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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마흔일곱 번째 책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밀러

by 마파람94 2025. 11. 13.

이번 책 너무 마음에 듭니다. 올해 읽었던 책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고자 합니다.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과 내용의 밀도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과학적인 내용과 철학이 어우러져 있고 작가의 개인적인 내용도 중첩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책의 약 삼분의 이 지점부터는 반전도 일어납니다.

와우 ~ 이러한 서사 구조를 만든 작가에게 찬사를 연발하게 됩니다.

제의 책갈피 입니다. 기억해 두고자 합니다.



3. 신이 없는 막간극, 55

그런 다음 아버지는 내 머리를 톡톡 토닥여주었다. 그때 내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잿빛이었을까? 그건 마치 이 세상을 덮고 있던, 깃털을 넣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 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 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위계의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아버지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다음 아버지는 요점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이게 포옹하자는 신호일지 모른다고, 아버지가 "농담이야, 넌 중요해!"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 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 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5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요만큼이야!" '요만큼'이라는 말을 할 때 아버지는 연극적인 동작으로 꼬집듯이 손가락들을 모았다.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아버지가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 20년 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단언과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

일곱 살의 내게 그날 폐부에서 회오리치던 차가운 느낌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뭐 하러 해? 학교엔 왜 가? 뭐 하러 종이에 풀로 마카로니를 붙이는 건데?" 어쨌든 유년기 동안 나는 그 답을 알아내기 위해 조용히 아버지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사람이다. 수전증이 있는 생화학자로, 모든 생명에, 심장박동과 번개에, 심지어 생각 자체에도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를 나르는 입자인 이온을 연구한다. 아버지는 안전띠도 매지 않고, 발신인 주소도 쓰지 않고, 수영이 금지된 곳에서 수영을 한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이제 소매와는 끝이라고 선언했다. 소매 때문에 시험관을 넘어뜨린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곧바로 가위를 들고 옷장으로 달려갔고, 이후 몇 년 동안 '학계의 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출근했다.

6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뭐였든 간에 말이다. 튼튼한 뼈대처럼 강한 기개를 찾아려 더듬거렸을 때 내 손에 잡히는 건 모래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언니의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언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려고 시도했지만, 룸메이트와의 문제가 폭 발한 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직업을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현금출납기를 다루기에는 너무 허둥댔고, 도서관에서 일하기에는 너무 수다스러웠다. 밤에 집에 오면 엄마의 걱정과 아버지의 실망을 대면했고, 자기 방문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나는 언니가 어떤 자연의 요소로, 외로움과 눈물의 토네이도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했고, 눈썹과 속눈썹을 뽑아낸 얼굴로 나타난 언니를 보면 겁이 났다. 낯설어 보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강력한 슬픔이 내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살갗을 조금씩 베는 것으로 그 슬픔을 쏟아내는 편이 더 나았고, 그게 다였다.

아버지는 우리 둘 모두에게 지친 것 같았다. 우리가 왜 기운을 내지 않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 지구라는 바윗덩이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인생의 좋은 점들을 알아차리고 즐기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아버지의 실험실 책상 위에 걸린 다윈의 인용구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며 꾸짖었다. 획을 둥글게 굴린 갈색 캘리그래피로 쓴 이 글은 니스를 바른 나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에서 가져온 글귀다. 그것은 다윈의 달콤하지만 의미 없는 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신이라는 꽃봉오리를 제거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 장엄함이 존재한다는, 충분히 열심히 들여다본다면 찾게 될 거라는 약속의 말과도 같았다.

6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끌었던 이유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우연히 어떤 비법을, 무정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어떤 처방을 발견한 게 아닐까 궁금했다. 게다가 그는 과학자였으므로, 나는 무엇이든 끈질기게 지속하는 일에 대한 그의 정당화가 내 아버지가 심어준 세계관에도 들어맞을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가능성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 는 무언가 핵심적인 비결을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 말이다.

***

그러나 페니키스 섬에서 데이비드가 한 경험을 읽고 나자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암울한 시간에 그의 도전 의지를 밝혀준 것이 신이었다면, 내가 그에게서 배울 것은 없었다.

내가 실마리를 발견한 것은 그가 다윈을 만났을 때다. 페니키스 섬을 떠난 뒤 데이비드는 위스콘신주 애플턴에 있는 작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과학 교사로 취직했다. 데이비드의 유년기에는 그저 속삭임에 지나지 않던 다윈의 사상은 이제 진지한 과학자라면 누구나 달려들어 해결을 봐야만 하는 강풍이 되어 있었다. 《종의 기원》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한 가지 시원始原 형태”에서 진화해 왔다든지, 인간은 여전히 진화하는 중이며 심지어 언젠가는 멸종할 수도 있다든지 하는 온갖 종류의 이단적인 내용들로 가득했다.

3. 신이 없는 막간극, 67

그러나 분류학자로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종들이 그 본성상 변경할 수 없이 확고한 범주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윈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종으로 여겨온 생물들에게서 너무 많은 다양성을 목격했고, 그 결과 종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확실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는 심지어 그중 가장 성스러운 경계선, 그러니까 다른 종끼리는 번식능력이 있는 자손을 만들 수 없다는 가정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다윈은 이렇게 썼다. “이종교배한 종들은 무조건 생식능력이 없다고도, 불임성은 창조주가 부여한 특별한 자질이자 창조의 신호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 이윽고 다윈은 종이, 그리고 사실상 분 류학자들이 본질적으로 불변의 것이라 믿었던 그 모든 복잡한 분류 단계(속, 과, 목, 강 등)가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진화의 흐름 주위에 인간이 우리 '편리'하자고 유용하지만 자의적인 선들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8 이라고 썼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에는 가장자리도, 불변의 경계선도 없다.

만약 당신이 분류학자라면 이게 얼마나 심란한 생각일지 상상해 보라.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대상이 알고 보니 퍼즐 조각도 실마리도 아닌 무작위성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신성한 텍스트의 페이지도, 성스러운 암호를 이루는 상징도, 신성한 사다리의 가름대도 아니었다. 움직이고 있는 혼돈의 모습을 담은 스냅사진에 불과했다.

6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 그 생각은 너무나 괘씸한 것이었다. 그 생각은 지구를 너무 황량한 것으로 느껴지게 하 고, 자신들의 추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루이 아가시는 죽는 날까지 요지부동으로 다윈의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그 주제에 관해 강연을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그때마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역겨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 젊은 세대에 속하고 아직 유연한 정신을 지니고 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이 점에 대해서만 은 '스승'과 의견을 달리하기로 했다. 자연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다윈이 관찰한 대로 종들 사이의 영역은 불확실한 회색 지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신도 회색 지대를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아, 이 문장 때문에 내가 그를 얼마나 흠모하게 되었던가. 이 문장을 본 나는 두 팔로 그를 안고 볼에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진화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전진할 길을 찾은 그가 참 용감하다고, 아주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는 그를 계속 나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바늘을 칼처럼 휘두르는 그가 뻔뻔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성의 자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 반드시 굴욕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7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늘 자신의 선지자로 모시던 루이 아가시의 제자답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 했다. 아가시의 흐릿한 “퇴화” 개념에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것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미끌미끌한 먹장어를 나태함이나 기생충 같은 “나쁜 버릇”이 한 종을 퇴보 또는 타락시키거나, “더 나쁜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11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머니 모양의 몸으로 여과 섭식을 하는 멍게가 한때는 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12 그러한 쇠퇴를 초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 대한 교훈담이고, 말 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

찰리와 함께 해안을 훑으며 다니는 동안 데이비드는 노련한 낚시꾼들이 먹이를 잡는 방법을 연구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촘촘 한 그물로 엄청난 양의 다양한 생물을 훑어 올리는 중국인 어부 들,13 샌타바버라에서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삼지창을 찔러 넣는 포르투갈 어부들,14 그리고 너무 부럽게도 정확하게 물속으로 돌진하는 갈매기와 펠리컨까지. 그는 자기가 채택할 수 있는 방법은 채택하고, 채택할 수 없는 것은 훔쳤다. 중국 인 수산시장을 찾아 아직 과학에 알려지지 않은 생물들을 쓸어왔 고, 새와 상어의 배를 갈라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은 생물들을 찾아냈다. 데이비드와 찰리는 이 출장에서만 80가지가 넘는 새로운 어류 종에 이름을 붙였다.15 생명의 나무에서 80개의 새로운 가지가 베일을 벗었다.

7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이 있는 곳들을 찾아갔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는 일, 그러니까 혼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질서를 만들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련 전체에서 얻은 교훈은 딱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게 뭐였을까?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이를테면 북미의 모든 담수어를 발견하겠다는 목표보다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었을까? 그는 "당장 출판하라는 것"이라고 썼다. 18 아, 더 세게 밀어붙이라는 말이었구나.

그는 자기 개인의 삶에 비극이 닥쳤을 때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그로부터 겨우 2년 뒤 11월 어느 날, 그의 아내 수전이 기침을 하며 몸져누웠다. 열로 인해 솟은 땀이 적갈색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딸 이디스의 설 명에 따르면 “시골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한" 폐렴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19

이번에도 데이비드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수전의 관위에 드리울 호화로운 국화 장식을 주문했다. 또한 유창한 추도사를 통해 아내와 공유했던 분류학에 대한 사랑과, "바닷물이 그 속에 포함된 미세한 동물들 때문에 별처럼 반짝이던" 페니키스 해변에서 함께한 밤 산책을 추억했다.20 어쩌면 그는 수전도 이런 추도사를 바랐을 거라고, 수전의 죽음은 질서를 찾으려는 그들의 가치 있는 사명 중에 맞이한 불행한 피해였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에는, 물고기들을 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미국의 황야로 다시 나갔다. 수전이 죽은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새 아내를 얻었다.


4. 꼬리를 좇다,79

제시 나이트라는 대학교 2학년 생으로, 여러 면에서 데이비드에게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아내였다. 수전이 데이비드가 출장 다니는 것을 한탄하며 외롭다는 글을 쓰고, 그가 너무 많은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보내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던 반면, 제시는 그냥 자기도 함께 가도 되냐고 물었다. 제시는 젊고 기운이 넘쳤으며 짙은 눈동자로 데이비드를 매혹했다. 그가 "흑요석처럼 검다"고 묘사한 제시의 눈을 들여다볼 때면 데이비드는 제시의 유전적 과거 속에서 배회하는 먼 옛날의 누군가를 더듬어 찾았다. "스페인...에서 온 방랑자"일 까? "마법”을 하는 사람? "플라시다 부인 Doña Plácida?"22 유전은 그가 세상을 비춰보는 렌즈가 되어 있었다. 이는 정확히 그가 자신의 물고기들에게서 밝혀내려고 애쓰던 것-특징들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특정한 물리적 속성들이 진화적 관계에 관한 실마리들을 어떻게 드러내주는지 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을 때도 그러한 충동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18세의 제시는 블루밍턴에 도착하자마자 데이비드의 첫째와 둘째 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냈다. 당시 10살이던 이디스는 이 행동 이 계모에 대한 반감을 영원히 강철처럼 굳히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생애가 끝나갈 무렵 수기로 쓴 회고록에 이디스는 이렇게 적었 다. "그때 나는 내가 그 여자를 결코 어머니라 부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23 아직 아기였던 소라는 제시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수전이 사망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라도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집안에 신경 쓸 아이가 없어지자 제시는 데이비드의 수집 원정에 자유롭게 동행할 수 있었다.

4. 꼬리를 좇다 81

부부의 이름은 릴런드 스탠퍼드와 제인 스탠퍼드로, 1890년 어느 날 이 부부는 블루밍턴까지 몸소 찾아와 자신들이 팰러앨토의 농지에 실험적으로 세운 작은 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데이비드는 그 제안에 따르는 넉넉한 봉급, 눈부신 기후, 태평양의 기름진 보물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망에 구미가 당겼다. 그를 주저하게 만든 유일한 요소는 스탠퍼드 부부였다. 릴런 드 스탠퍼드는 악덕 자본가로 널리 알려진 공화당 상원의원이었 다. 그의 아내 제인은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죽은 아들과 만나려고 영매들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일개 시민의 변덕에 놀아나는 놈팡이나 노리개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봉급에 그 날씨라면….

결국 그는 1891년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갓 마흔 살이 되었을 때다.

** *

일단 팰러앨토에 도착하자, 스탠퍼드 부부가 수상하게 벌어들인 재산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데이비드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몬터레이 반도 끄트머리에 홉킨스 해변 연구소라는 화려한 해양 연구 시설을 새로 만들었다. 아가시의 페니키스 여름 캠프를 모델로 하여 직접 관찰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벽보다도 창이 더 많았고, 파이프를 통해 바다를 곧바로 교실로 끌어들였다. 29

4. 꼬리를 좇다

89

그러나 이런 비판과 모욕, 그의 목줄을 확 잡아당겨 고통을 주는 악력이 있는 한편, 언제나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물고기가 주는 위안도 있었다. 데이비드는 드넓은 물의 세계가 무한한 위안을, 그 어떤 술이나 약보다 훨씬 더 나은 위안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우주에서 아직은 미지의 한 조각에 불과한 새로운 물고기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나가고, 새로운 이름을 하나씩 붙일 때마다 믿을 수 없는 도취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혀에 닿는 그 달콤한 꿀, 전능함 에 대한 환상, 그 사랑스러운 질서의 감각. 이름이란 얼마나 좋은 위안인가.

10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섹스 스캔들을 “덮어버렸다”고 비난하고, 이런 일이 결코 이번 한 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스파이에 따르면 데이비드는 “갱”처럼 대학을 운영하고, 교직원들은 “목이 날아갈까” 두려워 감히 그의 의견을 거스르지 못했다. 괴벨은 제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호소하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부인께서도 직접 말씀하셨듯이 이런 상황은 학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며, 훌륭한 대학을 만들겠다는 부인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이루려 한다면 즉각 시정해야 할 일입니다."12

곧 제인 데이비드가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꼈던 여자, 수상쩍은 돈으로 제국을 건설한 여자, 사이어소피가 죽은 아들을 만나게 해 줄 거라 믿을 만큼 암시에 잘 걸리는 여자은 중진 이사들에게 보내는 서명 편지에 데이비드의 도 덕적 결함들을 “오랫동안 고통스러울 정도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써 보냈다.13 루서 스피어Luther Spoehr라는 역사가에 따르 면, 1904년이 끝나갈 무렵 “스탠퍼드 부인이 조던을 갈아치울 계 획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한다.14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1905년 초 어느 밤 하와이를 여행 중이 던 제인이 예기치 않게 사망한 것은 그에게는 아주 행운이었던 셈이다. 15 우주가 그제야 데이비드에게 좀 관대해진 것처럼 보였다.

제인이 죽은 뒤 데이비드는 그 스파이를 스탠퍼드에서 해고했다. 16 이제 뒤에서 성가시게 항의할 사람도 없어졌겠다, 그는 또 한 번 장기간 유럽을 도는 여행을 계획했다.17 제시도 함께였다. 둘은 런던의 대성당들과 프랑스의 라벤더 들판과 스위스 알프스의 푸르른 풍광 속을 거닐었다. 독일에서는 강배를 타고 며칠 동안 모젤강을 따라 내려가는 여행도 하고, 간간이 그들이 탄 배를 따라오는 수생생물들을 감탄스럽게 바라보거나 맛을 보기도 했다.

11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내를 구하려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을 때 데이비드는 보고 말 았다. 그 지진이 루이 아가시의 조각상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부터 메어꽂은 광경을. 12 우스꽝스러운 장면, 급소를 찌르는 한 방이었다. 아가시의 두 발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고, 대리석으로 된 그의 작은 손은 아직도 과학책을 꼭 쥐고 있었다. 질서에 이르는 경로의 지도를 만들어줄 거라 믿었던 그 텍스트는 마침내 그를 피 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이끌었고, 그의 머리를 (콘크리트를 만들기 위 해서는 물과 함께 섞어야 하는) 모래에 파묻어버렸다.


123,
나에게는 다행히도 뒤져볼 자료가 아주 많았다. 데이비드는 회고록 이외에도 수많은 문서를 남겼다. 동화, 철학 에세이, 시, 풍자적 글, 저널, 어류 안내서, 유머에 관한 책, 절제에 관한 책, 외교에 관한 책, 강의계획서, 사설 등등. 책이 모두 50권이 넘었고 다른 텍스트들도 수백 가지에 이르렀다.

나는 먼저 그가 쓴 동화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동화가 도덕적 가르침을 가장 노골적으로 펼쳐놓는 형식일 테니까. <독수리와 파란 꼬리 스킹크>'라는 단편동화(스컹크를 생각하지 마시라. 스킹크는 도마뱀이다)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날쌔게 날아 내려와 파란 꼬리 스킹크의 꼬리를 잘라먹는다. 상처 입은 스킹크는 복수를 위해 독수리의 둥지로 종종걸음으로 올라가 독수리 알을 여러 개 집어삼키고는 '이 알들에는 새 꼬리를 만들기에 딱 충분한 만큼의 고기가 들어 있어'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둘의 행동은 계속된다. 독수리는 내려와 새로 난 꼬리를 잘라먹고, 도마뱀은 둥지로 올라가 알들을 먹어 치우는 일이 계속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패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꼬리에는 더 많은 알을 만들고 기가 충분하고, 알에는 또 하나의 파란 꼬리를 만들 고기가 충분하기"때문이다.


파괴되지 않는 것 125

발전했다. 데이비드가 마술적 사고 탓으로 돌린 것들 중 몇 가지만 꼽자면 고통, 병, 무지,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1924년에 《사이언스》에 발표한 <과학과 사이어소피〉라는 글에서 그는 16세기에 지 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이유로 화형 당한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기 전 브루노는 이렇게 일갈했 다고 한다. “무지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학문이다.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 없이도 습득할 수 있으며, 정신에 우울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해 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인용문을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차단해 버린 적이 있다면 그들 역시 브루노를 살해한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하고 비난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 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 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7. 파괴되지 않는 것 127

"활동적인 야외 생활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10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11 그는 우리 몸이 일으키는 전기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쓴 한 강의 요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행하고, 돕고,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정복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데서 온다.”12 내 생각 에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요점 같다. 여정을 즐기고 작은 것들을 음미하라고 말이다. 복숭아의 “감미 로운" 맛, 13 열대어의 “호화로운” 색깔, 14 “전사가 느끼는 준엄한 기 쁨"15을 느끼게 해주는 운동 후 쇄도하는 쾌감 등.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당신이 밟고 선 그 땅뙈기가 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라는 헨리 데이비 드 소로의 말을 인용한 뒤, 분발을 요구하는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 외치며 독자들을 배웅한다.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 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 이해주는 곳은 없다."16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 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17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18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12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19

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엄청 차가운 호수에 풍덩 뛰어들었다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큰 숨을 내쉬며 수면으로 치솟는 모습을 볼 때 느 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나는 왜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 수 없는 걸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뭘까?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 위생과 유머, 외교, 평화주의에 관한 그의 비판문과 시, 강의 노트, 알코올과 립스틱과 전쟁에 관한 논쟁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오후 나는 발견했다. 공포에 대한 해독제, 희망에 대한 처방을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진화의 철학'이라 이름 붙인 강의 요강의 제일 밑에 묻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그날 하루의 강의를 내가 풀고자 했던 그 난제, 바로 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바쳤다.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20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 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나는 경악했다. 이거였다. 내 아버지가 즐겨 쓰는 바로 그 비법. 오늘날까지도 아버지 책상 위 액자 속에 담겨 있는 바로 그 단 어들. 다윈이 외친 투쟁의 권유. 내 아버지와는 다르게 반항적이고, 희망과 신념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였던 데이비드지만, 결국 그에게도 내게 알려줄 새로운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늘 들어왔던 말을 또다시 상기시키는 것밖에는.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13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기기만 이 데이비드와 내 아버지가 경고한 것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 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 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 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 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 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 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연구자 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 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 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3

반면 그토록 칭송받던 정확한 인식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어떨까? 짐작했겠지만 그들은 병적인 수준의 우울증에 걸렸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힘들어했고, 좌절을 겪은 뒤에는 회복이 더 어려웠으며,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4

그리하여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은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었다. 몇 가지는 건강하지 않은 특징들 항목에서 건강한 특징들 항목으로 옮겨졌 다. '기만'이라는 용어는 '긍정적 착각'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바 뀌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약간의 자기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는 주로 심리학자 셀 리 테일러 Shelley Taylor와 조너선 브라운Jonathon Brown이 쓴 매우 영향 력 있는 논문 덕분이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긍정적으로 왜곡된 세 계관을 갖고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점을 보여준 200가 지가 넘는 연구를 검토하고 정리했다.5

여기까지는 이미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모를 수도 있다. 현실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취하는 관점 이 바뀌면서 심리치료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 말이다. 많은 치료사들이 "스토리 에디팅" 또는 "리프레이밍reframing" 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환자가 자신에 댓산 인식을 좀 더 긍정적인 빛으로...

8. 기만에 대하여 141


"해로울 게 뭔가요? 두려움을 잠재워주고, 미래에 적응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봐요"

"작은 거짓말이 큰 효과를 낸다고요?"

"물론이죠!"

***

마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메리 포핀스의 마법 가방처럼 긍정적 착각이 가져다주는 온갖 좋은(마음 깊이 느껴지는 잘 살고 있다는 느낌, 일과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성공, 심지어 더 좋은 신체 건강까지) 이 야기들'을 찾아 읽는 동안, 어쩌면 내가 개미보다 나을 게 없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느라 아버지가 나를 쓸데없이 헤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14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듯 지나간 1980년대에는 자녀의 자존감을 부풀려 줄 스냅팔찌와 형광색 티셔츠, 육아 도서들이 팔려나갔다. 전에는 미심쩍은 눈길을 받던 것이 이제는 심리학자들의 상담실에서 처방되었고, 교육 안내서에도 열성적으로 실렸으며,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도 포함되었다. 10

1990년대에는 포그스 딱지 게임과 매직 카드가 등장했고, 국립정신건강연구소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선언이 등장했다. “별 근거는 없더라도 막연하게 자신의 미래가 낙관적일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혜택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낙관론은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게 해 주며, 미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도록 동기를 불어넣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북돋우고,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준다."11

2000년대 초에 앤절라 더크워스 Angela Duckworth라는 한 고등학교 수학교사는 심리학 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러 해 동안 더 크워스는 왜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힘들어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12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에게는 무슨 비밀 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13



8. 기만에 대하여

143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 관학교) 사관생, 최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14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라. 순수한 그릿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15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6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 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 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 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17 말이다.

그릿의 가장 좋은 부분이자 가장 희망적인 속성이며, 아메리칸 드림과도 가장 잘 들어맞는 지점은 이것이 생물학적 기반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그릿이라는 이 마술적인 특성은 가르쳐서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 금 아마존에서 '그릿'을 검색해 보면 방법을 알려주는 기나긴 책 목 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릿: 포기하고 싶을 때 계속하는 방법》

《그릿: 꾸준히 해내고 번창하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에 관 한 새로운 과학》

《그릿에서 그레이트로: 끈기, 열정, 결단은 어떻게 평범한 당신을 비범하게 만드나》

10. 진정한 공포의 공간

187

화가 생명의 신성함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1906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새뮤얼 페니패커는 세 계 최초의 강제 불임화법이 될 뻔한 법안을 무산시키면서, “그러한 수술을 허가하는 것은... 주가 보호할 의무를 지닌... 무력한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과학적 이견도 점점 쌓여갔다.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우생학을 뒷받침하는 과학을 "부패한"47 과학이라 평하며, 가난과 방탕, 문맹, 범죄성 등 우생학자들이 불임화로써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특징들에서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과학자들은 자선이 실질적 악화를 초래한다는 “퇴화" 개념 자체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 은 생명체가 "역행"한다는 데이비드의 주장, 예를 들어 멍게가 다른 종들의 먹이에 의지한 결과 한자리에 고정된 주머니로 퇴보한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후에 이 회의론자들이 옳았음 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종의 기원>에 있었다. 어째선지 데 이비드와 프랜시스 골턴은 둘 다 그 결정적인 사실을 흘려버렸다.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 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 침략 등 가장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바로 변이다. 행동과 신체의 특징에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에 생긴 변이 말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 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18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거의 모든 장에서 "변이”48의 힘을 칭송한다. 그는 다양성이 있는 유전자 풀이 얼마나 건강하고 강력한지, 서로 다른 유형 개체 간의 이종교배 가 그 자손에게 얼마나 큰 “활력과 번식력”을 만들어주는지, 50 심 지어 완벽하게 자기 복제할 수 있는 벌레들과 식물들까지도 새로 운 변이형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유성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 을 발견하고 “이 사실들은 정말로 이상하구나!” 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따금이라도 서로 다른 개체와 교배하는 것이 유리하고 나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아주 간단히 설명된다!"51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 하라"가 될 것이다.52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 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53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54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갖춰준 것은 그 거추장스러운 목 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 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으며, 대다수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명과 발견, 혁명을 이루게 한 열쇠는 확산적 사고를 하는 뇌일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

10. 진정한 공포의 공간 189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55

남조세균cyanobacteria의 경우56를 생각해 보자. 바다에 사는 이 작은 초록점 같은 생물은 인간의 눈에 너무나 하찮게 보여 수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조차 없었다. 1980년대 어느 날, 우리가 호흡하는 산소의 상당량을 이 남조세균들이 생산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 다.이제 우리는 이 작은 초록 점들인 프로클로로코쿠스 마리누스 Prochlorococcus marinus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 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57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58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 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59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 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202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 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 사람들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가니요ㅡ도 무시해 버린 남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 들에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이던 그 상냥했던 소년이, 어떻게 바로 그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을 기꺼이 말살하려는 남자가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 중 어느 지점에서 변한 것일까? 그리고 왜?

208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자서전을 덮었다. 2권이자 마지막 권인 올리브색의 책. 나는 그 책을 헤더의 시카고 아파트에서 내가 머물던 작은 손님방 침실 탁자에 올려두었다. 밤공기가 차분했다. 헤더는 시내 건너편에 있는 남자친구의 집에 갔다. 비명을 지르는 듯한 도시의 뜨거운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 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2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줄 방법.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 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

그날 거실에서 애나와 메리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나는 애나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이기적인, 응석받이 같은 질문이었다. 애나가 수용소에 들어간 일, 학대당하고 강간당한 일, 정신지체자 취급을 당한 일, 진흙탕으로 밀쳐진 일, 턱이 부러진 일, 자신의 생식기를 절단당한 일에 관해 듣고 난 다음, 나는 애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12. 민들레 223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 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 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13

애나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론이지. 메리 때문이야.”

그것은 농담이었고, 우리 모두를 실수로부터 구해주는 메리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수록, 그 말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그들의 아파트를, 짝을 맞춘 안락의자와 짝을 맞춘 아이스티 잔을 다시 생각했다. 소 파에 앉혀둔 인형, 우리 안에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햄스터, 거기 앉아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두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12. 민들레

계속 차를 몰고 가다가 하늘이 어둠으로 통통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들이 또 다른 증거의 가닥들, 그들의 아파트 벽 너머 훨씬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가닥들도 함께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들은 내게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매달 몇 번씩 찾아와 그들을 위해 저녁을 만들어주고, 공과금 납부를 도와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일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또 그들에게 거의 매일 웃긴 문자메시지를 보내주는 메리의 양아들 조시에 관해서도. 또 불임화를 당한 데 대해 애나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해 동안 싸워오고, 결국 2만 5천 달러를 받아내 주었어며,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버틴 마크 볼드라는 변호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매일 아침 자기 집 발코니에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이웃 그랜트, 그리고 자신들의 '수호천사'라는, 아파트 단지의 접수계원 에버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이클론이 그들의 집을 부숴놓았을 때 지금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에버니가 온갖 조치를 취해주었다. 내가 아파트 프 런트데스크에서 방문 등록을 할 때 내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알고 에버니의 눈이 환하게 빛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에요!”14 에버니는 프런트데스크 너머 위쪽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애나의 그림들(졸린 강아지, 얼굴을 붉히는 여우) 을 가리켰다. 애나와 메리는 아파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늘 자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아끼지 않는다고 에버니는 말했다. 사실 자기는 그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수많은 불평불만을 들으면 보내는 길고 힘든 하루 중에 마음 따뜻한 그들을 보는 게 얼마나 반가운 휴식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22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펜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 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 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 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12. 민들레 227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 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 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 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15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16

계속 차를 몰면서 나는 이 넓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민들레들이 마침내 이 사실을 이해한 나를 향해 동시에 동작을 맞춰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습을, 운전대 너머에서 내게 손짓을 하고 노란 꽃송이를 흔들며 나를 응원해 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15. 데우스 엑스 마키나, 239

가장 놀라운 것을 마지막 순서로 아껴두었는데, 윤의 표현으로 "물고기들을 살해하는 의식을 치를 때 유독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이 의식은 보통 세 가지 동물의 그림을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소 연어, 페어. "여기서 나머지 둘과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하고 그들은 물었다. 이 무리에서 관계가 가장 먼 것은 어느 생물일까요? 그러면 아무 의심 없는 순진한 학생이 손을 들어 소를 고른 다. 소가 나머지 물고기들과 가장 다릅니다.

"바로 그때 분기학자의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지며 그 생각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하죠 27

분기학자들은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 출 것을 상기시킨다.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예를 들어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다. 폐어와 소는 둘 다 후두개(기관氣管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다. 연어는? 유감스럽게도 후두개가 없다. 그리고 페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하다. 이런 설명들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폐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간다.

그들이 생명의 나무를 베는 톱질 속도를 본격적으로 높이는 건 이때부터다. 윤에 따르면, 분기학자들은 사람들이 일단 이 사실-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 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13. 데우스 엑스 마키나, 241

산어류들만큼이나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숨어 있다. 이를테면 육기어류肉鯖魚類,Sarcopterygii-폐어와 실러캔스coelacanth-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있고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條鰭魚類, Actinopterygii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Gar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연골어강軟骨魚綱 이라 불리는 상어와 가오리들도 있는데, 이들은 참 수수께끼 같은 집단이다. 그 매끈한 피부와 곡선을 띤 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포유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비늘이 있는 송어와 장어보다 우리와 훨씬 더 거리가 멀고, 진화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생명의 나무를 더 아래로 훑어 내려가 생명의 기원에 점점 더 다가가면 먹장어(찾아보지 마시라. 이름은 귀엽게 들릴지 모르지만 빨 판 같은 주둥이와 면도날 같은 이빨을 지니고 있어 악몽 속 괴물 같다)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흔히 칠성장어와 함께 무악류無類로 분류된다. 그다음으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게으름에 대한 경고의 예로 자주 지적하던,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피낭동물)가 있다. 멍게는 엄밀히 말해(어쨌든 오늘날 분류학자들에 따르면) 척추동물은 아니지만, 척삭이라는 척추와 비슷한 구조물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갖춘 생물 중 하나다. 다시 말해 멍게는 퇴보한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혁신가였던 셈이다.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24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게서도 어류라는 범주가 사라졌는지 물었다. 멜라니는 "어이쿠" 하고 운을 떼더니 "널리 그렇게 받아들여지죠"라고 말했다.29 당신 도 상상할 수 있듯이 무덤덤하게.

맞아요. 직관에 어긋납니다!"30 자칭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인 릭 윈터바텀 Rick Winterbottom이 내게 한 말이다. 그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캐럴 계숙 윤에게 어류를 놓아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캐럴은 이렇게 썼다.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걸 보는 일, 아니 사실 내가 미숙하고 젊은 대학원생 시절부터 강의실에서, 세미나실에서, 연구실에서, 과학학회에서, 조용한 복도에서 계속 반복해서 해왔듯이 물고기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각별히 고통스러웠다. 어류의 죽음을 뒷받침하는 과학이 옳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언제나 얼마간 아픔을 안겼다. (…) 잔인할 정도로 깔끔한 분기학의 논리를 따라갈 때면, 나는 종종 어떤 식으로든 속임수에 넘어간 느낌, 누군가의 능란한 술책에 농락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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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 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 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 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 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질서”라는 단어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오르디넴ordinem이 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 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 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 다는 추정-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 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 ruler 뒤에는 지배자 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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