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책 : 이어령의 말
초등학교 시절 명상의 시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8시 9시 사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명언들이 흘러나왔던 기억도 있습니다.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의 책 속의 그의 생각과 말 그리고 글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 말에 담긴 생각을 엿봅니다.

그냥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내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냥 먹고, 그냥 자고, 그냥 노는 날 말이야. 어떤 때에는 봄이 와서 꽃이 피어도, 아침이 되어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도 아무 느낌 없이 그냥 흘끗 보고 지나쳐버리기도 하지.
갈매기
떠서는 안 됩니다. 표류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아야 할 때입니다. 날기 위해서는 자체의 추진력과 뚜렷한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뜨는 것과 나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냥 날아서도 안 됩니다. 높이 날아야 합니다. 그 큰 날개와 그 큰 바다, 그리고 그 넓은 하늘이 주어졌음에도 죽은 고기의 창자를 먹겠다고 선착장으로 날아드는 추악한 갈매기 떼가 될 것이냐, 아니면 조너선 리빙스턴 시걸의 갈매기처럼 높이 나는, 그래서 넓은 하늘과 바다를 나는 갈매기가 될 것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11
모레
우리 민족은 당장 코앞에 닥친 내일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먼 미래에 대해서는 항상 밝고 낙천적인 마음을 품고 살아온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이라는 말은 한자어인데 그보다 더 먼 '모레'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 고유의 말로 되어 있다. 또 한자로는 미래를 '뒤'로 인식하는데, 우리말에 있어서는 거꾸로 '앞'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한자어의 영향을 받아 '후일' '훗날'에서 나온 '뒷날'도 있지만, "앞날을 위해서 저축을 해두라"고 하는 말에서 보듯이 미래를 '앞'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반도성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끝없이 몇천 년간 싸워온 인류의 모든 분규를 풀어가는 정말 놀라운 기적의 세계가 있다면 바로 반도성의 회복이에요. 역사를 보세요. 대륙과 해양이 반도를 놓고 서로 새우 등 터뜨리던 그 역사가 종식돼야 인류는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맞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의 갈등, 대립, 피와 눈물의 역사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반도성의 회복은 한국의 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 전 세계에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은 희망의 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반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대륙에 붙어서 대륙이 돼버렸어요. 중국의 대륙이 돼버렸어요. 한국은 끊어져서 완전히 섬이 돼버렸어요. 해방되고 광복됐는데도 단순한 분단이 아니라 반도가 없어졌어요. 독일의 분단하고는 달라요. 우리는 해양과 대륙을 아우르는 반도성이 완전히 사라져서 아시아에서, 한중일에서 반도가 사라지고 대륙과 바다만 남았어요. 중국과 일본만,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만 남았어요. 그러니 끝없이 분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없는 세상에서 통일의 염원이라고 하는 것은 반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도성의 회복이 의미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끝없이 반도성을 죽여왔던 그 역사가 반도성을 살리는 역사로 급전환해서 처음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 서로의 갈등이 아니라 화합과 융합, 이런 것들을 인류가 엮어나가는,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52
달
달에 대해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시를 썼지만 한국 사람이 쓴 달에 관한 시에는 못 당하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달을 눈으로 보고 아름답다고 해요. 또 달빛에 목욕을 한다는 식의 신체성을 가져요.
그런데 한국의 달은 먹는 달이에요. 술잔에 뜬 달을 마시는 것이고, 내 뱃속에 달이 들어가서 훤하게 비춘다 이거예요. 외국의 시 중에서 이런 시를 아직 내가 못 봤어요.
달을 먹어버린다
62
청춘
옛날 읽던 책이 생각나 다시 읽으면, 그 뜻이나 이야기들이 많이 변해 있다. 책도 청춘이 있었구나. 같은 글인데도 시간이 흐르면 주름과 저승꽃 같은 반점이 생긴다.
77
진화
기껏해야 4센티미터도 안 되는 허약한 피카이아 pikaia는 포식자 노틸러스 nautilus (앵무조개)의 먹이로 쫓겨 다니다가 물고기로 진화했다가 다시 페어肺魚와 지느러미가 네 발로 변한 틱타알릭 Tiktaalik이 된다. 조상 피는 못 속인다. 틱타알릭 역시 철도 침목枕木의 쇠못 같은 포식자들의 이빨을 피해 헐레벌떡 육지 위로 기어올라 등뼈 달린 포유류의 선조가 되었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지구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기적 같은 반전 드라마가 용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숨어 있었던 게다. 어머니의 바다 이야기를 생각할수록 유쾌하고 통쾌하지 않는가.
자연대로 순응하고 자연대로 간 생물은 멸망하고, 반대로 자연을 거슬러 자연 질서에 어긋나는 일을 한 생물은 생명의 진화를 시작한다.
자연의 법칙을 주어진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중력을 거스른다든지, 네 발로 다니는 것이 가장 편한데도 두 발로 일어서서 수직으로 일어선다든지 하는 것처럼, 편리함을 버리고 불편을 감수하는 순간 생명은 그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독특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110
이파리
나무 이파리들은 수천수만 개의 잎이 있어도 각도가 다 다르다. 그래야 햇볕을 쬘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향으로 나면 전부 그늘이 될 것인데 다른 방향으로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똑같이 햇볕을 받을 수가 있다. 놀라운 세계다.
인간들도 나무 이파리처럼 서로 방해하지 않고 공생할 수 있는 그러한 배열을 알 수만 있다면 분쟁이 생길 일이 없다.
113
나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그 목적으로 군림한다. 여가는 노동의 재생산에 불과하고 휴식은 노동의 효율성을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오락을 의미하는 레크리에이션(재창조)이란 말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여가를 생활의 최고 상태요, 행위의 제일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가 가치가 노동 가치보다 우위에 설정돼 있는 철학이다. 앞으로 오게 될 문화자본주의를 맞기 위해서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과, 삶의 목적은 노동의 고통이 아니라 여가의 즐거움과 창조적인 기쁨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120
소리
콜럼버스는 맨 처음 산토도밍고섬에 상륙했을 때, 유럽에서보다 한결 아름답게 우는 종달새 소리를 들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섬에는 종달새가 살고 있지 않았다. 우리도 콜럼버스처럼 21세기의 신대륙에 첫발을 들여놓고 있으면서도 처음 듣는 새소리를 새新 소리로 들을 줄 모르는 때가 많다.
123
꿈
왜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동양이 근대에 와서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꿈'자 하나 때문이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어의 '드림 dream'은 원래 '즐거움'과 '기쁨'의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떠들썩한 잔치판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의 '꿈'은 '남가일몽南柯一夢'이나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덧없는 것이 아니면 환상의 뜻으로 쓰였다. 원래 그 글자 자체가 어두운 것,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구대륙의 문화가 신대륙 문화로 바뀌고 아메리칸 드림이 생겨나 개척민들이 허허벌판에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변화가 동양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132
인재
말 중에 천리마가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게 천리마인 줄 모르고 수레를 끌게 하는 거야.
단숨에 천 리를 달리는 게 짐짝을 끌라고 하면 소만도 못하잖아. 백락이라는 사람은 말야, 이거 딱 보면 명마라는 걸 알아봐. 그래서 이렇게 말이 있는데 백락이라는 사람이 딱 일 초만 멈춰 서서 봐도 말의 값이 몇십 배가 뛰는 거야. 천리마가 중요해? 백락이 중요해? 백락은 천리마는 아니지만 천리마를 알아보는 사람. 그러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천리마는 아니야. 뭐가 돼야 해? 백락이 되어야 하는 거야. 자기는 천리마가 아니더라도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그게 인재보다도 나은 거야.
134
술래
모든 예술과 철학과 종교는 숨는 자의 그 외로운 그늘 속에서 창조되었다. 디오게네스는 통 속에 숨었고, 공명孔明은 와룡강臥龍崗 초당草堂에 숨었고, 릴케는 뮈조트의 고성古城 속에 숨었다.
그러나 아들이여, 숨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는 슬기로운 술래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를, 유비劉備는 공명을 찾으러 다녔다.
권력 있는 정치가와 돈 많은 부자들은 숨은 자를 찾는 그 술래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위대한 사회와 그 문화는 이 즐거운 숨바꼭질의 논리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너는 아는가?
137
군주
수원 화성을 만들 때 골머리를 앓은 거예요. 너무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니까. 그래서 신하들이 성이라는 것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튼튼하게만 짓고 강하면 되지, 뭘 그걸 그렇게 아름답게 지으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신하들이 간하는 것을 보고 정조가 얘기하더라. "아름다운 것이 힘이니라. 아름다운 것이 강한 것이니라." 이런 군주를 가졌다는 것이 저는 참 자랑스러워요. 어느 군주가 이런 말을 해요?
143
스토리텔링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진리나 과학적 증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얽히고설키다 하나의 신화를 만들고 스토리를 만드는 이야기 속에서 바뀌어갑니다. (…) 언어라는 건 근거도 없는 것 같고 잘못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말이 어떤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도 강한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147
대립
이 세상은 두 토막으로 빠갤 수 있는 장작개비가 아니다. 손등과 손바닥처럼 둘이면서도 뗄 수 없는 하나인 것이 더 많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 하나도 붓글씨의 그 '한 일' 자처럼 점을 찍고 긋고 다시 힘을 주어 붓을 떼는 세 강약의 터치로 그었다. 거기에서 셋이면서도 한 획인 선의 아름다움이 창조된다. 그러나 서양 사람을 보고 한 일 자를 쓰라고 하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단순한 기하학적 선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분단, 갈등과 대립, 혁명으로 얼룩진 서양의 역사와 그 문명의 비밀을 알 것 같다.
서구 사회를 지탱하고 또 끌어가고 있는 것은 개인주의이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을 잇고 있는 것은 바로 대립 관계이다. 이 대립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발전하고 끝없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143
맷돌
맷돌은 한 짝만으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두 개의 돌이 서로 마찰을 할 때 딱딱한 곡물은 부드러운 가루가 된다. 세대도 맷돌의 법칙을 모방한다. 기성세대는 고정되어 있는 맷돌짝이요, 젊은 세대는 그 위에서 끝없이 돌고 움직이는 또 한 짝의 맷돌이다. 그 마찰 속에서 문화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운 가루가 된다.
150
그래도
어느 시인이 한국에는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고 우겼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있어도 우리나라의 섬 3358개 중에 '그래도'라는 섬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말했습니다.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살기 힘들 때 절망을 할 때 자신의 꿈과 소망이 산산조각이 나도 새로운 긍정을 만드는 섬이 있다고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그래도'라는 섬입니다. '그래도'의 섬 안에서 우리는 쓰러지다가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한국에 있다는 섬 '그래도'.
몇천 년을 두고 그래도 내 나라 그래도 내 고향 그래도 내 식구라고 말하며 살아온 한국인.
가난하고 어렵고 험한 역사 속에서도 '그래도'라는 섬 덕택에 시련을 이겨온 한국인.
절망이 앞을 가리고 외로움이 나를 가두어도 거센 폭풍이 불어와도 말하세요.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155
속도
우리는 빨리 가고 싶은데도 남이 가로막고 있으면 서 있어야 하고, 또 거꾸로 서 있고 싶은데도 남들이 다 걸으면 할 수 없이 바쁘지도 않은데 함께 밀려가야 한다. 개인의 속도와 사회의 속도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 자체가 획일화되어 있어, 속담대로 말이 한번 미치면 개도 소도 다 뛰게 마련이다. (…) 감정의 속도만 빨라지고, 막상 빨라져야 하는 사회의 기능적인 속도는 어디에선가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173
어기여
사람들은 기계와 함께 일하면서 일과 일 사이에 삽입되는 멈춤의 '어기여'를 잃고 '차'만을 외친다. 이것이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아는 산업자본주의,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자를 낳고 무는 금융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남들이 200년 걸려서 쌓아온 산업화를 불과 20년 만에 해치운 한국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어기여차'의 그 잃어버린 호흡이다. '어기여'를 뺀 '차, 차, 차'만 가지고는 숨이 차다.
185
맞아떨어지다
죽어 있는 것은 변화가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행동, 생각은 기계처럼 딱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어. 생각해 봐. 세상 사는 일이 단춧구멍에 단추를 끼우듯 언제나 꼭꼭 맞아떨어지겠니.
답
인생은 수능 시험이 아니에요. 채점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문제를 내고 여러분이 바로 그 답을 내야 해요. 그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밖에는 알 수 없어요.
200
머리카락
보들레르는 여성의 머리카락에 도취하여 한 편의 시를 썼다. “저 지쳐버린 아시아와 타오르는 아프리카, 모두가 멀고 먼 옛날, 부재不在하며 거의 사멸해 버린 세계가 여인의 깊은 머리 숲 속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머리의 숲에는 원시적인 생기가 넘쳐흐른다. 그것은 남성의 영혼을 부르는 향기 어린 숲이며, 검은 바다이며, 하늘로서 그려진다. 원초적인 자연, 하늘과 땅과 바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남성들이 여성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서 느끼는 사랑은 가장 원시적인 생의 본능과 그 경탄인 것이다.
210
성장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엎드려 기어 다니는 이상으로 편한 자세는 없다. 이 세상 어떤 의자나 책상도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모험을 자청하는가.
몸의 성장은 첫 담배를 피울 무렵만 되어도 곧 정지하고 만다.
더 이상 키는 자라지 않으며, 발은 한 번 맞춘 그 신발보다 더 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 자란다. 작은 물방울이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바다가 되듯이 인간의 의식도 끝없이 넓은 것으로 확대되어 가는 하나의 물방울이다.
227
젊음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불확실한 바다로 용감히 뛰어드세요.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납니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우리의 삶은 한 번뿐입니다. 또 젊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5분인가 10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원예가한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장미가 최고로 아름다운 것은 시간으로 재보면 한 5~6분 동안일 뿐 곧 시든다는 것입니다.
역시 인생이 길다고 하지만 젊은이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1~2년입니다. 이 귀중한 것을 왜 헛되게 보냅니까?
왜 허무주의에 빠져 술을 마시면서 인생의 꽃을 낭비합니까?
아무리 완벽한 조각도 그 자세를 바꿀 수 없기에 항상 움직이는 젊은이만큼 아름다울 수가 없다.
237
모험가
모험가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움직이고 거부하고 뛰어들고, 그러면서도 아무 결과도(실리적인 것)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데서 그 모험의 생명이 있다.
그리하여 모험적 인간은 절망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후회하지도 겁내지도 않는다. 따라서 모험가는 으레 향수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다. 생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다. 돌진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가벼운 몸차림으로 과거와 서슴지 않고 예별袂別한다.
그러므로 모험적 인간이란 자기 운명의 창조자이며, 반전통주의자이며, 반지성주의자이며, 반개성주의자이며, 실험적 인간이며, 따라서 유쾌한 하나의 해방인이다.
242
무늬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기 다른 '나이'를 갖게 된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한 생애에 있어 똑같은 나이를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나이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나' 또한 없다는 것이다. 스물두 살 때의 '나'는 서른세 살 때의 '나'가 아니며 마흔세 살 의 나는 예순여섯의 '나'가 아닌 것이다. (…)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나의 나이테처럼 자신의 의식 속에 뚜렷한 무늬를 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248
식食
내가 요즘 공식을 하나 생각해 냈거든.
그건 바로 '라이프Life-푸드Food = 라이Lie'라는 법칙이야.
그러니까 인생을 뜻하는 'Life'에서 먹는 것의 'Food'의 'F'를 빼면 남는 것은 거짓말 'Lie'밖에 없다는 것이지.
먹는 것만이 인생에서 남는 진짜라는 거다.
276
1밀리미터
1밀리미터를 따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그것은 컴퓨터가 대부분 해결해 줄 것입니다. 물론 1밀리미터를 따져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컴퓨터가 죽어도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98
잡雜
대장균의 DNA는 필요한 염색체만 있는 깨끗한 DNA이지만, 인간들의 DNA는 정크 junk라 해서 쓰레기통과 같다고 합니다. 지저분하고 쓸데없는 게 잡것이 많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인간은 오늘날 이와 같은 진화를 할 수 있었고, 대장균은 지금도 똑같이 완벽하게 깨끗한 대장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핀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잡에서 생명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302
실존
보통 사람은 언제나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눈앞에 있는 것들을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수가 많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두 번 다시 못 보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바라보는 그 순간의 시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물방울 하나에도 녹슨 지붕 위에 비친 햇살과 구름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무심히 바라볼 수가 없을 것이다.
티끌 하나도 온몸으로 느낀다. (…)
더구나 그런 경우 그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것이 또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체 어떤 것인가. 숨소리 하나, 머리카락 하나 놓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손끝 하나에서도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있고 작은 속삭임에도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고받는 말, 쳐다보는 눈시울,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순간순간의 그 움직임에 대해서 무엇 하나 무심히 넘기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실존 그 자체로서 나타난다.
327
퍼스트 펭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퍼스트 펭귄이었나? 요즘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아닌 것 같아. 내가 뛰어든 게 아니라 떠밀린 것 같아.
막 용기 있게 '나 들어간다!' 그랬는데 사실은 뛰어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어쩌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퍼스트 펭귄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이런 희극을 산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은 안 그렇다는 거지. 내가 암에 걸리고, 너 시한부야, 너 오래 못 살아, 하는 그 순간에, 그때부터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는 게 보이는 거야, 그때부터. 내일 있지, 모레 있지, 하는 게 아니라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하니까 요즘에는 목숨 거는 거지. 20대에 남에게 떠밀렸건 우쭐해서 뛰어내렸건 간에 (…) 선두에 서서, 처음으로, 뭐가 있을지 모르는 그 생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뛰어드는 펭귄의 모습은 추락이 아니라 참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어.
333
'2026독서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른 번째 책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박완서 (0) | 2026.09.30 |
|---|---|
| 스물아홉 번째 책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0) | 2026.09.16 |
| 스물다섯 번째 책 : AI 이후의 미래 어떻게 될 것인가 - 제이슨 생커 (1) | 2026.08.24 |
| 세 번째 책 : 경험의 종말 (0) | 2026.02.08 |
| 첫 번째 책 : 일터의 소로 (0) | 2026.0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