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책 : 일터의 소로
일터에서 어떻게 일을 해야 되는지 답을 알려 줍니다. 내가 꼭 해야 할 일, 해야만 하는 일,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들을 돕는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랑이 꽃 피는 일.
빵 굽는 향기가 나는 일.
햇볕이 들 때의 건초더미 말리는 일.
그 일이 그 시간에 최고의 가치가 있는 일.
그 일을 하리라 다짐합니다.

소로에게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조언이다. 내가 낭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모자라지 않는다. 소로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것을 마련하는데 실은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의미 있는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이런 생필품을 가졌을 때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 『검소한 주부』에서 차일드는 주로 철학적인 내용을 담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웃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서 우리가 다른 운을 타고났다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거기에 따르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습성과 성향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지혜로운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의 온갖 이점을 찾는 삶이지 우리에게 다른 조건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하는 삶이 아니다. 26
이것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삶이지만 행동에 옮기기는 굉장히 힘들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천천히, 목적의식을 가지고, 질서 있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차일드는 "위대한 지성의 가장 뚜렷한 특징"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는 한 가지 목표를 선택해...
서문
27
그뿐 아니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소로는 모든 물음에 대해 답이 있는 척하지 않는다. 모든 물음은커녕 대부분의 물음에 답이 없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가능한 한 다채롭기를 바란다. 개개인이 아주 신중하게 자기만의 길을 찾아 따라가기를, 아버지나 어머니나 이웃들의 길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28
나만의 길은 내가 생각하는 성공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성공한 삶이라고 여기고 칭송하는 삶은 한 가지 방식뿐이다. 우리는 왜 하나의 방식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나머지 방식은 희생시키려고 할까?"29 소로는 우리의 동료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우리의 상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들도 아마 소로를 상사로 두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상사를 대체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일터의 소로』는 소로가 종종 택한 집필 방식에 따라 개인적인 일화와 사연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갈 것이다. 우리는 직장 동료, 이웃, 친구 등과 대화를 나누며 일터의 지루한 일상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욕구, 통찰, 이야기는 이 책을, 소로와 이 시대 노동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사상을 형성했다. 소로의 생과 사상이 오늘날의 직업 노동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기 위해 우리 자신의 경험과 소로의 경험을 한데 엮어 만든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우리는 대개 생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지만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다른 걸 원한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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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괜찮은 직장이에요."
베드퍼드와 콩코드, 렉싱턴 등지에 사는 부유한 사업가나 첨단 기술 기업의 영업직 사원들은 포지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가격이 과하게 책정된 음료를 시키지만 바텐더에게 팁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깜빡한다. 가게의 책임자는 선심 쓰듯 로렌스에게 초과 근무를 주는가 하면 휴가는 깜빡하고 주지 않는다. 로렌스는 아이가 둘이고 대가족과 함께 산다. 그래서 초과 근무를 거절할 수 없다고 말한다. 로렌스는 거의 항상 혼자 힘으로 포지를 지킨다.
"괜찮은 직장이에요."
로렌스는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둘 거예요. 다른 꿈이 있거든요. 버몬트주에 땅을 사서 농장을 시작할 거예요. 채소도 팔고요.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건 프리스비 골프장을 여는 거예요."
로렌스는 오늘날 수많은 노동자처럼 퇴사를 꿈꾼다. 영원한 퇴사를.
"어리석은 일관성은 편협한 지성에 붙은 잡귀다.” 전형적인 만능 재주꾼 소로는 에머슨의 말을 삶의 방식으로 삼았다. 생계를 꾸리는 일은 단지 가고 싶은 직장을 선택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중요한 기술은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이직의 기술이다. 다시 말해 때맞추어 퇴사하는 기술이다. 소로는 이 방면의 선구자다. 물론 사직을 좀 더 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극심한 경쟁에서 빠지겠다는 투철한 의지일 수도 있고 일의 의미나 가치를 떨어뜨리는 노동 조건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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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형은 같이 가지 않았다. 보름 후 소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취업에는 실패했다.
메인주로 취업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소로는 콩코드에 있는 본가에 사립학교를 열었다. 처음에는 전교생이 네 명이었지만 곧 여덟 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소로는 존에게도 교사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요즘으로 치면 소로의 학교는 “대안 학교”로 분류될 것이다. 휴식 시간은 보통 10분이었지만 소로 형제는 학생들의 오전 휴식 시간을 30분으로 정했다. 직업 탐구를 위해 인쇄소 등으로 견학도 갔다. 불행하게도 존의 결핵 때문에 1841년 형제는 학교를 닫아야 했다. 1842년 1월 11일, 25세였던 소로는 형 존을 잃었다. 존은 결핵 때문이 아니라 면도를 하다가 손에 아주 가벼운 상처를 입은 탓에 파상풍으로 죽었다.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일지라도 인생은 이토록 위태로운 것이다. 소로는 형을 잃은 상실감으로 남은 20년 평생 1월만 되면 마음이 어두워지곤 했다.
1843년 5월, 소로는 작가의 꿈을 좇고자 뉴욕주 스태튼 아일랜드로 거처를 옮겼다. 소로는 프리랜서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뉴욕 살이의 꿈은 몸부림 끝에 결국 산산조각 났다. 겨우 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 소로는 잠시 몸을 웅크리고 마음을 얼추 다잡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1844년 4월 친구 에드워드 셔먼 호어와 함께 실수로 산불을 냈고 콩코드 숲을 36만 평 넘게 태워 먹었다. 「콩코드 프리먼」은 이렇게 보도했다. “화재의 원인은 소나무 그루터기에 불을 붙인 두 지역 주민의 생각 없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1. 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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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7월 4일,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 되기 며칠 전 소로는 다 포기하고 퇴직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온 나라가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고 있을 때 소로는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고 콩코드에서 월든 호수까지 2마일을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2년 2개월 하고도 이틀을 머문다. 『월든』을 미국 최초의 환경 운동 선언으로 해석하기 쉽고 그런 해석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소로의 시도는 당대의 문화를 규정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극한 경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단지 "생계를 유지"하는 삶과 자기 인생을 진정으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는 차이가, 확실한 간극이 있다. 이것이 『월든』이 주는 불변의 메시지이다. 현대 삶의 정신없는 바쁨 busyness을 인생살이라는 본질적인 일 business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이 귀중한 이유는 덧없고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파상풍으로, 혹은 결핵으로, 혹은 독감으 로, 혹은 팬데믹으로 죽을 수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끔찍하게 짧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소로는 자기 손으로 소박한 집을 지으며, 콩과 멜론을 키우며, 아이들을 데리고 콩코드 주변의 허클베리밭을 누비며 보내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퇴직자가 되려면 내 인생을 되찾아야 한다. 무엇을 중시하고 어디서 의미를 찾을지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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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는 질문에 우리가 특정한 직업이나 사무 공간을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체부입니다.” “교수예요.” “국세청에서 일합니다.” 디오게네스는 당연한 답변을 하는 대신 혁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특정한 폴리스, 즉 도시 국가 출신이 아니라 이 코스모스, 이 세계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디오게네스는 최초의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이다.
소로 역시 비슷했다. 그는 인정할 수 없는 정책을 펼치는 국가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당시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벌이던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 안에,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감옥에, 허허벌판에 있으면 내가 실존적으로 어떤 정치 단위나 노동 형태에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때 상당히 고독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해방감, 궁극적으로는 뜻밖의 놀라운 일체감이 든다. 내가 수시로 연기하던 역할을 내려놓으면 새롭고 더욱 폭넓은 관계를 맺을 자유뿐 아니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자유가 생긴다. 사직에는 이런 장점도 있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전 우주의 시민이라고, 말 그대로 코스모폴리 탄이라고 말했다. 소로 역시 『월든』의 말미에서 봄의 우주적 회생이 일깨워 주는 인간의 보편성을 칭송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대체로 잊고 있는 냉소주의의 또 다른 면이다. 모든 조직화된 것들에 대한 의심은 인간이 실로 깊고 넓게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직업 등의 기존 질서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서로 묶여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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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소로에게 맞은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로는 여러 다른 부도덕한 노동자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사표를 던지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로가 뛰어난 교사이자 노동자였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무엇보다 그 는 도덕적인 의미에서 훌륭했다. 우리도 때로는 급여를 포기하고 일을 그만둔다. 그 대신 두 발 편히 뻗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하고 자존감을 되찾기도 한다.
느헤미야 볼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 최근 우리는 한 명문대 철학과의 명예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가 왜 소로 같은 사람이 센터 스쿨 교사로 채용되자마자 그만두었는지 물었다. 교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한참 동안 우리는 체벌이 얼마나 부도덕한 행위인지 되새기고 있었다. 교수는 평생을 소로 연구에 바쳐 온 사람이었다. 훌륭 한 답변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는 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직장에 가면 대개 상사가 있어요. 그런데 상사들은 대부분 개자식이에요. 늙어 빠진 느헤미야도 그런 상사였지요."1" 상사는 사표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
첫 장을 쓰고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링크드인(취업과 이직을 위한 사회관계망-옮긴이)에서 우연히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1. 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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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이야기를 여기 올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그동안 의사 결정을 할 때 나와 내 일, 내 경력을 보는 타인의 시선을 늘 의식했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영혼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행복과 건강도 중요하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의 행복과 건강을 중시하기로 했어요. 내가 건강하고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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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을 하는 때가 따로 있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때가 따로 있으며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는 시간, 준비 작업을 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시간, 그리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따로 있다고 말이다. 이런 식의 일정은 생리학적 요구와 한결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강요는 이를 무참히 깔아뭉갰다.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보낸 시간을 꼼꼼히 적어 놓은 기록을 보면, 그가 날씨와 해의 길이, 자연 질서의 요구에 일과를 맞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사실, 우주의 로고스, 즉 우주의 질서와 발맞추려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위대한 철학적 노동자인 스토아주의자들에 대한 소로의 해석으로서, 노동의 본질과 시간에 대한 소로의 진지한 명상에서 드러난다. 소로처럼 스토아주의자들도 진정으로 선한 삶을 살고자 하면 자 연적 필요의 리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제를 벗어난 대상에 맞서 애쓰는 일, 가령 때때로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억지로 부인하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앞서 보았듯 소로는 산업 혁명의 태동과 성장을 목도했다. 그러니 요즘 흔히 말하는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미국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 즉 근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돈을 훔치는 행위와 다름없다는 생각도 이해했을 것이다. “시간 절도"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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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대다수는 이를 알고 있으며 마이크로매니지 먼트의 대상으로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인지하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단지 지상으로 향하는 문을 찾지 못한 경우일 수도 있으니 희망을 갖자.
우리의 직업 인생은 엄격하게 짜여 있다. 예상 가능하며 대개 유연성이 없는 일정을 따라가는데 그 일정은 시간의 흐름과 천체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다. 1년, 한 달, 한 주, 하루, 1시간, 1분을 가르는 선은 이미 그어져 있다. 반면 우리의 몸은 태양과 지구, 달 간의 관계보다 훨씬 더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의 건강은 차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지만 그 주기 가 달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책력의 현상과는 별개의 것이다.”5 흔한 시간 관리 방식, 융통성 없는 노동 시간, 엄격한 근태 일지 등에 소로는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주기별 연대표'(태양력, 율리우스력 등 시간 단위를 측정하는 다양한 역법에 따라 연대를 알려 주는 표-옮긴이) 따위를 게시하지만 우리 생의 한 해에 벌어지는 현상과 비교하면 그런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별자리보다는 봄에 싹이 죽어 있는 광경이 내게는 더 큰일이다.""
소로는 어떤 외부적인 도구 없이도 시간과 계절적 시기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으로 콩코드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피어 있는 꽃을 보고, 햇빛이 바닥을 때리는 각도를 보고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지금이 언제인지 그냥 알고 있었다.
2. 출근 도장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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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꾸준하고 보람된, 작은 헤라클레스적 과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고대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폴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열두 가지 과업을 수행해 야 했다-옮긴이). 처음에 원했던 양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나는 줄지어 선 내 콩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콩은 나를 땅과 연결해 주었고 그 결과 나는 안타이오스(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로 헤라클레스와 겨루었지만 패했다-옮긴이) 같은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콩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뭘까? 하늘만이 알 뿐이다.... 나는 콩에 대해, 콩은 나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콩을 아끼고 괭이질을 하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돌본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이다. 콩잎은 예쁘고 넓적하다. 내 원군은 이 건조한 흙을 적시는 이슬과 빗방울이며 비록 대체로 메마르고 거칠지만, 흙 자체의 비옥함이다. 적군은 지렁이와 추위, 그리고 무엇보다 마멋이다. 놈들이 먹어 치운 콩이 300평은 된다.3
콩알만큼 안다고 하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의미이지만 소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로는 콩으로부터 매우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부분은 좀 납득하기 힘들지만, 콩도 소로한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식물 간의 열린 교류는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하늘만이 알 뿐이다.” 이것이 소로의 진심이다. 콩과 자신과의 왕래, 상호 작용, 동일시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하늘만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신비로움이 소로를 매일 콩밭으로 나오게 했고,
3. 육체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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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찾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특히 마멋으로부터) 콩을 지켜 내게 했으며, 콩을 키우는 일을 통해 소로 자신을 땅과 연결되게 했다. 여기 “네가 바로 그것”의 감각된 실재가 있었다. 그 연결감, 힘, 자아가 있었다.
우리의 일 또한 신성하다는 시각을 갖고자 한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의 거룩한 업무에 신성한 목적이 있다면 무엇일까? 일은 왜 신성할까? 소로는 나란히 심은 콩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콩의 존재, 심지어 "작은 헤라클레스적 과업"을 방불케 하는 콩의 요구 사항조차 소로에게 힘을 주었고 그를 땅과 연결시켰다. 여기서 “힘”은 완력이나 단순히 신체의 지구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콩밭을 가꾸다 보면 그런 이득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소로가 말하는 “힘”은 영적인 기운이나 잠재적 능력을 말한다. 즉 이상적인 삶을 실현할 능력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거나 상을 조각하는 등 특정한 물건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수단을 조각하고 그릴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눈부신 능력이다.
최근에 아주 능력 있고 똑똑한 목수 재니스가 우리에게 한 말은 육체노동에 대한 소로의 시각이 고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못이 단단히 박히거나 판재가 딱 맞으면 그냥 느낄 수 있어요. 정확히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적이고 거의 종교적인 느낌이에요.” 재니스는 순수 예술을 하는 목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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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현대 사회의 공장식 제조업의 발전이 숙련된 육체노동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상품은 변함없이 만들어지지만 그걸 생산하는 경험은 사라진다. 다행히, 소로의 우려와 달리, 육체노동은 앞으로도 한동안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소로에게 가사일은 “즐거운 놀이였다".22 “하지만 손을 놀려하는 노동은 아주 고된 지경에 이르러도 결코 가장 헛된 일은 아니다. 노동에는 일관적이고 사라지지 않는 미덕이 있다. 학자에게 노동은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준다."23
월든에서 소로가 행한 육체노동은 신을 닮은 삶, 훨씬 더 훌륭한 삶을 위해서였을지 몰라도 이런 결과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 “수백만 사람이 육체노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깨어 있지만 100만 명 가운데 한 명만이 효과적인 지적 활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깨어 있다. 그리고 시적인 삶, 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1억 명 가운데 하나밖에 없다.”24 자족을 위해, 다시 말해 독립(모든 수준에서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활기찬 힘,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누구든 자기가 만든 장작더미에 일종의 애착을 가진다. 나는 창가에 장작을 쌓아 놓는 걸 좋아하는데 부스러기조차 만족스러운 노동을 떠올리게 하므로 많을수록 좋다. 나한테 아무도 쓰지 않는 도끼가 있었는데 겨울날이면 한 번씩 이 도끼를 들고 집 앞 볕이 드는 곳에서 콩밭에서 나온 그루터기를 갖고 놀았다. 쟁기질을 할 때 소를 몰던 사람이 예견했듯 장작은 나를 두 번 따뜻하게 해 주었다. 장작을 팰 때 한 번, 그리고 태울 때 한 번. 그러니 이보다 더 많은 열기를 줄 수 있는 연료는 없었다. 25
3. 육체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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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는 대개 주택의 구조를 만들거나 바닥재를 교체하는 등의 일을 한다. 소로였다면 전혀 상관없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가(에머슨과 소로를 매우 좋아했다)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말했듯이 손을 놀려하는 하찮은 일과 예술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손으로 하는 일에도 우리 같은 존재를 세상 그리고 타인과 연결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베키는 정원에 있을 때 진정으로 정원에 있었다. 그 풍경 속에 완전히 빠져 일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재니스도 못을 박을 때 다른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무엇인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 말이다.
*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려 믿을 수 없다면 역사적인 맥락을 좀 살펴보도록 하자. 밭일의 본질과 가치를 숙고한 사람은 소로가 처음이 아니다. 소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로부터 단서를 얻었다. 핵심은 베르길리우스이다. 소로에게 베르길리우스, 특히 그의 농경 시 『게오르기카 Georgics』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게오르기카』를 정말 좋아했다. 로버트 리처드슨은 명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의 순례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로는 『아이네이스 Aeneid』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게오르기카』를 더 좋아했다. 소로에게는 그 작품이 곧 지구라는 거대한 시였다."5
3. 육체노동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고 할아버지들이 가르치셨 듯 "이치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동은 대체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식기와 막 비질을 마친 카페트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수적인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허락한다면 흥미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집안일을 마치 목욕 의식처럼 생각한다. 말끔 한 기분이 들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불교에서는 소제를 명상을 행할 기회로 여긴다. 승려 마츠모토 쇼케이는 “절에 있는 승려들은 선 명상보다 소제를 하는 시간이 더 많다”28고 했다. 우리가 주로 하는 허드렛일은 승려들의 일과 다르지만 명상을 하며 식기세척기를 채우는 일을 포함해 선불교식 소제는 소로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할 것이다. 이는 허드렛일과의 타협이 아니라 예술적 전유이자 승화이다. 따분하고 고된 일을 예술, 노래, 축제로 변모시켜 울 빨래가 됐든 걸레질이 됐든 그 행위가 재미있고 흥겨워진다면, 그리고 그 일이 시대에 뒤떨어진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그 변모는 철저히 소로적이다. 그 시간을, 날을, 삶 전체를 고양시킨다. 물론 우리가 선불교에 통달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기분 좋을 때 시도는 한다. 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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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체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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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구이를 실컷 먹고 위스키 호수에서 커다란 카누를 저어 간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일단 위스키로 인한 숙취가 심하겠지만 그다음에 말이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무엇을 위한 휴가이고 은퇴인가? 낙원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친구인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블레이크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로가 이렇게 썼음을 상기하자. “부지런한 게 다가 아닙니다. 개미도 부지런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부지런히 일 하고 있습니까?”10 이 질문은 반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은퇴가 다가 아니다. 무엇을 향하여 은퇴하는가?"
소로는 러다이트 운동가는 아니었다(러다이트 운동가들도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러다이트 운동가'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기술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는 더 나은 노동 여건을 위해 투쟁한 성실한 노동자들이었다). 소로가 공장에서 불 폭탄을 터뜨렸다거나 기차를 탈선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철에 따라 이동하는 물고기인 미국 청어를 위해 빌레리카댐에 쇠지레를 갖다 대는 공상에 빠져 본 적은 있다. 『콩코드와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에서 소로는 이렇게 애통해한다. "불쌍한 청어야! 누가 네 억울함을 알아줄까? 칼을 들지도 않았고 전기 충격도 가할 수 없는 청어일 뿐인 너는 다만 순수함과 정당한 목적만으로 무장한 채 연약하고 말 없는 입을 내밀고 쉬이 떨어지는 비늘을 달고 앞으로만 가는구나. 적어도 나는 네 편이다. 빌레리카댐에 쇠지레를 갖다 대면 소용이 있을지 누가 알랴?"11
소로는 기계가 주는 혜택을 잘 알고 있었다. 연필용 흑연을 좀 더 고품질로 생산하기 위한 기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기차도 탔다.
4. 기술 발전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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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해 북쪽으로 향하는 탈주 노예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소로가 의심한 것은 기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었다. 무엇 보다 소로 시대 노동자들의 삶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기적인 절차가 아닌 기계적인 절차에 부합하도록 강요당했다. 기계 노동을 한다는 말은 기계와 닮은 삶을 산다는 의미였다. 기계는 휴식도 여가도 필요 없고 일터 바깥의 삶도 없다. 기계는 이상적인 노동자다. 인간에 불과한 모든 노동자들은 기계의 완벽한 생산성에 미칠 수가 없다. 기계를 이상화하면 대개 근로자의 인간성이 그 대가를 치른다. 노동자들은 “기계 이외의 무언가가 될 시간이 없다"고 소로는 불만을 토로했다.12 더 높은 목표를 고려하고 그 목표를 향해 의미 있는 행동을 취할 시간도 에너지도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에츨러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여름 산기슭에서 개를 한 마리 보았다. 어느 농부의 가족이 먹을 버터를 만드는 개였다. 개는 수평 바퀴 위를 돌면서 우유를 젓고 있었다. 눈에는 염증이 있었고 기침도 심각한 데다 기운도 빠져 보였지만 농부 가족은 빵에 버터를 바를 수 있었으리라. 13
상상력의 소산이기를 바랄 뿐인 이 장치는 결국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수많은 신기술을 설명하는 비유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빵에 버터를 바를 수 있다. 경축할 일이다. 하지만 기계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개 한 마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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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말투가 불손하거나 무례하거나 냉담하거나 무신경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과드립니다. 분석 철학 공부만 해서 이 방면으로 영 능력이 없습니다."
조시는 진정한 소통이란 극히 취약하며 기술적으로 진보한 “연결” 방식이 종종 우리를 현실로부터 표류하게 만들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다는 매우 소로적인 (그리고 아미시적인) 통찰을 어쩐지 깨닫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은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준다. 식료품점의 셀프 계산대를 떠올려 보자. 컨베이어 벨트 위로 작은 초밥 그릇들이 놓인 회전 초밥집도 그렇다. 웨이터를 상대해야 하는 사회적인 껄끄러움이 없다. 형식적으로는 저녁 식사 자리에 모여 있지만 각자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말없이 훑어보는 가족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것이 MIT 사회학자 셰리 터클이 저서 『외로워지는 사람들』에서 말하는 기술로 인한 단절이다. 우리는 점점 함께 외로워지고 있다. '나는 네가 필 요 없어'는 '너는 내가 필요 없어'가 된다. 아무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로는 이미 한 세기 반 전에 이 문제를 고민했다. “우리는 메인주에서 텍사스주까지 전신을 연결하려고 안달이지만 메인과 텍사스는 서로 긴히 전달해야 할 내용이 없을 수도 있다. ……… 주목적은 빠른 소통이 아니라 분별 있는 소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14 초고속 통신이 의미 있는 교감인 경우는 드물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과 기하급수적으로 더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단지 공허한 연결로 이루어진 구름일 뿐일지 모른다.
4. 기술 발전과 일
111
소로는 모든 이상향에 대한 갈망에 불기운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바람이고 밀물과 썰물이며 파도이고 햇볕이다. 그 힘은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 마력은 엄청나다. 결코 멈추지 않으며 절대로 처지지 않는다. 쉴 곳이 없어도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불이 없어도 온 기를 줄 수 있으며 고기가 없어도 먹일 수 있다. 옷이 없어도 입힐 수 있고 지붕이 없어도 비바람을 막을 수 있다. 사랑 안에 낙원이 있으면 사랑 밖의 낙원은 필요가 없다. 24
사랑이 있으면 낙원이 있다. 사랑이 없으면 낙원이 없다. 사랑은 “모든 성공적인 사회적 기계의 동력이다”.25 사랑은 모든 유토피아의 전제 조건이다. “천사가 가는 곳은 항상 낙원이지만 사탄이 가는 곳은 온통 불타는 흙과 재뿐이다.”26
4. 기술 발전과 일
117
물론 기술적으로 우리는 차츰차츰 위로 또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태양계 밖으로, 그 어떤 생물종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고 오 늘 우리의 삶을 눈부신 미래 세대를 위한 디딤돌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마음의 노력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이 근본적인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 “기계적인 힘이 아직 물리적인 세상의 힘을 충분히, 광범위하게 이용해 이상향을 만드는데 쓰지 못하듯 사랑의 힘도 아직 빈약하고 인색하게 쓰일 뿐이다. 구빈원, 병원, 성서 공회 등의 기계가 특허를 얻었지만 아직 사랑의 무한한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으며 이따금 이런 조직 위로 불어 내려온다."27 기계가 사랑에 근거한 도덕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인공 지능이 진정한 도덕적 지혜와 풍부한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내적인 진보, 좀 더 어려운 종류의 진보를 위한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사랑은 이처 럼 꽤나 실용적이다. 소로는 우리가 사랑의 공방에서 너무 게으른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우리는 사랑의 힘을 축적하여 앞날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행동할 준비를 하는 데는 더욱 소홀하다. 그렇다면 이 일에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는가?"28
또 다른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소로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 이후 집필한 강연 원고 「실용주의와 상식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문제를 명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자 보다시피 악몽 같은 비유를 이용했다. 좀 길지만 인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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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자면 퍽은 “영리하고 까불대는” 자연 속의 요정이다. 『월든』이 출간될 때 즈음 소로는 자신의 약점을 나열한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 목록에 “언제나 솔직하지만은 않다” “말장난을 좋아하고 웃기려고 하며 성실하거나 강인하거나 관대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적었다.” “웃기려고” 하는 소로의 모습은 『월든』의 첫 장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듯하다. “붉은 허클베리와 모래 벚나무, 팽나무, 적송과 검정 물푸레나무, 백포도나무, 노랑제비꽃에 물을 주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건기에 시들었을 것이다."3 소로는 콩코드의 숲에도 “물을 주었다”. 모든 의미에서 희극적이다.
소로는 웃을 줄 아는 진지함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다시 한번 그 이유를 살펴보자. 어릴 때부터 한창때인 44세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소로는 결핵을 앓았다. 서른셋에 이미 치아가 없었다. 그래서 19세기식 틀니를 맛보아야 했다. 스물여섯에 소로는 실수로 산불을 내서 숲을 36만 평 넘게 태웠고 콩코드 사람들은 소로의 실수를 잊지 않았다. 소로가 잊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스물넷에 소로의 형 존은 파상풍으로 죽었다. 1837년 스무 살 소로는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1837년 공황”도 같은 해에 찾아왔다. 앞서 말한 이 불경기 때문에 대학을 갓 졸업한 소로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적었고 조건도 별로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소로 인생의 저점을 되짚는 이유는 소로의 인생에 불행이 마치 양파처럼 겹을 이루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눈물을 흘리며 한 겹을 벗기면 또 다른 한 겹이 나와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러나 사람은 눈물 사이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5. 농담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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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두기는 참으로 쉽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노동자 소로, 우리가 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고 있는 소로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잠재적 무가치성을 걱정하며 종종 초조해했다. 추측하건대 이런 초조함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소로의 동기가 된 것 같다.
무의미한 노동을 이런 식의 틀에 가둘 경우 “제1세계만의” 문제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도 인정한다. 적어도 선진국 사람들의 경우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여지가 있다.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억지로 무의미한 노동에 투입된다. 그리고 이 장에서 다룰 가치가 있는 진정한 위기 사태는 바로 그런 노동이 벌어지는 상황일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다. 동시에 수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어디서 일하고 어디서 의미를 찾을 것인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들을 괴롭히는 실존적 진공 상태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것이다.
소로는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없는 허드렛일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은 확실한 목적이 있고 노동자에게 삶의 재미를 안긴다. 반면 허드렛일은 재미도 없고, 목표가 보이지도 않으며 상상하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먼저 짚어 둘 점은 강요된 업무, 절대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의 경우,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된 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의 미한 일이 될 위험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무의미한 노동을 사회 정의의 문제와 같이 고민해야 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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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아니 그 덜된 양반이 그래, 온종일 거기 서서 황소개구리의 습성을, 아 글쎄, 연구하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4
엉뚱한 소로 선생이 아닐 수 없다. 아주 덜된 양반임이 분명하다. 소로는 그 시간에 부지런히 움직여 돈을 벌거나 울타리를 한두 개 고치거나 장작더미에 땔감을 한 가리는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로는 거기서 그냥 황소개구리의 습성을, 아 글쎄, 연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소로의 농법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밭에 퇴비를 뿌리려면 불필요한 인력을 고용해야 했다. 월든이 얼어붙었을 때 아주 쓸모없는 구멍을 뚫은 일은 또 어떤가(소로는 이 덕택에 지역의 수중 지형도를 최초로 구축할 수 있었다). 농부는 그 구멍도 그다지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참, 황소개구리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초월주의 철학자들과 매일 교류한 프레더릭 루엘린 허비 윌리스는 한 콩코드 어린이의 삶을 놀라울 만큼 자세히 기록한 저서 『올콧가 회고록』에서 월든에 머물던 소로의 초상을 그린다. 우리는 이 모습이 소로의 “무의미한” 노동이 가진 심오한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로는 올콧 씨에게 월든 숲에 있는 야생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우리 식구들을 보여드릴게요.” 소로는 재빨리 오두막 문밖으로 나와 독특한 저음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곧장 멀지 않은 구멍에서 마멋이 나와 소로에게 달려왔다. 높낮이를 바꾸면서, 그러나 여전히 기이한 저음으로 휘파람을 불자 이번에는 청설모 두 마리가 소리를 듣고 겁 없이 소로에게 다가왔다. 또 다른 음을 내자 까마귀 두 마리를 비롯한 새 몇 마리가 날아왔고 까마귀 한 마리는 소로의 어깨에 앉았다. 까마귀가 소로의 얼굴에 아주 가깝게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깊은 인상이 남았다. 까마귀는 원래 사람을 아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소로는 주머니에서 먹이를 꺼내 동물들을 손으로 먹였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앞에서 부드럽게 그들을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 다른 종류의 휘파람으로, 그러나 여전히 특이한 저음으로 짧게 소리를 내며 동물들을 해산시켰다. 작은 야생의 짐승들은 각각 그 특별한 신호를 듣고 즉시 돌아갔다. 5
6. 무의미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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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이 좋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로는 그런 욕구가 아마도 다소 그릇된 생각에 이끌린 결과이거나 가식과 사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로는 "지지대가 빈약한 일을 피했다. 이런 일들은 금전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합당한 이유를 찾기 힘든 일들이다. 의미 있는 노동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각자 너무 짧은 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의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아폴로기아 apologia라고 했다. 소로는 철학자답게 어떤 일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지지대”, 즉 뒷받침하는 근거이자 합리적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급여만 맞다면 의미 없는 일을 하겠는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아야 충분할까? 소로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생을 낭비할 가치는 없다고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다.
소로는 또한 한때 의미 있었던 일이 서서히 의미 없고 따분한 일, 진부하고 생각이 필요 없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로 아무리 의미가 큰 일이라도, 가령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했던, 의식적으로 사는 실험도 케케묵은 일이 될 수 있다. 숲에 지은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 소로는 자신의 결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숲을 떠난 데는 숲으로 들어간 이유만큼이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 좀 더 많은 인생을 살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숲에서의 삶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리고 생각 없이 특정한 길을 택하고 그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지 생각하면 놀랍다. "12
6. 무의미한 일 145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소로의 노동 철학에 어떤 "요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에 관해 적어도 자그마한 선택권은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상당한 부분이 주로 허드렛일로 이루어져 있다. 장보기, 공과금 내기, 육아 등 말하자면 끝도 없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도망치는 것이 언제나 좋은 선택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방법이 때로는 효과가 있다. 우리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철학자의 삶은 가끔가다 굉장히 의미 없는 일로 여겨지곤 한다. 온갖 난해한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종이 위에서 붙잡을 수 있다. 그래서 책을 내도 읽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이다. 강의도 하긴 하지만 강의 때문에 아무도 읽지 않을 매우 중요한 논문을 쓸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억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프랑스인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듯 “무대 배경"이 무너지고 우리에게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어우러진 질문만이 남게 된다. "왜?"16 왜 이 고생을 하는가? 다 그만두고 텃밭이나 가꾸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다 우리는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윌리스의 아버지도 철학자였다) 한 말을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살면서 어디서 의미를 찾고 무엇에 대해 생각할지에 대해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의미 없는 노동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은 그것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할 기회다.
6. 무의미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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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흔하다. 분명히 해 두자면 존이 평소에도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존이 어머니를 맡는 날에는 그 일에 대해 (원한다면) 살짝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은 궁극적으로 가장 헛되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헛 된 일의 반대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헛된 일도 무엇보다 의미심장할 수 있다. “사랑의 아픔은 더한 사랑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고 소로는 말했다. 사랑과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찾아 헤매는 일은 헛수고다.18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보다 의식적인 삶은 없다. 생의 절정에 다다른, 한때 교사였던 베키는 이 창피한 순간을 인생의 불가피한 일들에 관한 마지막 강의로 바꾸어 성인이 된 아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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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의미한 일
에머슨식의 자립과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지 않다. 아주 같지는 않다. 놀랍게도 소로의 주장은 도덕적 주체가 되기 위한 노력, 그렇게 될 의무와 관련이 있다. 1848년에 소로는 H.G.O. 블레이크에게 이렇게 썼다. "사람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삶은 진실할 수도 있고 거짓될 수도 있습니다. 삶은 치욕이 될 수도 영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자신을 세우고 악한 사람은 자기를 파괴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당당해야 합니다.”3
선한 일을 하든 악한 일을 하든 자신의 일을 책임질 수 있는 도덕적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당당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면 그 일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나는 내 일이 자랑스럽다") 그 부산물은 책임이다. 그래서 “신실한” 노동은 도덕적인 노동의 근본이 된다. 도덕적 책임을 단지 지시를 따르거나 의무를 다하는 행동과 혼동하기 쉬운데 책임은 사실 이런 행동에 우선한다. 그것은 내가 특정한 길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다. 소로는 월터 롤리 경에 대한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실이나 입 밖으로 꺼내는 생각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모든 상황에서 자유로운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게 느껴지는지 보아야 한다."4
최근에 우리는 한 부동산 거물(그러니까 억만장자)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일을 한다고 했다면 아버지가 절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70대 억만장자의 말이었다. 살면서 “유리한 거래”도 했고 “불리한 거래”도 했지만 문제는 그 모든 거래에 대해 어떤 책임 의식도 느끼지 않은 사실이라고 남자는 덧붙였다(소로 역시 이를 문제 삼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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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의 인생의 각본을 스스로 쓰지 않은 것이다. 이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잠재적으로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 왜냐고? 우리가 그 거물에게 그렇다면 그 모든 거래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회사겠죠. 우리 집안일까요? 잘 몰라요."
개인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는 대기업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요점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이런 기업에는 대체로 영업 담당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남이 써 준 영업 각본,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 절차, 얼굴을 모르는 상사를 일개미처럼 따라야 한다. 한 대규모 유통 회사에서 영업 일을 하는 패티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회사가 하는 일에 대 한 책임을 누가 지는지 전혀 몰라요. 일단 저는 아니에요.” 이 기묘한 실존적 상황은 현대식 노동 소외의 핵심에 있기도 하지만 가장 심각한 종류의 도덕적 문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시스템과 제도, 기업이 책임을 지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는 상황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소외로 인해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 나아가 개인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하게 된다.
*
불성실하게 일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초월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아의 본질을 거스르는 죄악이었고 도덕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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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제국주의적 야망이다.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텍사스를 인정하고 서쪽으로 확장하기를 원했다. 미군 3만 5000명, 그리고 각 주의 자원군 7만 3000명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만큼이면 충분했다. 약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고생하고 죽이고 약탈했다. 소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보다 소로를 거슬리게 한 것은 당대의 가장 자극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고용 계획이었던 이 전쟁에 대한 일반 시민의 무신경한 태도였다. 나아가 이웃들이 제국주의라는 “일”에 철저히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 시민들이 힘들게 번 달러로 이 전쟁에 돈을 대고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다소 어처구니없고 역겨운 일이다. 노동자들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대가로 급여를 받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도덕적인 일을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 상관 않는 무지한 시민들이었다. 소로는 참지 않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하룻밤을 감옥에서 보냈다. 소로 의 「시민 불복종」의 뿌리에는 부도덕한 노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솔직한 이야기부터 하자. 오늘날 미국 군대의 1년 예산은 7770억 달러이다. 그 돈의 일부는 약 3조 달러 가량 인 미국의 연간 세수입에서 온다.12 국방 예산을 세수입의 약 4분의 1이 라고 보수적으로 잡아 보자. 이 비용을 (아주 높은) 안보 비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20세기에 미국이 벌인 전쟁 중에 목적과 결과가 의심스러웠던 전쟁이 얼마나 많았는지 고려하면 소로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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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특정한 생활 수준에, 좀 더 "사치스러운 삶”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금전적 운이 진정한 행복과 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과도한 부가 우리를, 소로가 말하는 "영혼의 필요"로부터 능히 멀어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혼에 필요한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월든』에서 소로는 명확히 말한다. 쉴 곳, 옷, 음식, 그리고 사랑 등 “온기”를 가져오는 것들이다. “내가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때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 처음부터, 혹은 오랫동안 사용해 오면서 아주 중요해진 것들을 뜻한다. 미개해서든 가난해서든 사상 때문이든 이런 필수적인 요소 없이 살아 보려고 한 사람은 매우 적거나 없을 정도이다."4
이런 말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상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인정한다. 마치 단식하는 스님의 말 같기도 하고 공기와 햇살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 같기도 하다. 우리가 선교라도 하려고 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소로는 돈의 가치에 대해서는 이상주의자였지만 아주 까다로운 실용주의자기도 했다. 소로는 구매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아니,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아주 정확히 계산해 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월든』의 많은 부분이 마치 에버니저 스크루지의 꼼꼼한 가계부처럼 읽힌다. 하지만 스크루지와 달리 소로의 지출 목록은 삶의 잉여품이 아닌 필수품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8. 월급의 기회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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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축은 곧 부였다. 하지만 시장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실이나 바늘을 위해 소 한 마리의 일부를 담보로 잡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의 일부를 상징하는 돈이 발명되었다. 돈은 삶에 필수적인 것들로부터 나왔고 단지 그것을 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뿐이었다고 소로는 말한다.
현대 사회는 페쿠니아의 관념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소의 일부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철저한 상품화의 단계에 이른 것일지 모른다. 내 시간과 몸, 내 정신 건강까지 죄다 상품화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를 부를 것인가?
소로는 이 추한 질문이 우리 세기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미 그 실루엣을 보았다. 실제로 숲 속 작은 오두막에 적합한 땅을 구하면서 그 질문과 똑바로 마주했다. 월든은 사실 소로가 처음 선택한 집터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플린트 연못”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연못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플린트라는 농부의 소유였다는 점이다. 돈으로 숲, 해안, 물, 하늘을(뉴잉글랜드의 이런 연못에는 물속에 하늘이 들어 있다)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소로는 진저리를 치며 경멸이 가득한 말을 남겼다.
“플린트 연못이라니! 정말 보잘것없는 명칭이다. 이 지저분하고 멍청한 농부의 농장이 하늘 연못에 접하고 있다고 해서, 그자가 연못의 가장자리를 가차 없이 갈아엎었다고 해서 제 이름을 붙일 권리가 주어지는가?"10 아름다운 장소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 이름을 붙일 수는 있어도 제멋대로 주장한 소유권을 이유 삼아 천연의 절경에 출입을 제한하는 행위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 “플린트 Flint”는 대체 누구였을까? 소로는 곧바로 농부에 대한 서술을 이어 간다. “지독한 구두쇠skin-flint일 것이다. 표면에 제 뻔뻔한 얼굴이 비치는 1달러나 빛나는 1센트를 더 좋아하고 연못에 내려앉은 들오리마저 침입자로 생각하는 놈이다. 하르피이아처럼 움켜잡는 오랜 버릇 탓에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단단할 것이다. 그러니 이 연못은 내게는 이름 없는 연못이다.”II 플린트는 돈을 버느라 너무 바빠서 자기가 사들인 연못에 가 볼 기회도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소로의 말에 따르면 플린트는 연못을 보지도 않았고 거기서 몸을 씻지도 않았으며 지키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고 "연못을 만든 신께 감사하지도 않았다”12 플린트는 그 신성한 장소를 단지 “화폐 가치"로만 생각했고 그 가치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상 연못 바닥의 진흙을 팔 수 있었다면 물을 뺏을 사람이다. 소로는 “그 자의 노동,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그자의 농장에 어떤 경의도 보낼 수 없다"13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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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이 말한 “보상”의 개념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소로가 노동의 실제 대가와 거기서 나오는 금전적 혜택 간의 타협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일터에서 보수는 단지 돈을 받는 문제, 돈을 좀 더 받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버는 급여의 대가로 내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계산해 보아야 한다. 내가 버는 돈은 내 시간에 대한 보상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흔히 그 돈은 내 자유에 대한 보상이자, 내 자존감에 대한 보상이며, 밤에 편히 잘 수 없는데 대한 보상이다. 다소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소로는 아마 과한 게 맞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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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그 내리막길은 수직으로 떨어진다. 공동체가 가장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일은 그 일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가장 불쾌한 일이다. 인간 이하의 것이 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16
소로는 CEO, 업계 최고, 유명 변호사, 스포츠 스타 등 이 시대의 가장 “성공한” 사람들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적으로 올라갈수록 내면적으로는 내리막길을 간다고 말한다. 심지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국가가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도 손해를 보는 일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국가가 천재에게 상을 내리는 방식도 현명하지 못하기는 마찬 가지다. 심지어 계관 시인도 그 영예에 따르는 부속적인 사정에 기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거대한 포도주 한 통을 뇌물로 준다. 그 통을 평가하느라 또 다른 시인이 시적 영감을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17
이 즈음에서 소로의 직업은 얼마나 발전적이며 현명했는지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로의 직업도 그렇지 못했다. “내 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가장 만족스럽게 보여 줄 수 있는 측량 기술은 고용주가 원치 않는 기술이다. 고용주들은 내가 일을 대충 하길 원하고 너무 잘하면 싫어한다. 충분히 잘해도 싫어한다. 내가 다양한 측량 기술이 있다고 설명하면 고용주는 어떤 방법이 가장 정확한지 묻지 않고 어떤 방법을 써야 땅이 가장 넓게 측량되는지 묻는다."18 정확하고 혁신적인 기술, “옳은” 방식을 고집하면 소로는 그 대가로 무시를 당하거나 사기가 꺾이는 말을 들었다. “장작 한 가리를 정확히 측정하는 방식을 고안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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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이 방식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거기서 측정을 맡은 사람이 말하기를 상인들은 땔감을 정확하게 측정하길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들 기준에서는 이미 너무 정확히 측정하고 있어서 상인들은 다리를 건너기 전 찰스타운에서 측정을 맡긴다고 했다. "19 확실히 해 두자면 소로는 일을 대충 했을 때,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을 때 더 많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 장작의 양을 측정하는 이유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가장 신속하게 늘리기 위해서였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돈은 공허하다. 쓸모는 있겠지만 공허하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면 돈은 무의미하다.
노동자의 목적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잘하는 것이다. 심지어 금전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봐도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줌으로써 단지 생계를 위해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이고 심지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마을 경제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20
“충분한 보수를 줌으로써 단지 생계를 위해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충분한” 보수를 주어서 일이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 준다 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지금 하는 일에 어떤 그럴싸한 명분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억 대 연봉을 받으면 좋지만 그렇다고 그 일 자체에 대단한 목적이 생기지는 않는다. 덕분에 호강할 뿐이다. 그냥 참고 견딜 뿐 일로 구원받을 수는...
8. 월급의 기회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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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주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로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또한 단순하고 진부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사랑"은 고대 그리스어로 필리아philia로 깊은 동료 의식이나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전장에서 함께하는 병사들은 가장 깊은 필리아를 형성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깊었느냐 하면 이 사랑의 힘을 바탕으로 서로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다.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과연 내가 깊이 사랑하는 일인가? 무엇보다 깊이 사랑하는 일인가? (그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희생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내가 선택한 직업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은행 잔고를 위해 내 영혼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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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개념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았다고 하려면 적어도 일확천금을 위해 실제로 금광을 찾아 떠난 사람, 지위 상승을 노리는 사람, 푼돈을 위해 모든 것을 건 투기꾼에 대해 적어도 언급은 해야 할 것 같다. 소로는 1850년대에 쓰고 다듬었던 유명한 수필에서 이런 사람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이 수필의 제목은 처음에는 「먹고사는 일 Making a Living」이었다가 결국 「원칙 없는 삶」으로 출간되었다.
8. 월급의 기회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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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비용이란 내가 특정한 업무를 하는 동안 할 수 없었던 다른 모든 일들, 그 업무로 인해 포기한 다른 기회들의 값이다. "돈만을 위해" 일하면 나와 나의 시간, 나의 자유를 가장 비싼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파는 것이 된다. 소로가 일을 통해 “영혼을 판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큰 물류 회사의 인사팀을 이끌고 있는 우리 친구 프랭크는 연봉이 20만 달러가 넘는다. 어느 날 밤 술을 너무 마신 나머지 프랭크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자기 자신에게도 쉽게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10대 때부터 도장공이 되고 싶었어. 집에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 말이야.” 정말? 정말이라고 했다. 밖에서 하는 일이고 만질 수 있는 결과물에서 오는 성취감이 있다고 했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어쨌든 우리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프랭크의 평생 꿈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꿈이 있었고 수십만 달러의 연봉 때문에 그 꿈을 접었다는 사실이다. 프랭크는 보수의 측면에서 궁극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보수를 받는 대가로 무엇보다 귀중한 우리의 잠재력을 포기한다. 보수는 실존적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소로가 말하는 “영혼”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우리의 가장 본질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능성을 잘 고려해서 우리를 고양시키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우리의 지극히 고유한 힘을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말 잘 쓰는 방법을 말한다. 그게 영혼이 담긴 일이다. 그러므로 일터에서 “영혼”을 잃는다면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을 유용하게 쓰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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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눈물을 닦은 프랭크는 인사팀장 자리에서 물러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고 도장 사업을 시작하기에도 너무 늙었다고 했다. 우리는 60세에 정년을 맞으면 그때 도장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프랭크는 우리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60세에 사다리를 타고 비계를 오르내리라고?” 인정한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왕창 번 다음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 은퇴자의 삶을 즐긴다는 생각만큼이나 멍청하다. 소로는 이미 150년 전에 우리 생각을 앞질렀다.
생의 가장 좋은 시기에 돈을 벌어서 생의 가장 덜 귀중한 시기에 의심쩍은 자유를 즐긴다는 생각을 하면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한 영국인이 떠오른다. 그는 시인으로 살기 위해 먼저 재산을 모으러 인도로 갔다. 실은 곧장 다락으로 갔어야 하는데. 29
소로가 노동자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시기는 월든에서 이런저런 일을 맡은 시기였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형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죽음은 멀지 않았고 온갖 장애물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소로는 일했다. 죽어가는 동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매일이 마지막일 수 있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다가오는 어둠에 대응하는 유일하고 적절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을 때는 돈도 명성도 가져갈 수 없다. 가장 진부한 말은 그만큼 진실이기 때문에 남용되는지 모른다. 소로가 가장 좋아했던 시가 베르길리우스의 『게오르기카』, 노동의 진정한 의미에 보내는 찬가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 보자. 소로는 아마 이 구절을 가장 아꼈을 것이다.
“시골이, 작은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이 나의 기쁨이기를. 이름은 사라져도 물과 나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하기를(Rura mihi et rigui placeant in vallibus amnes, flumina amem silvasque inglorius).”30
일하며 살아온 생의 끝에 이르러 잔고는 두둑할지라도 소로가 『월든』에서 말하듯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보다 큰 비극은 없다.
8. 월급의 기회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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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이런 식으로 형 존과 함께 중등학교를 세웠고, 엘러리 채닝과 각자의 시 쓰기 프로젝트를 다듬었으며, 아버지와 신기술이 적용된 연필을 만들었고, 랠프 왈도 에머슨과 초월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리디언 에머슨을 도와 에머슨 집안 아이들을 키웠고 페레즈 블러드와 매사추세츠 땅을 측량했다. 이뿐 아니라 얼음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사람들, 벌목꾼, 어부, 선원, 변호사들과도 협력해서 일을 벌였다. 이 모든 사례에서 소로는 분배할 수 있는 노동의 결실보다 동료와의 의식적인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곤 했다.
최고의 협업은 진정한 우정으로 이어진다. 소로는 이런 우정이 기막히게 드물고 그래서 기막히게 귀중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는 사례가 흔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과 데이트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다. 의미 있는, 의식적인 협업은 둘 이상의 사람들 간에 진실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소로가 말하는 협업은 공동의 목표를 향한 깊은 애착을 형성하는 일이다(이것은 오래된 우정이나 건전한 인간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적인 목적을 좇 는 개인은 이상적인 우정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다만 협업의 경우 공동의 목표는 언제나 “일을 잘하는 것"이다.
동료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일이 끝나고 같이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나 달력에 잊지 않고 내 생일을 적어 놓는 사람들을 떠올리기가 쉽다.
혹은 내 급여가 인상되는데 도움을 주고 상사 앞에서 내 잘못을 두둔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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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관계도 현실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소로는 이런 관계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며 살며시 운을 뗀다.
사람들이 사회적 덕목, 동료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을 붙이고 누운 새끼 돼지들의 덕목에 불과하다.
술집 같은 데서 사람들이 한 집단, 떼거리로 뭉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덕목이라고 부를 가치는 없다.!
소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친구이자 동료인 에머슨까지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일터에서의 “사회적 덕목”은 매우 불만족스러운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는 이익, 다른 하나는 즐거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익이 되는 동료는 예를 들면 이렇다. 철학자가 되기 전에 존은 남성복 가게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했다. 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 낸은 평범하고 단정한 여성복 브랜드를 입는 60대 할머니였는데 매일 아침 존이 실제로 출근하기 1시간 전에 출근 도장을 찍어 주었다. 즐거움을 주는 동료는 예를 들면 이렇다. 낸의 생일에 존은 직접 코코넛을 갈아서 독일식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별로 나쁜 관계 같지 않지만 그렇게 “좋은” 관계도 아니다. 만약 동료와의 관계가 단지 도움과 즐거움을 교환하는 관계라면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머물게 된다. 낸은 결국 게으른 젊은이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데 지쳤고 젊은이는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낸은 더 이상 초콜릿 케이크를 받지 못했다.
9. 불행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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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대 플리니우스를 언급한다. 그는 생전에 가이우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의 인물들에 대한 생각을 남겼다. 고대 사람들도 우리처럼 그들의 선조를 상상하려고 애썼고 우리의 후손도 그럴 것이다.
소로는 우리의 상상력이 부실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의 상상력으로 200년 전은 20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적었다." 가령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수천 년 단위로 흘러가는 지질학적 깊은 시간 deep time의 진정한 의미를 잘 체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에 대한 지속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통해 이 무거운 시간의 더께를 하나씩 걷어 낼 수 있다. 좀 더 예리한 통찰과 강렬한 호기심이 있으면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타인의 삶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점은 기자 Giza의 대피라미드가 건설된 시점보다 우리와 더 가깝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완공되었을 때 북극해의 브란겔섬에는 여전히 소수의 매머드가 살아 있었다. 월든에서 소로가 하곤 했던 이런 유희적인 상상은 우리를 잠에서 깨운다. 죽은 자들도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소로는 상상력을 재차 발휘하며 역사의 매 순간을 새로이 생생하게 느끼고자 했다. “지구는 책장처럼 겹겹이 포개어져 주로 지질학자나 골동품 연구가들의 연구대상에 그치는, 단지 죽은 역사의 단편이 아니다. 나무에서 잎사귀가 나오고 이어서 꽃과 열매가 뒤따르듯 살아 있는 시 같은 지구는 화석이 아니라 생명의 지구이다."10
9. 불행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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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의미 있는 일을 할 때는 우주가 나를 위해 정해 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우리 선택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수입이 짭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오직 우리만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학문적인 내용에 대한 경의일 수도 있고, 해당 주제에 대해서 우리만이 갖고 있는 애착일 수도 있다.
의미 있는 일은 정의상 대체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 마찬가지로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더 잘 가르치는 교수들도 있겠지만 결코 우리가 하는 그런 강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대한 결정이란 인생을 바꿀 결심 없이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반대로 의미 없는 일은 거의 언제나 사소한 결정과 관련이 있다.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판돈이 미미하거나 이후 현명하지 못한 결정임이 밝혀졌을 때 뒤집을 수 있다면 그 기회는 둘도 없는 고유한 기회가 아니다"!
소로에게 한 장 한 장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었다. 소로는 “일기는 모든 기쁨, 모든 희열을 담게 될 책"이라고 설명했다. 펜실베이니아주 중부의 작은 마을 출신인 약사 폴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다 죽을 뻔했음에도 직원들에게 “일 속에 나를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이었겠지만 소로는 폴의 충고에 담긴 좀 더 심오한 지혜에 주목했을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단호히 내던질 수 있는 일이며 그로써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한다.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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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일기를 열면 소로라는 인간, 소로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삶의 활기뿐만 아니라 어둠도 있다. 소로의 일기는 기쁨과 감사의 기록이자 슬픔과 후회의 토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를 통틀어 그것은 삶의 기록이자, 한 인간이 무엇이 뜻깊고 두렵고 신성한 지 고민한 결과였다. 어떤 직업 분야에서든 절정에 이른 노동은 이런 식의 기록을 남긴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일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너무 당연해서 말이 필요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학생들이 빈정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죠, 내가 일할 때 일을 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수많은 노동자들이 근무 중에 자신을 잊고, 자기를 잃어버린다. 결코 아름답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잊는 게 아니다. 하찮은 업무를 마치고 난 뒤에야 그동안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많지 않은가? 의미 있는 일의 즉시성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훨씬 단순하다. 의미 있는 일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을 자신의 표현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다. 소로는 모든 글을 쓸 때 이런 느낌을 받았지만 일기를 쓸 때 특히 그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가장 잘 쓸 수 있는 만큼 가장 잘 살 수 있다.3
글쓰기는 소로가 깊은 애착을 가졌던 일이므로 이 말은 모든 의미 있는 일에 해당된다.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만큼, 가장 잘 변호하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셈하고 건설하고 디자인하고 이끌고 치료하고 수리하고 청소할 수 있는 만큼 가장 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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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인간 존재 간에는 말하자면 실존적인 연음 현상이 있고 소로는 이를 강조하고자 애썼다. 소로의 말은 단지 “나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천직이 곧 "나"에서 시작한다는 상냥한 깨우침이다. 일터에서 내가 쓰고 있는 시간은 다름 아닌 내 삶이기 때문이다. 소로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1857년 10월 21일 소로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시인은 결국 자서전을 쓰게 되어 있지 않을까? 좋은 일기를 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시인의 상상 속의 영웅이 아닌, 현실 속의 영웅인 시인 그 자신이 어떻게 일상을 살아갔는지 알고 싶어 한다."4
다시 소로의 집필용 책상으로 돌아가 보자. 제롬 로렌스와 로버트 E. 리(로버트 E. 리 장군과는 무관함)가 공동 집필한 희곡 「소로가 감옥에서 보낸 하룻밤」 속의 인물 소로는 그를 취조하는 베일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름을 쓰면 문장을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단락이 만들어지고 또 그러다 보면 책을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쪽도 나처럼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겁니다.”5 아주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 대사를 실존 인물 소로가 들었다면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모든 의미 있는 업무는 비유적으로 혹은 글자 그대로 그 업무의 입구에 자기 이름을 적는데서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것으로 만든 뒤 다음 입구로 걸어 들어가거나, 뛰어 들어가거나, 달려서 혹은 우당탕거리며 들어가는 것이다. 소로는 온갖 잡다한 일과 직무를 수도 없이 맡았지만 매번 조용하고 고집스럽게, “이 일은 내 일이다. 이 일은 나 자신의 일이다"라고 거의 기도에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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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스템은 훔볼트의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모든 세부적인 사항을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콩코드의 현인”, 즉 에머슨에게 영향을 끼치기에는 충분했다.
사상은 유기체와 닮아 있다. 이주가 일어나면 변이도 발생한다. 에머슨은 유럽인들로부터 자기 수양의 횃불을 전달받아 미국화했다. 에머슨이 그린 빌둥은 훨씬 더 반항적이었기에 반란군의 자녀와 그 자녀 세대에 더 어울렸다. 에머슨은 개인을 훨씬 더 핵심에 놓았고 자기 수양의 목표를 훨씬 더 높게 잡았다. 노동의 산물, 일의 수준, 노력의 결과 등은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일에 비하면 부차적이라고 에머슨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말했다. 노동은 자아를 꽃피우고 강인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한에서 의미 있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에머슨에게 빌둥은 우리 자신보다 더 높거나 멀리 있는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 했던 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이 노동에 대한 에머슨과 소로의 생각에 가깝다.
소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노동자 사상가들은 자기 수양과 국가의 성장을 동일하게 여겼다. 건국 초기였기 때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유 시민들은 월트 휘트먼이 말했듯 저들이 “민주주의의 전경”10을 내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신세계였지만 더욱 새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소로의 민주주의 전경은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1할은 가꾸어져 있고(자기 수양을 뜻하는 'self-cultivation'에서 'cultivation'은 식물을 돌보고 기르는 일, 즉 경작을 의미하기도 한다-옮긴이) 9할은 가꾸어져 있지 않았다.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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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필요하거나 돈을 원해서 한 일이 아니다. 매트가 일을 하며 성장하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직원 글로리아의 경우는 확신할 수 있다. 글로리아는 이 가게의 심장이자 영혼이다. 펀스는 오전 6시에 문을 연다. 글로리아는 이보다 2시간 먼저 일어난다. 그것도 매일. 펀스에는 아침 일찍부터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먹고 머핀을 꿀꺽하고 크루아상을 우적우적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글로리아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다. 글로리아의 일은 언뜻 보면 아주 고된 일처럼 보이지만 펀스에서 글로리아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모든 방면으로 성장하고 있다. 글로리아는 어느 날 아침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좋아요. 손님이 별로 없을 때는 책을 읽을 수도 있어요. 여긴 냄새도 좋아요.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어요. 제가 안 하면 이 쿠키와 머핀을 누가 만들겠어요. 제가 볼 땐 맛이 아주 괜찮은 것 같아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요.”
글로리아가 마지막에 한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 말도 안 되는 시각에 일어나는 건 어떨까?
"해 뜨는 걸 볼 수 있어요."
글로리아가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는 보장은 없지만 누가 알겠는가? 노동으로 힘겹게 삶을 살아 내는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이 정도일지 모른다. 소로가 『월든』의 마지막에 썼듯이 우리는 언제나 눈을 뜨고 새벽을 맞이해야 한다. 새벽은 분명히 오기 때문이다. 그 새벽은 실제로 일출의 형태로 올 수도 있고 새로운 손님의 인사로 올 수도 있으며 빵 굽는 냄새로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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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소로적인 노동자는 많을 테지만(그러길 바란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별로 없고 글로리아 같은 사람만 떠오른다. 또 한 사람이 있다면 더글러스 랜드 앤더슨이다. 학생들이 닥터 에이라고 불렀던 앤더슨은 철학 교수였고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한 시대였던 1980년대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애쓴 몇 안 되는 학자였다. 하지만 이것이 앤더슨을 소로적인 노동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앤더슨의 삶이 소로의 삶과 닮아 있다면 그가 가죽 공장에서 일하면서 손으로 가죽을 벗기고 말리고 무두질했기 때문일 것이다. 앤더슨은 공장에서 받은 보잘것없는 급여를 가지고 뉴햄프셔주 남부의 작은 마을을 전전하며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최대한 확보했다. 가죽 공장에서 시작해 배관공을 거쳐 건설업에 종사하다가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마지막에는 다시 글쓰기로 돌아왔다. 알고 보면 평생 글을 썼다. 코네티컷주 시골에서 60대를 보내고 있는 앤더슨은 목재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하고 아내의 초콜릿 사업도 도와주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수입이 짭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살면서 그는 (소로처럼) 독일어와 라틴어, 희랍어를 공부했고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 philosophia의 원뜻-옮긴이)에 대해서라면 우리보다 많이 안다. 그러고 보면 아이비리그 대학의 그 어느 석좌 교수보다 많이 알 것이다.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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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고용되었는데 주택 60채를 짓기 위해 토지를 정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소로가 완수한 지역 측량 업무 중에는 나무를 베어 팔기 위해 숲의 경계를 긋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 일을 하는 도중 소로는 토지주를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래된 전봇대가 있던 자리를 살피는 모습을 보았다. 토지의 새 경계를 어디에 그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문득 소로는 토지주가 악마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토지주의 바로 옆에는 “어둠의 군주”, 즉 측량 기사가 있었다. 천직의 소명을 따를 수는 있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소로는 이후 이렇게 적었다. “사고파는 일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저주에 빠뜨린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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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가 했던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적은 사람만이 읽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방대한 일기를 쓰는 일이었을까? 결국 일기는 소로의 생각보다 아주 약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뿐이다. 아니면 미국 인문학의 명저로 널리 여겨지는 『월든』을 쓰는 일이었을까? 여러 아이들과 콩코드의 언덕을 누비며 허클베리를 따는 일이었을까? 결코 경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토지를 측량하는 일? 배를 만들어 마을 주변을 에워싸는 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일? 온갖 품종의 멜론을 다양하게 심어 여름날 콩코드 주민들의 잔칫상에 올 린 일? 품질이 뛰어난 연필을 만드는 일? 그러나 의미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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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이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었는지 묻기보다 삶이라는 신중한 노동에 임할 때 자기 고유의 방법을 찾았는지, 때로는 그걸 내려놓기도 하고 때로는 전에 없는 열정을 가지고 새로이 시작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일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타인의 관점에서 그 일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넘어갔는데 이제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소로의 친구 에머슨의 글이라고 잘못 전해지는 아주 유명한 글이 있다.
자주 웃고 많이 웃는 삶. 지적인 사람들이 보내는 존경과 아이들이 주는 애청을 누리는 삶. 정직한 비평가들의 칭찬을 얻고 거짓된 친구들의 배신에도 무너지지 않는 삶. 아름다움을 알고 다른 이의 장점을 발견하며, 건강한 아이를 낳는 텃밭을 가꾸든 사회적 조건을 향상하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가는 삶.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내가 산 덕분에 좀 더 수월하게 숨 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삶. 이것이 성공한 삶이다. 18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좋겠지만 이 글은 무엇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과 일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19세기 콩코드에서 소로를 제외하고 이런 전인적인 의미에서 성공했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성공이 특별히 보람 있는 일 한 가지에서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지적인 사람들이 보내는 존경” 혹은 “아이들이 주는 애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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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한 시간에 이 모든 걸 해야 하지만 너무 미루어도 안 된다. 냉소적인 은둔자라는 평판이 있었지만 소로는 기쁨과 사랑을 모르지 않았다. “작은 기쁨을 위해 위반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법은 없는 법이다.”19 1853년 소로는 이렇게 고집했다. “책도, 슬픈 기억도, 톱질도, 법 공부도 덮어 두자. 바깥의 자연은 명랑하고 자연의 행복한 벌레들은 오래지 않아 모든 걸 갉아먹을 테지. 법의 너머에는 들판이 있다.”20 소로는 에머슨 집안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어린 시절을, 뉴잉글랜드의 덤불 사이를, 딸기밭을 헤쳐 나갔고 그 노력은 깊은 애정으로 보답받았다. 동시대 가장 뛰어나고 총명한 사람들이 소로의 책을 아꼈으며 소로의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 에머슨은 종종 소로를 무시하고 냉랭하게 대했지만 소로는 용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로의 생애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1840년에는 이렇게 썼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인식되는 곳에 있다."21 1855년에는 이렇게 썼다. “올바른 관점에서 보면 모든 비바람과 그 안의 모든 빗방울에는 무지개가 있다.”22 소로는 친구가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스터브룩 숲에 살았던 이웃 페레즈 블러드도 그런 사람이었다. 또한 소로는 지하철도 운동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도왔으며 그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정원을 수없이 많이 가꾸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가꾸었다. 시대가 입막음하려고 했던 해방, 평등, 자립, 겸손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수백만의 독자를 위해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글로 남겨 놓았다.
삶이나 일에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없을지 모른다.
10. 보람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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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한 일 혹은 전혀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조화로운 일을 대하는 태도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속적으로 보람이 느껴지는 방식으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만족을 느낄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내가 될 기회를 주는 일을 찾는 것이다. 만약 의미 있는 일이 흥미와 목적의식을 필요로 한다면 두 가지 모두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매 순간 깨어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소로는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노력이 곧 현재에 충실하려는 노력, 늘 깨어 있으며 매 순간에 반응하려는 노력과 같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현재 속에 살아야 하고 파도가 올 때마다 뛰어들어야 하며 매 순간에서 영원을 찾아야 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기회의 섬을 딛고 서서 또 다른 육지를 바라보기만 한다. 또 다른 육지는 없다. 또 다른 생은 없다. 이번 생이, 이런 생이 전부다. 23
바로 이것이 우리가 결국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과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
우리의 일은 우리와 함께 죽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한다. 정해진 법은 없다.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세대는 앞 세대의 과업을 마치 난파선처럼 폐기한다.”24 어찌 됐든 소로는 결국 우리의 목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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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
일터에서 모든 의미 있는 순간이 그렇듯 이 책을 쓰는 일은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우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단지 운명을 따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삶이라는 일에 뛰어난 영웅은 아니다. 소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에 매력을 느꼈고 흥미를 느꼈으며 충분한 목적의식을 가졌기에 이를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종국에는 독자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종류의 일을 찾고 또 꼭 붙잡길 바란다. 이런 일이 의미 있는 삶의 바탕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것이 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궁극적으로 일에 대한 뜻깊은 고민은 매우 명확하지만 매우 달콤하고도 씁쓸한 사실로 귀결된다. 생이 끝나면 삶이라는 일도 끝난다는 것이다. 생은 짧고, 오직 한 방향으로, 끝을 향해, 아주 빨리 움직인다. 이 책의 한 저자는 40세에 심근 경색이 왔다. 또 한 저자는 한때 유사 자살 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살아남았고 지금은 아내가 있는데 아내는 매일 섬유 근육통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생한다. 그래서 삶은 공평하지 않으며 유한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제약을 가하는 동시에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그러므로 귀중하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자리를 찾아야 하며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1850년 소로가 파이어아일랜드에서 마가릿 풀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을 맡았을 때 소로는 외딴 해변에서 풀러의 유해를 헛되이 찾아 헤매는데서 멈추지 않았다. 소로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수행했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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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취약성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했다. 짧게 끝나 버린 삶을 두고 소로는 결론지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그 일을 좀 더 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좋은 일, 소로적인 생애를 살고자 한다면 다만 좋은 일을 하면 된다. 좋은 일을 행하기 위해 꼭 신의 은혜나 어떤 권위의 허락이 없어도 된다. (하지만 대체로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일이 좋은 일이라고 “고백”할 의지와 능력은 꼭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삶이라는 일을 “좋은 일로 만들” 능력이 있다. 유해를 수색하는 일이 아무 성과가 없자 소로는 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해 보고 싶은 실험이 있다면 해 보길 바랍니다. 꺼림칙한 의혹이 생겼다면 해소해야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나 대신할 수 없는 일을 하길 바랍니다. 그 밖의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좋은 삶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다. 남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간단하다. 보람 없는 활동과 업무를 택하기는 쉽다. 하지만 소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좋은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각자 “좋은 일을 좀 더 하면 된다.
웬델 베리는 여느 21세기 작가와 마찬가지로 소로와 특별히 가깝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했다. “소명'이라는 오래되고 훌륭한 관념은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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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느님, 혹은 재능, 혹은 선호의 부름을 받아 우리에게 특별히 적합한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3 사실상 소로는 파이어 아일랜드에서 마거릿 풀러의 시신이 아니라(찾았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또 다른 종류의 코퍼스 corpus(라틴어로 몸이라는 뜻의 코르푸스에 서 왔으며 한 사람의 글을 모아 놓은 집합체를 뜻하기도 한다-옮긴이), 즉 마거릿 풀거가 수년에 걸쳐 작업하고 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원고를 찾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찾지 못했지만 요점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이다. 남는 것도 일이다.
*
햇빛이 비칠 때 건초를 만들어라. 이 표현은 소로에게 매우 실질적이고 매우 강력한 의미를 가졌는데 종종 자신이 너무 빨리 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로는 44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로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결핵은 비를 맞으며 밖에서 일을 하는 습관 때문에 악화되기도 했다. 일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살아서 나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깨어 있는 동안에는 "좋은 일”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삶이 우리를 버리는 그 순간까지.
햇빛이 비칠 때 건초를 만들어라. 이 표현은 소로의 이웃에게도 매우 실질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웃들이 이 말의 실존적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콩코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머스케타퀴드라고 부른 곳에 위치해 있다. “풀 사이로 물이 흐르는 장소"라는 뜻이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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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선박을 제작했습니다. 호메로스가 인정할 만한 [노 저을 좌판이 넉넉한] 배는 아니었고 길쭉한 타원형의 구유 같은 배였습니다."" "몸과 영혼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배였다고 소로는 말했다. 소로는 살면서 적잖은 배를 제작했다. 가장 유명한 배는 머스케타퀴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물이 밀려들어 배를 밀어 올리고 소로 자신을 들어 올리게 될 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의 성스러운 본질이 아닌가 싶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물이 불어 날 때 우리를 떠 있게 해 주고 날라 준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소로의 마지막 몇 마디를 되뇌일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좋은 항해만이 남았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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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차이에 주목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공통점을 찾기 위함이다. 서로 다른 문화 속 사람들이 언어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알아야 비로소 번역이 가능해진다. 이 책의 두 저자는 말한다. "생은 짧고, 오직 한 방향으로, 끝을 향해, 아주 빨리 움직인다.” 바로 이 사실이 이 책의 두 저자, 역자, 소로, 퍼스, 제임스, 독자들을 하나로 이어 준다. 우리 역시 정해진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더욱 치열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이 책의 메시지를 더 귀담아들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좀먹는 일을 그만두고 내 길을 찾아간 대가는 아무도 내 면전에서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낙오자라는 비난에 그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도심 호텔에서 더 이상 바캉스를 즐기지 못하는 정도의 경미한 경제적 영향일 수 있다. 반면 어떤 이의 경우 훨씬 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소로는 보람 없는 노동과 그 노동을 거부함으로써 내가 처하는 위태로운 상황 중에 어떤 것이 나를 더 큰 위험에 처하게 하는지 스스로 묻게 만든다. 보람 없는 노동의 진정한 대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은 제한된 삶을 사는 누구나 물어야 하는 질문이며 이를 고민하는 삶이 바로 의식적인 삶, 철학하는 삶이다. 나 또한 그만두는 사람으로서 '본격 퇴사 장려 도서'나 다름없는 이 책의 메시지에 절절히 동의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몸을 지탱하고 마음을 고양시켜 주는” 노동을 찾아 스 스로 질문을 던지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옮겼다. 이 책을 옮기는 일은 결코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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