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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독서정리

열다섯 번째 책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by 마파람94 2020. 3. 30.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를 완독 하였습니다. 550쪽가량 되는 분량이지만 앞서 읽었던 600쪽가량의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에 비해서 진도가 아주 빨리 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써져 있기 때문이고 장난스럽게 그려진 삽화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많은 부분에서 쉽게 느껴져서 책 제목처럼 깊이가 얕음을 수시로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이 ~ 넓고 얕은 지식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단원 중간요약과 최종요약을 두고 있어서 더욱 머릿속에 잘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고대종교-철학에 대해 자칫 딱딱하기 쉬운데 쉽게 쓰놨으니 고전에 거부감이 있는 분들은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명확합니다. 

 

 

p.24

진리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내가 쥐고 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를 말한다.


p.36
그 변화는 우주가 자기 안에 우주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 즉 인간을 잉태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밤의 들판에 서서 어두컴컴한 하늘의 심연을 올려다보며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질문을 품은 이름 모를 존재로부터 우주는 오랜 침묵을 꺠고 비로소 자기반성의 사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p.37
우주의 크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월적 거대함 앞에서 내 일상의 사소함은 너무도 하찮게 느껴진다.

 

p.111
나의 세계와 나의 우주가 나의 의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우주가 당신의 의식에 의해 발현 된 것이라면, 우리는 세계 창조의 모든 이유와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합리적으로 선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류의 존재는 생각보다 하찮지 않다. 인류의 탄생은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p.113
우리가 만약 너무나도 거대한 우주 속에서 너무나도 작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안에 거대한 우주가 담겨 있고 그것을 담아낸 자가 바로 우리였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pp. 113-114 

인간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곧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점을 갖는다. 우주의 존재 목적이 우리에게 있고, 우주가 창조된 것이라면 그 창조의 관심도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때의 창조자는 외부의 그 무엇일 수는 없다. 우주와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가 빅뱅 뒤에 숨은 초월적 신일 수는 없다. 차라리 그것은 '나'라는 존재,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인류의 존재는 생각보다 하찮지 않다. 인류의 탄생은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특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우리가 우주에서 유일한 의식적 존재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우주의 역사를 상상함으로써 우주는 138억 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오직 인간의 의식과 사유 때문이었다.  기억해야 한다. 텅 빈 우주를 지켜보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p.158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고대인보다 지혜로운가? 그들보다 인생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고전이 남아 있어서다. 

 

p.191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 신을 말할 때, 그 신은 발화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신은 각자의 마음 안에 산다. 

p.212 
전통과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과 이해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자신의 생각을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전통적 견해와 공식적 인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다.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신념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문제가 되는 사람은 하나의 선택만이 옳고 다른 선택은 틀렸다고 믿는 사람일 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사문인가, 바라문인가? 진리, 철학, 세계관, 신앙에서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p.231
세속과 탈속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에게 쥐여준 의무를 행하라.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신에게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p.251 
흥미롭게도 삼황의 전설은 <구약>의 <창세기>와 <길가메시 서사시> 혹은 그리스 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4대 문명 중에서 황하 문명은 나머지 세 문명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은 중간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유사성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신화가 실제의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사유 방식이 구조적으로 유사하거나, 

p.270 
학문과 학문의 연계는 학계안에서 엄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에게는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지식을 이리저리 붙여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신나고 가슴 뛰는 일이다. 

pp. 283-284 
노자와 공자는 혼란한 세상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발 딛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노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곳에서 떠나고자 했다면, 공자는 그곳을 바꾸고자 했다. 다시 말해 노자는 인위적 개입의 헛됨을 깨닫고 초월적 가치로 나아가고자 했다면, 공자는 인위적 개입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현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탈속과 세속. 얼핏 모순되어 보이고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단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의 보편적 무늬 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렇다 저렇다 규제할 수 없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며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p.300 
공자의 가르침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공자의 말씀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기는 하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우주와 인간의 본질 전반을 탐구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공자의 말씀은 너무나 상투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윤리, 정치 이념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저 당연한 말의 나열일 뿐, 거시적 세계관 제시에는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무엇인가? 거시적 전망이 부재한 사회 윤리는 그 사회의 유지와 관리에는 매우 유용할 수 있으나, 어떠한 변혁과 혁신도 꾀할 수 없기 때문이다. 


p.376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말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세계를 환영이라는 뜻의 '마야'라고 불렀고, 서양철학에서는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로 '현상'이라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식'이 모습을 변화한 것으로서 '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참고로 마야, 현상, 색은 모두 실제로는 실체를 갖지 않고, 그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의 상태에 있다. 즉 공의 상태인 것이다.


p.385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리를 말했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을 말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p.337

우리 몸속의 피는 46초마다 한 바퀴돌고, 피부 세포는 2주에서 4주 사이에 바뀌며, 뼈의 조직 세포는 10년이면 모두 대체된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의 신체와 지금 당신 신체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신체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임시적인 무더기다.

p.381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 계발적인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제가 이 말의 뜻을 진전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p.386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수많은 낯선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서다.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딤으로써 나의 작은 세계관의 영토를 가볍게 넘어서기 위해서다.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p.470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채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중략)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p.508 
예수는 홀로 광야로 나아갔다. 척박하고 쓸쓸한 그곳에서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며 자신의 내면으로 깊게 침잠했다. 고행하는 예수에게 악마가 찾아와 그를 세 번 시험했다. 첫 번째로 악마는 돌을 들어 보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고 말했다. 예수는 <구약> 성서를 이용해 답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신명기 8:3)"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당신을 시중 할 것이니 이곳에서 뛰어내려보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기 6:16)" 세 번째로 악마는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화려함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노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시험도 물리쳤다.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 악마는 물러났다.  

p.541
진정한 자유. 이 말은 세속의 화려함과 분주함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 일생 전체가 자본주의적 노동과 소비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심연으로 참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p.546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이다.

 

p.540

많은 단순한 이가 신은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 

 

p.542
만약 당신이 내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고, 진리가 이를 스스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549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p.551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둘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하루 중에서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시간을 모아 남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TV를 끄고, SNS를 닫고, 당신이 당신의 방을 청소하듯 당신의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이제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과 귀를 닫고, 호흡을 가다듬고, 평온히 내면에 머물며,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잡다한 생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다섯째, 많은 날이 지나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졌다면,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 두었던 나의 삶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계가 나의 마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를.

 

p.553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초월적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당신이 언젠가 당신의 내면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p.553 
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무한한 우주를 담아내려고 하고, 우주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 가장 심오하고 초월적인 답은 이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과정을 말한다. 

 

 

 



1. 우주: 세계의 탄생 <중간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다중 우주의 개념과 여러 모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중 우주론은 우리 우주 외에 다른 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이고, 그 모형으로 레벨 1부터 4까지 그리고 서너 가지의 모형이 더 있음을 확인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레벨 1은 우리 우주 너머의 텅 빈 영역을 또 다른 우주로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우주의 기본 상태는 급팽창의 상태이며, 이를 영원한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이 인플레이션의 속도는 점차 가속되고, 결국 시공간의 팽창은 빛과 물질의 팽창 속도를 넘어서서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이 영역이 레벨 1의 다중 우주다.

레벨 2는 영원한 인플레이션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거품 우주였다. 레벨 1의 완벽히 텅 빈 시공간의 표면에서 양자 요동이 발생하고, 순간적으로 물질과 반물질의 쌍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된다. 이때 영원한 인플레이션이 이 균형을 어긋나게 하면서 물질이 발생한다. 수많은 우주가 이런 방식으로 생성되는 것이 레벨 2의 다중 우주다.

레벨 3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가설에서 파생되는 우주론으로, 관찰자의 의식이 미시 세계의 유의미한 사건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우주로 분화되는 다중 우주 모형이었다.

레벨 4는 수학적 우주 가설로, 우주의 실체가 수학이며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상태의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었다.

이외에도 우리는 브레인 우주론을 살펴보았다. 초공간을 떠다니는 거대한 5차원의 막인 브레인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빅 스플랫이 발생해 수많은 우주가 탄생하고 소멸한다는 설명이었다.

이중 당신이 기억해두어도 좋을 모델은 레벨 2의 영원한 인플레이션과 레벨 3의 평행 우주 그리고 브레인 우주론이다. 이 세 우주론이 오늘날 가장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는 다중 우주론인 동시에, 이 책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모든 것의 이론에 도달하기 위한 현대 물리학의 치열한 성과가 집약된 이론들이기 때문이다. 세 우주론 모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작게는 과학 관련 서적이나 다큐멘터리를 볼 때 도움이 될 것이고, 크게는 우리 내면의 우주를 더 광활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 우주는 결국 당신의 상상 안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세계는 생각보다 신비한 무엇인 듯하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중첩되어 있으며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기이한 세계의 매우 일부분만을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태어났다. 지금부터는 이 기이한 세계를 조금 더 선명히 바라보기 위해 차원에 대해 알아보고, 인간이라는 단순한 존재가 우주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것이다.

1. 우주: 세계의 탄생 <최종 정리>
첫 번째 장이 끝났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큰 그림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세계와 자아의 관계라는 주제에는 사실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사유가 다루는 세 가지 범주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인문학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근본 주제를 다뤄왔다. ‘세계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세계와 자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위대한 스승들이 세 번째 주제를 탐구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순서대로 따라가고 있다. 우선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중이다.

이를 위해 우주의 시작에서 출발했다. 오랜 시간 우리는 우주가 유일무이하고, 그 시작은 빅뱅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시간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중 우주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공간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거대하고 무한한 다차원의 집합이었다.

이어서 이 상상하기 어려운 우주를 그나마 머릿속에 그려보고자 차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차원은 특정 물체의 위치를 말하기 위해 필요한 좌표의 수로, 우리의 세계는 공간의 3차원과 시간의 1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시공간을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지, 실제 우주가 그렇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는 추가 차원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추가적인 공간 차원과 추가적인 시간 차원에 존재하는 의식이 있다면, 그는 4차원의 시공간에 거주하는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에게는 우리의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드러날 것이고, 우리의 내면과 외면이 동시에 보일 테니 말이다. 이에 더해 우리는 가장 낮은 차원인 0차원의 존재가 인식하는 세계와 자아의 관계도 살펴보았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세계와 자아의 통합을 말하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중 우주에 대한 탐구는 어떤 면에서 인간을 초라하게 만든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태양계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쫓겨난 것으로 시작해서 근현대 우주론의 발전은 인간의 탈중심화라는 일관된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다중 우주론에 이르러서는 우리 우주마저 초차원을 떠도는 티끌인 마당에 인간의 절대적 지위와 가치를 말하기는 민망해졌다. 하지만 왜 우리 우주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인간 중심 원리는 다중 우주론과 결합하며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했다. 의식적 존재에게 결코 발견될 수 없고 내부에 의식적 존재를 잉태할 수 없는 우주라면 그 우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어떤 우주가 우주로서 존재하려면 그 안에 의식적 존재를 포함해야만 한다. 우리는 앞서 이렇게 질문했다. ‘우리는 왜 우주를 이해하려 하는가?’ 그에 대한 심오한 답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우수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어쩌면 우리 우주는 우리가 이곳에서 눈떴기에 비로소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2. 인류: 인간과 문명 <중간정리>
우리는 방금 138억 년의 시간을 빠르게 여행했다. 큰 사건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 우주의 탄생,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을 살펴보았다.

우리 우주의 탄생은 138억 년 전의 대폭발과 함께 시작됐다. 빅뱅 이론은 20세기 초 허블이 천체들의 적색편이 현상을 관측함으로써 예측되었고, 펜지어스와 월슨이 빅뱅의 흔적인 우주 배경 복사를 발견함으로써 오늘날의 정상과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어서 우리는 우주를 시간적 측면과 공간적 측면으로 살펴보았다. 시간적 측면에서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통합되어 있던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해,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물질과 천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아보았다. 공간적 측면에서는 우주의 기본 천체인 은하를 중심으로 은하단과 초은하단의 규모를 확인함으로써 압도적인 우주의 크기를 상상해보았다.

다음으로 지구의 탄생과 역사를 살펴보았다. 빅뱅 이후 92억 년이 지났을 무렵, 우리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한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으로 지구가 탄생했다. 지구는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며, 명왕누대, 은생누대, 현생누대의 세 가지 지질 시대로 구분할 수 있었다. 명왕누대는 암석이나 화석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지구 탄생 직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론상의 시대다. 은생누대는 33억 년에 이르는 가장 긴 시대로 암석은 발견되었지만, 생물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현생누대는 5억 7천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로, 바다와 육지 위로 생명체가 번성했다. 현생누대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로의 전환기마다 몇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대멸종은 급진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생물 종의 변화를 동반했다.

지질 시대를 살펴보는 중에 우리는 최초의 생명 탄생을 지켜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8억 년 전, 모든 생물의 공동 조상이 등장한 것이다. 자신의 정보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이 기이한 존재의 발생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화학적 진화론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원시 지구의 환경에서 무기물이 유기물로 합성되었고, 이 유기물로부터 원시 세포가 단계적으로 발생하며 생명이 탄생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매우 상식적이고 탈신비적이라는 장점을 가졌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화학적 진화론이 무기물에서 복잡한 유기물이 합성될 수 있음만을 보여줄 뿐, 유기물에서 어떻게 생명으로의 도약이 가능한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 그리고 생명을 물질적 현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논의를 너무도 단순화했다는 점에 있었다.

생명 발생의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밝혀낼 수 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원시 지구의 어딘가에서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것만은 확실하다. 이 신비한 존재는 38억 년의 시간 동안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밟은 끝에 지금으로부터 6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을 탄생시켰다. 인류의 공통 조상은 그 당시의 다른 유인원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에게서 분리된 진화의 가지는 수많은 개체를 탄생시키며 결국 매우 독특하고 문제적인 후손을 등장하게 했다. 그의 후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완전하고 나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최초 조상을 상상할 수 있었고,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지구의 탄생과 우주의 시작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였다.

2. 인류: 인간과 문명 <최종 정리>
두 번째 장이 끝났다.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은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세계, 자아, 관계. 이 중에서 우리는 1장과 2장에서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세계의 탄생부터 지금의 나에 이르는 길고도 긴 시간을 빠르게 여행했다. 그 시작은 시간 이전의 시간으로서 다중 우주에서 시작해, 시간과 공간의 출발인 빅뱅을 거쳤고, 우리 우주의 역사를 지나, 은하와 태양계의 형성 그리고 지구의 탄생에 이르렀다.

지금으로부터 38억 년 전의 어느 날에는 지구 위에 최초의 생명이 등장했다. 그리고 점진적인 진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발생했다. 이때의 진화는 어떠한 목적이나 인위적 방향을 갖지 않는다. 임의적인 자연환경의 변화에 적응한 존재는 번식의 기회를 가졌고, 그렇지 못한 존재는 도태되었다. 지구는 단세포 생물부터 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과 형태의 생명체로 뒤덮였다.

다채로운 생명들 속에서 모든 인류의 조상이 등장했다. 인류는 이 조상으로부터 진화의 가지를 분리해 나왔다. 300만 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 대륙에 등장했고, 150만 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60만 년 전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등장하여 네안데르탈렌시스와 사피엔스의 공동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4만 년 전, 인류 진화의 최종 형태로서 현생인류인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이들은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구인류를 몰아내고 지구 상의 유일한 인간 종이 되었다. 이들은 떠돌거나 정착하며 번성해 나갔다.

그리고 7천 년 전, 문명이 탄생했다. 인간들은 집단을 이루고 도시를 만들었다. 규칙적인 삶의 방식은 문화가 되었고, 언어가 탄생하여 지식이 확산되었다. 세계 4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이 큰 강을 기반으로 발전해갔다. 인간은 거칠지만 풍요롭고 낭만적이던 자연이라는 개간되지 않은 땅을 떠나, 제도와 질서 그리고 상징으로 가득한 문명이라는 개간된 땅으로 이주했다.

문명은 유례없는 풍요와 안전을 보장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졌고, 이로 인한 새로운 갈등과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부와 권력을 향한 집착의 괴로움이 발생했고, 늙고 낡고 잃어가는 것에 대한 고통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고대인의 삶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 이래 많은 변화와 진보가 있었던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문명 이후의 인류가 같은 세계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입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것들의 형태와 모습은 다를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근원적인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는 세계라고 할 때 물질적인 세계를 상상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국가와 사회, 문명과 문화 역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이고, 인류와 타인이라는 사람들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이며, 내가 던져진 나의 신체,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욕망과 집착도 내가 던져진 세계다.

위대한 스승들은 세계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던져진 자아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대면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들으러 떠날 시간이다.


3. 베다: 우주와 자아 <중간정리>
하나의 사상이 별다른 변화 없이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이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극단적인 간결함이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더할 수도 빼낼 수도 없는 내용이어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보편성이다. 그 간결한 사상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탄생한 수많은 사람의 진리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범아일여의 사상은 3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도착했다. 우리가 낯선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고대 인도인의 사상을 다루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치열하게 살다 간 수많은 사람이 어떤 사상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어떤 진리를 길어냈는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 우리는 고집스레 앉아 있던 나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광활한 보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초기 인도인의 세계관은 거대한 순환론적 모형이었다. 자연, 신, 사제, 인간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고리 안에서는 특정 존재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긴밀히 공존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베다》에 따른 의례가 복잡해지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사제인 브라만의 지위가 점차 강화되었고, 이것이 고착되어 계급 세습 제도인 카스트의 기원이 되었다.

《베다》는 중요한 문서였다. 여기에는 의례 절차가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들의 개념과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들은 자연현상과 인간 정신을 반영했다. 인도인이 설명한 신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베다>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그것은 다신론적이고 유일신론적이며 동시에 범신론적이었다. 여러 신들의 모순된 형태는 고대 인도인의 정신 속에서 공존했다.

이러한 신과 세계에 대한 심오한 관심과 탐구는 <우파니샤드>로 정리되었다.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명확했다. 그것은 범아일여로, 전체로서의 세계와 개체로서의 자아의 본질이 궁극에서 하나라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범아일여를 이해하기 위해 관념론과 실재론을 비교해보았고, 머릿속에 투명한 수정구슬을 떠올림으로써 자아 안에 세계가 담긴다는 의미를 체험적으로 연습해보았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게 했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슈라마나 혹은 사문이라 불렀다. 반면에 《베다>의 엄격한 전통을 따르는 이들을 브라흐마나 혹은 바라문이라 불렀다.

<우파니샤드>는 인도 사상의 뿌리가 되었고, 자기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이의 길잡이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었다. <우파니샤드>의 전통은 현실 속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3. 베다: 우주와 자아 <최종 정리>
세 번째 장이 끝났다. 우리는 앞서 1장과 2장에서 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중 우주, 빅뱅, 지구, 생명, 인류, 문명의 탄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행한 것이다. 이후 3장부터는 자아와 관계의 문제를 다루며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여정이다. 방금 그 첫 여행지로서 인도 사상의 대륙을 횡단했다.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인도 서북부 지역에 정착한 아리아인의 경전이었던 <베다》는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며 오랜 시간을 이어져 왔다. 《베다》, <우파니샤드>, 힌두교로 전통은 이어졌고, 그 핵심은 범아일여 사상이었다. 우주의 원리인 브라흐만과 자아의 본질인 아트만이 그 끝에 이르러 하나라는 가르침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추상적이고 궁극적인 설명이라 하겠다.

범아일여의 사상이 일관되게 이어졌지만, 인도 사상 안에서의 내적 갈등도 있었다. 그것은 세속과 탈속의 대립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제사장이나 의례라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진리와 대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많은 이가 세속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사회적으로 이러한 수행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었다. 세속과 탈속의 조화를 위해 제시된 것이 <바가바드 기타>였다. 인도의 사상은 크리슈나의 입을 통해 인도인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게 했다. 너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라. 다만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때 비로소 네 안의 자유와 평온을 얻을 것이고, 신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힌두교는 <우파니샤드> 전통의 탈속과 <바가바드 기타>의 세속의 균형을 찾았고 많은 인도인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인도 사상의 거대 줄기를 살펴본 3장에서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할 개념은 한 가지다. 범아일여. 자신의 내면 깊이 침잠함으로써 체험적으로 얻어야 하는 진리. 하지만 현대의 물질문명이 주는 안락함에 익숙하고 먹고살기에 빠듯한 우리가 이를 인생에서 체험할 가능성은 요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으로나마 이 개념을 이해해보기 위해 머릿속에 투명한 수정구슬을 떠올렸다. 이제 다시 투명한 수정구슬을 꺼내어 그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담긴 왜곡된 세계를 관찰하자. 수정구슬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마음’인 동시에 ‘내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다.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마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다른 것은 없다.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그려낸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이성적으로나마 범아일여를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다.

우리가 이 개념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은 앞으로 여행할 나머지 사상의 대륙 속에서 이 개념을 수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내면 안에서 우주를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이 단일한 주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이 고전을 읽어내는 것을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온 고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단일한 주제에 대해 너무도 낯설어하기 때문이다. 고전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건 많은 지식이 아니라, 그 고전이 발 딛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선(先) 이해다. 현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 사실이지만, 자아와 세계를 통합해서 고려하는 사고방식은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의 절반이 발 딛고 있는 세계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베다>에 대해 알아본 이유는 인도 종교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수많은 고전의 세계로 자유롭게 여행하기 위해 내면의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다.

 


4. 도가: 도리와 덕성 <중간정리>

위대한 스승들이 왜 축의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서 등장했는지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무렵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 간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졌고, 재화는 희소해졌으며, 이로 인한 갈등과 전쟁이 흔하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중국 대륙도 다르지 않았다. 삼황오제의 이상적인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현실적인 역사의 시대로 들어서며 갈등과 전쟁은 첨예해졌다. 주나라 천자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로 이뤄진 봉건제도가 무너지며 춘추전국시대가 찾아왔고,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위대한 스승 노자가 등장했다.

그는 혼란과 폭력의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찾고자 했다. 이에 대한 그의 사상은 <도덕경>에 잘 드러나 있다. 대략 5천 자, 81장으로 구성된 이 문서는 도와 덕에 대한 경전으로, 우주적 근원이자 질서로서의 도와 그것의 내면적 반영인 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상편 [도경]은 도의 의미를 설명한다. 도는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이고, 천지의 시원이며, 무와 유를 아우르는 우주적 질서다. 다음으로 하편 [덕경]은 구체적 행위와 태도 속에서의 덕의 의미를 설명한다. 노자에 따르면 가장 이상적인 덕은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거대한 도의 이치를 따르는 태도다. 이러한 덕을 겸비한 이는 성인이며, 그는 쌓지 않고 나누지 않고 다투지 않는다.

노자의 사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의 사상이 독특하거나 특수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노자 사상은 일반적으로 인위를 거부한 무위의 삶에 대한 추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인위가 아닌 무위를 추구했는가에 있다. 그것은 노자가 우주의 질서와 내면의 질서를 일치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주를 발견할 것을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자의 사상은 범아일여의 가르침과 같은 선상에 있다.

물론 그의 거대 사상과 가르침도 어떤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우파니샤드>가 처했던 한계와도 유사하다. 즉, 탈속을 추구함으로써 세속의 가치를 소홀히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문제가 된다. 어쨌거나 현실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삶에 애착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은 쉽게 닿기 어려운, 너무도 요원한 경지였던 것이다. 문제를 보완하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하는 대안적 가르침이 필요했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 또 다른 위대한 스승이 등장했다. 바로 현실에 발 딛고 있던 공자다.

4. 도가: 도리와 덕성 <최종 정리>
네 번째 장이 끝났다. 우리는 방금 중국 사상의 대륙을 횡단했다. 가장 앞서 고대 중국의 신화와 역사를 살펴보았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위대한 스승들이 탄생했다. 노자와 공자. 그들이 가졌던 근본 물음은 동일했다. 어떻게 이 고통과 혼란을 멈출 것인가. 다만 그 해결 방 안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노자는 탈속의 가치를 추구했다. 번잡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모든 인위를 멀리한 채 자신 안의 우주의 순리를 따르고자 했다. 그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로서의 도와 그것을 내면화한 덕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공자는 세속에 남고자 했다. 그는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바르게 교정하고 나아가 사회의 질서를 바르게 한다면 지금의 혼란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예를 익히고 인을 실천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자의 도가 사상과 공자의 유가 사상은 이후 중국인의 세계관으로 정착했고,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찾을 수 있게 했다. 특히 유가 사상은 강력한 사회 윤리 사상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공자 이후의 유가 사상은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현세적인 가르침만을 제시할 뿐,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거대한 철학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주돈이는 도가와 불교 그리고 음양론과 오행론을 접목하여 우주와 인간의 존재 원리를 체계적으로 밝힌 <태극도설>을 제시했다. 이것은 이후 유학이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이어지며 우주와 인간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가 중국 사상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류 보편의 거대 사상이었다. 인도의 범아일여 사상처럼 우주와 자아의 관계를 밝히고 자아의 내면에서 우주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노자의 가르침에서도, 주돈이의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자는 도와 덕의 본질을 밝히고 덕 안에서 도를 발견하고자 했다. 주돈이는 무극으로부터 태극, 음양, 오행, 인간으로 이어지는 발생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존재 방식이 우주의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5. 불교: 자아의 실체 <중간정리>
불교는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상적 연결고리다. 인도 지역에서 탄생하여 베다의 세계관 안에서 길러졌지만, 인도에 정착하지 못하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가, 유가 사상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아시아인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네팔 지역에서 탄생한 고타마 싯다르타를 기원으로 한다. 후에 붓다가 된 그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독특하고 심오한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의 사상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압축된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로, 1)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직시하고 2) 고통의 원인으로서의 무명과 갈애를 이해하며 3)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 4) 이러한 열반에 이르는 길로서 팔정도를 실천함을 말한다. 여기서의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바른 행위와 생각으로, 그 본질은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의미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불교의 주요 개념으로서 연기와 오온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두 개념은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이다. 연기는 세계의 실체에 대한 설명으로,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세상 만물 중에서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여 이것이 소멸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실체에 대한 관점으로 이어진다. 자아라는 존재도 이러한 연기의 결과로 잠시 뭉쳐진 존재일 뿐이다. 붓다는 자아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단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임시적인 무더기일 뿐임을 밝혀낸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다섯 가지의 무더기라는 뜻으로 오온이라 불린다. 이에 따르면 세계나 자아에 고정 불변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은 허상일 뿐이다. 붓다는 세계와 자아의 실체를 무상과 무아로 정리한다.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선명히 직시할 때에야 집착에서 풀려나고 비로소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치,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묶어 삼법인이라고 한다.

불교가 다른 철학이나 종교와 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는 이유는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아에게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은 일반적인 철학이나 종교 사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 고유의 사상이다. 이러한 특징은 같은 인도 지역에서 태어난 《베다>와 불교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베다》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아트만을 상정하는데, 이를 자아가 있다는 의미에서 유아설이라 한다. 반면 불교는 자아의 실체는 연기와 오온의 임시적 결과물일 뿐 고정되고 불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아설을 설파한다.

세계와 자아에 대한 불교의 독특하고 심오한 관점은 이후 여러 분파와 학파로 분화되며 깊이 탐구되었다. 우리는 그중에서 대승불교를 따라가며 그 속에서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발견해보려 한다.

 


5. 불교: 자아의 실체 <최종 정리>
다섯 번째 장이 끝났다. 이제 두 개의 장만을 남긴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 전체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탐구하는 여정에 있다. 여기서의 거대 사상이란 다양한 지역과 역사 속에서 탄생한 보편적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 결론은 일원론, 즉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였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로 ‘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1장 [우주]와 2장 [인류]를 통해 우주의 탄생부터 문명의 등장까지 살펴보며 인류가 지금까지 도달한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확인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은 거대 사상이라는 고대의 지혜를 단순히 오래된 관점이나 과거의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인류의 보편적 지식으로 고려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서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3장 [베다]에서 <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힌두교를 다루며 인도 사상을 관통하는 범아일여의 사유를 알아보았다. 4장 [도가]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사상, 신유학을 살펴보며 중국 사상의 핵심으로서 우주적 질서인 도와 개인의 내면인 덕을 일치시키는 도덕 일치의 사유를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5장 [불교]에서는 붓다 초기의 가르침과 이후 등장한 대승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을 살펴보며,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내면 안에서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알아보았다.

인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고대 동양의 근원적인 사유 방식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이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에 기반을 둔다.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자아의 마음이 그려내는 것이고, 세계란 자아의 마음 안에 담긴 것이며, 자기의 내면으로 깊게 침잠했을 때 비로소 세계의 실체와 조우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위대한 스승들의 보편적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은 어떨까? 고대 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에게서도 일원론적 관점을 찾을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사유는 세계와 자아 각각의 독립적 실체를 확신하고 이들을 엄격히 분리해서 다루는 이원론에서 출발한다. 이제 남은 이야기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다룰 것이다. 그들의 철학과 종교가 어떠한 계기로 이원론에서 출발하게 되었는지, 이원론으로 인해 어떠한 문제와 대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대안으로써 어떻게 일원론이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6. 철학: 분열된 세계 <중간정리>

유럽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둔다. 이 오래된 문명은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에게 문명, 암흑기,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중에서 고전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이 그리스 고전기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의 이 짧은 기간을 전후로 수많은 도시국가가 발달했고, 특히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며 공존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원정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며 아테네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탄생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아테네의 광장에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던 그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적절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 대화 상대자가 내면에서 스스로 진리를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제자들이 스파르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자신의 이성적인 신념에 따라 독배를 비웠다.

소크라테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아테네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에 대한 꿈을 접었다. 이후 아카데미아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으며, 이데아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2천 년 동안 서양 사상의 근본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데아 사상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인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는 세계관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 세계를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데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관계는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다. 즉, 플라톤에게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

 

플라톤 이후의 서양 사상은 그의 세계관 안에서 성장했다. 서양인은 세계, 자아, 그리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플라톤의 사유 방식을 공유했다. 우선 세계는 두 가지 세계로 나뉘었다. 그것은 완전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실 세계였다. 다음으로 자아는 두 가지 자아로 나뉘었다. 그것은 불멸의 영혼과 필멸의 육체였다. 마지막으로 자아와 세계의 관계 역시 둘로 나뉘었다.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의 주인이자 인식의 주체가 되었고,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은 주체에 의해 탐구되고 개발되는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의 탄생이다. 이원론은 대립하고 독립되어 있는 두 항을 설정하는 태도로, 서양의 사상과 문화의 기본 틀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이원론이 단순히 세계를 분절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항이 다른 하나의 항에 폭력과 억압을 가하게 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의 자각과 극복은 서양에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특히 칸트의 관념론은 비범한 결론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자아와 세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 비범한 결론이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다.

6. 철학: 분열된 세계 <최종 정리>
여섯 번째 장이 끝났다. 우리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차이를 살펴보았다. 동양의 사상은 고대에 시작된 일원론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베다>와 도가와 불교는 자아와 세계의 분리되지 않는 깊은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만 근현대 이후 동양인은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상사적 변화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였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인도와 동양을 식민지화했고, 우리는 강제적인 동시에 자발적으로 서양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동양인으로 태어난 모범적인 서양인이 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원론적 사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식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고 세계와 세계를 분리하며, 세계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를 갖고 있다.

반면 서양 사상사의 방향은 동양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고대에 시작된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철학과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근대까지 이어졌다. 이원론과 로고스 중심주의로 정의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는 자아와 세계를 분할함으로써 주체가 대상을 교정하고 교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비극이 되었다. 인간, 서양, 백인, 남성, 이성으로 상징되는 주체는 자연, 동양, 유색인, 여성, 신체로 상징되는 대상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진행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플라톤주의의 근원적인 문제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원론을 대신할 다원론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철학 등 각 분야에서는 억압되어왔던 대상들의 지위가 복원되고 있다. 이것은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하나의 거대한 다원주의적 흐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실천적인 움직임에 앞서 사상적인 탐구는 이미 깊게 진행되고 있었다. 18세기,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을 제시함으로써 2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자아와 세계의 분리라는 이원론의 전통을 극복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인식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고, 세계를 인식 주체의 내면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정립했다. 인식 주체는 수동적으로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선천적인 인식 능력을 통해 인식 대상에 색을 입히고 정리하여 능동적으로 세계를 그려내는 존재였던 것이다. 칸트 이후 근현대의 서양 철학사는 이원론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아와 세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정리하면, 동양의 세계관은 고대의 일원론으로 시작해 근현대에 그것을 잃어버리고 서양의 이원론을 받아들인 반면, 서양의 세계관은 고대의 이원론으로 시작해 근현대에 이르러 일원론적인 탐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철학과 함께 서양 사상의 양대 뿌리가 되는 기독교다. 우리는 이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역사적 측면에서의 탄생 배경과, 사상적 특징으로서의 이원론,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대안이 기독교 교리 안에서 수용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7. 기독교: 교리와 신비 <중간정리>
서양 사상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기독교의 탄생을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알아보았다. 첫째 세계사적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역사, 둘째 이러한 전체 맥락 속에서 진행된 유대 지역의 역사. 셋째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위대한 스승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이야기는 고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로마 왕국은 기원전 6세기 공화국 시대에 이르러 안정된 정치 체제를 기반으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이뤄냈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서부를 장악한 로마는 거침없이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결국 오늘날의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공화국 말기에는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1인 독재를 꿈꾸며 강력한 개척 정책을 펼쳤지만, 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에 반대했던 모든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로마는 제국 시대를 맞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재위했고,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의 변방이었던 식민지 유대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오랜 시간 유대 지역에서 살았다. 기원전 11세기에 사울에 의해 건국된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 이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다. 이 중에서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에 멸망했고, 남유다 왕국은 기원전 6세기에 신 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이후 페르시아가 유대 지역을 점령하고 유대인의 자치를 허락하면서 그들은 바빌론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기원전 63년이 되면 지중해를 빠르게 장악해나가던 로마 제국에 의해 이 지역은 또다시 점령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원전 4년 전후로 탄생했다. 당시의 유대인은 오랜 시간 동안의 식민 지배와 노예 같은 삶을 견디며 고대부터 전해져온 메시아사상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치유하며 이 땅에 도래할 신의 나라를 말하는 예수는 많은 유대인에게 메시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당시 유대 민중의 관점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삼십 대의 젊은 예수는 어떤 인물로 비쳤을까?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낮은 언덕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파하는 그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확실한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예수 입에서 나온 삶에 대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 철학과 연결되는 접점을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7. 기독교: 교리와 신비 <최종 정리>
일곱 번째 장이 끝났다. 서양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철학과 기독교를 근본 뿌리로 한다. 이 두 사상은 일반적으로 대립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이원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2천 년의 역사 동안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다. 이번 장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해 보았다.


첫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추상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열정적인 사도였던 바울의 사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자와 관계 맺기 위한 필연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바울의 역할이 400년 전 플라톤의 역할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사유 속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진리와 관계 맺은 자가 처하게 되는 보편적인 사건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추상화와 일반화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졌다.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지위가 구체적 개인에서 초월적 보편으로 격상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제국의 작은 식민지 유대 지역에서 활동한 예수는 바울을 통해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존재로 확장된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반면 단점은 그러한 해석으로 현실에 발 딛고 살아 숨 쉬는 가르침을 설파했던 예수의 혁명적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가려졌다는 점이다.

교회는 바울의 사상을 토대로 성장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되었다. 반대로 인간은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신과 인간은 분리되었고, 천국과 지상도 분리되었으며, 영혼과 신체, 선과 악, 금욕과 쾌락도 마찬가지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는 4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플라톤의 이원론과 만나며 체계화되고 세련되어졌다. 이원론의 세계관 안에서 종교와 철학은 접점을 찾았다.

이원론은 오랜 시간 서양을 지배했다. 특히 서양 철학이 근대에 이르러 일원론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이원론을 유지했다. 이를 통해 신의 완전무결함은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절대적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일원론적 측면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 우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기독교 신비주의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일원론의 사유가 특정 지역과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의 모든 지역과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 사유 방식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이다. 이 거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7개의 대륙을 가로질렀다. 우선 [1장]과 [2장]에서 세계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중 우주의 가능성과 우리 우주의 시작, 지구와 인류의 탄생, 문명의 발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여행했다.

우리가 멈춘 시간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여행은 공간적으로 확장되었다. 지구 곳곳의 여러 문명에서 등장한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보며 그들이 자아와 세계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을 살펴보았다. [3장]부터 [5장]까지는 인도와 동양의 스승들을 만났다. <베다》를 간직했던 고대 인도인과, 동아시아의 노자와 공자, 그리고 인도와 동양이 연결고리가 된 붓다와 그의 분파들을 만나보았다. 이들은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이루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것을 제안했다. 그 깊고 고독한 심연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은 나의 투명한 의식이자 동시에 우주 전체의 본질이었다. 나의 눈앞에 드러난 세계의 실체는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속에서 세계의 실체는 열린다. 이러한 자아와 세계의 통합이라는 거대한 신비를 위대한 스승들은 꿰뚫어 보았고, 이를 범아일여, 도와 덕, 일체유심조로 언어화했다.

[6장]과 [7장]에서는 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을 만났다. 서양 사상의 양대 산맥인 철학과 기독교를 알아보며, 서양 사상이 동양의 일원론과는 달리 이원론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했다. 우선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이데아 사상이 제시된 이후로 2천 년 가까이 이원론 철학을 이어갔다. 기독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추상화되었고,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사상을 직접 적용함으로써 신과 인간, 천국과 지상이라는 엄격한 이원론의 세계관을 정립했다. 다만 철학에서는 칸트 관념론이 등장하고 기독교에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등장하며 서양 사상 안에서도 일원론의 가능성이 진지하게 탐구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인가? 21세기 기술 문명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만 하는가?

우선 실용적인 이유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동서양의 고전을 펼친다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원래 고전이 어렵기 때문도 아니고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 철학과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다는 데 있다. 인류의 사유를 출발시킨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을 말해왔는데, 우리는 이원론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외국을 여행하며 이것저것 경험해보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역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은 대부분 일원론의 거대한 대륙 위에서 탄생했다. 당신이 고전을 펼치고 그 안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내면세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일원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당신이 일원론을 이해해야 하는 실용적인 이유다.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불교의 세계관에, 이슬람의 세계관에, 유물론의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태어나 불교인으로 성장하고 불교도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유물론자로 태어나서 유물론자로 죽고, 어떤 이들은 실용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허무주의자로, 어떤 이들은 과학주의자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세상 모든 이가 각자 발 딛고 있는 수많은 세계관을 가장 근원적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어떤 이들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보고, 세계가 자기 내면의 반영임을 매 순간 느끼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어떤 이들은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존재라고 매 순간 인지하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들이다.

우리가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한 발을 내디뎌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당신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외부의 폭풍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모든 선입견을 판단중지한 후, 내면의 가려진 대륙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자.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은 끝에 이르렀다. 우리는 다시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면의 좁은 섬을 미나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한 대륙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장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당신은 광활한 바다 앞에 섰고 사방은 열려 있기에 정해진 길을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나아가는 모든 방향이 길이 될 것이다. 다만 바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굳은 봄도 풀어주고 가득 한 배 속도 비워줘야 하기에 거대 사상의 바다로 나아갈 당신을 위해서 준비 운동을 준비했다. 이 준비 운동은 당신을 멈춰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가족, 학교, 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둘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하루 중에서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시간을 모아 남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TV를 끄고, SNS를 닫고, 당신이 당신의 방을 청소하듯 당신의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이제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과 귀를 닫고, 호흡을 가다듬고, 평온히 내면에 머물며,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잡다한 생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다섯째, 많은 날이 지나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졌다면,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 두었던 나의 삶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계가 나의 마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38억 년에 이르는 시간을 여행했다. 인간이 가진 추상화의 능력은 138억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도 서너 음절의 단어로 표현해버리지만, 이 숫자가 담고 있는 실제 의미는 가늠할 수 없다. 만약 우주를 초월한 관찰자가 존재하고 그가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면 그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라고 해도 부족한 이 짧은 생의 한순간에 지구 위의 작은 공간에 앉아 우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는 이야기를 방금 읽어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 우주를 초월한 존재가 느낀 마음이 혹시 지금 당신의 마음과 동일한 것은 아닐까?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초월적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등장한 수많은 지혜로운 스승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세계 속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당신 속에 세계가 있다는 진실, 세계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진실. 위대한 스승들은 이 깊은 합일의 진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자 했다.

이제 당신이 알려줄 차례다.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우주의 본질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당신이 깨달은 진실을 당신의 입으로 다른 이들에 전해줘야 한다. 위대한 스승들이 당신에게 그러했듯이.

당신이 언젠가 당신의 내면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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