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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스물 네 번째 책 :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교수

by 마파람94 2021. 6. 21.

스물 네 번째 책입니다.

 

국어교육학과 교수인 저자의 글 솜씨가 책 속에 녹아 있습니다. - 이것은 책을 이것저것 읽으면서 생겨난 습관인 듯 합니다. 번역 글에서 볼수 없는 묘미랄까요... - 이 책 속의 문장들은 읽기 쉽고 공감이 되며 세련된 표현이 돋보이는 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내용에서 느낀 점은 같은 내용인데도 어떻게 표현하여 전달하는지에 따라 마음속에 새겨지는 크기가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공대에서 11년을 공부한 입장에서 '시를 잊은 그대에게' 라는 제목과 부제목으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라는 책 제목이 나를 위해 지은 책 같아 보였습니다.

 

책을 모두 읽고 유튜브의 정재찬 교수의 강연을 보면 효과 만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모든 공대생들에게 강추하는 책이 되겠습니다.

 

 

 

 

34

아침 볼 요량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그저 히든수작 삼아 오랜 운전으로 피곤한 허리를 펴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오! 신이시여! 내 평생 그토록 많은 별은 본 적이 없다. 사막 위의 맑은 하늘 탓일까. 말 그대로 별이 쏟아진다. 별빛은 쉬 없이 내 눈 속으로 달려들고 이내 눈이 시려진다. 이러다 무릎이 꺾일라. 그랜드캐니언의 감동도 이내 그 지위를 내주고 말았다. 그 어떠한 지상의 장관도 이런 경이는 없다. 그뿐이랴. 무지개와 노을 조차 고작 대기권을 벗어나지 못한 헛것. 빛의 산란에 불과한 것. 헌데 저 하늘 너머 저 많은 실체가 지금 이렇게 수억 년의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나와 교접하고 있지 아니한가.

어둠이 밝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때론 밝음이 어둠을 가리는 것이란 생각을, 그때 나는 처음 하고 있었다. 밝음이 가시고서야, 무지개와 노을 어울린 하늘 저 대기권 장막 너머로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어둠이 와야 어둠조차 가릴 수 없던 참빛이 드러나리니별이 빛나는 그날 밤 나는 가장 위대한 우주의 서사시 신의 시를 보았던 것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 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 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 중에서



40 : 별이 빛나던 밤에

별에 관한 모든 몽상은 이러한 별의 아이러니한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자를 배운 다음 우리가 만난 별에는 또 어떤 것이 있었다. <어린 왕자》의 소행성 B-612도 있고, 황순원의 <별>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별별 별을 다 만나 보았을 것이다. 이병기의 시조에 이수인이 곡을 붙인 별도 꽤 많이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가 잊지 못하는 별 중 하나는 오랫동안 중 ·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바로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 의 <별>이 아닐까 싶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원작의 맛을 살려 요약해 보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외로이 양을 치는 목동, 내 나이 스무 살, 나는 주인집 따님 스테파네트를 흠모한다. 어느날 뜻밖에도 그녀가 일꾼들을 대신해 목동의 양식을 갖고 산으로 찾아온다. 오, 귀여운 모습!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스커트 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며, 깜찍한 것이 일부러 얄궂은 질문을 던지고는,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는다. 마침내 아가씨는 빈 바구니만 들고 떠난다. 헌데 저녁 무렵, 아가씨가 그만 흠뻑 물에 젖어 다시 돌아온다. 돌아갈 길 없게 된 그녀. 이제 우리 둘만이 이 깊은 산 중에 함께 있게 된 것. 기어이 밤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아가씨를 위해 울안에 새 짚과 모피를 깔아 주고 나왔다.

 

이때까지 밤하늘이 그렇게도 유난히 깊고, 별들이 그렇게도 찬란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녀가 밖으로 나온다. 나는 염소 모피를 벗어 아가씨 어깨 위에 걸쳐 주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리고 우리 둘이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았다. 무슨 바스락 소리만 들려도 그녀는 바싹 내게로 다가들었다. 바로 그 찰나에 아름다운 유성이 한 줄기 우리들 머리 위를 스쳐 갔다. 그녀에게 나는 밤하늘의 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득 내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느껴졌다. 리본과 레이스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앙증스럽게 비비대며 잠든 그 녀의 얼굴을 지켜보며 나는 꼬빡 밤을 새웠다. 가슴이 설레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 맑은 밤하늘의 비호를 받아, 어디까지나 성스럽고 순결함을 잃지 않았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스치곤 했다. 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님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 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다시 읽어 보아도. 도무지 이 소설엔 소설이라 할 만한 사건이 보이질 않는다. 산속에서 두 남녀가 별을 쳐다보다가 아무 일 없이 잠드는 일 빼 곤 별 볼일이 없지 않은가? 이런 의심이 들 땐 빨리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사건 없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사건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다. 남녀가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별 사건이 없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설을 이루는 사건인 것이다.

'알퐁스 도데가 이 소설을 쓸 무렵 프랑스 사회는 성적으로 문 란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소설을 처음 접하는 당시의 독자들은 야릇한 성적 호기심으로 이 소설의 전개 과정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보니 우리 눈에도 이 소설의 등장인물과 배경이 심상치 않다.


49 : 별이 빛나던 밤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 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운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야말로 별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헤고 있다. 이름까지 붙여가며 말이다. 그런데 잘 보라, 처음엔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등과 같은 정서적이지만 추상적인 어휘가 연결되더니, '시' 를 거쳐 그만 '어머니'에 다다르면 어조가 바뀐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연결할 때는 어딘가 멋과 여유마저 느껴지는 듯하더니,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시인은 연거 푸 어머니를 되뇌며 뭔가에 걸리거나 홀린 듯이 아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저 별 하나에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이름과 개념을 부여하다 가, 어찌어찌하다 그 연상의 과정이 '시'로 이어지고, '시'는 급기 야 '어머니'를 호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덜컥 '어머니'를 불러 놓고 보니 느낌이 달라지고 시가 달라지는 게다 그렇다. 별에 대한 연상이 추상에서 구체로 관념에서 육체로 이행해 가면서, 시인은 어머니를 떠올린 순간부터 그리움에 몸 서리를 치게 된다. 그렇게 한번 그리움의 물꼬가 터지자 그다음 부터의 연상은 차라리 폭포수에 가깝다. 이제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들이 기억 저편에서 마치 저 하늘의 별처럼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젠 거꾸로 별이 모자랄 지경이다. 아까까지는 시행 하나에 이름 하나 붙이더니, '어머니'를 떠올린 이후 호흡은 빨라지고 시행은 길어진다. 그는 마치 토해 내듯이 어머니에게 그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하나 전하고자 한다. 소학교 때 친구부터 비둘기, 노루 따위를 거쳐 릴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여리고 순수하고 선한 존재다. 잊고 있던 수많은 고맙고 그리운 이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시상대에 선 수상자라도 된 듯이 윤동주는 하나하나 호 명한다.

그리운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만날 수 없으니 또 얼마나 고통인가. 그러기에 윤동주는 그 잠시의 행복한 추억이 끝나는 순간 고통스럽게 인정한다"이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듯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별은 그런 거라고 밝게 빛나 기쁘고 멀리 있어 슬프다고 어찌할꼬. 그리움도 추억도 그러한 것을 그리움 덕택에 살고 그리움 때 문에 못 살겠는 것을.



109 그대 등 뒤의 사람

 

이 시를 모르는 탓이리라 그러니 이제라도 서둘러 이 시를 보자.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1958년, 미당 서정주 1915~2000는 《현대문학》 11월호 에 신예 시인 하나를 추천한다. "지성을 서구적 기질에 의해 흉내 낼 줄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속에서 귀하고 중요한 지 성의 움직임을 발견했다고 고평하면서 말이다. 놀랍게도 이 지 성'의 주인공은 약관의 나이, 곧 스무 살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이이가 바로 황동규 다.

황동규는 1938년 평안남도에서, 본인은 이렇게 불리길 좋아하지 않지만, 소설가 황순원 1915~2000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고등학생 시절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작곡가를 꿈꾸다가 청음은 뛰어나나 발성에 자신이 없다는 성악가라면 모를까 아무튼 이해 못 할 이유로 그 꿈을 접고 그 대신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 문단의 편에선 운명이랄까, 그의 이 기이한 선택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실 <즐거운 편지>는 고3 시절 짝 사랑하던 한 살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로, 고등학교 졸업 때 교지에 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듬해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문학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물론 이런 사실이 시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는 아니다. 공부 잘한다고 좋은 시인도 아니며, 저러한 이력은 아무나 흉내 낼 일도 아니다. 다만 공부 때문에 게임을, 또는 게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지금의 청소년들이 안타까워 굳이 밝혀 둘 따름이다

황동규의 등단작 <즐거운 편지>는 이처럼 비록 열여덟 살짜리 애송이가 쓴 시이지만, 국민의 애송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조숙하다. 먼저 1연을 보라. 단 하나의 제법 긴 호흡의, 아주 일상적인 어휘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시를 이룬다. 그러나 산문처럼 늘어지지 않고 시상의 전개와 호흡의 흐름이 적당한 긴장을 이루면서도 잔잔하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능숙하다. 그냥 읽다 보면 처음엔 어려워 보이지도 않고 세세한 내용을 따져 보기도 전에 그저 뭔가 있어 보이는 그 분위기. 여기에 많은 이들이 홀려 이 시를 자기의 연애시나 애송시로 삼았으리라.


112

당신은 고소영이나 수지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진정 어려운 일에 부닥쳐 한없는 괴로움에 빠질 때 그때 그대를 도울 사람, 그대가 의지할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극점에 빛나는 오로라도 대 양을 뒤집는 태풍도 아니다. 당신이 온전히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해질녘 노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는 바람일 게다. 당신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의 등 뒤에 서 벗어나 그대 앞에 서리라. 그리고 그대를 불러 보리라.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을 지켜 온 자이 니 말이다. 그대여 그때 가거들랑 나를 인정하고 내게 의지하라. 나처럼 당신을 오랫동안 조용히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기다린 자가 있던가 지금 사소해 보이는 내 존재가 과연 그때도 사소 할 것이냐. 나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그런 사람, 당신을 지키는 그대 등 뒤의 사람인 것이다

이 시를 이렇게 읽으면 아닌 게 아니라 <편지>의 '환유'가 아내 '정인'에게 이 시를 읽어 준 것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릇 신기한 것과 신비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잘리고 사람이 사라지는 마술은 신기하지만 신비하지는 않다. 그런다고 사람의 상처 하나 고친 적이 마술은 없다. 반면에 자연, 우주, 생명 같은 것은 신비한 일이지 신기하다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경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기에 홀려 신비 를 잊는다. 마치 마술에 홀려 현실을 잊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가짜 가치에 흘려 우리는 진짜를 잊고 산다. 말하자면 신비하지만 사소해서 그 가치를 몰라주는 일이 너무도 많은 게다.


153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뜰 것이다. 하지만 버스가 그냥 지나치거나 만원이 올라타지 못하면 많이 슬플 것이다. 한 눈을 팔아 놓쳤더라면 제 눈을 찍고 싶어질 게다. 그래도 또 다음 버스가 있으면 또 기다리면 되고 어쩌면 경험의 교훈을 좋아 이 번엔 힌두 정거장 앞으로 걸어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기다림은 결국 시간과 변화의 문제다. <어린왕자> 여우의 말이 기억나는가?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 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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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 노래를 있는 사람

림자'란 말인가? 연애 시 제목 같지 않은가? 꽤 오래전, 지금은 <대장금>의 '한 상궁'으로 유명해진 탤런트 양미경이 처음 데뷔한 텔레비전 단막극 제목이 바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거니와 아니나 다를까 제목이 암시하듯 그 드라마는 떠나간 옛사랑을 잔잔하게 회의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드라마의 작가는 김광규 시의 내용을 모른채 제목만 잘못 빌려 온 것일까? 실은 많은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김광규야말로 다른 곳에서 이 제목을 빌려 온 것이다. 멕시코 출신의 트리오 '로스트레스 디아망테스 Los Tres Diamantes"가 발표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라틴 음악의 고전, <루나나 una Menu>의 한 국어개사 작품 제목이 바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던 것. "푸른 저 달빛은 호숫가에 지는데 옛사랑 부를 때 내 곁엔 희미한 그림자, 사랑의 그림자여"로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우리나라 가요계에 중창단 전성시대를 연 '블루벨즈'란 그룹이 1969년에 발표한 번안곡으로서 원곡에 못지않은 감미로운 화음과 근사한 휘파람 소리로 적지 않은 호응을 얻은 노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김광규야말로 대중에게 사랑노래로 잘 알려진 친숙한 제목을 따다가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 셈이었던 것. 게다가 이 시를 읽는 동안, 아련한 옛 추억을 더듬는 원곡의 은은함을 배경 음악으로 삼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으니 이를 두고 일석이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독자 대중이 변하였으니 그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된 셈이다. 


 

200

한이 많아 떠나지 못할 목숨이라면, 죽음의 재료로 아편을 택한 것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한'이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우리의 전통적 정조라 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럴 땐 예로 설명하는게 요령이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 브라질을 만나 5 대 0으로 지고 있다고 하자. 그럴 때는 오히려 한이 맺히지 않는다. 한은커녕 인심만 후진 다. 자포자기하여 겉으로는 "아예 10대 0을 채워라", "이 참에 기록 한번 세워 보자" 등 한 마디씩 하며 화를 대신해 보지만 속은 의외로 편안할 것이다. 헌데 월드컵은 커녕 아시안컵 경기에서 일본에 1 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에 동점골을 내주고, 경기 종료 5분을 남겨 놓고 주심의 오심으로 페널티킥을 허용해 2 대 1 로 역전당하면 그때부터 우린 조용해진다. 아무도 농담을 함부로 꺼낼 수 없고 그만하면 잘했다거나 전에 브라질한테 당할 때 보단 낫다거나 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밥맛도 없고 속이 답답해져 온다. 심하면 잠도 잘 안 온다. 이게 바로 한이다. 증거를 댈까? 그로부터 4년 후, 다시 아시안컵에서 일본과 맞붙어 승리하게 되면 다음날 신문 기사 제목은 보나 마나 뻔하다.

 

"4년 전 한 되갚아!!"

김소월의 한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그럼 하지, 그냥 갈까. 그럼 가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되돌아선다. 어릴 적부터 듣고 배운 것이 그런 것이기에 김소월 시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슬프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게 만든다. '한'이란 이처럼 복합적인, 그래서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 감정이다. 특히 <산유화>의 저만치'라는 시어처럼 김소월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어도 드물다. 그는 늘 자신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내 눈앞에 피어 있으면, 똑 따면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저기, 도저히 손이 가 닿을 곳 없는 곳에 있으면 쳐다보지 않고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은 꼭 저만치' 피어 있는 게다. 그냥 가자니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딸 수 있을 것 같고, 따려고 하자니 건너편 절벽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이라 위험해 뵈기도 하고, 아마 또 그렇게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간만 흐르고 그는 돌아서야 했을 것이다. 그의 운명처럼, 그래서 늘 그의 시를 읽으면 읽는 우리가 답답해지고 한이 맺히는 듯하다.

그러니 소월의 한을 집단적 전통이나 식민지 민중의 심정과 기계적으로 결부짓곤 하는 상투적인 해석과 이젠 결별하자 그의 한은 사무치게 개인적이다. 그것은 또한 관념이 아니다. 시에 담긴 그의 처절한 삶, 그 한의 질과 농도에 유념해 귀를 기울여 보라, '아버지'는 아버지이되, '부모'가 될 수 없었던 이를 아버지로 두었던 소월의 상처를 아프게 바라봐 주고, 시를 통해 흘러나 오는 그의 신음을 공감하며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시인에게 먼저 베풀어야 할 도리가 아닐까? 그런 연후에 그에게 '민족 시인'이라는 월계관을 씌워 드리자. 부를 상실한 그의 한이 국가라는 어버이를 잃은 우리 민족의 한과 통하였으니, 그리하여 한 개인의 애틋하고 가슴 아픈 정한이 우리의 집단적 정서로서 한과 긴밀히 연결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니, 아무래도 순서가 이렇게 되어야 소월에 대한 올바른 이해리라.


 

204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냈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 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 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 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없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겨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이 시에는 아무래도 시인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다. 그의 집이 광산과 맺어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 되면서부터였다. 때는 광산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등 빈민이 모여들면서 광산은 나날이 팽창해 갔다. 다닥다닥 붙은 수백 채의 움막, 술집도 즐비하여 온종일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삼촌이 자본주를 끌어들여 시작한 광산 경영은 마침내 그의 아버지도 끌어들이게 되고 광산에 일단 손을 댄 이상 계속해서 화약상 금 방앗간 금분석 등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다. 그는 명절이 오면 이십여 명의 광부들이 집에 모여 돼지를 잡고 순대를 삶으며 웅성대던 모습이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한다.


207 :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러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시인은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던 성싶다. 아버지를 가엾게 생각한 일도 없고 그래서 늘 스스로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여겼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거울을 보고 놀란다. 거울 속엔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가 감상적인 화해로 끝나는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이 시는 자기 연민의 시로 읽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다 보니 기 한번 못 펴고 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자기 연민을 느끼는 내용으로 이해됨 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긴 그늘 탓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내' 가 '내'가 아니라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 늙고 초라한 '아버지'로 존재함을 깨닫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게 들린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그 또한 아버지의 그늘임은 이제 더 이상 말할 나위 없다. 이것은 묘한 화해와 긍정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해도 결국 닮고 만 인생, 닮지 않는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성공이 아닌 삶임을 인정하는 사람, 스스로는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그의 자식이 또 그렇게 살지는 않겠노라며 곁을 떠나간 경우 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아버지를 닮고 마는 것도 이 시의 제목처럼 아버지의 그늘 탓이지만, 아버지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결국 아버지의 그늘 탓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늘'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라.


 

 

218

운명적이기에 충분히 극적인 것이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다만 권상우와 함께 열연했던, 당시만 해도 낯선 아역 신인에 불과했던 문근영, 그녀의 "그 큰 눈에 하나 가득 눈물 고이던 모습만이 가사의 느낌을 여실히 전해 주었을 따름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긴 하나 마찬가지로 그런 점에서 나는 가슴을 후비고 쥐어짜는 듯한 지영선의 리듬 앤 블루스 풍 편곡 보다 좀 더 순수하고 맑게 들리는 포크송 같은 이 노래의 원곡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1983년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강영철과 메인 보컬을 맡은 양하영으로 이루어진 혼성 듀엣 '한마음', 그리고 이후 솔로로 독립한 양하영이 다시 부른 <가슴앓이>에는 별 과잉이 없다. 어둡지만도 않고 밝지만도 않다. 부를 수만 있다면 듣는 내가 오히려 한 옥타브 더 올려 가슴 터지게 후렴구를 불러 보고 싶은데 정작 가수는 절규에까지 이르지는 않는 수위에서 어쩌란 말 이냐는 말만 반복한다. 그런데 그 반복이 묘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래,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이걸 너무 소리 높여 반복하면 악쓰는 꼴만 되고 만다. 그건 가슴앓이가 아니다.

가슴앓이를 겪어 보았는가 십대든, 이십대든, 아니 늙어서도 운명 같은 만남과 헤어짐의 상처는 정녕 가슴을 앓게 만든다. 그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가슴 부위를 가격 당한 듯 가슴이 아프다. 진짜로 목구멍부터 명치 부위가 때로는 뭔가로 가득찬 듯 답답하게 때로는 텅빈 것처럼 허탄하다. 그럴 때면 절로 한숨이 터진다. 가슴은 산산이 흐트러진다. 아, 어쩌란 말이냐 여기에는 천하장사도 대책이 없다. 사랑 앞에서, 운명 앞에서


224 : 어짜란 말이냐나 흩어진 이 마음을

서른여덟의 청마는 갓 서른이 된 정운의 미모와 재능 앞에서 눈이 멀고 만다. 한복을 즐겨 입던 그녀의 단아한 아름다움은 이미 당대 많은 문우의 마음을 설레게 했거니와 무엇보다 문학을 비롯하여 그녀의 정신세계를 공유하면 할수록 청마는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시와 편지를 바친다. 그러나 정운은 비록 홀몸이긴 하나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고 더욱이 청마는 유부남이었던 것. 정운은 마음의 문을 닫고 청마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청마는 가슴을 앓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꿈쩍도 않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 시는 바로 이런 사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의 편지는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곤 했다. 연애할 때는 누구 나 시인이 된다고 하는 판에, 시인이 연애를 하기 시작했으니 오죽하랴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고자 그는 자신의 가슴앓이를 이토록 처절히 고백하곤 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릿길입니까? 끝내 만릿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 1952년 6월 29일 편지 중에서

한동안 편지에서 청마는 그녀를 정향이라 칭했다. 정향이란, 가수 현인이 부른 <베사메무초>에 나오는, 프랑스 말로는 리라꽃이요. 가수 이문세가 부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영어로는 라일락꽃이요, 순수 우리말로는 수수꽃 다리라 부르는 꽃을 이르는 말이다.

 

28일에 쓴 편지에서도 그는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날이 나의 낙명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해 당신 없인 못 살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살기 힘들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구원'인 동시에 '절망'인 사랑 때문이다. 그리하여 편지에서 시인은 항의한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라고, 동시에 그 는 정향을 원망한다. 정말 내 사랑이 들리지 않느냐고, 입을 여미고 왜 말 한마디 없느냐고 왜 일부러 우리 사랑에 눈을 감으려 드느냐고, 과연 이렇게 사랑하는 내가 미련한 것이냐고, 아니면 서로의 우정과 사랑을 십분 감지하면서도 신분상의 이유로 짐짓 서로를 멀리해야 하는 것이 미련한 것이냐고. 


 

239 :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

그나마 자신의 유언대로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베토벤 무덤 곁에 묻힌 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lbert.1797-1828. 그의 손을 거치면 시는 노래가 되고 음악은 말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겨울나그네>는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더불어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인 빌헬름 뮐러 withem Maller 1794-1827 의 시집에 곡을 붙인 것이다.

 

스물한 살 시절 뮐러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멜로디를 내 힘으로 붙일 수 있으면 나의 민요풍 시들이 지 금보다 훨씬 더 멋질 것이다. 그러나 확신컨대나의 시어에서 음률을 찾아 그것을 내게 되돌려 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슈베르트였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겨울 나그네> 시 스물네 편 하나하나에 곡을 붙였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노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보리수>라는 데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 빌헬름 뮐러, <보리수>

고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참 많이도 불렀던 노래다. 그때만 해도 그 의미는 알지 못했고 그냥 아름답고 어딘가 성스럽게 들리는 음악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히 그 이유를 설명하긴 힘든데,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왠지 다른 노래가 하나 연상되며 서로 갈마들곤 했다. 그 1절만 옮겨 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 박목월 시 · 김순애 작곡. <사월의 노래>

 


짐작건대 이 시의 화자도 젊은 방랑자이리라. 집에서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는 나그네 신세인 게다. 허나 이 친구는 그리고 이 시는 밝기만 하다.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란 것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라 보는 것이 옳다.


 

242  :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

오늘날 드라마에서는 망가진 역을 맡을 만큼 세월이 흘렸고, 아, 곽지균 감독은 스스로 생을 정리해 그만 고인이 되지 아니하였던가. 그뿐이라,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영화를 보니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 아니던가!

 

강석우, 이미숙, 안성기, 이혜영 등의 연기도 좋았고,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 특별히 <보리수>의 울림도 좋았다. 그래도 역시 이 영화가 준 감동의 기본은 시나리오의 힘에 있었다. 원작이 바로 1984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최인호 1945-2013의 동명 소설이었던 것.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찾아보는 것 역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덜컥 숨이 멎었다.

그때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그 젊고 아름답던 청년은 어디 에 갔는가? 그 청년의 흔적을 이 무덤 속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한순간 저희들끼리 어우러져 만 들었던 하나의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불던 기억은 시든 풀잎을 스쳐가는 무심한 바람에 불과한 것. 아아,

나는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했던가 아득히 먼 옛 기억 속에서 나는 그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사람만을 생각하고 그 사람만을 기도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생각 난다. 그 언젠가 그 사람을 찾아서 설악산 계곡으로 홀로 가던 옛 기억이 그날 밤 물가에서 입 맞추던 그 첫 키스의 날카로운 기쁨이.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고 그토록 생각하고 그토록 기도하던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이 저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 아름답던 젊음은 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헛간 속에 채집되어 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 최인호, <겨울 나그네> 중에서

 


우연의 일치일까. 최인호도 나와 같은 연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기뻤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그도 박목월의 <사월의 노래>를 연상한 것이 아닐런가. 그러자 오랜 세월 잊었던 목련과 보리수가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기쁜, 아니 별로 기쁘지도 않던 우리들의 젊은 날은 다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그 그리움은 언제든 재생 가능한 것임을 아니 회복은 불가능해도 기억 속의 재생, 재생을 위한 그리움만은 언제나 가능해야 한다고 믿고 싶어 졌다.

20 년 동안 100쇄 이상 찍은 베스트셀러, 거기에 앞서 말한 대로 1986년 영화화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1989년에는 손창민, 김희애 주연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는가 하면, 1997년과 2005년에는 윤호진 연출의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한 소설 <겨울 나그네. 최인호는 이 소설을 2005년, 그러니까 20년 만에 새롭게 대폭 손질하여 개정본을 출간하기까지 하낟.


257 : 겨울 나그네를 만나다

인생이야말로 이슬과 노을처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소풍은 어디까지나 잠시 다녀오는 것. 영원한 가치는 다른 곳 곧 하늘에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그는 허무조차 느끼지 아니한다.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 끝날 때도 슬퍼하기는커녕,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비슷한 시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최희 준은 <하숙생>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인생은 나그네 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 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 러가듯/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하지만 천상병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의 행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의 집은 하늘이었다. '소풍'의 대구는 '귀가 가 적당하거늘 귀천이라 이름하였으니 말이다. 천상병, 그는 천상, 천상의 시인이던가!

이것이 나그네의 방랑과 소풍의 차이다. 둘 다 집 떠나는 것은 같다. 하지만 전자는 오고 감에 정처가 없고 후자는 분명하다. 그래서 전자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 매력이 있는 반면, 먹을거리 조차 스스로 구해야 하는 고달픔이 있고, 후자는 김밥 도시락까 지 싸가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그네에게 소풍은 없다.


267: 한밤중에 눈이 내리 소리도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먼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귀에 들리겠는가. 왈가닥 처녀 아이도 아니고 여인이 그것도 옆방에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옷을 벗는데 그 소리가 들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옷은 하늘하늘한 실크 잠옷이거나 곱고 단아한 한복이거나 어딘가 그런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아무래도 안 들린다. 김광균이 주목한 것은 바로 밤눈의 이러한 속성, 곧 '소리 없음',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눈은 소리 없이 내릴 뿐 아니라 눈 내리는 밤은 평소보다 더 고요하기까지 하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눈의 입자가 육각형 흡음 구조라서 밤에 눈이 쌓이면 사위가 고요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누구나 경험해 보았듯이 밤눈은 눈치도 못 채고 있다가 무심코 창밖을 보거나 방을 나서야 알 때가 많다. 그때의 감동과 설렘을 떠올려 보라. 어쩌면 이 시의 화자도 방 안에 있다가 눈을 맞이했고 그래서 뜰에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이었으니 정녕 그는 눈 오는 줄 미처 몰랐으리라.

하지만 소리가 나는 것은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과연 어찌 표현할까?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시냇물이 소리 없이 흐른 다는 것은 달리 어찌 표현하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표현의 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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