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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스물 한 번째 책 : 걷는 생각들

by 마파람94 2021. 6. 7.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아주 공감을 일으킬 만한 산문인 것 같습니다. 아주 가벼운 마음과 짧은 시간에 책 한 권을 뚝딱 읽고 싶은 분이 있으면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2시간 정도에 금방 읽을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거의 매일 걷기를 하고 있는 짝에게 책을 건네 주었으니 책 읽은 후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p. 71 : The show Must Go On
봄은 여왕이다. 언제나 모든 이들이 갈망하고, 사랑 의 미소로 여왕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봄은 약간은 도도하며 오만하다.

봄은 품위를 지키며 마차를 타고 오기 전에 시종을 보낸다. 그녀는 가장 믿음직스럽고 신속하게 자신이 행차할 길을 닦아줄 전령을 보내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린다. 한껏 기대를 고조시키는 그녀의 본능적 마케팅 전략이다.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충직한 시종은 '바람'이다.

꽃들이 제아무리 몰래 봄을 맞을 준비를 할지라도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까지 속일 수는 없다. 바람은 봄의 향기를 싣고 온다. 본능적 감각이 다른 동식물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인간은 '기억'이라는 사고를 통해 생존의 데이터를 만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맘때 산책길에서 만난 봄바람은 대학교 1학년, 어른이 되는 길목에 서의 낯섦을 환기시킨다.

대학교 1학년의 교양영어 수업, 무엇을 배웠는지, 어 떤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9시 첫 수업이었다는 것은 생생하다. 공과대학에서 너무나 멀었던 종합관에서의 1교시는 여러모로 시작 전부터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언덕 쪽에 자리 잡은 종합관에서 수업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벚꽃 향기가 실렸다. 벚꽃 향기를 맡으러 일부러 법과대학을 둘러 내려오곤 했다. 수업 내용은 기억이 없고 수업 들으 러 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만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학년의 봄은 세상이 내 것 같기도 하고, 세상 무엇 하나 내가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봄의 기억이다. 설렘과 불안이 벚꽃 날리는 바람에 실려왔다. 내게 봄은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교양영어 수업에서 무슨 교양을 배웠는지 또는 무슨 영어를 배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문장만은 기억하고 있다

"The show must go on."

워낙 유명한 노래 제목이지만, 원문은 작가 겸 언론 인인 해리 골든의 에세이에서 비롯됐다. 바람난 아내 문제로 괴로워하다가도 무대에 설 시간이 되면 (Vesti giubba(의상을 입어라))라는 아리아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의 이야기다. 많은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향해 등골이 빠지게 일하고 자기만의 슬픔을 가진 어머니들은 그와는 무관하다는 듯 자식들을 등교시키는 이야기를 한다.

저자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세상이 무너질 때, 자신의 세탁물이 빨리 도착하지 않는 것에 화내고 있는 손님을 향한 분노를 억제하며 '상대는 상대, 그 자신의 현실인 세탁물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장면은 참으로 뭉클하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하인이 와야 할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서 머리끝까지 화났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도착한 하인을 잘라 버릴 생각을 하던 타고르 앞에서 하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묵묵히 청소를 시작하고, 타고르가 "나가"라고 소리 지르자 하인은 아주 무겁고 나직한 목소리로 “제 어린 딸년이 어젯밤에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청소를 이어간다. 그러고는 작가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삶은 어떠한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p. 96 : 인연 여름편
짝퉁 외로움이 대부분이라 순수 외로움을 채집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땅 위로 파견되는 지렁이들은 고수익 선망 직종의 도전적인 엘리트 직업이다. 우리는 지렁이를 너무 몰라본다.

오리들이 가끔 물에 머리를 처박고 한참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왠지 무언가 건져 올릴 것 같은 기대감에 나는 멈춰 서서 오리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먹이를 낚아 올리는 오리에게 괜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출근의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기다리던 오리가 물고기를 낚아서 올라오는 것을 보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다. 몇 번씩 머리를 처박고도 허탕을 치는 오리를 보며 짠해지는 것은 만화영화 <아기 공룡 둘리>를 보며 '고길동이 불쌍하다고 느껴지면 그것 '이 어른이 되는 때'라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리들 역시 한강철교를 지나는 기차나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에 갇힌 인간군상을 보며 벌어먹고 사는 일의 힘듦에 대해 동병상련의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낚시하는 사람을 통해 물고기를 만나기도 한다.



p. 102 : 아침의 산책은 여행을 떠나는 길
즐거움이려니 생각하며 미화된다. 씁쓸함은 있을지언정 후회나 원망은 없는 것이 여행자의 기본 마음가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길 잘했다거나 돌아오는 길에 벌써 다음 여행지를 잡는 것이 여행자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지 역시 누군가의 일상이다. 나는 하와이에서 2년 정도 산적이 있다. 여행자에게는 최고의 장소 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이며 직업이며 루틴이다. 결국 여행이란 자기 마음의 조건들을 낯설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환경을 낯설게 바꾸는 것이 가장 쉽다. 소소하지만 일상을 낯설게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산책이 다. 산책 또한 여행이 된다.

아침 산책을 한 달쯤 기록해보니 생각지도 못한 작은 여행기를 갖게 되었다. 출근 시간이 바빠서 길게 못 쓴 날도 많긴 하지만,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적어둔 감상의 20분짜리 글들과 주어온 나뭇잎이며 낙엽, 꽃들을 붙 '이고 기분 좋으면 스티커까지 붙여놓은 스크랩북이 있다. 휴대폰으로 찍은 풍경 사진을 출력해서 함께 붙이니 나만의 포토 에세이가 되었다. 아침 산책은 멋진 여행이었다.


p. 122 : 꽃을 걷는 마음
수없이 많은 사람의 발에 묻어 그 사람의 생과 함께 살아간다. 꽃은 시간을 걷고 사람을 성큼 걸어 또 다른 생명력으로 신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간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지 사람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산책 길의 꽃들도 걷고 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고, 누구의 목적을 위해서도 소비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시계획에 의해 심겨졌다 할지라도 뿌리를 땅에 박고 오가는 부자와 가난한 이와 행복한 이와 불행한 이와 여럿 또는 혼자인 모든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발걸음 속에 흩어져 살아간다. 이 도시의 산책로에서 당신의 걸음으로 다시 살아가는 꽃들이 있음을 가끔은 기억해주기를.

꽃길은 누군가를 위해 펼쳐진 길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꽃에게로 걸어가는 길이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에서 "한 도시를 아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도시의 사람들이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꽃'을 바라볼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금전적으로든, 마음으로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 위에 떨어져 있는 능소화를 주웠다. 스크랩북에 붙여두고 싶다.


p. 125 : 소심함의 소중함에 대하여
언제부터였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상사에게는 상사라서 대들지도 못하고, 부하직원에게는 그/그녀가 삐질까봐 야단도 못 치고. 불합리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또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싶어 항의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눈치 보이고 마음 쓰인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된 걸까? 원래부터 이렇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산책길을 걸을 때도 내 소심함이 느껴진다. 좁은 산책로를 걸을 때 마주오는 사람과 동선이 겹칠 것을 고려해서 한쪽으로 비키는 사람도 나고, 파워워킹이 아니라도 충분히 파워 넘칠 듯한 아줌마가 뒤에서 나를 밀치고 가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나다. 기껏해야 '어?' 하며 돌아보는 정도, 그녀와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격차가 났지만, 멘탈에서는 초격차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강아지의 목줄을 길게 잡아 강아지가 내게 달려들 때도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피하기 바쁘다. 강아지 주인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기 강아지가 나를 밀어내고 길을 차지하자 '아이고, 씩씩해라. 내 새끼 잘했어' 하는 당당한 눈빛으로 지나간다.


p. 131 : 불쌍한 라떼들에게
젊고 몸이 건강할 때는 건강검진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중년의 나이가 되니 이제까지 들어오던 “예전 같지 않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슬프지만 이해하게 된다. 딱히 어디라고 표현할 수 없게 몸 이곳저곳에서 삐거덕 소리가 난다. 쓸 만큼 써서 이제는 조심히 움직여야 하는 낡은 차에 대한 애잔함과 서글픔, 심지어는 고마움까지 찔끔 느끼는 시점은 불현듯 찾아온다. 몇 살, 언제가 아니라 '스며들듯이 그렇게 느껴진다.

몸만 그러하랴. 당연히 마음도 그러하다. 어떤 집에 살고 있으며, 남편은 무엇을 하며, 아이들은 몇이고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회사에서는 얼마나 잘 나가고, 재테크는 어떻게 하고 있으며, 외모는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인생의 성적표 같은 평가들이 매 순간 이루어지는 나이가 40대다.

20대, 30대 때와는 달리 내 옆에 있던 친구들과 사는 방식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각양각색 달라졌다. 부지 불식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란 단어도 생각이란 단어도 너무나 모호해서 두 단어가 결합되니 그 자체가 모순 덩어리가 되는 듯하다.) 측정할 수도 없게 인생의 격차가 벌어져 있다.


p. 134 : 불쌍한 라떼들에게
그간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는 각자의 상황들이 쌓였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만 난무하다가 어렵게 1년에 한두 번 만남이 성사되지만 그 시간은 3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속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호구조사하던가("너는 요즘 뭐하니?") 추억놀이 ("야, 그때 기억나?")를 하는 수밖에 없다. 서로의 변화를 알기에는, 서로의 느낌을 알기에는 '생활'이 너무나 달라지고 변했다.

그러니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 우리 엄마의 명언대로 "마음은 나이 먹는 법이 없다"는데 나 이 먹지 않은 내 마음을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 구질구질하고 자라지 못한 마음, 서글프지만 아직은 빛 나는 나의 마음을 들어줄 이는 나뿐이다.

그래서 산책길에서는 내 소리만 들어야 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인터넷도 켜지 말고회사 이메일도 체크하지 않고, 사회적인 '나'라는 존재의 어떤 오지랖이 개입하기 전에, 물 한 잔을 마시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신 뒤 가장 자연스러운 나라는 인간으로 산책길에 나서야 한다.

최대한 문명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 이것이 가상의 순례길을 걷는 당연한 약속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나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 이것이 산책길의 가장 중요한 약속이다. 물론 간간히 음악을 들어주는 것은 좋다.


p. 141 : 가끔, 문득, 그냥
가끔, 문득, 그냥. 이 세 단어면 충분하다. 사랑을 표현하기에
세 단어에 그의 이름을 넣으면, 내가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세 단어에 그의 이름을 넣으면, 우리가 왜 이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 단어에 그의 이름을 넣으면 세월이 지나 아스라한 기억 속에 그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세 단어에 나의 이름을 넣으면, 그것은 나의 '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p. 151 : 오즈의 마법사
나는 아침에 햇빛이 비추는 동쪽 방향으로 걸어간다. 태양이 막 떠오를 때, 태양을 향해 걸어가고 싶은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조금이라도 따뜻한 길을 향해 걸으려는 잔꾀, 봄날은 따뜻한 햇살을 받고 싶은 마음, 여름날은 한낮이면 뜨거 워지겠지만 밤을 깨고 나온 햇살은 언제나 부드러워 밤의 냉기를 품은 시원한 밝음에 대한 환영이다. 어떤 계절이든 아침 산책길에는 나는 해를 향해 걷는다.

햇살이 비치는 산책로를 또박또박 걸어갈 때 가끔, 아니 자주 오즈의 마법사를 떠올린다. 캔사스 외딴 시골마을에 사는 도로시는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마법사 OZ를 찾아가는데, 그에게로 가는 길이 노란 벽돌길이다.

노란 벽돌 길. 주로 낮은 것이나 땅을 보며 걷는 나는 밟고 지나가는 그 '길'에 뭉클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치 도로시가 된 듯하다. 비록 혼자지만 허수아비도 양철 나무꾼도 겁쟁이 사자도 함께 걷는 느낌이다.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이후부터는 많은 것이 두렵고 겁나서 움츠러든 겁쟁이 사자가 된 것 같다. 쓸개 (담)가 한의학적으로 '용기'를 관장하는 기관이라 한다. 그래서 담력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괜히 쓸개 탓을 했지만, 사실 요즘은 정말 많은 것이 자신 없고 두렵다. 나는 도로시인 줄 알았는데 어떤 날은 허수아비고, 어떤 날은 양철 나무꾼이고, 어떤 날은 겁쟁이 사자다.

더 슬픈 것은 내 안에서 발견된 OZ다.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대머리에 주름 투성이 노인이지만 '위대한 마법 사인 척' 살아가는 오즈. 점점 자신 없어지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이력과 경력을 덧붙이지만 언제 들킬지 모르는 가면놀이를 하는 내 모습

어쩐지 무겁더라. 도로시인 줄 알았더니 허수아비, 사 자, 양철 나무꾼, 심지어 OZ까지 하나하나 올라붙어서 몸무게가 야금야금 늘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독수리 오형제가 합체하듯이 다양한 내가 합쳐져서 무거운 무게로 걷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길을 걷는다. 노락 벽돌 길 같은 산 책길을 따라 걸으면 조금 헤매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OZ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내 안의 이 버거운 친구들과 꿋꿋하게 걸어간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면서 햇살을 향해 걷는 일은 긍정적인 하루를 연습하는 내 게 가장 좋은 명상이다. 이렇게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지 모른다. 내게 답을 알려줄 진짜 오즈를.


p. 217 : 0과 1 사이, 당신과 나 사이
숫자에 대해 생각하며 걷는 날이 있다.

나는 0과 1 사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0 다음의 숫자를 묻는다면(수학자에게 묻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이 1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내가 찾는 답이 아니다.

중학교 수학 시간에 선생님은 0과 1의 두 점을 긋고, 이 안에 점이 몇 개냐고 물었다.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점과 점 사이에 몇 개의 점이 더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0과 1은 가장 가까워 보였다. 그런데 확대해보면 그 사이에 점들이 이어져 있고, 또 다른 점들이 있다. 영화 <맨 인 블랙>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한없이 파고들 어가도 세계가 계속해서 나온다. 0과 1 사이는 가까운 듯 아주 멀다. 기준의 문제다. 우리에게 0 다음의 숫자는 1이지만 어떤 수학자에겐 0.0079823가 그다음 숫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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