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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독서정리

마흔 번째 책 : 그때 장자를 만났다. -강상구

by 마파람94 2020. 8. 19.

자유로움에 목마르다면 장자를 탐구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 전에 읽었던 장자 관련 책이 너무 재미있던 터라 도서관에서 유사한 책을 하나 더 빌렸습니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 라는 책입니다. 책이 재미있습니다. 더욱이 책 중간중간에 서양 고전 얘기들이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자칫 따분하기 쉬운 장자의 철학에 다채로움을 더했습니다. 최근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는데, 자유하면 빠질 수 없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에 대한 스토리도 곁들여 진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물 한 바가지 붓는다고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든다고 바뀌지 않는다. 본성이 그렇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본성을 되찾자는 주장이다.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다. 억지로 상대를 바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내 시선을 바꿔야 한다. 내 자리만 옮긴다면 머리카락만 뒤덮인 뒷모습 대신 앞모습도 볼 수 있다. 내 시선을 바꾸는 노력, 내 자리를 옮기는 수고, 그게 오해를 풀고 편견을 깨는 첫걸음이다. 인정과 존중, 나아가 화해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자의 가르침은 산으로 들어가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말이다.

p. 10

" 우리는 흔히 " 다른 " 것을 " 틀리다" 고 말하곤 한다. 학은 오리 다리가 짧다고 늘리겠다고 덤비고 오리는 학의 다리가 길다며 자르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다. 다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이 꼬인다. 

 

p. 25
어떤 사람이 탈레스에게 물었다.

"무엇이 어려운 일인가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럼 무엇이 쉬운 일인가요?"
"남에게 충고하는 것."
어떤 똑똑한 사람이 더 똑똑한 사람에게 용 잡는 법을 배웠다. 전 재산을 다 털어놓으며 열심히 배웠더니, 삼 년 만에 용을 잡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기술을 쓸 곳이 없었다. (열어구)


p. 39
스스로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신발이 된다. 신발이 되면, 남들이 따라오는 발자국을 남긴다. 어떤 사람은 발이 커서 큰 발자국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발도 작고 몸무게도 가벼워서 발자국조차 희미할 수 있다. 발자국이 희미한 건 초라한 건가? 내 신발로 내 발자국 내가 남겼으면 그걸로 됐다. 남들이 따라오면 좋지만, 안 따라오면 또 어떤가. 나는 이미 신발이고, 이미 발자국을 남겼는데.

 

p. 59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 하면서 세상과 치열하게 소통했던 헬렌 켈러가 남긴 글 중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있다.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단 사흘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것이다. 첫째 날은 아는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그 얼굴들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마음에 기억한다. 둘째 날은 미술관에 간다. 셋째 날은 마지막으로 해 뜨는 광경을 보겠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하거나, 너무나 당연해서 아예 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경이로운 일들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내일이면 앞을 못 보게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세요.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p. 61
신발이 작아서 발이 아플 때, 혹은 신발이 커서 자꾸만 벗겨질 때, 우리는 발을 의식한다. 허리띠가 커서 바지가 흘러내릴 때, 또는 허리띠가 작아서 숨을 못 쉴 때, 우리는 허리를 의식한다. 신발이 맞으면 발은 생각하지 않는다. 허리띠가 맞으면 허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마움마저 잊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p. 63
역사상 가장 싸움 잘하는 장군이라는 피로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자신이 왜 싸우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중략) 편히 쉬기 위해서 하는 싸움이라면, 싸움을 하지 않는 편이 더 편히 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산다. 
(중략) 

진실은 가까이에 있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마치 발에 너무 잘 맞는 신발처럼, 평소에는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이미 잘 맞는 신발을 신고 있으면서 자꾸만 더 멋진 남의 신발만 탐을 낸다. 그게 더 눈에 잘 띄니까. 눈 크게 뜨고 잘 보면 내 발에 이미 너무나도 잘 맞는 신발이 신겨져 있다. 중요한 건 내 신발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p. 68 
빈방에 볕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이 아니라 마음의 멈춤이다.


p. 74

돈을 쓴다는 건, 돈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돈에 집착하다는 건, 돈에 매여 산다는 뜻이다. 사람이 돈의 주인이 돼야지,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살아갈 때 돈이 돛이 돼야지, 닻이 되면 안 된다.


p. 75
욕심이란 지평선과 같다. 차를 타고 가면 금방 갈 것 같지만, 가도 가도 결코 도착할 수 없다. 여전히 손에 닿을 듯 눈앞에 보일 뿐이다. 하늘이 땅으로 무너지기 전에는 절대로 갈 수 없다. 욕심은 그래서,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얻기에 이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마라.”………욕심의 대상이 꼭 돈이나 명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삶 그 자체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돈이 그렇듯이, 삶도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돈이 ‘갖는’것이 아니라 ‘쓰는’것이듯, 삶은 ‘갖는’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p. 93
큰 물건은 큰 상자에 넣어야 들어간다. 깊은 우물은 긴 두레박 줄을 써야 길을 수 있다. 자기 상자 바꾸고, 자기 두레박 줄 늘릴 생각을 하지 않으면 큰 물건은 못 쓰게 되고, 멀쩡한 우물도 마른 우물이 된다.

p. 95
사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는 건, 감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대로 둔다는 뜻이다. 바꾸는 건 나 자신이다. 내 위치를 바꾸고, 내 시선을 바꾸고,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p. 102
멘토르는 해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정답은 어차피 없다. 답은 텔레마코스의 마음속에 있다. 그 답을 스스로 찾도록 한다. 멘토의 역할은 그렇게 찾은 답에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답을 찾지 못해 끙끙거리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는 일이 많다.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그래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면 답은 의외로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여기까지다. 인생 좀 더 살아봤다고 섣불리 정답을 제시하는 건 욕심이자 오만이다.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에서 정답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정답일 리가 없다.

 

p. 103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하루는 마당에서 허물을 벗고 있는 나비를 보게 됐다. 보고 있자니 안간힘을 쓰는데 도무지 허물이 벗겨지지 않았다.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마음에 살짝 손을 갖다 대서 허물을 쏙 벗겨줬다. 물론 허물은 아주 쉽게 벗겨졌다. 그러나 나비는 나오자마자 날아가지 못하고 곧장 죽어 버리고 말았다.

 답답해도 나비가 스스로 벗고 나올 때까지 참아야 했다. 안쓰러워도 허물을 벗겨주는 건 나비를 도와주는 게 아니다. 번데기 신세를 면하고 나비로 거듭나려면 자기 극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멘토라는 사람이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도와준답시고 나서면, 그거야말로 제자 인생 버리는 지름길이다.


p. 109
올 때가 돼서 오는 게 삶이고, 갈 때가 돼서 가는 게 죽음이다. 때가 돼서 하는 일에 좋고 싫고 가 있을 이유가 없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에픽테토스는 “배가 정박 중일 때 잠깐 뭍으로 놀러 나온 게 인생”이라고 했다. 배 떠날 시간 됐으면 얼른 가서 탈 일이다. 미련 떨고 고집부려 봤자 달라질 것 없다. 아까우면 배 시간 다 되기 전에 신나게 놀든가.

 

p. 114 : 길은 다녀야 만들어 진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늘 고민만 많은 주인공에게 조르바가 던지는 말이다.-중략-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이다. 조르바가 비판하는 것처럼 '생각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에우리비아데스는 '나중에 욕먹을까봐' 아무 일도 못한다. 부리단의 당나귀처럼 '다른게 더 좋아 보여서' 아무것도 못할 때도 있다. 그럼 일을 하더라도 제대로 못한다. 다른 생각하느라.

 

 

p. 134

에픽테토스는 인생살이를 겸손하게 받아먹는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일부러 불러 세우는 건 교양머리 없는 짓이다. 내게는 왜 안주냐고 따지고 드는 건 더욱 안 될 말이다. 내게 아직 안 왔으면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내게도 기회는 오니까.

이상하게 뭘 해도 꼬이기만 할 때가 있다. 아무리 애써도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뭘 해도 안 된다. 파도가 오지 않은 때다. 기다려야 한다. 긴장은 풀고 마음 편하게, 그러나 새로운 파도에 언제든 올라탈 준비는 마친 채.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흐름을 따라가야 편하다. 결을 거스르면 피곤하다. 힘 빼고 결을 따르면 된다.

 

p. 138

"기억하라. 너는 연극배우다. 네 역할은 작가가 마음대로 결정한다.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 대로. 역할이 주어지면, 너는 가난한 사람이 될 수도, 절름발이가 될 수도, 통치자가 될 수도, 그냥 보통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냥 자연스레 연기하면 그만이다. 네게 주어진 역할을 잘 연기하는 거. 그게 네 일이니까. 네가 맡을 역할을 정하는 것, 그건 네 일이 아니다."



p. 145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건, 내 선택이 아니라 내 성격이다.
“오는 세상은 기다릴 수 없다. 가는 세상은 따를 수 없다”라고 한 접여의 말이 맞다.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손에 댈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바로 지금뿐이다.

p. 149

 

알베르 "카뮈는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고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정복할까, 아니면 정복당할까?' 감히 이런 식으로 묻지 말고 계속 싸우"라고 했다. 박경철은 "기필코 올려놓겠다는 목적은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없이 도전하는 행위, 그것만이 진실이며 거기서 역설적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썼다. 장자는 바르게 사는 길로 얽혀 살기를 제시한다

 

장자는 바르게 사는 길로 ‘얽혀 살기(영녕)’을 제시한다.

 

무릇 삶을 죽이는 이는 죽지 않고, 삶을 살리는 이는 살지 못한다. 성인의 도는 보내지 않는 것도 없고 맞이하지 않는 것도 없고, 헐어버리지 않는 것도 없고, 이룩하지 않는 것도 없다. 이게 바로 영녕이다. 영녕이란, 얽혀 살다 보면 이루는 것이다…. 대종사

p. 152
“우리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나와 함께 유배를 간다. 아무리 험한 곳에 있을지라도 몸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다 찾고 마음은 좋은 것을 즐기느라 충만하다(세네카)”

 

p. 165
"십 리쯤 되는 들판을 질러가는 사람은 세 끼만 먹고 가도 든든하지만, 백 리쯤 여행을 떠나려면 전날 밤부터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고, 천 리 길을 떠나려면 석 달 전부터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십 리 길 떠나는 사람이 천 리 길 떠나는 사람에게 '무겁게 뭘 그리 많이 싸 갖고 가려 하슈?' 하고 시비를 거는 꼴이다.

p. 172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태양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오만이다. 우주에는 태양보다 더 큰 항성이 수도 없이 많다. 해가 열 개 있어 조바심 나는 건 권력자 한 사람뿐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해를 보고 살면 그만이다. 내가 아는 게 전부고,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는 생각은, 자칫 남이 아는 것을 부정하고, 남의 세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다.

p. 185
내가 가는 길은 내 기준일 뿐이고, 내 원칙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고 원칙이 있다. 무슨 권한으로 내 기준과 원칙을 강요할 수 있나. 원칙은 스스로에게 적용해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내 원칙을 남한테 함부로 적용하는 것은 폭력이다. 합법적이라면, 권한 남용이다.

p. 216
내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내 마음이 이미 차 있으니 상대의 말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내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비로소 내 말을 전할 수 있다. 대화의 시작은 재주가 아니다. 마음가짐의 문제다.

p. 272
위로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공감을 하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궁금해야 한다. 궁금한 건 관심이다. 관심은 애정이다. 이제 물어보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너무 흔해 빠진 힐링, 그 위로라는 것에 애정은 얼마나 담겨 있나.

 

p. 307

무지개라고 하면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을 띠게 된 건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프리즘으로 빛을 분리해내면서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정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색깔이 '됐다'. 그전까지는 유럽 사람들도 무재개를 보통 여섯 가지 색깔이라고 불렀다. 우리 조상들은 '오색 무지개'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무지개가 세 가지 빛깔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p. 329
‘중간’은 없다. 다만 고집을 버리는, 집착을 버리는, 독단을 버리는 유연함이 있을 뿐이다. 때로는 세상에 무심한 용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치열하고 악독한 뱀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언제라도 입장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스스로 입장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p. 337
<공자가어>에는 거백옥에 대해 공자가 내린 직접적인 평가도 나온다.
"자기 몸은 바르게 갖지만 남에게는 바르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

 

p. 359

어차피 종살이를 한다면 바위에 하는 것보다 제우스에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순간,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일갈한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묶여 있어요. 왔다 갔다 하니까 당신은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릴 생각은 꿈에도 못해요."

 

p. 363 : 붕새 이야기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된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된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그새의 등덜미는 몇 천리나 되는데, 한번 기운을 떨쳐 날면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소요유]

 

장자를 다 읽고 보면 ' 이 애기 한편이 장자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었구나'라고 뒤늦게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중략- 자유롭게, 멋지게, 거칠 것 없이 창공을 가른다. 변신이다. 예전의 모습을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다. 자유란 그렇게 거듭나는 변신이다. 자신을 버림이고, 자신을 되찾음이다.

 

p. 364 : 붕새의 움직임

붕새는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일 때에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고하는데, 남쪽 바다는 곧 천지다. [소요유]

 

주의할 점은 변신이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이는 때를 '틈타' 할 수도 있고, 바다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이는 '덕분에' 할 수도 있다. 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이는 데 '힘입어' 변신을 이룬다. 세상이 무엇 하나 혼자 힘으로만 되는 건 없다.

 

p. 366 : 붕새의 구만리 상공 

물론 그 길이 쉽지는 않다.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 죽더라도 비밀을 보겠다" 는 각오가 필요하다. 같은 말을 조르바의 입을 빌릴 때에는 좀더 시원스레 한다. "부딪혀 작살이 나면 그뿐이죠." 까짓것 한번 해보는 거다. 물론 작살날 각오도 해야한다. 비상에 실패하면 추락이 기다리고 잇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p. 367 : 붕새의 조망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는 오히려 쪼잔한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자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땅 위에서 사는 법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조르바가 말했던 긴 줄을 드디어 끊게 되는 것이다.

 핵심은 거리 두기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땅 위에서만 산다면, 그게 전부다. 그러나 하늘에서 본다면, 더 넓은 땅도 볼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그런 거리 두기로 깨어 버릴 수 있다.

 

 

p. 370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그릇 물을 웅덩이에 부어 놓고 지푸라기 하나를 띄우면 배처럼 뜨지만, 그곳에 잔을 띄우면 가라앉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쌓인 두께가 얇으면 저 큰 붕새의 날개를 떠받칠 힘이 없다. 구만리쯤 올라가야 바람이 충분히 쌓여서, 그 바람으로 날갯짓을 하면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 그런 다음에야 남쪽 바다로 간다. (소요유) 

 

p. 371

구만리까지 솟아오르는 건 어쨌든 붕새 혼자 감당할 일이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어떤 비웃음이 날아와도, 꿋꿋하게 용기를 잃지 말고 비상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변신, 그리고 구만리 상공에서의 비행은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바람이 없으면 날갯짓을 할 수 없다. 완전한 자유란, 결국은 의존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기타:

- 긴장을 풀고, 마치 남의 일 보듯 심드렁해지는 그 순간, 문제의 해답이 보인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엉뚱한 순간에 멋진 답이 튀어나온다. 훈수꾼들이 늘 장기판을 더 잘 보는 이유도 같다.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기 때문. 장기판에 바짝 붙어 있지 말고, 약간 떨어져 앉아 전체를 보기 때문. 거리두기, 또는 마음 비우기 효과다. 장자의 용어로는 무심이다. 말 그대로 무심히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비로소 보인다.


- 남 탓하지 말라. 못 배운 사람들은 무조건 남 탓이다. 배움은 자기 탓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배움은 남도 내 탓도 하지 않는데서 완성된다. (에픽테토스)

 

-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이냐 아니냐만 염두에 두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상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도 함께 생각하라. (세네카)

 

- 통발을 갖는 게 목적이 아니다. 고기를 잡는 게 목적이다. 뜻을 전하는 게 목적이다. 뜻을 이해하는 게 목적이다. 말은 수단일 뿐. 말에 갇히면 명분에 갇히고, 구호에 갇히고, 생각에 갇힌다. 제 생각에 스스로 갇혀 옴짝달싹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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