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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독서정리

서른아홉 번째 책 : 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 -이인호 교수

by 마파람94 2020. 8. 12.

 

서른아홉 번째 책을 읽었습니다. 한양대 이인호 교수님이 쓴 '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 입니다. 중국 고전은 왠지 딱딱하고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을 깨 줍니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책이 쓰여 있습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출판사 새빛에듀넷 펴냄 | 2010.05.24 발간
책 소개 : 한양대학교 ERICA 캠퍼스 중국학과 교수 이인호의 『장자에게 배우는 행복한 인생의 조건』.

 

제1장 節慾(절욕) : 
행복의 낙원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지요. 


1. 탐욕이 화를 자초합니다 
2. 명예와 이익을 떨치면 삶이 자유롭습니다 
3. 순리에 따르는 삶 
4. 욕심을 줄이면 행복이 보입니다 


제2장 虛心(허심) :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 

 

1. 속박과 구속을 벗으세요 
2.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 
3.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4. 피고 지는 꽃처럼 인간도 그렇게 돌아갑니다 


제3장 餘裕(여유) :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1. 조직의 소모품으로 전락한 당신 
2. 가늘지만 길고 여유롭게 사는 지혜 
3.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4.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롭습니다 


제4장 自足(자족) :
자존심 높이 세우니 행복한가요?

 

1. 재물이란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2. 명예와 인기는 허망한 것입니다 
3. 업적에 대한 압박을 벗으세요 
4.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제5장 遊戱(유희) : 
삶의 에너지는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옵니다. 

 

1. 높이 오르면 멀리 보입니다 
2.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예술 
3. 여운으로써 전달합니다 
4. 기교가 아닌 마음으로 빚습니다


제6장 장자의 인생 

부귀영화는 공기 중의 먼지와 같은 것, 은둔과 참여 사이의 진정한 자유인, 죽음마저도 달관한 장주

7장 『장자』와 중국문화

 

 

 

莊子(출처 : zh.wikipedia.org) 

 

 

 

 

 

p. 39 : 순리에 따르는 삶

우리 개개인의 생명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거의 대부분 국가나 사회의 큰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도가 중에서도 특히 장주는 그렇게 큰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생명이나 행복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개체 생명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즐겁고 행복한가 하는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장주는 특별히 「양생주(養生主)」라는 글을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 숙고했습니다. ‘양생(養生)’이란 무슨 뜻인가 하면, 생명을 잘 유지하고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근자에 많이 사용되는 ‘웰빙’이란 용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주가 제시하는 웰빙의 으뜸 조건은 무엇일까요?

p. 40 : 장주는 소를 잡는 백정 이야기로 설명했습니다.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 잡는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손을 대고 어깨로 기대고 발로 디디고 무릎으로 받치는데, 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칼날을 움직일 때마다 사사삭 나는 소리는 너무도 운율적이었다. 소 잡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했고, 들리는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문혜군이 놀라서 소리쳤다. “하, 정말 대단해. 어떻게 기술이 저리 좋을 수 있단 말인고!”
백정은 칼을 놓으며 아뢰었다. “소인이 추구하는 바는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소인이 초창기 소를 잡을 때는 보는 소마다 온전한 소였습니다. 3년을 잡다 보니 그때부터는 모두 해체되어 보였습니다.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정신으로 대합니다. 이목구비의 감각적인 기능을 정지시키자 정신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인은 그저 소 몸속의 결을 따라 그 빈틈으로 칼날을 놀리고 사이사이로 길을 내는데, 모두 원래 소의 구조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섬세한 힘줄과 근육 그리고 뼈와 살이 복잡하게 엉킨 부위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는데, 굳이 큰 뼈다귀를 칼로 쪼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상급 백정은 1년에 칼을 한 번 간답니다. 왜 1년에 한 번 갈까요? 칼로 베기 때문입니다. 일반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간답니다. 왜 한 달에 한 번일까요? 칼로 찍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19년째 수천만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여전히 새것입니다. 소의 관절과 힘줄 그리고 근육 사이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너무도 얇으니, 그 얇은 칼날은 틈새를 여유 있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19년 칼을 놀렸지만 숫돌에서 막 꺼낸 칼날처럼 얇습니다.

이렇게 노련하건만 근육과 뼈가 어지럽게 얽힌 부위를 만날 때마다 소인은 여전히 조심스러워, 마음을 칼끝에 싣고 칼날을 천천히 스치면 소 한 마리가 훌러덩 해체되어 흙이 땅바닥에 쏟아지듯 와르르 주저앉습니다. 이때 소는 자신이 이미 낱낱이 해체되어 죽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그제야 소인은 칼을 내려놓고 바로 서서 사방을 느긋하게 둘러봅니다. 곧이어 소인은 흡족한 마음을 수렴하고 칼을 거두어 고이 보관합니다.” 문혜군이 탄성을 질렀다. “훌륭하네. 자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로소 양생의 도리를 깨달았네.”

 p. 42 
장주는 양생의 관점에서 백정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살아 있는 소의 복잡한 관절, 난해한 힘줄과 근육 그리고 얽히고설킨 살점 등은 명예와 이익에 혈안이 된 험악한 사회와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비유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다른 인간과 부대껴 살아가려면 어떤 태도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좋겠냐는 것입니다. 칼날이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으려면 관절, 힘줄, 근육, 살점 사이로 자연스럽게 칼질을 해야 합니다. 힘줄이나 근육 혹은 살점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고기는 고기대로 망가지고 칼날을 칼날대로 무뎌질 것이며,

심지어 관절을 잘못 건드리면 칼날이 나가거나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로 사람에게 치였다느니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칼날이 망가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할 때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는 좋을 게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매사에 순리대로 할 것이지 무리하게 강행해서는 안 됩니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꼭 후유증이 있습니다.

p.44
무리하지 않으면 힘든 일도 없습니다. 힘들지 않으면 짜증 날 일도 없습니다. 짜증 내지 않으면 성격이 밝아집니다. 성격이 밝아지면 설령 힘든 일이 생겨도 낙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는데 힘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힘들지 않으니 무리할 일도 없지요.

이런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마음의 여유는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즐겁고 여유 있는 마음가짐, 이것이 곧 웰빙의 기초가 아니겠는지요. 그러므로 무리하지 않으면 즐거움은 절로 오게 됩니다.

 
제2장 虛心(허심) :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

p. 69 :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습니다
송영자와 열어구 라는 도사가 있었습니다. 장주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송영자라는 도사가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이 욕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내적인 마음가짐과 외적인 물질세계를 구별할 줄 알았고, 명예와 굴욕의 경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송영자는 세속의 폄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저 집착하지 않는 경지였다.

한편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다녔는데 무척 경쾌했다. 한번 나가면 보름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열어구도 행복 따위를 애써 추구하지는 않았다.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유람하기는 했으나, 그저 걸음을 면했을 뿐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소요유」)

 

p. 70
우리 범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송영자나 열어구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남이 조금만 칭찬해도 좋아 죽고, 남이 조금만 비난해도 길길이 날뛰는 이 속세에서 송영자 같은 사람은 대단한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열어구는 바람을 타고 다닌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장주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머리와 마음에는 집착하고 싶지 않은 명예나 행복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열어구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기는 했으나, 실은 바람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바람이라는 외부 조건이 없어지면 그간 날아만 다니던 열어구는 아마도 다리 근육이 풀려 기어 다니기나 할는지요. 그렇다면 장주가 추구했던 자유는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자연의 변화에 따르며 무궁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무슨 외부의 조건이나 지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절대적인 자유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소요유」)

p.71
비단 장주뿐 아니라 옛 중국의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현대에도 자연재해에 대해 속수무책인 인류가 수천 년 전에는 얼마나 무력했겠습니까? 그저 순응하고 따르는 것만이 최선이었습니다. 이런 자연의 힘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한 사람들이 도가 사상가이며, 장주는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고 자연의 변화에 역행하는 일은 좋을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설령 문명사회에 살더라도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을 최대한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주는 무기, 무공, 무명을 요구했습니다.

 

p. 72
‘무기(無己)’란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 위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무공(無功)’이란 업적이나 성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명(無名)’이란 인기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무공과 무명도 어렵지만 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무기만 제대로 이룬다면 아마도 무공이나 무명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가지 없음을 성취한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문명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온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신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므로, 결국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셈입니다.

p. 73

그러므로 장주가 생각했던 진정한 자유란 육신의 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명이 빚어낸 아집과 업적, 명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누리게 되는 정신적인 자유입니다.

우리도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시달릴 때마다 그런 자유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진 자일수록 자유인이 되기는 힘들 듯합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 아집 때문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는 업적이나 성과나 명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유인이 되기 힘들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자는 비록 기독교나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불현듯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5장 3절)

여기서 ‘가난하다’ 함은 재물이 부족한 빈곤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집에 사로잡힌 지식이나 업적 그리고 성과나 명예 등등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하는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중국어로 된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허심(虛心)’으로 번역했더군요. ‘마음을 비운 자는 복이 있나니…….’ 어떻습니까?

더욱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집, 지식, 업적, 성과, 명예 등등 세속적인 가치를 마음에 두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십중팔구 빈곤하게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는 복이 있는 사람이지요. 이것은 마치 장주가 「대종사」편에서 ‘지상의 소인은 하늘의 군자’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마음이 가난한 자’란 장주가 말했던 그 자유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유인은 당연히 복이 있지요. 고민거리가 없는 이 속세가 그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요.

p. 75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하면 그 빈자리에 평화와 행복이 깃든다는 뜻이겠지요. 현실의 구속을 떨치고자 멀리 여행을 떠나도 결국 당신은 현재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느니 마음을 가난하게 하면 몸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곧 유유자적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범인인가 봅니다. 자유인이 되기가 왜 이리 힘든지요.


제3장 餘裕(여유) :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p. 123 : 가늘지만 길고 여유롭게 사는 지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찌나 말을 사랑하는지 아름다운 죽기로 똥을 받아내고, 귀한 도자기로 오줌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기 한 마리가 말 등에 붙었다. 이 사람은 냅다 모기를 후려쳤다. 깜짝 놀란 말이 펄쩍 뛰면서 마구가 부서지고 고삐마저 끊어졌다. 말도 다치고 사람도 다쳤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앞뒤를 안 가리고 모기를 잡았건만, 결과는 모두 상처 받지 않았는가. 이 어찌 조심스럽지 않은가. [인간세]

 

이 사회를 등질 수 없다면, 이 직장과 조직을 벗어날 수 없다면, 마치 호랑이에게 싱싱하고 온전한 먹이를 던져서는 안 되듯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 말고, 저수지처럼 물을 축적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야금야금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조용히 실력을 쌓고 능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일 테지만, 그래도 실력과 능력을 내보일 때는 조금씩 꾸준히 끊임없이 보여줘야만 생존에 지장이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게다가 말을 너무도 지극히 사랑했던 저 일편단심 짝사랑의 주인공처럼 아무 사회와 직장 그리고 조직에게 충성을 다해도 한순간의 실수나 방심으로 인해 크게 다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사회와 직장과 조직의 생리를 조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눈앞의 사소한 일에 매몰되어 전체를  파악하지 못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또한 장주의 충고입니다.

 

곧은 나무는 먼저 잘린다. 감미로운 샘물은 먼저 마른다. [산목]

 

p. 124

오나라 왕이 양자강에 배를 뛰워 유람하던 중 원숭이 산에 오르게 되었다. 원숭이들은 오나라 왕 일행을 보자 혼비백산 사방으로 도주하여 가시덤불 속으로 숨었다. 그런데 유독 한 마리만이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오나라 왕 앞에서 재주를 뽐냈다. 오나라 왕은 활시위를 당겼다. 원숭이는 보란 듯이 민첩한 동작으로 화살을 잡았다. 오나라 왕은 기분이 상하여 수행하던 궁수들에게 일제히 발사하도록 명했다. 원숭이는 화살에 맞아 즉사했다.

오나라 왕은 측근이던 안불의에게 주의를 주었다. "저 원숭이는 민첩한 동작을 믿고 내 앞에서 교만하게 까불다가 목숨을 잃었다오.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네도 지위를 믿고 다른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말게나." [서무귀]

 

어느 직장, 어느 조직이든 설령 관리자라 하더라도 아랫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서는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그 직장이나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중략-

잘난 사람도 잘난 체해서는 좋은 일이 없는데, 하물며 그렇지도 못한 사람이 교만하게 나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장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장장이가 쇳덩이를 녹여 연장을 만들려 했다. 그런데 쇳덩이가 튀어 오르며 요구했다. "나를 보검으로 만들어주시오." 대장장이는 불길한 쇠붙이라 여겨 던져버렸다. [대종사]


p. 128 :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우리를 숨 가쁘게 만드는 이 경쟁이라는 괴물은 당초 누가 만든 것일까요? 과학기술과 경제가 만든 것입니다. 과학기술이나 경제의 운영 핵심은 속도와 가격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빨리 처리하는 사람을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능력을 일컬어 ‘효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율을 둘러싼 경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p. 136

효율을 다투는 세상에서는 시간이 가속됩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더욱 빨리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렇게 바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주는 기계식 두레박을 거부한 노인장의 우화를 이야기하며,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남쪽 초나라에 놀러 갔다가 진나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음이란 곳을 지나가는 데 마침 노인장 한 분이 밭을 일구고 있었다. 노인장은 우물을 파고 들어가 물을 길어 다시 올라와 밭에 뿌려주고 있었다.

졸졸졸 물을 뿌리는데 힘은 들고 효과는 별로 없었다. 자공이 말했다.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마지기에 물을 댈 수 있습죠. 힘은 별로 안 들고 효과가 크답니다. 어르신도 하실 마음 없으신지요?” 노인장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자공이 대답했다.

“나무를 깎아 기계를 만드는데, 뒤쪽은 무겁게 앞쪽은 가볍게 해 주면 물을 긷는 것이 마치 물을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끓어 흘러넘치듯 빠르게 들어 올립니다. 흔히 두레박이라고 부르지요.”

노인장은 화를 누르고 웃으며 대꾸했다. “내 스승께 들었다네. 기계를 만드는 사람은 편한 것만 찾는 마음이 있고, 편한 것만 찾는 마음에는 반드시 간사한 생각이 깃든다네. 간사하면 순수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면 정서가 불안해지지.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 도통할 수 있겠는가? 내가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수치스러워 안 하는 것이라네.”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지」)

자공은 분명히 경제적 관점에서 효율성이 좋은 과학기술을 이용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장은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효율을 추구하면 간사한 마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두레박을 이용하면 밭에 물을 주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그 절약한 시간으로 더 많은 밭을 경작하면 수확량이 늘어나서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끝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문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p. 138 
앞서 언급했던 대로 효율적으로 경작하는 노인장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농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도 따라서 두레박을 이용할 것이고, 심지어 더욱 개량된 두레박을 고안해낼 것이고, 같은 시간에 더욱 많은 농작물을 생산해낼 것입니다. 결국 순박한 농부들도 서로가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경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p. 139

경쟁이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며, 그 결과 극소수만이 승자가 되고 절대다수는 패배자가 됩니다. 사회적 자원은 승자들이 독식하므로 빈부 격차는 필연적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는 당연히 살아가기 힘들며, 부자라 해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빈부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상호 간의 대립, 질투, 멸시, 증오 등의 악감정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 모두는 불만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삶이 아닙니다. 효율만을 따지며 경쟁하는 우리는 사실상 서로의 시간을 빼앗아가며, 영문도 모른 채 바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p. 140
바쁘게 살아봐야 결국 남는 것은 초조, 불안, 불만으로 피폐해진 심신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연의 속도, 즉 우리 본연의 속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제4장 自足(자족) : 자존심 높이 세우니 행복한가요?

p. 153 재물이란 나무의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장주는 난세에 태어나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장주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발적 가난’을 택했습니다. 장주가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덜 가질수록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사할 때 물건이 많으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특히 귀한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태백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했는데, 우리 모두는 지구에 잠시 들렀다가 떠나는 과객일 따름이라고 갈파했습니다. 무릇 과객이란 간편하게 다녀야 편하듯 우리의 삶도 덜 가질수록 자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p. 154

물질에 얽매이는 삶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것은 장주만 설파한 것이 아닙니다. 송나라 때 곽상(郭象)이란 분이 지은 『규거지(瞡車志)』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유 씨가 있었는데 조그마한 절간에 얹혀살았다. 빈털터리였으므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절간을 청소하고 불상을 닦으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부자가 유 씨를 기특히 여겨 비싼 두루마기 한 벌을 선물했다. 그런데 두루마기가 생긴 다음부터 유 씨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유 씨는 외출을 해도 방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는데, 귀한 두루마기가 생기자 자물쇠가 필요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채웠지만 그래도 누가 자물쇠를 부수고 훔쳐갈까 걱정되어 종일 초조했다. 불안하게 며칠을 보낸 유 씨는 자신이 그리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가 단지 두루마기 한 벌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 씨는 미련 없이 두루마기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 두루마기가 없어지자 유 씨는 비로소 평온하고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질이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무일푼일 때 편안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장주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세속적인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를 일컬어 ‘본말이 전도된 사람’이라 규정하면서 “인간을 타락시키고 삶을 해치는 것은 물욕 때문이며, 재물이란 그저 나에게 잠시 맡겨진 것일 뿐 결코 내 것이 아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근본이고 부귀영화를 포함한 재물은 외적이고 지엽적이며 말단적인 것인데, 장주가 살았던 그 당시에도 근본이 무엇이고 지엽과 말단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널려 있었는가 봅니다.

p. 159 
장주는 생명을 보양하고 물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으므로 당연히 신외무물(身外無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아무리 높게 자라도 뿌리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가지가 번성하고 잎사귀가 무성하다고 하여 뿌리를 잊는다면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겠습니까?

장주의 생각에 재물이란 나무로 비유하면 고작해야 가지나 잎사귀일 뿐 뿌리는 아니었습니다. 장주는 아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설파합니다.

지금 어떤 이가 보석으로 새총 알을 만들어 높이 앉아 있는 참새를 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틀림없이 비웃을 것이다. 왜 비웃을까? 귀한 것을 사용하여 천한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왕」)

귀한 것은 생명이며 그 생명을 보전하고 즐겁게 살아가야 할 사람이 재물에 탐닉하여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한 것인지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설령 재물을 모았다 하더라도 보석을 새총 알로 사용하는 사람처럼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서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고 했던 것입니다(「마가복음」 8장 36절).

 

p. 162 : 명예와 인기는 허망한 것입니다.

의자가 있다고 합시다. 의자는 이름일 따름이죠. 사람이 앉을 수 있게끔 모양과 기능을 갖추어야만 의자입니다. 그 모양과 기능이 실제입니다. 실제와 이름은 부합되어야만 하고 또한 부하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를 '명실상부(名實相符)하다'라고 합니다. 의자든 책상이든 볼펜이든 그 어떤 물건이든 간에 명실상부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대혼란이 옵니다. 물건에 관해서는 이토록 엄격하게 규정하여 준수하려는 사람들이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명실상부를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p. 165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숭아나무, 오얏나무는 굳이 말이 없어도 그 밑에는 자연히 오솔길이 생긴다."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굳이 내 과일이 맛있다고 떠들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니까 길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명성과 실제가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명실상부한 사람은 굳이 명예와 자존심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p. 169

왕밀이 이렇게 선물을 크게 준비한 이유는 물론 자신을 추천해준 데에 대한 감은이기도 하겠고, 또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양진은 그 자리에서 선물을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자네를 아는데, 자네가 나를 모른다니 어찌 된 일인가?" 왕밀은 양진이 괜히 튕겨보는 것이라 믿고는 조용히 아뢰었다. "밤이 깊어 아무도 모릅니다." 이에 양진은 야단쳤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아무도 모른다니 무슨 뜻인가!" 왕밀은 부끄러워 황금을 들고 도망치듯 물러나왔다.

 

p. 186: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당신은 호랑이 조련사를 아는가. 조련사는 산 먹이를 주지 않는다. 호랑이가 잡아먹을 때 포악한 성질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련사는 때가 아니면 먹이를 주이 않고, 먹이를 줄 때는 성질을 자극하지 않는다. 호랑이와 사람은 다른 종이건만 조련사가 호랑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유는 호랑이의 습성을 파악하여 순리대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를 어기면 조련사는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 [인간세]

 

p. 189

자기에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모두 좋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약점입니다. 떡집 주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떡이니 손님도 좋아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엉뚱한 떡을 만들어준다면 과연 손님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상대가 원하는 사랑을 베풀어야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제5장 遊戱(유희) : 삶의 에너지는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옵니다

 

p. 199 :높이 오르면 멀리 보입니다.

매미 뒤에는 사마귀, 사마귀 뒤에는 까치, 까치 뒤에는 장주, 장주 뒤에는 문지기가 노리고 있었더라는 [산목] 편의 이야기도 장주가 일부러 연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p. 215 :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예술

앞서 웰빙을 논하며 ‘소 잡는 백정’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백정의 솜씨에 탄성을 지르던 문혜군이 신기(神技)라고 극찬하자 백정은 담담하게 그것은 ‘기술’이 아니고 ‘도(道)’라고 아뢰었습니다. 백정이 말한 ‘도’가 과연 진정한 ‘도’라면 소뿐만 아니라 웰빙-양생에도 적용되듯 기타 모든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소 잡는 백정’의 이야기를 통해 장주의 예술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 잡는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손을 대고 어깨로 기대고 발로 디디고 무릎으로 받치는데, 칼날을 움직일 때마다 사사삭 나는 소리는 너무도 운율적이었다. 소 잡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했고, 들리는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양생주」)

어떤 예술 분야에 종사하든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저 백정이 다년간 실습했듯 기초를 착실히 다져야 하고, 이어서 기교가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면,

이제는 이목구비의 감각적인 기능이 정지하면서 마음과 정신이 활발해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정해진 기술이나 일정한 기교의 단계를 지나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릇 어떤 예술이든 기교만으로 대성할 수는 없습니다. 저 백정이 자신의 해체 기교를 기술이 아니라 ‘도’라고 자신 있게 말한 그 이면에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부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p. 221
저토록 신의 경지에 도달한 백정이건만 결코 방심하지 않습니다.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한시도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흙더미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지듯 소가 훌러덩 해체되었는데, 소는 자신이 낱낱이 해체되어 이미 죽은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답니다.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묘사는 도저히 잔인한 도살 과정이라 볼 수 없는 예술적인 묘사입니다. 위 이야기는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그의 마음과 정신 속에는 이미 그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들린 듯 밤낮을 잊은 채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훌륭한 예술 작품은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길지만, 정작 완성하는 시간이 의외로 짧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식 예술 정신이며 창작론입니다.

 

p. 221

이렇게 노련하건만, 근육과 뼈가 어지럽게 얽힌 부뒤를 만날 때마다 소인은 여전히 조심스러워, 마음을 칼 끝에 싣고 칼날을 자연스럽게 밀어주면, 소 한 마리가 훌러덩 해체되어 흙이 땅바닥에 쏟아지듯 와르르 주저앉습니다. 이때 소는 자신이 이미 낱낱이 해체되어 죽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p. 222 
중국에는 ‘흉유성죽(胸有成竹)’이란 성어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이미 대나무 그림이 있다는 뜻이지요. 대나무의 이런저런 모습을 하나하나 재가면서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일필휘지로 대나무 그림을 완성시켜버린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려면 마음속과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대나무가 그려져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p. 225

윤편은 수레바퀴 제작 전문가입니다.-제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인이 죽은 사실은 알고 난 후

윤편이 다시 여쭈었다. "그럼 임금께서 일고 계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제환공이 화를 냈다. "과인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잇는데 미천한 것이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다니. 말이 되면 살려주고 허튼소리면 죽을 것이다."

윤편이 아뢰었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을 가지고 비유하겠습니다. 나무를 깎아 바퀴 축에 맞출 때 너무 수월하게 들어가면 헐거워 덜거덕거리고,, 너무 꼭 끼게 만들면 뻑뻑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헐겁지도 너무 끼지도 않게 만들려면 마음 속의 의도가 미묘한 손끝의 감각에 맞아떨어져야만 합니다. 이건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식에게도 가르쳐줄 수 없었고 자식도 제게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나이 일흔이 되도록 아직까지도 이렇게 안자 바퀴를 깎고 있습지요. 옛 성인이 전하려는 그 섬세하고도 미묘한 생각은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성이니 죽으면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임금께서 일고 계신 것은 성인이 남긴 쓰레기가 이니고 무엇입니까." [천도]

 

p. 229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문학적 형상화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밤에 허리가 있습니까? 밤이란 대상은 허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황진이의 글에 담긴 속뜻은 사랑하는 님과 함께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은 믿음, 소망, 사랑, 원망, 절망 등등의 감정이 지극히 복잡다단하게 섞인 마음입니다. 그 뜻은 아무리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또한 그 형상화한 것을 정밀하게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모두 드러낼 수 없습니다. 언어의 한계이고 이미지의 한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왕필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작가는 표현이 잘 안 된다는 가 혹은 표현이 부적절하여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6장 장자의 인생

p. 245 : 장자의 탄생과 생활고

지금으로부터 약 2,470년 전, 송나라 몽성(蒙城)이란 곳에서 ‘장주’라는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주(周)’로 지었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주’는 단순히 왕조의 이름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조화로운 서주(西周)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장주가 태어난 시기는 중국의 역대 지식인들이 이상향처럼 여겼던 태평성대 서주시대가 막을 내리고,

사회가 점차 혼란스러워지는 동주(東周)시대로 진입한 지도 어언 4백여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동주시대를 흔히 춘추전국시대라 부릅니다. 장주의 집안이나 부모님의 교육 정도가 어떻게 되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주(周)’라는 이름으로 보건대 교육을 잘 받은 귀족 가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만 장주가 어렵게 산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이라고는 해도 몰락한 귀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장주는 옻나무 농장인 칠원(漆園)을 관리하는 말직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말단 관리였던 장주는 틀림없이 박봉에 시달렸을 것이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직장마저도 장주는 오래 근무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장자』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장주는 옹색한 뒷골목에 살면서 짚신을 짜서 생계를 유지했고, 그러다 보니 생활고에 시달려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몸은 바짝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장주를 가리켜 나뭇가지처럼 길고도 마른 목줄기에 안색은 누렇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영양실조가 틀림없어 보입니다.

빈곤을 견디다 못한 장주는 친구에게 양식을 꾸러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황하의 일부 구간을 관리하는 관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감하후(監河候)라 불렀습니다. 장주의 하소연을 듣던 감하후는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걱정 말게.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내가 소작인들한테 세금을 거둘 테니까, 그때 삼백 금을 자네한테 주겠네.”

 

p. 249
장주는 당황했습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인데 연말까지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오거나 친구의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우리의 장주는 유머러스하기도 하지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주었습니다.

어제 일이 있어 이 근처에 왔다네. 뒤에서 누군가 부르더라고.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도 없는 것이야. 이상하다 싶어 찬찬히 살펴보니 수레바퀴 패인 자국에 빗물이 조금 고여 있는데, 그 물속에 물고기 한 마리가 허덕이고 있더군. 그놈이 나를 부른 것일세.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물고기 한다는 말이, “나는 황해 바다 용궁의 사신이오. 어찌하다가 이 꼴이 되었으니 물 한 바가지만 속히 부어주시오.” 내가 대답했다네. “걱정 마시게.

내가 남쪽 나라 황제를 어떻게든 설득하여 황해 바다의 물줄기를 이곳으로 끌어와 당신을 당당하게 맞이하겠소.” 허, 그런데 물고기가 그냥 핏대를 세우더라고 “이 죽일 인간아, 내가 일진이 사나워 오늘 이 지경이 되었다만 물 한 바가지면 며칠은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황해 바닷물을 끌어와 나를 맞이한단 말이냐. 관두어라. 내일모레 건어물 가게에 가서 말라비틀어진 내 육신이나 구경하지 그래.” (「외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찾아간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분노에 치를 떨었음직도 하건만 장주는 위와 같이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입니다. 장주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주는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대략 송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p. 263 은둔과 참여 사이의 진정한 자유인

장주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혜시(惠施)입니다. 혜시가 양(梁)나라 재상일 때의 일입니다. 장주는 친구 혜시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혜시에게 이간질을 합니다. “장주가 당신을 보러 온단다.

그런데 실은 당신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양나라 왕을 만나러 오는 것이다. 장주가 얼마나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좋은가. 너의 재상 자리는 이제 곧 장주에게 넘어갈 것이다.” 혜시는 위기감을 느꼈고 곧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장주는 스스로 혜시를 찾아왔습니다. 당황하는 혜시에게 장주는 또 우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친구여, 남쪽에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는데, 아는가? 이 새는 남해에서 북해로 날아갈 때, 그 길고 먼 여정에서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약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네. 원추가 유유히 창공을 날아갈 때 지상에 올빼미가 있었네. 마침 올빼미는 썩은 쥐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원추를 보자 고개를 젖혀 사납게 꺼억꺼억 소리를 질렀다네. 자기 먹이를 노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일세. 자네는 지금 재상 자리를 입에 물고 나한테 꺼억꺼억 소리를 지르는 것인가? (「추수」)

굳이 여러 말하지 않아도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장주는 자신을 고결한 품성의 원추에 비유하면서 재상의 자리나 권력은 썩은 쥐와 같으니 줘도 싫다는 것입니다.

 

p. 264
부귀영화에 급급한 소인배의 마음으로 세속의 가치를 초월한 사람의 배포를 헤아리지 말라는 비아냥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양나라 왕이 장주를 초대했습니다. 정장을 입는 것이 예의겠으나 장주는 그럴 형편이 못 되어 누더기를 걸치고 왕을 만났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장 선생, 행색을 보니 말이 아니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셨소? 너무 고달프시겠소이다.” 이에 장주는 대답했습니다. “행색이 초라한 것은 빈곤한 탓입니다. 정신이 불안하면 고달프지요. 이 몸은 빈곤할지언정 고달프진 않습니다.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났을 뿐이지요.” (「산목」)

위 글에 따르면 ‘고달프다’는 것은 주로 정신적인 측면을 가리키고, ‘빈곤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장주의 생각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발휘하지 못할 때 고달픔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그저 빈곤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장주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고 정신적으로 고달팠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인류 역사를 조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도덕적으로 문란하여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제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장주는 정신적인 해탈의 길, 즉 초연한 삶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해탈이나 초연한 삶이 현실의 고통이나 부족함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부족함을 감내하거나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하고도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그저 마음먹기 나름일 테니까요.

 

p. 266
그렇다면 장주는 정신적인 세계에 안주하여 자아도취에 빠진 은둔자일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는 친구나 제자와 함께 사회와 인생의 각종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고, 기회가 되면 각 제후국의 군주들과 만나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장주는 세상을 등진 은둔자라기보다는 은둔과 참여의 사이에서 즐겁게 노닐던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p. 288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따면서

느긋이 남쪽 산을 바라다보노라면

구르은 하루에도 저녁이 제일 좋아

새들이 서로 짝지어 둥지로 돌아오니

이런 생활에 내 진정 좋아함이 있는데

그게 무언지 따지려면 이미 말을 잊었어라. - 도연명 [음주 시]

 

스스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마치 새가 날아 지쳐 둥지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중략- 느낌과 생각을 곰곰이 음미하며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어 언어문자로 기록하고 싶었지만, 막상 하려니 콕 집어서 뭐라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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