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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쉰 번째 책 : 천천히 다정하게 - 박웅현

by 마파람94 2025. 11. 27.



 

시집을 들기가 어렵습니다.

여기 박웅현 작가님은 시를 읽을 때 등신대를 세우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시와 가까이 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일전에 정재찬 교수님이 쓴 '시를 잊은 그대에게' 라는 책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낮에 하늘을 보면서 ‘오늘 하늘이 파랗네' '구름이 많네' 생각하지 그 너머에 있는 별을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한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낮이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천상병 시인은 보이지 않는 별을 봅니다. 그는 <한낮의 별빛>이라는 시에서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빛을 보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한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지만 사실 저 하늘에는 별들이 있지, 별들이 지금은 낮이라서 잠들어 있구나, 밤이면 깨어나겠구나, 시인은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하고 묻는 것이죠. 즉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이 시의 이 한 구절을 알기 전과 후의 우리는 다를 겁니다. 한낮의 파란 하늘을 보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별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이철수 선생의 《마른 풀의 노래》라는 판화집에는 죽어서 마른풀들을 주목한 작품이 여럿 실려 있는데, 표지로 쓰인 작품에는 이런 문구가 함께 새겨져 있어요. “대승사 산선각 아래 마른풀 열매가 부르는 겨울 노래를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겨울 마른풀을 그 누가 주목하겠습니까?

025

이번에 이야기해 드릴 시는 천상병 시인의 <아가야〉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상병 시인의 시는 직접 담지 못하고 시에 대한 제 이야기만 담아 봅니다. 우선 이 시의 풍경은 이렇습니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는지 낙심 가득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듯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해뜨기 전 새벽에 사직 공원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장면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그 이른 시간에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문 밖에서 슬프게 울고 있는 겁니다. 남자는 아이가 왜 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을까 생각해요. 아마도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쌌거나 하는 실수로 엄마에게 혼나고 집에서 쫓겨난 게 아닐까 짐작하죠. 그러면서 아이에게 무심해지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봄 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자신의 일과 실패한 인생을 이리저리 곱씹던 남자로서는 아이가 자기만큼 힘들 거라는 생각은 들 지 않아요. 그는 아이에게 독백처럼 넋두리하듯이 말하죠. 어린 너가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우니? 무슨 슬픔을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지 깨우쳤다고 우니? 정처 없이 헤매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하면서요. 하지만 슬픔의 무게는 각자의 주관적인 무게인 것 아니겠어요? 초콜릿을 빼앗기고 우는 아이의 슬픔이 연봉이 깎인 어른의 슬픔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남자는 아이를 향해 너는 엄마가 있지만 나는 엄마도 없고 나를 받아줄 사람도 없는데 뭘 우니, 울지마, 하면서도 그 아이의 울음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눈물조차 나지 않던 남자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고 꾹꾹 눌러 참던 감정이 울컥 터져 나오고 맙니다.

048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이문재, <봄날> 중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장면입니다. 대부분 배달하는 오토바이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 않죠. 거칠고 위험하게 운전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 배달 기사에 대한 시인의 시선도 처음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학 본관 앞은 많은 학생이 걸어 다니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부아앙” 소리를 내며 좌회전하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어요. 심지어 그러다 넘어질 뻔했고요. 부정적인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 배달 기사인 청년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휴대전화를 꺼내서 막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목련 꽃을 찍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배달하겠다고 급하게 오토바이를 몰던 사람이 왜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나 했더니 꽃 사진을 찍으려던 거였어요. 배달하는 청년에게도 꽃을 주목하는 시선이, 봄을 맞는 마음이 있는 것이죠. 저는 청년의 이런 순간을 시적인 순간이라고 봅니다.

제가 느끼기에 또 한 가지 시적인 순간이 있다면 그 장면을 잡아낸 시인의 시선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아, 저 배달하는 청년 안에도 꽃을 발견하는 시선이 있구나, 너무 예쁘다, 하고 잡아냈으니까요.

050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연민, 소멸적인 것에 대한 구원

저는 춘천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카투사라고 하죠. 그 시절 한 달에 한 번 외출 나가는 토요일 아침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금요일 근무를 끝내고 다음 날 외출 나갈 것을 생각하면 설렜어요. 보통 토요일 새벽에 기차를 탔는데, 서울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이른 새벽에 경춘선 기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이 정말 좋 았거든요. 기차는 의암댐이 있는 지역을 지나 북한강을 따라 달리고, 이른 새벽에 출발하면 기차 안에서 강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물안개라고 하면 그 시절 그 새벽의 경춘선만 생각납니다.

강가나 호숫가에 물안개가 짙으면 강물이 잘 보이지 않습 니다. 그러다 안개가 쏙 걷히면 강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오면 안개가 걷힌 물 위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윤슬이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은 그 풍경을 “물안개가 증발하고 나자 호수는 힘껏 이른 아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잠깐입니다. 해가 완전히 뜨면 풍경이 달라지거든요. 아마도 이 한 구절이 없었다면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 길,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북한강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기 어려웠을 거예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시절 새벽 찰나에 제가 본 북한강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묘사는 일시적인 것에 대한 구원이라는 쿤데라의 문장을 말씀드렸었죠? 정말 이 시 구절은 일시적이었던 제 군생활 추억에 대한 구원이 맞습니다.

물안개가 증발하고 나자 호수는 있는 힘껏
이른 아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문재, <신새벽에 나를 놓다> 중에서

요즘 하늘이 무척 예쁘죠? 한국의 가을 하늘은 유별나게 예쁜 것 같아요. 오죽하면 애국가에서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라고 하겠어요?

070


봄이 되면 봄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다 느낍니다. 3~4월쯤 되면 사람들 표정이다 바뀌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도 많아지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지죠. 새들도 활기를 띄고 이 골짝 저 골짝 꽃들이 난리가 나고요.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두빛을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 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고은의 《순간의 꽃》에 실린 시의 한 구절입니다. 4월 말에는 비단 서운산뿐만 아니라 어느 산이든 온갖 초록이 가득합니다. 연둣빛부터 청아한 초록빛, 진한 초록빛까지 명도와 채도를 달리한 온갖 종류의 녹 빛으로 산이 뒤덮여요. '생동하다'라는 동사가 절로 떠오르 는 때입니다. 그런 때 그런 날에 무슨 사랑을 이야기하겠어요. 무슨 미움을 이야기하겠어요. 봄은 그런 계절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함민복 시인은 “봄은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들의 잔치"라고 말합니다.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라는 말 이 딱 맞는 것 같아요. 헤르만 헤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들은 다 안다. 살아라, 자라라, 사랑하라, 즐겨라.” 봄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헤 세는 말하죠. 그러니 한 옥타브 올라간 새소리일 수밖에요.

081

내 인생도 꽃잎은 지고 열매 역시
시원치 않음을 나는 안다
담 밑에 개나리 환장하게 피는데
내 인생의 봄날은 이미 가고 있음을 안다
몸은 바쁘고 걸쳐 놓은 가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거두어 드린 것 없고
마음먹은 만큼 이 땅을 아름답게 하지도 못하였다

나뭇가지마다 용솟음치는 많은 꽃의 봉오리들로
겨울바람 속에서 먼저 피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나를 앞질러 가는 시간과 강물
뒤쫓아 오는 온갖 꽃의 새순들과
오래오래 이 세상이 환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선연하게도 붉던 꽃잎 툭툭 지는 봄날에

도종환, <지는 동백꽃을 보며> 전문


저는 이것이 절창이라고 느낍니다. 동백은 다른 꽃들보다 조금 일찍 피었다가 일찍 떨어집니다. 그런 동백이 노인의 독백 같은 독백을 하는 거예요. 마치 〈My Way〉의 “후회가 없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언급할 만큼 많았던 것도 아 니야(Regrets, I've had a few.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라는 가사처럼요. 동백은 최선을 다해 피었지만 그렇게 아름답게 피지 못했던 것도 인정하고, 욕심도 있었고, 자신이 주 인공이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도, 충분히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이제는 질 때가 되었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 때에 사방에는 개나리, 진달래가 올라와요.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거예요. 후회도 좀 있고 미련도 좀 있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 충분히 노력했고 잘 살았다고 생각해, 라고요. 동백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이죠.

139

지구가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죠.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이 구절 역시 서클 오브 라이프, 생의 순환입니다.

저는 제가 죽은 뒤에 제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죽을 때가 되어 바다에 뛰어들면 물고기들이 나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면 지구에 좀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 평생 그 많은 생선과 많은 고기를 먹었는데 나는 돌려준 게 없으니 그렇게라도 갚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원이 내 안으로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대요. 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또한 이 원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인간은 자연에 돌려주는 것이 없으니 끊어질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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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 애니메이션 〈UP〉의 도입부에는 주인공 할아버지 칼이 살아온 지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데요. 아내를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아이를 잃고 아내는 슬픔에 빠지죠. 칼은 그런 아내에게 모험을 꿈꾸게 하고 두 사람은 꿈을 위해 경비를 모으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그 돈을 쓰게 돼요. 그런 채로 나이가 들고 아내는 병들어 먼저 세 상을 떠납니다. 이 부부의 일생이 약 5분 정도의 영상에 녹아 있어요. 이 이야기를 시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웬 생시 같은 꿈!

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외선생으로 돌다가 군대 3년 푹 썩는 꿈

외국으로 유학 가서 박박 기는 꿈

돌아와 눈매 고운 여자 얻어 장가드는 꿈

그 여자와 집 장만하는 꿈

그 여자와 자식 낳는 꿈 아이 자라는 꿈

그 아이 대학생 되도록 애 끓이며 지켜보는 꿈

직장생활 여의치 않은 꿈

뒤늦게 승진하는 꿈

주식으로 한몫 잡는 꿈 다시 꼬라박는 꿈

피신하는 꿈 외로워 우는 꿈 부모님

편찮은 꿈

한 분 먼저 가시는 꿈

남은 분 모시는 일로 집안 뒤집히는 꿈

그러나 아이들 때문에 차마 갈라는 못 서는 꿈

집 넓히는 꿈

승용차 커지는 꿈

접대에 골프에 허덕이는 꿈

어느 날 명예퇴직도 하는 꿈 그러다 그러다 아내 먼저 먼 길 떠나기도 하는 꿈

처자식 뒤로 하고 가기도 하는 꿈

졸업 30주년 안내장 받는 꿈 '무슨 내라는 돈이 이렇게 많대요' 마누라 잔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면서 '아 벌써 그렇게나 됐나' 마음 아득해지는 꿈

김사인, <30년, 하고 중얼거리다> 중에서

김사인 시인의 <30년, 하고 중얼거리다>라는 시의 일부입 니다. 꿈입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지요. 일장춘몽, 인생은 한바탕 봄 꿈 같은 것이란 뜻의 한자어입니다. 그래서 시에는 꿈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처럼 우리 인생을 담아낸 시들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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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학을 가지 않고 취업하겠다는 뜻이 명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하지 않고 부모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의 학업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집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일찍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거나 험하게 생활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인문계 학생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있다는 것은 집안 환경이 좀 낫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박준 시인의 <잠들지 않는 숲>에는 그런 시대의 그런 삶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시의 화자인 '나'는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고, 한 친구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고, 또 한 친구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입니다. 셋 모두 가진 게 별로 없는 고만고만한 집안의, 성적 은 좋지 않고 집에서도 크게 관심 두지 않는 아이들이죠. 이 친구들은 올해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인데, 그래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친구들로서는 집안 환경이 단시간에 나아질 거라는 희망은 없어요. 성적도 가정 형편도 인문계는 꿈꿀 수 없죠. 사는 게 뻔해 보이고 미래는 기대되지 않아요. 새봄은 왔는데 우리는 공업고등학교에 가야 하고 그 이후의 삶은 그저 그럴 것 같아요. 그런 자신들의 처지가 울적하고 답답하지 않겠습 니까? 그런 상황에서 머리나 노랗게 물들여야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 친구들에게 고등학생이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하다니, 하며 욕하며 혀를 찰 수 있을까요? 그들 입장에 감정을 확 밀어 넣어 보면 달리 보이게 되죠. 이런 시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 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박준, <잠들지 않는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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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힘들 때 마다 힘내, 괜찮을거야, 하고 이야기했는데 지나고 보니 이 말이 얼마나 허망한 말인지 알겠더래요. 누가 힘들다고 할 때는 힘내라, 괜찮다, 잘될 거다, 파이팅, 이런 말보다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영화 보러 갈까? 그런 말이 오히려 진정성 있는 위로였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생각해 보면 힘내라고 하는 건 해야 할 몫을 힘든 당사자에게 돌리는 거잖아요. 밥 먹을까, 영화 볼까, 하는 말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힘내라는 말보다 그런 말이 상대를 동굴에서 한 발짝 나오게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훨씬 진정성 있는 위로라는 거죠. 이것은 제가 오히려 20대 친구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려면 이런 시선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귀천>은 아마도 천상병 시인의 시 중 가장 잘 알려진 시가 아닐까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시 구절은 참 아름답죠. 그런데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 구절은 아름 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놀랍고 가슴이 아립니다. 말씀드렸듯 이 그는 터무니없이 중앙정보부에 잡혀 가서 전기 고문을 당했고 그 이후 심신이 망가진 채 거의 폐인처럼 살다가 떠난 분입니다. 가진 게 없어서 여기저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았고 명절에 여비가 없어서 집에도 가지 못했던 사람이고 요. 그랬던 사람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시인은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도 있어요.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새벽 이 오고 태양이 뜨면 곧 사라질 이슬 같은 우리 삶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 뒤에 이어지는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도 같은 문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 고 말하리라” 하죠. 덧없는 삶도 더불어 손을 잡고 생을 다하는 날 하늘로 돌아가서 지난 생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거라는 거예요. 삶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천상병 시인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잘못된 정보로 잡혀 가서 전기 고문을 당하고 삶이 통째로 망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돌아가면서 이 삶이 아름다웠더라고 이야기하겠다고 해요.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사는 것이 좋았고,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는 마음이었을 까요? 시인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지 삶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은 쿤데라의 마지막 작품인데, 저는 제목에서 이미 할 이야기를 다했다고 봅니다. 이 책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도 좋았습니다. 삶은 의미 없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묻는 것은 두뇌가 너무 발달한 사피엔스들의 망상이에요. 누구 말대로 “두뇌가 병적으로 팽창하여 미쳐버린 짐승”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이야기했어요.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라고요. 우리는 그저 생명일 뿐입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풀은 삶의 의미를 따지지 않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 간을 사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삶은 분명 축제입니다. 무의미의 축제. 쿤데라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죠.

지금 이 순간이 축제입니다.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이 눈으로 저 풍경을 바라보고 있고 걷고 웃고 손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여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요. 이것이 축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 외에는 의미 없습니다. 천상병 시인도 한때는 왜 내 삶은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묻지 않았을까요? 그런 물음 끝에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대해 이제 더는 의미를 묻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간을 거쳐 그저 살아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36

천양희 시인은 <놓았거나 놓쳤거나〉라는 시에서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라고 해요. 제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광고 일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썼던 전략을 다시 쓰면 이미 새롭지 않아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늘 새로운 시도를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에는 실패가 동반될 가능성이 높으니 두렵죠. 그러니까 이미 잘 아는 길, 성공하는 방법으로 자꾸 가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Better sorry than safe'입니다. 안전한 것보다 미안한게 낫습니다. 실패해서 미안해질 수도 있지 만 그 길을 가는 게 낫다, 그러니 미안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어요.

'Casualties of the war.' 이 말도 좋아합니다. '전쟁의 사상 자들'이란 말인데 전쟁을 수행하면 사상자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247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라고요.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과 춤을 추는 것과 책을 읽는 것 하나하나 다 정성을 다한다는 겁니다. 잠을 자는 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책을 쓰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책을 쓰는 일에만 집 중하겠다는게 아니라, 잠자는 것도 책을 쓰는 것도 중요하고 버스 타러 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죠. 지금 순간에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을 제일 잘 사는 방법입니다.

이문재 시인은 숨 쉴 때 허파에 집중하고 가슴에 있는 풍선을 분다고 생각하며 들숨 날숨에 집중하라고 해요. 밥 먹을 때 소화기관을 떠올리면 밥알 하나하나를 급히 먹게 되지 않을 겁니다. 처음 봄 소풍 가는 딸아이 도시락을 싸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음식을 대충 차리게 되지 않겠지요. 이렇게 하면 모든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숨 쉰다는 사실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고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순간이 찬란해지는 겁니다. 매 순간 이렇게 살면 정말 좋은데 정말 쉽지 않아요. 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늘기는 합니다. 이문재 시인도 그런 노력 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노력을 이런 시로 써낸 것이고요.

254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허파에 집중하며
가슴에 있는 풍선을 분다고
생각해보라.

밥을 넘길 때마다
소화기관을 떠올리며
처음 봄 소풍 가는 딸아이
도시락을 싸주는 거라고

무엇인가 볼 때마다
다음 생을 위해
사진을 찍어두는 거라고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저 별빛 중 하나가
천 년 전에 출발해
이제 막 도착하는 거라고
이제 막 지구를 스쳐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라.

내 몸과 나는
얼마나 멀고 가까운가.
너와 나는
얼마나 신비롭고
거룩한 것인가.

이문재,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3) 전문

255


정도전의 “창문 열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을 보이는구나”라는 시를 좋아합니 다. 주역은 세상의 이치를 말하는 책이죠. 정도전이 이 주역을 읽는데 창문 너머로 나뭇가지 끝에 핀 흰 벚꽃 혹은 매화가 눈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걸 보고 저것이야말로 하늘의 뜻, 세상의 이치로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죠. 하늘의 뜻을 알려고 주역을 읽고 있는데 하늘의 뜻은 책 속에 있지 않고 가지 끝에 핀 꽃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종환의 이 시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뭘 알자고 여러 가지 지식을 쌓지만 그것 역시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창 하나만 제대로 열어 놔도 하늘이 전부 쏟아져 들어오는데요.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 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 이여
창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도종환, <책꽂이를 치우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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