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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열 여덟 번째 책: 보다 읽다 말하다-김영하

by 마파람94 2021. 5. 11.

 

독서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 김영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가 쓴 에세이 같은 글을 만났습니다. 마치 작가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본 것, 읽은 것, 말한 것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글을 읽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질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돈키호테, 안나카레리나, 보바리 부인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책의 주요 글들이 좋은 영향을 준 것이겠지요.

 

책을 가까이한 후 읽는 것에 대한 힘이 늘어 갈수록 책을 읽는 내공이 쌓임을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주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이해, 나의 내면에 대한 만족감을 일부 얻어 갑니다. 책을 읽는 중 주요 밑줄 그은 곳에 대해 기억 연장을 위해 옮겨와 봅니다.

 

 

 

 

p. 33

뒤쪽에 앉아 있던 학생 하나가 들린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무지요.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요.

정답이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예를 들어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재벌집 아들 김주원은 가난한 배우 길라임에게 천진한 얼굴로 이렇게 묻는다.

“이봐, 길라임씨,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뭐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하면 오랫동안 저축도 하고 마음도 졸이고 뭐 그러는 거 야?"

그가 타고 다니는 수입 컨버터블이나 고급 양복, 대저택이 아니라 이런 천진한 무지가 그를 정말 타고난 부자처럼 보이게 만든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군중들을 격분시킨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남겼다는 루머였다. 민중의 삶에 대해 그토록 무지하다는 것이 그녀를 실제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여자로 부각시켰다. 만약 가난한 사람을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들에 대한 엉터리 속설들을 말하게 하면 된다. 

 

 

p. 35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

그의 말에는 그 어떤 공격성이나 비아냥의 기운도 없었다. 그의 의문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천진함이야말로 그가 가난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 두 명의 부자가 있다. 하나는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 의 <코스모폴리스>에 등장하는 에릭 패커다. 주식과 외환 시세를 예측하는 수학적 모형을 발견하고 이를 실용화하여 엄청난 부를 쌓은 그는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 리무진에 앉아 있다. 그는 그 안에서 건강검진도 받고 부하직원도 만나고 심리상담도 받고 강의도 듣고 섹스도 한다.

또 한 명의 부자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있다. '집 없는 억만 '장자'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그의 재산은 이십억 달러라고 하지만 그런 숫자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의 재산 목록을 들여 다보자. 그는 자신의 투자회사인 베르그루엔 홀딩스를 통해 버거킹,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독일 백화점 카슈타트 등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부를 실감케 하는 것은 이런 숫자나 목록이 아니라 그의 발언들이다. 

 

 

p. 69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 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귀족도 뭣도 아니면서 여행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 한 시인이 한 분 있다. 그분은 서울 태생으로 모든 학교를 서울에서 다녔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울 밖으로 거의 나간 적이 없다. 해외여행도 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책을 번역하고 친구를 만난다. 친구들이 해외로 나가면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사람들이 "답답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빙긋이 웃으며 "서울 밖으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 한다"고만 답한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위험을 무릅쓴 채 여행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는 "너무 멋진 여행이 었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들보다는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응수하는 그가 좋다.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p. 89

그리고 다음 해는 종로의 한 극장에서 <비포 선라이즈> 를 보고 있었다. 배경이 비엔나라니 그것부터 신기했지만 우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부산의 한 극장에서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배경이 하필 그리스라니! 우연치고는 좀 심하다 싶었다. 게다가 나는 주인공 제시와 직업까지 같지 않은가 말이다.

예비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 속의 그들은 어쨌든 다시 만나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지만 현실의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전혀 모르고 있다(셀린과는 달리 그녀는 내가 치른 그 많은 낭독회 등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다만 이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녀 역시 <비포 미드 나잇>을 보았다면 비엔나에서 스쳤다가 부다페스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아테네까지 함께 여행한, 자기가 쓰고 있다는 이상한 소설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던 한 남자를 반드시 기억할 것이라고.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 사십대에 다다른 셀린은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이번에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건 가요?"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나는 비슷

 

p. 125 : 샤워부스에서 노래하기

샤워할 때면 명가수다. 관객은 오직 나 한 사람뿐, 거울과 타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울림도 좋다. 그런데 밖에만 나가면 수줍어서 노래를 못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에 나 오는 장의사의 고충이다.

 

이 놀라운 목소리를 우연히 욕실 밖에서 엿듣게 되는 미국인 사돈 제리, 왕년의 오페라 감독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혼자 듣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성악계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주었건만 오디션장에서는 떨려서 노래를 못한다. 제리는 무대에 샤워부스를 설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그래도 저건 아니지 않나 하는 낭패감이 동시에 드는 희귀한 장면이다. 어쩌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은 장면인지도 모르겠다.

 

 

p. 130

영화사만 둘러봐도 샤워부스와 함께 나타난 인물들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장뤼크 고다르가 대표적이다. 비평가 출신이었기에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무지했다. 그런데도 그냥 찍었다. 한마디로 막 찍었다(그러고 보면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는 제목과 형식이 일치한다). 촬영은 엉망이고 이야기는 비약과 생략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는 그게 '새로운 영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던 영화는 이미 낡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전략은 먹혔다. 몇몇 사람들은 덩달아 고다르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은 누벨바그라 불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무대에 샤워부스가 설치되었고 그로부터 한동안 샤워 하면서 얼마나 노래를 잘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미학적 기준이 되었다.

세상에 맞춰 자신을 바꿀 것이냐, 세상을 자기에게 맞게 바꿀 것이냐, 아마도 모든 예술가의 고민일 것이다.

 

 

p. 135

드리며 창틀에 쌓여가는 눈송이, 방한구에 싸인 몸뚱이의 한쪽에 눈이 덮인 채 옆을 지나가는 차장의 모습. 지금 밖엔 사나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줄곧 똑같은 것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기차의 진동, 한결같이 창문에 내리치는 눈,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는 증기열의 급격한 변동. 어두컴컴한 속에서 어른거리는 똑같은 얼굴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들..

그러나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마침내 빠져든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자기도 키발을 하고 병실 안을 걷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 순간의 안나는 이미 폴 오스터가 언급한 3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

 

브론스키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안나의 욕망은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형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아직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유부녀라는 안나의 현실 대 '브론스키라는 매혹의 대상'도 기차의 소음' 대 '소설의 내용'으로 교묘하게 치환되어 있다. 안나는 읽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자기가 경험한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p. 215

맥빠지는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현대소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만큼 이런 원칙에 구애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들이 결말에 다다라서는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극적인 갈등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래전에 알고 지낸 한 젊은 영화감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문고판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시간이 나면 꺼내 보곤 했다. 얇은 책이기 때문에 저렇게 읽다가는 다 외워버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 책을 보며 창작의 방향을 바로잡는다고 말했다.

 

예컨대 "희극은 현실적 인간 이하의 악인을 표현하려 하고 비극은 그 이상의 선인을 표현하려고 한다" 는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코미디 영화를 만들겠다면 보통 사람들보다 어딘가 못난 점이 있는 인물이 등장해서 못난 행동을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악인'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못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 '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그가 말한 '선인' 역시 착한 사람이라기보다 관객들 다수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오셀로는 무공이 높은 장군이었고, 리어 왕은 신하들로부터 존경받는 왕이었고, 이순신은 지략과 리더십을 겸비한 제독이었다. 오이 디푸스 역시 테베의 왕이었고 영리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귀족의 자제였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열렬한 사랑에 자기 몸을 던졌다.

 

p. 246

그 후로도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 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숱한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내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하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나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돈키호테』와 『보바리 부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엠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엠마 보바리로 바꾸어 놓는다.


 

p. 279

인을 도운 경험이 똑같은 형태로 내게 돌아오지도 않는다. 마스터 카드의 광고는 그 지점을 파고든다. 멋진 경험들, 예를 들어 자녀와 함께한 캠핑 같은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It's priceless.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경험들을 신용카드로 사라는 것이다. 그들이 은폐하는 것은 청구서가 한 달 후에 날아온다는 것이고, 결국은 가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는 다르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맨,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이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진다. 나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 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 루고 쌓여가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른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본다. 정당은 우리를 유권자로 여긴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다. 우리가 더 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크레이프 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p. 293

심지어 작가조차도 오래전에 쓴 자기 작품에 대해 완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쓴 피에르 바야르는 그래서,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작가에게 절대로 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작가는 독자가 이야기하는 책이 자기 책 이 아닌 것만 같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때 책임은 양쪽 모두의 불완전한 뇌에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기억도 부정확하고, 독자의 기억도 마찬가지이니 둘은 오래전에 읽은 어떤 소설에 대한 불완전한 기억을 나누다가 서서히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잘못된 기억은 책을 가지고 와서 책장을 펼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꿈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신비의 영역 속에 남아 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한때 보르헤스는 젊어서 출판한 어떤 책 하나를 심하게 부끄러워한 나머지, 도서관마다 찾아다니며 그 책을 대출한 후 없애버렸다고 한다.

 

작가들마다 그런 '흑역사'가 하나쯤은 있는 데, 이것을 삭제하기는 매우 어렵다. 책은 한번 출판되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 서관에 납본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그 어떤 책도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p. 336

몇 시간쯤 후, 홈즈가 믿음직스러운 친구를 깨웠다. "이보게 왓슨, 하늘을 보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주게." "수백만 개의 별이 보이는군." 그러자 홈즈가 물었다. "그 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가?" 잠시 생각하던 왓슨이 대답했다.

"천문학적으로 수백만 개의 은하계 수십억 개의 항성이 존재한다는 것, 점성술적으로 사투르누스가 사자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 지금이 약 세시 십오 분쯤 됐을 거라는 것 신학적으로 신은 전능하고 인간은 미미한 존재라는 것, 기상학적으로 내일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것, 뭐 이 정도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삼십 초쯤 말이 없던 홈스가 입을 열었다

"어떤 놈이 우리 텐트를 훔쳐갔다는 것을 알 수 있네."

이 농담은 이 시리즈의 익숙한 패턴을 반복한다. 왓슨은 헛 짚고 홈스는 가르친다. 홈즈는 신이나 기계처럼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주는 존재인데, 이번에도 그는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한 인물이 누군가가 텐트를 훔쳐가는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는 게 웃음의 포인트다. 그의 완벽성이 해제될 때, 우리는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p. 345

으로 외치지 않고, 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준다. 우리는 라스콜니코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 의 소년들도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 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내가 모르는 내 숨겨진 모습과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친다.


 

 

p. 351

어렸을 때의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심지어 15소년 표류기」의 저자가 해저 2만리』의 저자와 같은 저자라는 것도 몰랐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면 그 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점점 많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개개의 책들이 외딴섬처럼 고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완전 동감: 최근 연금술사와 다른 원전에 표현된 보물이 숨겨진 장소에 대한 꿈 이야기)

 

나중에는 소설과 소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마치 탐정이 무관해 보이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듯이 하나하나의 단서 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소설문학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지도를 완성하려는 욕망이 생겨났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사는 세계를 잘 알고자 한다. 난파하여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는 나름의 안정을 찾자마자 섬 여기저기를 답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분명 고립된 섬이 맞는지, 그 섬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지 알고자 한다. 그것은 당연한 욕망이다. 독자 역시 소설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뎠다면, 그리고 그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세계가 얼마 나 깊고 넓은지, 그리고 지금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럽다.

 

 

 

p. 370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일지도 모른다.

 

별들이 수백 수천 년 전에 보내온 빛이 이 제야 우리의 망막에 와 닿듯이 책 역시 까마득한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 도달하고 영향을 미친다. 밀란 쿤데라의 통찰처럼, 비록 우리 현대인의 시야가 마치 요제프K 의 그것처럼 좁아져 있고 모두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고, 세계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이 좁은 전망을 극적으로 확장해줄 마법의 문 이 있다. 바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것이다.

 

 

 

 

p. 398

빛이 정말 완벽하게 차단돼 있어서 눈을 뜨든지 감든지 똑같습니다. 처음엔 약간 무섭죠. 연인과 같이 가면 좋겠지요? 꼭 잡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몰래 입을 맞춰도 아무 도 모를 겁니다. 그 안에서 시각장애인과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겁니다. 길도 건너고(차 소리가 들립니다), 더듬더듬 벽을 만지며 걸어가기도 합니다. 앞에 안내자가 있지만 아무래도 불안합 니다. 그러다 카페에 앉아서 음료수도 마십니다. 콜라를 주문하자 콜라처럼 느껴지는 뭔가를 갖다 줍니다. 마셔보니 정말 콜라 같더군요.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밖으로 나와서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십오 분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겁니다. 저뿐 아니라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감각이 살아납니다. 시각을 사용할 수 없으니 귀도 쫑긋해지고, 촉각도 예민해집니다. 청각이나 후각도 보통 때보다 훨씬 민감해집니다. 심지어 어둠 속에 서 마신 콜라의 맛도 훨씬 더 생생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평소 얼마나 덜 사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평 소에 우리는 거의 시각만을 사용하고 살아가지요. 그런데 다른 감각을 사용하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고 그에 따라 우리의 감정도 훨씬 풍부해집니다.

저는 미술관에 가서 조각을 볼 때 허락된다면 가끔 만져봅니다.


 

p. 402

감추고 대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은 저성장의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 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을 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문학만큼 다양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작가마다의 독특한 스타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큰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비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p. 414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앞으로 십 년밖에 못 산다면 뭘 할까? 지금 마흔셋이라면 쉰셋에 죽는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쾌하게 정리되죠.

 

우선 각종 경조사에 가지 않을 겁니다. 친구 아기 돌잔치? 안 갑니다. 아마 이런 인터뷰도 안 할 겁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마음껏 하며 살고 싶을 텐데, 그 일이 내겐 소설 쓰기입니다. 십 년이면 기껏해야 너덧 편밖에 못 쓸 텐데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는 거죠

그런데 이 기간을 좀 더 좁힐 수도 있습니다. '오 년밖에 못 산다면? 저는 우리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수시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대답이 나올 텐데 그럼 또 물어보는 니다. 이 년밖에 못 산다면? 저 같은 경우 그 모든 경우의 수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이 소설 쓰기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더니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십 년, 오 년, 이 년의 우선순위가 모두 같으니까!"

같은 질문을 예술하는 친구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십 년을 산다고 해도 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이 일을 계속해야지" 하더군요. "오 년밖에 못 산다면?"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년이면 어떠냐?" 했더니 "당연히 프라모델을 만들어야지"하더라구요.

 

 

p. 426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 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 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던 시절에 이런 수업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나는 용서한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p. 429

이런 순간까지도 글을 쓰거나 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아직 최종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지요. 작가들의 평균 수명으로 미루어볼 때, 저의 생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다고 예상할 수 있는데요. 어떻게 죽을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뭘 하고 있을지는 분명히 알 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겠지요. 저의 동료 작가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 놓을지도 모릅니다.

 

 

 

p. 434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이거 얘기하면 누가 야단치지 않을까? 혼내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안 쓰는 거예요. 소설을 쓴 다는 것은 사실 자기 내면의 어떤 것을 꺼내놓는 아주 위험한 일인데,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비판을 하면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글쓰기에 있어 정말 좋은 선생님은 학생의 장점을 하나라도 들어서 얘기해주고 넌 어쩜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생각해냈니, 너는 참 글을 잘 쓰는구나, 또 써봐라 또 써봐, 그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남의 글을 비판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싶은 유혹이 들죠. 그런데 남의 글을 비판하다 보면 그 비판의 언어가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남을 칭찬하고 추어주면 그 말들 역시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글 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제가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빨간 펜을 버리고 '참 잘했어요' 고무인을 준비하시라는 겁니다.(웃음) 그리고 그걸 막 찍어주셔야 해요. 어떤 아이에게는 두 개씩 찍어주시구요.

* 어차피 글이라는 것이 자기표현의 도구잖아요. 제멋에 겨워서 쓰는 건데, 선생님이 고쳐줄 수 있는 글은 논문 같은 일종의 비판적 글쓰기 또는 이론적 논리적 글쓰기 정도입니다. 학생이 자기 감상을 표현한 글에 대해서 빨간 펜을 휘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p. 443

일단 학원을 가야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피아노 레슨, 발레 레슨. 이제 더 이상 즐겁지 않습니다. 초등학생이 돼서도 벽에 색칠하다간 아마 집에서 쫓겨나고 말 겁니다. 예술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때로는 목표도 정해져 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예술은 예술로 대학을 갈 아이들에게만 허용됩니다. 딱히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예술적인 분방함은 탄 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경복궁으로 사생대회를 하러 갔습니다. 왠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궁궐 같은 것은 그리고 싶지가 않아 저는 그냥 검은색으로 도화지를 채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제 귀를 잡아당기더군요. 돌아보니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지금 뭐 그리는 거야?" 선생님이 제 그림을 집어 들면서 물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달도 없는 어두운 밤, 까마귀가 나무에 앉아 서 울고 있는 장면이에요"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우리 영하가 미술에는 재능이 없어도 스토리텔링에는 재주가 있구나"라고 말씀하시기는커녕, "이 자식이 그림을 그리라니까 장난을 쳐? 이리 나와"라고 야단을 치며 그림을 입에 물고 서 있으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다른 학교에서 온 여중생들도 많았는데 한마디로 개망신이었습니다.


 

 

p. 446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예술을 시작하는 겁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인터넷 접속을 끊고, 당장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른이라고 못할 것 없습니다. 자기 운명이 아니라고 외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연극하기'라는 재미있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이 과목은 연극원에 들어온 모든 학생들이 힘을 모아 짧은 연극 한 편을 만드는 것인데, 특이한 것은 각자의 전공과는 가능한 한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기를 잘해서 들어온 학생은 극본을 쓰고, 글을 잘 써서 들 어온 극작과 학생은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대미술을 하는 학생이 연출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학생들도 나중에는 정말 즐거워합니다. 저는 연극을 막상 하게 되면 미칠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을 여러 곳에서 목격했습니다. 군대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도, 아주 짧은 촌극 하나를 만들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깊이 몰입하고 즐거워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친구들 몇을 꼬셔서 음대의 이탈리아 가곡 수업을 들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음대생들은 악보만 척 보고도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지만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저희는 최소한 한 시간 전에 음대에 가서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음대생 한 명을 설득해 연습실에 들어가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연습을 해야만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p. 484

예술적 자아는 소설로 풀면 되는 거 같아요. 소설 속에서 더 과감해지고, 더 미친놈이 되는 거죠. 작가는 삶을 분별없이 살아선 안 돼요. 제 몸을 불사르면서 한두 작품쯤 좋은 작품을 쓸 수도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전 지속 가능 한 소설가로 살고 싶어요.

에피큐리언으로 살아가기

대학교 때 철학개론을 보면서, 제 철학적 입장을 정리한 적이 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게 에피쿠로스 학파예요. 스토아 학파처럼 금욕적이진 않지만, 높은 형태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느끼는 고통과 기쁨, 이런 것들에 점점 집중하게 돼요. 그에 비하면 책을 내는 일은 훨씬 지루한 일이에요. 큰 즐거움을 주지 않아요.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밤에 술 마시는 일도 거의 없어요. 취미도 없고, 다른 것에 탐닉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나에게 깊은 수준의 만족감을 주느냐 그게 아니라면 그만두는 거죠.

 

 

p. 507

질투심 이런 것 때문에 친구 작품의 장점을 잘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억압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자주 했어요. 이미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기 있는 사 년 동안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에 있는 어린 예술가들이 상처 받지 않도록 잘 보호해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라고요. 글쓰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얘기했죠.

지금도 그런 글쓰기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고 계시나요?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게 프로페셔널의 딜레마죠. 그러나 고민은 합니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가 계속 즐거울 수 있을까? 처음에야 당연히 즐겁죠. 작가와 창작물 사이의 일종의 허니문 같은 시기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에피파니일 수도 있겠죠. 그 허니문 시기에는 내가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또 놀라고, 그런저런 즐거운 시기가 있지요. 그러나 그런 시기가 지나고 저처럼 십 년이 훌쩍 넘어가 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더 다른 문제들을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즐거움만 가지고는 헤쳐나갈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는 걸

 

p. 508

댓글을 달았는데, 아니 글쓰기가 즐거울 때도 있냐, 이러시더군요.

그러니까 결코 즐겁지 않다는 것이죠?

네, 그러면서, 그런 얘기를 하면 다른 분들이 화내지 않겠냐고 오히려 저를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어요.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이로구나,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도 앞이 캄캄해지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자기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라는 것은 뭐냐, 어디서 오느냐, 왜 글을 쓰면 즐거우냐에 대해 생각을 해볼 기회가 됐어요. 만약 글쓰기가 즐겁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우리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감옥에 있을 때도 글을 쓰고 정말 고통스러울 때도 글을 쓰잖아요.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종이컵에다가 포크 같은 것으로 시를 써서 변호사에 게 내보냈고 그게 시집이 돼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면 과연 그런 시를 썼을까요? 감옥에 갇혔을 때, 정말 갑갑하고 괴로울 때 인간은 글을 쓴다는 거죠. 저는 글쓰기가 가진 이런 해방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도 교육에서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해방감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냐고 고등학생이

 

 

p. 526

그러므로 함재기 조종사들은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무수한 가상 착륙 연습을 한 이후에야 진짜 항모에 착륙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습 삼아 겪기에는 너무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입니다. 연애나 결혼은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단골 사건이지만 한 인간의 일생에서는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이토록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을 인간들은 어떻게 미리 준비할까요? 바로 시뮬레이터를 통한 가상 연습입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면서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야기들 대부분은 간단한 핵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온했던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과 맞서 싸워 결국에는 삶의 균형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문학적 실험이 있었지만 지난 수천 년간 이런 기본적인 구조가 유지돼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정신적 무기가 있습니다. 이 상상력은 주로 앞으로 일어날 커다란 사건, 자기 삶의 균형을 깨뜨릴지도 모를 사건을 미리 그려보는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일, 주변에서 보고 듣지 않은 사건

 

 

p. 529

색 스크린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삼각도 아니고 원도 아닙니다. 영화가 발명된 이래 백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창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 창을 통해 어딘가를 '구경'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에마』의 주인공 에마를 글로 읽는 것과 영화로 보는 것은 꽤 다른 경험입니다. 소설로 읽을 때는 내 멋대로 상상하던 인물이 영화에서 는 배우의 얼굴로 고정됩니다. 우리가 상상하던 공간 역시 미술 감독의 뜻에 따라 재현되고 그 안으로 제한됩니다.

 

이런 특성을 폴 오스터는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험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평면에 투사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원래 이름은 활동사진이었고 영어에는 아직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영어로 영화는 모션 픽처 motion pictures, 즉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뜻 아닙니까? 반면 소설은 평면이 아닌 삼차원적 공간, 상상적 세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어 딘가 다른 세상'에 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곳은 19세기 러시아의 궁정일 수도 있고, 뉴질랜드 근처의 무인도일 수도 있고, 플로리다의 어촌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우리 마음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일 뿐입니다. 

 

 

p. 532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우리를 실패와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를 피할 수 있다 해도 죽음이라는 가장 유명한 실패는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소설은 철저하게 실패와 실패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리고 많은 소설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내용 중에 죽음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보며,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 실패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아울러 소설은 실패가 때로는 성공보다 더 위엄 있는 사건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뼈만 끌고 포구로 돌아왔지만 소설을 읽은 우리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그 물고기와 싸웠고, 그 물고기가 숨을 거둔 후 에는 그 물고기의 살을 뜯어먹으려는 상어와 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의 실패에는 위엄이 있습니다.

 

소설들은 그런 패배로 가득합니다. 늙은 돈키호테는 평생 읽어온 기사도 소설의 세계를 동경해 길을 떠나지만 비웃음을 살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조차도 우리는 미소를 띠며 읽게 됩니다. 


 

 

p. 533

환상을 좇아 일상을 탈출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그걸 좀 과장되게 보여준 것뿐입니다. 그를 보면서 위엄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소설이라는 이 이상한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실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구와 달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달은 무슨 인테리어 소품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떠서 광합성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태양광만 지구로 반사하지만, 그럼에도 지구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고 여성들의 생리주기도 조절합니다. 많은 생물들이 달의 주기에 따라 이동하고 짝을 짓고 산란합니다. 소설도 그와 비슷하게 인간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 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p. 547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평생 한 작가 혹은 특정 작품만 줄 창 읽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서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바람둥이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책을 만나거나, 혹은 과거에 읽었으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책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는 혼자 즐거워합니다. 이런 즐거움은 가장 가까운 친구와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이 은밀한 기쁨을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의 독서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심지어 그 책을 쓴 작가와도 독서의 감상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작가 역시 그 작품을 완성한 후에는 한 사람의 독자와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백 번을 더 읽은 독자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보다는 작품에 대해 잘 기억하겠지만, 그 기억 역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가면서 다른 독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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