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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스물 두 번째 책 : 반딧불이 - 무라카미 하루키

by 마파람94 2021. 6. 9.

 

무라카미의 글은 심층적인 깊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 속으로 계단을 통해서 1층, 2층, 3층 또는 산 둘레길 중턱 정상 방향 또 한편으로는 바닷속으로 잠수해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더 그러한 느낌이 짙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읽는 사람이 책 속으로 점차 점차 시나브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p. 47 : 반딧불이 

생각해보니 해가 저문 뒤 급수탑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때보다 바람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 센 바람도 아닌데,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궤적을 남기고 내 옆을 지나갔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 지표를 덮어갔다. 도시의 빛이 아무리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 해도 밤은 제 몫을 확실히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 병뚜껑을 열고 반딧불이를 꺼내 3 센티미터쯤 튀어나온 급수탑의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반딧불이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볼트 주변을 비틀거리면서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부스럼 딱지처럼 벗겨진 페인트 자국에 발을 걸치기도 했다. 잠깐 오른쪽으로 가서 거기가 막다른 곳이란 걸 확인하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볼트의 꼭대기로 기어올라가 그곳에 가만히 웅크렸다. 반딧불이는 마치 숨이 끊긴 듯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댄 채 그런 반딧불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참 동안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만이 우리 사이를 강물처럼 흘러갔다. 느티나무가 어둠 속에서 무수한 잎들을 비벼댔다.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기다렸다.

반딧불이가 날아오른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녀석은 뭔가를 떠올린 듯이 갑자기 날개를 펴더니 그다음 순간에는 난간을 넘어 옅은 어둠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이 급수탑 주변에서 재빠르게 호를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듯이 잠깐 그곳에 머무르더니, 이윽고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감은 눈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그 약하디 약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p. 75 : 헛간을 태우다 

자신이 없지만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그가 말한 대로, 누군가 태워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지막 헛간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건널목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은 삼십일 분 삼십 초였다. 나는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서 소파에 누워 레코드를 한 장 들은 뒤 일을 시작했다

한 달 동안, 그런 식으로 나는 매일 아침 같은 코스를 달렸다. 그러나 헛간은 타지 않았다.

'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낡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지나친 생각이다. 실질적인 문제로 나는 헛간을 태우지 않는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헛간을 태우는 이미지가 부풀어오른다 해도 나는 실제로 헛간을 태울 만한 인물이 아니다. 헛간을 태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다. 아마 그는 태워야 할 헛간을 변경했을 것이다. 혹은 너무 바빠서 헛간을 태울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서도 전혀 연락이 없었다.


p. 117 :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술렁거리는 소리는 아까보다 약간 약해져 있다. 그녀는 그 볼펜을 손에 들고 종이 냅킨 뒤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 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구부리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유방 사이의 매끄러운 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에 종이 냅킨은 너무 부드러워서 볼펜 끝이 계속 걸린다. 그래도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중에 순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녀는 손을 멈추고 볼펜의 파란 플라스틱 뚜껑을 깨물었다. 그리 세게 깨무는 건 아니다. 잇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깨물었다.

그녀는 언덕을 그렸다. 복잡한 모양의 언덕이었다. 고대사 삽화에나 나올 듯한 언덕이다. 언덕 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집 주위에는 장님 버드나무가 무성했다. 장님 버드나무가 여자를 잠재운 것이다.

"장님 버드나무가 대체 뭐야?" 친구가 물었다.

"그런 종류의 버드나무가 있어." 그녀가 대답했다.

"들은 적도 없는걸." 친구가 말했다.

"내가 만들었어." 그녀가 말했다"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를 묻힌 작은 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여자를 잠재우는 거야." 그녀는 새 종이 냅킨을 꺼내서 거기다 커다랗게 장님 버드나무를 그렸다. 장님 버드나무는 진달래 크기 정도의 나무였다. 꽃이 피지만 그 꽃은 두꺼운 잎에 싸여 있다. 잎은 녹색으로 도마뱀의 꼬리가 잔뜩 모여 있는 듯한 모양이다. 잎이 가늘다는 것만 빼면 장님 버드나무는 조금도 버드나무 같지 않았다

"담배 있냐?" 친구가 내게 물었다나는 쇼트호프 갑과 성냥을 테이블 너머로 던졌다. 그는 한 개비를 빼서 불을 붙이고는 내 쪽으로 다시 던졌다.

"장님 버드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지만, 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깊어" 그녀는 설명했다. "실제로 어느 수령에 도달하면 장님 버드나무는 위로 자라는 걸 멈추고 아래로 아래로만 뻗어가, 그래서 어둠을 양분 삼아 자라."

"그리고 파리가 그 꽃가루를 묻혀 여자의 귓속에 파고들어 여자를 재우는구나?" 친구가 물었다. "그러면 그 파리는 어떻게 되는데?"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 살을 먹지, 물론, 그녀가 말했다. "우적우적." 친구가 게걸스럽게 먹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 그녀는 그 여름 장님 버드나무에 대해 긴 시를 썼고 그 줄거리를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유일한 여름방학 숙제였다. 그녀는 어느 날 밤 꾼 꿈을 바탕으로 그 스토리를 만들고, 침대 위에서 일주일 동안에 걸쳐 긴 시를 완성했다.



 

p. 171 : 춤추는 난쟁이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극히 한순간의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원래의 아름다운 여자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이 그녀의 복숭앗빛 뺨 위에서 빛났다. 나는 내가 난쟁이를 이겼음을 깨달았다. 나는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낸 것이다

"너의 승리야." 난쟁이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네 거야. 나는 나간다."

그리고 난쟁이는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걸로 끝난 건 아냐." 난쟁이는 말을 이었다. "넌 몇 번이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나 지는 건 단 한 번 이야. 네가 한 번 지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리고 넌 언젠가 반드시 진다. 그걸로 끝이야. 알겠어? 나는 그걸 계속 기다릴 거야."

"왜 하필 나야?" 나는 난쟁이를 향해 소리쳤다. "왜 다른 누군 가가 아니고 나냐고!"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난쟁이의 웃음소리는 한동안 주위를 떠돌더니 이내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난쟁이의 말은 옳았다. 나는 지금 경찰에 쫓기고 있다. 무도장에서 내 춤을 본 누군가 그 노인일지도 모른다가 당국에 출두해 내 몸에 춤추는 난쟁이가 들어와 춤을 추었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한편,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불러다 철저히 심문을 했다. 내가 언젠가 난쟁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동료가 증언했다. 내게 체포 영장이 나왔다. 경찰들이 와서 공장을 포위했다. 제 8 공정의 미인 아가씨가 내 작업장으로 찾아와서 살짝 알려주었다. 나는 작업장을 뛰쳐나와 완성된 코끼리를 저장해두는 풀에 뛰어들어 그중 한 마리의 등에 올라타 숲으로 달아났다. 그러다 경찰관 몇 명인가를 밟아뭉갰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한 달 가까이 숲에서 숲산에서 산으로 도망다니고 있다. 나무 열매를 먹고, 벌레를 먹고강물을 마시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수는 많다. 그들은 언젠가 나를 붙잡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붙잡으면 혁명의 이름 아래 윈 치에 꽁꽁 묶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고 한다. 그렇다

난쟁이는 매일 밤 꿈에 나타나 내 몸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한다

"적어도 경찰에게 잡혀서 능지처참은 안 당할 거야." 난쟁이는 말한다.

"그 대신 영원히 숲 속에서 춤을 추게 되겠지?" 나는 묻는다. "당연하지." 난쟁이는 말한다"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네가 직접 결정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난쟁이는 킬킬 웃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다. 그들은 바로 저기까지 와 있다.


p. 210 : 비 오는 날의 여자
구두가 젖지 않도록 마치 고기의 비계를 골라내듯 주의 깊게 보도의 물웅덩이를 피해서 걷고 있었다. 그녀들의 그런 동작이 아주 멋져서 나는 한참 동안 그 다리의 움직임을 창밖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들 뒤편에 보이는 울타리에서 개나리와 목련의 선명 한 빛깔이 봄비에 번졌다. 봄꽃에는 소리라는 것이 없다.

산딸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는 빗방울이 갓 죽은 물고기의 이빨처럼 곱게 줄지어 있다. 그 흰빛 안에는 어딘지 모르게 폭력의 기억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이빨들은 하나씩 하나씩 무언가 떠 올린 듯 문득 가지를 떠나 아래로 흘러, 검고 부드러운 지면에 소리도 없이 빨려들어갔다.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가는 차의 타이어 소리만이 이따금 내 귀에 와닿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결이 촘촘하고 반질거리는 옷감을 손끝으로 가만히 문지르 는 듯한 소리였다.

해 질 녘의 어스름이 점점 푸른빛을 더하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자동 점등식 가로등이 소리 없이 켜지는 그 시각까지. 나는 빈 잔을 들고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잘못 볼 리 없는 초록색 우산과 241호 여자가 집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단념하고 현관문을 닫은 뒤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새삼스레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은 아주 이상해 보였다. 특별히 무언가가 이상한 건 아니다. 방은 평소와 같았다. 아주 평범한 거실이다. 소파가 있고, 테이블이 있고, 스테레오 세트가 있고, 레코드와 책이 있다. 나는 일할 때 말고는 언제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몹시 이상한 방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구가 파멸한 뒤 유일하게 남은 장소 같았다. 비 오는 날의 여자 탓이다. 부풀어 오른 심장과 주위 소리를 빨아들여버리는 탐스러운 봄꽃 탓이다. 이 세계에서 아마 영원히 상실되었을 그 초록색 탓이다. 나는 한 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주방으로 가서 빈 잔을 싱크대에 두었다. 그리고 아침에 남은 커피를 데워 마셨다.

이윽고 조용히 밤이 찾아왔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의 여자 #241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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