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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열 아홉 번째 책 : 곰브리치 세계사

by 마파람94 2021. 5. 22.

열아홉 번째 책 : 곰브리치 세계사

 

지난 4월 말 우연히 들렀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들었습니다. 곰브리치의 세계사에 대한 책입니다. 대학 때 교양 미술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곰브리치의 예술사에 대한 정보를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곰브리치 하면 예술사인데, 세계사가 있었군 하면서 책을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마치 학식 높은 학자인 할아버지가 세계사에 대해 알기 쉽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실제로 책 내용 중에는 부담 없이 책을 읽으라는 곰브리치의 메시지가 들어 있고도 합니다. 책 내용들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한번쯤은 접해 봤었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알고 있는 내용을 왜 읽는가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답은 명확합니다. 재미있습니다. ~ 

 

재미있게 잘 읽었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밑줄들을 옮겨와 봅니다.

 

 

p. 79

사람들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그리스에게는 남 다른 면이 있었다. 서아시아의 강대한 왕국들은 전승된 풍습과 교리에 지나칠 만큼 얽매였던 반면, 그리스인, 특히 아테네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 사회에서는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것이 등장했으며 어떠한 제도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라의 지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위대한 영웅인 밀티아데스나 테미스토클레스도 그런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한때 이들을 찬양하고 존경하면서 기념비까지 세워 주었으나 머지않아 탄핵과 비방의 대상으로 삼고 추방시켜 버렸다. 이런 점이 물론 장점은 아니겠지만 아테네인의 독특한 성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시험하며 결코 만족하거나 안주할 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백 년 동안에 이 작은 도시 국가의 정신 세계에서는 동방의 대제국들에서 천 년 동안에 일어나는 것보다 더 심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해 내고 그림과 시로 표현하고 시험해 보았던 모든 것, 당시의 젊은이와 원로들이 각기 광장과 의회에서 논하였던 모든 것은 오늘날까지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페르시아인이 기원전 490년 마라톤에서 또는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에서 승리했다만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p. 143

7월을 뜻하는 단어는 대머리에 황금 월계관을 즐겨 썼던 깡마른 남자, 비록 몸은 병약했지만 의지가 굳고 두뇌명석했던 한 남자의 이름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당시 서양에서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인은 시기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투스 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지배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억압할까봐 두려 웠던 사람들은 결국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브루투스와 사람들은 원로원 회당에서 단도를 들고 카이사르를 습격했다. 카이사르는 기를쓰고 저항했지만 브루투스를 본 순간 이렇게 말했다 한다. 브루투스, 너마저. 그러고는 아무 저항 없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가 기원전 44년이었다.

7월 다음은 8월이고, 8월을 뜻하는 서양어로는 '오거스트', '아우구스트' 등이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란 사람이다. 그는 여러 사령관들과 함께 오랫동안 바다와 육지에서 싸웠으며 마침내 기원전 31년에는 로마 제국의 제1인자로 부상했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카이저'가 어디서 생긴 말인지 아는가? 바로 '카이사르' 라는 말에서 왔다.

1년 중 한 달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또 다른 한 달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붙이게 되었다.

 

 

p. 146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바울이 이런 설교를 하면 법을 중요시하는 로마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뭔가 아주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것은 법보다 더 귀한 신의 은총을 알리는 좋은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은 그리스어로 '에브안겔리온'이며, '복음'을 뜻하는 독일 어 '에반겔리움'도 여기서 비롯됐다. 아버지 신의 은총에 관한 이 기쁘고 좋은 소식은 (이런 은총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앞서 유대인들이 설파했던 것이지만) 곧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로마 관리들이 이 종교에 주목하게 되었다. 원래 로마 관리들은 종교 문제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유일신을 믿는 크리스트교도들은 황제의 조각상 앞에 향을 피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관습은 로마에 황제 제도가 도입된 후부터 굳어진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도 이집트나 중국, 바빌로니아 또는 페르시아의 지배자들처럼 신으로 숭배되었다. 황제의 조각상은 제국 어디를 가나 있었고 훌륭한 국민이라면 이따금 그 상 앞에서 향을 피워야 했다. 그런데 크리스트교도들은 이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에 관리들은 강제 수단마저 동원하곤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서 30년쯤 후, 그러니까 서기 60년경에 로마는 잔혹한 황제 네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 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몸서리를 치곤 한다. 그런데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사실 이 네로란 인물은 말도 못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악당은 아니었다.

 

p. 147 :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수도

 

 

p. 177

프랑크 제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그러니까 서기 600년경만 해도 아랍인은 언급할 만한 특별한 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사막을 떠돌다 천막에서 잠을 자고 서로 싸움질을 일삼았을 뿐이었다. 신앙도 단순했으며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도 않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인처럼 별을 숭배했고 무엇보다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어떤 돌을 경배했다. 이 돌은 메카라는 오아시스 도시의 한 성전에 안치되어 있었 는데, 이 성전의 이름은 카바였다. 아랍인들은 종종 이 돌에 경배하기 위해 사막을 지나 순례 여행을 하곤 했다.

당시 메카에는 무함마드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의 아버지 압달라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메카의 카바 성전을 지키는 귀한 가문에 속했다. 압달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무함마드에게 남긴 것은 낙타 다섯 마리가 전부였다. 아주 많은 유산 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다른 귀한 집안의 아이들처럼 사막의 천막 숙영지에서 살지 못하고 부자들의 염소지기로 일해야 했다. 후일 그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느 부유한 여자의 사업을 돕게 되었다. 카라반과 함께 낙타를 몰면서 장거리 여행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부유한 여자와 혼인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고 어린 사촌인 알리도 양자로 받아들였다.

'메카에서 무함마드는 높은 존경을 받았다. 커다란 매부리코에 머리칼과 수염이 검고 걸음걸이에도 무게가 있는 이 건장하고 활기찬 남자를 사람들은 '정의로운 자'라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기에 메카의 카바로 온 아랍인 순례자들 뿐 아니라 가까운 아비시니아에서 온 크리스트교도나 아랍의 오아시스에 모여 살던 유대인들과도 즐겨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유대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능한 유일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함마드는 저녁에 샘물가에 앉아 아브라함과 요셉 그리고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하던 무함마드가 갑자기 환영을 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무함마드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는 이렇게 외쳤다. "읽어라!"


 

p. 180

무함마드를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무함마드는 모든 신봉자를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막 도시로 피신시켰다. 무함마드 역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창문으로 빠져나가 사막 도시로 도피했으니, 이때가 서기 622년 7월 16일이다. 이 도주를 아랍어로 '헤지라'라 부르며, 무함마드의 신봉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연도를 계산한다. 그리스인에게는 올림피아 로마인에게는 로마 건국 그리고 크리스트교도에게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막 도시에서 무함마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이 도시는 후일 무함마드를 기리기 위해 '예언자의 도시'란 뜻에서 '메디나'라 불리게 되었다. 모두가 그를 환대했고 앞다투어 집에 모시려 했다. 무함마드는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낙타의 발길이 닿는 집에 머물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신자들을 가르쳤고,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기꺼이 경청했다. 그는 신이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유대인에게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인간을 가르쳤으며 이제는 자신을 예언자로 선택했다고 이야기했다.

무함마드는 아랍어로 '알라'라 불리는 신 이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의 운명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위대한 책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두려워하거나 기뻐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와야 할 것은 오게 마련이고 죽음의 순간 또한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신의 뜻에 복종할 도리밖에 없다. '복종'은 아랍어로 '이슬람'인데, 무함마드는 자신의 교리를 이슬람이라 불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자들은 이 교리를 위해 싸워서 이겨야 하며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또한 이 신앙, 즉 알라와 예언자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지만 불신자나 비겁한 자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그는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그의 설교나 게시 등에서 천국 아름답게 묘사했는데, 그러한 글 전부를 '코란'이라 묶어 부른다.

 

 

p. 187

로마인은 12 X11 라고 표기했다. 그러면 112는? CXII이다. 그럼 1112는? MCXII이다. 이런 로마 숫자로 곱셈이나 덧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반면에 아라비아 숫자로는 그러한 셈을 하기가 아주 쉽다. 이 숫자가 예쁘고 쓰기 편하기 때문 만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새로운 점이란 자릿수를 말한다. 숫자가 세 개 쓰여 있으면 맨 왼쪽에 있는 것은 백 자리이다. 그래서 '백을 나타낼 때는 1을 쓴 다음 0 두 개를 연이어 쓰면 된다.

당신이 이처럼 유용한 것을 발명했다면 어땠을까? 아무튼 나는 이런 것을 만들어 낼 자신이 없다. 이 같은 숫자 체계는 물론 '숫자'를 뜻하는 유럽어 치퍼 (Ziffer)'나 '사이퍼 (cipher)' 등도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랍인은 인도인에게서 큰 자극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천일야화라는 동화보다 더 경이롭게 생각하는 점들이다. 서기 732년에 카롤루스 마르텔이 아랍인을 물리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랍인이 대제국을 세우고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 인도인, 심지어 중국인들을 정복해서 이들의 사상과 기술적 공식, 발명품을 모두 종합한 것도 잘된 일이라 볼 수 있다.

 

p. 205

북방의 뱃사람들인 노르만족이 프랑스의 어느 해안 지역을 정복했으며 이곳이 오늘날 노르망디라 불린다는 사실은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노르만족은 이웃의 부족들처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데 곧 익숙해졌지만 대담한 항해와 모험 그리고 정복에 대한 열정은 잃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시칠리아까지 배를 타고 가서 그곳의 아랍인들과 싸우고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했다. 그곳에서 위대한 영도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주도 아래, 하인리히 4세에 맞서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옹호했다. 노르만족의 또 다른 일부는 윌리엄이란 왕의 지휘 아래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해협을 건너가 덴마크왕 크누트의 후손인 영국 왕을 제압했다. 이후 윌리엄은 '정복왕 윌리엄'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때가 서기 1066 년인데 이 연도를 모르는 영국인은 거의 없다. 이 민족 군대가 영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관리들로 하여금 모든 마을과 장원에 관한 정확한 보고서를 올리게 했고 이중 많은 땅을 전쟁 동지들에게 봉토로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노르만족은 영국의 귀족이 되었다. 이들 노르만족이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어는 게르만어와 로맨스어가 합쳐진 언어가 되었다.

 

 

p. 246

피렌체 시민들은 그리스어도 배웠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인들이 남긴 저작을 특히 즐겨 읽었다. 그리고 카루스 대제나 바르바로사 보다 테미스토클레스나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에게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다. 마치 그 사이에 놓인 긴 시간은 한갓 꿈에 지나지 않으며, 자유 도시 피렌체가 아테네나 로마 같은 도시가 된 것 같았다.

 

오래전 지나가버린 옛 시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시대가 갑작스레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고대 문물을 통해 자신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재생'이나 '부활'을 뜻하는 '리나시멘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말 보다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그동안 고대 문화가 암흑 속에 묻혔던 것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고대의 정신을 소생시키고자 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로마 시대의 모든 것, 탁월한 조각상과 이탈리아 곳곳에 폐허로 남아 있는 화려하고 웅대한 건축물에 열광했다. 예전에는 이교도 시대의 잔재라 불렸으며 감상의 대상이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피렌체 사람들은 다시 기둥을 사용해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옛 물건에만 탐닉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연을 대하는 시각도 새롭게 변화시켰다. 2,000년 전의 아테네인들처럼 자연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이들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과 나무, 사람, 꽃 그리고 동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고 이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 수도사의 책에 나오는 성자 이야기나 대성당의 창문처럼 대상을 엄숙하고 위대하며 성스럽게 그린 것이 아니라 다채롭고 쾌활하며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그리고 편견 없이 정확히 묘사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만져 보는 것, 예술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최선으로 간주되었다. 

p. 245 : 피렌체

 

 

 

p. 284

한 도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이 많이 살았다. 펠리페 왕은 개종을 강요했지만 이 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펠리페 왕은 에스파냐 귀족 한 사람을 전권대사로 파견했다. 이 귀족은 펠리페 왕보다 더 열렬하고 진지하며 음산할 뿐더러 엄하고 후 독한 사람이었다. 알바공이라 불렸으며 창백하고 표정 없는 얼굴에 뾰족한 수염을 기르고 몸도 비쩍 마른 사람으로 펠리페 왕이 좋아할 만한 전형적인 투사였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 시민과 귀족들을 냉혹하게 처형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579년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이 에스파냐 군대를 몰아내고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유롭고 부유한 이 상업 도시의 시민들은 이 제 바다 너머의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운을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펠리페왕이 당한 최악의 참패는 아니었다. 또 다른 실패는 한층 더 참담했다. 당시 영국의 지배자는 여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로 아주 영리하고 의지가 강하며 목표 의식도 뚜렷하지만 냉혹한 면도 있고 허영심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톨릭교도의 공세에서 영국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라 안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사정없이 박해를 가했다. 또 가톨릭 신자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이던 아름답고 우아한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왕권도 주장하자 그녀를 붙잡아 처형시켜 버렸다. 더 나아가 엘리자베스 여왕은 펠리페 왕과 싸우던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도 도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보여 준 적대적 태도에 분노한 펠리폐 왕은 가톨릭 교권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정벌해서 없애 버리기로 결심했다.

펠리페 왕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막강한 함대를 정비했다. 범선이 130척이고 대포는 2,000문, 병사는 2만 명이 넘는 대함대였다. 그냥 읽고 넘어가지 말고 130척의 함 선이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함대였다. 1588년 이 함대가 무장한 병사와 온갖 무기, 여섯 달치의 군량을 싣고 에스파냐를 출발했을 때만해도 조그만 섬나라 영국이 이 함대를 막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p. 305

너도나도 베르사유풍의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이들은 궁전에 황금과 다마스크(무 늬가 있는 천 / 옮긴이) 바르고, 나뭇가지를 쳐서 반듯한 가로수 길도 냈다. 그리고 궁전에서는 커다란 가발을 뒤집어쓴 귀족이나 풍성한 드레스 차림에 얼굴 가득 분을 칠한 귀부인들, 아침꾼과 노련한 말재간꾼 들이 판을 쳤다.

귀족들은 모든 면에서 루이 14세를 모방했지만 그와 꼭 같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루이 14세를 '흉내 냈을 뿐으로, 번지르르한 모습을 뽐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스꽝스러움도 드러내는 복제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이들보다 한수 높았다. 무슨 말인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루이 14세가 쓴 편지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 다. 이 편지는 에스파냐 왕에 즉위한 손자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부가 심한 사람을 총 '애하지 말고 네 심기를 거스를 줄 알면서도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라 여흥을 즐기느라 네 임무를 등한히 하지 말고 생활의 질서를 잡아 휴식과 오락 시간도 정해 놓아라. 국정에는 네 모든 주의력을 쏟도록 해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먼저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보라, 최선을 다해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해라. 모든 사람을 친절히 대하고 그 누구에게도 모욕적인 말은 삼가라.

 

바로 이것이 허영과 우아함과 사치와 위엄과 무자비함과 경쾌함과 근면함을 묘하게도 함께 지니고 있던 루이 14세의 대원칙이었다.

 

p. 304 : 베르사유 궁전

 

 

p. 342

사절단이 도착했다. 회의장에 황제의 사신이 있을 높은 의자가 마련되자 나폴레옹이 말했다. "저 의자를 치우게 나는 옥좌만 보면 앉고 싶어지니까." 그는 황제로 하여금 라인강 너머의 모든 독일 땅을 프랑스에 넘기게 하고는 파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파리에는 그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 자신의 대답한 계획을 밝혔 다. 당시 프랑스의 최대 적국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에 많은 식민지를 가진 강대국이었다. 이런 영국을 직접 공격하기에 프랑스군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쓸 만한 함선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나마 영국의 식민지를 공격하는 것은 훨씬 수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영국이 지배하는 이집트로 자신을 파견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처럼 동방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뿐 아니라 고대 유적을 연구할 학자들도 데려갔다. 이집트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이슬람교도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무함마드 같은 대예언자라도 되는 양 연설을 했다. 나폴레옹은 이슬람교도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자 신이 이집트에 오리라는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예언된 사실이고 코란에도 적혀 있노라 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므로 내게 대항하려는 모든 시도는 부질없는 짓임을 알라. 내가 벌이는 모든 일은 성공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말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1798년 피라미드 근처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이집트 군대를 격퇴했고 몇 차례의 다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육지 전에서는 나폴레옹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해전에서는 여전히 영국인 이 가장 뛰어났다. 특히 영국의 유명한 넬슨 제독은 이집트 해안의 아부키르 근처에서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의 군대 안에서 전염병이 돌았고 프랑스 정부 내에서 불화와 반목이 심해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비밀리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유명한 장군이었으며, 모두들 그가 적국과의 싸움에서처럼 국내 정치에서도 유능함을 발휘할 인물이라 믿었다.

 

p. 343  1798년 피라미드 전투

 

p. 364

공장주가 나타나 굶주리는 100명의 직조공들에게 말한다. 기계와 공장을 돌 볼 사람 다섯이 필요하오 얼마를 주면 되겠소?" 제일 먼저 누군가 말한다.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은 주셔야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한다. "매일 빵 한 덩어리와 감자 1킬로그램을 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 "저는 빵 한 덩어리만 주면 돼요" 그리고 다른 네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이 제 공장주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한다. "좋소 그러면 당신들에게 일을 맡겨 보겠소. 한 데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할 수 있소?" 누군가 열 시간"이라고 대답하자 다른 사람이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른 말한다. “저는 열두 시간 일할수 있어요.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 말한다. “열여섯 시간이라도 문제없어요. 가족의 생계가 걸린 중대한 문 제였던 것이다. 이제 공장주가 말한다. "좋아요 당신을 고용하죠 하지만 당신이 잠잘 때면 내 기계는 놀아야하나? 기계는 잠잘 필요가 없는데." 직조공은 풀이 죽어 이렇게 대답한다. 그때는 여덟 살짜리 제 아들을 보낼게요. 그 애한테는 얼마를 줘야 하오?" "버터 바른 빵 값으로 크로이처를 주세요" 그러자 공장주는 이렇게 말한다. 버터는 안 바른 빵으로 합시다. 이런 식으로 타협이 이뤄지고 나면, 나머지 95명의 직조공들 은 굶어 죽거나 다른 공장에서 일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당시의 모든 공장주가 이렇게 악랄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임금을 가장 적게 주는 악덕 공장주들이 가장 싼 값으로 상품을 팔았기 때문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다른 공장주들 역시 양심의 가책이나 동정심을 느끼면서 도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섬세한 수공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 인가? 기계는 같은 일을 100배나 빠르게 처리하고 품질도 훨씬 더 고르며 비용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전에 직조공이나 대장장이, 방적공 목수로 일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빈궁한 처지가 되었으며 단 몇 푼이라도 벌기위해 이 공장 저 공장을 기웃거렸다.

 

p. 365 : 밤에도 가동되는 공장

 

p. 419 

앞서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장을 나는 이런 말로 끝맺었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고 있다. 더 나은 미래는 반드시 와야만 한다! 오늘날 그런 미래가 정말로 도래한 것일까?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인구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은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인들 역시 멀지 않은 과거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빈곤이다. 하지만 구호책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빈곤의 비참한 상황이 관용을 잃은 사고방식이나 태도와 늘 연결되기 마련이라는 것도 주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세계 곳곳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부유한 국가들의 양심도 조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 지역에서 지진이나 홍수, 가뭄이 들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 부유한 나라의 시민 수천 명이 물품과 인력을 제공하는 원조 활동을 펼치곤 한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해도 좋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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