도모히코의 동생이 아마도 전쟁 트라우마로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 공략전을 치르고 귀국해 제대한 뒤에 곧바로 그렇죠?"
"그렇다네. 아마다 도모히코는 역사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 서 더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연이어 잃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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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손의 힘을 빼고 기사단장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 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그려진 광경과 똑같이 칼을 뽑자 버팀목을 잃은 기사단장은 의자에 힘없이 쓰러졌다. 눈을 크게 부릅떴고, 입은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양손의 작은 열 손가락은 허공으로 내뻘은 채였다. 그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하고 피가 발밑에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작은 몸에 비해 놀랄 만큼 많은 양의 피였다.
그렇게 기사단장은-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는-끝내 숨을 거두었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깊은 혼수상태로 돌아갔다. 의식을 지니고 지금 이 방에 남아 있는 존재는 피로 물든 아마 다 마사히코의 식칼을 오른손에 틀어쥐고 기사단장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뿐이었다. 내 귀에 닿는 것은 스스로의 거칠고 가쁜 숨소리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내 귀는 또 다른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것은 소리와 기척 사이에 있는 무언가였다. 귀를 기울이게나, 기사단장이 말했다. 나는 그 말대로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가 이 방안에 있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나는 피로 물든 날카로운 흉기를 손에 쥔 채 그 자세 그대로 눈만 움직여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긴 얼굴이었다.
나는 기사단장을 죽임으로써, 긴 얼굴을 이 세계로 끌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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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의 물건을 보여주게." 얼굴 없는 남자가 말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펭귄 장식품을 보여주었다.
얼굴 없는 남자가 공백의 눈으로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이거면 되네." 그가 말했다. "이걸 뱃삯으로 하지."
이것을 남자에게 건네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건 아키가와 마리에가 소중히 가지고 다니던 부적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멋대로 다른 사람에게 내주어도 될까? 그 탓에 아키가와 마리에의 신변에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을 얼굴 없는 남자에게 내주지 않으면 강을 건널 수 없고, 강 건너편에 다다르지 못하면 아키가와 마리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다. 그러면 기사단장의 죽음도 헛되이 만드는 셈이다. "이걸 뱃삯으로 드리겠습니다." 나는 과감하게 말했다. "저를 강 건너편까지 데려다주세요."
얼굴 없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언젠가 자네에게 내 초상화를 부탁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그때 이 펭귄 인형을 돌려주지."
남자가 앞장서서 나무 돌제 끄트머리에 매인 작은 배에 올라탔다. 납작한 과자 상자처럼 각이 진 배였다.
5 영원은 아주 긴 시간이지 397
이곳으로 돌아와 쉬지. 저곳으로 드나들어."
나는 철망이 찢어진 통풍구를 가리켰다. 마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얕고 조용한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수리부엉이를 바라보았다. 수리부엉이는 우리를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제자리에서 조용히 사려 깊게 쉬고 있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 집을 나눠 쓰고 있는 것이다. 낮에 움직이는 존재와 밤에 움직이는 존재로서 이곳에 있는 의식의 영역을 절반씩 나눠 쓰고 있다.
마리에의 작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나와 동생 고미도 이렇게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사이좋은 남매였다. 언제든 자연스레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마리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 안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것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손이 뺨에 닿았을 때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마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처럼 따뜻한 눈물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이 소녀는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울 수가 없었다. 아마도 꽤 오래전 부터. 나와 수리부엉이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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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가 이어졌다. 아름답게 다듬은 철쭉 덤불, 머리 위로는 색이 밝은 소나무가 가지를 뻗었다. 그 너머에 정자 같은 곳이 있었다. 리클라이닝 소파가 놓여 있어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듯했다. 커피 테이블도 보인다. 여기저기 등과 정원 등이 서 있었다.
이윽고 마리에는 저택을 한 바퀴 돌아 골짜기 쪽으로 나왔다. 그쪽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지난번 방문 때도 와본 곳이다. 멘시키는 이곳에서 우리 집을 관찰하는 거라고. 그녀는 테라스에 선 순간 알아차렸다. 그 기척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마리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자기 집 쪽을 바라보았다. 골짜기 너머 바로 정면이었다. 허공으로 손을 뻗으면 (그리고 만일 그 사 람의 팔이 상당히 길다면 닿지 않을까 싶은 거리에 여기서 그녀의 집은 완전히 무방비로 보였다. 그 집이 지어질 당시 골짜기 너머에 다른 집은 한 채도 없었다. 건축 규제가 완화되어 이쪽에 주택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그래도 십 년은 넘은 일이지만). 그래서 그녀가 사는 집에는 골짜기 맞은편의 시 선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활짝 열린 상태나 다름없다. 고성능 망원경이나 쌍안경을 쓰면 집안까지 들여다보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방도 창문을 통해 제법 확실히 보일 터였다. 물론 그녀는 조심성 많은 소녀였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반드시 창문의 커튼을 쳤다.
60 만일 그 사람의 팔이 상당히 길다면 507
마리에는 그 확실한 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각오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자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 남자는 멘시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남자는 결국 문을 열지 않았다. 잠깐 주저하다가 손을 거두어 그대로 붙박이장 앞을 떠났다. 왜 마지막 순간 생각을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무언가가 그의 행동을 제지한 것이리라. 남자는 이어서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다시 문을 닫았다. 방안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틀림없다. 트릭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방에는 이제 나뿐이다. 그녀는 확신했다. 가까스로 눈을 감고, 온몸에 쌓여 있던 팽팽한 공기를 크게 토해냈다.
심장이 아직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한다 -소설이라면 그렇게 표현하리라. 두방망이질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마지막 순간 나를 지켜주었다. 그렇긴 해도 이 장소는 너무 위험하다. 그 누군가는 이 방에서 내 기척을 느꼈다. 틀림없이 언제까지나 여기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행운이 따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녀는 다시 기다렸다. 방안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그래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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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용기가 있어. 그건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지.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조심 또 조심하라고 모쪼록 방심하지 말게. 여기는 여느 평범한 장소가 아니니까. 성가 신 것이 배회하는 곳이야."
"배회?"
"어슬렁거린다는 뜻이네."
마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여느 평범한 장소와 어떻게 다른지, 대체 어떤 성가신 것이 배회하는지 더 알고 싶었지만 뭐라고 질문할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다.
"난 이제 여기 못 올지도 모르네." 기사단장이 비밀을 고백하듯이 말했다. “이제부터 가봐야 할 곳도 있고 다른 할 일도 있거 든 무척 중요한 용건이야. 그러니까 대단히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제군을 도와줄 수 없겠어. 나머지는 제군이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수밖에."
"그렇지만, 제 힘만으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죠?" 기사단장은 실눈을 뜨고 마리에를 보았다. "귀를 잘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날카롭게 버려두는 걸세. 그것밖에 길이 없어. 그리고 때가 오면 제군도 알 것이야. 오, 지금이 바로 그때 구나 라고. 제군은 용감하고 총명한 아이야, 주의를 게을리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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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멘시키 씨가 알아챌 일도 없다. 하지만 방안에서도 근처 어디서도 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어둠에 섞여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까? 어디선가 사다리를 찾아내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는 거다. 정원의 자재창고에서 접이식 사다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곧 기사단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여긴 경계가 삼엄한 곳이야. 여러 의미로 감시가 철저하지. 그리고 '경계가 삼엄하다'는 말은 경비회사 시스템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터였다.
기사단장의 말을 믿어야겠지. 마리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다. 여러 가지가 배회하는 장소다. 조심해야 한다. 인내심을 한껏 발휘해야 한다.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다. 기사단장의 말대로 당분간 여기서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자. 그리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거다.
때가 오면 제군도 알 것이야. 지금이 바로 그때구나 라고. 제 군은 용감하고 총명한 아이야.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래, 나는 용감하고 총명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말짱하게 살아남아서 이 가슴이 좀 더 커지는 것을 지켜봐야지.
그녀는 매트리스에 누운 채 생각했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졌다. 바야흐로 한층 깊은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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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깊은 미로 같은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멘시키는 그런 미로에 제 발로 들어가기를 꺼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마리에는 그가 그 미로에서 참을성 있게 돌아다니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연습은 한 시간쯤 이어졌다. 그런 다음 그랜드피아노 뚜껑을 탕하고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에서 짜증 섞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강한 짜증은 아니다. 적당하고 품위 있는 짜증이다. 멘시키 씨는 설령 넓은 저택에 혼자 있을 때도 혼자라고 믿고 있을 때도 자제심을 잃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남은 하루는 전날과 똑같이 반복되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까마귀들이 울면서 산속 둥지로 돌아갔다. 골짜기 맞은편의 집 몇 채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아키가와가의 불빛은 자정이 지나고도 꺼지지 않았다. 그 불빛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적어도 마리에는 그렇게 느꼈다. 저곳에서 속을 끓이고 있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와 대조적으로 역시 골짜기 맞은편에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즉 내가 사는 집이다)에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같았다. 해가 진 뒤에도 불빛 하나 없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싶어 마리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은 어디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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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에는 그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이 그림에는 지금의 내 생각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고 했다). 괜찮다면 자기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를 기꺼이 그녀에게 주었다(약속했던 석 장의 데생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오히려 더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림이 미완성이면 나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완성 상태인 것 같으니까 멋지잖아요." 마리에는 말했다.
“완성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 까지나 미완성이야."
"멘시키 씨도 그래요?" 마리에가 물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데."
"멘시키 씨도 아마 미완성일 거야." 내가 말했다.
멘시키는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밤마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을 찾아 고성능 망원경으로 골짜기 맞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비밀을 지님으로써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의 균형을 교묘히 컨트롤 한다. 그에게 비밀은 서커스의 외줄타기 곡예사가 들고 있는 장대 같은 것이다.
물론 마리에는 멘시키가 망원경으로 자기 집을 관찰한다는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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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도 잘 모른다.
"어쨌거나, 당신은 그 아이를 낳을 생각이네." 내가 말했다. 유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예전부터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 적어도 우리 사이에 서는."
그녀가 말했다. “응, 나는 예전부터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 우리 사이에서도 다른 누구와의 사이에서도."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아이를 제 뜻으로 이 세상에 내보내려 하잖아. 혹시 마음만 먹었다면 더 일찍 중절할 수도 있었는데."
"물론 그런 생각도 했고, 고민했어."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인데." 유즈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임신해버린 것도 그런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런 얘기는 흔한 운명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게 느꼈어. 매우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도록.
63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581
그래도 나는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그는 아키가와 마리에가 자기 아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밸런스 위에 자신의 인생을 구축하고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 내려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귀찮은(적어도 자연스럽다고는 하기 힘든 작업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황량한 황야에 버려진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순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오다와라 근교의 산머리 집에 살면서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체험을 통해 배운 점이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새벽의 화재로 영원히 소실되어버렸지만, 그 훌륭한 예술작품은 내 마음속에 지금도 실재한다. 나는 기사단장과 돈나 안나와 긴 얼굴의 모습을 눈앞에 선명히 떠올 릴 수 있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그들을 생각하면 드넓은 저수지 수면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때처럼 기분이 지극히 고요해진다. 내 마음속에서 그 비가 그치는 일은 없다.
나는 아마 그들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그리고 무로는, 내 어린 딸은,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은총의 한 형태로,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나는 옆에서 곤히 잠든 모로를 향해 말했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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