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책은 내가 가지 않은 길로 안내해 준 책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살면서 기로에서 선택한 길을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내가 겪어봤을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마산, 창원을 묘사한 공간이 공감과 함께 머릿 속에 구성됩니다. 창원 기계공단, 마산 수출자유지역, 마산의 구도심인 창동과 합성동 그리고 창원의 유흥가인 상남동을 이야기로 친숙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제 책갈피 입니다.

비로소 게임과 내 접점이 완벽하게 끊어졌다. 그 대가로 통장에 찍힌 150만 원을 보자 '허무' 두 글자론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께를 꾹 짓눌렀다. 컴퓨터 그래픽 속에 깃들었던 노력이, 인연이, 추억이, 숫자 속에 삼켜졌다. 서글프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의 안타까움, 그 뒤에 몰아닥치는 초라함과 굴욕감, 유쾌함과 정반대 편에 존재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한참을 헤엄쳤다. 어느덧 계절은 겨울에 가까워져 있었고 기말고사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시간은 전심전력으로 행복한 시절과 멀어져 갔다. 달력은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2009년,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내던져진 둘째 날. 하늘이 아직 잠 덜 깬 듯 몽롱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을 즈음, 초등학생 시절 누볐던 동네를 배회했다. 제비산 입구 버스 정류장 바로 앞 골목 피시방, 안으로 들어서면〈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시디 패키지가 잔뜩 쌓여 있는 카운터. 온갖 게임 가이드북과 잡지가 꽂힌 책장이 보이던 곳. 컵라면 가득 쌓아놓고 <리니지> 하던 아저씨들은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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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에서 벚꽃 명소로 유명한 곳은 단연 진해 군항제는 봄이 모든 화장을 끝마친 채 자기 미모를 맘껏 뽐내는 기간이었다. 진해의 화려하다 못해 경이로운 분홍빛 향연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창원기능대, 그러니까 한국폴리텍 7 대학 창원 캠퍼스가 속한 내동 교육 단지 역시 벚꽃 명소로 유명했다. 배짱 좋게 폴리텍에 입학한 경남전자고등학교 졸업생 다섯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썰렁한 언덕을 걷고 있었다. 아직 추위가 제철이었던 2월, 오리엔테이션 날은 그 야말로 불평불만 콘서트였다. 학교 주변엔 대학가 특유의 활기는커녕 흔한 편의점 하나조차 없었다. 터덜터덜 등교하는 이들은 모두 남정네였고 하나같이 표정이 밝지 않았다. "와...... 이래가꼬 두 달은 댕기긋나?" 혀를 차던 이때만 해도 아직 손톱 거스러미만큼의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대학인데 고등학교보단 낫지 않을까. 평일 중 하루는 시간표를 비울 수도 있고, 낮쯤에 느긋하게 강의 들으러 나가기도 하고, 수강 과목 하나 정도 말아먹어도 의연할 그 정도 여유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자 농담 주고받던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분위기며 건물 배치가 익히 알던 대학교와 너무도 달랐다. 살풍경이란 단어의 창시자가 있다면 이 광경을 보며 떠올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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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허옇고 네모난 건물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캠퍼스 정중앙엔 공터와 축구 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말로 이 이상 묘사할 풍경 자체가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콧구멍을 쑤셨다. 납땜 실습실에서 풍기던 묵직하고 쿰쿰한 수은 향을 맡으며 강의실에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딴청 부리며 교수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출근 시간의 만원 버스처럼 짜증스럽고 예민한 분위기 속, 쭈뼛대던 우리에게 말을 건 친구가 있었다. 바로 옆 창원기계공고 졸업생이라고 했다. 큰 키에 드센 인상, 툭툭 내뱉듯 던지는 말투 가 인상 깊었다. 그는 금세 우리와 말 트더니 우울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마산? 멀리서도 왔네. 해필 여는 왜 왔노? 아싸리 옆에 창원전문대 가지. 우리 학교서 여 드오면 기공 4학년이라 칸다."
"기공 4학년?"
“여는 수업 시간 다 정해져 있고, 학점도 한참 오버해서 듣는다. 전문대가 대충 팔십 학점쯤 채우면 되그든? 근데 여는 거진 백십 학점 듣는다 생각해라.”
“빡시노. 그래도 딴 학교보다 취업 잘된다 카던데?"
갑자기 어른 25
통근 버스 있고, 대기업 하청이라 시스템도 갖춰놓았을 테고, 수요가 많은 제품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잔업도 적을 터이니 다니기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땐 정작 중요한 대전제를 빼먹고 있었다. 대기업이라고 어찌 멀쩡한 곳만 있겠는가. 그 당연한 사실을 알기 위한 수업료는 꽤 비쌌다.
효성 공장이 위치한 창원 신촌 공단은 빈틈도 멋대가리도 없었다. 봉암교 너머 신촌 로터리에서 시작해 성주사역 사거리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 위를 보고 있노라면, 한 겨울 금속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곳곳에 대기업 간판이 붙어 있었고 각각의 부지 또한 넓어 회사 하나하나가 소 공단 같았다. 마산 공단을 걸으며 듣고 맡았던 요란한 공작기계음과 절삭유 냄새는 6차선 도로 좌우로 분주히 오 가는 차들의 엔진 소리와 배기가스 냄새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일할 4 공장은 한전 발전소에 납품할 절연체를 만드는 곳. 노키아보다야 훨씬 작았지만 건물 세 동에 자체 식당까지 있는 '꽤 큰 중소기업' 정도의 규모였다. 회사 사무실은 이층에 있었는데 첫 입사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장은 “초보들한테까지 최저 시급은 못 준다” “일 잘하면 시급 금방 올려준다"라고 했다. 당시엔 그 말이 너무 생경했다.
산재를 당하다 57
따끈따끈한 수지가 발등에 떨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절로 비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할 줄 몰라 진땀 흘리며 수지를 쏟았다고 외쳤다. 사수 형님이 펄쩍 뛰며 어딘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내 사장이 꿍꽝대며 뛰어오더니 이마를 짚은 채 대뜸 병원부터 가자고 했다. 그 병원이란게 커다란 창원병원도 아닌 내동 상가에 있는 작은 동네의원. 대기열엔 외국 인 노동자들이 끙끙대고 있었고 내 차례는 한참 이후에 왔다. 그렇게 초기 냉각이 중요한 화상을 한 시간 넘도록 방치했다. 의사는 발목을 몇 번 둘러보더니 어쩌다 다쳤느냐는 질문도 없이 파상풍 주사와 항생제만 맞혔다. 사장은 택시비 2만 원을 쥐여주고 선심 쓰듯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수습 같았다. 결국 엄마에게 사 실을 알리고 다른 병원에 가기로 했다. 3·15 의거탑 옆의 친절신경외과의원. 실력은 좋지만 손님한테 버럭대기로 유명한 원장은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물었다.
“와, 심하네. 발 똑띠 움직이나?"
“예. 발은 왜………………”
“여여 발모가지 안에 바로 신경이 지나가그등. 딱 일 센치만 더 드갔음 발목 짜를 뻔했네. 니 우짜다 이리 다쳤노.
산재를 당하다 59
산업 기능 요원
마산 한국전력공사 바로 앞 창원육교를 지나면, 마산 구암동에서 창원 팔용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고, 공단과 민가의 경계는 희미하지만 난개발지와는 확연히 다른 팔용 공단의 독특한 풍경이 보인다. 비유하자면 마치 가는 선으로 그린 빙고판 같아서 공장의 숲에서 2차선 도로 하나만 건너면 민가에 도달할 수 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엔 자전거로 오가는 이들이 많았고 점심에도 작업복 차림으로 산책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방팔방 전후좌우에 공장뿐인 산업지구 신촌 공단과 달리 사람냄새가 옅게나마 풍겼다. 2011년 6월 1일. 대학생활 일 년 반 동안 등하교 버스 안에서만 보던 풍경 속에서 일하게 되었다.
산업 기능 요원 67
입사 일 년 일 개월 차. 무기력에 찌들어 햇볕조차 혐오스러워져 가던 2012년 7월. 도망치듯 사 주 기초 군사 훈련을 받으러 갔다. 물론 본 목적은 다른 특례 회사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사 주 훈련은 같은 지역 공익 요원, 기능 요원, 전문 연구원만 소집되기에 이직할 회사 알아보기에 아주 적합한 무대였다.
당시엔 직장 동료만 아니면 누구라도 쉽게 친해질 줄 알았다. 한 이 주일쯤 지나면 내무반 사람들과 잘 소통하여 괜찮은 회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군대란 환경 탓일까. 분대 사람들은 지나치게 쉽게 이빨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숨겼다. 무례하거나 벽이 높거나 양극단의 인간상만 존재하는 좁은 세계에서, 소기 목적은 전혀 달성하지 못하고 군인들을 향한 존경심만 쌓은 채 사주만 에 퇴각했다. 회사로 복귀하니 새 후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복보단 잘 다린 정장이 어울릴 듯한 친구였다. 사람도 착하고 입담도 탁월해서 금방 현장 직원들과 친해졌다. 특히 고객 응대를 잘했는데, 며칠 안 되어 그 능력을 발휘했다. 후배가 오기 전까지 수개월 동안 나를 괴롭힌 납품사 사장이 있었다. 제품은 몇 개 안 사가면서 바라는 건 많고 제 잇속 챙기기 위해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진상의 전형.
시련과 마주할 시간 87
소집 해제 한 달 전, 본격적으로 편입할 학교를 알아보 던 나는 문득 입사 시절이 떠올랐다. 이렇다 할 수리 매뉴얼이 없어 벽에 부딪힐 때마다 선임자에게 꼬치꼬치 캐물 어야 했다. 말은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았고 선배들은 내가 숙달되기 전 회사를 떠났다. 결국 무수한 야단과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때마다 '제대로 만든 인수인계서 하나만 있었더라면' 하고 씁쓸히 입맛을 다시곤 했다. 생각이 미친 김에 삼 년 가까운 회사생활을 회고하듯 인수인계서를 쓰기 시작, 퇴근 후 일과를 자발적 잔업으로 보냈다. 고치느라 애먹었던 고장 사례를 샅샅이 뒤져 실업계 고교생 1학년도 알아들을 수 있을 문장으로 꼼꼼하게 써 내려갔다. 겸사겸사 불량 통계도 만들어 연구실에 갖다주었다. 나름의 마무리를 끝마치고 마침내 소집 해제일인 2014년 4월 16일. 구중중한 하늘이 비를 힘 없이 흐느적흐느적 떨어뜨리던 그날, 함바에서 마지막 점심으로 아귀찜을 먹는 동안, 티브이에선 학생들을 실은 배가 점차 기울고 있었다. 걱정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사 사람들과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마침내 회사 문을 통과했을 때 나는 무슨 일이건 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다. 바로 몇 발짝 앞에 인생 최대의 암흑기가 도사리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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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거 함 봐. 용접 배워두면 어디서든 도움 돼.”
'용접'은 힘든 노동의 상징처럼 세상에 알려져 있다. 나 역시 달리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 태양만큼 눈 따가운 빛이 아른대고 사방으로 벌건 불똥이 튀어대는 위험한 일로 치부했다. 처음으로 용접면을 쓴 순간, 내 짧은 인식이 얼마나 큰 편견덩어리였는지 깨달았다. 온통 어두운 시야 속, 번뜩이는 불꽃만 남은 망망대해 위에서 치열하며 섬세한 손놀림이 8자를 그리며 흐느적댄다. 천천히 진군하는 용융 풀은 나긋하게 산책 나온 주홍 반딧불이 같다. 목적지에 도달한 불길이 사그라지고, 지나왔던 길엔 위아래 간격이 똑바른 용접 비드만 남아 철판과 철판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어때, 해볼 만할 것 같애?” 아저씨의 물음에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사하네예!" 처음으로 용접을 접한 날이었다.
포터 아저씨는 전문 노가다꾼이었다. 주말마다 온갖 공구가 실린 트럭을 몰고 날 데리러 왔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입담도 무척 좋아서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특히 고등학생 때 양다리 걸치다 그중 한 명에게 걸려서 얻어맞은 사연이 인상 깊었다.
포터 아저씨 115
제조업 쪽으로 온 젊은 경리 직원들은 낯을 많이 가렸다. 말수도 적고 업무 외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 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장 아저씨들은 자기들의 행위며 발언이 실례란 사실을 몰랐다.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의 “애 잘 낳을 것 같네"란 말은 칭찬의 의미를 담았을지라도 여성들이 느끼기엔 그저 성희롱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한국이 연하가 연상더러 불쾌감을 쉽게 표시할 수 있는 나라이던가. 결국 알아서 사리고 최대한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경리직은 잠깐 거쳐가는 아르바이트이니, 사람들한테 굳이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나 역시 깊은 인연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다음 주 월요일. 점심시간 종과 함께 장갑과 앞치마를 벗어던졌는데 초원씨가 불쑥 부스로 들어왔다. 소개해준 책을 정말 잘 읽었다며 묻지도 않은 감상평을 늘어놓는데 참 난감했다. 읽은 지 한참 지나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맞장구치느라 가뜩에 땀범벅인 이마 위로 진땀이 주르륵 흘렀다. 자연스럽게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됐다. 밥 먹는 동안 서로의 신상을 교환했다. 초원씨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스물네 살. 여중, 여고, 국어국문학과의 완벽한 여초 사회 사람이었고, 창원대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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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금지. 제스처도 금지."
초원씨가 자기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나도 모르게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본래의 푸근한 미소로 돌아왔다.
“제가 곧 회사를 나가요. 대답은 그때 주세요. 아셨죠? 그럼 가볼게요. 월요일에 만나요.”
대기업이 하청업체 납품 단가 후리듯 일방 통보를 내린 초원씨는 그대로 돌아섰다. 작은 뒷모습이 골목을 끼고돌며 사라질 때까지 그저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 집으로 돌 아가는 버스 안, 심박수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고 머릿속은 엉망진창 난장판이었다. 서로 호감은 있었지만 설마 고백이라니, 너무 갑작스럽잖은가. 생애 첫 피고백의 느낌은 얼얼했다. 개연성이 너무 없으니 온갖 가설만 머릿속에서 자꾸 증식했다. 나쁜 버릇이 또 시작됐다. 누군가 내게 조금만 살갑게 굴어도 흉가 찾아낸 귀신처럼 의심 암귀부터 번지는 버릇. 그 누가 용접 흄냄새와 땀냄새로 얼룩진, 배 나오고 땅딸막한 데다가 못생긴, 시간당 최저 시급 언저리 받는 하청업체 용접공을 좋아하겠는가. 은주에게 고백 못 한 이후로 찌질함은 고쳐지긴커녕 더욱 심해졌다.
공장 굴뚝에도 사랑꽃은 피는가 161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눈물 이란 꼭 슬플 때만 나지 않음을, 눈 아래 맺힌 작고 뜨거운 액체 속엔 온갖 복잡한 감정이 조밀하게 뭉쳐 있음을. 비로소 삶의 감각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반응한 쪽은 부끄럽게도 배였다. 지난 열흘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살았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퍼먹은 다음, 회복실에서 죽음의 산골짜기를 넘어온 심여사와 재회했다. 병원생활이 어땠느 냐고 물으니, 엄마는 씩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거 아이드라. 내가 니 냅두고 어딜 가긋노. 밥 제대로 안 묵고 집도 개판 쳐놨제? 그거 가만 냅두라. 내가 다치 알꾸마."
말이 안 나와서 그저 두 손 꼭 잡고 소리 없이 눈 밖으로 수분만 내보냈다. 그날 저녁, 지웠던 워크넷 앱을 다시 깔 았다. 반드시 지금의 이 시련을 이겨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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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오 미터에 달하는 길이를 메워야 했다. 용접 도 무려 십일 단을 쌓아야 했는데 중간에 불량이라도 났다. 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야말로 무식할 정도로 용접을 때려 박은 결과물을 보고 있자면, 볼보 차의 금강불괴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와중에 키가 유달리 컸던 한 형님은 그 긴 구간 용접을 끊지도 않고 단번에 때우곤 했다. 결과물은 잘 나오지만 허리와 팔꿈치가 남아나질 않는 방식이었다. 왜 그리 힘겹게 용접하시느 냐 물으니, 형님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고선 "이래 때아놓으면 멋지다 아이가!"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목소리엔 용접사의 자부심과 멋스러움, 흡사 조각사나 화가 같은 예술인의 긍지가 느껴졌다.
6월 하순엔 또 한 번 낙상을 입었다. 용접봉을 바꾸려 발 판 디딘 채 올라갔다가 힘을 너무 주는 바람에 뒤로 고꾸라졌다. 하필 뾰족한 철판 아래로 떨어져 꽤 큰 부상을 입었다. 허리 쪽은 다행히 단순한 염좌로 끝났지만 진짜 문제는 팔. 그날부터 오른팔이 심하게 저렸다. 저릿한 감각이 도통 사라지질 않아 정형외과에 갔더니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4, 5번 경추 뼈가 붙어 있는 데다 바로 아래 디스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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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엔 정보와 제도를 받쳐줄 교육기관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은주 자신이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래들과의 오랜 격리, 끝나지 않는 가난, 오차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업무 속에서 너무 오래 허우적대고 있었다. '앞으로 뭐하지?' 라는 의문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실업급여 받는 동안 나름 책이나 영화도 찾아보고, 홀로 여행도 가봤지만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결국 퇴사 석 달 차에 아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다른 직장을 구했다. 창원 LG 사내 하청이었다. 업무는 라인 작업. 일자리 구했다며 잠깐 안도했던 은주의 상태는 더욱 나빠져갔다.
“니도 알잖아. 라인 작업 힘들고 지리해서 못하는 거 아 이다 아이가. 미래가 없는데 우얄 끼고, 고마 돈 하나 보고 하는 짓거린데."
어떠한 기대도 설렘도 없는 공간에서, 단지 돈 때문에 일 하는 게 익숙해진 사람들. 거대한 공장의 부품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곧 자신의 미래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한때는 비슷한 나이대 직장 동료들과 말을 트기도 했지만 금방 멀어졌다고 했다. 또래들은 하나같이 지금 잠깐 여기서 일할 뿐 다른 꿈이 있다고 말했다.
지방 청년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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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집안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잠만 자기 바빴던 아버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막노동을 삼십 년 가까이해 오며 자식 둘에 할머니까지 감당해 냈으니 올바른 가장 노릇 할 여력이 남 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한 그날부터 동생은 아버지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가 어떻게 가정의 기둥으로서 버텨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원칙을 입에 달고 살았다. 원칙만 지키면 어떻게 살아도 타인에게 손가락질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생이 어찌어찌 인맥을 통해 병역 특례 업체에 취업한 날, 아버지는 딱 여섯 가지 원칙만 지키며 살라고 하셨다. 그 원칙이 뭐였는가 하니, 일과 놀이를 철저히 분리한다. 평소 근력 운 동과 달리기를 병행한다. 노는 날과 금액 한도를 정확하게 정한다. 책임지지 못할 잠자리는 절대 가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매일 누릴 수 없다는 걸 생각한다. 잘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 계속 공부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어째 조던 피터슨이 떠오르는 그 여섯 가지 법칙을 동생은 철저히 지켰 고, 카푸어로 살며 자격증도 따고 약간이나마 저축도 했다.
트랙터 조립하는 회사에서 기능 요원으로 복무 중이던 동생을 일찌감치 눈독 들인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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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왈. 수천억 대 자산가가 되고 싶다. 사업 규모를 더 키우고 투자 공부도 더 해서 돈이 썩어 넘치도록 벌고 싶다. 경남에서 이름난 부호가 돼서 날아다니던 철새들도 나 보면 내려와서 인사하게 만들고 싶다고. 그런 다음 뭐 할 거 냐 물으니 “일단 쌓아놓고 고민해도 안 늦지 않수?"란 대 답이 돌아왔다. 대번에 수긍했다. 각자 맥주 1000cc를 더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렀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맞은바라기의 마산만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취기를 몽땅 쾌감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냥 내일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 기사분이 오고, 조수석에 탄 동생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는 거 다 말아 잡수시면 연락하이소. 용접사 하나 필 요하거등."
“아이쿠 아우님. 신경 써주셔서 고맙소.”
동생은 예나 지금이나 속물이었다. 동시에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재능과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겸비한 천재였다. 성공하고픈 욕망이 가득했고 실제로 차근차근 이루어가고 있었다. 아마 수많은 기업인들이 동생과 비슷한 단계를 거쳤을 것이다. 다만 그들 대다수는 부의 정점에 오른 다음에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했다.
다시 만난 사람들 253
똑바를수록, 푹 꺼졌거나 위로 볼록하지 않을수록, 눈으로 봤을 때 예쁠수록 '좋은 용접'인 셈이죠. 잘된 용접은 금속판 위에 그린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선 용접사는 예술가와도 닮아 있습니다. 이 '좋은 용접'을 해내기 위해 지금도 지구촌 곳곳의 용접사들이 불꽃을 튀기고 있을 거예요.
저는 이 일이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결과물이 바로바로 눈에 보이잖아요.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의심할 필요가 없는 거죠. 글 쓰다 보면 이런 점이 참 답답했거든요. 나름 잘 썼답시고 탈고하고 내보면 반응이 시큰둥해요. 이런 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원고에 집중을 못하죠. 용접은 그렇지 안 았어요. 눈앞에 있는 일에만 온전히 정신을 쏟아부을 수 있었거든요. 용접의 생명인 비드는 '운봉'이라는 손기술에서 판가름 나요. 운봉은 용접이 최대한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쇳물을 퍼뜨려주는 기술이에요. 용접의 목적, 각 금속마다 다른 속성, 금속의 두께와 간격, 위아래 수직 수평 같은 방향까지. 이 모든 변수를 감안해 움직임을 조절하지요. 일류 용접사의 운봉 기술은 시계 장인들의 그 섬세한 손짓과 궤를 같이합니 다. 특히 민감한 금속은 과장 없이 0.1초 차이로 쇳물이 덜 녹아 용접이 안 되거나 과열로 인해 철판에 구멍이 뚫려요.
청색에서 백색으로 265
이런 재료는 용접하기 진짜 피곤해요. 장갑 집어던지고 욕도 하고 한숨도 쉬죠. 그런데 동시에 호승심이 막 생겨요. 여러분 들은 혹시 어려운 게임에 도전하신 적 있나요? 이미 70퍼센트 정도 블록이 차 있는 테트리스 같은 것들. 하다 보면 정말 짜증 나지만 깨고 싶은 욕망도 생기잖아요. 제겐 용접은 그런 어려운 게임인 셈이죠.
어디에나 다 쓰인다는 점도 맘에 들었어요. 밖으로 나와서 잠깐만 둘러봐도 용접이 안 들어간 사물이 참 드물잖아요. 가로등이며 신호등, 수많은 자동차와 빽빽한 빌딩 안쪽, 지하철의 몸체와 그 아래 깔린 레일까지 말이죠. 제가 현대로템 하청에서 잠깐 일했는데요. 거긴 본사가 창원이라 우리가 만든 물 건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몰라요. 그러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탄 순간 알게 됐죠. 객차 맨 앞과 뒤칸이 짧았던 이유는 노약자석 때문이었구나. 출입문 바로 위 공간이 비었던 이유는 역 안내 표지판이 붙기 때문이구나. 검사원이 천장에 붙는 파이프 용접이 중요하다고 자꾸 강조한 이유는 손잡이가 달리기 때문이었구나. 남들은 알리 없는 고생의 이유가 눈에 보였을 때. 어쩐지 콧잔등 비비고 싶은 뿌듯함과 우리가 만든 물건이 온전히 제 역할 다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보람참, 그리고 내 일이 세상에 도움 되고 있단 사실에 행복함을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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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와 매연, 공장과 작업복의 회색 지대가 저의 세계였듯 여러분 역시 각자 자신의 세계가 있을 거예요. 저는 여러분이 자신의 세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오히려 더욱더 선명하게 그 세계를 완성해 나가길 바랍니다. 다만, 내 세계를 더욱 또렷하게 하기 위해선, 공부와는 약간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저 꾸준히 우직하게 정진해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예전부터 관심 가던 분야 혹은 옳다고 생각하던 분야, 재밌다고 느꼈던 분야를 찾아 꾸준히 넓게 파고드는 게 중요해요. 까고 말해서 '덕질'하자는 거죠. 거창하게 '뭐뭐학 개론' 같은 두껍고 재미없는 책부터 읽을 필요 없어요. 유튜브나 나무위키도 괜찮습니다. 어떤 경로건 정보의 가지를 계속 뻗어 나가는 게 중요해요.
저 같은 경우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쾌척하는 분들의 생각이 늘 궁금했어요. 아무리 봐도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잖아요. 그 심리를 쫓다 보니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을 알게 됐어요. 관련 책과 기사, 방송을 꾸준하게 보 다보니, 사람이 돈을 이성적으로 쓰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저의 세계가 또렷해졌어요. 선명해진 나의 세계와 학교에서 열심히 갈고닦으셨던 기술이 합쳐졌을 때, 아 주 근사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청색에서 백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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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건설 쪽으로 복귀해 현장 분위기도 파악할 겸 까대기, 그러니까 지게를 멘 채로 위층에 자재 날라주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오십 대 초반 중년이 감내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쌓인 눈칫밥으로 아파트 한 채는 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시 정각의 말끔한 일 처리보단 적당히 핀잔 들어가면서 쉬엄쉬엄하는게 더 효율적임을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탁월한 입담꾼답게 단순노동마저 '자의식 수수료'라는 개념을 적용해 멋들어지게 묘사했다. 요는 자의식과 체력을 골고루 안배하는 게 핵심. 무작정 몸을 한계치까지 몰아가는 게 아니라 때론 욕들을 각오하고 쉬어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의식 수수료를 내는 것을 피해선 안 된다. 즉 관리자가 빨리빨리 하라며 채근하는 소리를 듣는 걸 두려워하면 금방 골병 난다고 했다.
공사 사흘째. 그날도 중간층에서 잠깐 쉬어가는 도중이었다. 겨울 눈치도 안 보고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입김 뿜어대던 그때, 그야말로 찰나 같은 비명을 들었다. 지게를 내려놓고 발성 지점을 찾아갔을 땐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아저씨는 사람이 죽은 그 당시보다 이후에 벌어진 일에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당일, 그다음 날에도 뉴스 한건도 보고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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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고향을 떠나며
3월이 왔다. 고향을 떠날 시간.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북마산 가구거리를 지나 도달한 창동예술촌 입구는 아직 한산했다. 앞으로 두어 시간 뒤엔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며 일상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본래 창동은 마산 대표 번화가였다. 특히 인근 남고와 여고 사이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교복 차림으로 코아양과에서 소개팅하다 눈 맞으면 근처 연흥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며 사랑을 싹 틔웠다. 당시의 낭만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시나브로 도태되었다. 계획된 창원에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들어서면서 유행지의 지위는 창원과 가까운 합성동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구태여 창동을 찾지 않았고, 수십 년 장사해 오던 가게들과 독립극장들은 하나둘 퇴장했다
에필로그 | 고향을 떠나며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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