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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독서정리

서른 번째 책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박완서

by 마파람94 2026. 9. 30.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박완서 작가 선생님을 떠올리면요.

다음 제목의 글들이 장면들과 함께 기억 속에 내려 앉았습니다.


언덕방은 내방
나의 아름다운 이웃 : 내 목숨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답답하다는 아이들 : 허깨비 타파
고추와 만추국
내 어린날의 설날 : 한꺼 번에 세 밤
여자와 남진 : 화장실 외
사랑을 무게로 안느끼게
코고는 소리를 들어며






그 여자의 병상은 내가 멋대로 상상하고 겁을 낸 것처럼 그렇게 참담한 게 아니었다. 건강할 때보다 많이 수척해 있었지만 건강할 때 보다 한층 착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건강할 때의 그 여자의 밝음이 눈부신 거였다면, 병상의 밝음은 고개가 숙여지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 여자가 자신의 병명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요샌 우리 큰애가 대학교 갈 때까지만 살게 해 주십사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너무 과하게 욕심부리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 집 큰애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그런데 과욕(過慾)이라니.

나는 적어도 내 첫 손자가 장가드는 것까지는 보고 싶다는 평소의 내 과욕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문득 암처럼 고약한게 정말 두려워하는 건, 목숨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아니라 저런 해맑은 무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희망이 생겼다. 그 여자가 암을 극복하고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내 예감이 들어맞으려나 보다. 그 여자는 요새 만날 때마다 좋아지고 있다.

어제는 커단 시장바구니에 과일을 가득 사 가지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그 여자와 만나기도 했다. 아직도 창백했지만 백합처럼 고왔다.

그 여자는 알까?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 여자의 건강을 빌면서 손자가 결혼하는 걸 볼 때까지 살고 싶은 내 과욕을 줄여서라도 그 여자의 목숨에 보태고 싶어 하는 마음을.

1983년

30

딸애가 받아 놓는 걸 얼핏 보면서 나는 여기자와 마주 앉았다. 그들이 가져온 용무에 상관없이 여대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은 전화로 일단 분명하게 거절한 원고 청탁을 또 하기 시작했다. 나는 웃으면서 들었다. 물론 웃으면서 부드럽게 거절할 속셈이었다. 작가에게 쓸 수 없는 원고를 조르는 건 빈털터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다. 돈은 꾸어서라도 줄 수 있지만 원고란 그런 융통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라는 돈을 못 줄 때는 모질고 독하게 굴어야 하지만, 원고는 못 써 줄 때일수록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나의 작가적 관록(?)이다.

그때도 그런 부드럽고도 확실한 거절을 준비하고 있는데 딸애가 그 노란 꽃을 화병에 꽂아다가 바로 내 옆탁자 위에 놓고 갔다. 얼핏 볼 때 국화려니 했었다. 마침 국화 철이었고 크기나 빛깔이 지천으로 흔한 노란 국화와 흡사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장미였다. 국화에선 천하도록 흔해 빠진 노란색이 장미에선 왜 그리도 신기하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예쁜 노란색이었다. 빛깔뿐 아니라 꽃봉오리의 모양도 그렇게 섬세할 수가 없었다. 거의 절묘하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꽃봉오리가 반쯤 벌어진 듯도 반쯤 오므라진 듯도 싶게 필락 말락 했다. 그때가 바로 그 장미의 미와 순수의 절정의 순간이었다. 가만히 다가가니 그 향기 또한 감미롭고도 그윽했다. 나는 순수하게 행복했다.

나는 선뜻 그 원고를 써 주마고 했다. 자신이 대학 문화에 무지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순수한 행복을 가져다준 이를 차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 희귀하게 아름답던 노란 장미는 사흘도 못가서 시들어 버렸다. 아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의 박명(薄命)함이여!

그러나 그때 원고를 써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후회해 봤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장미 몇 송이가 나에게 미친 뇌물 효과에 아연했고 킬킬 킬 실소 했다. 나 같은 여자가 작가가 됐기 망정이지 고관의 사모님이라도 됐다면 어쩔 뻔했나 실로 아찔한 일이 아닌가.

-미안, 미안, 나에게 그 순수한 기쁨을 준 노란 장미를 뇌물에 비유해서 미안, 미안……………

41

천성적으로 누가 나한테 너무 잘해 주려고 하면 나는 그게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걸 어쩌랴.

자연히 내 집이 제일이다.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그러나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난방이 잘된 집에서 배 불리 먹고 편안히 빈둥댔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춥고, 배 고프고, 고단하고, 집에 붙어 있음으로 생기는 온갖 인간관계까지가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꿈꾸는 여행은 구태여 경치가 좋거나 처음 가보는 고장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표표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나에게 부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마음이 시리고 헛헛할 때,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에 내가 불쌍해 보일 때, 수녀원의 언덕방이나 그 뒷산의 바다가 보이는 의자 생각만 해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 이 일만 끝마치면 거기 가서 쉬리라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내키지 않던 일에 새로운 신명이 나기도 한다.

수녀원의 언덕방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6년이 된 다.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1988년 가을이었으니까

48

다시 말동무를 해주는 수녀님도 계셨고, 구메구메 간식거리를 챙겨 주시는 수녀님도 계셨고, 식사할 때마다 그렇게 적게 먹어서 어떡하냐고 근심을 해 주는 수녀님도 계셨다. 그러나 그 모든게 적절할 뿐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식사는 정결하고 맛있었지만 검소하고 평등했고, 아 무도 나를 위해 전복죽이나 잣죽을 쑤어다가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고 적절했고 오직 수녀님들의 화평한 미소만이 도처에 넉넉했다. 수녀님들의 미소는 내가 있는 걸 다들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착각까지 들 지경이어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불편한 마음이 들 새가 없었다. 결국 나는 언덕방 손님 노릇을 통해 세 살짜리 같은 응석받이로부터 홀로서기에 성공을 할 수가 있었다.

그 후에도 거의 해마다 수녀원 언덕방의 손님 노릇을 다만 며칠이라도 하고 와야 마음이 개운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잘해 주는 친척 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수녀원 뒷산에 사계절은 또 얼마나 좋은지, 자연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고 잘 가꾼 것 같으면서 자연 그대로인 뒷산에 안겨 새소리를 듣고, 다람쥐와 숨바꼭질하고,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보는 기쁨과 평화는 주님, 당신은 참좋 으십니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복잡한 부산에 그런 좋은 동산이 있다는 걸 누가 믿을까. 거기 언제나 갈 수 있고 또 가기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복도 많다 싶다.

1994년

50

오 남매 중 외아들을 잃는 참척을 겪었다. 그 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내가 뭘 잘 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더욱 참혹하다. 남들은 회개도 잘하고 양심선언도 잘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인지 이런 모진 벌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뭘 그다지 잘못했는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도무지 내 탓이오가 안 된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살았대서가 아니라 부모가 먼저 죽고 자식이 나중 죽는 것은 평범한 사람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순리라고 여겨서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당한 남다른 역리가 부끄럽고 사람을 피해 혼자 있어도 하늘땅이 부끄럽다. 예전부터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들이 그 애를 잃고 나자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 것도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낯섦이어서 남들과 조화를 이루는 데 불편할 적이 많다.

다행히 남은 자식들이 창의 불빛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지척에서, 수프가 식지 않을 만한 이웃에서, 이 나라 끝에서, 혹은 지구의 반대 방향에서 돌봐 주고 걱정해 주어 살아 나가는데 힘이 돼 주고 있다. 나는 자식들과의 이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좋아하고, 가장 멀리, 우주 밖으로 사라진 자식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도 있는 신비 또한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여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나.

1991년

58

삼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여남은 구경꾼조차 라디오 방으로 몰려 우승자의 골인 광경, 세운 기록 등에 귀를 기울이느라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도 무감동하게 푸른 유니폼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몇 등쯤일까, 20등? 30등? 저 사람이 세운 기록도 누가 자세히 기록이나 해 줄까? 대강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20등, 아니면 30등의 선수가 조금쯤 우습고, 조금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푸른 마라토너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졌다. 드디어 나 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꼴찌 주자의 위대성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171

나는 그를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좀 전에 그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자기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옛다 모르겠다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내가 그걸 보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어떡하든 그가 그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느끼지 말아야지 느끼기만 하면 그는 당장 주저앉게 돼 있었다. 그는 지금 그가 괴롭고 고독하지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보면 안 되었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 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실로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다.

내 고독한 환호에 딴 사람들도 합세를 해 주었다. 푸른 마라토너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주자는 잇따랐다. 꼴찌 주자까지를 그렇게 열렬하게 성원하고 나니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장소에서 환호하고픈 오랜 갈망을 마음껏 풀 수 있었던 내 몸은 날듯이 가벼웠다.

172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라톤이란 매력 없는 우직한 스포츠라고밖에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앞으론 그것을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조금도 속임수가 용납 안 되는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에.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나는 아직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의 참뜻을 알고 있지 못하다.

왜 그들이 그들의 체력으로 할 수 있는 하고많은 일들 중에서 그 일을 택했을까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날 내가 20등, 30등에서 꼴찌 주자에게까지 보낸 열심스러운 박수갈채는 몇 년 전 박신자 선수한테 보낸 환호만큼이나 신나는 것이었고, 더 깊이 감동스러운 것이었고, 더 육친애적인 것이었고, 전혀 새로운 희열을 동반한 것이었다.

173
1976년

참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고, 어려운 일은 보다 지혜로운 자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눈파는 버릇이 남자만의 것이 아닌 이상 과히 억울해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남자들처럼 미련하게 눈을 두리번대고 고개를 돌리지만 않는다뿐이지 여자도 충분히 한눈은 팔고 산다. 어린 계집애 적 엄마 손 잡고 시내 나들이를 나가서 오빠는 한눈을 팔다가 미아 소동까 지 일으킨 데 반해, 꼬마 숙녀처럼 다소곳이 앞만 보고 다 녔는데도 오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듯이 말이다.

다만 남자의 한눈팔기는 대담하고 외향적이기 때문에 동반한 여자가 눈치를 안 챌 수 없고, 눈치를 채고 나면 뾰죽한 자존심이 심히 거슬린다. 그래도 그만 일로 심각하게 고민까지 할 것은 없을 줄 안다. 좀 볼썽사나운 배 안의 버릇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길에서 흔히 엉터리 약장수의 허황한 너스레를 경청하려고 첩첩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참, 온종일 별 볼일 없이 한가한 사람들도 다 있다 싶다. 그런데 이 말똥이나 소털, 개뼈다귀 같은 걸 갖고 만병통치의 영약인 양 입에 거품을 품고 있는 약장수 둘레에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는 우중(愚衆)을 좀 더 자세히 보라.

195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요새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연애의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툭하면 우려하는 젊은 세대들의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란한 남녀 관계도 실상은 연애 불감증에서 오는 초조하고 절망적인 몸짓인지도 모를 일이 다. 이런 교제란 곧 싫증이 나게 마련이고 싫증이 나면 지 체 없이 빠개 버린다. 헤어진다는 말보다 빠갠다는 말은 얼마나 드라이한가. 헤어진다는 말엔 생각이 나겠지 하는 여운이 있으나 빠갠다는 말엔 여운이 없다. 우지끈하는 파괴의 쾌감만이 느껴질 뿐이다.

어찌 보면 참 편하게 돼먹은 세대다. 입고 있는 옷에 서부터 사고방식까지. 그런데도 그들은 답답하다 못해 땀땀하단다. 그들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것의 정체는 무엇 일까. 한나절도 못 가서 끝장이 나고 마는 협소한 우리 국토일까? 기성세대의 주책일까? 사회적, 정치적인 부조리 일까? 10년이 여일한 교수의 낡은 노트일까? 미래에의 불안일까? 이 몇 가지 어림짐작이 다 맞을 수도 그중 하나도 안 맞을 수도 있으리라.

'가슴 답답하다'는 말을 언제 주로 쓰느냐고 물으니 무시로 밑도 끝도 없이 쓴단다.

211

청바지에 티셔츠가 터질 듯이 미끈하고 건 강한 놈들이 가당찮게 무슨 죽을병이 라도 들었다고 “땀땀해 아유 가슴 땀땀해” 하고 캠퍼스를 누빌 생각을 하면 정말 답답하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들이 그들의 예지로 그들을 억 누르고 있는 허깨비의 정체를 규명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겐 우리가 못하는 것을 능히 할 수 있는 저력 이 있다. 팝송을 들으며 온몸을 들까불면서도 어려운 시 험 공부를 거뜬히 해낼 만큼 한가닥 맑은 정신만은 또렷 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옷차림은 꺼벙하고 때로는 야해서 한마디로 격식을 도외시한 것이고 하는 짓 은 경망하고 당돌해서 한마디로 버르장머리가 없다. 그것 이 그들의 겉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모습은 우리 기성세대의 고질 병-필사적인 외화 치레, 냉수 먹고 이 쑤시는 허식,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같잖은 점잖음—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지도 모 르지 않나.

그래 도전을 하려거든 철저히 해라. 속 빈 강정인 기 성 세대에게 너희들의 알찬 내실로 맞서거라.

팝송을 들으면서라도 좋으니 지독하게 공부하고 밤새워 명작을 읽고 진지하게 고민하거라.

그리고 답답한 일이 있거든 답답해하거라. 답답한 것 과 맞서거라. 답답한 것을 답답한 줄 모르는 바보야말로 구제할 길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1973년
212

드디어 흥겨운 점심 자리가 마련되고 처음에는 아이 들 노래자랑으로 시작한 오락판이 어른들의 노래와 춤으 로 그 절정에 달했다. 식곤증과 취기와 피로로 남자들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여기저기 나둥그러져 낮잠을 자고 그 제서야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밭이랑 사이를 걸으며 이건 오이꽃 이건 호박꽃 해 봤댔자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지도 않았다.

농사꾼이 한여름의 폭양을 무릅쓰고 몇 뙈기의 밭, 몇 마지기의 논에 목숨을 매달고 농사를 짓는 옆에서 오락 삼아 취미 삼아 농사짓기 놀이를 벌인다는 건 농사꾼에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이요, 그들의 성실에 대한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유린일까. 저녁나절 농사꾼들이 넓혀 놓은 농로(農路)로 자가용을 몰아 그 골짜기 마을을 벗어나면서 우리가 그날 하루 얼마나 큰 해독을 그 마을에 뿌리고 떠 나나 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가 재작년 일이 고 그때만 해도 주말농장이란 말을 난 픽 신기하게 받아들였다가 이런 일을 겪었었다.

도시인의 탈공해(脫公害)도 중요하고 정서 생활도 중 요하지만 남이 목숨을 걸고 하는 행동을 바로 그 옆에서 취미 삼아 오락 삼아 즐긴다는 건 목숨 걸고 하는 행동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나 조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드디어는 목숨 걸고 하는 행동에 회의를 품게 되고 의욕 을 상실하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또 1주일에 한 번쯤 나가서 농사 흉내를 내고 돌아온 다는 게 도시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결코 이로울 게 없을 줄 안다. 아이들은 순진한 것만큼 철딱서니도 없다. 아이 들다운 직감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생활양식의 격차를 단 박에 알아차리고 우월감과 특권 의식을 갖게 되는 건 당 연하다.

그리고 농사일이란 보잘것없는, 경멸해 마땅할 천역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은연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주말농장을 통한 도시 아이들과 농촌 아이들과의 만남이 란 한쪽에는 부질없는 우월감을, 한쪽에는 상처를 주는 결과밖에 못 남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농촌과 도시의 생활의 격차를 하루빨리 해소돼야 하겠지만 그때까지는 주말농장을 갖는 분의 양식에 기대할밖에 없겠다.

도시에서 각종 공해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듯 농촌 에선 주말농장이라는 새로운 공해가 농민들의 정신 건강 을 해친다면 어쩔 것인가.

1974년

239

나는 또 대학에 다니는 애들이 아침에 학교 갈 때마다 데모하지 말라고 이른다. 혹시 데모에 휩쓸리게 되더라도 행여 앞장서지는 말고 중간쯤에서 어물쩍거리다가 뒷구멍으로 살금살금 빠지라고 이른다.

그 애들의 경멸의 시선이 다소 따갑지만 웅얼웅얼 그런 소리를 한다. 나는 올 1년 내내 이렇게 가족들에게 비겁과 보신(保身)을 가르쳤다. 잠 안 오는 밤 문득 이런 내가 싫어진다. 구역질 나게 싫어진다.

이런 1년을 보내고, 또 한 살 미운 나이를 먹고, 추한 나이테를 두를 내가 싫다. 잠 안 오는 밤, 나는 또 1년 동 안 내가 작가랍시고 쏟아 놓은 말들이 싫어진다. 나는 또 작가랍시고 느닷없이 선택을 강요당했던 찬반(贊反) 앞에 서 무력하게 떨던 내가 싫다. 찬반 중 어느 쪽이 내 소신 인가 보다는 어느 쪽이 보신에 이로울까부터 생각했던 내 가 싫다.

실상 나는 내가 작가임에 손톱만큼의 긍지도 못 가진 채 다만 두려워하고 있다. 왜 이렇게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처음 얻어들은 작가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이광수(李光洙)였다.

246

통틀어 인가가 20호도 채 안 되는 벽촌, 겨우 까막눈이나 면한 정도의 청년인 삼촌들과 삼촌 친구들 사이를 돌고 돌며 남루가 된 채 오히려 보물처럼 아낌을 받던 『무 정』과 『흙』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들이 빛나는 눈으 로 벅찬 감동을 나누던 겨울밤의 질화롯가를 기억한다. 그러나 같은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청년들을 얼마나 무서운 좌절, 끔찍한 고독 속에 내팽개쳤던가를 나는 또 기억한다.

“이광수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됐대!"

대!" “청년들은 다 일본 병정이 돼야 한다고 연설까지 했

세상은 한층 암울해지고 백성들은 성(姓)을 갈고 청 년들은 일본 병정이 됐다. 그 시대엔 누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광수의 가야마 미쓰로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는 없다. 그가 작가였기에, 침묵만 했어도 독자들에게 감사와 용기를 줄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한 나는 내가 작가임을 두 려워할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처럼 문학사에 남을 작 가는 못될망정 작가라면 마땅히 그 시대의 고민을 앞장서 걸머져야 한다는 엄청난 고난의 운명 때문에 작가라는 이 름이 두렵다.

247

이렇게 글쟁이임조차 두렵고 힘에 겨워 잠 안 오는 밤 나는 나 다운 비겁한 탈출을 꾀한다. “흥, 언제 적 내가 글 써먹고 살았나" 이렇게 생각하면 한결 속이 편해진다. 하 긴 한때 작가였다 만 사람은 보기에 딱하지만 여자는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주부라는 꽤 괜찮은 평생 직업이 남 아 있기 때문일까.

한때 작가였다 만 남자는 생각만 해도 정나미가 떨어진다. 설사 운수가 좋아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거나, 돈을 왕창 벌어 재벌이 됐다손 치더라도 그 출세에서 썩은 냄 새가 풍길 것 같다. 그러나 한때 작가였던 여편네, 한때 작 가였던 아무개 엄마, 과히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잠 안 오는 밤 내가 한다는 생각은 고작 이런 생각이다. 내가 얼떨결에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게 됐을 때만도 별 감동도 별 야심도 없었지만 단 하나 여류 작가는 안 되리라. 어떡 하든 그냥 작가가 돼 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내가 3, 4년의 알량한 글쟁이 생활 끝에 도달한 결론이 겨우 여자라는 것으로 어떤 탈출구를 삼아 보려는 거니 한심할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싫다. 이런 내가 쏟아 놓은 비비 꼬인 말들과 비겁하게 복면한 말들이 싫다. 그리고 이 긴긴 겨울이 싫다. 개 짖는 소리만이 충만한 이 긴긴 잠 안 오는 음습한 밤은 정말로 싫다.

1974년

248

다시는 서울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엄마는, 아니 서울 그 좋은 3층 집 학교를 마다하고 이 두메 구석 초가지붕 간 이학교 다닐 거냐고 야단을 치면서 나를 억지로 끌고 서 울로 왔다.

개학해 다시 학교로 온 나는 그 계집애와 다신 친하지 않았고, 물론 그 계집애의 심부름 같은 것도 안 했다. 나는 그 계집애를 깊이깊이 미워했고 깊이깊이 경멸했다.

그 후 여직껏 서울에서 사는 서울 사람이지만 그때 그 서울 계집애에 의해 눈뜬 사람 보는 눈ㅡ그것은 다분히 옹 졸한 편견일 가능성이 많다ㅡ은 여직껏 못 버리고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너무 약고 똑똑하게 겉으로 바라진 애는 괜히 싫고, 어른끼리 사귈 때도 너무 세련되고, 사교적인 사람에겐 정이 안 가고 경계심을 먼저 품게 되고, 어느 한구석이라도 시골뜨기스러움이 엿보이면 사귀어도 좋을 것 같은 신뢰가 간다.

그리고 남들이 학벌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이 나 나는 내가 시골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에게 얼마만치 시골뜨기성이 남아 있느냐는 나 도 잘 모르겠다.

요새는 아무리 두메산골에 가도 외모가 시골뜨기인 사람은 많아도 내가 원하는 그 우직, 단순한 시골뜨기성이 내면으로부터 풍기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다.

하물며 도시 한 폭 판에서랴.

그러니까 내 시골뜨기성에의 그리움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걸 거다.

1976년

322


나는 다시 달아보진 않았다. 나는 그날 꼭 900원을 번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꼭지 따서 잘 말려서 빻아다가 항아리에 넣어 놓으니 김장을 반쯤은 한 것 같다. 김장을 해 넣고 나면 나의 만추국이 필 테지. 나는 이래저래 흐뭇했다.

한가해진 김에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군용차에서 휘 발유를 빼돌리다 불이 나서 차와 집을 불태우고 어린이가 셋이나 죽은 사건이 눈에 띈다. 화곡동에서 일어난 일이 다. 화곡동이라면 요전에도 보일러공에 의해 어린 3남매 가 무참한 죽음을 당한 곳이다. 둘 다 돈 때문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도 화곡동에 사신다. 나는 오랜만에 문안 겸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안부 말씀드리고 나서 요새 화곡동에서 끔찍한 불상사가 자주 있으니 밤이나 낮이나 문단속 잘하시라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으셨는지 조금 화를 내시면서 끔찍한 일은 결코 화곡동에서만 난 게 아니라고, 무슨 무슨 사 건은 어디서 났고, 어떤 어떤 흉악범은 어디서 어떻게 했고…………… 올 1년에 일어난 흉악범의 이름서부터 발생한 장 소까지를 놀라운 기억력으로 줄줄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노인네의 이런 주책스러운 기억력에 울컥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머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대 강대강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도 영 기분이 안 좋았다. ‘웩, 웩' 지난 1년을 토해 내고 싶었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라도 토해 내고 싶었다. 그러나 무슨 재주로 사람이 집어먹은 세월을 다시 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코 세월을 토해 낼 수는 없으리란 걸, 다만 잊 을 수 있을 뿐이란 걸 안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 기고 올해는 갈 테고, 올해의 괴로움은 잊혀질 것이다.

나는 내 망년(忘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만추국을 갖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뭐, 포인세티아라든가 하는 서투른 서양 이름이 아닌, 이름도 의젓한 만추국이 화려하게 만개할 즈음 나는 내 한 해를 보내고 그리고 잊어버릴 것이다.

342

1976년

어머니는 귀찮은 듯이 손가락을 세 개쯤 펴 보인다. 엿물을 핥으며 어머니 흉내를 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면 그렇게 많아 보일 수가 없다. 한꺼번에 자고 깨고 싶다.

엿이 다 고아지기 전에 우선 큰 항아리로 하나를 퍼낸 다. 그게 조청이다. 개성 사람들은 특히 조청을 많이 한다. 서울 사람처럼 인절미에 찍어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찹쌀가루를 많이 장만해 놓았다가 손님이 오시면 즉석에서 경단을 빚어 펄펄 끓는 물에 익혀 내 가지고 아무 고물도 묻히지 않고 그대로 조청에다 묻혀낸다.

군맛이 전혀 없이 달게 잘 고아진 수수엿에다 굴려 낸 찹쌀 경단의, 어린 혓바닥이 녹아버릴 것 같은 감미는 설의 미각의 추억 중에서 으뜸가는 추억이다.

다 고아진 엿은 그대로 반대기를 만들어 보관하기도 하지만 절반 이상은 강정을 만든다. 미리 마련해 놓은 밥 풀 튀긴 것, 콩 볶은 것, 땅콩 깐 것을 엿과 버무려 반대기를 만든다. 모양은 둥글둥글하고 두툼하고 푸짐하다. 집의 아이들의 주전부리거리와 세배 오는 친척 아이들의 세 찬 상을 위한 거다.

그러나 점잖은 손님용은 좀 다르다. 흰깨와 흑임자를 따로 볶아 강정을 만드는데 콩가루를 묻혀 가며 얇게 밀어 마름모꼴로 썰어 낸다. 달고 고소하고 품위도 있다.

358

소문대로 담배를 피는 여자애도 있었지만, 내가 놀란 건 끽연보다는 차라리 그 비할 데 없는 방종스러운 분위 기였다. 나는 그날 별의별 환락장을 다 기웃대 봤으므로, 남자 여자가 어울린 방종의 모습은 지겹도록 구경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 금남의 집에서 여자들끼리만의 방종스러 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치마끈을 풀어놓은 여자들처럼 게게 풀린 모습으로 함부로 뒤섞여 야한 소리를 주고받고 몸가짐을 한껏 망측스럽고 버르장머리 없이 뒹굴리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이 아닌 모든 곳에서 남자와 여자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모습을 좋아하고 또 그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주위에 이성의 눈을 의 식하는 게 사는 즐거움도 되지만, 이성의 눈이 견제의 역할까지 함으로써 인간이 지킬 최소한의 예절이랄까 절도 랄까를 지키면서 살게 되는 게 아닐는지.

곧 바캉스 시즌이 된다.

이럴 때 우리 어버이들은 장성한 딸이 여자 친구끼리 만 여행을 떠난다면 안심을 하고 남자가 섞인다면 펄쩍 뛰는 경향이 있는데 외견상의 문제로 쉽사리 안심도 근심도 하지 말 것이다. 안심하고 귀한 딸자식 치마끈 풀러 내놓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1975
370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 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 고를 하기도 한다.

일전에 어떤 친구한테 지독한 소리를 들었다.

“너같이 애들을 막 키워서야 이다음에 무슨 낯으로 애 들한테 큰소리를 치겠니? 그 흔한 과외 공부 하나 시켜 봤 니? 딸이 넷씩이나 있는데 피아노나 무용이나 미술 공부 같은 걸 따로 시켜 봤니?"

그때 그 친구의 모멸의 시선이 지금 생각해도 따갑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애들 중 예능 방면의 천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모를 알량하게 만나 묻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간혹 들긴 하지만 이다음에 '큰소리'치기 위해 지나친 극성을 떨 생각은 아예 없다.

379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한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 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 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 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 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 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 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 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 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 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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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 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 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 기를. 멋쟁이이기를.

대강 이런 것들이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라는 사람 됨 됨이다. 그렇지만 이런 까다로운 주문을 아이들에게 말로 한 일은 전연 없고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다.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 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 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

381
1973년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코를 고는 것도 이비인후과 계통의 질환에 드는 모양이지만 나는 남편의 유연(悠然)한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낙천성(樂天性)과 건강이 짐작돼 싫지 않다.

스스로가 코를 골기 때문인지 남편은 잠만 들면 웬만한 소리엔 둔감한데 빛에는 여간 예민하지 않다.

난 꼭 한밤중에 뭐가 쓰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머리맡 에 스탠드를 켜고는, 두터운 갈포갓이 씌워졌는데도 부랴 부랴 벗어 놓은 스웨터나 내복 따위를 갓 위에 덧씌운다.

그래도 남편은 눈살을 찌푸리고 코 고는 소리가 고르 지 못해진다. 까딱 잘못하면 아주 잠을 깨 놓고 말아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는 담배를 피어 물고 뭘 하느냐고 넘겨다보며 캐묻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물어물 원고 뭉치를 치운다. 쓸 게 있으면 낮에 쓰라고, 여자는 잠을 푹 자야 살도 찌고 덜 늙는다고 따끔한 충고까지 해 준다.

382

그래도 나는 별로 낮에 글을 써 보지 못했다.

밤에 몰래 도둑질하듯, 맛난 것을 아껴가며 할 듯이 그렇게 조금씩 글쓰기를 즐겨 왔다.

그건 내가 뭐 남보다 특별히 바쁘다거나 부지런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아직 내 소설 쓰기에 썩 자신이 없고 또 소설 쓰는 일이란 뜨개질이나 양말 깁기보다도 실 용성이 없는 일이고 보니 그 일을 드러내 놓고 하기가 떳 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는 일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읽히는 것 또한 부끄럽다.

나는 내 소설을 읽었다는 분을 혹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그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한다.

만일 내가 인기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온 세상이 부끄러워 밖에도 못 나갈테니 딱한 일이지만,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니 또한 딱하다. 그러나 내 소설이 당선되자 남편의 태도가 좀 달라졌다. 여전히 밤중에 뭔가 쓰는 나를 보고 혀를 차는 대신 서재를 하나 마련해 줘야겠다지 않는가.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는 나는 정말 꼴불견일 것 같다.

383


요 바닥에 엎드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뭔가 쓰는 일은 분수에 맞는 옷처럼 나에게 편하다.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도 실용성이 없는 일, 누구를 위해 공헌하는 일도 아닌 일, 그러면서도 꼭 이 일에만은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 인 소설 쓰기를 나는 꼭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 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쟤도 안 바꿀 것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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